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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후

last modified: 2019-03-20 17:14:36 Contributors

조선의 역대 왕비
고려 34대 공양왕비 순비 노씨/조선 건국 태조신의왕후 한씨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
정종비 정안왕후 김씨

神德王后 康氏
1356~1396

Contents

1. 소개
2. 일생
3. 평가
4. 사극에서


1. 소개

태조 이성계의 계비이자 조선 최초의 왕비. 무안대군, 의안대군의 어머니이며, 본관은 곡산.

사실 신덕왕후의 위치는 좀 어정쩡한 부분이 있다. 고려 때는 여러 명의 정실부인을 둘 수 있었고, 신덕왕후는 본래 이성계의 경처(京妻)였다. 그런데 조선은 고려와 달리 1명의 정실부인만을 인정했다. 신의왕후 한씨가 조선 개국 전에 사망했기에 별 문제 없이 조선의 첫 왕비가 되었지만[1], 실제로 한씨가 조선 개국 때 살아있었다면 서열 싸움이라든가, 고려 때처럼 정실부인을 여러 명 두도록 할 것인가라든가, 어느 쪽을 왕비로 세우느냐 같은 걸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2]

2. 일생

상산부원군 강윤성(象山府院君 康允成)과 진산부부인 강씨(晉山府夫人 姜氏)의 딸로, 부계는 곡산 강씨[3]이고, 모계는 진주 강씨이다.

신덕왕후의 숙부 강윤충은 이자춘의 형 이자흥의 사위였는데, 이런 인연으로 이성계와 접촉할 수 있었고 강윤성의 딸이 이성계와 결혼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성계와 무려 21살의 나이차가 있다.

조선이 건국되자 현비(顯妃)에 봉해져서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되었다. 태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 자신의 소생인 의안대군을 세자로 만드는데 성공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병으로 죽었다. 이후 존호는 신덕왕후(神德王后)라 하고 능호(陵號)를 정릉(貞陵)이라고 했다. 신덕왕후가 죽은 후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의안대군은 살해당했다.

원래 신덕왕후의 능은 오늘날의 중구 정동에 뒀지만, 태종대에 지금의 위치인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졌다.[4] 태조가 죽기 전, 신덕왕후의 무덤으로부터 100보 밖에 있던 땅을 하륜 등 공신들에게 나누어줬는데, 그 자리에 공신들의 집들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태조는 그저 말없이 울었다고 한다.(...)[5] 태종은 신덕왕후를 미워하여 그녀의 기일이 되어도 조회도 파하지 않았는데, 태조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냥 형식적인 제사만 올리고 끝냈다.

결국, 태종은 태조 사후에 신덕왕후에 대한 예우를 완전히 왕비격에서 후궁격으로 격하시켜 버리고[6] 정릉을 이장했다. 이후 능에 사용되었던 12지상들은 청계천을 치수한 김에 광교를 세워서 석재로 사용해 물 속에 거꾸로 처박아버렸다. 그러나 현종 때 복권되었고, 이후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가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가 되었다. 대한제국 때는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추존.

3. 평가

동북면 변방 출신의 장수였던 태조 이성계를 중앙에 연결해서 결국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소생인 의안대군을 세자로 밀어주면서 그녀가 죽은 뒤에 조선왕조 초기 피바람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40세에 승하했는데 태조가 73세까지 당시로써는 장수했다는 점에서 짧다면 짧은 수명. 만일 폐세자 의안대군 방석이 장성할 때까지 살았다면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태종 이방원의 무인정사도 그녀의 승하 2년 후에나 일어났다는 점. 태조가 그녀의 죽음 이후 정치의 뜻을 잃었다는 점. 그리고 그녀의 든든한 집안배경에서 볼 때 터무니없는 가정은 아니다.

4. 사극에서

용의 눈물에서는 김영란, 정도전(드라마)에서는 이일화가 배역을 맡았다.

용의 눈물에선 태조의 총애가 극진한 인물로 나오며 이성계의 안주인 노릇을 톡톡히 하는 인물로서 그려진다. 이방원과는 원래 사이가 괜찮았고[7] 이방원도 조선 개국 전까지는 어머니로서 극진히 모셨다. 조선개국 이후 이방석을 세자로 세우면서 점차 한씨 소생들, 그 중에서도 이방원을 홀대하게 되는데 처음엔 '에이 그래도 설마 어머니께서 나한테 그리하셨겠나...' 모드였던 이방원 역시 갈수록 신덕왕후와 대립이 깊어지게 된다. 심지어는 추운 겨울에 잡은 사슴을 신덕왕후 면전에 내던지면서 "아바마마께서는 여색에 빠지시어 몸이 쇠하셨소, 아바마마께 고기 한점 남기지 말고 고아 드리옵소서"라고 할 정도. 이 장면은 배우 김영란 씨에게 사전에 알리지 않고 찍어서 김영란 씨가 촬영 당시에 실제로 기겁했다고 한다. 사슴도 그럴듯한 인형이나 박제가 아니라 실제 살아있는 사슴을 마취로 기절시키고 찍은 거라니 더욱 실감났을 듯(...).

여기에 세자빈의 간통 사건과 더불어 세자 방석의 흑화까지 겹치면서 홧병으로 처절하게 병사한다. 이때 신덕왕후가 죽어가면서 "방원이가 살아있는 한, 우리 세자는 산 목숨이 아닙니다. 방원이가 죽어야 합니다! 방원이가 죽어야! 방원이가 죽어야 합니다!!"라고 절규하는데 이 장면은 무인정사 이후 두고두고 태조가 회한에 잠길 때마다 등장하게 된다.[8]

사후 내레이션에서는 '미모와 지략을 갖춘 걸출한 여인이었다'로 설명되나, 정작 작중 행보는 지략을 확실하게 발휘하기보다는 정도전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며 왕자들(특히 이방원)에게 치이고[9] 세자 방석의 개초딩 짓거리에 속만 썩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모습이 많으며, 여기에 종종 중대한 일을 처리할 때 무당을 불러 점을 치고 푸닥거리를 하는 꽤나 한심한[10] 모습을 보여주는 탓에 작중 이미지가 썩 좋지는 않다.

정도전(드라마)에서의 신덕왕후는 해당 항목에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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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신의왕후가 왕비로 추존된 시기는 정종이 즉위한 이후이다.
  • [2] 사실 고려 때도 정실부인을 여러 명 두는 사람은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 최우도 첩은 많았지만 정실부인은 한 명이었다(재혼을 하긴 했지만). 일부다처제 항목에도 있지만 정말 여러 명의 부인을 둬도 괜찮은 건 왕 정도였고, 그나마 정실부인을 여러 명 둬도 대부분은 이성계처럼 고향에 둔 향처와 도성에 둔 경처의 두 명 정도.
  • [3] 신천 강씨의 분파 중 하나. 현대에 들어 신천 강씨와 통합한 2개의 분파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덕왕후를 신천 강씨의 일원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 [4] 당시 정릉동은 양주목 관할이었다. 여기가 영화 건축학 개론에 나오는 그 정릉이다.
  • [5] 사실 이 부분은, 고려 때만 해도 도성 안에 왕실의 묘를 쓸 수 없었는데 태조가 이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 [6] 태종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시키고 싶었던 듯하나, 사실 사료를 보면 그녀가 후궁으로 확실히 강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태종대에 완성된 태조실록에서 신덕왕후를 '강비'로 지칭한 경우가 종종 발견되지만(폐서인이 된 왕비는 '성+비'로 된 명칭으로도 불렸다.), 기록에서 그녀의 지위 자체는 후궁이 아니라 차비(둘째 왕비)라고 적혀 있으며 후대에서 이걸 바꾸려고 하진 않았다(조선 초에는 고려의 체계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는데, 차비(2비)는 '왕의 두 번째 정실부인'을 의미한다. 후에 계비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가 되었기에 신덕왕후는 '계비'로 여겨지게 된다.). 이 때문인지 사실 태종대 이후의 기록에선 주로 '신덕왕후'로 지칭되었으며, 선조대에 그녀에 대한 예우를 복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때 그 근거 중 하나가 비문에 그녀가 차비(둘째 왕비)로 적혀 있는 등 태조의 왕비임이 명백하다는 것이었다.
  • [7] 이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일로 면전에서 이성계가 방원을 죽이려 들자 이지란과 같이 말리고, 이성계가 그 이후에 군령으로써 방원의 목을 베어오라고 이지란에게 지시하자 "비록 자신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다섯째도 자신의 자식이다"라고 울먹이며 이성계에게 선처를 호소한다. 중전이 된 이후의 강씨의 태도를 보자면 진짜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의 차이이다.
  • [8] 함께 나오는 장면은 방번, 방석 형제의 참살장면. 이성계의 깊은 한과 아들과의 애증을 상징하는 장면들이다.
  • [9] 권력에 욕심이 없는 방과, 방의는 방석의 세자 책봉 이후에도 별다른 마찰이 없었고 괄괄한 방간도 공적인 자리에선 예를 지키는데 반해 방원은 이성계나 신덕왕후 면전에서 직언을 서슴치 않는다.
  • [10] 굿을 하는 게 꼭 한심한 행동일 필요는 없으나, 주변 인물들의 이를 보는 시각과(무당이 홀대받던 시기였으니...) 굿 특유의 광적인 연출이 겹쳐 한심스러움이 배가 된다. 여기에 현대에도 무당의 이미지는 좋은 편이 아니니... 그런데 이 때 부르는 무당이 꽤나 용해서, 작중 일어날 일의 대부분을 예견해서 맞추는 신기를 보여준다.작중 병 하나 제대로 고치는 모습이 없는 어의따위보다 훨씬 낫다 그러나 그 담대하고 총명하던 원경왕후조차 말년에 남편과 소원해지고 동생들이 죽고 양녕대군은 엇나가고 성녕대군이 몸져눕는 악재 속에 의자할 곳을 찾지 못하다 무당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