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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

last modified: 2015-09-21 18:55:05 Contributors

Contents

1. 소개
2. 생애
2.1. 출생과 과거
2.2. 스파르타쿠스 전쟁
2.2.1. 검투사의 탈주
2.2.2. 검투사, 로마군을 격파하다
2.2.3. 자유의 투사 스파르타쿠스
2.2.4. 로마군 달아나다
2.2.5. 알프스가 보인다
2.2.6. 부자나리 등장
2.2.7. 이 지옥같은 로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2.8. 임페라토르의 최후
2.3. 전쟁 이후
3. 평가
3.1. 장군으로서의 스파르타쿠스
3.2. 그에 대한 말
3.3. 크라수스
4. 대중매체의 스파르타쿠스
5. 스파르타쿠스 관련 책 링크


1. 소개

고대 로마 시대의 인물로,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운 검투사로 유명하다.

라키아(현재의 그리스 북부에서 불가리아에 걸친 지역으로 당시에도 그리스와는 구분되어 바르바로이로 불리던 문화권) 출신.

스파르타와는 별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2. 생애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은 단편적이며,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고 어디까지가 단순한 전설인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단 현존하는 기록을 토대로 하자면 그럭저럭 그의 생애를 구성할 수 있다.

2.1. 출생과 과거

플루타크 영웅전에 의하면, 그는 트라키아의 유목민 출신으로, 명민한 정신과 대단히 튼튼한 신체를 갖추었고, 신분에 비해서 훨씬 교양있는 인물로 트라키아인보다는 그리스인에 가까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목민 출신으로 기록한 부분을 다르게 해석하여, 트라키아의 '마이디(Maidi)' 부족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트라키아에는 '스파르타코스'(그리스어)라는 이름의 촌락이 있었는데, 라틴어 '스파르타쿠스'와 같기 때문에 그를 이 촌락 출신이라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영웅전에서는 또 그의 아내[1]는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부족 출신으로 디오니소스의 광기에 들린 여자 예언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트라키아는 디오니소스 숭배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또 아피아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스파르타쿠스는 한때 로마군의 병사로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 외의 해석도 가능하지만, 스파르타쿠스가 로마군을 상대로 사용한 비범한 전술 능력을 볼 때 그가 태어날 때부터 노예출신이 아니라 본래는 교양있는 자유인이었으며, 군대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는 가설이 그럴 듯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적지 않다.

기묘하게도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키기 3년 전 BC 77년 겨울에서 BC 76년에 걸쳐서 아피우스 클라디우스 폴케르는 트라키아의 마이디 부족을 상대로 전쟁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전쟁이 스파르타쿠스가 노예로 전락한 중대한 사건이 되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여러가지 가설을 종합하여, '본래 트라키아 유목민 부족의 고귀한 가문 출신의 청년이었던 스파르타쿠스는 로마 군에 보조병으로 들어가서 군사 기술을 익혔으나, 자기 부족민과 싸우게 되자 배신하여 싸우다가 붙잡혀 노예로 전락하였다'는 식으로 스토리를 쓰는 경우가 많다.

2.2. 스파르타쿠스 전쟁

2.2.1. 검투사의 탈주

기록이 확실하지 않아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가는 추정과 상상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아무튼 트라키아 출신의 스파르타쿠스는 노예가 되어 이탈리아로 끌려와 검투사가 되었다.

스파르타쿠스가 들어가게 된 검투사 양성소는 '렌툴루스 바티아투스'라는 남자가 소유한 곳이었다. 트라키아인과 갈리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플루타크 영웅전의 기록에 의하면 다른 곳보다도 검투사들에 대한 대우가 상당히 가혹한 곳이었던 듯하다.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 양성소의 잔혹한 대우에 반발하여 70명의 동료 검투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바티아투스에 대한 기록은 이후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검투사들은 봉기 당초에는 부엌에서 부엌칼이나 꼬치구이용 꼬치 등을 훔쳐서 무기로 썻다.

이 사건은 처음에는 스파르타쿠스와 100여명의 검투사 동료들만의 소규모 탈주극에 불과했다. 양성소를 탈주한 스파르타쿠스와 그 동료들은 베수비오 화산의 산악 지대로 도망쳤다. 보통 화산지역은 암석만 그득한 황폐한 지역이지만 베수비오 화산은 제정시대에 분화하기 전에는 화산인지도 모를 정도로 삼림이 울창한 곳이니 산적질 하기 딱 좋은 지역이었다. 이들은 이 곳에서 터잡고 지나가는 행인들의 짐을 터는 전형적인 산적질을 하였다.

마침내 카푸아에서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소규모의 진압대를 파견하였는데 스파르타쿠스 일당은 이들을 패배시키고 빼앗은 무기와 갑주로 무장한 뒤 더 심하게 날뛰었다. 이럴수록 이들의 유명세는 높아져 갔고 이를 듣고 합류한 노예, 불량배, 부랑자등로 인해 카푸아 도시 정부로써는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마침내 로마 정부가 나서게 되었다.

2.2.2. 검투사, 로마군을 격파하다

처음엔 로마 정부는 이들을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하였으며 때문에 정규 로마 군단병 레기온이 아닌 시민군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3천명의 신병이 긴급히 징집되었고 이들은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이피아누스의 기록에는 '바리니우스 글라베르'라고 되어 있다)의 지휘하에 스파르타쿠스를 토벌하러 갔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법무관 글라베르는 베수비오 화산으로 올라가는 유일한 길을 막고 차근차근 올라가며 스파르타쿠스의 노예군을 포위하여 섬멸시키려 했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산 위에 있던 야생 포도넝쿨을 엮어 로프를 만들어 그것을 타고 절벽을 내려와 글라베르의 군대의 후방으로 돌아가 기습했다. 전혀 예상밖의 기습에 로마군은 혼란에 빠져 참패하고 만다.

그러자 로마 정부는 2차로 법무관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 지휘 아래 다시 시민군 4000을 편성하여 보냈다. 이때 바리니우스는 그의 부관인 루키니우스 코시니우스에게 2000명을 쪼개어 지휘하게 하였다가 각개격파당했고, 코시니우스는 별장에서 마음 놓고 목욕을 하다가 스파르타쿠스의 기습을 받아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죽임을 당했다. 바리니우스는 스파르타쿠스 반란도당을 포위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때 스파르타쿠스는 밤 중에 시체를 주둔지에 세워놓고 빠져나가서 피하는 속임수를 썼다. 이 사실을 알아낸 로마군은 곧바로 스파르타쿠스를 추격했지만 얼마 못가서 개발살났고, 바리니우스는 도망치긴 했지만 말과 파스케스, 군기를 모조리 스파르타쿠스에게 빼앗겼다.

이것은 로마의 위신에 엄청난 상처를 입혔는데, 군대가 군기를 적에게 빼앗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죽을 죄였고, 여러 개의 나뭇가지를 묶어서 만든 도끼인 파스케스[2]는 그 당시 로마 고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스파르타쿠스의 권위는 이후 매우 높아졌다.

2.2.3. 자유의 투사 스파르타쿠스

두 차례에 결쳐 로마 정부가 파견한 토벌대를 무찌르자 스파르타쿠스의 명성은 로마 전역에 퍼졌고 그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 전역의 노예들이 반란에 합류하였다. 이때 스파르타쿠스는 고의적으로 양치기들이 많이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그의 생각대로 양치기들은 앞을 다투어 스파르타쿠스에게 합류했다. 당시의 양치기 노예들은 신체가 건강하고 발이 빨랐으며 난폭하기로 이름이 높았기에 스파르타쿠스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으며, 노예 외에도 그들과 처지가 별로 다를 것 없고 사회에 불만이 많은 하층민들도 반란에 합류하였다. 반란에 합류한 사람들이 워낙 많았기에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산적떼는 4만으로 불어나게 된다. 문헌마다 숫자가 4만, 7만, 9만, 12만 등으로 다양하지만, 가장 적은 수인 4만이라도 고대에는 엄청난 수였다.

이리하여 스파르타쿠스의 탈주는 단순한 노예 탈주 사건이 아니라, 로마 역사상 유래가 없는 사상 최대의 노예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노예군은 누케리아, 투리, 메타폰툼 등의 도시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병력을 보충하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 이 과정에서 로마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던 노예군은 살인, 약탈, 강간 등을 일삼았다.

로마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때 스파르타쿠스는 약탈을 막으려고 했으며 이탈리아에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노예군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스파르타쿠스의 동지인 크릭수스 역시 "로마놈들을 죽이자!"는 의견을 가졌고, 이 때문에 나중에 둘이 갈라졌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도 스파르타쿠스의 "내년에 로마군이 쳐들어올 것이니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은 모두에게 받아들여졌고, 이에 따라 그는 야생마를 잡아 기병대를 조직하고 양치기들을 모아 군인으로 키우는 등의 준비를 했다. 또한 이나 같은 사치품의 구입을 금지하고 이나 구리를 구입하게 함으로서, 장래에 쓸 무기를 만드는 치밀함을 보였다.

2.2.4. 로마군 달아나다

이듬해 로마 정부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 판단하였고 그해에 선출된 두 집정관, 루키우스 겔리우스 푸블리콜라와 흔히 클로디아누스로 알려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에게 각각 2개 군단씩 편성한 뒤 스파르타쿠스의 진압을 맡겼다. 현직 집정관이 2개 군단을 지휘하는 것은 완전한 정식 정규군이었음을 의미하였고 두명의 집정관이 동시에 군단지휘권(임페리움)을 한 국가가 아닌 산적떼 토벌에 쓰는 것은 로마 역사상 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하면, 한니발 바르카가 이탈리아로 침입했을때 로마 정부는 두명의 집정관들에게 각각 두개 군단을 이끌고 상대하게 하였다. 산적떼 두목이었던 스파르타쿠스가 전략의 아버지 한니발과 같은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 무렵 스파르타쿠스와의 의견 차이로 그의 동료 크릭수스가 일부 병력을 데리고 떠나가는데, 로마 집정관 겔리우스의 군단병들이 이들을 잡아 완파시키고 크릭수스를 죽인다.

이 소식을 들은 스파르타쿠스는 나머지 병력과 북상하여 갈리아로 달아나려고 시도하였고 이를 렌툴루스가 가로막았다. 두명의 집정관이 출정했는데, 한사람만 앞길을 막은 이유는 당시 로마 집정관들은 둘이서 합쳐서 이기기 보다는 본인의 병력만으로 이기고 싶어했는데 이는 군사적 영광을 공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렌툴루스는 자신의 군단병만으로 급히 싸움을 걸은 것이 큰 원인이었다.

뒤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렌툴루스의 군단병을 거짓말처럼 격파하였고, 이때 로마군은 수치스럽게도 스파르타쿠스에게 등을 보이고 달아났다. 한니발을 제외하면 이런 위업을 이룬 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전투에는 이름도 붙여지지 않고, 로마 역사가들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어떻게 싸웠는지 꼼꼼하게 기록한 한니발 전쟁 때와는 달리 그냥 졌다고 썼을 뿐. 그 때문에 스파르타쿠스가 어떤 전술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로마군 정규군의 전술능력을 감안하자면 스파르타쿠스가 일반적인 야만인 스타일의 대포 돌격을 한 게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렌툴루스의 로마군이 노예군의 일부를 포위했을 때 스파르타쿠스가 나머지 노예군과 함께 렌툴루스를 기습했다고 한다. 곧이어 스파르타쿠스는 자신을 추격해오는 겔리우스의 병사를 상대하여 이 병력도 격파했으며, 갈리아 총독이자 전직 집정관인 카시우스의 병력까지도 격파한다.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이 같은 결과로 보아, 스파르타쿠스는 매우 놀라운 전술을 사용하여 정면으로 로마군을 격퇴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적어도 기록된 바에 따르면, 압도적으로 우월한 전투력을 가진 로마군을 상대로, 미끼 부대를 보내서 유인하고 본대를 이용하여 개격파하는 치밀한 전술 기동으로 로마군을 압도하여 물리쳤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중해 최고의 군사적 영광에 빛나는 로마에게 있어 큰 치욕이었다. 사람 취급도 못 받는 '물건'에 불과한 노예 검투사와, 그 검투사가 지휘하는 노예군에게 로마의 높으신 분들인 현직 집정관 2명과 전직 집정관 1명이 연달아 패배한 것이다. 군단수만 따져봐도 집정관 1인당 2개 군단이니 6개 군단이 패배를 당한 셈이다. 살아서 돌아간 집정관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는 안 봐도 블루레이.

그 다음에 들어온 소식은 로마 고위층의 분노를 폭발시킨다. 스파르타쿠스는 포로로 붙잡은 로마인들에게 검투사 경기를 시켜 서로 죽이게 했던 것이다. 이 경기는 전사한 크릭수스를 위해 벌인 것이며, 전사자를 위해 경기를 바치는 것은 로마의 높으신 분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일로 스파르타쿠스의 명성은 매우 높아지게 되었고,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아 로마사에 꼭 등장하게 되었다.

2.2.5. 알프스가 보인다

두 집정관을 패배시킨 뒤에도 스파르타쿠스와 동료들은 계속 북상하였고 가는 길에 합류하는 인원덕에 12만까지 불어난다. 해당 기록이 로마시대 역사가 아피안의 기록이고 당시의 경향을 볼때 어느 정도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엄청난 숫자로 불어난 셈이다. 이들은 알프스까지 행군하였고 더 이상 로마군은 이들의 탈출을 막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며, 목적지를 트라키아로 잡은 듯 하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다시 남하를 시작, 나폴리 지방으로 내려온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것이 스파르타쿠스 최대의 실책이라고 평가한다. 그냥 넘어갔으면 자유를 얻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이탈리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 본인이 이탈리아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찾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던 것이 분명한 만큼, 왜 이렇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설은 트라키아 출신이 아닌 노예들이 의식주를 충족하기 매우 어렵고 야만족이 들끓는 트라키아로 향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며, 반란 초기부터 스파르타쿠스의 말을 잘 듣지 않았던 노예들의 행태로 보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싸우면 이기는 우리가 왜 도망가야 합니까?

배리 스트라우스 같은 경우는 스파르타쿠스 군단의 상당수를 이뤘던 켈트, 게르만족이 소위 "2세대" 노예였던 것을 지적한다. 즉 그들에게 알프스 이북은 고향이 아니라 낯선 땅이나 다름 없었다. 스파르타쿠스가 세력 확대를 위해 포섭했을 이탈리아 남부의 빈민과 양치기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한 평생 이탈리아 남부에서 살아왔을 그들에게 거대한 알프스 산맥이 주는 위압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스파르타쿠스는 여기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만 데리고 군을 나눠서 고향으로 떠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스파르타쿠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2.2.6. 부자나리 등장

스파르타쿠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안 원로원은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이라고 결의하고, 로마 제일의 부자인 법무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스파르타쿠스 토벌의 명을 내린다. 그는 패주한 집정관의 군대와 자신의 사비를 털어 징집한 병사를 합친 8개 군단으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군과 맞서 싸우게 된다.

집정관이 패배한 싸움에 등급이 낮은 법무관인 크라수스가 나선 이유는 두 집정관들이 이미 산적떼에게 패배했다는 망신을 당했으므로 더이상 군단을 지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라수스는 8명의 법무관 중에서도 수석 법무관이었고 따라서 두 집정관의 패배 뒤 그가 지휘할 차례였던 것이었다. 또한 원로원이 로마 제일의 부자였던 크라수스가 사비를 털어 병력을 소집하기를 기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크라수스는 패배한 집정관의 군단들에게 10분의 1의 형을 내렸다. 이는 한 부대의 10명 중 한명을 제비로 뽑아 남은 9명의 동료가 때려죽이는 무시무시한 형벌이었다. 이렇게 무서운 형벌을 내려 전 군단에게 본보기로 삼은 뒤 스파르타쿠스를 조이기 시작한다.

2.2.7. 이 지옥같은 로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숫적 불리함에 서서히 밀린 스파르타쿠스는 이탈리아 반도의 장화 발끝까지 몰렸고, 불리함을 깨달은 스파르타쿠스는 해적들과 접선해서 를 얻어 이탈리아를 탈출하려 했지만 해적들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뗏목을 동원해보기도 했지만 그 역시 실패한다.

현대 역사가들은 스파르타쿠스가 시칠리아로 달아나서 그 섬을 근거지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칠리아는 몇년 전에도 노예 반란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며, 판단 자체는 옳았지만 해적들이 로마에 매수당했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 스파르타쿠스에게 나쁜 소식이 전해진다. 외국으로 원정을 나갔던 로마군단이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를 불모지에 몰어넣고 벽까지 쌓아서 포위망을 완성한 크라수스의 병력들은 "이제 폼페이우스가 오면 넌 죽는다"고 상대를 조롱하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스파르타쿠스는 병력을 이끌고 로마군의 포위망을 돌파해버린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말을 안 듣는' 노예들의 고질병이 또 터졌다. 노예군 일부가 스파르타쿠스와의 의견 차이로 갈라지고, 이들은 곧 로마군에게 섬멸당한 것이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동쪽으로 후퇴하면서 겸사겸사 스파르타쿠스를 추적하던 크라수스의 기병대에게 역습을 걸어서 패퇴시킨다.

그러나 그가 목표로 한 항구에는 이미 동방에서 돌아온 로마군단이 상륙하고 있었다. 길이 막힌 스파르타쿠스는 다시 후퇴하면서 활로를 모색했지만, 그의 부하들이 "로마놈들과 싸우자"며 후퇴명령을 거부한다. 스파르타쿠스는 여기서 로마군과 정면으로 싸우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지만, 부하들의 완강함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2.2.8. 임페라토르의 최후

로마군과의 전력 차이를 알고 있던 스파르타쿠스는 일종의 배수진으로서 노예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좋은 말을 많이 얻을 것이고, 진다면 더이상 말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말을 베어버린다.

그 후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와 전투를 벌이지만 압도적인 숫적 차이에 열세에 몰렸다. 물론 카르헤 전투에서 보듯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은 뛰어나지 않았으나 그가 동원한 8개 군단의 수는 무려 5만여에 달하였고 이들의 무장의 질은 산적떼에 지나지 않는 스파르타쿠스 군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마지막 수단으로 돌격대를 이끌고 크라수스를 죽이기 위해 돌진한다. 성공했다면 승리했겠지만, 로마군은 전력을 다해 이를 저지했고, 스파르타쿠스는 그의 손으로 두 명의 백인대장을 베어 쓰러뜨릴 정도로 분전했으나 결국 힘이 다하여 쓰러지고 만다.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은 노예군의 붕괴를 가져왔고, 그것으로 전쟁은 막을 내린다.

여기서 로마 역사가들의 기록이 갑자기 자세해진다. 그야 여기서부터 이겼으니까 로마의 역사가 플로루스는 "그는 거의 임페라토르(Imperator)처럼 싸우다 죽었다"고 기록했다. 이 임페라토르는 장군이나 사령관을 의미했지만, 플로루스의 시대에는 '황제'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일개 검투사가 황제처럼 싸우다 죽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다른 역사가들 역시 표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스파르타쿠스가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는 것에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의 최후를 묘사한 기록은 두 가지 중 하나다. 하나는 스파르타쿠스가 동료들의 버림을 받은 후에도 싸우다가 죽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릎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동료들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스파르타쿠스가 자유의 투사다운 최후를 맞이한 것에는 변함이 없다. 심지어 마지막 전투에서 싸운 노예들에게도 "노예들은 검투사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답게, 용감하게 싸우고 사나이답게 죽어갔다"는 찬사가 바쳐졌다.

그가 화려한 갑옷이 아닌 노예군 전우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초라한 복장을 하고 있었던 탓이었는지, 스파르타쿠스의 전사는 거의 확실하지만 로마군은 전투 후에도 전장에 쓰러진 시신 중 어느 것이 그의 시신인지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 살아남은 상당수의 패잔병들이 서둘러 로마로 강행군하는 폼페이우스군을 만나 격파당했고 폼페이우스는 자신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마무리 지었노라고 원로원에 서신을 보낸다. 이것을 원로원은 그대로 인정하였다.

물론 원로원이 크라수스의 공적을 모를리가 없었다. 하지만 원로원에겐 크라수스가 군사적 성취를 얻어 정계의 중심인물로 급부상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시 폼페이우스는 어차피 스페인에서의 활약으로 개선식을 할 것이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에게 겸사겸사 개선식을 거행하게 하고 크라수스에겐 개선식을 주지 않으려는 꼼수를 부린 것이었다. 덕분에 크라수스에겐 개선식이 아닌 한단계 아래인 오베이션이라는 퍼레이드를 주었다.

그리고 원로원으로서는 크라수스의 개선식을 절대로 허가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개선식을 치를 정도라면 매우 중요한 전쟁에서 이겼다는 뜻인데, 물건에 지나지 않는 노예 검투사와의 전쟁에서 이겼다고 개선식을 허락하면 스파르타쿠스가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노예에게 그런 영광을 준다는 것은 로마인들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크라수스의 공을 인정해(그리고 크라수스의 뜻이 반영되서) 원로원은 오베이션 때 수여하는 금속 관 대신 개선식을 치른 사람에게만 수여하는 월계관을 수여했다.

2.3. 전쟁 이후

패배한 스파르타쿠스의 잔존 병사들 중 6000명이 포로로 잡혔고, 이들은 노예들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한 본보기로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반란 노예들은 놀랍게도 십자가 위에서도 의연했으며, 심지어 매달린 채로 로마군을 조롱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살아서 도망친 사람들은 산에 숨어서 산적질을 하며 살아갔지만, 이들 중 누구도 스파르타쿠스의 위업을 재현할 수는 없었고 나중에 로마군에 의해 몰살당했다. 스파르타쿠스의 잔당은 상당히 뿌리 깊게 남아 있었는데, 카틸리나의 반란에서 이들이 카틸리나 측에 협력한 정황이 있고, 아우구스투스가 스파르타쿠스 잔당 토벌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반란의 여파로 재발 방지를 위해 노예들에 대한 대우가 약간은 나아졌다. 그래봤자 눈 가리고 아웅 수준이라 의미는 없다. 노예를 짐승 취급하는 것도 여전했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기록을 조금밖에 남기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 전쟁은 사실 그 규모 면에서는 2명의 법무관과 2명의 집정관이 털리고, 이례적인 조치로 8개 군단을 동원해서야 겨우 진압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전쟁이었음에도, 기록 남기기 좋아하는 로마인들 답지 않게 남은 기록은 적고 상세함도 꽤 떨어지는 편이다. 비천한 노예 검투사에게 로마가 몇 차례나 얻어맞았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이런 건 숨겨야 해!

그러나 로마인들은 절대로 스파르타쿠스를 잊지 않았다. 키케로나 카이사르도 스파르타쿠스를 언급한 바 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가리켜 "새로운 스파르타쿠스"라고 비난한 바 있다. 안토니우스에게는 분에 넘치는 이름이다.

그리고 이후 로마인들은 검투사들의 경기장 주변에 로마군을 배치했다. 만약 반란을 일으키면 죽여버리기 위해서다.

물론 그렇다고 로마 제국에서 노예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것이 절대 아니다. 기회만 있으면 로마에선 노예들의 반란은 계속 일어났다. 심지어 로마제국의 번영기라는 5현제 시대에도 노예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로마제국이 막장이 되는 말기에 들어선 이 노예반란이 더욱 심각해진다.[3] 결국에는 노예반란으로 인해 게르만족과 결탁한 로마 시의 반란 노예들이 로마 시를 함락하여 로마 시를 콩가루로 만들어준다. 물론 로마인들도 그동안 자신들이 억압한 노예들에게 심하게 보복당한다. 특히 노예를 많이 거느린 로마의 부자들이랑 귀족들이 가장 심하게 당했다. 그 이후에 서로마 제국은 큰 타격을 입고 멸망하고 만다.

3. 평가

로마에서 노예 반란은 적지 않은 일이었다. 스파르타쿠스가 봉기하기 얼마 전에도 시칠리아에서 노예 반란이 일어나 거의 전역이 점령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그들 중에서도 특히 뒷날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검투사라는 직업이 풍기는 잔혹하고 비정하고, 로마인의 쾌락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하는 비참한 처지, 그 검투사들을 이끌고 세계 제국으로 발돋음 하던 로마를 상대로 봉기에 나선 스파르타쿠스의 비장함은 현대인들에게 여느 노예 반란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와 적대한 로마인들의 기록에서도 스파르타쿠스는 무분별한 살육을 제지하는 등 고결한 성품을 지녔다고 되어있어, 저 고결한 성품의 남자가 어쩌다 노예의 신분이 되어서 봉기에 나서게 되었는지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다.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4] 돌아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결국 현대에 이르러 그의 이름은 단순한 노예 해방의 상징을 넘어서, 끝내는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의지와 모든 억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게 되었다.

3.1. 장군으로서의 스파르타쿠스

기록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의 군사적 역량은 상당히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사치품 구입을 금지하고 병기를 비축하는 한편, 보초를 세우고 정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단순히 요행이나 수박 겉핥기로 알고있는 정도가 아니라 기본적인 병법을 충실하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파르타쿠스의 출신은 불명이지만 이 점 때문에 스파르타쿠스가 본래는 고귀한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왜냐하면 당시 이런 군사 기술은 노예의 처지에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떄문에 스파르타쿠스가 트라키아에서 부족민으로 지낼 때 로마군에서 보조병으로 근무했다는 추측이 있기도 하는데, 당시 가장 발달된 군사 기술을 가진 것이 로마군이었으며 로마군과 함께 싸우는 것이야 말로 로마군의 전술을 습득하는 가장 좋은 루트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단순히 '기본만 하는' 수준도 결코 아니었다. 스파르타쿠스는 대단히 지능적이었다. 놀라운 계략을 여러 차례 써서 로마군을 속이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런 '꼼수'에만 능한게 아니라 정통적인 지휘능력도 비범했는데, 정면 대결에서도 몇 차례 로마군단을 격파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가 1류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그는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 같은 당대 제일의 로마 명장들과 직접 대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류들과 싸워 이긴 것만으로는 스파르타쿠스가 1류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 하다못해 스파르타쿠스가 상대한 로마 군대는 적어도 로마군 내에서는 아시아 원정에 나간 로마군이나, 폼페이우스가 이끌고 간 원정대에 한참 못미치는 삼류 수준이긴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상대가 2류라면,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병력은 3류나 4류도 아니고 오합지졸 그 자체에다가 지휘관 작계도 씹어먹은 노예들이었다. 도망친 노예들로 이루어져 질적 수준을 기대하기 어려운 병사들을 이끌고 로마군을 몇 번이나 격파한 군사적 능력은 결코 낮춰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들을 이끌고 다녔다는 것 자체로 스파르타쿠스의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스파르타쿠스는 형식상 이나 장군 같은 직함도 쓰지 않았고, 우두머리라고는 해도 여러 노예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도 하는 등. 절대적인 지위를 구축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들과 탈주 노예로 이루어진 질 낮은 병사들을 이끌고 그 명장 한니발 바르카에 버금가는 공포를 로마에 안겨주었다. 변변한 근거지도 없이 도적떼와 같았던 스파르타쿠스 집단의 처지에 비추어보면 도무지 믿기지 않는 승리였다.

3.2. 그에 대한 말

볼테르는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가리켜 "가장 정의로운 전쟁",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이 때부터 스파르타쿠스는 억압받는 약자를 규합하여 체제에 대항한 고결한 영웅으로 여겨졌으며, 많은 창작물에서 이상적인 영웅으로 이야기 되었다.

칼 마르크스는 스파르타쿠스를 아주 좋아하였으며, 아마도 마르크스가 가장 좋아하는 고대인이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고대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눈부신 동지, 위대한 장군, 고귀한 인물, 고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부르며 극찬했다. '약자들의 혁명'을 주장한 마르크스가 그 선도적인 형태를 제시한 것으로 보이는 스파르타쿠스를 칭송한 까닭은 특별히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을 것이다. 좌익 진영은 이 평가를 받아들여 스파르타쿠스를 '민중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이 때문에 커크 더글라스가 주연을 맡은 <스파르타쿠스>가 영화화될 때 어려움이 많았다고. 공산주의자들의 영웅을 어찌 미국에서 떠받들어주겠는가 그러나 메카시즘이 가라앉은 후에는 그런 시각도 사라졌고, 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로널드 레이건은 자유를 위해 싸우고 희생한 사람의 예로 스파르타쿠스를 들었다.

마르크스가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비슷하게 스파르타쿠스를 높이 평가하였다.



3.3. 크라수스

크라수스는 단순히 축재만 한 것이 아니고 공공시설 건설등에도 사재를 많이 기부했으며 정치가로서도 상당한 무게감을 갖고 있었다. 가령 크라수스가 선출된 법무관의 직위는 해마다 단 8명만이 선거로 선출되는 직위이므로 인기가 없다면 얻을 수 없는 직책이었다. 게다가 당시 역사서에는 그를 로마 정계의 위엄있는 주요인사로 묘사했다. 따라서 역시 젊은 나이부터 로마 정계의 주요인사인 폼페이우스에 강한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폼페이우스가 이미 엄청난 군사적 성취를 이미 이룬데다 또 그해에 히스파니아에서 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명성을 날리고 있었기에 그에 대항하고자 자신이 이 희대의 노예반란을 진압했다는 명성을 얻길 원했다. 그리고 그는 대군이었던 스파르타쿠스의 군을 멋지게 격파하여 기대에 부응한다. 이걸 보면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도 그렇게 욕먹을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로마역사가들에겐 카르헤 전투가 로마 역사상 최대의 참사 중 하나였으므로 그의 군사적 재능을 최대한 깎아야 그나마 체면치례가 가능했던 것이었다. 카르헤 전투에 맞먹는 참사는 아루시오 전투와 칸나이 전투 정도인데 아루시오 전투의 경우 게르만족이 상당한 대군이었으므로 변명의 여지가 있었고 칸나이 전투의 경우 한니발이 너무 명장이라 체면치례가 가능하였다. 하지만 카르헤 전투의 경우 수레나스라는 역사에 잠깐 등장한 인물에게 상당한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7개 군단이 전멸당하다시피 하였으므로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을 최대한 깎아야만 로마의 체면이 서는 것이었다. 또한 위에서 말했듯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를 격파한걸 대단한 일이라고하면 반란노예따위가 로마와 대등한 상대라는걸 인정하는게 되기도 하다.

4. 대중매체의 스파르타쿠스

  • 스파르타쿠스/기타 창작물 참조.
  • 현재 싸이클계의 세계 최강의 타임 트라이얼 스페셜리스트이자 최강급 클래식 레이스 선수인 파비앙 칸첼라라의 별명이기도 하다.

5. 스파르타쿠스 관련 책 링크

  • 스파르타쿠스 전쟁 - 배리 스트라우스 저. 스파르타쿠스 전쟁에 대해 자세히 연구한 책이며 리그베다 위키의 이 문서보다 100배 더 자세하다.
  • 스파르타쿠스 - '신화가 된 노예'라는 부제목을 달고 있으며 스파르타쿠스가 신화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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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엄밀히 따지자면 고대 로마에서 노예들은 주인의 묵인 하에서 동거녀와 살아갈 수는 있지만 법적으로 결혼은 불가능했다.
  • [2] 지도자의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는 파시즘이라는 명사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 [3] 로마의 적들이 더욱 강해져서 노예를 획득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데다가 있는 노예들까지 도망가거나 반란을 일으켜 로마제국은 그동안 의지해왔던 노예제 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는 로마제국에 막대한 타격을 준다. 귀족들도 노예들이 도망가거나 반란을 일으켜 노예제 농장인 라티푼디움을 경영하기가 어렵게 되자 휘하에 있는 노예들을 모두 해방시켜 소작제로 전환한다. 이는 로마의 국방력이 더욱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 [4] 실제로 스타르타쿠스 혼자서 알프스산맥을 통과할수 있었고 알프스는 넘으면 스파르타쿠스는 안전하게 고향으로 갈수가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가버리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하는 노예반란군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고 이들과 같이 싸우다 죽는것을 택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