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숭례문

last modified: 2017-09-18 00:18:54 Contributors

seoulsouthgate.jpg
[JPG image (Unknown)]

조선 말기의 숭례문


2013년 2월 14일 드디어 가림막을 걷어낸 모습. 조..조금만 더하면!
4월 완공


Contents

1. 개요
2. 숭례문? 남대문?
3. 수난의 역사
4. 방화 사건
4.1. 사건 경위
4.2. 방화범
4.3. 비효율적인 진화
4.4. 복구
4.4.1. 복원 문제점들
4.5. 사건의 파장
4.5.1. 숭례문 괴담
4.5.2. 숭례문, 복원 후...
4.5.3. 숭례문 부실 복구 및 재시공 통보
5. 역사
6. 숭례문에 얽힌 사건들
7. 숭례문 수문장 교대식
8. 다른 매체의 숭례문
9. 찾아가는 방법
10. 관련 검색어


조선 한성의 4대 성문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동문 서문 남문 북문

1. 개요

600년 동안 한양을 둘러싸고 있었던 한양도성의 남쪽에 위치한 문. 현재도 서울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보 1호. 서울의 상징이나 다름 없었던 건축물이다.

도시 남문의 이름에 '남' 자가 안 들어가서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인의예지를 동서남북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서울의 정문들 이름이 붙여졌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덕목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기준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동: 인(仁)을 기르는 흥인지문
서: 의(義)를 두텁게 하는 돈의문
남: 예(禮)를 숭상하는 숭례문
북: 지(智)를 기르는 흥지문이어야 하지만... 지혜를 뜻하는 지(智) 대신에 정(靖)자를 썼는데 이는 "꾀하다" 또는 "꾀" 라는 뜻이 있다. 지혜 대신 살짝 비틀어 꾀라고 지었다고한다. 또 일설에는 흥지문으로 하면 백성이 똑똑해져서 다스리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설도 있다. 북은 음을 상징한다고 해서 이 문은 쪽문으로 세워졌고 대신 지어진 '정화하는 의미인' 숙정문마저도 안된다고 해서 통행금지.
신(信)은 보신각이다. 4대문의 중앙에 세웠다.

주의할 점은 숭례문이 한양도성의 최남단에 위치한 문도 아니고, 방향 역시 남향이 아닌 남서향이라는 점. 그리고 2010년에 복원하는 도중 밝혀진 사실로 숭례문의 원래 기단은 지금의 지면보다 1m60cm 정도 아래에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15세기 무렵의 도로는 지금보다 훨씬 낮았고, 상대적으로 숭례문의 성벽은 더 높았다. 그러나 결국 예산을 이유로 기단은 다시 묻여졌다.

2. 숭례문? 남대문?

남대문이라는 명칭은 일제에 의해 강제개명될 때 붙어진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소문이 언젠가부터 퍼졌다. 특히 숭례문 전소 이후 의식적으로 '남대문' 을 피하고 '숭례문' 으로 부르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이런 오해(혹은 악의적 왜곡)가 널리 퍼지기도 했다. 이는 잘못된 일본어 잔재론 중 하나로, 사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도 백성들은 이미 편하게 남대문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많으며 단어 수도 남대문이 숭례문보다 더 많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5년 9월 24일 기사에는 '正東曰興仁門, 俗稱東大門. 正南曰崇禮門, 俗稱南大門' 이라 하여 보통 동대문, 남대문으로 부른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속(俗)은 속되다, 천박하다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세간에서는, 백성들은' 으로 해석하는 게 맞다. 백성들은 물론 신하나 군주들까지도 즐겨 남대문, 동대문 등으로 불렀다. 세종 9년 1월26일 기사에는 '上曰: 明日置于南大門外愼以衷之家' 라 하였는데 여기서 상은 물론 세종대왕. 그 외에 서애 유성룡, 한음 이덕형도 남대문이라 부른 기사가 있으며 실록을 쓰는 사관조차 성종14년 12월 4일에 보면 '南大門內行廊失火, 延燒十餘間' 이라 하여 남대문이라 적어놓았다.

그러므로 남대문, 동대문 명칭은 잘못된 것도 일제의 잔재도 아니다! 백성은 물론 군신이 모두 친근하게 아무 이견 없이 남대문, 동대문이라 한 것을 전소사건 이후 '남대문은 틀린 이름' 이라거나 '일제 잔재'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와 불성실일 뿐이다.하지만 아직까지 이런 기사가 나오고 있으니...

3. 수난의 역사

일제시대에 들어서 한국의 대부분의 도시 성곽들의 운명이 그러하였듯이 한양도성도 철거되기 시작하였으며, 숭례문의 서쪽과 동쪽의 성곽 역시 헐리게 되었다. 이러한 것은 해방 이후 50년이 넘도록 복원되지 않았다. 사실, 실권이 일본에 넘어간 대한제국 말부터 일본은 교통을 위해 숭례문도 철거할려고 했지만, 숭례문이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지나온 성문이라는 이유로 보존될 수 있었다.[1] 그 후 숭례문은 '일제가 지배하는 경성의 랜드마크'로서 활용되었다.

한국전쟁 때 건물의 일부가 피탄되어 무너졌으나 다행히 화재로 번지지 않아 전후에 복구될 수 있었다.

sungryemun.jpg
[JPG image (Unknown)]

2008년 2월 화재로 붕괴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도 서울을 뒤덮은 융단폭격에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건물 중 하나였으나... 어리석은 노인의 불장난에...

4. 방화 사건

실제로 일어난 사건! HELP!

이 문서가 다루는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것이며, 열람 및 수정 시 주의해야 합니다.
서술에 문제가 있을 경우 [http]위키워크샵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DSC_5767.jpg
[JPG image (Unknown)]

DSC_5829.jpg
[JPG image (Unknown)]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화재 현장

4.1. 사건 경위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50분쯤 원인 모를 불이 흰 연기(검은 연기가 아니다.)와 함께 숭례문 2층에서 발생하여 소방 당국은 신고를 받고 소방차 32대, 소방관 128명을 현장에 출동시켰고 불씨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 현판을 잘라내고 물과 소화 약제를 뿌리고 화재 진압에 총력을 다했으나 2월 11일[2] 오전 0시 25분쯤 2층 누각 전체가 불에 휩싸이고 화재 4시간 만인 오전 0시 58분쯤 지붕 뒷면이 붕괴[3]되기 시작했으며, 2층이 붕괴되었다. 이어 바로 1층에 불이 붙어 새벽 1시 55분 쯤에는 누각을 받치고 있는 석반만 남긴 채 모두 붕괴된 다음 5시간 만에 전소되었다.

당시 숭례문을 관리하고 있던 업체의 직원은 퇴근하고 CCTV만이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초기 화재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가던 시민의 신고가 들어오고서야 사태가 파악되었다. 방화 당시 쓰인 것은 겨우 니스 3통과 라이터 하나였다.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YTN, 헤럴드 뉴스, 소방방재청, 경찰청 보도 참조).

20:47KT 텔레캅이 남대문에 설치한 센서에 뭔가 반응. 경찰서및 소방서에 연락 안함.
20:50화재 신고
20:53중부소방서 회현 소방파출소 도착. 화재 진압의 FM대로 해체하며 진화하기로 계획
20:57텔레캅 직원 도착. 현장에서는 진화작업중(이건 뭐...)
20:59문화재청에 화재 통보. 답변 국보가 훼손될 수 있으니 신중하게 진화
21:30화재 진압된 것으로 결정. 잔화 처리. 발화점 미확인
21:35문화재청, '화재진압이 우선' 일부 훼손 승인
21:55화재 비상 2호
22:32화재 비상 3호 - 서울 소방재난 본부장 지휘
23:10숭례문 현판 회수
23:20화학식 소화제(거품으로 산소차단) 사용
23:50지붕 해체 개시
00:252층 누각 전체 발화
00:582층 붕괴
01:55대부분 붕괴

4.2. 방화범

방화 용의자는 택지개발에 따른 자신의 토지에 대한 보상액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었다. 해당건설사가 공시지가보다 높게 산정해 1억원을 제시했는데 이 인간은 밑도 끝도없이 4~5억을 내놓으라고 땡깡을 부린것. 그런 이유로 나이를 뒤로먹은 70세 노인 채종기로 과거에 같은 이유로 창경궁에도 방화했던 것도 밝혀졌다. 원래는 종묘를 불사르려 했는데 종묘의 경비가 삼엄하여 숭례문으로 표적을 바꾸었다고 한다. 문화재를 선택한 이유는 경비가 허술해 접근이 쉽고 인명 피해가 나지 않으며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문화재에 대한 시민 의식이 아직도 낮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지금이야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전통이란 그저 낡고 버려야 할 것으로 인식이 광범위하게 있던 시기가 불과 수십 년 전이었다. 50년대 미국에서 한국 문화재 전시회가 열리자 분노한 한국인들이 빨리 없애야 할 전통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다니 말이 되느냐고(...) 항의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나마도 유형 문화재는 어느 정도 보전이나 되었지 춤, 노래, 요리를 비롯한 무형문화재들은 그따위 상것들의 장난질이 어떻게 문화재냐?고 오랫동안 비웃음을 당하다가 박정희 시대에 가서야 겨우 문화재로 인정받았다. 옆 동네의 행적이 생각난다

방화범은 현장검증 자리에서 당시 대통령에게 하소연해도 들어주질 않았다는 뜻으로 "노무현의 잘못이 99.9%, 나의 잘못은 0.1%", "그래도 인명피해는 없었잖아. 문화재는 복원하면 된다" 는 망언을 하여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검증이 끝나고 "문화재를 훼손해 국민들께 죄송하다" 는 말을 했다. 재판을 받은 채종기는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2년 형이 구형되었으며 1심 판결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형이 과중함을 들어 항소, 서울고등법원은 2008년 7월 31일 항소를 기각하며 징역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여 복역하게 된다.

화재사건 이후 세간에서는 전통 문화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철없는 젊은 자식이나 어린 놈이 장난으로 삼거나 구식 문화에 혐오감 등을 가져서 불을 저질렀다고들 추정하였지만 뜻밖에도 70대의 노인이었다는 사실에 경악과 충격을 금치 못하였다. 무엇보다 전통 문화를 소중히하고 옛 것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노인들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돈에 눈이 멀어서 문화재를 불태웠다는 사실에 경악하였다.

2013년 시점으로 여전히 아픈 데 없이 건강하게 복역 중이다. 교도소의 규칙적인 생활 탓인지 요통까지 나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1939년생 76세로 2018년에 출소 예정.

4.3. 비효율적인 진화

비교적 화재 신고는 일찍 되었지만 그 진화 과정이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소방인력의 전통 목건축 구조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진화를 위해 노력했던 소방관들 개개인의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제도적으로 전통 목건축에 대한 소방인력 교육이 부족했던 것.

당시 소방관들이 돌입하기에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밖에서 소방차 32대로 물을 퍼부었지만 지붕이 완전 방수라 2층의 지붕 내부에 붙은 불들을 끌 수가 없었다. 목건축은 나무가 물에 닿으면 썩기 때문에 지붕 방수에 엄청난 신경을 쓰기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기와를 걷어내든가 서까래에 구멍을 뚫는다든가 해서 불이 붙은 부분에 직접 물이 닿게 했어야 한다고 하지만 당시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은 물론 경찰, 서울시, 현장 생중계를 하던 방송사 등 아무도 이를 몰랐다. 문화재청의 전문가들은 너무 늦게 도착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도면 역시 너무 늦게 왔기 때문에...

소방방재청에선 이런 고건축물 화재에 대비한 훈련을 전혀 한 적이 없어서 소방관들은 지붕이 완전방수라는 걸 몰랐다고 한다. 황평우 문화재연구소장 등 몇몇 민간 문화재전문가가 TV중계를 보고 급하게 연락을 시도하고 현장에 나왔으나 모두 무시당했다고... 당시 전국의 수많은 유적지에도 소화기만 비치되어있지 화재 상황에 대비한 구체적인 메뉴얼 따위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소방관들이 내부에서 천장에 구멍을 뚫고 물을 뿌리려고 했으나 붕괴 위험이 있어 포기했다고 한다. 전통 목건축물은 나무를 겹겹이 쌓아서 만들어진 것이고 무거운 지붕의 무게로 기둥을 누르는 구조기 때문에 기둥 등 구조체가 타게 되면 붕괴하기가 쉽다.

  • 목조 건축물이 5시간 이상 버틴 것도 기적이다. 전근대 화재 진화는 연소(延燒)의 방지에 중점을 둔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건물에 붙은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불이 붙은 건물은 포기하고 그 옆의 건물을 부숴 불이 더이상 번지게 하지 않는 방법이다. 실제로 국내 목재 건축 문화재 전체가 화재에 휩쓸렸을때 이렇게 전소되지 않고 1층 누각 대부분과 2층 누각 일부라도 살아남은 케이스가 거의 최초라고.

  • 사실 숭례문의 1층 누각은 상당 부분 남았기 때문에 '반소' 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마도 숭례문이 '국보 1호' 라는 상징성과 사회에 불만을 품은 방화로 탔다는 충격적인 사실 때문에 언론에서 지나치게 표현한 것. 만약 전소되었다면 바로 국보에서 지정해제되었을 것이다. 2005년 4월 강원도 산불로 종각이 전소되어 소실된 낙산사 동종은 종각이 탔다고 해제된 게 아니라, 종 자체가 녹아서 구릿물로 변해 사라졌고 그해 7월 7일 보물에서 지정해제되었다. 반면 숭례문의 경우는 국보의 지위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물론 막대한 피해를 입어 예전과 같은 가치는 회복할수없다.

4.4. 복구

그나마 다행이라면 거의 전소된 2층과 달리 1층 누각은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는 점과 숭례문 안에 있던 가치 있는 문화재의 상당수는 60년대 해체보수할 때 꺼내서 누각 안에 보관하고 있다가 몇 년 전에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서 무사하다는 점이다.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진 현판은 떼낼 시간이 없어서 연결 부분을 톱으로 절단하여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바람에 약간 파손되긴 했지만 지켜냈다.

복구까지는 짧게는 1년 반에서 2년 정도로 예상되었지만 치명적인 문제는 광화문 보수하느라 목재로 사용 가능한 정도 수령이 된 여분의 국내산 소나무가 존재하지 않았다. 건축에 쓰이는 목재는 크기가 적당한 나무도 있어야 하지만 벌목 후 수년동안 건조를 시켜야 하기 때문에 바로 조달할 수가 없다. 그래서 광화문을 다 분해해 놓은 상태에서 거기에 쓰일 목재를 숭례문으로 돌려서 쓰고 있다고 한다(한국전쟁 때문에 국내에 목재로 쓰일 만한 소나무 씨가 말라버려서). 다행히도 태조 이성계의 5대조가 안장된 준경묘(濬慶墓) 경역의 금강송 20그루를 숭례문과 광화문 복원에 사용하는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동의해 이를 벌채한 것을 비롯, 곳곳에서 소나무를 기증하겠다는 고마운 시민들 덕에 재목 충당은 별 문제 없을 듯하다. 그런데 자재를 뺏긴 광화문이 먼저 복원 완료된 게 또 미스터리다.

4.4.1. 복원 문제점들

  • 말이 많은 목장인 신응수부터 시작해서 문제점들이 꽤 있어서 복원에 대해 우려가 있기도 했다. 전통 방식으로 복원하겠다고 했지만 일제시대 시멘트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포크레인이나 그라인더를 이용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재미교포 건축가가 실측 자료를 주겠다고 하는데도 붕괴 3년후에야 실측도면을 찾은 사실도 있다. 다만 실제 복원 공사는 2010년부터 진행했기 때문에 공사 시작일로부터 계산하면 1년.

  • 또한 복구 공사가 전통 기법에 기반을 두지 않은 설계에 따라 진행되어 원형 훼손의 우려가 있다는 감사원의 감사 결과가 공개되기도 했다. 일단 복원 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최대한 전통방식을 따르긴 했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어서 전통 안료의 경우 도저히 복원에 쓰일 양과 질이 충분히 되질 못하여서 상당부분 일본산 안료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 전통방식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80년대 이후 숭례문에 단가가 싸고 규격에 잘 맞는다는 이유로 수제 기와가 아니라 기계 기와를 사용했었고 이 때문에 화재 당시에는 몇몇 부분을 제외하곤 전부 기계 기와로 교체 되었다고 한다. 이때 복원 당시엔 중요무형문화재 제91호인 제와장 한형준 선생과 그 제자들을 불러 수제 기와를 제작했고 중요무형문화재 121호인 이근복 번와장[4]이 그 기와를 가지고 교체했다. 화재 이전 숭례문과 복원 후 숭례문 기와의 색이 다른 이유가 바로 이것인데 기계 기와는 검은색에 가깝고 수제 기와는 회색빛에 가까운 색이라고. 안타깝게도 현재도 고궁을 비롯해 대부분의 문화재 기와는 전부 기계 기와를 사용하는 편이다. 광화문 복원 당시 사용된 기와도 기계 기와라고한다.

    불타기 전 복원 후

  • 숭례문에 그려준 벽화 복원이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숭례문에 그려진 벽화가 화재가 나기 전에 있었던 모습과 너무 달라서 네티즌들은 원래의 용 그림을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용처럼 만들었다며 비난했다. 역사학자 전우용 씨도 자신의 트위터에 단가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하여 논란을 부추겼다.[5] 그러나 단청장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화재가 나기 전에 있었던 그림은 1963년에 복원공사 때 그려진거고 현재 그려진 그림이 오히려 원판에 가깝다고 밝혔으며 문화재청에서도 1963년 복원 공사 당시의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전용우 씨도 관련 트윗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렸다. 사실 조선 시대의 용 그림을 보면 의외로 지금 애니메이션에 나올 것처럼 희화된 용이 많다. 용을 희화화한 것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유행했던 것으로, 한나라 시기 때부터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왔다. 시대를 앞서간 조상님

  • 2013년 2월 가림막 철거 후에는 좌우 성벽 복원 부분이 논란이 되고 있다. 물론 원래 성문이었고 현재 서울 시가 한양 성곽 복원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성벽 복원 자체는 합당한 일이긴 한데, 아무리 주변 도로 문제라고는 하지만 성벽의 좌우 비대칭이 해도해도 너무 심한 비대칭인 것. 화재 이전 성벽 없이 숭례문 단독으로 서있었을 때의 장엄한 대칭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소수이지만 오히려 이런 비대칭미가 낫다는 의견 또한 있다.

    그러나 수원화성의 경우에 도로 위로 성벽을 육교 형식으로 만들어 복원한 사례가 있고, 한양도성의 성곽들 역시 전체적으로 복원중이라 숭례문 서쪽 성곽도 곧 복원될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 상세한 복원공사 내용은 KBS 다큐멘터리 '숭례문 1911일의 기록'을 참고.

  • 2013년 10월 숭례문 단청 20여 곳이 벗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문화재청에서는 색을 밝게하기 위한, 일종의 배경색인 호분(흰색)을 너무 짙게 발랐고 또 그 위에 주색을 칠했더니 무거워져 전통안료인 아교로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박락(剝落, 나무 등에 새긴 그림이나 글씨가 오래 묵어 긁히고 깎이어서 떨어짐) 현상이 일어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니까 파운데이션을 너무 발라 화장이 떨어진.. 아무래도 아교가 합성안료보다 약해 일어난 현상으로 보인다. 합성안료의 경우 녹색위에 바로 주색을 칠해도 색이 잘 나오지만 전통안료는 잘 나오지 않는다. 아마 이런 자잘한 사고는 앞으로도 자주!일어날 것으로 보이는데, 전통기법으로 복원하는 것이 옳긴 하지만 이미 전승이 끊긴 방법으로 무리하게 복원을 한 측면도 있다. 일례로 문화재청에서는 녹생 안료의 원석인 공작석을 힘들게 구해왔다고 홍보했지만 공작석을 받아든 단청장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며 오히려 신기해했다고(...).

  • 이 항목 본문에 언급되어있는 문화재전문가 황모씨는 라디오에서 전통 기법이었으면 안료가 나무에 스며들어 떨어지지 않는데, 일본식 안료를 써서 그랬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위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채색기법은 기본적으로 광물성 안료를 붙이는 것이다. 다만 그 안료나 붙이는데 사용하는 재료가 무엇인지(예를 들어 아교나 계란노른자)에 따른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항목에 언급된 것처럼 전승이 제대로 되지 않은 기술들을 전통에 집착해서 무리하게 적용하다가 생긴 불상사인거지....... 숭례문 부실 복원 논란이 한창 거셀 때의 일로, 사실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논란을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사실확인을 떠나서 명색이 문화재 전문가라는 사람이 제작 기법을 이렇게 몰라서야.....

  •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숭례문의 1층과 2층의 기와는 물론 현판마저 변색되고 성벽에서 녹물이 흐르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기와가 금이 가거나 깨질 정도였다.기사 총체적 난국

4.5. 사건의 파장

당시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은 이 일로 자리를 내려와야 했다. 문화재청에서 직접 관리하는 문화재의 수는 극히 적다(궁궐과 왕묘 정도). 문화재청 예산이 4천억 정도고 국내 문화재 개수는 다 합치면 대력 2만여개. 그래서 문화재청은 각 지자체에 방어 계획을 짜주고 지자체에서 돈을 내게 되어있다. 그런데 이런 곳에 누가 돈을 쓰고 싶을까. 하다못해 서울시장쯤 되는 큰 사람은 문화재청장보다 사실상 강한데... 그래서 유홍준은 문화재청장으로 있던 당시 1문화재 1지킴이 운동을 벌이고 스폰서로 KT를 써서 전국 문화재에 무인경보시스템을 돌렸다. 그러나 특별대우는 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결과는...

사건당시 파장이 엄청났다. 모든 언론의 탑기사로 숭례문 화재를 내세웠으며 외신에서도 비중 있게 다뤘을 정도. 전소 당시 많은 구경꾼(...)들이나 언론사에서 찍은 동영상을 보면 붕괴가 됐을 때 비명소리가 들려오는데 이건 무섭거나 놀라서가 아니라 진짜 안타깝고 아쉬워서 내는 소리였다. 심지어 현장에서 우는 사람들도 있었고 뉴스를 보며 눈물을 흘린 사람들도 꽤 됐다. 전소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등 웬만한 유명인 추모식을 방불케할 정도였다. 다만 이건 숭례문이 친숙한 일상의 하나였던 서울사람의 경우고 타 지역사람에겐 나라의 큰 유물이 불에 탔다는 큰 충격이긴하나 감정이입하며 울 정도까진 아니었다. 근데 방송사도 기자도 시민도 다 서울사람뿐이라

일부 환빠 커뮤니티에서 "사대주의 조선 왕조의 유물이 사라진다" 며 숭례문 전소를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한 개독교인이 미주 중앙일보에 투고한 "NO 숭례문복원 NO 우상망국" 이라는 칼럼은 우상숭배의 상징인 숭례문 복원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 수많은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다. 서태지는 숭례문 전소를 보고 'COMA' 라는 노래를 제작했다고 한다.

뉴스 방송사 YTN은 사옥이 숭례문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어서 어느 언론보다 빨리 사건을 보도할 수 있었다. 대신 숭례문의 잔해가 보이는 배경을 화면에 비추기 애매하게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제대로 된 가림막을 설치하기 전 까지 숭례문을 비추지 않았다.


일본아사히 신문은 2월 14일 "남대문 화재-한국의 슬픔을 생각한다(南大門炎上―韓国の悲しみを思う)" 라는 사설을 게재했다. 1950년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복원한 교토의 금각사(킨카쿠지)를 생각하면 남의 일 같지가 않으니 이웃 나라의 슬픔에 마음을 담아 협력할 방법을 찾아보자는 내용.

MBC 무릎팍도사에서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유홍준 교수(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가 나와서 "숭례문의 운명과 나의 운명은 오버랩이 됐다. 내가 아무리 문화유산에 대해서 잘했다고 할지라도 국보 제 1호 숭례문 화재 시절에 문화재청장이었다는 것은 죽고 난 다음에도 기록에 남을 것이다" 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4.5.1. 숭례문 괴담

sungryemun2.jpg
[JPG image (Unknown)]


숭례문 붕괴 이후 위의 정도전이 "숭례문이 전소하면 도읍과 나라의 운이 다한 것이니 멀리 피난을 가야한다" 라는 말을 실록에 남겼다는 풍수 괴담 짤방이 돌아 사회 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Dcinside의 모 회원이 창작임을 밝히고 만든 짤방이 와전되어 퍼진 소문. 게다가 상술되었듯이 이 사건에서 숭례문은 전소가 아니라 반소되었다.

무엇보다도 정도전의 정치적·철학적 성향에 비추어보면 저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정도전이 아니라 사명대사같은 사람이었으면 더 그럴듯 했을텐데
정도전은 유학 이외의 가르침은 일체 배격했으며 당연히 땅의 기운이 어떻다느니 하는 얘기도 전혀 믿지 않았다. 태조 임금이 도읍을 옮기는 문제에 대하여 재상들의 의견을 물었을 때에는 "신은 음양술수 그런 거 모릅니다. 그러나 중국 역사를 살펴봐도 천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나라를 다스리는 건 땅이 아니라 사람에게 달린 것입니다. 지기의 성쇠 어쩌고 하는 건 자기네들이 생각이 있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옛날 사람들이 그렇다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겁니다. 술수하는 자 말고 선비의 말을 들어 헤아리십시오" 라는 상소를 올려서 도읍을 옮기는 데에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천도가 결정되자 도시 설계에 큰 역할을 담당한 것도 사실.

풍수상으로 숭례문이 광화문의 해태상과 숭례문 옆에 있었던 남지라는 연못(서울역 인근 서울스퀘어 터에 있었다)과 함께 경복궁의 화기를 막는 비보수단으로 만들어졌고 숭례문의 현판이 세로인 것도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한 게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남지는 도시계획으로 없어지고 해태상은 광화문 복원 작업으로 치운 지금 숭례문까지 없어져서 관악산의 화기가 청와대로 바로 간다는 소리는 있다. 여기서 화기는 단순히 불의 기운이 아니라 전쟁이나 재앙과 같은 살(煞)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사실 조선시대 기준으로 한 나라의 대문이 전소될 지경이면 수도가 점령상태 혹은 총체적 무질서 대혼란 상태이므로 도망가야 하는 것은 상식일지도 모른다(...).

4.5.2. 숭례문, 복원 후...

화재 이전 숭례문, 화재 당시 모습, 복원 이후 숭례문의 모습 비교는 여기서 볼 수 있다. #

복원 후에 심하게 훼손되어 국보 1호의 가치가 사라져 지금이야 그렇지 100년, 200백년 지나고 후손들은 역사적인 유물로 생각할 것이 분명한데. 당장 경복궁도 대원군 집권 때 건축한거니 200년도 안된 건데국보 2호나 보물 1호, 혹은 불국사에게 그 자리를 넘겨줄 거라는 추측이 있었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고 불국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되어 있기도 하니까 불국사에게 그 자리를 넘겨줄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사실 국보의 번호는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이 그저 등재된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진 것이다. 가치의 차등보다는 일종의 일련번호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게다가 한 번 결번이 되면 다시 쓰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감히 누가 국보 1호를 지울 수 있겠냐는 것이 문제. 그리고 사실 불국사야말로 숭례문보다 더 심한 폐허에서 복원된 사례이며 현재 복원된 숭례문 자체도 1층 부분과 석축 부분은 많은 부재들이 보존되었다는 점에서 숭례문은 이변이 없는 한 국보에서 내려오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는 숭례문과 함께 한양도성 일부를 복원시키는 작업을 진행중이며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중이다.#

복원이 끝나 개방이 되고 나서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주말에는 바글바글 사람들이 몰려와서 숭례문을 사진에 담고 숭례문 안내를 듣는 등 활기가 넘친다.

4.5.3. 숭례문 부실 복구 및 재시공 통보

복원된 지 5개월쯤 경과한 2013년 10월초 단청이 벗겨져 있는 것이 발견되어 부실 복구가 아니냐는 논란이 나왔다.

좀더 자세한 조사를 위해서 문화재청은 숭례문 종합점검단을 구성하여 종합적인 현장 확인을 하고, 원인 분석 및 향후 대책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현장 확인 결과, 단청의 벗겨짐 뿐만 아니라, 기와가 깨져 있고, 현판이 금가 있는 등 다수의 하자가 발견되었다.


단청에 제대로 된 아교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나왔다.


덜 말린 부실 목재를 사용했다는 .의혹도 나왔다

결국에는 부실복구 특별조사에 감사원 감사청구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보 1호를 부실공사하다니, 충공깽 그 자체.변영섭 문화재청장은 부실복구에 대한 책임으로 전격 경질되었다.

숭례문 복원공사가 부실로 이어진 것은 “공기(工期)를 맞추기 위해 서둘러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공기를 하루 초과할 때마다 1670만원의 지체금을 내야 해서, 부실공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다.

한편 복원과정에서 사용된 목재가 일부 빼돌려졌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 의혹에 대한 경찰수사가 시작되었다. 추후 조사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14년 1월 18일, 숭례문 부실공사 관련 검증조사를 했던 충북대학교 박원규 교수가 학과사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의 조사결과 자살로 결론이 난 상태이다.

2014년 3월 4일 숭례문 목재가 러시아산이 아니라는 뉴스가 나왔다.

2014년 5월 15일 감사원이 감사결과발표를 통해 복구 부실내역을 발표했고 문화재청에 재시공 통보했다.


2014년 9월 9일 SBS 에서 전문가와 함께 내부를 점검했는데, 재앙수준이라고 평가했다.

5. 역사

  • 1395년(조선 태조 4년) - 숭례문 시공
  • 1398년(조선 태조 7년) - 평도공 최유경선생이 준공.
  • 태종의 맏아들이던 양녕대군이 숭례문 현액을 씀.
  • 세종 30년(1448년)에 '신작'이라고 칭할 정도로 개축했으며, 성종 10년(1479년)에 중수.
  • 1592년 5월 3일 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남대문으로 진입,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함정일까봐 여러 번 정탐병을 보낸 후 조심스레 흥인지문으로 서울 진입. 이때문에 일제강점기에도 흥인지문과 숭례문은 헐리지 않을 수 있었다.
  • 1907년 - 일본 황태자(뒷날의 다이쇼 텐노)가 방한하자 일제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 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서울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다.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 1916년 - 고적급유물보존규칙 공표.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 1924년 -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함.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없었다.
  • 1933년 8월 9일 - 제령 제6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공포
  •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남대문을, 보물 2호로 동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
  • 1962년 - 한국 정부는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해서 남대문을 국보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을 국보 2호, 동대문을 보물 1호, 보신각종을 보물 2호로 각각 지정
  •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 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되었다.
  • 1996년 11월 - 국보 1호 변경 주장이 이슈가 되어 문화재관리국이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서울대가 자체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하였다. 서울 시민 1,000명 중 67.6%가 변경에 반대했다. 문화재전문가 144명(문화재위원 49명,전문위원 95명)의 59.2%가 변경에 반대했다. 반면 서울대 학부 및 대학원생 262명 중 57%(150명)가 변경에 찬성했다. 변경 찬성 대답자들은 [[훈민정음][을 1위로 지지했다.
  •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했다. 불허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 2003년 -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서울 성곽의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 10m씩 복원했다.
  • 2003년 9월 - 일제는 돈의문 등 조선의 왕성인 궁궐과 성곽을 항일의 상징으로 보고 철저히 파괴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을 열고 지나갔으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을 열고 지나갔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보존했다고 200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 일본 도호쿠대 특별연구원이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인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 평양성 일대에 현존하는 현무문과 칠성문, 보통문, 모란대, 을밀대, 만수대 등도 모두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승리한 것과 관련되는 유적이라 해서 고적으로 지정돼 보호받았다고 한다.
  • 2005년 5월 27일 - 숭례문 주변을 광장으로 단장함.
  • 2005년 11월 - 감사원은 국보 1호를 변경할 것을 문화재청에 권고했다.
  • 2005년 11월 -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국보 1호 변경에 찬성했다.
  • 2006년 3월 1일 - 1907년 일제에 의해 출입 금지된 숭례문이 이명박 서울시장에 의해 99년만에 일반에 개방이 결정되어 3월 3일부터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 2008년 2월 11일 - 방화로 인한 화재로 붕괴하였다.
  • 2013년 4월 29일 - 숭례문 복원 완료. 정식 개방행사는 5월 4일.
  • 2013년 10월 - 숭례문 부실복원 논란.

6. 숭례문에 얽힌 사건들

  • 1991년 8월에는 만취한 50대 남성이 훔친 승용차를 몰고 숭례문의 철제 출입문을 들이받았다.
  • 1997년 2월에도 만취한 30대 남성이 일본인 관광객 2명과 함께 숭례문의 통제구역에 침입했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7. 숭례문 수문장 교대식

전소하기 전날까지 숭례문을 지키는 사람(수문장)을 교대하는 의식을 보여주는 행사를 했다.

DSC_5780.jpg
[JPG image (Unknown)]

DSC_5782.jpg
[JPG image (Unknown)]

DSC_5785.jpg
[JPG image (Unknown)]


저녁때쯤 철수했다고 한다.
철수하지 말고 계속 지켰어야 했다

8. 다른 매체의 숭례문

비행 FPS게임 디센트 시리즈(1번 항목) 3번째 작품의 서울 미션에서도 등장한다. 문제는 제작진이 상상하는 서울의 이미지가 실제와는 달리 살짝 왜곡(?)되었다는 거지만... 한글 간판도 등장하고 서울 느낌을 내려는 노력은 있었다.

레이싱게임인 그란 투리스모 시리즈(그란투리스모4(PS2)/그란투리스모(PSP)) 서울 코스로 나온다. 숭례문에 바짝 붙어 코너를 돌다가 갑자기 뭔가 들이받치는 현상이 있으니 주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다르나서스 정문에는 숭례문과 똑같이 생긴 오브젝트가 있다.

괴혼시리즈 중 '데굴데굴 쫀득쫀득 괴혼' 에서 붙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근처 지형은 서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에이지 오브 코난에서 퀘스트로 '파괴된 숭례문 복구' 를 한다고 밝혔다.

야채부락리의 마을맵중 하나로 나온다. 거기다가 몬스터로는 방화범(...)이 나온다.

숭례문 복원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백괴사전에서는 숯례문 이라는 항목명으로 등재돼 있었다(...). 숭례문 복원 공사가 완료된 후에는 다시 "숭례문"으로 환원되었다.

남성 듀엣 바이브 4집에 숭례문 방화사건을 모티프로 한 '숭례문'이 수록됐다. 남성 테너와 여성 소프라노까지 기용한 나름 웅장한 곡. 사실 전주 부분만 바이브가 부르고 성악 파트가 훨씬 많다.

kimgabul1.jpg
[JPG image (Unknown)]


아랑전설2에서 최초의 외국 게임 속 한국인 캐릭터김갑환의 스테이지에 최초의 한국 스테이지로 등장했다.뒤쪽에 삼성생명이 보인다. 신한은행은 왜 없는거지압권표정으로 싸움구경하는 모녀는 왜 있는거지

레고 아키텍쳐로도 출시되었다. 품번은 21016.

9. 찾아가는 방법

수도권 전철 4호선 회현역서울역(지하철)에서 약 400m 정도 걸으면 도착한다. 버스의 경우 옛 YTN타워 앞의 정류장이나 숭례문 정류장에서 정차하는 버스가 많으므로 이 것을 이용하면 된다.
----
  • [1] 1904년부터 1908년까지 일본군의 조선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교통 장애를 이유로 숭례문 제거를 추진하였다. 당시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가 "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빠져나간 문입니다. 조선출병(임진왜란) 당시 건축물은 숭례문 외에 몇 남지 않았는데, 파괴하는 것은 아깝다"고 설득했고, 이에 하세가와가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오타 히데하루의 논문 <근대 한일 양국의 성곽 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 정책>에 실려있다.
  • [2] 덕분에 '일본 건국 기념일에 불탔다'는 말이 돌았다.
  • [3] 사실 전통 건축물에서 기와가 자연히 흘러내리면 사실상 붕괴된 것이나 다름 없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기와가 흘러내린다는 것은 각재와 기와 사이가 화재로 상실되었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건조물이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통 기와가 흘러내리기 시작한 후로부터 거의 즉시 건조물이 붕괴됨을 고려할 때, 숭례문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화재를 버틴 것이라 할 수 있다.
  • [4] 제와장이 기와를 굽는 장인이라면 번와장은 그 기와를 가지고 실제 시공을 하는 장인을 뜻한다.
  • [5] "숭례문에 '복원'된 용 그림이 화제군요"라며 "용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건, 십중팔구 '단가'일 겁니다. 디즈니 캐릭터 같은 이 용이 '가격' 중심문화의 상징인 셈이죠"라고 썻다가 이후 "복원 기준으로 삼은 건 1963년의 용 그림이라는데, 참고하세요. '단가' 관련 트윗들은 지우고 당사자에게 사과드립니다"라는 트윗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