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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last modified: 2019-04-11 17:32:07 Contributors

이 항목은 히로히토로도 들어올 수 있다.

Contents

1. 일본의 연호
1.1. 용례
1.2. 미디어 매체에서의 쇼와
1.3. 쇼와 시대의 인물들
2. 덴노 히로히토
2.1. 소개
2.2. 전쟁 책임
2.2.1. 방관자였는가?
2.2.2. 꼭두각시였는가?
2.3. 죽음
2.4. 다른 나라와의 관계
2.4.1. 한국과의 관계
2.4.2. 미국과의 관계
2.4.3. 중국과의 관계
2.4.4. 네덜란드와의 관계
2.5. 기타
2.6. 가족관계
2.6.1. 자녀들
2.6.2. '악독한 시어머니'였던 어머니와 아내


1. 일본의 연호

일본의 역사
다이쇼 시대 쇼와 시대 헤이세이 시대

일본덴노 히로히토가 재위하고 있을 때 사용했던 연호.

한자로 적으면 昭和, 한 글자(2바이트)로 압축하면 . 통용 표기로 '소화'. 쇼와 원년이 서기 1926년이다. 1926년 12월 25일까지는 사실상 다이쇼 15년이었고, 1926년에 쇼와 원년이라는 연호가 쓰인 것은 며칠 되지 않는다.

의미는 빛나는 일본.《서경(書經)》 요전(堯典)의 '百姓明, 協萬邦 (백성이 밝게 드러나고 만방이 화목하게 되었다)'에서 유래했다.

1.1. 용례

서기 1989년(쇼와 64년)에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하고 그의 장남 아키히토 덴노가 즉위하여, 연호는 헤이세이로 교체되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쇼와'는 흘러간 옛날 것을 뜻하는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한국에서의 쌍팔년도와 같은 쓰임새다.

  • 사례 1 - 식신의 성 시리즈의 주인공 쿠가 코타로가 아버지에게 불평할 때 "쇼와 태생 주제에!"라고 말하곤 한다. 국내로 따지면 '쌍팔년도에 태어난 주제에!'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 사례 2 - 엔카 가수 이시카와 사유리의 히트곡 〈쇼와의 꿈꾸는 제비(昭和夢つばめ)〉에는,"우리들은 쇼와 시대에서 날아온 제비들이지요(私たちは昭和から飛んできたつばめなのね)"라는 나레이션이 나오면서 그 시대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는 정서를 표현한다.
  • 사례 3 - 1989년은 해의 첫 7일간만이 쇼와 64년으로 1월 8일부터 헤이세이 원년이 된다. 덕분에 많은 곳에서 새해 1주일만에 달력 등을 새로 장만해야 해서 인쇄업자들만 득봤다. 민폐 쩐다. 일본의 대학가에서는 헤이세이 연도에 태어난 대학생들이 1989년 1월 1일에서 7일 사이에 태어난 다른 학생들을, 비록 서력으로는 출생연도가 같더라도 쇼와시대의 아저씨, 아줌마라고 놀리는 경우가 있다. 비슷한 케이스로 마지막 국초딩세대가 있다. 1989년 항목 참조. 쇼와 원년(1926년)과 64년은 7일밖에 안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 사례 4 - 1989년 1월 7일 이전에 발급한 공문서, 엽서, 각종 증명서 등에 발급된 곳에 있는 유효기간, 공사장 안내판의 공사기간 등의 날짜표기를 보면 1990년, 1991년이 쇼와 65년, 쇼와 66년 등으로 표기되어 있기도 했다. (쇼와 65년과 헤이세이 2년 표기 엽서, 유효기간 날짜가 쇼와66년으로 표기된 운전면허증, 공사기간의 날짜가 쇼와69년까지로 표기된 공사장 안내판)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지금도 어르신들에게 옛날 일을 물어보면 '소화 몇 년'이라 말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소설 〈비명을 찾아서〉의 부제는 대놓고 "경성, 소화 62년(1987년)"이다. 이 작품에서 쇼와 덴노는 늘그막에 직접 쿠데타를 추인하는 방송을 하는 굴욕을 겪는다. 때문에 당시에 간행되어 지금까지 국내에 남아있는 서적에는 끝부분의 판권지에 있는 소화 간행연도가 먹칠로 지워지거나 칼질로 도려진 흔적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때 세워진 비석을 봐도 역시 건립연도를 깎아내서 없애버린 것이 많다.

1984년 일본을 방문한 대한민국의 전두환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는 히로히토.
이때 일제 강점기에 대해 최초 사과 언급을 했다.

한국에게는 여러모로 아픔이 많은 시대지만 일본의 극우 세력에게는 영광의 시대 비슷하게 인식되는 시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행패부리다가 처참하게 깨지긴 했지만 대차게 전쟁 일으켜서 초반엔 잘 나갔고, 패전 후에도 경제대국을 건설하여 호황을 누렸던 시기이니. 사실 이 시기의 호황 덕택에 현재의 일본이 아직도 그럭저럭 경제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영광의 시대라고 생각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다. 위에서 말하는 소위 '영광'이라는 것이 제국주의를 기초로 한 주변 나라들의 피와 고통으로 누리게 된 것이니 문제이긴 하지만, 원래 제국주의 시절을 거쳤던 국가들은 대부분 그 시절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다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군부에 의해 지나치게 사회 분위기가 경직되었던데다 허구헌날 전쟁만 터지던 쇼와 시대보다는 다이쇼 시대를 훨씬 더 좋았던 시절로 여긴다고 한다.

쇼와 연호는 일본의 침략전쟁이 한창이던 쇼와 10년대가 1935년~1944년이듯 메이지와 함께 서력기원에 바로 대입해서 적용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나마 5년 단위로 딱딱 끊어지기에 쇼와 ↔ 서기 연도계산은 메이지다이쇼 시대보다 쉬운 편이다. 애초에 이건 일본만 해당하는 게 아니고 연호를 사용해온 동양사 전반에 걸친 문제다.

1.2. 미디어 매체에서의 쇼와

쓰르라미 울 적에를 플레이해본 사람이라면 지겹도록 들어본 연호이기도(쇼와 58년=1983년). 저때에 메이드 카페 같은 게 있는 건지 궁금해 하면 지는 거다(…)

교고쿠도 시리즈의 연호도 쇼와다. 쇼와 26년(=1951년).

안녕 절망선생은 쇼와 연호가 계속되는 현대라는 설정이다.전쟁에 회의감을 느끼는 아키히토 덴노를 본격 개무시 역시 극우 꼴통

용자특급 마이트가인의 연호도 역시 쇼와인데 쇼와 125년(굳이 옮기자면 2050년)이다. 장수만세, 사이보그 소와치

전쟁 후에는 어느 괴수급 인간이 '쇼와의 어둠의 제왕'으로 불리며 정제계를 지배했지만 어둠 속에서 강림한 도박의 정령에게 쳐발리고 사라졌다고 한다.

헤이세이 원년을 배경으로 하는 시마다 소지시키 타케시 시리즈 제11작인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에선 깐족대는 게 얄미워 죽겠는 주임, 주작의 달인 벤야마 경감, 일제강점기 가라후토에 끌려가면서 인생 망친 조선인 형제와 그 조선인 형제를 이용해먹고 나 몰라라하는 여러 일본인들을 보여주며 쇼와시대를 일그러진 시대라고 대차게 깐다.

그 외에 서브컬쳐에서 쇼와 시대 느낌을 내기 위해 쓰는 소품 중 특히 유명한 것이 기모노 위에 에이프런을 두른 종업원. 꼭 쇼와가 아니더라도 고풍스러움을 연출하기 위해 많이 차용한다.

영화 엠페러에선 종전 이후 천황제를 없애버리려는 맥아더에게 압박을 받는 모습으로 나온다. 문제는 단순히 천황제 폐지가 아니라 그 구실로 삼은 게 전범으로서 혐의 여부인데 와패니즈인 주인공에 의해 전범으로 혐의가 없는 게 확인되고 다 같이 평화를 추구하자는 결말로 나와 제대로 욕먹었다.

1.3. 쇼와 시대의 인물들

쇼와 시대에 태어난 인물들은 쇼와 시대/출생항목 참조.

2. 덴노 히로히토

일본의 역대 덴노
123대 다이쇼 덴노 124대 쇼와 덴노 125대 아키히토 덴노[1]

제호 쇼와 덴노 (昭和天皇)
이름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迪宮裕仁)
생몰년도 1901년 4월 29일 ~ 1989년 1월 7일 (87세)
출생지 일본 도쿄 아카사카 구 동궁어소
사망지 일본 도쿄 지요다 구 후키아게고쇼
재위기간 1926년 12월 25일 ~ 1989년 1월 7일 (62년 13일)
즉위식 1928년 11월 10일
장례식 1989년 2월 24일

"국제적인 반응이 상당히 걱정되오. 우리의 도덕성이 문제가 되겠지. 그러나 할 수 없소. 진행합시다. 전혀 상관없소. 나는 괜찮소."
- 인도차이나 진격을 허용하는 히로히토의 반응. '스기야마(杉山) 메모' 중에서

2.1. 소개

4월 29일생으로 이날이 전쟁 전에는 '덴노의 생일'이라는 의미에서 장절이라는 휴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후 식목일, 정확히는 '녹색(綠, 미도리)의 날'로 바뀌었다가 2007년 자민당, 공명당, 심지어 당시 야당인 일본 민주당의 합의로 '쇼와의 날'으로 재개정되어서 동북아 국가들에서 말이 좀 나왔다. 윤봉길이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킨 날도 바로 이 날이었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迪宮(미치노미야)라고 한다. 중국 황제들처럼 연호+(帝)같은 형식으로 표기를 만들면 '화제'(…)가 된다.

2.2. 전쟁 책임

패전 후 각지의 피해상황을 보고받을 때 시큰둥하게 "아 그래?" 혹은 "아 그렇습니까?" 이 말만 반복해서 빈축을 샀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 후 인간선언을 통해 자신이 신이 아닌 평범한 인간임을 선언하였다. 이후에는 입헌군주제로 전환된 일본의 국내 정치에 간여하는 일 없이 해양생물학을 연구하며 살았다. 주 연구분야는 말뚝망둥어. 쇼와의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도, 어려서부터 과학 과목을 좋아하고 생물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일단 직접적으로 전범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고 형벌도 받지 않았지만 법적으로는 엄연한 유죄이고 전범이 맞다. 다만 그 책임의 정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2.2.1. 방관자였는가?

더글러스 맥아더와 히로히토. 그야말로 1장으로 요약 가능한 태평양 전쟁 결과.
이 사진은 일본 언론이 알아서 보도하지 않았으나 미군정이 반드시 보도하도록 지시해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맥아더가 정복도 입지 않고 주머니에 손까지 찔러넣은 채 찍은 모습으로 "누가 대장인지" 깨닫게 해줘 사진을 보고 자살하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였다. 에드워드 베르가 쓴 책 "히로히토 - 신화의 뒷편"에 의거하면 이는 맥아더의 의도된 행동이었다고 한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던 도조 히데키는 전범재판 중 "천황의 의사에 반하여 개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한 일이 있다.

시다 유타카 교수가 쓴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 6권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따르면 덴노메이지 유신부터 최종승인을 할 수 있는 능동적 권한을 가졌고, 히로히토 자신도 전쟁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리였고 실제로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일례로 전시(戰時) 국정에도 직접 참여한 건 물론 작전 수립이나 시행에도 직접 참여했고 작전을 수정하게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일본에선 누구보다 전시상황을 자세히 파악했으며, 실제로 일본 육해군은 서로에게조차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 히로히토에게만큼은 그대로 보고했다. 한마디로 히로히토야말로 누구보다 전시상황과 일본군 전체의 막장실태를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소리이며 당연히 태평양 전쟁, 중일전쟁, 난징대학살, 731 부대, 일본군 위안부 등 각종 전쟁 범죄에 대해서도 전부 파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만행과 병신짓을 막거나 이후로는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놔뒀다. 더군다나 수많은 일본군 병사들이 태평양에서 히로히토의 이름을 외치며 죽어줄 정도로 신 취급을 해줬으니 분명 제재할 명분은 충분했으며, 히로히토 본인 역시 맥아더와의 회담에서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어떤 처벌이라도 받겠소."라는 뜻을 맥아더에게 전했다는 일화가 맥아더의 회고록을 통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덴노를 전범으로 처리하여 제재를 실행에 옮길 경우 일본인들의 역린을 건드려 엄청난 저항이 발생할 것이 우려된 데다, 덴노를 꼭두각시로 남겨 두는 편이 일본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미국 정부의 암묵적인 뜻으로 인해 전범이 되지는 않았다. 맥아더가 히로히토와 함께 사진을 찍은 의도 역시 '나는 히로히토를 지지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는 해석이 있으며, 실제로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보호하는 데 있어 가장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맥아더의 회고록에도 히로히토에 대한 악담은 단 한줄도 적혀있지 않고 오히려 '그는 일본 최고의 젠틀맨'이라는 식으로 치켜세우는 문장까지 있기도 하다.

결국 맥아더 사령부의 황족 전범재판 불기소 방침에 의해 전쟁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국가 운영에 관한 모든 권한 박탈과 전 재산 몰수 등의 조치를 받았고 '일본의 상징적인 국가통합의 상징' 지위만 남게 된다. 일본 헌법학계에서는 대체로 상징덴노제라 하여 현실적으로 일본 덴노가 국가원수로서의 특징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해도, 국정에 관한 권한이 없고 국가원수로서의 덴노의 지위에 대한 규정이 없으며 그저 일본국 헌법 제4조에 '국가통합의 상징'이라고만 명시되어 있으므로 덴노를 국가원수로 보지 않는다. 일본 역사에서 덴노는 오랫동안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유신 이전으로 원상 복귀된 셈이다.

일본 국민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무조건 항복으로 일본인 전멸을 막은 평화주의자'로 인식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덴노는 1945년 8월까지 일반인은 절대로 볼 수 없는 현인신이었기 때문에 그냥 존재감이 없었다. 실제로 19~20세기의 각국 황제나 국왕이나 대통령 등과 달리 덴노는 언론에 거의 노출되지 않았다.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신이 갑자기 '인간 선언'을 하며 전쟁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인 관계를 회복했다는 사실만이 일본 국민에게 보여진 현상이기 때문에 이 이벤트는 덴노에게 인간을 위해 지상으로 내려와 대신 희생한 신과 같은 이미지를 부여했고 결국 덴노는 실권을 잃은 대신 중대한 상징성을 획득해버렸다. 물론 덴노가 유신 이후 제국주의 시절에 저질렀던 온갖 만행들을 잊지 않고 그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현재의 일본인들이 과거의 식민 지배나 침략 전쟁에 대해 별다른 책임감을 못느끼는 것은, 패전의 수습 과정에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히로히토가 이런 식으로 가공의 이미지 뒤에 숨어버리고 그 과정에서 국민들에게는 '전쟁의 피해자'라는 이미지를 부여해버려서 가해자로서의 자신을 날것 그대로 인식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라는 얘기들이 일본 학계에도 많이 언급된다.

2.2.2. 꼭두각시였는가?

상술했듯이 꼭두각시였다는 설도 존재한다. 꼭두각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내세우는 근거는 분명 히로히토는 전쟁을 수차례 반대했음에도 도조 히데키는 전쟁 준비를 멈추지 않으며 히로히토를 계속 설득했다는 점, 그리고 전쟁을 도조가 주도적으로 이끄는 과정에서 히로히토가 도조에게 반감을 상당히 품었고 의견 충돌도 있었으나 결국 바뀐건 딱히 없었다는 점 등이 있는데, 사실 이러한 근거들로 도출해낼 수 있는 결론은 '도조가 정말 엄청나게 전쟁에 미친놈이였다'에 가깝지, 히로히토가 도조의 꼭두각시였다고 보긴 힘들다. 어쨌든 전쟁의 주도권은 도조에게 있었고, 도조가 워낙 막 나가다보니 히로히토와도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국가원수로서의 권한은 도조가 아닌 히로히토에게 있었으므로 히로히토는 전쟁을 멈출 힘이 없었던 게 아니라 이미 진행중인 전쟁을 멈출 생각이 딱히 없었던 것이라고 보는게 더 그럴듯하다. 도조 조차도 히로히토와 의견 충돌이 있다고 해서 대놓고 히로히토를 쌩까는 짓을 저지르진 않았으니 말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도조와 히로히토의 관계는 실권자와 꼭두각시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대립 관계였다고 보는게 더 가깝다. 도조 히데키 항목을 참조하면 왜 역사학자들이 히로히토가 아닌 도조를 히틀러, 무솔리니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은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도조야말로 일본 제국의 히틀러 같은 존재였으며, 전범으로서의 죄가 누구보다도 무겁다 = 히로히토는 무고한 꼭두각시일 뿐이였다 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요약하자면 일본 제국의 전범 중에서 가장 죄가 무거운 인물은 전쟁을 일으키고 주도적으로 이끈 도조가 맞지만, 국가원수로서 전쟁을 허가하고 방관한 히로히토 역시 죄가 무겁다는 것이다. (이것은 히로히토 본인이 직접 인정한 사실이다.)

2.3. 죽음

NHK에서 히로히토 덴노 사망 2분후에 방송한 내용. 내청장이 사망 전인 오전 4시의 덴노 상태를 발표하는 내용과 임시뉴스
NHK에서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한 지 1시간이 지난 후에 방송한 내용. 궁내청장이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한 것을 발표한 내용과 관련 임시뉴스. 덴노가 사망한 것을 알릴 때는 "천황폐하 붕어"(天皇陛下 崩御). 위 2개의 동영상에서 나오는 궁내청 장관은 지모리 쇼이치.
히로히토 덴노 사망 당일과 헤이세이 시대로 넘어가기 전날부터 나온 MBC 뉴스데스크 관련보도. 당시 관방장관인 오부치 게이조가 헤이세이 연호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장면도 나온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방송 화질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심지어 1988년 가을부터 히로히토 덴노가 위독해지자 일본의 모든 행사와 콘서트, 총리의 해외일정이 취소되고 전 일본이 숙연해져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해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 세이부 라이온스는 3년 연속 우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축하연 없이 조용하게 묻혔다. 안습 또한 광고계에서는 '건강하세요', '멋진 인생', '드디어 그날이 온다' 등의 멘트가 사라졌다. 역시 덴노의 심기를 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언론에서는 이 분위기를 선도하여 모든 기사를 황실의 동향파악에 집중하고 덴노가 매일 어느 정도의 맥박을 유지하는지까지 일일히 기사화했다. 1988년 9월 21일자 영국황색언론 더 선에는 악마지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당시 니혼 TV에서 방송한 덴노의 상태와 관련된 특별뉴스) 일본 전역은 자숙이라는 명분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했으며, 연일 천여 명의 사람들이 덴노가 머무는 도쿄 황거에 몰려들었다. 패전 후 인간선언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의 심리 내면에 덴노에 대한 숭상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이 위독 상태가 해를 넘겨서 오래 끌자 덴노의 사망 당일에는 일본에서는 일부 극우 노친네들이 황거 앞에서 울어제낀 것을 제외하고는 차분했다. 오히려 정규방송이 안 나온다고 방송국에 항의 전화가 빗발칠 정도. 정규방송이 빠지고 추모방송이 주구장창 나오다보니 생긴 일인데 당연히 재미있을 리가 없으니. (…) 그래서인지 비디오 가게의 매출이 상승했다고. 이 시기의 웃긴 일화로는 언제 쇼와 덴노가 죽는가 가장 빨리 알아내기 위해 황거 근처에서 거의 노숙을 하던 한 기자가 있었는데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야말로 노숙자 몰골이 되었다. 그런 꼴을 한 기자 옆을 지나던 한 어린이가 옆에 있던 어머니에게 "저 아저씨는 뭐야?"라고 물으니 어머니가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되는거야."라고 대답하는 걸 들었다고. 지못미.

쇼와는 죽기 직전에 일본의 몇몇 역사학자들과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심지어는 아메리카, 유럽 국가들에 대해서도)에게 전쟁 책임에 대한 사과를 남길 것을 요구받았다.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일제강점기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혔고, 중국의 덩샤오핑을 만나 중일전쟁 당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사과의 뜻을 밝혔으나, 양쪽 다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아서 아는 사람은 많지 않고,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지극히 형식적인 사과 같았다며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꽤 있다. 일단 상술했듯이 패전 후에 자진출두하여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으려 했던 것과, 나중에 인터뷰에서 여태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로 전쟁을 허가했던 것을 꼽은 것,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들을 합사하는 것을 반대한 것 등을 보면 일단 일본 제국 시절에 대한 죄책감이나 후회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해국들의 비난과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고, 쇼와 본인 역시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 나이 서른이었던 1932년이봉창 의사가 던진 폭탄에 맞아서 골로 갈 뻔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폭탄 2개 중 하나는 잘못 던져지고 하나는 불발이 되어 실패. 당연히 이봉창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당했다.

참고로 소설 13계단에 따르면 쇼와가 위독해지자 전 교정기관의 사형 업무가 중지되었던 적이 있다. 쇼와가 사망한 뒤 특별사면이 이뤄질 것을 고려한 결정이었는데, 이 와중 최고재판소에서 사형 여부를 다투던 일부 사형수들은 상고를 취하하여 사형을 확정시켜 버렸다. 최고재판소에서 감형될 가능성보다 특사로 감형될 확률이 높다고 보고 도박수를 던진 것이다. 그 이유는 판결이 확정된 피고인만이 특별사면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한국도 같은지 추가바람) 결국 특사가 내려지긴 했는데 대상은 생계형 사범 등 애매한 경우만이 해당되었고. 그 결과 사형수들은 스스로 자신의 명을 단축시켜 버리는 비극이 발생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사형수의 사면은 사실상 전무했고, 감형도 1975년 이후로 전혀 없었으며 사형을 면한 경우는 모두 2심에서 정상참작사유 발생 등을 이유로 무기로 감형된 자들이었다.

2.4. 다른 나라와의 관계

2.4.1.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는 사실상 악연이 깊을 대로 깊은 관계로 일제강점기의 폭정과 억압통치로 상처와 비극을 그리게 하였고, 일제강점기 말기 때 제2차 세계대전에도 개입하면서 무고한 조선 청년 및 처녀들을 학도병정신대,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징집시키면서 역사적으로 이들에게 생지옥으로 인도한 악한으로 낙인찍혀 악평을 받아왔고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주범으로서 남북한 모두에게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러한 제도를 실시한 원흉은 당시 총독이였던 고이소 구니아키였지만, 쇼와 역시 이를 허가했으니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천하의 개쌍놈스러울 수 밖에 없다.

재임 시절 대통령 전두환이 방일(訪日)하여 쇼와를 만난 적이 있었지만 정작 쇼와는 역대 덴노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을 방문한 사례나 경험이 없다. 그 이전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때에도 방한한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이쇼 덴노가 왕세자 시기에 방한한적은 있다. 사실 본인이 방한을 하고 싶어도 한국 애국단체와 순국선열단체들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와 같이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대만에는 과거에 쇼와가 방문했던 적이 있으며, 타이베이 인근 신베이터우 온천에는 그가 이용했던 탕도 남아있다.

2.4.2. 미국과의 관계

지금이야 2차 세계대전에서 양국이 서로 치열하게 싸웠던 적대심이 사그라드는 추세이고 특히 중국의 견제를 위해서 미국과 일본이 서로 연합을 하는 구도가 나오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미국과 일본은 엄연히 태평양 전쟁을 하며 일본군미군 포로들을 지나치게 학대한 사실이 있어 미국의 중장년층 세대들은 반일감정이 꽤 남아있는 편이다.

2.4.3. 중국과의 관계

중국은 비록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지만,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으로 인해 중국에게도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도 히로히토를 비난하는 여론은 여전하며, 일본 덴노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음은 물론이다. 일단 지금의 아키히토 덴노는 개념 행보 덕분에 딱히 비난 받지 않는 편이지만 히로히토는 중국의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알리바바 그룹 등에서 여전히 비난받는 것은 물론이고, 간혹 도조 히데키를 제치고 히틀러, 무솔리니와 함께 악마로 취급받는 경우까지 있다.

2.4.4. 네덜란드와의 관계

예로부터 네덜란드와 일본은 에도 시대부터 활발한 교류를 하여 양국간의 적대심은 그닥 심하지 않다. 하지만 최근에 네덜란드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까지 밝혀지면서, 네덜란드인에게도(한국이나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71년 히로히토가 아내 나가코 황후와 함께 네덜란드를 방문하자 격렬한 항의 시위가 있었다. 네덜란드 노병들과 전사자의 유족들이 "일본 왕을 전범 재판에 회부해라!!", "일본 왕이 죽인 내 아버지를 살려내라!!", "살인마는 네덜란드를 떠나라!!"라는 항의가 빗발쳤고 일장기 소각, 보온병과 돌팔매가 날아들어 수행원들이 거의 죽어나갔다.

2.5. 기타

근대 이후 대영제국빅토리아 여왕(1819~190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와 함께 80세 이상을 살고 60년 이상을 즉위한 세 군주 가운데 하나. 재위기간은 프란츠 요제프 68년(86세), 빅토리아 64년(82세), 쇼와 63년(88세). 그런데 사실 이보다 좀 더 앞선 시대에 한명 더 있는데, 청나라고종 건륭제(1711~1799)로, 무려 89세까지 60년(!)을 재위했다. 게다가 이것도 자신이 강희제보다 오래 재위하기 싫어서 자진 퇴위한 것이고, 상황 재위기간을 더하면 64년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현존 인물 가운데는 태국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있다. 2014년 기준으로 87세에 68년간 재위했다. 조만간 근대 이후 최장수 군주(빌헬름 1세, 만 91세)를 경신할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 2세 역시 89세로 60년 기록을 넘겼으며 2014년 부로 쇼와보다 장수한 군주가 되었다.

일설에는 1945년 9월 27일, 더글러스 맥아더도쿄에 진주한 지 1달 동안 히로히토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없자 제발이 저린 히로히토가 직접 '출두'해 찍은 사진이 2장이며, 히로히토가 90도로 허리를 꺾어 맥아더에게 굽신거리는 사진이 있으나 일본 측의 방해 공작으로 찾기 힘들어 졌다는 떡밥이 있었다. 맥아더의 회고록이나 당시 함께 있었던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히로히토가 맥아더의 환영 인사에 '감사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여 답했다는데, 이 얘기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히로히토가 90도로 허리를 숙여가며 굽신거리는 사진이 찍혔다는 증언은 없었으며, 애초에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엄연히 한 나라의 군주로 대해주며 그에 걸맞는 예의도 갖췄다고 한다. 위에 나와있는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사실은 맥아더 특유의 허리 펴기(…) 자세 때문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지만, 맥아더의 회고록을 보나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보나 맥아더는 분명히 히로히토에게 충분한 예의를 갖췄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로 잘 알려져 있는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는 1931년 6월에 철근 콘크리트로 세워진 '부용교'란 다리가 있는데, 지어진 때가 쇼와 6년이라 흔히 소화다리라고 불린다. 태백산맥의 등장인물 '소화'와는 전혀 관련없다. 소화다리의 '소화'는 쇼와의 한자표기인 昭和를 한국식으로 읽은 것. 그러니까 소화다리를 건넌다는 것은 쇼와를 짓밟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많이 건너두자

2.6. 가족관계

다이쇼 덴노와 데이메이 황후(사다코)의 4남 중 장남으로 출생, 아내 고준황후(나가코)와의 사이에서 2남 5녀를 낳았다.

2.6.1. 자녀들

  •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照宮成子) 내친왕(1925.12.6-1961.7.23): 어머니 나가코 황후의 숙부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의 장남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모리히로(東久邇宮盛厚) 왕과 결혼, 3남 2녀를 낳았다. 다이쇼 덴노가 생전에 본 유일한 손주이기도 하다. 패전 후 평민 신분으로 떨어졌고(신적강하), 만 35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어 히로히토 덴노와 나가코 황후 내외는 큰 충격을 받았다.

  • 차녀 히사노미야 사치코(久宮祐子) 내친왕(1927.9.10-1928.3.8): 병으로 요절. 나가코 황후는 직접 밤을 새워가며 간병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기였던 사치코 공주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고, 슬픔에 잠긴 나가코 황후는 한동안 아기와 같은 크기의 베개를 끌어안고 지냈다고 한다.

  • 3녀 다카노미야 카즈코(孝宮和子) 내친왕(1929.9.30-1989.5.26): 다카츠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와 결혼. 자녀는 없다. 남편 도시미치의 불륜과 사망으로 과부가 되었고, 강도까지 당했다. 그후 친정인 황실에 돌아와 이세신궁의 제관을 맡아보며 살다가, 아버지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뒤따르듯 죽었다.

  • 4녀 요리노미야 아츠코(順宮厚子) 내친왕(1931.3.7-): 이케다 다카마사(池田隆政)와 결혼. 자녀는 없다.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했고, 거의 말이 없고 과묵한 성품이라고 한다.

  • 장남 츠구노미야 아키히토(繼宮明仁) 친왕(1933.12.23-): 평민 쇼다 미치코와 연애결혼을 하여 화제를 모았다. 나루히토 황태자를 포함한 2남 1녀를 낳았다.

  • 차남 요시노미야 마사히토(義宮正仁) 친왕(1935.11.28-): 어머니 나가코 황후가 고른 옛 화족 가문의 딸 츠가루 하나코(津輕華子)와 결혼하였고, 결혼 후로 히타치노미야(常陸宮)라는 궁호를 받았다.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은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기도 하다. 자녀는 없다.

  • 5녀 스가노미야 타카코(淸宮貴子) 내친왕(1939.3.2-): 어머니 나가코 황후의 외사촌 동생인 시마즈 히사나가(島津久永)와 결혼하여 1남을 낳았다. 히로히토 덴노와 나가코 황후의 딸 5명 중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간 인물로, 바로 위의 언니 이케다 아츠코와는 정반대로 활달하고 화려하며 떠들썩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한다.

2.6.2. '악독한 시어머니'였던 어머니와 아내

아내 고준황후(나가코)는 일본 막장 드라마를 현실로 찍었다. 큰아들인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려 할 때 우익 단체까지 동원해가면서 반대했다. 쇼다 미치코가 말이 평민이지 닛신(日淸) 제분이라는 대 재벌가의 장녀이며, 외가는 화족 소에지마(副島) 가문이기도임에도. 결혼 후에도 악독한 시어머니의 교과서가 무엇인지 아주 제대로 보여주었다. 미치코 황후시월드에게 어찌나 시달렸는지 1993년 10월 20일 만 59세 되던 해에 실어증으로 쓰러지기까지 했으며, 나가코 태후는 그 자신이 사망하는 순간인 2000년까지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미치코 황후를 괴롭혔다. 고만해 이 미친년들아

아이러니한 것은 나가코 황후 역시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에게 시집살이를 당했다는 것이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 사다코 태후의 시녀 다케야 츠네코(竹屋津根子)와 나가코 황후의 시녀 다케야 시게코(竹屋志計子)는 친자매였지만, 웃전들의 기싸움으로 인해 서로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다이쇼 덴노가 아직 살아있던 시절, 나가코 황태자비시어머니의 앞에서 너무 긴장하여 장갑을 낀 채로 젖은 수건을 짜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때 사다코 황후는 "너는 무엇을 해도 서투르구나!!"라고 시종들도 있는 앞에서 꾸짖었다고 한다.[2]

한편 고준황후의 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왕은 일본 육군 대장으로, 1928년 대만 시찰 도중에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의 의거로 상해를 입어 다음해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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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연호는 헤이세이지만 아직 사망하지 않았으므로 아키히토라고 부르는 게 옳다. 문서 참조.
  • [2] 장갑에 대한 악몽은 며느리 미치코 황후와 손자며느리 키코 비에게도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