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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일

last modified: 2015-04-13 01:09:18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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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소개
2. 독립운동
3. 대한민국 해군,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
4. 한국전쟁에서의 활약
4.1. 대한해협 해전
4.2. 인천상륙작전
4.3. 흑역사(...)
5. 전쟁 이후
6. 손원일급 잠수함
6.1. 가족 관계
7.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1. 소개

역대 해군참모총장
초대 손원일 - 2대 박옥규
대한민국의 초대 해군참모총장. 최종 계급은 중장. 1909년 5월 5일(음력) ~ 1980년 2월 15일.

대한민국 국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서울을 탈환한 뒤, 그의 명의로 내린 포고문.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대한민국 해군출신 첫 방부장관
한국군 낚시전설의 시작


2. 독립운동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1] 상해시절 상해에서 본 각국 해군들의 모습에 해방된 한국에도 그러한 해군을 건설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3. 대한민국 해군,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

광복 이후 귀국해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가 되는'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설했다. 해방 후 난립했던 여러 군사조직이 자기들끼리 등수놀이처럼 서로서로 먼저 생겨났다고 기싸움이나 하고 있을때, 손원일 제독은 국제적으로 한국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고, 북부의 소군정과 남부의 미군정으로 분할된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손원일 제독은 군정청에 직접 찾아가, 승인을 얻고 정식 군대로서 인정을 받게 된다. 현실을 인식하지 못했던 국군준비대를 비롯한 다양한 단체들이 1945년~1948년 사이에 그야말로 공중분해 된 것을 생각해 볼 때, 정세를 파악하는 시야가 정밀했다고 읽을 수 있다. 대한민국 해군이 해방병단의 전통을 이어받아 자주적으로 생긴 조직임에 비하면, 애석하게도 육군은 사실상 미군정의 국방경비대에 의해 '이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애초 군정청의 정식 명칭이 '재조선 미 육군 군정청'임을 감안할 때, 육군은 탄생부터 미 육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국군이 창건되었을 때, 육군공군은 주요인사가 옛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해군의 경우 창군 과정에서 일본 해군 출신이 적었다.
이유는 예상외로 간단한데, 옛 일본 해군의 폐쇄성이 때문이었다. 식민지 출신을 받아들였다가, 선상반란이라도 일어난다면...속이 시원하지 따라서 식민지 출신인 조선인은 일본 해군에서 육상근무만 시켰다. 전쟁 막바지에 가서야 파일럿으로 항공대에 받아들인 정도가 예외랄까.[2]
초대 국방장관인 이범석, 국방차관 최용덕[3]이 출신을 구분하지 않고 군 출신을 징집하다시피 끌어왔듯, 대한민국 해군 역시 신생군대에 필요한 군 경력자가 절실했다. 이에 따라 비록 육상근무를 했더라도 일본 해군 출신들 역시 해군의 일원으로 영입했다. 한동안 해군, 해병대에서 '병조(兵曹)', '오장(伍長)' 등 육/공군과 다른 계급이 쓰인 것도 이 영향이다. 모두 옛 일본군에서 쓰인 계급명이다.[4]
그러나 해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항해장교의 경우는 달랐다. 식민지 출신을 꺼린 일본해군의 폐쇄성 덕분이겠지만, 일본의 항해학교를 졸업하고 상선사관으로 근무했던 이들만이 항해술을 알았기에 일본 해군이 아닌 민간 출신이 대한민국 해군의 주축을 이루게 된다.

손원일 제독은 보유한 선박이라곤 일본군이 패전으로 유기한 목선 몇 척이 전부인,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던 대한민국 해군을 키워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군 낚시전설의 제 1막을 올린 백두산함 구입도 바로 그의 작품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1948년 12월 10일, 대한민국 국군 최초로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때 진급한 동기(?)로는 김홍일, 송호성, 채병덕, 이응준이 있다.[5] 불과 2개월 뒤인 1949년 2월 4일에는 소장으로 진급한다.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1949년 4월 15일, 대한민국 해병대를 창설한다. 그가 해군의 아버지인 동시에 해병대의 아버지이기도 한 이유다. 해병대의 창설은 반년 전 순반란의 영향이 컸다. 인근에 해군 병력이 있었으나, 반란군이 장악한 지역에 작전을 펼치기에 상륙전력이 없다시피해 그저 눈만 뜨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병력이 있는데 왜 작전을 못해 여기서 해병대 전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지상군 출신으로 해군에 입대한 인원을 중심으로 해병대를 창설하게 된다. 1,2대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한 신현준, 김석범 장군은 모두 만주국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육군에서 근무했으나 광복 이후에는 해군 장교로 임관했었다. 그러나 이때, 손원일 제독의 권유를 받아 해병대 창설의 주역이 된다.


4. 한국전쟁에서의 활약

4.1. 대한해협 해전

한국전쟁 개전 직후, 고속정으로 부산에 침투하려던 북한 특공대의 수송함을 격침시켰다. 이른 바 대한해협 해전으로, 아 해군의 첫 해전이었다.
민간 선박처럼 보이는 허름한 배가 불을 다 끄고 조용히 부산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측 함정에서 뭔가 싶어 무선신호를 보냈는데, 선박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침투하려는 적선인가, 아니면 단순히 무전기가 고장이라도 난 민간 선박인가... 고심 끝에 신호탄과 함께 위협사격을 가했는데, 상대 선박이 기관포로 응수했다. 그렇다. 후방 교란을 위해 침투 중이던 적선이었던 것이다! 우리측 함정은 빈약하기 짝이 없는 무장으로, 적선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우리측에서도 사상자가 발생할 만큼 적선의 무장은 예상 밖으로 강력했고, 또 완강했다.금쪽 같은 특공대 병력을 실어오는 중인데 당연하지 그러나 혼신을 다한 전투 끝에 결국 적선을 침몰시키는데 성공한다. 만약 적선이 후방에 상륙했다면, 훗날 최후의 보루로서 임시수도로 기능했던 부산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부산을 장악하지 못했더라도, 최후방에까지 걸친 적의 공세에 엄청난 혼란을 겪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6]

4.2. 인천상륙작전

인천 상륙작전 당시 손원일 제독은 국군 최고 지휘관이었다. 작전에 앞서 영흥도와 덕적도의 탈환을 이희정 중령 및 함명수 소령[7]에게 지시, 이를 성공시켜 거사를 앞두고 1차 장애물을 제거했다.[8] 상륙작전 당시에는 해상함대 지휘권은 없었지만, 직접 소총을 들고 한국 해병대의 상륙작전을 지휘했다. 원래 손 제독은 미군 지휘부와 함께 기함 함교에서 작전을 참관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어느 순간 사라진 손 제독이 직접 돌격하고 있다는 보고에 미군장성들이 경악했다고 한다. 애시당초 우리 해병대가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손 제독의 공이 컸고... 사령관이 직접 돌격한 사례는 같은 한국전쟁 당시의 백선엽 장군의 예 정도가 고작.그런데 그런거 하다가 전사해버리면...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9]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경인가도를 질주했다.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적과의 치열한 시가전 끝에 중앙청에 해병대가 다시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때 국군 최고 지휘관으로서, 대한민국 국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는 간지터지는 포고문이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10]

4.3. 흑역사(...)

흑역사라고 해도 굳이 따지자면 부인인 홍은혜의 흑역사이겠지만... 이게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서 부부라면 모르기 어려운 수준이라 여기에 적는다.

피난 시절[11]에 외교관이나 주한 미군 고관들을 접대할 목적으로 여배우나 엘리트 여성들을 알선해서 붙여주는 일(..)에 홍은혜가 힘쓴 일도 있었다. 모윤숙이 조직한 낙랑클럽이 대표적인 모임이다. 모윤숙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부인 허숙자와 함께 홍은혜를 꽤 칭찬한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두고두고 욕먹을 일이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자랑스러워 하고 있으니 판단은 알아서들 하자. 아무래도 시대성이란 것을 감안은 해야하니...[12] 미국 CIC는 자체 조사를 벌여 이걸 로비를 위한 고급 호스티스 단체로 규정했다.

두 번째로는 보도연맹의 학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다. 개전 당시 해군 묵호경비부 소속 장교의 증언에 따르면,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 지시로 감찰 중이던 보도연맹원을 해군에서도 처리한 바 있다고 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사료가 아닌 개인의 구술에 의한 것이긴 하다.

5. 전쟁 이후

1952년에 중장 계급으로 예편했다.[13] 이듬해 국군의 최선임자로서 국방부장관이 되어, 1956년까지 역임했다. 이후 주서독 대사를 지냈다. 대장으로 진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전투함이 한 척도 없는 해군에서 대장이 나온다면 그건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한국 해군에 전투함이 갖춰지거든 그 이후에 대장 계급을 받겠다고 본인이 고사했다는 일화가 있다. 대한민국 해군에 최초의 대장 계급이 등장한 해는 1966년이다. 해병대사령관이 해군참모총장보다 먼저 대장을 받은 하극상을 포함시키면 더 빨라질지도?


대한민국 해군에서 이순신, 장보고와 함께 추앙받는 3대 제독 중 하나. 화려한 전과는 없지만 겨우 일본 해군에서 목선 몇 척 인계받은 아무 것도 없는 한국 해군을 일으켜 세웠고 장성으로서의 모범을 보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6. 손원일급 잠수함

한국 해군이 장보고급 잠수함의 후계함으로 도입한 214급 잠수함이 그의 이름을 따서 손원일급으로 명명되었다. 경상남도 창원시에 위치한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영내에 손원일 제독의 동상이 있다. 진해 군항제 기간에 이루어지는 부대 개방시 일반인도 직접 볼 수 있다.

6.1. 가족 관계

부친은 독립운동가였던 손정도 목사. 중국 상하이에 있는 국립중앙대학 항해과를 졸업하고 중국 해군의 국비유학생으로 독일에서 3년간 수학하였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김일성이 손정도 목사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점. 손 목사가 중국 길림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할때 김일성은 그의 교회에 다녔고 손 목사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또한 손 목사의 차남인 손원태 박사와는 의형제처럼 지냈고,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1994년 8월에 김일성이 사망하자 조문 차 방북한 손원태 박사의 생일잔치를 김정일이 평양에서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손원일 제독이 대한민국 해군의 참모총장으로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아이러니.[14]

부인인 홍은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기독교 관련 증언이나 서적에 자주 나온다. 회고록도 절반 정도는 기독교 관련 이야기다.

전 국회의원 홍정욱은 손 제독의 손녀사위가 된다.

7.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제3공화국(드라마)에서 배우 민욱씨가 손원일 역을 맡았다.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2 소련군 4번째 미션 동영상에 한국군 사령관이 등장하는데 손원일 제독을 모티브로 한 듯 하다. 하필 소련군 미션에 등장하시다니 명백한 고인드립. 물론 고증따윈 씹어버리는 전통(?)을 자랑하는 시리즈답게 입고 있는 동정복 상태가 심히 엉망(미 육군 방공병과 장교 병과장을 달고 있는 등)이며, 계급도 중령밖에 안 된다.(...) 해상자위대 간부처럼 생겼다는 의견도 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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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손원일 제독의 부친 되시는 손정도 목사는 당시 임시정부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일제가 어떤 사건으로 독립 운동가를 잡아들이면서 고문하던 도중에 손원일 제독의 이름이 마침 나왔고 그가 손정도 목사의 아들인 것을 안 일제가 당시 잠시 들어와 있던 제독을 고문했던 것. 이 부분은 홍은혜 여사의 회고록에도 나온다. 그렇다고 제독이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손원일 제독은 1930년 상해독립단체의 비밀연락원의 임무로 입국하였다는 혐의로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된 경력이 있다. #
  • [2] 이 파일럿 출신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김재규다. 일본 해군 항공대 소속으로 특공 훈련을 받던 중 종전을 맞았고, 종전 이후에야 소위로 임관했다.
  • [3] 이 분은 공군의 아버지가 되시겠다. 중화민국 공군의 창군 멤버인 동시에 광복군 참모처장을 역임했다
  • [4] 오장은 해병대에서 아직도 쓰인다. 계급명이 아닌, 병사 계급 가운데 최선임자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된다.
  • [5] 출신을 따졌을 때 독립운동 계열이 3명(손원일, 김홍일, 송호성), 일본군이 2명(채병덕, 이응준)이다.
  • [6] 홍은혜 여사의 회고록 및 해군의 자료에 의하면 당시 손원일 제독은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이었고 실질적인 지휘는 함장인 최용덕 중령이 했다고 한다. 이때 쓰인 배가 바로 한국 해군 첫 전투함인 PC-701 백두산함이다.참고로 해당 백두산함의 주 무장은 76mm 단장 함포와 12.7mm 기관총 정도였으며 특히 76mm 함포는 자금 부족으로 훈련시에도 실탄을 넣지 않고 훈련에 임했을 정도로 적었다고 한다.
  • [7] 북한 간첩에 의해 미군 배가 북한으로 건너갈 당시 특공대를 조직해 옹진만을 급습한 장교. 이후 국회의원이 됨.
  • [8] 다만 안타깝게도 당시 작전에 직접 참가한 해군 육전대는 북한군과의 격전 끝에 모두 전사했다.
  • [9] 실제로 맥아더는 전역 사령관이면서 최전선에 자주 들락거려 욕을 많이 먹었다. 이건 2차세계대전 때 태평양에서의 일이고 한국전쟁때는 매스컴용 사진촬영 외에는 전선시찰따위 개나 줘버렸고 1차세계대전 장교들 마냥 도쿄타워 지휘실에 앉아 지도를 보고 지휘했다.
  • [10] 이 공로로 미국정부로부터 해병대사령관인 신현준 장군과 함께 은성무공훈장을 전달받았다. 이는 대한민국 해군으로서는 최초의 수훈이다.
  • [11] 이건 모윤숙의 주장인 1951년 창립설을 따를 경우. 미국 CIC 보고서 기준이면 전쟁 발발 이전인 1948년이다.
  • [12] 홍은혜의 소개로 미국 해군 고위고문단과 동거한 여배우 윤인자의 회고록 《나는 대한의 꽃이었다》가 2011년에 출간되었다.
  • [13] 당시에는 참모총장도 중장이던 시절이었다.
  • [14] 김일성의 회고록에도 손정도 목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거 자체가 따지고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인 셈.
  • [15] 그런데 실제로 맡은 배우가 일본계 미국인인 리처드 나리타다.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