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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견

last modified: 2015-11-30 16:11:41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상세
3. 일대기
3.1. 군웅할거 이전
3.2. 군웅할거 이후
4. 기타
5. 기타 창작물에서의 손견
6. 관련 항목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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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修陵懷舊蹟(수릉회구적) : 수릉에서 옛 자취 회고해보니,
匿璽啓雄心(닉새계웅심) : 옥새 숨겨 영웅되려는 마음 먹었구나.
遂達江東業(수달강동업) : 강동의 패업(霸業)을 달성했던 일,
臨風感不禁(임풍감불금) : 바람 맞으며 생각하니 감회를 금할 길 없네.

孫堅

후한 말의 군벌이자 삼국지의 등장인물. 생몰년도 156~192년. 한현의 선임

별명은 강동의 호랑이. 꿀물셔틀[1]

2. 상세

는 문대(文臺)로 손종의 차남이며 아래에 동생 손정이 있었다. 형 손강은 일찍이 죽었고, 형의 아들들인 손분손보는 손견이 거병하자 그를 따랐다. 손견은 손책손권 그리고 손부인의 아버지로 강동 손가의 창업자이다. 보통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자의 후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설이 있다. 진수가 삼국지에 '아마 손자의 후손일 것이다'라고 추측성 언급을 했는데, 웬만큼 선조가 불확실하지 않으면 이런 표현은 안 쓰기 때문.[2] 그래서 손자의 후손은 자칭이고 후한 말의 신흥 호족 가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3. 일대기

3.1. 군웅할거 이전

본래 양주 오군 부춘현 사람으로 어렸을때부터 대담하고 화통한 기질로 인해 이름이 높았다. 17세 때 부친과 배를 타고 전당현에 이르렀는데, 강기슭에 수적떼들이 약탈품을 나누고 있었다. 이에 놀란 손견의 부친은 나아가지 못하고 도리어 배를 돌리려 했는데, 손견은 부친의 만류에도 기어이 칼을 잡고 언덕으로 올라가 장수가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 마냥 연기했다. 이를 본 수적들은 관군이 체포하러 오는 것으로 알고는 황급히 달아났는데, 손견은 이를 뒤쫓아가 기어이 수적 한 명의 머리를 베고 돌아왔고 부친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 일로 이름이 알려져 관리가 되었다.

이후 회계군에서 신흥 종교 세력의 교주였던 허창과 그 아들 허소가 반란을 일으키자 1천명의 군사를 모아[3] 양주의 관군과 합류해 공을 세웠다. 이때가 172년이었는데 손견은 156년생이니 역산하여 헤아려보면 이때 손견의 나이는 17세가 된다. 수적떼를 쫓아낸 일화와 같은 해의 일이다(...) 당시 양주자사였던 장민이 손견의 공적을 장계에 적어 조정에 알리자 손견은 염독현의 승(丞=현령 보좌관)[4] 으로 임명되었다. 몇해 뒤에 우이승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다시 하비승으로 전임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평판이 좋았기에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손견이 하비승으로 있을 때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주준을 우중랑장으로 삼아 반란 진압의 일익을 담당하게 했다. 주준은 손견을 군사마로 천거해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다. 주준은 양주 회계군 출신이며 이전부터 반란 진압으로 잔뼈가 굵은 양주의 실력파 관리로 손견의 선배격이 된다. 더구나 허창의 난 당시에는 회계군의 주부를 지내 손견의 활약상을 더욱 눈여겨 봤던 듯 하다. 이에 손견은 하비 일대에서 1천명의 군사를 모아 주준과 합류했는데, 주준과 손견이 함께 힘을 합쳐 분투하니, 가는 곳마다 파죽지세였다고 한다. 연이은 패배에 황건적은 완성으로 달아나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했는데, 이때 손견은 황건적의 거센 저항에도 스스로 앞장서서 성벽을 기어오르며 병사들을 독려해 승리에 크게 공헌했다. 주준이 손견의 공적을 조정에 알리자 조정에서는 손견을 별부사마로 임명했다.

185년 5월, 변장, 한수가 서량지역에서 난을 일으켰다. 중랑장이었던 동탁은 황건적에게 패하여 파직되었다가 이 반란의 진압을 이유로 복직되었는데 해가 지나도록 아무런 전과도 세우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고 있었다. 이에 조정은 장온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반란 진압을 지휘하게 했고, 장온은 표를 올려 손견을 자신의 부관으로 참전하도록 했다. 먼 남쪽지방 출신 손견이 머나먼 서북방까지 특별하게 차출되어 나간것을 보면, 그가 이미 전도유망한 장수로 조정에 인식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동탁은 장온의 소집령에 느릿하게 움직이며 한참만에야 도착했는데, 오히려 장온을 대하는 태도가 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이에 손견은 장온에게 동탁이 무능한 지휘로 군사들을 혼란스럽게 하여 반란을 전혀 진압하지 못했으며, 명령에도 제대로 따르지 않은 데다, 윗사람에게도 무례하기 짝이 없어 그 죄가 매우 크다며 동탁을 처형할 것을 주장했지만, 장온은 동탁과 강족과의 관계를 들어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동탁과의 사이가 벌어졌다.[5]
한편 변장과 한수는 낙양에서 대군이 온다는 소식에 겁을 먹어 별다른 교전없이 투항했고 때문에 손견은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손견이 동탁을 죽이자고 주장했다는 일이 알려지자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을 봤을때 당시 동탁이 얼마나 방자하게 굴었는지 알 수 있다.

구성이란 자가 1만여 명의 무리를 모아 장사군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장사태수에 임명되어 진압을 맡았는데 불과 보름만에 구성을 깨뜨렸고, 자신의 관할구역을 넘어 인근의 군인 영릉과 계양에서 구성에게 호응해 일어난 주조와 곽석 등의 무리까지 모조리 토벌해버렸다. 이는 엄연한 월권 행위였지만 조정은 손견의 공을 인정해 이를 사관에 기록하게 하고 오정후에 봉했다.

3.2. 군웅할거 이후

영제가 붕어하고 동탁이 권력을 잡아 전횡을 휘두르자 각지에서 군사가 일어나 동탁을 치려 했다. 손견 또한 동탁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북진했는데 형주를 지나는 동안 조인이 형주자사 왕예를 죽여달라는 격문을 뿌렸다. 이에 손견은 왕예를 추궁하러 갔는데 왕예는 손견이 자신을 추궁한다는 이유로 자살했다.

왕예는 평소 손견이 무식하고 행동이 가볍다는 이유로 경시했다곤 하나 어찌됐든 손견의 상관이었다. 주석에 따르면 왕예 또한 동탁을 치기 위해 거병했었는데 당시 왕예와 앙숙이었던 무릉태수 조인이 왕예에게 해를 입을 것을 왕예의 죄를 부풀린 글을 쓰고 손견에게 가서 광록대부 온의의 격문이라고 속였다. 이를 믿은 손견은 왕예를 습격했고 왕예가 성루에 올라 "도대체 내 죄가 무엇이냐." 고 묻자 "모르는 것이 죄이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궁벽해진 왕예는 결국엔 자살했는데, 이는 하극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손견이 왕예 살해의 명분이라 믿고 있던 중앙 고관의 격문 또한 조인이 날조한 가짜였기 때문에 완전히 조인에게 이용당한 셈이다. 하지만 이 사건 자체가 손견의 입지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일단 왕예가 비록 명목상으로는 손견의 상급자라고는 하지만 직함이 자사였고 자사는 사실상 실권이 그리 크지 않아서 명예직에 더 가까웠다. 실제로는 태수가 자사보다 영향력이 더 좋은 시기가 후한 말이였고 더군다나 원소가 유우를 옹립해도 그의 신변에 아무 영향이 없을 정도로 황실의 권위가 무너지던 시절이다. 이 때문에 자사 하나 죽인건 그리 큰 사건조차 되지 못했다. 심지어는 장온이 자사 따위보다는 넘사벽으로 높은 태위 신분인 상태에서 동탁에게 맞아죽은 사건조차 그리 큰 사건이 아니던 시기였다. 그렇게 따지면 차주는 서주자사의 신분으로 유비에게 살해당했다. 그러고도 유비의 입지는 변한게 없었다. 유비는 차주를 죽인 이후 하비태수가 되었다. 참고로 동탁은 태위 장온을 패서 죽이고도 입지에 아무 변동이 없었고 황제인 유변을 폐지하고 독살해서야 입지에 변동이 생겼다.

이 뒤에 원술에게서 중랑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계속 북상해 남양에 이르렀을때 남양태수 장자가 길도 닦아놓지 않고 군량도 내놓지 않는 등 협조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죽여버리고 원술에게 남양을 바치자 이에 원술은 손견을 파로장군, 예주자사에 임명했으며 손견이 얻지 못할 것이 없고 구하지 못할 것이 없어졌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당당히 하나의 세력으로써 반동탁연맹에 참가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신분 자체는 명목상으로만 원술의 부장이었을 뿐 실제로는 원술의 동업자에 더 가까웠다. 원술의 세력 자체는 손견이 알아서 만들어 바친 쪽에 가까웠지만, 손견은 신흥 가문 출신인데다 용맹무쌍했지만 또한 거칠며 즉흥적이었고 스스로 학덕은 포기했다고 말할 정도로 무식했기 때문에 호족들에게는 야만인스러운 무부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원술은 후한 최고의 명문 원씨 가문의 적자였던 데다 원술 또한 개인적으로 군웅할거 이전부터 호걸로 이름이 높아 명성이 있었고, 여기에 더해 동탁으로 인하여, 낙양의 원씨 일족이 모조리 몰살당한 일로 엄청난 동정표를 받아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술군 세력 내부를 보자면 원술군의 뼈대 자체가 손견이였고 원술이 이룩한 군공 거의 전부는 손견이 이룩해준 것이다. 원술은 손견에게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고 손견은 원술에게 군공을 세워주는 사이였다. 이 때문에 원술이 명목상 상급자라고는 하지만 손견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유표가 손견의 성인 장사를 털어먹기 전까지는.

손견은 드센 호족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원술의 이름을 이용하며, 후방에서의 물자 지원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술 역시 손견 때문에 남양을 거점으로 얻은 데다가 아직 군사력을 키우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으므로 손견에게 물자 지원을 해줌으로써 동탁과 싸우게 만든다. 그렇게 둘은 동업자가 되어갔다.

손견은 원술의 지원을 받으며 계속 북상하여 드디어 동탁군과 교전하게 된다. 초반에는 서영을 상대로 고전하여 불과 수십기만 이끌고 도망치는 등의 수모를 겪지만 군사를 수습한 뒤 동탁이 확인사살을 위해 보낸 호진여포를 양인에서 대파하고 도위 화웅을 참수하고서 역공에 나섰다. 다만 손견이 일기토를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손견이 너무 잘 나가서 낙양까지 수복하면 다시는 제어할 수 없으리라 여긴 원술은 손견을 견제하기로 결정하고 군량의 보급을 중단했다. 손견의 군이 주둔하고 있던 양인에서 원술이 주둔하던 노양까지는 대략 100리 거리였는데 손견은 밤새도록 말을 달려 원술의 앞에 출두해 군의 전황과 자신의 전략에 대해 땅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할 정도로 열변을 토하고 '위로는 국가의 역적을 제거하고 아래로는 공의 원수[6]를 갚기 위해 힘쓸 뿐'이라며 한치의 사심 따위는 없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손견의 열변에 부끄러워진 원술은 즉시 군량을 보내며 손견을 주둔지로 돌아가게 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원술이 손견을 시기해 군량의 보급을 끊자 손견이 패했고, 이 일은 관우의 이름을 높이는 계기가 되지만, 실제로는 원술과 손견의 상부상조하는 관계는 다소 마찰은 있었지만 마찰이 있을때마다 서로 좋게 풀었고, 이후로도 낙양을 수복할만큼 손발이 잘 맞았다.

한편 이 무렵 동탁은 북상하며 연전연승하는 손견을 꺼려해 이각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그의 자식들을 태수와 자사로 천거해주겠다며 회유했지만, 손견은 온갖 모욕과 함께 거절한 뒤 계속 진군해 낙양에서 90리 떨어진 곳에서 동탁군과 대치한다. 동탁은 친히 나와 여러 능을 사이에 두고 손견과 싸웠는데, 패하여 달아났고 낙양 서쪽의 민지현에 주둔했다. 크게 이긴 손견은 여세를 이용해 계속 진군했고, 낙양을 지키던 여포를 패주시키고 낙양을 수복한다.

하지만 이미 동탁이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낙양을 초토화시켜, 낙양성 안팎엔 연기나 불빛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이를 본 손견은 애통해하며 동탁이 파헤친 역대 제왕들의 종묘를 수습하고 제사를 지냈다. 이때 손견은 전국새를 발견했지만, 원술의 협박에 이를 빼앗겼다는 기록이 전해지나, 배송지는 이 설을 부정했다.

당시 반동탁 연합군의 맹주였던 원소는 장안의 조정을 동탁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했고, 동탁이 보낸 연합군의 해산을 종용하는 칙사를 살해하는 등 조정의 권위를 강하게 부정하고, 명망 높은 황족인 유우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원소의 주장은 상당히 극단적인 논리였지만, 당시 동탁 정권과 헌제의 정통성이 워낙에 약했던 데다, 원소의 기세가 엄청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계획은 유우 본인의 완강한 거절로 인해 무산되었는데, 이는 곧 기존의 권위를 부정했고 이를 따르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데에도 실패한 것이다. 이로 인해 각지의 관리들은 제각기 다투며 토지를 겸병하고 사병을 늘리는 등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며 군벌화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관리들이 군벌화 경향을 보이긴 했으나 일단 관리들이 중심으로 받들던 황제 자체를 부정함으로서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이렇게 반동탁 연합군은 흐지부지 되고 군벌들의 시대가 시작된다. 바야흐로 군웅할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와중에 유표는 손견의 거성인 장사를 몰래 털어먹었다. 그 전까지는 손견과 원술은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나가는 동업자 관계였으나 이 사건으로 인하여 손견은 원술에게 진짜로 종속되는 비극을 맞이하고 만다. 손견은 유표에게 자신의 성을 도난당했고 이 때문에 거의 유랑민이 되다시피한 손견과 그 휘하병력들은 원술에게 얹혀살게 되었다.[7]

이 무렵 원소의 독주를 견제하고 있었던 원술은 헌제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한편 서쪽으로 진군하여 낙양을 회복하고 또한 동탁을 처벌하여 황실을 구해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소는 유우의 추대에 실패하고, 원술은 정말로 낙양을 수복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데 이른 것이니, 원술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원소 또한 원술의 상승세를 견제하여 회계사람 주앙을 예주자사로 삼으며, 예주를 공격해 탈취하도록 했고 주앙은 예주를 내습하여 양성 등의 주요 거점을 빼앗는다. 양성은 사예와 예주를 잇는 길목에 위치하는데 이 일대가 주앙에게 넘어가면 예주와 형주 북부에 근거지를 둔 원술은 낙양과의 연결이 끊기게 된다.
주앙은 오와 회 지역의 유력자였는데, 그의 형인 단양태수 주흔과 동생인 주우 또한 원소와 연계하며 원술과 대립했다. 이 주씨 형제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은 거의 없으나, 원술이 남양을 통치할 때 극도로 가혹하게 다스리며 마음대로 세금을 걷었다는 기록과, 주흔이 원술의 잔학함을 싫어해 그와 대립했다는 기록으로 유추했을때 원술의 군비 조달을 위한 지나친 수탈로 양주와 예주 일대의 경제가 붕괴된 것에 반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해 중앙정부가 사실상 있으나 마나한 상태로 흘러가는 당시 분위기에 따라 대부분의 주와 군에서는 제각기 겸병하며 강해지는 데 힘쓰고 있었다. 손견은 주앙의 내습 소식을 듣고는 원소 등을 필두로 한 분리주의자들의 행태에 대해 "같이 의병을 일으켜 장차 사직을 구하고자 하였다. 이제 역적들이 격파되려 하는데 제각기 행동을 이 같이 하니 내가 누구를 믿고 힘을 합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고 눈물을 흘리며 길게 탄식했다고 한다.

이에 분발한 손견은 휘하의 군사를 이끌어 주씨 형제와 여러 차례에 걸쳐 싸웠지만 결국 이들을 몰아내지 못했으며, 자연히 낙양에서의 영향력을 잃게 되어 다시 노양으로 돌아갔다.

손견은 이후 유표를 공략하라는 원술의 명령을 받았다. 손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이미 유표에게 거성인 장사를 뒷치기당해서 원술의 거성에 머물러야만 했으며 이 때문에 원술이 하라는 대로 해야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손견은 유표를 공격했지만, 야밤에 순찰하다가 황조가 몰래 보낸 저격수에게 저격당해 죽었다. 영웅기에 따르면 여공군이 궁지에 몰리자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고 한다. 사후에는 조카 손분이 손견의 시신을 수습하고 그 손견의 시신을 오군 곡아라는 곳에서 장사지내고 난 뒤, 손견의 잔당을 이끌고 다시 원술에게로 귀의했다.

4. 기타

동탁은 두 원씨(원소,원술)와 손견 그리고 유표만 죽이면 천하가 평정되어 두려울 게 없다고 했다.동탁의 관점에서 4대 주적인 소술표견
  • 원소는 전 소제 정권의 중심인물이란 위치에 있었고, 이미 십상시 주살과 낙양 입성한 동탁과의 대립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데다, 동탁에 의한 원씨 일가의 몰살로 인하여 얻은 동정표를 더하여 분리주의를 선동해, 신질서인 장안 조정의 정통성과 중앙집권력을 박살낸 장본인이다.
  • 원술은 이런 원소의 분리주의를 대차게 까면서도 낙양으로의 진군과 장안 수복이란 명분을 제시하는 틈새공략으로 반사이익을 얻었고, 손견은 좀 더 현실적이고 과거의 정부의 정통성에 매인 원술의 대안을 압도적인 무용으로 실천해냈다.
  • 유표는 동탁에 의해 새로이 바뀐 조정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한편으론 원소를 맹주로 떠받드는 등 상황에 따라 수시로 태도를 번복하며, 적을 피하고 자신은 약소 세력을 병합해 가며, 형주를 장악하고 할거하는 지극히 표리부동한 태도를 보였다. 동탁 입장에선 말 그대로 4대 역적 목록에 올라갈 만한 셈이다.하지만 손견에게 뒷통수를 후려서 손견의 영지를 훔치고 되찾으러온 손견을 암살했으니 동탁에게는 유표가 완전히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다.
  • 손견은 군웅할거시대 이전부터 활약하다가 군웅할거 극초반에 사망하지만 글자 그대로 '폭풍'같은 행보를 보였다. 보통 원술과 별달리 연관없는 독립적인 군벌로 묘사되거나 혹은 원술을 이용한 뒤 자립하여 패업을 꿈꿨던 것으로 여겨지나, 앞서 설명했던 것 같이 손견 본인이 이를 극구 부정했고, 정사상의 행보를 봐도 이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정황 설명은 오히려 아들 손책에게 어울린다.

하지만 전해진 기록들을 살펴보면, 손견은 장사군의 태수라는 관위가 있었고, 실질적인 임지와 군사를 갖췄으며, 본인이 오군의 토호 출신으로 오군과 인접한 양주 일대에까지 기반을 가졌으니, 군벌로서 할거하려는 마음만 먹었다면, 그대로 해봄직한 위치에 있었다. 오히려 장사태수인 손견이 반동탁 연합에 참가한다고 멀리 형북-사예 등지까지 이동하는 것은 자기 기반에서 떨어져 고립되는 것을 의미했고,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그대로 남에게 빼았길 수도 있는 위험성이 다분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유표한테 빼앗겼다.

게다가 실제로 자신의 임지에서 한참 멀어진 이상 자력으로는 보급의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으니, 십중팔구 그대로 패망하거나 도적떼로 전락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태수 쯤 되는 인물이 애초에 이런 위험성을 몰랐을 리가 없다. 이러한 것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충심으로 나선 것이지 난세를 틈타 군벌로 할거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이건 철저한 바보짓 이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다. 사실 손견이 왕예의 죽음에 대해서 하나도 약점잡힐게 없다. 조조는 연주자사 금상을 쫒아냈고, 유비는 서주자사인 차주를 칼로찔러 죽였으며 동탁은 삼공인 장온을 패죽였다. 왕예는 손견이 직접 죽인것도 아니고 왕예 본인이 손견을 두려워하여 자살했다.

손견은 원소를 필두로 한 분리주의자들의 행태를 거의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성격은 좀 거칠어도 한 황실에 대해서 일관된 우국충정의 모습을 보였기에 배송지는 그의 저서에서 손견은 당대의 여러 인물 중에서도 충렬(忠烈)이라는 칭호가 가장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손견이 위로 모신 인물이 하필이면 천하의 역적인 원술이라는 게 문제였다. 어떻게든 황실의 권위가 유지되던 영제 시대 때는 그렇게 날라다니더니 결국 군벌 시대에 들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원술 손아귀에서 놀아나다 죽은 게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원술이 초반에 헌제의 정통성을 옹위한 이유는, 그냥 원소가 잘 나가는 것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적인 동탁에 의해 강제로 추대된 어리고 정통성이 약한 황제로 인해 중앙정부가 극도로 약해진 틈을 타 자기가 스스로써 황제의 자리에 오를 욕심을 가졌는데, 유우 같이 무게감 있는 인물이 황제로 즉위하면 곧 중앙정부와 사회의 질서가 회복될까 우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삼갤 같은 곳에서는 꿀물셔틀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한다.

원소가 주앙에게 명을 내려 손견을 치게 하면서 역적 동탁의 주살을 방해했다는 건 유우 추대 시도와 더불어 군웅할거의 원술과 공손찬 등 초반 적대세력들이 원소를 비난하는 주된 명분들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원술이 칭제하면서 흑역사화가 됐는지 이후에 조조가 원소를 비난할 때는, 유우 추대 쪽으로 기틀을 잡고, 원술과 엮어서 원씨 전체를 깐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오국태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손상향을 낳았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허망한 최후가 좀 아쉽다. 하지만 화웅에게 패배한 것도 원술의 속좁은 짓 때문으로 표현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 손견의 평가가 이득이라고 보기 어려운게 정사에서는 아내가 인질로 잡히는 바람에 옥새를 강탈당한 것을 연의에서는 옥새먹튀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삼국지평화에서의 시궁창스러운 모습만 어느정도 수정 보완되었을 뿐이지 정사에 비해서 이득인 것은 절대 아니다.

삼국지평화를 비롯한 원대 삼국극에서는 화웅이나 여포가 나타났을 때, 배가 아프다면서 도망가는 비참한 역할로 등장하는 등 이미지가 형편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설득력을 더욱 얻는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견의 이미지를 용장으로 설정하여 정사 삼국지와 크게 다르지 않는 수준으로 복귀시킨 셈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옥새를 손에 넣은 다음 원소유표가 그를 추궁하자 "내가 옥새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칼과 화살을 맞아 죽을 것이다." 라고 맹세한다. 일종의 복선인 셈.

손견이 옥새를 손에 넣은 얘기는 많이 알려져 있는데, 배송지는 손견이 한실에 충성했다는 점을 근거로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실제로 옥새는 발견되자마자 원술이 강탈해갔고, 훗날 원술은 그 옥새를 이용하여 자신이 황제임을 온 천하에 알려 공공의 적이 되고 만다.

오나라가 건국된 이후 손견은 역대 중국의 황제로서 그 이름을 올렸다. 손권은 자신의 아버지를 사후 추숭 형식으로 시호를 올렸는데, 그 시호가 시조 무열황제(始祖 武烈皇帝)로 오나라 첫 황제로서 추존되었다.

5. 기타 창작물에서의 손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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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손견이 원술의 빵셔틀이 된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을 당해서다. 손견이 반동탁 연합군으로 활약하고 있는 동안 유표가 손견의 거성인 장사성을 뒷치기로 점거해버렸고 근거지를 잃은 손견은 원술에게 의존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손견이 유표를 공략한 것 역시 자신이 잃은 장사성을 수복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손견 본인은 끝내 장사를 수복하지 못했고 손책도 장사 수복에는 실패했으며 그 동안 장사의 주인은 유표 → 한현 → 유비로 바뀌어 오다가 익양대치 이후 협상을 통해 손권대에 돌아온다.
  • [2] 조조조참의 후손, 유비는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라고 명확하게 적은 것과 비교된다.
  • [3] 손견의 가문이 경제력을 갖춘 신흥 가문이었다는 주장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이 정도 규모의 군대를 편성하는 데는 상당한 자본금이 필요한 데다가 인맥 역시 중요하다. 비록 손견이 공직에 있었다곤 하나, 말단이었고 수완이 좋았다고 한들 고작 17세의 소년에 불과했으니,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1천의 병력을 모은 주체가 손견으로 된 것은 최소한 그의 가문이 군대 편성의 자금 문제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부를 축적해왔고 다른 호족들에게 영향력을 미칠만한 가문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겠냐는 것.
  • [4] 후한 시기 현령을 보좌하는 공식적인 직위는 승(丞)과 위(尉) 두 직책이 있었다. 이중 승은 문관직으로 문서와 행정담당을 하는 직책이었다. 위는 현의 치안을 담당하는 총책임자로 군권을 담당하는 직위였다. 무장으로 유명한 손견이지만 승의 직위에 오래 있었던걸 보면 행정수완이 뛰어났던듯 하다. 이는 그 주변에 유능한 문관들이 많았던 이유가 될 수 있을듯 하다.
  • [5] 이후 장온은 하진 사후 조정을 장악한 동탁에게 죽는다.
  • [6] 반통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동탁은 아직 낙양에 거주하고 있던 원씨들을 역적죄로 몰아서 원씨 일족이 몰사당했다. 이로서 동탁은 원씨 일족(원소, 원술)의 원수로 여겨졌으며, 본래 동탁이 원씨의 추천을 받아 임관한 고리였고 당시 온 천하에 원씨의 문객이 많이 퍼져 있어 동탁을 증오하는 여론이 급격히 퍼져 나갔던 것이다.
  • [7] 정사 오서 손파로토역전에 나온 내용 중 하나인데 원술이 군량을 제때 보내지 않아 손견이 패하자 손견은 원술에게 호통을 치며 상황설명에 들어갔고 "원술은 손견에게 쩔쩔맸다." 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던 손견이 유표한테 장사를 도난당하자 원술에게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