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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last modified: 2015-04-10 18:07:49 Contributors

Contents

1.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1.1. 개인적인 삶
1.2. 삶과 철학
1.3. 죽음
1.4. 평가
1.5. 제자들
2.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1.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그리스어: Σωκράτης (Sōkrátēs, 현대식으론 Sokrátis)
BC 469년 - BC 399년

ho de anexetastos bios ou biôtos anthrôpôi
ὁ δὲ ἀνεξέταστος βίος οὐ βιωτὸς ἀνθρώπῳ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서양 철학, 더 나아가 인류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어떠한 저술이나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제자 혹은 지인인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등이 남긴 저술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그의 삶과 사상을 알 수 있다.[1]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크라테스의 일화나 행적은 대부분이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근거한 것이다.

1.1. 개인적인 삶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4대 성인 중 한 사람.[2]
대머리에다가 생기다 만 것 같이 못생겼었다고 전해진다. 하필 당시 아테네에서는 외모 또한 인격의 일부로 여기는[3] 풍조가 있어 상당히 고생했다고 한다.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 알려진 것도 그의 미남 제자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면서부터였다 하니 아테네의 외모지상주의나 소크라테스의 추모가 어느 정도나 심각했는지 대략 짐작해볼 만하다.[4]

마누라, 크산티페는 못생긴 악처였다고 전해지는데 근거는 없다. 사실 앞뒤 정황을 따져보면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악처보다는 오히려 선처나 현처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소크라테스는 집에 돈 한 푼 가져다 주지 않는 주제에 백날 돈 많은 한량들(대표적으로 플라톤)이랑 놀기만 하는 무능한 남편이었지만 크산티페가 그런 남편을 내쳤다는 기록은 없으며, 외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자결할 때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가 물려받고 내팽개친 석공소를 직접 운영하여 가족을 먹여살렸다는 것을 보면 현모양처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래도 소크라테스의 행실에 열받아 물을 뿌린 적도 있으니, 그의 행동을 100% 참아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걸 다 참았으면 크산티페가 4대 성인이지 소크라테스는 이런 부인이 참을성을 길러준다고 했다나 어쨌다나. 크산티페가 악처라고 전해지는 것은 다툼이 많은 친구를 악우라고 하는 것처럼 단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며, '효자보다 악처가 낫다'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결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중장보병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아테네 시민은 중장보병으로 복무해야하는 의무가 있었으므로 소크라테스도 당연히 국가의 의무를 수행한 것. 대표적인 참전 전투로는 델리온 전투가 있는데, 이때 아테네군이 패배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침착하게 후퇴하는 담대함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소속된 부대도 소크라테스가 침착한 대처 덕분에 무질서하게 패주하지 않고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5][6] 무려 세 번이나 참전했었다고.

'아테네의 변명'이라는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삶과 당시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동안 위에 서술된 것처럼 세 번 참전했던 것과, 딱 한 번 이스트모스에서 포세이돈을 위해 열리는 대축제였던 이스트미아 제전을 구경하러 간 것을 합쳐 단 네 번 밖에는 아테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플라톤의 '크리톤'에서 아테네의 법이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형식으로 자문자답한 소크라테스의 독백에 의하면 '우리(아테네의 법)와 우리의 도시(아테네)만으로도' 소크라테스에겐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1.2. 삶과 철학


우선 소크라테스의 삶은 가난했다. 일한다는것 자체가 철학자의 삶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다혈질인 아내가 돈벌고 오라고 으름장을 놓고 또 이를놓고 티격태격 싸우는게 다반사가 된 것.
이 생활에 영향을 받았는지 하루는 제자중 한명이 스승님 결혼은 해야합니까. 하지 말아야합니까? 라는 질문에 하면 후회하고 안해도 후회한다.라고 답했을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가난했던 소크라테스가 일개 수병도 아니고 최소 중산층 이상급은 돼야 군장을 마련할 수 있었던 중장보병으로 어떻게 참전할 수 있었느냐가 미스테리인데, 역사가들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석공소 주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아버지 때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재개발 사업으로 단단히 한몫 잡았었을 거라는 설, 소크라테스 대신 석공소를 운영했던 크산티페가 의외로 수완이 탁월한 경영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설, 알키비아데스 같은 소크라테스의 금수저 제자들이 스승님을 위해 대신 군장을 마련해 드렸을 것이라는 설 등등. 하지만 아직 확실한 사실은 알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아테네를 지극히 사랑했던 철학자소피스트들의 궤변에 아테네가 놀아나고 회의주의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이에 반발하여 보편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등장했다.
현재의 시선에서 보면 지극히 잉여로운 인물로, 하는 일도 없이 시장이나 광장을 돌면서 사람들을 붙잡고 묘한 철학적 질문을 해댄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당시 아테네 사람들도 그런 철학을 좋아했던건지, 꽤 재밌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호응을 잘 해줬다고. 하지만 이 당시 아테네를 신랄하게 비판하여, '아테네의 등에'라 자칭하기까지 했다. 이 때 적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는 이후 사형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적들이 생긴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당시의 유명한 소피스트들과 논쟁을 벌여 결국 소피스트의 무지를 드러내는, 일종의 도장 깨기를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에는 외모가 인격을 대변하던 시절이기에, 소피스트들은 못생긴 소크라테스를 무시하면서 흔쾌히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러다 소크라테스의 논리에 휘말려 결국 자기가 자신의 논리를 부정하게 되고, 결국은 망신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러니 당연히 적들이 생길 수밖에...

저술보다는 대화를 통해 철학활동을 하였고, 특히 상대방에게 계속 질문을 해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법을 썼다. 이런 질문을 중심으로 하는 교수법을 소크라테스식 문답법, 혹은 산파법(산파술)[7]이라고 부른다. 확고한 주장을 가지고 있던 피질문자가 문답법에 의하여 결국 자신의 주장을 자기 입으로 자연스럽게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유도심문과도 비슷해 보이지만, 소크라테스가 산파술을 통해 논쟁의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자세는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거나 혹은 심문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상대보다 더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고 기본적인 것부터 검토해나가는 것이다. 때문에 이를 형사가 사용하는 유도심문과 같은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해답을 제시해주지 않는' 단점을 지녔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을 통해 어떤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도덕 철학을 위해 기존에 있는 개념(가령 '경건함', '선함', '좋음' 따위의)을 명료하게 만드는 것에 주목했으므로 이러한 지적은 핵심을 완전히 잘못 짚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계속 산파술을 시전하고 다닌 끝에 결국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되고,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는 말을 남겼다.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델포이 신전에 어떤 자[8]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가 있습니까?"라고 묻자 무녀는 평소에 늘 쓰던 질질끄는 은유나 수사들을 생략[9]하고 단 한마디로 요약한 "아니."[10]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여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만나고 다니며 그들의 지혜를 시험해 봤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똑똑해 보였던"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조차 몰랐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그제서야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공자가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라는 말을 남겼던 것과 비교해본다면 흥미로운 대목. 참고로 흔히 알려진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다.(원래는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져 있는 말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많은 제자들중 특히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만의 철학이 독특하고 흥미롭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제자들보다 소크라테스를 더 자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책에 기록한다. 어쩌면 소크라테스가 기록을 전혀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대비책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플라톤은 그리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알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또 감명 깊게 받은 제자 중 한 명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서양 철학 역사상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을 꼽을때 항상 1-2-3순위를 차지한다.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고대 그리스 역사의 먼치킨인 알렉산드로스 3세로 따지고보면 알렉산드로스가 소크라테스의 증손제자에 해당된다. 인류 최고의 스승-제자라인이 아닐까.

1.3. 죽음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11]

하지만 이러한 행위가 신들을 부정하고 젊은이들을 현혹하여 아테네의 전통을 해친다고 생각되어 당대 아테네 상류층에게 위험인물로 낙인찍혔고, 실제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 위험인물들이 꽤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스파르타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양쪽을 모두 몇 차례씩 배신한 매국노 키비아데스가 있었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 권력을 잡고선 민주주의 지도자들을 쓸어버리고, 조금이라도 반발하는 사람들은 죄 죽여버리고, 시민의 수는 3000명으로 고정시키고선 나머지 인원들은 언제건 즉결처분 시키고 재산을 몰수할수 있도록 한 폭군 크리티아스[12]도 있다. 결국 참다못한 아테네인들은 크리티아스를 처단하고, 뒷처리를 위해 이 모든 사태의 시발점인 소크라테스를 고발하고 재판을 거쳐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소크라테스 본인은 자신을 따라다녔던 청년들의 과두 정치 체제를 몹시 부정적으로 평가했을 뿐 아니라, 과두정에서 살라미스 사람 레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자 그냥 쌩까고 집으로 돌아가는 등의 항의를 보이기도 했다. 과두정이 조금만 오래 유지되었더라도 그 일로 인해 소크라테스 본인이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또한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플라톤의 사상이라는 중론이 있지만) 과두 정치 체제를 상당히 하등하고 부정적인 체제로 간주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과두 정치의 시발점이라는 혐의는 부당하다고 할 것이다.

어쨌든 표면상으로 소크라테스의 기소 혐의는 아테네가 믿는 신을 우습게 보고 새로운 우상을 섬기면서 젊은이를 타락시킨 죄였다. 황당해 보이지만 이게 어쩔수 없었던것이 긴 내전을 거치면서 더이상 불화의 불씨를 키우기 꺼려한 아테네 시민들이 전쟁 이전 누굴 지지했던 잘잘못을 따지지 않기로 대대적 사면령을 내렸고, 당연히 아테네 시민인 소크라테스도 이 사면령에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매국노 알키비아데스와 폭군 크리티아스라는 위험인물을 키운 죄목을 물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 그래서 진짜 목적은 알카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의 정신적 스승에 대한 재판이지만 겉으로는 엉뚱한 걸 만들어 제시한 것.

사형 판결을 받은 재판도 대외적으로 보면 무척 황당하다[13]. 이 재판은 우선 투표(배심제)로 유죄/무죄를 가린 후, 유죄로 결정되면 다시 고발자가 제안하는 처벌과 피고 본인이 제안하는 처벌 중에서 투표를 하는 방식이었다. 유죄 판결이 나왔을 때는 무죄 쪽과 표 차이가 크지 않았으므로 이 때까지는 사형 판결을 받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소크라테스는 내가 해온 일에 대한 합당한 응보라면 국가가 나를 봉양하는 것이다라고 길게 설명한 후, 마지막에 "하지만 다른 사람이 벌금형을 제안하라고 권했으니 그렇게 하겠다" 라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 '변호'는 배심원들을 몹시 기분나쁘게 만들었기 때문에[14] 큰 표차로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무죄 쪽에 표를 던졌던 사람들도 소크라테스의 자기변호를 들은 후에는 사형 쪽에 표를 던지게 된 것.

죽기 직전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빚졌다며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당시 아테네에는 병에 걸렸다 나으면 이 신에게 감사의 표시로 제물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자신이 독약을 마시고 죽음으로써 모든 질병에서 해방되니 고맙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화를 상징적으로 해석해서, 삶 자체가 질병이고 죽음은 그 '삶'이라는 병의 치료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으나 소크라테스의 평소 언행은 그런 허무주의와 관계가 없었으므로 진실일 가능성은 낮다. 다른 각도의 해석으로는, 평소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쇠가죽만큼이나 두꺼운 아테네인들의 '무지의 가죽'을 가렵히는 '등에(쇠파리)'에 빗대었듯이, '아테네인들의 무지의 병을, 나 대신 치유해달라'는, 철학자로서의 임무를 완수해달라는 부탁으로 보기도 한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설들이 있다. 그냥 병으로 고생하다 나은 적이 있는데 제물을 아직 올리지 않았기에 죽으면서 부탁을 남긴 것이라거나, 또는 단지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이웃 사람에게 진짜로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었다거나, 심지어 그냥 농담이었다는 설까지 있다.(...) 황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대체로 할 말을 직설적으로 했지 은유적으로 빙빙 돌려가면서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굳이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고 의미를 해석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며 직설적인 의미로 해석하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플라톤의 책 파이돈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독약을 받고 죽었다고 한다. 파이돈이라는 책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파이돈이 에케크라테스라는 사람에게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해주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파이돈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먹고 누운 상태로 몸이 굳어지다가 경련을 일으키면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차분한 죽음의 모습을 플라톤이 포장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2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우선 플라톤은 이 시기의 소크라테스와 엮이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15]에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죽을 시기에는 소크라테스 곁에 없었다. 두번째로 당시 그리스에서 널리 사용된 사약을 먹으면 심한 구토증세를 일으키면서, 전신의 마비와 경련과 함께 사망한다. 플라톤의 묘사와는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먹은 독약은 일명 독당근(Poison Hemlock, Conium Maculatum)으로 알려진 물건이다(알칼로이드계 독극물인 Coniine). 이런 구토증세를 일으키는 독약은 중추신경계를 공격하는 독미나리고,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당근은 심장에서 가장 먼 부위부터 말초신경계를 공격해 마비시키는 독약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최후는 오히려 플라톤의 서술과 같은 품위있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건 어떻게 죽었냐가 아니라 '왜 그가 죽음을 선택했는가?'다.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이 때 이미 70세를 넘겼고, 길어야 몇 년으로 이미 남은 삶이 얼마 되지 않는 나이였다. 일단 그는 재판장에서도 자기 신념을 꺾느니 죽겠다고 말한데다가 실제 기소된 죄목은 매국노와 폭군의 정신적 스승으로 아테네 전체의 증오의 대상이었으니 재판에서 타협의 여지는 없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이들을 대놓고 돕거나 한 게 아니라 단지 정신적 스승일 뿐이라 사형은 너무하다는 평가가 아테네 내부에서도 꽤 많았으므로 형벌을 벌금형 정도로 줄일 수가 있었는데 스스로 그것을 거부했다. 또한 감옥에서 얼마든지 탈옥할 수 있었는데 이 또한 거부했다.[16]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독배를 든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사실 소크라테스는 대화편에서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없다[17] 다만 소크라테스가 한 말은 '악법도 법이다'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크리톤'에서 친구 크리톤이 탈옥을 권유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법에 의한 판결을 (비록 그 판결이 부당해 보이더라도) 개개인의 판단으로 부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반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게. 가령 이곳에서 도망할 작정으로 있는 우리한테로, 이 짓을 어떻게든 일컫건 간에, 법률과 시민 공동체가 다가와서는 막아서고서 우리에게 묻는다고 말일세. “소크라테스여, 말해다오. 그대는 무엇을 하려고 하고 있나? 그대는 그대가 하려는 이 일로써 우리 법률과 온 나라를, 그대와 관련되는 한, 망쳐놓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나? 혹시 그대가 생각하기엔 이런 나라가, 즉 나라에서 일단 내려진 판결들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개인들에 의해 무효화되고 손상되었는데도, 그런 나라가 전복되지 않고서 여전히 존속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크리톤, 우리는 이 물음들이나 또는 이와 같은 부류의 다른 물음에 대해서 뭐라 대답할 것인가?(50a~b)

다른 측면의 설명으로는 그가 계약론적 사고를 가졌다는 해석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에게 한 말을 보면, 아테네와 아테네의 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다른 폴리스로 떠날 자유가 있었는데도 평생 아테네를 떠나지 않고 아테네가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면 이는 아테네의 법률을 지키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한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한다면 그 계약을 어기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외국으로 피하길 원했다면 애초에 재판정에서 영빈관에서 밥 사라고 어그로 끌지 않고 순순히 추방형을 제안했다면 충분히 받아들여졌을 텐데 이제 와서 판결에 불복해 해외로 도피하겠다는 건 모순이라는 것도 소크라테스 스스로 지적한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의 행동에 대한 설명으로 처음부터 국가의 안정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켰다는 설명이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배 및 이후 벌어진 피바람의 원인에 대한 청산 의도를 갖고 추진된 재판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고, 아테네 시민이자 제자들이 저지른 매국행위와 폭정으로 인해 벌어진 국가의 혼란과 몰락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할 입장으로써 재판에 순응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정황을 통한 추측일 뿐, 소크라테스는 그런 의미를 암시하는 말조차 한 적이 없다.

하지만 단순히 매국노의 스승이라는 점 만으로 아테네인들이 소크라테스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소크라테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이라는 풍자극에서 소크라테스를 교묘한 궤변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원수지간으로 만든 천하의 개쌍놈으로 묘사하고 있다. 모든 권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가 설파하는 '보편적 진리'가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거대한 권위로 변질할 것을 예측했고,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매도한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희생은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매우 숭고한 일로 여겨졌고,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세계에서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게 된다.

1.4. 평가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책을 쓴 적도 없고, 자신만의 사상을 전개한 적도 없다. 중앙대 심리학과 이장주 교수의 발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책이 기억력과 사고력을 감소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에 책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런 사고 방식은 고대 세계에서는 의외로 그리 드물지 않았다.

참고로, 그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플라톤에 의해 날조된 인물로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만으로 실존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뿐만이 아닌 다른 제자들이나 당대의 다른 소피스트들의 글에서도 볼 수 있었다. 다만, 다른 문헌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특히 제자인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고록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언행은 플라톤의 것과 큰 관련성이 없다. 플라톤의 후기 작품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이름만 소크라테스일 뿐, 플라톤의 고유한 사상을 소크라테스라는 등장인물이 말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철학적 업적 자체는 적다고 생각하는 이가 더러 있는데, 이는 상당히 잘못된 생각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통해 비로소 대상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직접적으로 계승되어, 더 나아가서는 2600년 서양철학사를 꿰뚫는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관념론으로 이어지기 때문. 때문에 철학적 업적 또한 결코 적지 않다.

따라서, 비록 플라톤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철학적 업적과 영향력은 상당한 편. 그리고 더 나아가 인지도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최고를 달리는 데[18], 이에는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삶의 모습과 진리를 대하는 진실된 자세, 그리고 죽음의 상징성[19]이 매우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고, 이로써 후대에 깊은 교훈을 남겼기 때문.

때문에, 철학적 업적에 있어서 최고로 꼽히는 철학자는 보통 플라톤 혹은 칸트이나, 가장 모범이 되는 철학자, 혹은 훌륭한 인간상으로는 소크라테스가 주저없이 꼽히는 편이다. (오죽하면 4대 성인 중 하나에 들어갈까...)

또한, 사상 최강의 토론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당대 똑똑하다고 알려진 정치인, 시인 등을 모조리 바르고, 특히 궤변을 통한 말빨로 먹고살던 소피스트를, 수장인 프로타고라스를 포함해 열 네명을 1:14로 관광 보낸 건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사건. 때문에 말빨과 논리 전개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학자로 평가된다.

다만 중요한 점은, 소크라테스의 토론목적은 말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으로 하여금 스스로 진리를 도출하게 하는 데 있고, 소크라테스는 오로지 산파로서 이것을 도와주기 위한 토론을 한다는 것이다. 즉 거짓되고 주관적인 논점으로 어쭙잖은 궤변이나 그럴싸한 논리로써 늘어놓는 이에게 있어 소크라테스는 말 그대로 사신과도 같은 존재이지만, 반대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이 거짓없고 진실하고 논리적이라면 그에게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산파와도 같은 존재이며,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인 것이다. 일례로 그리스의 위대한 존재론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와의 논쟁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딱히 그에게 태클을 걸지 못했었다.

소크라테스가 사신이냐 산파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아닌, 토론을 하고 있는 상대편의 수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가령 어쭙잖은 궤변을 잘 일삼는 키보드 워리어나, 현대의 몇몇 논객과 같은 이들에게는 소크라테스는 말 그대로 사신일 것이다.

1.5. 제자들


플라톤
세노폰
키비아데스
티스테네스

2.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로 2011년 12월 사망했다. 소크라테스(축구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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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로인해 발생한게 바로 '소크라테스 문제'. 누가 남긴 어떤 기록을 얼마나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 [2] 이 4대 성인 떡밥에 관해선 항목 참조 바람
  • [3] 즉, 미남은 성격도 좋다는 소리를 진지하게 믿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고발되어 잡혀온 창녀가 예쁘다는 이유로 무죄방면 되기도 했고,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에는 질 게 뻔한 전투에 참여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회의에서 퇴각해야 하는 이유를 조리있게 설명했지만 못생겼다는 이유로 주장을 묵살당한 병사의 이야기도 나온다.
  • [4] 하지만 크세노폰의 기록에 따르면 '용맹하고 남자의 풍모가 넘치는 미남'라고 한다. 뭐, 크세노폰은 뼛속까지 빠돌이였으니까.
  • [5] 아테네군의 운 좋은 일부 패잔병들끼리 뭉쳐 소규모 집단이나마 전열을 다시 갖췄다. 추격하던 기병들은 소규모이지만 저항할 태세를 갖춘 중보병무리들을 괜히 상대하다 다칠까봐 회피하고, 지천에 널린 손쉬운 먹잇감인 비무장 도망병들에게로 말머리를 돌렸다.
  • [6] 실제로 전투에서는 패닉 상태에 빠져서 무질서하게 패주하면 궤멸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패배하더라도 침착하게 전열을 어느 정도 갖춘 상태에서 후퇴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특히 그리스식 보병 은 뭉쳐있으면 상당히 강하지만 흩여지면 답이 없어서, 퇴각 상황에서도 전열을 유지하고 있으면 추격하는 기병이라도 함부로 덤비기가 상당히 부담스럽다.
  • [7] '조산사'라는 뜻의 산파(産婆)와 같다(!) 어머니가 산파였기 때문에 진리의 분만(?)을 도와준다고 "산파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는 석공인데 이것도 진리를 점차 찾아간다는 것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도. 그런데 이 방법을 개발한 사람이 대표적인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스 철학자 전기작가였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 (Diogenes Laërtius, 생몰년일은 불명. 그러나 남긴 저작을 분석하여 3세기 사람으로 추측한다.)가 그런 기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설령 소피스트가 이런 방법을 개발했다고 해도, 소크라테스가 산파술을 활용한 방향은 인습과 개념의 구분을 하지 않던 소피스트들과는 정반대로 인습에서 벗어난 개념을 정립하기 위함이므로 소크라테스의 위상에는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 [8] 소크라테스의 친구였던 카에레폰(Chaerephon)이 질문했다는 설이 있다.
  • [9] 대표적으로 크로이소스의 신탁이 있다. 리디아의 왕이었던 크로이소스가 무녀에게 "우리 전쟁하면 승리함?"이라고 물었더니 무녀 曰 "크로이소스가 전쟁을 한다면, 그는 대제국을 멸망시키리라."라는 답변이 튀어나와서 믿고 키루스의 페르시아와 전쟁했더니 되려 패배해 리디아가 멸망했다. 신탁의 대제국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리디아였던 것.
  • [10] 여기에는 다른 설도 있는데, 당시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의 신탁은 두 가지 방법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하나는 많은 돈을 받고 정식으로 써주는 거창한 신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적은 돈을 받고 예/아니오만 알려주는 약식 신탁이 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요청한 소크라테스의 친구는 이 약식 신탁을 받아서 답이 딱 떨어졌다고도 한다.
  • [11] 이는 서기 2세기 로마의 법률가 도미누스 울피아누스가 한 말로 전해지며, 1930년대 경성제국대학 법과 교수 오다카 도모오가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소개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실제로는 '국가가 나에게 철학을 포기하라 명령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고한다. 헌법재판소는 이미 2005년 11월에 소크라테스의 어록으로 '악법도 법이다'를 학교에서 가르치는것은 부적격하다고 의견을 냈다.
  • [12] 여담이지만, 이 크리티아스는 플라톤의 사촌이기도 하다. 그 사촌과의 대화담을 한 형식으로 사촌의 이름을 따서 만든 크리티아스라는 작품을 만들었으면 그 유명한 아틀란티스도 바로 이 크리티아스에서 실려나왔다.
  • [13] 참고로 소크라테스가 고소되었을 때의 죄목들은 1. 소크라테스는 국가 공직의 추첨제를 비판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국가제도를 경시하게 했다. 2. 병에 걸리거나 소송을 당할 때 아버지나 친척은 도움이 안되며 의사나 법에 밝은 자가 보다 유용하다고 하여 부모나 어른을 공경하지 않게 했다. 3. 호메로스의 시구를 악용하여 젊은이를 오도하게 했다. ...였다. 물론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건 아테네인들도 알고 있었으므로 본질은 알카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의 사상적 스승으로써 아테네를 파멸로 몰아넣은 죄였고 소크라테스 자신도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사형을 받아들인 것이다.
  • [14] 왜냐하면 소크라테스 자신은 올바름, 정의로움, 아름다움 등에 대해 아테네 사람들이 숙고하도록 만드는 철학적 행위야말로 어떤 행위보다도 숭고한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기소당한 바로 그 행위는 국가에 대한 킹왕짱 봉사이므로 영빈관에서 밥이라도 한끼 사야 되는 거 아니냐라고 주장해서 어그로를 끌었던 것. 참고로 아테네 시민이 영빈관에서 대접받으려면 개선장군이나 올림픽 경기 우승자급 위업을 이룩해야 했다(...)
  • [15] 플라톤 본인은 몸이 아팠다고 하고 있다. 다만 당시에도 그 이야기를 믿어준 사람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 [16] 법이 자신에게 유리할때만 적용받고, 불리할땐 피한다는것은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던 논리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기에 자신의 논리의 일관을 보이기 위해 탈옥하지 않았다.
  • [17] 이 말은 고대 로마의 법률 격언 “두라 렉스, 세드 렉스(dura lex, sed lex, 법이 지독해도, 그래도 법이다)”를 번역한 말이다. 로마의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가 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역시 자기 책에 저 격언을 인용했을 뿐이다. #
  • [18]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플라톤을 모르는 이는 널리고 널렸지만, 소크라테스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 [19] 진리와 정의를 위해 죄없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모습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죄없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비견될 만큼 상당히 충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