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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last modified: 2015-04-07 17:08:12 Contributors

Contents

1. 小將
2. 所長
2.1. 현장소장
3. 小腸
4. 所藏
5. 少壯
6. 訴狀
7. 蕭莊
7.1. 생애
7.2. 아버지 소방등

1. 小將

현대 군인의 계급체계중 장관급 장교의 2번째 단계.

자세한 것은 소장(계급) 항목 참고.

2. 所長

연구소, 훈련소 등으로 끝나는 주로 지식,인재양성을 맡는 기관의 장 또는 소(所)라고 이름 붙은 기관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어? 그럼 주유소는

2.1. 현장소장

하나의 건설현장의 총책임자이며 해당 회사에서의 직급은 부장이다. 해당 건설현장의 모든것을 총괄하며 그에 따르는 책임도 큰데 안전사고가 발생할 경우 은팔찌를 차기도 한다. 하지만 월수입은 건설현장의 총책임자 답게 쩔어준다. 큰 공사를 맡을 경우 대기업 고급간부가 안부럽다. 자신이 맡은 건물이 무사히 완공되면 결코 섭섭하지 않은 큰 수입을 올리지만 인명피해를 동반한 사고가 날 경우 현장소장의 인생은 망한다. 물론 재산피해만 날 경우 회사 차원에서 변상 조치로 끝나기 때문에 현장소장에게 큰 타격은 없다.

3. 小腸

  • 이 부분에는 작은창자 항목으로도 들어올 수 있다.

신체기관으로 위와 대장 사이에 있는 길이 6∼7m에 이르는 소화관으로 소화운동을 하면서 영양분을 소화,흡수하는 기관이다. 작은창자라고 한다.

위액에 의해 암죽처럼 된 음식물은 소장을 통과하는 사이에 소장벽에서 분비되는 장액, 간에서 만들어지는 쓸개즙, 이자에서 나오는 이자액 등과 혼합된다. 소장은 소화운동을 하면서 영양분을 소화·흡수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소장은 위에서부터 십이지장·공장(空腸)·회장(回腸)의 세 부분으로 구분한다. 소장 내면의 점막에는 윤상으로 뻗어 있는 수많은 주름이 있고 그 표면에 융모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 융모 사이로 장선이 열려 있어 장액을 이곳으로 분비하며 음식물을 분해하고 영양을 흡수한다.

장기자랑 2번 항목에서 가장 외출이 잦은(...)부위. 이럴때 사용하는 용어 혹은 실제 음식인 순대돼지의 소장을 이용한다. 단 분식집등에서 파는 공장순대의 경우 의 소장을 이용한다.

4. 所藏

자기의 것으로 지니어 간직함. 보관,소유등의 용어보다 좀더 물적,정신적 자산으로써 가치를 갖고 보호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즉 소장가치가 없는 물건은 가지고 있어봐야 소장이라고 안한다는 말.(...)

오덕계에서 흔히 하나의 굿즈는 3개를 사서 하나는 소장,하나는 포교,하나는 사용한다는 말을 쓸때 소장이 이 소장이다. 그렇듯 오덕들도 소장가치에 목매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런 오덕들의 요구를 반영한 물건이 바로 한정판.

5. 少壯


젊고 기운차다는 뜻. 현대에선 주로 정치판에서 많이 쓰는 용어로 젊은 정치인들을 소장파 정치인이라고 부르며 나이많은 노장파의 반대말로 쓴다.

따라서 소장파(少壯派)란 어떤 단체내부에서 비교적 젊은 구성원들이 모여 하나의 세력을 이루는 파를 의미한다. 때문에 비교적 급진적이며 기존 질서의 개혁을 추구하곤 한다. 단 소장파가 무조건 좋은 단체는 아니다.

6. 訴狀

법률 소송을 제기하기 위하여 제일심 법원에 제출하는 서류를 말한다.

비슷한 말로 소송장, 소첩, 진정서등이 있으며 이 소장에는 법정 기재 사항인 당사자, 법정 대리인, 청구의 취지, 청구의 원인을 적어야 한다.

위의 단어들과 달리 이 소장은 [소ː장]이 아닌 [소짱]으로 발음한다.

7. 蕭莊


548 ~ 577

7.1. 생애

중국 남북조시대 wiki : "양(육조)" 양나라의 비정통 황제이다. 원제 소역의 손자이며 소방등의 아들이다. 552년 원제가 즉위한 뒤에 소장을 영가왕(永嘉王)으로 삼았다. 554년 서위소찰과 함께 강릉을 점령하고 소역을 잡아 죽였을 때 소장은 당시 7세에 불과했고 추격을 피해 어느 민가로 도망가 숨었다. 이후 왕림(王琳)이 소장을 찾아내어 건강으로 보냈다. 그러나 건강에 도착한 소장은 경제 소방지가 즉위한 후 인질이 되어 북제로 보내졌다. 557년 진패선이 소방지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양나라를 멸망시키고 wiki : "진(육조)" 진나라를 건국하자 왕림 등 사람들은 양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북제에 소장을 돌려보낼 것을 요청했다. 왕림 등은 소장이 도착하자마자 그를 영주(郢州)에서 양나라 황제로 옹립했고 소장은 이듬해인 558년 연호를 천계(天啓)로 개원했다. 소장은 장강 중·상류 유역의 땅에 의지하여 진나라와 싸웠다.

560년 왕림과 진나라의 후진(侯瑱)이 무호(蕪湖)에서 싸웠다. 그런데 이 때 북주에서 군사를 보내 영주를 공격하자 결국 왕림이 패배했고 영주는 함락되었다. 이 떄 소장은 북제로 도망으며 이로써 양나라 부흥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소장이 북제로 달아나자 북제는 소장을 개부의동삼사와 양왕으로 봉하고 양나라를 다시 일으키도록 허락하고 도왔다. 하지만 이미 북제가 망해가던 시대라 크게 성과는 없었고 577년 북제가 북주에게 멸망당하자 소장은 분통해하다가 옛 북제의 수도 에서 병으로 죽으니 향년 30세였다.

7.2. 아버지 소방등

528 ~ 549

원제 소역과 상동왕비 서씨(徐氏)[1]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는 실상(實相)이다. 아버지 소역이 상동왕 시절 태어나자 곧바로 왕세자로 봉해졌으나, 소방등의 어머니 서소패는 못생겼고 소역의 후궁들에게 질투를 느꼈으며 또 실수하는 행실이 많았기 때문에 소역에게 총애를 받지 못했으므로 소방등 역시 총애를 받지 못했다. 후경의 난이 일어나고 할아버지 무제가 죽은 뒤 소역은 건강에서 봉지인 강릉으로 돌아갔고 소방등이 군사를 통제하는데 화목하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 비로소 그 능력에 탄복하였다. 그러나 서소패가 소역이 자신을 총애하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행동을 올바르게 하지 않자 소역이 화가 나서 큰 쪽문에다 서소패의 행실을 대강 써서 방을 붙였고 소방등이 이를 보고 오히려 더욱 두려워했다.

소역이 후경을 토벌하기 위해서 조카이며 하동왕 상주자사 소예에게 사자를 보내 그 양식과 무리들을 감독하려고 했으나, 소예가 세 번이나 거부했다. 그러자 소방등이 소예를 먼저 토벌하기를 요청했고 소역은 넷째 아들인 안남후 소방구를 상주자사로 삼고 이어서 소방등에게 명령해 정예군 2만 명을 거느리고 소방구를 상주로 호송한 뒤 소예를 격파하고 소방구로 하여금 상주자사를 대신하도록 하게 했다. 소방등이 곧 출정하려고 할 즈음에 친한 사람에게 "이번에 가서 난 반드시 죽을 것인데 죽더라도 그에 적당한 곳을 얻는다면 내 어찌 다시 한스러워 하겠는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소방등의 군대가 마계(麻溪)에 도착했는데 소예가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소방등을 기습 공격하니 소방등의 군대는 패배하고 소방등은 물에 빠져 익사했다. 소방구가 패군을 거두어서 강릉으로 되돌아갔고 소역은 소방등이 죽었는데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소역은 소방등을 무열세자(武烈世子)로 추시했고 552년 황제로 즉위한 뒤 이어서 시중, 중군장군(中軍將軍)과 양주자사(揚州刺史) 등의 관위를 추증했으며 이어서 충장세자(忠壯世子)로 다시 추시했다. 문학가였던 아버지의 끼가 좀 있었는지 생전에 《삼십국춘추(三十國春秋)》와 《정주자(靜住子)》를 저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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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름은 서소패(徐昭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