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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last modified: 2015-07-12 02:29:49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1.1. 수뇌부
1.1.1. 1941년
1.1.2. 1945년
1.1.3. 1991년
2. 발전
2.1. 창군과 내전을 통한 깨달음
2.2. 종심 작전의 부상
2.3. 제2차대전: 피의 수업료를 지불하고 무적이 되다
2.4. 냉전 : 미국의 라이벌
2.4.1. 기본전략 : 비대칭전력
2.4.2. 육군
2.4.3. 해군
2.4.4. 공군과 방공군
2.4.5. 말기
3. 병폐
3.1. 정치장교의 지휘간섭
3.2. 대숙청
3.3. 인명경시
3.4. 안습한 군수능력
3.5. 조직 체계 문제
3.6. 취약한 훈련수준
4. 징병제(대한민국 국군과의 공통점과 차이점)
5. 개입한 전쟁 및 분쟁
6. 군조직
6.1. 각군별
6.2. 군관구
6.3. 함대
7. 훈장
8. 군가
9. 기타
10. 관련 항목
11. 한국계 인물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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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해와 해를 거듭하며 더욱 강해지는 소비에트 인민의 힘이라!"

1988년 소련 '조국 수호자의 날' 기념 포스터.

창설부터 1946년 이전까지의 이름
붉은 군대
Красная Армия
Red Army
크라스나야 아르미야
Рабоче-Крестьянская Красная Армия
(노동자-농민의 붉은 군대: 라보체-크레스치얀스카야 크라스나야 아르미야: 1917-1946)

1946년 이후의 이름
소비에트군
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소비에트군: 바아루죤늬예 실릐 사볘츠까바 사유자:1946-1991)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대.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붕괴하는 순간까지 미군과 함께 세계 최강의 군대였고,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군대였다. 2차대전 종전시에는 약 1000만, 냉전 말기에도 총병력이 500만 명 이상이었다.

초기에는 종심작전의 창안 등 큰 발전을 보여주지만 대숙청으로 죄다 무위로 돌아가는 등 불안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더니, 제2차 세계대전시 추축군을 상대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경험과 전략을 배우고 종심작전을 부활시키는 등 크게 성장한다.[1] 승전한 시점에서는 그 군사력이 워낙 강한데다, 자본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명시한 공산당 이론과 힘의 논리에 민감하던 점이 겹쳐 다른 나라들을 불안케 했다. 실제로, 냉전 기간 동안 소련군의 주된 임무는 전쟁발발시 나토군을 분쇄하고 서부유럽에 진주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막대한 양의 병력과 전차, 항공기를 준비하고 육군 병력의 70% 가량을 유럽지역 국경에 공격형으로 배치하고 있었다. [2]

1.1. 수뇌부

2차대전때까지의 소련군 수뇌부는 스타프카라는 일종의 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1.1.1. 19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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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발발당시 스타프카의 구성원.

위줄부터 세묜 티모셴코 원수(국방장관), 이오시프 스탈린 수상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 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장관,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총참모장)
세묜 부됸늬 원수,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대장(해군 총사령관)

1.1.3. 1991년


해체 당시인 1991년 기준이다.

통수권자 국방장관 총참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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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 예브게니 샤포슈니코프 공군 대장 블라디미르 로보프 대장

이 중 국방장관은 소련 보수파 쿠데타 이후 임명된 옐친계 인물들이다.안습의 고르바초프

2. 발전

2.1. 창군과 내전을 통한 깨달음

러시아 제국러일전쟁 패배와 국내 혁명운동으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닌데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결국 전비 때문에 제정이 몰락하고 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임시정부는 제정에 뒤이어 전선을 맡았으나, 결과적으로 전황은 더욱 나빠졌고, 이틈을 타서 볼셰비키당이 휘하 소수병력을 이용하여 정권을 전복하고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했다.

그러나 새로 정권을 잡은 이들은 대다수가 군대나 군사에 정통하지 못한 비전문가들이었다. 게다가 아직 불안정한 정권의 상태를 볼 때, 군대처럼 힘있는 집단이 반란을 시도할 경우 체제가 전복되는 것도 가능했다.[4] 영관급 이상의 경험많은 장교들은 대부분 반혁명세력의 편에 섰고, 이들은 공산당에 대항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볼셰비키당의 무력은 병사 소비에트와 연결된 적위대뿐이었다.

그 후로 러시아는 1918년부터 20년까지 적백내전에 돌입하며, 실제로 그 후유증은 20년대까지도 계속됐다. 그 불안한 틈을 타고 다른 나라 군대들이 러시아를 침범하기도 했다. 미군, 일본군도 백군을 지원하며 공산세력과 싸웠지만 결국 승리는 붉은군대에게 돌아간다.

초기의 적위대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에 따라 '인간은 모두 평등하므로' 계급제를 완전히 없애려 했다. 붉은군대의 전신으로도 볼 수 있는, 병사 소비에트에서 지휘관은 선거로 뽑히던 전통 때문에, 적위대의 지휘관은 선거로 뽑혔다. 그러나 이 때문에 사병 출신들이 지휘관을 맡게 됨에 따라 내전 초기에 적위대는 연패를 했다. 레온 트로츠키는 1918년 적위대를 개편해서 장교선거제도를 폐지하고 위에서 능력자를 지휘관에 임명하는 체제로 바꾸고, 이름을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군대"로 개칭했다. 문제는 "능력자"들이 대부분 러시아 제국군 장교출신이었으므로, 이를 감시하게 도입한 것이 정치장교 제도. 그러나 트로츠키 아래서 계급제도는 끝내 내전이 끝날 때까지 도입되지 않았다.

그래서 군대에는 계급제에 의한 통제가 사라지고 부대 내에는 오로지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같은 직책만이 존재하게 됐다. 예외는 장군 뿐이었기에, 군의 계급은 사실상 '병사, 장군' 이 둘 밖에 없었다. 사실 고급 장교들 사이에서는 그런 직책이 계급 역할을 하기도 했다. 보병이나 기병들로만 싸운 적백내전에서 승리하는 등, 처음에는 이런 체제가 그럭저럭 돌아갔다. 그러나 문제는 군이 복잡해지면서 불거졌다. 복잡한 조직에서 개나소나너도나도 같은 계급이다 보니, 지휘관의 명령을 듣더라도 병사들이 잘 따르려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중대장이나 대대장 이외엔 중간 책임자가 없었기에 병사들은 평상시에도 통솔하기 힘들었지만, 전시에는 더더욱 통제가 불가능했다. 누구 하나 명령이 제대로 수행되는지 안 되는지 관심 없었고,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때문에 트로츠키에 이어 붉은군대의 총사령관[5]이 된 미하일 프룬제는 이를 개혁하려 했으나, 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면서 이 문제는 계속 남았있었다. 그동안 붉은군대는 500만 대군으로 성장한데다가, 기갑부대, 공수부대와 같은 새로운 병과가 창설되면서 계급의 필요성이 절실히 제기되어, 결국 1935년 붉은군대에 계급제도는 마침내 도입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적백내전의 경험은 소련의 군사학과 군사 사상을 크게 발전시켰다. 1차대전보다 훨씬 광활한 지역에서 내전을 겪은 소련군은 부족한 예비 전력을 철도로 이동시키면서 전선 곳곳을 틀어막았고, 간신히 패배를 면할 수 있었다. 연이어 위협받던 전선을 증강하기 위해 철도로 대규모 부대가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적백내전은 또한 제대 전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부 보병 사단들은 전쟁 기간 중에 다섯 차례나 여러 전선을 오가야 했다. 이 경험을 통해 모든 참전자들은 준비된 전력과 전략 예비대의 필요성을 뼈아프게 인식하게 되엇다.

내전 과정에서 소련군 1세대 지휘관들은 소수의 전력으로 광대한 공간을 방어한 대다수의 전투들을 큰 경험으로 삼아, 이와 같은 전장 환경에서 모든 전술적인 작전들을 전체 전역으로 통합하여, 적 후방 깊숙한 목표를 겨냥했다. 그리하여 붉은 군대는 승리의 2가지 원동력은 특정 지역에 적을 압도하는 전력을 집결시키는 것과 산개한 적을 섬멸하기 위한 후방 진출, 돌파, 포위 등의 신속한 기동에 있음을 깨닫게 되어 당시의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먼저 기동전의 필요성을 깨닫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기동의 전제 조건은 고도로 기동화된 공세 전력이었고, 적백 내전에서는 이점을 무장 열차와 차량, 특히 기병 전력에 많은 부분을 의존했다.

2.2. 종심 작전의 부상

적백 내전이 끝난 후 붉은 군대는 전선군 내지 야전군 규모의 작전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1차대전 시절같은 1회의 전략적 승리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닌 지속적이고 누적되며 연속적이고 장기적인 작전을 연구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의 비슬라 강까지 진격한 미하일 투하쳅스키는 위와 같은 소련 군사학계의 논의에 공감하여 블라디미르 트리안다필로프의 '충격군' 이론을 받아들여 이를 자신의 '광정면 동시접촉 이론'과 결합시킨 소련식 기동전 전술인 '종심전투교리'를 완성시켰다. 투하쳅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는 현대식 군대는 한 번의 결정적인 전투로 무너트리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방대하고 피해로부터의 회복도 빨라서 공격자는 일련의 연속적인 공세를 펴야 하며, 각 공세는 직후에 적 후방에서의 신속한 전과확대로 연계되거나, 방어자가 전력을 재정비할 때는 새로운 전투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전투를 일반적인 전략의 문맥에 놓고 본다면, 당시 소련 군인들은 개별 전투의 전술과 전체 전쟁의 전략 사이에 위치한, 용병술의 새로운 수준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간적인 수준은 알렉산드르 스베친이 저술한 책 제목인 '작전술'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작전술은 전체 전략적 작전이나 전체 전역의 맥락에서 대규모 부대의 작전을 기획하고 조율하는 상급 지휘관들의 영역이자,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한 일련의 연속적인 군사 행동이다. 참고로 영어로는 'Operational Art'.

모든 전선에서 충분한 밀도의 부대로 적을 고착시킨 후(견제군의 역할) 선택된 지점을 보병, 포병, 전차가 결합된 충격으로 돌파할 수 있으며, 그 간극을 통하여 항공기 및 기계화 부대의 지원을 받는 기동군을 적 후방에 투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종심전투교리는 1929년부터 소련군의 표준 전술로 정착됐지만 아직 공업화되지 않은 소련에게는 다소 꿈같은 전투교리였으며 그 영역이 전술 차원에만 미쳤고 아직 작전술의 범위까지는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까지는 투하쳅스키 이론을 지지해 준 스탈린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종심전투 교리의 실행을 위한 대규모 기갑세력 양성 등 붉은 군대의 현대화 계획을 적극 집어넣었다. 이를 통해 1936년에 이르면 마침내 소련 군사학계의 최고 걸작인 종심작전이 탄생하게 되었다. 종심작전은 현대의 러시아군중국 인민해방군, 조선인민군 등의 공산권 표준 전투교리로 자리잡게 된다.

당시 영국의 리델 하트와 프랑스의 샤를 드 골이 기동전 교리를 상부에 내놓았지만 번번히 무시당하고 독일의 하인츠 구데리안 또한 그다지 대접받지 못한 시대임을 감안하면 종심작전의 등장은 큰 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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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 훈련중인 소련군. 1935년.

그러나 결국 대숙청의 칼바람이 붉은 군대에 몰아닥쳐서 투하쳅스키가 처형당하자, 종심작전은 철저히 부정당하게 되었고 소련의 군사 사상은 크게 퇴보하고 만다. 그 결과는 겨울전쟁독소전쟁 초반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혹독한 경험을 치른 소련군은 게오르기 주코프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를 비롯한 숨은 투하쳅스키 지지자들에 의해 종심작전이 부활하고(앞으로 종심작전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베를린을 점령해 나치 독일을 패망시키게 된다.

이미 소련이 사라졌고, 소련군의 군사 교리는 원판의 경우 당연히 러시아어이며 그쪽 군사 기밀이었다. 다만 우리에겐 천조국이 소련과 어떻게 싸울까를 먼저 연구를 했고 그 결과를 특수작전교범(Special tactics)으로 출간했으며 인터넷에서 그 교범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며 단지 영어로 적혀 있다는 사소한(...) 문제만 극복할 수 있다면 간단하게나마[6] 공부해볼 수 있다.

다음은 소련군 작전술의 핵심들이다.
  • 기동을 통해 적을 물리친다.
  • 적이 대규모로 유기적인 활동을 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
  • 적이 상황에 맞춰 반응하는 것을 막는다.
  • 군단 이상 단위를 갖는 적의 조직과 통제를 부순다.

이를 위해서 강조되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 기동성
  • 속도
  • 우선권
  • 유연성
  • 주 목적 달성에 집중할 것
  • 기습
  • 전장 정보
  • 전투력의 유지
  • 효과적인 조직

2.3. 제2차대전: 피의 수업료를 지불하고 무적이 되다

1941년 6월 독소전쟁 발발 이후, 12월 모스크바 전투 직전까지 약 5개월간 소련군이 날려먹은 병력은 사상자와 포로를 합해 약 600만으로서, 전쟁 직전의 총전력을 거의 탕진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여기에 장비의 손실도 엄청나서 전투기와 전차의 손실량은 각각 2-3만대에 육박했다. 이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첫번째로 대숙청으로 조직력과 지휘력이 매우 약화된 점, 두번째로 부적절한 병력 배치, 세번째로 2년간 실전경험을 쌓아 최강의 군대로 성장한 독일군의 가공할 전력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엄청난 병력을 날려먹었기 때문에 야전의 허리가 되는 경험많은 초급장교와 부사관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며,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혀 훈련을 받지 않은 초급장교들과 부사관들이 일선지휘를 맡으면서 (+ 전통적인 러시아의 인명경시가 합해져) 1943년 말까지 독일군에 비해 몇배나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이렇게 버티면서 사관학교가 아닌 실전에서 교리를 학습하게 된 이런 초급장교나 부사관들의 레벨업이 계속되고, 살아남은 사병들이 경험을 쌓으면서 초급장교나 부사관으로 계속 승진함에 따라 소련군의 전력도 계속 업그레이드가 된다. 특히 러시아 혁명 이후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고 대숙청 이후 쾌속승진한 40대 고급지휘관들[7]의 지휘가 세련되어 가면서 소련군은 점점 소프트웨어면에서 독일군에 맞설만한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소련은 이미 1941년 전쟁 발발 직후부터 독일이 1943년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총력전 전산업 총동원체제를 실시하였다.(독일군의 동원체제가 늦은것은 장기전을 주비하던 히틀러쪽의 계산이라는 설이있다.)독일군의 진격이 예상되는 곳에서는 아예 공장 전체의 설비가 며칠만에 해체되어 우랄산맥 동쪽에서 조립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무기의 대량생산을 달성함으로써 물량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현대전에서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분명히 개별무기의 성능은 장인정신의 극치로 정성껏 만들어내는 독일군이 우수했지만, 소련은 개별 성능은 독일에 미치지 못해도 생산비용, 소비자원, 생산물량 등을 고려한 총합은 독일보다 우수한 무기들을 뽑아내는데 성공함으로써 하드웨어에서도 우위를 점하는데 성공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독일군 지휘부는 소련을 군사적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특히 미군이 개입한 이후로는 소련의 정복이 아니라 전선안정화를 목표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3년 여름 소련군의 주력을 섬멸하기 위한 치타델 작전을 실시했다가 위와 같이 업그레이드된 소련군에게 결정적으로 패하면서 동부전선의 균형추는 소련측으로 기운다. 이후 소련군은 투하체프스키가 생전에 꿈꾸었던 종심작전 교리를 십분 발휘하여 독일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했으며 바그라티온 작전, 비수아-오데르 대공세, 8월의 폭풍 작전에서 인상적인 기갑웨이브 공세를 발휘함으로써 서방측에게 깊은 인상과 함께 공포감을 준다.

2.4. 냉전 : 미국의 라이벌

2.4.1. 기본전략 : 비대칭전력

냉전이 시작되자 소련군은 미국에 위협을 느끼고 동유럽 위성국들과 함께 집단방위동맹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물로 나온 것이 바르샤바 조약기구(WTO)였다. 소련은 미국으로 상징되는 서방세력과 직접적으로 맞설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동유럽 위성국들로 하여금 완충지대를 만들어서 2차대전과 같은 사태를 다시는 겪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의 두배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제2차대전에서도 소련의 생산시설은 반 이상 파괴되었지만, 미국은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소련이 단시일 안에 미국의 국방력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해서 군사비에 몰빵하는 것은 안 그래도 좋지 않은 국내경제를 악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흐루쇼프 이후 소련 지도자들은 재래식 무기에 몰빵하는 대신 핵무기와 미사일로 전쟁억지력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아예 전략로켓군이 따로 편제되어 있었으며, 이런 정책의 대표적 부산물이 바로 스푸트니크 인공위성과 차르 봄바.

2.4.2. 육군

제2차대전 중 급속도로 팽창한 소련군은 전쟁 말기가 되면 500여개 보병사단과 50여개 전차군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 당시 총병력은 천만을 넘었다. 소련군은 전쟁 직후부터 병력을 감축하면서도, 기갑덕후인 독일군과 싸우면서 얻은 '전차는 육상전의 제왕이다'라는 교리에 충실하게 군개혁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완전 기계화에 몰두하게 되었으며 주코프가 국방장관을 맡고 있던 1957년이 되면 전차군단은 전차사단으로, 일반보병사단은 기계화보병사단으로 전환되었고, 전통적인 보병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기계화보병사단은 3개의 기계화보병 연대와 1개의 전차연대를 보유했다. 전차사단은 그 반대비율로 3개의 전차연대와 1개의 기계화보병 연대를 보유했다. 냉전의 최정기에 소련군은 500만의 병력과 210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일반보병사단은 없고 특수부대를 제외하면 전체가 기계화보병이거나 전차사단이었다.

가끔 인터넷에 나토가 침공 징후를 보이는 유사시에는 핵선제공격과 함께 7만대의 탱크가 서부유럽으로 우르르 몰려나오는 작전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가 돌아다니는데,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실상은 이렇다. IISS에서 발간하는 연감 밀리터리 밸런스(Military Balance)는 소련군이 보유한 전차 수량을 53,000대에서 55,000대 수준으로 잡았다. 7만대는 소련 전차전력 전부와 바르샤바 조약국을 모두 포함한 수치다. 그나마도 맬컴 찰머스(Malcolm Chalmers)와 루츠 운터제어(Lutz Unterseher)는 "Is There a Tank Gap?: Comparing NATO and Warsaw Pact Tank Fleets"라는 논문에서 바르샤바 조약군이 이탈리아, 터키, 그리스, 스페인, 노르웨이를 제외한 중부 유럽에 개전 3일 후 동원 가능한 전력을 9,900여대로 추산하면서 6,700여대를 동원 가능한 NATO군에게 단지 1.47:1의 수적 우위밖에 가지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추정으로는 스티븐 잘로가(Steven J. Zaloga)의 수치가 있다. 잘로가는 "Tank War-Central Front: NATO vs. Warsaw Pact"에서 소련군이 1989년 기준 치장물자를 포함해 중부 유럽에 17,000여대의 전차를 배치해두고 있어 13,000여대의 전차를 배치한 NATO보다 1.3:1의 수적 우위를 가진다고 계산했다.

물론 잘로가는 소련군의 동원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NATO의 증원능력은 보수적으로 접근하면서 동원령 발효 30일 후에는 소련군이 전차 4만여대를 중부 유럽에 동원, 약 15,000여대를 동원 가능한 NATO 중부유럽군보다 약 2.6:1의 수적 우위를 가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찰머스와 운터제어는 소련군의 동원능력이 상당히 취약하다고 평가했으며, NATO의 증원능력도 보다 높이 샀다. 이 추산대로면 소련군이 개전 120일까지 전차 28,000여대를 동원 가능하지만, NATO 중부유럽군의 전차전력도 21,000여대까지 증강된다. 전력 비율은 고작 1.31:1로 소련군=물량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게다가 소련군이 선제핵공격을 수행했을지조차도 확실치 않다. 소련 핵전략은 시대별로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70년대 이후 소련군은 선제핵공격을 내켜하지 않는 편이었다. 77년 툴라 선언에서 선제불사용(No First Use)를 천명할 정도. 80년대 초반에는 선제사용을 아예 고려치 않았고 80년대 후반에도 제한적으로 고려되는 수준이었다. 물론 툴라 선언 이후에도 선제핵공격을 전제로 한 작전계획이 수립됐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건 여러 작전계획 중 하나일 확률이 높다. 실제 전력구조와 작전술의 발전이 재래전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했기 때문.

정규전이 벌어졌다면 무시무시했겠지만, 문제는 8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을 때다. 게릴라전이 중심이고 좁은 산지의 비탈길이나 돌산을 오가며 벌어지는 아프가니스탄의 전투에서는 그 우월한 기갑전력도 큰 효용이 없었고, 인명을 돌보지 않는 무자비한 공격과 피점령지 정책은 결국 소련군에는 반전과 염세주의를 퍼트리고, 아프간인들을 무자헤딘에 가담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8년만에 GG치고 물러났다.


2.4.3. 해군

육군에 비해 해군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그래도 세계 순위권 다만 2차 대전 당시에 소련군이 이탈리아군조차 가지고 있었던 전함을 보유하지 못했다는 편견은 사실과 다르다.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소련은 강구트급 전함을 네 척이나 보유하고 있었고[8] 적어도 수치상으로는 경쟁자인 독일에 비해서 압도적이었다. 다만 전형적인 내륙 국가인 소련의 특성상, 전함이 나설 자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2차 대전 당시에 소련이 전함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사실 강구트급은 러시아제국때 설계 제작한 것이므로, 소련은 성립후 한동안은 신형전함을 만들 생각이 없었던 것은 맞다. 해군력제한을 위한 런던 군축회의나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소련은 끼지도 못했으니.. 굳이 따지자면 1980년대 나온 키로프급이야말로 소련이 순수히 설계제작한 유일한 전함으로 볼 수 있다. 서방측을 자극할까봐 순양전함이라는 요상한 명칭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구트급이 마냥 항구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것은 또 아니다. 비록 구식 전함이긴 하지만 다행히도 독소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현대화 개장을 끝마쳐서 나름대로 쓸만한 정도는 되어 있었다. 발트 함대 기함 마라와 1번함 옥차브리스카야 레볼루치야는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몰려오는 추축군을 향해 함포 사격을 퍼붓다가 각자 격침, 대파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체를 바닷물에 담근 채로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끝날 때까지 함포 사격을 계속 하여 훗날 레닌그라드의 불사신으로 불린다. 유일하게 무사했던 3번함 파리쥐스카야 코뮤나도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면서 포격 지원을 하며 요긴하게 써먹었다.

이 전함들은 전후 10년 동안 더 굴리다가 1956년에 스크랩 처리되거나 훈련용 표적함으로 생을 마쳤다. 이어서 본격적인 냉전이 시작되자 소련은 바다에서 크게 밀리기 시작한다. 현대 해군 건설은 왠만큼 중공업 생산력이 뛰어난 나라 조차도 쉽지 않은 대형 프로젝트로, 주력함을 제작하는 데에는 수천톤의 철과 수 년의 시간이 소요되는데 막 2차 세계대전의 여파를 벗어난 소련에게는 그 보다 더 시급한 프로젝트가 셀수 없다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된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의 유사시 적국들은 미국, 영국과 같이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이미 세계 톱의 해군을 보유한 국가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적인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비대칭 전력인 잠수함 전력에 힘을 기울였고, 소련 해군의 수상함은 미국에 절대적으로 뒤졌지만 잠수함 전력 만큼은 미국에 위협적인 수준이 되었다.[9]

전략적으로 거의 섬나라인 미국과는 달리 소련은 여러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다가 제대로 된 항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규모의 해군 운용은 무리였다. 그리하여 육군이 NATO를 대단히 위협할 정도로 공세적인 전략을 가진 데 반해 해군은 수세적인 전략으로 일관했다. 소련 해군은 항모전단을 구성해 미해군의 항모전단과 대결하기보다는 소련 근해로 다가오는 미함대를 원거리에서 미사일로 요격하려는 수세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항공모함은 1990년 소련이 망하기 1년 전에야 겨우 어드미럴 쿠즈네초프급으로서 운용할 수 있었다. 소련 해군 항공대는 항공모함이 아니라 육상기지에서 발진하여 미국의 항모전단을 공격하는 것으로 상정되어 있었다. 베트남이 공산화된 후 미국이 지어놓고 떠난 캄란만 기지를 공짜로 얻어 썼고, 이것으로 소련 태평양 함대는 동남아까지 진출할 수 있었으나, 소련 붕괴 이후 철수한다.

2.4.4. 공군과 방공군

냉전기간 동안 일단 소련은 항공기의 숫자 면에서는 미국을 훨씬 앞지르고 있었으나, 실상은 자기들이 질적 전력면에서 뒤쳐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2차 세계대전기 독일공군에 워낙 호되게 당한 것 때문에 대공 미사일과 화기류 개발에 큰 관심을 쏟았다. 2차대전에서 소련 공군을 지휘한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공군원수는 흐루쇼프에게 대규모 공군 건설을 제안했으나, 흐루쇼프는 국방비를 줄이고 싶어했기 때문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어에 치중하여 대공미사일과 대공무기 개발에 열심이었고, 특히 대공미사일 성능은 뛰어났다. 그러나 80년대 초 까지도 전투기와 요격기는 숫적 우세를 앞세우는 저성능기 위주의 항공기가 대다수였고, 이는 이란 혁명 당시 입수 된 미군 항공기와 그 교범을 분석한 소련군이 Su-27MiG-29기 등을 배치할 때 까지 별다른 대책이 없이 이어진다.[10]

소련군은 공군과 방공군을 분리하여 방공군에게 방공전투기 + 고고도 대공미사일, 군사위성을 담당시켰다. 우주군도 방공군 소속이다. 일반 공군에는 전투기와 전략, 전술폭격기를 운용하게 했다. ICBM이나 중거리탄도탄 같은 경우는 전략로켓군에서 담당했다. 그 이외에도 특이한 점은 수송기 세력인데, 워낙 영토가 넓다보니 유사시 신속대응군 역할로서 공수부대의 규모와 임무가 매우 중요하였다. 때문에 수송기의 성능과 그 숫자등에서 우월한 경향을 보인다. 냉전기에 생산된 소련 수송기들은 냉전이 끝난 지금에도 민간화물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자주 사용될정도.

2.4.5. 말기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 실시한 개혁이 실패하고 경제가 붕괴되면서 소련은 해체되었고, 소련군도 공중분해되었다. 국방비나 병력이 전성기의 1/10까지 줄어들고, 국방 시스템이 모조리 붕괴된 나머지 2000년대 중반까지 그 후신인 러시아군은 안습이었다. 푸틴 집권이후 나아졌다. 자세한 것은 러시아군 참조.

3. 병폐

3.1. 정치장교의 지휘간섭

위에서도 말했듯, 군사분야에 미숙한 정치가들이 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다 보니 독소전쟁 초기까지는 그 부작용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치장교 시스템이다. 소대장급 이상 지휘관에게는 같은 권한에 같은 계급의 정치장교가 1:1로 따라 붙었다. 이들은 당의 이론과 지시를 군이 잘 따르도록 지시하고 교육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들은 군의 계급, 명령체계에서 독립된 조직으로 공산주의 이론이 우선적으로 교육되었다. 사실상 부대 안에 지휘관이 두 명인 셈이라, 의사결정에 걸리는 시간이 두 배로 늘고 신속한 결정을 내릴 수 없어 군의 작전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더욱 문제를 심화시킨 요인은 정치장교들이 권한은 큰 주제에 군사적 자질이 심각하게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에 있었다. 차라리 그냥 지휘관이 둘이면 또 모르겠는데 대부분의 장치장교들은 군사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거의 꽝인 수준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소련군은 군인 둘이 아니라 군인 한명과 말 안 듣고 하는 일마다 꼬치꼬치 태클 거는 민간인 한명에게 지휘받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중대장 : "파시스트의 전차가 우리 진지로 몰려들고 있다! 통신병은 즉시 공격 중인 병력들을 참호로 복귀시키고 대전차 포대에 연..."
정치장교 : "중대장 동지의 의견은 스탈린 동지의 지시와 맞지 않소! 스탈린 동지께서는 모든 전선에서 절대 후퇴 없이 적을 공격하라고 지시하셨소. 이대로 계속 병력을 돌격시켜야 하오."
중대장 : "야이 머저리야! 지금 당장 대전차전 준비를 해야해!"
정치장교 : "지금 당의 지시에 반하는 거요? 이 반동놈이!? 반동이다! 전위대! 탕!!!"

결국 정치장교가 있는대로 병크를 터트리는 사이에 병사들은 무슨 명령을 따라야 할지 우왕좌왕하게 되고 결국 적 전차부대의 공격에 사이좋게 전멸하고 마는 식이다. 가뭄에 콩나듯이 군사적 재능이 있거나 최소한 개념이라도 있는 정치장교가 걸린 부대는 다행이 두 지휘관이 쿵짝이 맞아 괜찮은 전과를 올릴수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이런 사례는 드물었기 때문에 정치장교가 있는 부대는 대부분 참혹한 최후를 맞기 일쑤였다.

다행히 독소전쟁 초기에 독일군에게 신나게 털린 이후에는 정치장교가 작전에 간섭하는 일은 사라졌고, 뛰어난 지휘관들의 지휘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3.2. 대숙청

위에 언급한 정치장교들은 소련군의 전투력을 작살내는 요소였고,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한 장성과 장교들은 이 때문에 정치장교를 없애던가 권한을 줄이려 노력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대기근 에서 스탈린은 소련군을 동원해 우크라이나를 철저히 탄압했고, 수백만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공산주의 이념적으로도 군대는 인민을 위한 것이고, 당시 정식 명칭조차 '노동자 농민을 위한'인 붉은 군대가 이 따위 짓을 하는걸 본, 혹은 참여한 장교들은 스탈린에게 반감을 품었고, 얼마 안되던 당 소속의 군인들이 스탈린에게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이는 스탈린의 의심병을 부채질했고 결국 대숙청이 벌어졌다.

3.3. 인명경시

원래 제정 러시아군도 그런 성향이 있었지만 병사의 목숨이나 안전에 대한 배려가 극히 적었다는 것이다. 과정보다는 목적과 결과가 더 중요시 여겨져 독소전쟁 초기에 결국 부족한 무기와 조건에도 불구하고 대량 공격에 나섰다 큰 피해를 입는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 병사를 일개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경향 덕택에 군의 사기는 크게 낮았으며 실제로 비인간적인 처우와 인권무시로 인해 탈영이 잇따랐다. 이 때문에 러시아군은 전통적으로 전쟁에서 흘리는 피가 필요이상으로 많은 군대로 인식되어 왔지만 제정 러시아에 이어 2차 세계대전 시기까지는 아직 러시아의 인구수가 받쳐주고 있었으므로 이런 구태의연한 악습은 계속되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대전 말기가 되면 성비가 망가질 정도로 인명손실이 너무 극심해져 더 꼬라박기도 힘들어지자 소련군도 미군과 같이 기계화군대로 탈바꿈했으며, 실제로 소련 말기에는 일반 포병과 보병은 존재하지도 않고 모두 자동차화된 기계화사단들이었다.

여담으로 냉전 시절 동독군의 주 임무는 서방 세력과의 전쟁시 제파식 전술의 제1파였는데, 이게 NATO처럼 각 국가별로 담당영역[11]이 존재하여 해당전선은 해당국가가 주력이 되어 담당하는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다. 좀 더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하면, 공격시 제일 큰 피해가 발생하고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최초 공격을 동독군에게 맡겨서 동독군이 적 전력을 깍아먹고 피해를 보면, 그때 소련군 본대가 공격을 들어가는 식이다. RPG 게임으로 비유하면 동독군은 탱커, 소련군은 딜러 역할이란 말. 당연하지만 적의 공격을 다 받아내는 것은 동독군이고 가장 큰 피해도 동독군이 보게 되어있다. NATO 마냥 가맹국들이 최대한 동등한 지위에서 자국방위, 혹은 동맹국 보호를 위해 각각의 영역을 맡고 희생을 보는게 아니고, 소련의 위성국이 소련군이 볼 피해를 적게 보도록 만든 총알받이인 셈. 소련군의 작계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이 점을 부정조차 하기 힘든데, 첫째는 소련군 작계 자체가 제파식공격의 제 1파는 큰 피해를 보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정예 병력은 보내지 말도록 하고있다. 1파가 적에게 피해를 주고 나면 그 때 잘 준비된 정예부대를 투입하여 공격하도록 하고 있다. 두번째는 유사시 나토군이 동독을 공격할때의 방위 계획인데, 우습게도 동독군은 공격시 선봉을 서야 하기 때문에 뒤로 빠진다. 소련군이 동독을 방어하고, 다시 반격을 할 때 동독군을 보낸다. 물론 동독군은 바르샤바 조약군에서도 정예이고, 이를 전략 예비대 같은 개념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으나, 정작 소련군은 자기네 부대는 전략예비대로 쓰려고 뒤로 꽁쳐놓고 동맹국 군대를 총알개념으로 적진에 던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에는 상황이 악화되어 엄청난 감군을 한 데다가, 가혹행위 방지도 담당했던 정치장교가 사라지자 병사 대우가 나빠져서 지금 러시아군은 구타, 가혹행위 등 온갖 비인간적인 처사에 시달리고 있다.[12]


3.4. 안습한 군수능력

겉으로 드러나는 숫자나 전투력은 무시무시했지만, 내부적 실상을 알고 들어가보면 문제점 역시도 상당했다.

http://sonnet.egloos.com/3644278 이 포스트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바르샤바 조약국은 소련을 제외하면 기껏해야 폴란드, 동독, 체코 등등이었던 반면, 나토 가맹국은 메이저급만 따져도 미국, 서독, 영국, 이탈리아, 터키 등등에 프랑스도 준 가맹국이었다. 때문에 이 나라들의 전체 경제규모나 국방예산 규모로 보면 나토 가맹국은 바르샤바 조약국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미국과 NATO 가맹국들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지니려 했던게 문제로, 결국 이는 무리하게 키운 체급을 유지하느라, 군수지원, 의료지원 같은 지원 분야의 부실로 이어졌다. 특히 탄약 등의 군수물자 비축량의 계산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인데, 여기에 의하면 미군의 험비 한 대를 상대할 때 쏴야 하는 DShK 기관총탄 숫자가 겨우 2발. 참고로 라이벌인 미국은 전통적으로 쇼미더머니로 비유되는 보급품 러시와 매우 튼실한 후방 지원체계가 장점인 군대라서, 비교해 보면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 베트남 전쟁때 못 쓰고 쌓아놓은 폭탄을 걸프전쟁때 다 재고처리 했다던가, 유사시 한반도에 투입시키기 위해 주일미군 기지에 보관중인 치장물자만 한국군 1개 보병사단을 무장시킬 정도라던가, 사막의 군용기 보관소에서 보관중인 항공기 숫자가 다른나라 공군기 숫자보다 많다던가... 물론 전쟁이 터지면 모든 산업이 군수품 생산에 집중될터이니 보관 물자 비교가 별 상관 없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러면 현역 장비를 충분히 생산하고도 비축물자량도 어마어마한 NATO와 미군은 바보게? 유사시에 후방의 국민들이 전시체제로 들어가서 물자를 생산한 뒤 전방으로 보내는 동안에도 전방의 군인들은 열나게 총쏘고 포탄 쏴야 하니까 비축물자를 모아두는거다.

또한 의료지원과 군수지원 체계의 경우 기껏해야 2차 세계대전 때보다 살짝 나은 수준이었다. 위 블로그의 내용 중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대조국전쟁 때 보다는 나은 의료지원을 받고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풍토병으로 작전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http://fmso.leavenworth.army.mil/documents/afgmed/afgmed.htm 해당 자료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전체 파병병력의 67%에 달하는 41만 5천명의 인원이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치료받은 수준이다. 쉽게 말하면 대한민국 육군 전체 규모에 필적하는 인원이 질병에 시달린 것으로, 엄청난 대 재앙이었다. 게다가 이중에서 폐렴은 무려 20%, 말라리아 4%에 이질[13]등도 많다. 참고로 2차 세계대전 동안 소련군의 질병 입원 비율은 35% 정도(...).

http://whqlibdoc.who.int/bulletin/1993/Vol71-No3-4/bulletin_1993_71(3-4)_385-388.pdf 이 논문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부터 소련으로의 말라리아 감염 경로에 관한 논문인데, 가관인것이 7600명의 대부분이 말라리아 걸린체로 전역한 소련군 병사다. 심지어 이중 70%는 군대에서 단 한번도 말라리아 약을 받은 적이 없다. 반면에 이후에 벌어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시 미군은 2006년 부터 2008년 전체 감염자 숫자가 고작 179명, 2009년 부터 2011년 까지는 170명에 불과했다.[14]

비전투용 군수장비가 모자란 면은 소련 특유의 생필품 부족현상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계획경제의 부작용 때문에 어떤 분야는 물자가 넘쳐나는 반면, 다른 분야는 심각한 부족이 벌어진다. 예를들어 1980년대, 소련군의 포격훈련량은 세계최고였을 정도로 수천달러짜리 포탄은 수없이 허공에 퍼부었지만, 정작 군인들은 치약의 보급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핵심 장비를 적대하는 서방에서 수입하는경우도 있었는데, 마이크로 칩이나 에어컨 같은 기기들은 소련에서 생산하기 힘들어서 서방에서 구입했다.[15] 특히 에어컨 같은 경우는 원자력 잠수함 내부 온도조절에 필요했기에 해군참모총장이 '서방제 에어컨을 급히 입수해달라'같은 요구를 했을정도.[16]

또한 소련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전군에게 양말 대신 발싸개를 지급했다. 우리가 흔히 양말도 못 사는 거지나 쓴다고 '거지 발싸개'라고 부르는 그 발싸개 맞다.http://en.wikipedia.org/wiki/Footwraps 발싸개는 양말보다 빨리 건조가 되고 구멍이 뚫려도 돌려서 싸면 구멍이 덮어지는 장점이 있었으나, 제대로 싸지 않으면 양말보다도 심각한 발 부상이나 물집을 불러오기 십상이었고 통풍이 잘 안되어 발냄새가 엄청났다고 한다. 소련이 붕괴하자 마자 독립국가들은 전원이 군에서 발싸개를 퇴출시키고 양말을 지급하였으며, 심지어 러시아는 2012년에(!) 국방장관이 올해야말로 군에서 발싸개를 완전히 퇴출하겠다고 했을 정도. 다만 이것은 양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련식 군화(장화식)에서는 양말보다 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프가니스탄의 VDV대원 : "저는 운동화 신는데 왜 양말대신 발싸개를 주는거죠, 동무?ㅠㅠ"

그리고 해군에는 양말을 보급했다. 북한군도 1990년대까지는 발싸개를 지급했다. 1990년대 MiG-19기를 몰고 귀순한 이철수 대위가 발싸개를 하고 왔을때, 일부 언론에서 엘리트 공군 비행사에게도 경제난때문에 양말을 지급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철수 대위가 직접 "소련식 비행화를 신을때는 양말보다 발싸개가 더 편리하다"고 반박한 바 있다.그럼 본가인 러시아에서 퇴출은 왜 시키나?

마지막으로 소련의 대해외 식량 수입 제 1순위가 미국이었다.미국이 멸망하면 우리는 어디서 식량을 수입해 오지요, 동무? 계획경제와 협동농장 특유의 비효율성 때문에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곡창지대를 가지고도 매년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17] 때문에 매년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등의 서방국가로부터 엄청난 식량(대부분 밀)을 수입해야 했다.사실 저런 식량의존 때문에 세계평화가 유지된 면이 크다.

3.5. 조직 체계 문제

소련은 보유 예산보다 더 큰 대규모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징병제를 유지하였으며, 부사관급 간부들 역시 예산 절감을 위해 모병을 통해 급여를 주는 전문인력으로 유지하는 것 보다 같은 복무 기간 2년을 가진 징집으로 유지하였다. 이로서 간부급들의 자질과 의욕, 자기 병과에 대한 전문성 문제가 심각하게 다가왔으며, 이로서 타 서방 국가의 부사관 급이 해야 하는 업무를 장교들이 떠 맡아야 함으로서 과중한 업무 부담이 생겨났다. 다른 서방 국가들이 공연히 부사관등의 하급 간부를 군의 중핵으로 여기고 육성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병의 계급 역시 2단계로 간소화 되어 있고 병 조직을 관리할 부사관급 간부의 권위가 없다시피하여 병간의 계급 갈등과 구타, 갈취, 내무부조리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으며, 어떻게든 군대를 빠져나갈수 있는 상황이라면 병역을 기피하는 풍조를 낳음으로서 징집자원이 사회 취약계층에 한정되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는 소련 붕괴 이후 그나마 부대 관리에 신경을 쓰던 장교 계층이 군을 대거 탈출하며 더욱 심각해졌다.

3.6. 취약한 훈련수준

열악한 군수능력과 조직체계상의 약점은 소련군의 훈련수준 역시 저하시켰다. NATO군 전차승무원이 일반적으로 연간 100~200발의 전차포 교탄을 소모할 때 소련군은 정예사단이 연간 50발, 보통은 20여발 수준의 전차포 사격을 수행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엔진 신뢰성 및 부품 수급 문제 때문에 전차 기동훈련은 끽해야 중대급이었으며, 전차병의 훈련 수준도 NATO군에 요구되는 것보다 크게 낮았다. 미군 M1 에이브람스 전차병들이 2,000m 거리에서 등장한 표적을 12초 이내에 90% 확률로 격파할 것을 요구받은 데 반해 소련군은 최대유효사거리 내의 표적을 60초 이내에 격파하는 것이 기준이었다. 전차장이 표적을 포착하고 포탑을 지향하는 데 10초, 여기서 초탄 발사까지 20초가 더 걸린다. 차탄 사격 시간도 미군은 5초, 소련군은 12초. 독일군이나 네덜란드군의 레오파르트2도 미군 M1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능상 서방 신예 3세대 전차와의 비교는 불공정하다고? CAT '85의 성적을 보면 M60 패튼이나 레오파르트1, 치프틴 같은 구형 전차들의 퍼포먼스가 3세대 전차들보다 좀 떨어지긴 했지만 표적과 교전하는 데 16.2초 이상 걸린 전차는 단 하나도 없었다. 초탄 발사까지만 30초가 걸리는 소련군과는 훈련의 차원이 다르다.

소련군은 충분한 교탄과 부품을 일선에 보급할 능력이 없는 것은 물론, 부대의 등뼈라고 할 수 있는 부사관을 단기 징집으로 유지하는 조직체계상의 문제 때문에 충분한 훈련도를 확보할 수 없었다. 전차소대 내에 2년 이상 야전에서 근무하면서 훈련한 병력이 1/4을 넘기는 소대는 극히 드물었으며, 사실 2년 이상 복무한 인원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징집병을 유지하면서도 전문적 부사관을 육성해 부대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서유럽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그 대가는 TOW 탑재 지프를 동축기관총 5~7발로 격파할 수 있다는 비실전적, 아니 비현실적인 훈련기준이었다[18][19].

심지어 이런 문제는 특수부대인 스페츠나츠도 피해갈 수 없었다! 스페츠나츠 또한 전원이 2년 복무하는 징집병 중에서 임의로 인원을 선출하였고, 이들 부대의 부사관 역시 한국군의 병장 계급 비슷하게 징집병 중에서 복무기간이 긴 병사에게 그냥 주어진것. 그나마 스페츠나츠의 명성에 관심을 보이고 지원하는 병사도 많았다고 하며, 이들을 정규직 부사관 학교에 보내어 못 버티는 사람은 탈락시키고 나머지를 훈련시키는 식으로 인적자원의 질을 좀 더 높여보려는 시도는 하였다. 하지만 이들 대다수의 질적 수준은 소련군 상층부의 인식에서도 조금 더 특수한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 병사 정도였다. 아프가니스탄의 실전에서 일반 보병부대 보다 이들의 전과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이들이 체계적인 훈련을 잘 받은 것 보다는 임무의 특성상 소련군에서 이례적으로 자율판단과 행동을 허가받았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소련군 내에서 몇 안되는 '병사 개개인의 창의성, 독창성'을 인정받은 병종이라 게릴라전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실제로 소련 멸망이후 러시아 스페츠나츠들과 교환훈련을 하게된 미군 특수부대원들이 이들의 사격, 전술 능력에 대하여 "명성만큼 대단하지는 않다"라고 평가를 하였으며, 그 분야에서 도리어 여타 동유럽 특수부대를 더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20] 실제 사례에서도 인질구출 작전에서 인질의 안전 보다는 인질을 잡은 테러범을 때려잡는데 더 집중한다거나, 버스 인질극 제압 시범을 보일때 수류탄과 폭약으로 버스를 아주 박살내버리는(...)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4. 징병제(대한민국 국군과의 공통점과 차이점)

소련은 한국처럼 징병제를 실시했고. 복무 기간은 육군과 공군은 2년으로 우리 나라랑 비슷했고 해군과 국경경비대는 3년이었다.[21] 그러나 소련의 대학생들은 학교에서 실시하는 교련 수업만으로 예비역 장교 자격이 부여되어 사실상의 병역 면제 혜택을 받았다는 점은 한국과 다르다.[22]

6. 군조직

6.1. 각군별

  • 련 육군 Сухопутные войска
  • 소련 해군 Военно-морской флот
  • 련 공군Военно-воздушные силы
  • 련 방공군Войска ПВО
  • 련 전략로케트군 Ракетные войска стратегического назначения
  • 련 내무군 (내무부 관할이나, 전시에는 국방부로 소속이 바뀐다)

6.2. 군관구

  • 레닌그라드
  • 벨라루스
  • 카르파티아
  • 키에프
  • 오데사
  • 모스크바
  • 볼가-우랄
  • 북캅카스
  • 투르케스탄
  • 시베리아
  • 트랜스바이칼
  • 극동
  • 중앙아시아

6.3. 함대

8. 군가

아래는 소련군의 유명한 군가들이다. 대체로 소련군가에는 러시아 민요풍의 노래가 많다. 한편으로는 애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쾌하다. 반복되는 후렴구가 특징이며, 후크송의 원조 음악적으로 봐도 훌륭하다. 소련군(현재 러시아군도 마찬가지)의 공식 합창단인 붉은 군대 합창단[25]은 웅장한 선율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1990년에는 한국에도 방한하여 연주회를 가진적이 있다. 소련의 군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군가/해외 항목을 참조할 것.


대표적인 소련 군가 초원. 자세한 건 항목을 참조하라. 월드 인 컨플릭트 트레일러로 쓰여 유명하다. 그러나 몇몇사람들은 소련 군가 하면 미제가 만든 어떤 게임 노래부터 떠올린다

9. 기타

소련제 무기와 장구류는 서방과는 전혀 다른 개성을 자랑했기 때문에 밀리터리 매니아 중에는 이쪽에 심취하는 경우도 있다. 하야미 라센진이라던가. 그러나 결국 개인장비는 서구를 의식하여 디자인되었다.

많은 병사들이 우샨카를 착용했기 때문인지 우샨카는 소련군을 상징하는 물건처럼 인식되고 있다. 우샨카를 착용하고 PPSh41을 들면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소련군 병사로, AK47을 들면 냉전 당시의 소련군 병사로 코스프레할 수 있다. 그럼 군복은? 어차피 대충 입어도 일반인은 구별 못한다.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에서는 아인슈타인이 타임머신 개발에 성공해 과거로 날아간 뒤 히틀러를 없애버리지만, 시간의 반동으로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군이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레드얼럿 1편에서 소련군은 나치 독일군 대신 V2로켓과 잠수함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상상속 무기인 테슬라 코일을 사용한다. 전반적으로 C&C시리즈의 악역 Nod의 변형판이었지만 유닛들 성향은 GDI에 가깝다. 맘모스 탱크와 헤비 탱크 등으로 강력한 화력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

레드얼럿 2편에서는 유리의 사이킥 능력이 추가되었다.

3에서는 2이후(유리의 복수 이후) 시점에서 과거로 날아가 아인슈타인을 날려버리고 세계 유일의 초강자로 새로 등극하나 했는데, 웬 욱일 제국군이 나타나 뒷통수.

슈퍼마리오의 별칭(...)이다. 실향민 출신인 오락실 주인이 마리오를 보고 1의 군인을 닮아서 그렇게 불렀대나 뭐래나.


이거 하나면 이해가 갈 것이다. 참고로 배경 노래는 슬라브 여인의 작별.

11. 한국계 인물

고려인 출신의 소련군인도 있었다. 북한 지역으로 소련군이 관동군을 제끼고 내려온 1945년에 이미 소련군 장교 가운데 고려인이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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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붉은 군대가 초기의 막장상태에서 크고 아름다운 무적의 스팀룰러로 변하는 과정을 담은 책으론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이 있다.
  • [2] 사실 순수공격형이라기보다는, 나토군이 침공 징후를 보일때 선빵을 날린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공세형 수비.
  • [3]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소전쟁이 터지자 국방장관이던 현역군인 세묜 티모셴코 원수는 서부전선군 사령관을 맡아 전선에 나갔고, 스탈린은 공석이 된 국방장관을 전쟁 끝까지 겸직했다.
  • [4] 실제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그런 선례를 만들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군에 대한 당의 통제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했다. 이런 곱지 못한 시선은 정치장교 제도의 창설과 훗날 스탈린 시대에 벌어진 대숙청의 기조가 됐다.
  • [5] 정확히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 [6] 156페이지짜리다. 'OPFOR Battle Book ST 100-7'로 검색
  • [7] 종전시 원수까지 오른 주코프, 코네프가 전쟁 발발 당시 만 44세 (1897년생), 그리고 바실레프스키가 45세, 로코소프스키가 46세, 대장까지 오른 추이코프, 체르냐호프스키, 노비코프는 겨우 36세 밖에 )되지 않았다.
  • [8] 이중에 4번함 프룬제는 손실이 너무 커 해체되었으며 자매함들의 부품으로 전용된다.
  • [9] 2차대전 이전부터 소련은 잠수함 전력으로는 세계적이었다. 수상함보다는 돈이 덜드는 잠수함 보유에 열을 올려 보유대수는 2차대전 당시 1위였다. 그리하여 발트해나 북해에서 독일의 수송선들은 무수히 소련 잠수함에 격침되었다.
  • [10] 실제로 베트남전, 4차 중동전쟁 등을 보면 미국산 전투기들을 괴롭힌 것은 오히려 적 전투기 보다도 대공포와 미사일이었다.
  • [11] 예를 들면 중부유럽 지상군은 미군, 서독, 영국이 담당하고 준 가맹국인 프랑스도 유사시 돌파당할 가능성이 높은 전선을 담당한다 - 식의...
  • [12] 그래도 그나마 러시아군은 쇼이구 시대에 들어오면서 조금쪼끔 나아지고 있긴 하다.
  • [13] 그냥 설사만 하고 마는 병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데, CDC에 따르면 매년 전세계에서 110만명이 사망하는 병이다.
  • [14] Falling rates of malaria among U.S. military service members in Afghanistan substantiate findings of high compliance with daily chemo prophylaxis, - Remington L. Nevin, 2012/12
  • [15] 이 역시 공산국가의 특성상 어쩔수 없는 부분이었다. 100% 계획경제였던 탓에, 국가에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의 개발과 생산은 그럭저럭 이루어지지만 민간소비재에 대한 연구와 생산이 뒤쳐진 것이다. 예를 들면 마이크로 칩, 자동차, 에어컨 같은 민간소비재 기술을 이용하는 분야는 서방과의 차이가 안습이었다. 특히 보편적인 학문의 자유와 치열한 경쟁을 통한 기술혁신이 없기 때문에 2차대전 이후 새로 등장한 전자, 컴퓨터, 소프트웨어 분야는 서방에 비하면 안습인 수준이었다. 다만 수학, 물리 등 기초과학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미국과 대등한 수준, 혹은 일부 능가하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시뮬레이션의 바탕이 되는 확률론이나 스토캐스틱 프로세스(확률과정론) 같은 분야를 완성한 인물들도 러시아 출신.
  • [16] 이게 왜 심각한가 하면, 각종 기계와 장비가 상시 돌아가고 외부 공기의 유입이 안되는 잠수함 내부는 에어컨이 없으면 온도가 40도 이상 치솟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도 더위먹고 쓰러질 판국인데, 그 보다 더 심각한게 기계가 열 때문에 고장난다(!). 만에 하나 소련 핵잠수함 내부의 원자로 관리하는 컴퓨터/관리 인원이 열 받아 맛이 가기라도 했다면...
  • [17] 참고로 우크라이나와 미국 중북부 농장지대는 지구 상에서 농사짓기 가장 좋은 지질을 가진 지역들로, 그 규모도 각각 한반도의 수 배 크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세계최고 수준이다. 미국은 거기서 식량이 남아돌아 동물사료용 옥수수 농장도 잔뜩 지어놓았을 정도지만, 소련은 그런 땅을 가지고도 농업이 저지경이 된거다.
  • [18] Zaloga, Steven J. Tank War-Central Front: NATO vs. Warsaw Pact, Osprey Publishing, 1989
  • [19] 해당 서적의 한국어 번역은 http://bluefalcon.egloos.com/4333134
  • [20] 실제로 미국, 영국의 특수부대원 출신들에게 동유럽 최고의 특수부대를 뽑아보라고 하면 러시아의 알파 그룹 등은 언급도 안 되고, 폴란드의 그롬은 거의 반드시 언급된다.
  • [21] 현재 러시아도 징병제를 실시하지만, 복무 기간은 1년이다. 그래도 러시아군은 100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다.
  • [22] 현재 러시아의 대학생들도 병역 면제 혜택을 받고 있다.
  • [23] 공군 조종사들이 파견되었다.
  • [24] 비공식적으로 지원.비행기 조종 교관과 전차 운용 교관들이 갔었다.
  • [25] 정식 명칭은 알렉산드로프 앙상블. 물론 저것도 줄인 것이고 진짜는 '적기훈장을 두번 수훈한 A. V. 알렉산드로프 명의의 러시아군 정통 가무 앙상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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