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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

last modified: 2018-08-18 18:24:21 Contributors

세키가하라 전투
날짜 1600년 10월 21일
장소 일본 미노노쿠니 후와 군 세키가하라
(현재 기후 현 후와 군 세키가하라 정)
교전세력 동군 서군
지휘관 도쿠가와 이에야스
혼다 타다카츠
이이 나오마사
호소카와 타다오키
이케다 테루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도도 다카도라
이코마 마사무네
가토 기요마사
모가미 요시야키
다테 마사무네
모리 테루모토
이시다 미츠나리
우키타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쵸소카베 모리치카
사타케 요시노부
우에스기 가게카스
오다 히데노부
시마 사콘†
오오타니 요시츠구†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병력 88,888 명 81,890 명
피해규모 불명 불명
결과 동군의 승리
기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 시작.

Contents

1. 개요
2. 배경 - 도요토미 가의 내분
2.1. 정통성은 누구에게 있었나
2.2. 미츠나리와 칠본창의 대립
3. 전투 전
3.1. 각 세력의 규합
3.2. 개전
4. 세키가하라 전투
5. 동군과 서군의 참전 다이묘/장수
5.1. 동군
5.2. 서군
5.3. 전개
6. 종전, 그리고 결과
7. 동군이 승리한 비결
7.1. 명령 체계의 차이
7.2. 양측 지휘관의 능력 차이
7.3. 모든 건 이에야스의 손바닥 위
8. 전후 처리
9. 시바 료타로의 동명의 소설


1. 개요

関ヶ原の戦い
서기 1600년(케이쵸慶長 5년) 음력 9월 15일(10월 21일)에 일본 미노 국 세키가하라(지금의 기후 현 후와군 세키가하라마치)에서 벌어진 전투. 일본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리 테루모토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한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한 동군 간 내전이 귀결된 결전이다. 이 전투에서 승자에게는 향후 260년간 일본을 지배하는 권한이, 패자에게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병력규모도 양군 총합 17만 명을 웃도는데다가 향후 일본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큰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가 진행된 시간은 고작 3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는 넓은 의미로는 동군과 서군 간 벌어진 일련의 내전행위를 총칭하는 의미로도 볼 수 있으며, 전투는 세키가하라뿐만 아니라 도호쿠, 호쿠리쿠, 큐슈 등 일본 전국에서 벌어졌다.

전투 결과 이에야스가 승리하여 에도 막부가 수립되었고, 이후 조선과의 관계가 급격하게 호전되는데다가 여러 다이묘들이 실각하거나 전봉되는 등의 파급효과가 일어났으므로 정치적인 의의도 크다. 세키가하라 합전(合戰), 동서합전이라고도 부른다. 워낙 일본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투라서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세키가하라'라고 하면 일종의 '중대한 승부처'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합, 사건 등을 가리키는 관용구로 쓰인다. 창작물에서도 가끔 "여기가 우리의 세키가하라야!"라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시기적으로는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病死)로 인해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종전한지 2년만에 일어난 일이라 임진왜란 때 조선을 공격했던 가토 기요마사, 토도 다카토라, 고니시 유키나가, 후쿠시마 마사노리등 왜군 장수들이 다수 참전했다.[1] 고니시와 가토처럼 임진왜란 때도 서로 반목하고 경쟁하곤 했지만 이제는 진짜 적이 된 것이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

2. 배경 - 도요토미 가의 내분

2.1. 정통성은 누구에게 있었나

실질적으로는 이시다 미츠나리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결이지만, 형식상으로는 '도요토미 가문의 내분'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츠나리는 둘 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서로를 적대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기존에는 이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일한 혈통인 도요토미 히데요리 및 그의 생모인 요도도노를 지지하는 소위 오오미 파가 중심이 된 서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인 네네를 중심으로 한 소위 오와리 파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중심이 된 동군의 대립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주류였다. 당시 일본도 그렇지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적통과 서통의 차이가 컸기 때문에 적통에 해당하는 정실인 네네를 지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쪽이 서통에 해당되는 요도기미를 지지하는 이시다 미츠나리에 비해 정통성적인 측면에서 앞섰다고 볼 수 있으며, 도요토미 출신 다이묘들이 동군에 든 것도 어느 정도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네네가 오히려 서군 편을 든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요도도노와 함께 개입했으며, 서군 주요 인물과 친분이 깊었고 나중에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딸 타츠히메를 양녀로 삼아 보호하기까지 했다는 것이 그 근거. 이것이 사실일 경우 도요토미 출신 동군 다이묘들은 동군에 든 명분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그냥 인정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닐까

2.2. 미츠나리와 칠본창의 대립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야심을 드러낸 도쿠가와는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의 다이묘를 포섭하기 시작하였다. 이 오와리 출신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인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필두였다. 반면 문관인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소위 오미파라 불리던, 가문 내에서 비교적 신참 다이묘들은 물론 기타 명문 다이묘 가문들을 규합, 도요토미 가문 내부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

애초에 미츠나리와 칠본창의 갈등은 임진왜란 이전의 감정적 앙금으로부터 거슬러가는 해묵은 원한이 원인이었다. 결국 갈등은 파국으로 치닫고, 마에다 토시이에까지 사망하자 후쿠시마와 가토 등은 다짜고짜 이시다 미츠나리의 목을 베려고 덤벼들기까지 했다. 이에 미츠나리는 다름 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등 뒤로 숨어서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요청했고 너구리 영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츠나리를 그의 거성인 사와 산성까지 무사히 배웅해주도록 조치는 했으나, 그 직후 이시다 미츠나리를 오봉행에서 강제로 파직시켰다. 즉, 은혜를 베푸는 동시에 원수가 된 셈인데 이 은혜마저도 이에야스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함이었다. 과연 늙은 너구리

3. 전투 전

3.1. 각 세력의 규합

이렇게 되자 결국 이시다 미츠나리는 반 이에야스 세력을 규합해 이에야스와 승부를 보기로 작정한다. 물론 양쪽 다 이전부터 자기 세력을 착실히 모으고 있었고, 미츠나리의 파직 이후 본격적으로 소집을 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었다.
문제는 내전이 가시화될 때까지도 미츠나리의 인망이 바닥을 기는 수준이었다는 것. 이를 타개하기 위해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궁여지책으로 대 다이묘 중 한명인 리 테루모토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미츠나리가 원활하게 거병할 수 있도록 도왔다. 반대로 이에야스는 얼굴마담 그런 거 없이 본인이 총지휘관으로 앉아 히데츠구 사건에 연루되어 죽을 뻔한 영주들을 구해줌으로써 쉽게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시즈가타케의 칠본창도 미츠나리를 향해 빠득빠득 이를 갈고 있었기 때문에 수월하게 일을 풀어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에야스 본인이 가장 많은 병사와 영지를 소유한 다이묘였다. 임진왜란때 이미 고쿠다카가 266만 석이였으니 222만 석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도 훨씬 많았다.
아무튼 미츠나리는 비록 인망이 바닥을 기었건 얼굴마담을 세워야 했건 일단은 자기 세력을 규합하는데 성공했고, 세력 규모는 대강 비등하게 맞춰졌다.

3.2. 개전

1600년 6월, 에치고의 호리 히데하루는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며 고발하였고, 이에야스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오사카에서 출진하였다.[2]

이에야스는 출진하면서 교토 교외의 후시미 성에 가신인 토리이 모토타다와 약간의 경비병을 남겨두었고, 미츠나리와 그 일파(서군)가 이를 급습하여 후시미 성이 함락되었고 모토타다가 전사하였다. 이후 미츠나리는 이세(伊勢), 미노(美嚢)등을 침공하였고, 7월 중순에는 이에야스 또한 이 소식을 들었다. 이에 이에야스는 회군을 시작하여 7월 25일에는 칸토의 시모츠케 국 오야마에서 동군의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이에야스 휘하에 종군하고 있던 다이묘들이 미츠나리와 맞서 싸우기 위해 이에야스를 전적으로 지지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이에야스는 주변 다이묘들을 결집시키니, 이를 오야마 평정이라 한다. 이후 동군은 토카이도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한다. 8월 23일, 동군의 선봉은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 히데노부가 지키던 기후 성을 제압하였다.

동시에 이에야스는 나카센도를 향한 진군을 계획하여 3남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일군을 맡기나, 히데타다는 우에다 성에서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발목을 잡히고 결국 세키가하라에 합류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대해 처음부터 히데타다의 임무는 나카센도의 제압이었으며, 세키가하라에 합류하는 것은 추후 내려진 명령이라는 이설도 있다.

이에야스는 기후 성을 점령하고 에도를 출발해 오카야마에 포진하여 히데타다를 기다렸으나, 히데타다가 오지 않자 결국 9월 14일 합류를 포기하고 진군을 개시한다. 이때 서군은 동진을 위해 오사카를 출발하여 오카야마 남쪽인 오가키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동군의 예상치 못한 빠른 등장에 당황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서군은 가라샤의 죽음으로 인한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이탈을 제압하기 위해 1만 5천의 병력이 묶였고, 주력인 모리군은 출진을 미루고 미적미적대는 등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여기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마저 14일에 있었던 서군 군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서군 수뇌부는 코바야카와군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3]

서군은 오가키 성을 무시하고, 서쪽으로 진군하는 동군과 결전을 치르기로 결의하고 성을 나섰다. 마침내 15일, 세키가하라에서 양군은 결전을 벌이게 된다. 이 때 모인 군사는 동군이 약 8만, 서군이 약 8만 5천명으로 양쪽을 합하면 16만이 넘었다.

  • 막간에 발단이 된 도호쿠의 우에스기 이야기를 하자면,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토벌을 위해 출진하였으나 후시미 성 전투 이후 반전하였다. 이 때 이에야스는 모가미 요시아키의 거성에 도호쿠의 다이묘들을 모아 우에스기 토벌에 종군시키려 하였는데, 본인이 반전하고 다른 다이묘들이 떠나는 와중에 모가미만 전쟁 준비를 하는 꼴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우에스기가 모가미를 공격하여 모가미의 거성을 빠르게 포위하였으나, 요시아키는 데와의 여우라는 별명답게 3천의 병력으로 2만이 넘는 우에스기 군을 상대로 선전하였고 우에스기 군은 하세도 성에 묶이게 되었다. 이 때 관망하던 다테 마사무네가 참전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우에스기 군은 퇴각하고 이후 이에야스에게 항복하였다.

4. 세키가하라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의 포진. 파란색이 서군이고 붉은색이 동군. 주황색은 서군에서 배반한 부대이며 약간 진한 파란색은 서군으로 참전했지만 전투에는 나서지 않은 잉여방관한 부대이다.

메이지 덴노 시절 일본의 사관학교 장교로 온 프로이센의 클레멘스 메켈 소령은 이 포진도만을 보고 즉시 서군의 승리라고 대답하였다. 일본인들이 동군의 승리와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후 사정을 설명하자 소령은 "그것은 작전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사실 전후사정 다 무시하고 포진만 놓고 보면 전후사정을 몰랐던 클레멘스가 서군의 승리를 장담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일단 군력은 양군이 거의 대등한 상황에서 지형은 서군이 월등하게 유리했던 것. 동군은 말 그대로 포위당한 상태인데 그것도 그냥 포위도 아니고 산골짜기에 갇혀 포위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동군후방포위부대가 방관한 부대라서 문제인거지

포진도를 보면 동군의 최종지휘관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이에야스가 포진(가운데의 가장 큰 붉은 표시)한 산 바로 위의 진한 파란색 부대가 (명목상) 서군의 총대장이자 대군을 이끌고 온 모리 가문의 부대였다. 이들이 제대로 싸웠다면 산 바로 아래에 포진한 동군 본진도 무사하기는 어려웠다. 모리와 안코쿠지 에케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퇴로만 확실히 차단해도 동군을 전멸시키는 것까지도 가능한 포진이었다. 병력의 숫자도 서군이 조금이나마 유리했고 질에서도 결코 동군에 뒤쳐지는 편은 아니었다. 즉 지도 오른쪽에 있는 부대들까지 합치면 동군을 포위하는 형태의 학익진이 완성되는 상황. 클레멘스가 듣자마자 서군의 승리를 장담한 것이나 전후 사정을 들은 후에 했다는 '그건 작전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발언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이런 좋은 포진을 가지고 진 데는 전투 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 문제가 무엇인지는 아래에 상세히 나와 있다.

5. 동군과 서군의 참전 다이묘/장수

5.1. 동군

동군에는 다음과 같은 지휘관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 최종지휘관 도쿠가와 이에야스 : 모든 명령은 형식적이든 실질적이든 도쿠가와 이에야스 한 명에게 집중되었다.
    • 부지휘관 도쿠가와 히데타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군재를 비롯한 종합적인 능력은 뛰어나다 할 수 없는 위인이지만 참모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인물. 그런데 현실은 우에다 성에서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관광당했다. 그것도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
    • 혼다 타다카츠 : 전장에서 작은 상처 하나조차 입지 않았다는 맹장.
    • 이이 나오마사 : 살인귀 효부라 불리던 맹장.
    •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 욕은 무지 잘했던 쿠가와 4천왕의 1인.
  • 다테 마사무네 :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리 테루모토, 우에스기 카게카츠 등에게 밀리지 않는 거대 다이묘.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기간 동안에는 카게카츠와 동맹맺고 우에스기군이랑 모가미군이 싸우는 걸 관망만 하였다.
  • 부 토시나오 : 다테 마사무네, 모가미 요시아키와 함께 우에스기 카게카츠군에 맞서기로 되어 있었지만 영지내에서 잇키가 일어나 귀환.
  • 모가미 요시아키 : 다테와 난부군이 이탈하면서 우에스기군에게 열심히 털렸다. 여기에 이전에 영지를 빼앗겼던 오노테라가가 쇼나이 방면으로 쳐들어 오기까지... 결과적으로 겨우 버티긴 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가 조금만 늦게 끝났어도 사망할 뻔했다.
  • 구로다 요시타카 :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텅 빈 서군 다이묘들 영지를 털고 있었다.
  • 구로다 나가마사 : 킷카와 히로이에와 내통하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반 약속을 받아낸 세키가하라 전투 제 1의 공로자.
  • 후쿠시마 마사노리 : 이시다 미츠나리를 무지하게 싫어하는 인간. 그러다 보니 전투에서 열심히 싸웠다.
  • 가토 기요마사 : 7본창의 투톱(혹은 쓰리톱), 구로다 요시타카와 함께 텅 빈 서군 다이묘들 영지를 빈집털이했다.
  • 호소카와 타다오키 : 아내인 가라샤가 미츠나리 때문에 사망. 그렇기에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 도도 다카토라 :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많은 서군 다이묘들의 배신을 획책했다.
  • 오다 유라쿠자이, 다나카 요시마사, 이케다 테루마사 등등등

어쨌든 동군 다이묘들은 대부분 서군을 무찌른다는 목적 하나만을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서군은...

5.2. 서군

대부분 하나의 목적으로 움직인 동군과 달리 이 쪽은 배신과 내분이 철철 넘쳤고 지휘계통도 막장으로 점철되었다.

  • 명목상 총지휘관 리 테루모토 : 우유부단한 인간으로 안코쿠지 에케이의 주전론과 킷카와 하루이에의 화평론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그래놓고 한다는 게 오사카성에서 버로우.
    • 실질적인 총지휘관 리 히데모토 : 모리 테루모토의 사촌이자 양자로, 오사카성에 버로우탄 테루모토를 대신해 모리군을 총지휘했다. 하지만 그도 전투 내내 도시락 핑계로 구경만 했다. 덕분에 다른 서군의 발까지 묶었다. 장하다
    • 안코쿠지 에케이 : 모리 테루모토의 가신으로, 모리 테루모토를 서군의 총대장으로 가담하도록 유도하고, 모리 테루모토의 이름을 팔아서 서군 장수들을 모집한 인물.
  • 진짜 총지휘관 이시다 미츠나리 : 말 그대로 진짜 총지휘관이지만 애초에 전략, 전술적인 면에서 답이 없을 정도로 낙제급인 사람인지라 너무 한심한 판단만 내리고, 거기다가 엉망진창의 지휘계통과 자신의 계급이 낮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자신이 명령을 전달하려고 해도 "어디서 미츠나리 따위가 나한테 명령질이야?" 라고 말을 들어처먹을 생각이 없는 다른 다이묘들 덕분에 속이 탈 지경이었다. 세력을 잘 규합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 시마 사콘 : 전후 구로다군 병사들이 "꿈에서 사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며 벌벌 떨었던 맹장. 하지만 너무 빨리 조총에 맞고 리타이어.
    • 모 요리사토, 이 효고 : 사콘 리타이어 후 이시다군을 이끈 맹장들. 그나마 이들이 있어서 미츠나리 측이 조금이나마 버텼다.
  • 오오타니 요시츠구 : 서군의 몇 안되는 뛰어난 장수지만 거느린 병사는 600여명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 병력을 가지고 1만명이 넘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군대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 시마즈 요시히로 : 역시 서군에서 알아주는 맹장. 그러나 애초에 전투의지가 부족한 데다가 거느린 병사가 오오타니 요시츠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사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요청으로 후시미 성을 구원하기 위해 참전하였는데, 성을 지키던 토리이 모토타다가 시마즈군을 공격하여 서군에 가담하고 말았다. 이때 요시히로가 이끄는 군사는 1000여 명 정도로 매우 적었는데, 70만석의 대 다이묘가 이렇게 적은 병사를 이끌고 온 이유는 그의 무리한 조선 침략에 화가 나 있던 형 요시히사와 중신들이 참전을 반대하여 요시히로가 사비를 털어 군사를 모았기 때문.[4] 결국 미츠나리는 시마즈군의 수가 적은 것에 실망했고 요시히로가 내놓는 기습계책을 죄다 씹어버렸다. 이에 요시히로도 분노하여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지휘를 거부하였고 미츠나리의 명령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었다. 가장 압권은 전투 도중 시마 사콘이 부상당하자 미츠나리가 요시히사에게 대신 지휘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거부한 것. 미츠나리는 요시히로의 조카 토요히사라도 보내달라고 하지만 이마저도 거부해버렸다. 여기에 전황이 서군에게 어려워져 우키다 히데이에군이 퇴각하자 요시히로는 우키다군에게 총질을 가했다.
  • 고니시 유키나가 : 그나마 열심히 싸운 몇 안되는 서군 다이묘.
  • 우키타 히데이에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역시 그나마 열심히 싸운 몇 안되는 서군 다이묘.
  • 사나다 마사유키 : 우에다성에 압도적인 병력으로 쳐들어온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덕분에 히데타다는 전후 아버지 이에야스에게 욕을 엄청 들어야 했다.
  • 우에스기 카게카츠 : 도호쿠 지역에서 난부 토시나오, 다테 마사무네, 모가미 요시아키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난부 토시나오는 영지에서 잇키가 발생하자 귀환하였고, 다테 마사무네는 카게카츠랑 동맹맺고 사태 관망, 홀로 남은 모가미 요시아키를 털고 있었다.
  • 다케 요시노부 : 이시다 미츠나리의 친구. 아버지 요시시게는 동군을 지지하였으나 요시노부는 친구따라 서군을 지지하였다. 결국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아버지랑 싸우느라 아무것도 못했다.
  •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처조카. 서군 내에선 손꼽힐 만큼 대군을 이끌고 있었으나, 구로다 나가마사가 총 몇번 쏘니 바로 동군에 붙어버렸다.
    • 쓰노 시게모토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부장. 초반에는 열심히 싸웠으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동군으로 배신하자 히데아키의 명령을 따를 수 없다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명령을 거절했으며, 결국 주군을 배반하고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요격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아버렸다. 그 때 남긴 말이 "방패 속의 배신은 사무라이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 : 역시 칠본창의 일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배신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 따라 배신했다.
  • 카와 히로이에 : 처음부터 화평론을 주장하다가 동군과 내통하는 상황.

5.3. 전개

동군의 선봉장은 후쿠시마 마사노리였으나 이이 나오마사가 이에야스의 아들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를 데리고 50여명의 병력으로 냅다 우키다 군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서군은 개전 당시 동군과 실제로 전투를 할 수 있었던 병력은 약 3만 3천여(미츠나리, 오오타니 + 고니시, 우키타)정도였으나, 압도적인 지형의 이점을 통해 병력차를 극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잘 싸우고 있던 시마 키요오키(시마 사콘)가 부상을 입어 실려 나가면서[5] 삐걱대더니, 미츠나리가 시마즈 군에 사자를 보내 요시히로나 토요히사가 대신 지휘를 해줄 것을 부탁한 것을 요시히로가 미츠나리의 사자가 말을 탄 채 군령을 전했다는 이유로 응전을 거부하면서[6] 일이 꼬인다.

여기에 사실상의 주력인 모리군은 이미 동군과 내통한 킷카와 히로이에가 길을 막고 있어 참전하지 못하였다.[7] 모리군은 테루모토의 양자인 히데모토가 지휘를 맡았으나, 그에겐 안코쿠지 에케이의 주전론과 킷카와 히로이에의 화의론 중 어느 쪽도 선택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결국 그는 도시락 먹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핑계로 전투 내내 방관만 하였다. 결국 모리군이 싸우질 않는 바람에 에케이는 물론 타치바나 무네시게, 쵸소카베 모리치카군까지 발목이 잡혀 방관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지형, 그리고 미츠나리의 편에 서서 끝까지 싸워주는 우키다와 고니시가 있었기에 서군은 여전히 싸워볼 만했다. 정오가 지나면서 슬슬 병사들이 지쳐 나가떨어지며 어느 쪽이 유리하다 할 수 없는 백중세가 지속되었는데, 이 때 동군의 회심의 카드이자 전투를 끝낼 결정타가 터졌다. 동군과 내응을 약속한 히데아키가 이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보고를 듣고 화가 난 이에야스가 코바야카와의 진지에 대하여 위협사격을 가하였던 것이다[8]. 이에 놀란 히데아키는 결국 마음을 다잡고, 산 밑의 오오타니 군의 배후를 급습했다. 히데아키가 이끄는 1만 5천의 병력, 서군 전력의 약 20% 가량이 동군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그의 배신을 이미 예상했던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소수의 병력만을 가지고 이를 물리쳐 후퇴시키긴 했으나,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인해 이때까지 전투의 흐름을 주시하고 있던 서군의 여러 무장[9]이 동군으로 돌아서면서 오오타니 군을 공격한다. 이에 요시츠구는 분투하였으나 과부적으로 괴멸하고 자신도 할복하였다. 이것이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흐름은 동군 쪽으로 기울게 된다.

동군은 더욱 사기충천하여, 혼다 타다카츠는 말이 총에 맞아 낙마하였음에도 바로 일어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서군의 병력들을 도륙하는 용맹을 과시하였고 코바야카와 군은 우키타 군을 집중공격해서 결국 괴멸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패주하여 시마즈 요시히로의 영지 방향으로 도망쳤는데, 이때 시마즈 군이 우키타 군에게 총질하며 팀킬까지 일어났다. 서군은 분전에도 불구하고 시마 사콘, 가모 요리사토, 마이 효고 등의 맹장들이 차례차례 전사하는 가운데 결국 괴멸되었다. 가토 군 또한 고니시 군을 일찌감치 괴멸시켰다.

한편 서군의 시마즈 군은 목숨을 걸고 동군 본진을 정면돌파[10]하여, 일부 병력만이 겨우 살아남아 큐슈로 도주하였다. 참전한 1000명 가운데 살아서 돌아간 이는 100명 남짓에 불과했다고. 이 돌진으로 시마즈 토요히사, 쵸쥰인 모리아츠가 전사했다. 현실은 시궁창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는 동군의 대승으로 종결되었다. 정확한 사상자는 알 수 없으나 소설 대망에 따르면 동군의 사망자가 약 4천 정도에 서군은 약 3만에 이르렀을 거라고. 소설인 만큼 숫자에는 신경 쓰지 말고 대강 서군이 그만큼 큰 규모로 패배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6. 종전, 그리고 결과

한편 큐슈에서는 구로다 죠스이(구로다 요시타카)와 가토 기요마사가 서군의 빈집을 열심히 털고 있었다. 특히 빈집이 털린 고니시 유키나가우키타 히데이에는... 결국 히데이에는 시마즈 가로 도망쳐야 했다. 이들의 빈집털이는 다치바나 긴치요에게 막혔지만 긴치요의 활약도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조스이의 이러한 빈집털이를 두고, 그 역시 일본을 차지하려는 야망이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중앙에서 내전을 벌이는 동안 큐슈를 제압하고 시마즈가와 연합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해 볼 만하다는 구상이었다는 것. 하지만 현실은 아들 나가마사의 활약 덕택에 동군이 빠르게 승리하면서[11] 망했어요. 세키가하라 전투 종료 후 죠스이는 그동안 털었던 서군 빈집을 모두 이에야스에게 넘겼다. 그리고 아들 나가마사가, 이에야스가 자신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들며 감사를 표했다고 자랑했더니 그럼 네 왼손은(이에야스를 베지 않고) 뭐했냐?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모리 테루모토는 전후 모리 히데모토, 타치바나 무네시게[12]의 주전론을 거부하고 알아서 이에야스에게 항복하였다.

야사로, 이 때 주변에 살던 일반 백성들은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전투를 구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세 일본처럼 봉건 영주들 간의 전투는 특성상 일반 민간인들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이 대전투 또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 것보다 구경은 둘째 치고 밥이 넘어가긴 하나?

7. 동군이 승리한 비결

7.1. 명령 체계의 차이

동군과 서군은 이미 지휘체계에서부터 차이가 났었다. 동군은 오직 이에야스의, 이에야스를 위한, 이에야스에 의한 군대였으나,[13] 여기에 맞서 싸워야 할 서군은 이시다 미츠나리의 절망적인 인망으로 인해 모리 테루모토라는 얼굴마담을 내세워야 했고, 이로 인해 지휘권이 이원화되었다.

물론 테루모토가 형식상 지휘관이었기에 실제로 미츠나리의 지휘권에 간섭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나 그래서 오사카에 버로우 내부적인 단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테루모토의 우유부단함 또한 서군 장수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는 요인이었다. 애시당초 미츠나리가 자신이 직접 최종지휘관이 되지 못하고 모든 명령을 내릴 때마다 모리 테루모토의 이름을 팔아야만 할 정도로 인망이 바닥이라는 사실 자체가 문제였지만. 이러한 서군의 모습을 보면 미츠나리는 미츠나리대로 사람을 못 믿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타 지휘관들은 시마즈 요시히로처럼 그런 미츠나리에게 실망하거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나 모리 히데모토 처럼 갈팡질팡거리며 전투 중에 미츠나리의 명령을 씹어버리는 임무형 지휘체계의 단점이 돋보이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런 차이는 전투 중에 서군의 배신 퍼레이드가 일어나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반면 동군은 이에야스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했고, 이에야스는 자군을 확실히 통제하는 것은 물론이요 서군의 장수들까지 흔들어댔다. 미츠나리가 이를 막지 못한 끝에 결국 서군 전력의 20~25%가 동군으로 돌아서고 비슷한 수의 전력이 방관만 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패배는 당연지사였다.

7.2. 양측 지휘관의 능력 차이

무엇보다 이에야스와 미츠나리의 능력 차이는 이 전투에서 가장 크게 기여했다. 물론 군략에 있어서는 이에야스도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지만 미츠나리는 말 그대로 인망만큼이나 바닥을 기는 게 군략이었다. 오다와라 정벌전 때 카이히메를 상대로 물길을 잘못 파서 수공을 실패하는 삽질을 하지 않나 행주대첩에서 10배의 군세로 그 10분의 1밖에 안되는 조선군에게 탈탈 털리고 지휘관 급들이 줄부상을 당하는 병크를 만들어내지 않나... 토리이 모토타다를 상대로도 시간을 질질 끌었고 여러 모로 좋지 못했다.

백보쯤 양보해서 군략까지는 이에야스도 안 좋으니 넘어간다 쳐도 가장 큰 문제는 정치력. 이 부분에서 미츠나리는 이에야스의 발끝에도 못 미쳤다. 그리고 이것이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패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미츠나리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히데아키는 1만 5천의 대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군과 서군 사이에서 간을 보는 처지라 서군 입장에선 무조건 잡아야 하는 존재였다. 특히 히데아키는 미츠나리에 의해 영지가 감봉된 적이 있었기에 감정이 좋지 못할 수밖에 없으니 더더욱 관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코바야카와에게 글로 된 서약서만 줬을 뿐 별도의 관리도 하지 않으면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펼친 학익진의 한쪽 날개를 맡겼다. 정말 하다못해 서로 백중세였던 정오 즈음이 되어서라도 설득에 나섰으면 모를까 그마저도 못해서 결국 히데아키가 배신 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만 해야 했다.

거기다 모리 테루모토의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물론 얼굴마담이긴 해도 형식상 총지휘관이니 손을 쓰기 어려운 문제도 있었겠지만, 어떻게든 테루모토를 전장에 나오게 만들거나 아니면 확실하게 서군의 편으로 만든다든가 해야 했는데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황을 만들었고, 그 결과 안코쿠지 에케이만 믿었다가 킷카와 히로이에가 히데모토를 미친 듯이 흔들어놓은 덕에 모리 군은 전투 내내 방관만 했다. 심지어 상대 총지휘관인 이에야스를 빤히 내려다보는 곳에서!

반면에 이에야스는 처음부터 전투를 순순히 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전투는 다이묘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총지휘관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킷카와 히로이에를 통해 모리 군을 뒤흔들었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흔들다 못해 아예 자기편으로 돌아서게 했다. 그러면서 자기 밑의 다이묘들은 꽉 붙잡았다. 이렇게 다이묘들을 장악한 것도 미츠나리가 가라샤를 섣불리 인질로 잡으려다 자살하게 하여 호소카와 타다오키를 격분하게 만들고, 미츠나리가 시즈가타케의 칠본창과 반목해온 결과물이었다. 군략의 차이는 적었으나 정치력의 차이는 너무나 컸다. 즉, 병력 및 예하부대 장악 능력은 말 그대로 프로와 아마추어였던 것.

7.3. 모든 건 이에야스의 손바닥 위

이런 차이는 결국 전투 전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에야스 마음대로 하게 만들었다. 이에야스는 우에스기의 거병을 통해 자신이 거병할 기회를 얻었고, 미츠나리가 거병할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미리 우에스기와 인접한 다테와 모가미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고는 순순히 아이즈 쪽으로 나아갔으나, 미츠나리가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부대를 재편성해서 다테와 모가미로 하여금 우에스기를 상대하게 하고 돌아갔다. 때문에 서군은 바람과 같이 달려오는 동군을 상대로 당황했고 미츠나리는 이런 당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세키가하라라는 전장을 잡고 학익진을 편성해 최고의 포진을 만들어놓긴 했으나 문제는 이게 이에야스 손바닥 위였다.

미츠나리는 위에서 썼듯이 예하 부대 장악 능력이 최악이었다. 그렇다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미츠나리는 어디까지나 이기기만 하면 불만이고 뭐고 누를 수 있다는 단순무식한 계산을 통해 어떻게든 동군과 전투를 하고 싶어했다. 물론 이렇게 빨리 벌어질 줄은 몰랐겠지만, 이미 계산은 다 해놓았고 실제로 세키가하라 전투의 지형과 포진은 서군에게 유리했다.

그러나 전투라는 게 미리 병력을 배치해놓고 어택땅 찍는 게임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 이에야스는 처음부터 서군이 전투를 서두른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순히 서군이 호랑이 아가리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데도 그 입 속으로 유유히 들어가 주었다. 이미 이길 판을 다 만들어두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싸워서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미츠나리는 전투 중에 아군의 배신 퍼레이드와 말 안 듣고 방관하는 휘하 다이묘들에게 절망해야 했다. 아군의 불만을 방관한 결과 아군이 방관을 하는 최악의 상황에 부딪힌 것이다. 반대로 이에야스는 자기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전투 상황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패는 전략적 차원에서 이미 결판나 있었고, 서군에는 이를 전술적 승리로 뒤집을 역량을 가진 자가 없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휘자와 구성원간의 관계라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 전투라고 할 수 있겠다.

8. 전후 처리

서군 출신 영주들은 그야말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패전 후 도주했다가 옛 친구인 나카 요시마사에게 붙잡힌 이시다 미츠나리, 로마 가톨릭 신자라 할복을 거부하고 케나카 시게카도[14]에게 붙잡힌 고니시 유키나가는 참수를 당했다. 그리고 모리 테루모토에 대한 경고의 메세지로 테루모토를 대신해 안코쿠지 에케이가 조리돌림당한 후 참수당했다.

  • 리 테루모토는 사형을 면하는 한편 영지 보전을 약속받고 주코쿠로 돌아갔지만 애시당초 이에야스는 그를 그냥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스오, 나가토, 빈고, 아키, 이와미, 이즈모 120만석에서 스오, 나가토 30만석으로 감봉. 그나마도 원래 이에야스가 테루모토를 처형한 후 완전히 소봉시키고 자신과 내통한 킷카와 히로이에를 대신 내세우려 했으나 히로이에가 이에야스와 담판한 끝에 30만석이나마 남겨 준 것이다.[15] 서군 총대장으로서의 책임을 물어 모든 영지를 몰수한 것. 여담으로 테루모토 본인은 이 일에 대해 매우 분하게 생각해서 이후 잠잘때 발을 에도쪽으로 향하게 했다. 참 쪼잔하다...

  •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아이즈 번의 거대 다이묘 120만석에서 요네자와 30만석으로 감봉 크리. 사실 요네자와는 가신 나오에 카네츠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영지였다. 즉 자신이 가진 영지는 죄다 뺏기고 가신 영지를 대신 차지한 형세. 패전 후 카게카츠는 '무운(武運)이 쇠한 것이니 이제 와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라는 한마디만을 남겼다고 한다.
    사실 A급 전범이라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는 신세였지만, 나오에 카네츠구의 엄청난 말빨로 목숨을 건진데다가 카네츠구의 요네자와의 영지까지 자신의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양도 받았다. 여기에 카게카츠의 인품에 매료된 (…또는 실업자가 되기 싫었던) 가신들이 감봉에도 불구하고 집안을 떠나질 않아서 에도시대 초기에 우에스기 집안은 엄청난 재정난에 시달렸다고 한다.

  • 시마즈 가에 망명했다가 체포된 우키타 히데이에는 오카야마 60만석에서 개역당하고[16] 자신은 하치죠시마로 유배 된 뒤 거기서 죽었다. 그나마 처가인 마에다가 덕분에 그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할복을 강요당하거나 목이 잘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키타 히데이에는 그야말로 엄청 가늘고 엄청 길게 여생을 보냈는데 에도 막부 제 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츠나가 치세하는 시절인 1655년에 향년 83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 사나다 마사유키사나다 유키무라 부자도 쿠노산으로 유배 크리. 동군 쪽으로 보낸 사나다 노부유키가 구명한 덕분이었다. 이후 마사유키는 유배지에서 죽고 유키무라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사카 성으로 들어가 싸우다 전사했다.

  • 쵸소카베 모리치카는 아버지 모토치카의 친구였던 이이 나오마사에게 부탁해 개역을 면할 뻔 했으나 가신 히사타케 치카나오가 모리치카의 형인 츠노 치카타다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 결국 개역크리.

  • 아버지 사타케 요시시게에 발목잡혀 뜻을(?) 이루지 못한 사타케 요시노부는 히타치 54만석에서 아키타 20만석으로 감봉.

그 외에도 서군에 가담한 영주들 상당수가 영지를 감봉당했고 감봉당한 영지는 동군에 가담한 영주들에게 돌아갔다. 오늘날의 기업으로 비유하자면 도요토미 그룹의 계열사 사장님들이 하루아침에 자회사(구멍가게) 지점장 수준으로 떨어진 격이다. 살아남은 이들도 변방의 도자마 다이묘가 된 자들이 많았으며, 결국 일부 다이묘나 그 밑의 낭인(로인)들은 아예 쫓겨난 다음 사카 성 공방전에 참여하거나 민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 시마즈 요시히로만은 사츠마 70만석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X맨으로서 보여준 활약 때문이다 사실 이에야스도 시마즈가에 대해 토벌령을 내리긴 했으나 건재한 시마즈 가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요시히로가 동원한 병력은 요시히로 본인이 사재를 털어 마련한 병력이라 세키가하라 전투의 패배 후에도 시마즈가는 건재했던 것. 여기에 요시히로의 형 시마즈 요시히사가 사실상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그는 이 모든 게 치매에 걸린 요시히로의 독단이라며 그에게 독박을 씌워버렸다.[17] 결국 이에야스는 이러한 시마즈가의 주장을 받아들여 시마즈 요시히로가 당주자리에서 물러나는 조건을 걸고 제재를 철회한다. 잘못 건드렸다간 구로다 요시타카와 연합할지도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규슈가 너무 멀고 시마즈 군이 강군이란 소문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 고니시의 사위 소 요시토시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그냥 장인어른의 지시로 서군에 가담한 점 + 조선과의 외교회복을 위해 필요한 인물이라는 점을 들어 형벌생략이라는 파격적인 혜택을 받았다. 이후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인 니시 마리아와 이혼했다.

9. 시바 료타로의 동명의 소설

원제는 '세키가하라関ヶ原'이며 한국에는 '세키가하라 전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전 5권.

소설의 시점은 딱히 고정되어 있지 않으나 대체로 이시다 미츠나리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부분이 많으며 소설 오리지널 캐릭터 역시 미츠나리의 첩일만큼 그에 대한 조명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내용 구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까지이며 세간에 알려진 '불의를 싫어하고 타협을 모르는 츤데레이시다 미츠나리'라는 캐릭터성은 이 소설을 통해 확고해졌다고 보면 된다.

이 소설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노회한 '너구리'이자 산전수전 다 겪은 무장으로 문자 그대로 최종보스 포지션. 미츠나리를 주역으로 서술한 탓도 있어 상대적으로 악역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이 특징이다. 무리한 미화로 거의 이에야스를 부처처럼 묘사한 대망을 먼저 읽은 독자가 이 소설의 이에야스를 접하면 다소 충격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에야스를 무작정 깎아내린 것도 아니고 이에야스의 배포나 장점, 강점도 서술하고 있어서 이에야스가 왜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역시 알 수 있다. 사실 이 소설이 오히려 이에야스의 본질을 더 잘 설명한 편이라는 평이 지배적.

자료를 최대한 모으고 등장인물들을 관조적인 입장에서 다루는 편인 시바 료타로의 소설답게 이 소설 최고의 묘미는 히데요시 사후의 어수선한 정국에서 미츠나리에게 붙을지 이에야스에게 붙을지를 고뇌하는 여러 인간 군상들에 대한 묘사이다. 이 소설은 자못 담담한 어조로 동군과 서군의 여러 인사들에 대해 서술하면서 왜 동군 혹은 서군에 붙었는지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있으며, 미츠나리가 주창한 대의명분을 따르는 사람/ 히데요시 사후 최강자이자 대세였던 이에야스를 따르는 사람/ 단지 미츠나리를 제거하기 위해 이에야스에게 붙은 사람/ 어정쩡하게 중립을 지키는 사람/ 가문의 안위에만 급급한 사람/ 이시다와 도쿠가와 모두 물리치고 자기가 천하를 차지하려는 야심가까지 다양한 인간 유형들이 등장한다. 이는 마치 한국사로 치면 계유정난 전후를 다룬 사극과 비슷한 분위기로 계유정난 시기[18]를 다룬 창작물에서 '실세(수양대군)'와 '명분(단종)' 사이에서 여러 길을 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나오는 것처럼 이 소설에서도 히데요시 사후 최강 실세인 도쿠가와를 따르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히데요시의 유지를 지키자는 대의명분 아래 뭉친 자들, 그리고 그 사이의 여러 길을 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나오며 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거나 찾아 보는 것도 이 소설을 읽는 묘미이다.

여담이지만 이 소설에서 이시다나 도쿠가와 모두 물리치고 자기가 천하를 차지하려는 야심가는 상술된 사항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구로다 죠스이로, 세키가하라 전투후 일단 정리된 일본내 정국을 서술하는 소설 말미를 장식하는 것도 이에야스가 아니라 그이며 그의 표표한 모습도 잘 서술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일독할만한 가치가 있으나 국내 정식발매본은 2013년 시점에서 거의 절판된 상황이므로 중고 서적 등을 뒤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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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애초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다이묘가 원정에 참전하긴 했다. 히데요시 계열의 다이묘가 주력이라 묻혔지만.
  • [2] 에치고는 원래 카게카츠 땅이었는데 히데하루가 전봉을 왔다. 문제는 다른 곳으로 전봉가는 다이묘는 자신의 영지로 전봉오는 다이묘를 위해 한해 석고(石高)의 절반은 두고 가는 게 관례인데, 카게카츠는 전부 다 가지고 가 버렸다. 덕분에 엄청나게 고생을 한 히데하루는 카게가츠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여담으로 이 때 카게카츠는 양부인 겐신의 유해는 그냥 두고 갔으며 이 유해는 나중에 히데하루가 보내줬다.
  • [3] 이시다 미츠나리의 "한번 적은 영원한 적"이라는 사고방식은 이 전투에서 서군을 더욱 위기로 몰고 갔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동군으로 돌아섰다는 정황이 감지된 뒤에도 코바야카와를 설득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던 것.
  • [4] 다른 주장으로는 반대가 아니더라도 동원할 병력 자체가 없었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 특히 노량해전 당시 사츠마 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이를 미처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5] 이때를 계기로 역사에서 퇴장하였는데, 전사설과 생존설이 분분하다.
  • [6] 시마즈 요시히로는 위에서 말했듯 어쩔 수 없이 서군에 붙어있었고 미츠나리에게 사사건건 무시당했다. 이에 대한 보복이었던 것.
  • [7] 애초에 테루모토는 전투기간 내내 오사카성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 [8] 단, 이 위협사격과 이에 따른 내응설은 여러 이유로 부정되기도 한다.
  • [9] 와키자카 야스하루, 쿠츠키 모토츠구 등 약 4천 병력.
  • [10] 이를 '전진철수'라 하는데 돌격하는 모양새로 후퇴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돌격!" 이라고 쓰고 "도망가자!"라고 읽으면 된다.
  • [11] 후시미 성 전투를 기점으로 세키가하라까지는 2달 남짓한 기간이다.
  • [12] 아직 모리가문의 병력은 아무런 피해가 없이 오사카성에 주둔하고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리까지 데리고 있었던 만큼 아직 싸울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13] 동군의 다이묘들은 서로 선봉을 서겠다고 아우성이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 한 사람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일사천리로 움직였고, 야망이 커서 통제가 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다테 마사무네마저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능수능란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 [14] 타케나카 한베에의 아들이다
  • [15] 애초에 히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하더라도 모리 가문만은 보존해달라는 조건으로 동군에 가담하였다. 도쿠가와는 킷카와 히로이에의 탄원(담판)은 물론 테루모토의 아들과 첩을 인질로 받고 나서야 그 선에서 마무리했다고 한다.
  • [16] 그 영지는 구로다 요시타카에게 넘어갔다.
  • [17] 실제로 요시히로는 나중에 치매에 걸려 말년이 비참했다고 한다.
  • [18]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수양대군이 실세가 된 것은 계유정난 이후이기 때문에, 사실 이 시기를 다룬 사극들 가운데 단종 친화루트를 탄 경우는 수양대군 세력의 입지를 너무 과장하는 경향이 크다. 아무리 사서가 승자에 대한 미화라고 해도, 역사적 의미에서 계유정난은 '약소 계파가 건곤일척을 노리고 저지린 도박'이지 강대 계파의 확인사살 내지는 양강의 정면충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