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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공황

last modified: 2015-04-14 12:35:48 Contributors

The Great Depression.

1929년에 시작된 세계구급의 경제위기이며, 지금까지도 좁게는 자유방임주의, 넓게는 자본주의의 실패사례로 자주 회자되고 있다.

당시에 생활상이 궁금하다면, 구글에 위에 나온 영어를 써보자. 모든 사람들이 빈궁하게 살고 있고, 식량배급을 받거나 직업을 구하고자 선 줄이 정말 길게 이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Contents

1. 개괄
2. 왜 일어났나?
3. 누구냐 너?
4.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정치경제학적 견해: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 표출
4.1. 반론
5. 그 이후

1. 개괄

1929년 10월[1], 미국 월스트리트의 갑작스런 주가 폭락(the Wall Street Crash)의 여파가 전 세계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위협했다. 역설적으로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지표의 구심점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2. 왜 일어났나?

이유는 복잡하나 몇 가지의 큰 줄기로 나눠볼 수 있다.

1.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프랑스, 그리고 다른 열강들이 금본위제도(gold standard)로 돌아간 점. 하지만 오히려 화폐를 과대평가함으로써 각 나라 수출 시장의 축소를 야기했다. 1928년말 부터 사실 전세계 실물 경기 지표는 꼴아박고 있었다.

2. 1번의 이유로 인한 과도한 보호 무역론(Protectionism) 대두. 실제로 미국의 스무트-홀리의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과 근립궁핍화정책(Beggar Thy Neighbor Policy)은 근시안적인 정책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세계는 이미 경제적으로 어느정도, 아니 어떤 시각에서는 오늘날의 자유시장보다도 더 강한 수준의 운명공동체가 된 상태. 결국 세계 시장 전체에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3. 대공황 이전에 이미 시작된 농수산물 시장의 위기. 떨어지는 농산물 가격과 오르는 공산품 가격에 따른 '협상가격의 위기(벌어지는 가위/scissors crisis)'라고 부른 사태의 결과물이다. 이는 이미 트로츠키나, 그다지 회주의자가 아닌 다른 경제학자들도 십여년 전 예견한 바 있다.

4. 독일의 전쟁 배상금. 독일의 경제적 부흥을 막고자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esailles)에서 영국, 프랑스 등은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Republic)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은 화폐를 마구 찍어내서 지불 능력이 없다고 과시했고 인플레이션 덕에 독일 경제는 파탄났다. 연쇄적으로 유럽경제까지 영향이 미치게 된다.

5. 디즘과 대량생산, 대량소비에 따른 '구산업'(광산업 등 1,2차 산업)에서 '신산업'(비재 등)으로의 산업의 변혁. 하지만 이러한 '신산업'은 시장과 소비심리의 변화에 더욱 더 민감해서, 더 쉽게 경기를 타는 경향을 보였다.(흥할 땐 확 흥하고 망할 땐 막 망하고.)

6. 위에 열거한 이유들을 통제할 국제통화기금의 부재.

7. 지출가설
- 케인즈가 주장했다.
- 1929년 주식시장 붕괴로 자산가치가 떨어지고 불확실성이 증가하면서 소비가 줄었다.
- 은행이 부도되면서(3년간 1/5가 부도) 투자자금 조달능력이 떨어져 투자가 감소했다.
- 30년대의 긴축정책 : 30년대 정치가들은 실업이 급증하는 상황에서도 균형재정정책에 관심을 가졌다. 결국 정부의 경기대응이 부재하면서 공항이 심화되었다.

8. 통화가설
- 프리드먼이 주장했다.
- 무릇 통화량은 본원통화(실제 통화)*통화승수(뻥튀기시키는 변수)에 따라 결정된다.
- 대공황기동안 본원통화는 18%증가했음에도 통화승수는 38%감소하였다.
- 통화승수가 감수한 이유는 민간이 은행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고(망하니까), 은행이 대출을 꺼려했기 때문이다(지급준비금 증가).

9. 먼델-토빈효과
- 대공황기에는 디플레이션이 횡행했다.
- 그런데 디플레이션이 횡행할 경우 민간은 앞으로 현금가치가 증가할 것을 예상하고서 투자를 줄인다. 따라서 경기침체가 가속화된다.

이 외에도 유동성 함정 등 각종 지적은 많다.

3. 누구냐 너?

정직하게 말해서 미국의 대공황이 왜 세계 대공황으로 확산되었는지에 대해 명쾌한 설명은 현재에도 찾기 어렵다. 사실 세계 대공황이 미국의 대공황으로부터 촉발된 건지조차도 불분명하다.

미국의 대공황에 대해서는 지출가설, (수정된) 통화가설이 있고 둘다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요컨대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씀씀이를 줄이면서 현금보유를 늘려갔다는 것이다. 즉 흔해빠진 불경기의 시작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부적절한 거시적 대응으로 파국에 이르렀다는게 일반적 공감대다. 그런데 이것이 왜 미국 외에서도 발생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어쩌면 그냥 각국에서 사람들이 씀씀이를 줄인게 우연히도 때가 맞아 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게 가당치 않다고 생각한다면 미국의 대공황 원인으로 갑자기 우연히 전 미국인들이 씀씀이를 줄였다는 것이 꼽힌다는 걸 생각해보기 바란다. 이렇게 말하는건 소위 대공황의 전파기제라는 것이 대단히 취약한 근거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카오스 이론이려면 좀 되려나...[2]

두번째 원인으로 지적된 보호무역주의, 대표적으로 Smoot-Hawley 관세 설의 허구성을 보면 문제는 분명해진다. 이에 대해 폴 크루그먼이 지적한 부분은 사실 그게 별거 아니었다는 거다. 동법은 수입관세를 약 40% 인상했다. 당시 미국의 순수출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6% 이니까 이는 미국의 GNP 대비 고작 2.4%의 세율인상인 셈이다. 일단 이게 미국의 대공황을 야기한게 아님은 너무나 확실하다. 조세부담률이 2.4% 포인트 올랐다고 실업률이 25%에 달하는 파국이 된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소리인거다.

심지어 당시 유럽국가들이 오직 미국과의 무역으로만 많은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고 무리하게 가정해도, 경상수지흑자가 오늘날 흑자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보라. 기껏해야 5%가 보통이다.[3] 쿤의 법칙상 이는 실업률의 약 2.5% 포인트에 해당한다. 이것도 수년간 이어지는게 아니라 단년도로 끝난다. 결국 이 정도로 대공황을 전염시킬순 없다. 이것은 관세뿐 아니라 환율인상 등 여하한의 근린 궁핍화 정책에도 적용되는 논리이다.

또 경쟁적 관세인상이 아닌 경쟁적 환율인상은 더욱더 공황을 전파시키기 곤란해진다. 한국이 환율을 달러당 1,000원에서 10,000원으로 올렸다 치자. 일본도 이에 대응하여 달러당 100엔이던 환율을 달러당 1,000엔으로 올렸다치자. 한국과 일본간에는 원엔 환율변동이 전혀 없다. 나아가 미국도 도로 100엔당 1달러로 떨어뜨리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첫번째로 지적된 금본위제하로의 복귀는 대공황의 전파기제는 아니지만 역시 문제가 많다. 어느 나라가 금본위제하에서 과대평가된 통화를 갖게 되었다고 치자. 그 나라야 수출감소로 경기후퇴가 있겠지만 그럼 그 상대국은? 호황이 되어야 할거다. 이건 동시다발적 불황을 설명하지 못한다. 심지어 무역상대국도 과대평가된 통화를 가졌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두 나라가 통화 가치를 모두 높이거나 낮춘다면 아무일도 발생한게 아니라는 점은 위에서 이미 말했다.

네번째의 경우 독일에 지적된것인데 연이은 전쟁배상부담의 완화조치 및 인플레이션의 안정 이후 독일 경제는 사실상 호황기로 진입해 있었다. 물론 곧 나락으로 굴러떨어고, 진짜 인플레이션이 달려왔지만…. 선후가 바뀌어있단 이야기는 이 이야기다.

여섯번째 국제통화기금의 부재는...사실 있는게 나쁠건 없는데 어차피 70년대 이래의 수도 없는 금융위기들이 국제통화기금 있다고 없었던 적은 없었으니, 대공황이라고 딱히 뭐...

대공황의 국제적 전파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일단 무역에 의한 전파경로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무역의 격감이 세계경제의 성장을 저해할수는 있어도 극단적이고 파국적인 경제상황으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국제적 자본이동 측면을 주목한다.[4]

다른 한편에서는 위에 언급된 협상가격위기와 신 산업으로의 구조변화가 그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정부대응과 맞물려 세계적인 문제가 된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 중 어느 것이 더 결정적인지에 대해 정설은 없다. 두 종류의 주장 공히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고는 있지만 포착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세계 대공황이 왜 발생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대충 정리하자면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한 시장의 위축에 따른 비대한 경제구조의 붕괴와 이를 막아야 할 적절한 정책의 부재로 인한 재앙이었다 보면 되겠다.

4.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정치경제학적 견해: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 표출

마르크스주의자에 따르면, 대공황은 예고 된 것이며 자본주의는 그것으로 무너질 것이라고 보았다.자본가가 이윤을 목적으로 공장을 짓는다면, 물건을 많이 만들려고 할 것이다. 아무리 생산설비와 토지, 원자재(불변자본)가 있다고 하더라도 노동자들의 노동(가변자본)이 더해져 생산된 제품을 판매하지 않고서는 이윤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공황이 5~8년 간격으로 발생해 주기가 매우 짧았으며, 가공할 만큼 위력적인 공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산업의 연계가 긴밀하지 않았고, 무역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으며, 지속적인 기술 발전을 통해 미개척 시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가에게는 이윤율도 중요하다. 이윤율은 이윤과는 엄밀히 다른 개념이다. 투자한 금액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윤을 냈느냐이다. 가령, 1년간 1000억원을 투자해서 100억원을 벌었다면, 이윤율은 10%이다. 하지만 이윤으로 남은 100억원은 몇몇의 자본가가 모두 써버리기엔 많은 금액이다. 따라서 이윤은 자본가에게 돌아가 다시 자본이 되어 투자된다. 즉. 올해에는 1000억원이었던 자본이, 다음 해에는 1100억원이 되고, 다음 해에도 10%의 이윤율을 냈다면 그 다음해의 자본은 1210억원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본은 지속적으로 거대해진다. 이런 반복과정을 통해 자본이 축적된다.

생산량이 많아서 물건을 많이 팔수록 자본가들의 이윤 축적은 늘어난다. 자본의 축적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생산설비가 개발되고, 생산량이 증대되며 빠른 속도로 재화가 보급된다. 하지만 재화의 필요량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보급되고 나면 더 많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이로써 생산량이 떨어지게 되면 대량 생산수단을 소유한 대자본가들의 이윤율은 떨어진다. 따라서 이윤율 하락을 막기 위해 자본가들은 몇 가지 노력을 하지만 결코 이윤율 유지를 보장하지 못한다.

1.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투자를 더욱 확대한다. 이로 인해 생산설비가 거대화되고, 생산력이 높아져 비계획적 과잉생산을 낳게 되어 생산품의 가격이 떨어진다.

2. 임금수준을 낮춘다. 이로 인해 노동자 대중의 소비수준이 떨어진다. 생산품의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게 됨에 따라서 이윤율 하락은 반복된다.

3. 독점, 담합을 위해 자본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한다. 자주 볼 수 있는 사례는 대기업간의 인수합병이나, 작은 기업을 대기업이 사들이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시장을 독점하거나 경쟁 기업과 담합할 수 있을 만큼의 과점 상태를 만든다. 이 상태가 되면 노동자 대중의 상품 구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매년 떨어지는 이윤율을 방어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4. 새로운 상품 개발을 위해 투자를 더욱 확대한다. 하지만 기술개발이 정점에 이르게 되면 투자한 자본에 대비해 이윤의 발생량은 낮아진다. 즉 1000억원을 들여 A라는 기술을 개발해서 상품화 해봤자 더욱 더 고도의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배수로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옛날처럼 100억원을 벌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제적 과정들과 상기 항목에 기술된 역사적 측면을 봤을 때 "이윤 축적→자본 증식→비계획적 과잉 생산→이윤율 하락→공황→전쟁 등의 파괴행위"의 과정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윤율 하락에 따른 공황은 생산의 동기가 이윤인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자본주의의 폐해 때문에 한동안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대안으로 여겨진 적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이 쪽 아이디어를 어느 정도 받아들인 '수정자본주의'가 탄생하여 시장을 100% 자율규제에 맡기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정부 규제와 통제를 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아래 항목의 반혼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며, 상당히 극단적인 견해로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 당시 시장경제의 위축이 있었고, 그로 인한 비대한 경제구조가 무너진 것은 사실이다. 대공황 이전부터 경제에 대한 불안요소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지만, 그들의 예상보다도 내성이 부족했었다.

4.1. 반론

그러나 (주류) 경제학자들은 위와 같은 맑스주의의 이윤율 저하 이론을 유사과학이라고 비판한다. 경제학자들의 의견은 첫째로 생산성이 증가하면 이윤율 역시 증가하고, 둘째로 이윤율의 변화는 매우 복잡하고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이윤율 상승→이윤 축적→투자→과다 경쟁, 과잉 생산 등의 이유로 이윤율 하락 등의 구도로 단순히 도식화하기 힘들다는 반박이다.[5] 대표적으로 1961년 발표된 키시오의 정리에서는 새로운 기술의 도입 등으로 상품의 단위가격이 낮아지고 (맑스주의자들이 가변자본이라 불는) 노동력의 가격이 동일하다면 이윤율은 증가할 수 밖에 없음을 들어 반박한다.

위에서 사례로 든 '이윤율 하락'의 사례를 경제학에서는 효용이론과 균형이론을 통해 설명한다. 특정 재화가 잘 팔린다는 것은 즉 사회 전체적으로 높은 효용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며, 이 재화의 생산량이 늘었을 때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라 그 재화가 가진 효용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낮아질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 재화를 만드는 기업을 소유한 자본가의 이윤율이 저하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이윤율이 오히려 높아질 수도 있으며 (이윤율의 예측이 쉽지 않다는 비판을 다시 생각해보자), 또한 이러한 변화에 의해서 공황이 올지 말지는 알 수 없다.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자본가의 이윤을 노린 투자가 무조건 공황으로 이어지는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이 이 반박의 요점이다.

5. 그 이후

대공황 당시 '아이를 팝니다.'라고 걸어놓은 한 미국인 가정.

세계 대공황의 여파는 경제, 정치, 사회, 그리고 문화에 이르기까지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크나큰 위기감에 따른 민족주의의 부활과 민주주의의 침체, 그리고 정치적 극단주의(예: 스페인 내전)는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비극을 낳게 된다.

미국의 경우,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당선되고 나서 제도주의 비주류 경제학 등을 중심으로 한 뉴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6] 뉴딜 정책이 효과는 집권 1기에는 강력했으나, 집권 2기에 몰아닥친 1937년~1938년의 불황으로 인해 마무리가 좋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실 의견이 많이 다른데 대부분 자유방임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뉴딜을 돈만 낭비한 쓰레기정책이다!!라고 까고 정부개입주의자들은 지들이 잘했으면 애초에 개입을 했겠냐??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1937년 불황은 연방정부가 '이 정도면 됐겠지' 하는 안이한 마음으로 의회내 재정긴축론자들과 타협하면서 재정지출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뉴딜 옹호론자인 폴 크루그먼의 견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불황은 뉴딜이 불황을 끝내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뉴딜의 후퇴가 새로운 불황을 가져왔다는 것이 된다.[7]

여하간 이러한 개별 국가 단위가 아닌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를 해결해준 것은 다름아닌 제2차 세계대전.[8] 다만 요즘에도 이러한 방법으로 경제위기를 해결하려는 순간 핵전쟁이 일어날 테니 좋은 생각은 아니다. 현재 2차 대전 당시의 추축국 수준의 역량을 발휘할 정도의 국가가 잘해봐야 중국, 러시아 정도인데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핵보유국이라는 것이다.

일본제1차 세계대전에 의한 짧은 호황 이후 지나친 보호무역주의로 쌀값이 폭등하는 등의 경제 위기를 겪었던데다[9] 과도한 군비를 감축하고자 하는 긴축정책의 일환으로 1928년 금해금(金解禁)[10]을 시행했다가 바로 다음해에 대공황이 터지는 바람에 이 두가지가 겹처지면서 쇼와공황(昭和恐慌)이 터져 농촌경제가 완전히 붕괴했다. 당시 일본 농촌 기록을 보면 딸을 사창가에 팔아치우면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고, 소작쟁이가 급증하는 상황이 여실히 드러난다.[11] 이로인해 미숙하게나마 이루어지던 일본의 입헌 양당정치는 국민들의 지지를 상실하면서 그 힘을 잃어 군부의 폭주를 억제하지 못하게 되었고, 쇼와공황의 참상 속에서 군에 들어간 일선 병사들의 사회에 대한 증오과 정치에 대한 불신을 등에 업은 일본 군부는 폭주를 시작한다. 그리고 만주사변의 발발로 일본은 긴축재정을 포기하고 준전시의 통제체제로 바꾸면서 대기업 중심으로 중소기업을 합병시키고, 조업을 단축시키는 식의 국가통제정책과 적극재정을 펴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일시적으로 경기가 살아나자 대공황으로 지처있던 일본 국민들은 군부의 폭주를 열렬히 환영하면서 최종적인 몰락으로 향하는 악순환의 사이클[12]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다만, 일본같이 대공황의 여파를 받은 국가 중에서도 변동환율제를 택한 나라들은 비교적 쉽게 불황을 탈출한 편이다. 오늘날에도 그러하듯 환율 장난을 통해 수출로 땜질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30년대는 일시적으로 전세계적으로 고정환율제가 퇴조하고 변동환율제가 대세가 되었다.[13]

그리고 일시적인 전비 지출에 따른 경기 팽창도 따지고 보면 신기루라 볼 수 있는데, 정부 지출은 따지고 보면 죄다 국민 세금이다.[14] 당장 지출이 느는 것 정도는 세금 부담으로 이어지는 정도가 적으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수년 동안 전쟁을 하다보면 슬슬 국민들도 세금 부담에 본격적으로 직면하게 된다.

주목할 것은 대공황의 원인이 된 자산시장 붕괴, 은행 부도, 불확실성 증가, 디플레이션 등의 증세는 오늘날에도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잃어버린 10년이라든가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라든가... 벤 버냉키가 연준총재가 된 것에는 버냉키가 대공황만 파온 사람인 점이 감안된 바가 크다. 그리고 이 때의 교훈을 바탕으로 각국 중앙은행은 세 가지를 중시하게 되었다. '자산시장도 고려해라.', '경제의 불확실성을 없애라.', '돈이 필요한 곳에 어떻게든 돈을 공급하라.' 이 때의 교훈은 오늘날의 양적완화 정책에 반영된 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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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정확히는 10월 24일 "검은 목요일"과 10월 29일 "검은 화요일"의 폭락.
  • [2] 사실 카오스 까지 갈건 없고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 미디어의 발달, 버블, 등으로 인해 미국인들의 소비가 실제 소득수준 이상으로 과잉되었고 결국엔 그 한계에 다다르면 소비는 다시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유럽의 제국 역시 전세계의 식민지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고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손실분을 메우려면 더 넓은 식민지가 필요한 상황에서 그것을 충족 시킬 수 없으니 재화의 생산 및 소비여력이 줄어들 수 밖에 없는 것.
  • [3] 한국의 경우 2011년 기준으로 272억 달러로 명목GDP 8325억 달러의 3%에 그친다. 근데 PPP는 더 높고 경상수지 흑자는 더 떨어질 계획이다.
  • [4] 다시 강조하지만, 20세기 초엽 당시 서구는 의외로 국제투자가 극히 활발했다. 오히려 규제가 없었다는 점에서는 지금보다 더 자유롭다고 보는 견해도 많다.
  • [5] 특정 산업에서 이윤율이 오르고 내릴 거라는걸 예측할 수 있으면 주식을 하면 된다. 주식의 상승과 하락을 맞출 수 있다는 소리니..
  • [6] 영국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경제사상을 적용한 케인스 주의는 대공황 이후 주류의 반열에 올라선 건 사실이지만, 뉴딜 정책은 케인스 주의와 직접적 연관이 적다. 각자 비슷한 시기에 따로 제시한 것. 당선 직후 루스벨트는 케인스를 직접 만났지만, 균형재정을 지지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의 수요위주 경제학에 대해서 "정치 경제학자라기보다는 수학자겠구만!(“He must be a mathematician rather than a political economist”)"라며 비꼬았다. 뉴딜 정책은 이후 균형재정 목표가 후퇴하면서 진행 된 것이었다.
  • [7] 크루그먼은 진정한 코미디는 80여년 뒤 일부 멍청한 후손들이 이걸 집어들고 재정정책이 대공황에 별 효력이 없었다고 난리를 낸다는 점이라고 신자유주의를 비꼬았다.
  • [8] 이것 역시 "뉴딜은 별거 아니었어"라는 생각으로 지나치게 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히 전시경제의 활황은 존재했지만 흔히 생각하는 화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시경제의 배급체계하에서 소비가 배급을 통해 품목별 수량별로 제약을 받기에 재정지출의 승수효과는 극단적으로 쪼그라든다. 뉴딜 시기와 비교해서 훨씬 낮은 승수효과는, 그저 더 많은 지출규모에 의해 상쇄되었을 뿐이다. 이걸 효율적인 부양정책이라고 생각하면 미친거다. 다만 승수효과를 통해 보이는 효율성과는 별개로 전쟁에는 돈이 들고, 돈이 들고, 돈이 엄청 많이 든다. 규모면에서는 댐 공사와는 넘사벽. 어떤 면에서 본다면 공황을 해결할 정도로 막대한 정부지출이 가능한 영역은 전쟁 정도밖에는 없다고 봐야 할지도?
  • [9] 이 때 일어난 폭동 덕에 과거 조선총독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리가 물러났고, 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 산미증식계획이었다.
  • [10] 금 수출 금지정책 중단. 당시 일본은 열강으로 인정받던 5개국(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중 금 수출 통제를 마지막까지 시행하던 국가였는데 국가재정 긴축 정책(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정부측에서 군부의 반대를 억누르고 동의한 것은 이러한 긴축재정의 일환이었다)에 따른 것.
  • [11] 1930년대 조선의 경우엔 요즘으로 치면 대졸자인 전문학교 졸업자의 70% 이상이 실업자로 이른바 룸펜이 되어버린 것도 이러한 불황의 여파라 볼 수 있다.
  • [12] 군부의 폭주로 전쟁 발생 -> 정부가 이 때문에 적극재정을 펴게 되면서 일시적으로 경기 부흥 -> 국민들이 군부가 일 잘한다고 군부의 폭주를 지지 -> 군부는 더더욱 폭주. 이런식으로 더 큰 전쟁인 중일전쟁이 발생하고, 더더욱 큰 전쟁인 태평양전쟁까지...
  • [13] 그리고 이러한 고정환율제는 종전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로 다시 부활해 30년간 국제금융을 지배하게 되었다.
  • [14] 그리고 전쟁의 특성상 국민이 반드시 돈으로만 세금을 내지는 않는다. 징병, 노역, 좀 더 나가서 안부, 로정신대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