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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last modified: 2019-02-19 19:44:32 Contributors

成宗

동북아시아에서 군주에게 붙이는 시호나 묘호의 하나. 대체적으로 국가 체제와 문물, 제도 정비를 완성시킨 군주라는 뜻이 담긴 시호/묘호이다.

Contents

1. 고려 성종 왕치
1.1. 생애와 업적
1.2. 평가
1.3. 조선 성종과의 유사점
1.4.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1.5. 강릉(康陵)
2. 조선 성종 이혈
2.1. 왕위에 오르기까지
2.2. 치세와 치적
2.3. 문약해진 군사력
2.4. 믿는 도끼에 발등?
2.5. 수성의 군주
2.6. 인물됨과 일화
2.7. 사후
3. 오월의 성종
4. 남당의 성종
5. 성종 야율문수노/야율융서
6. 원 성종 보르지긴 테무르
7. 의 성종

1. 고려 성종 왕치

고려의 역대 국왕
5대 경종 왕주 6대 성종 왕치 7대 목종 왕송

묘호 성종(成宗)
시호 강위장헌광효문의대왕
(康威章憲廣孝文懿大王)
왕(王)
치(治)
온고(溫古)
배우자 문덕왕후(文德王后), 문화왕후(文和王后)
아버지 왕욱(王旭)
어머니 선의왕후(宣義王后)
생몰년도 음력 960년 12월 26일 ~ 997년 10월 27일
양력 961년 1월 15일 ~ 997년 11월 29일 (38세)
재위기간 음력 981년 7월 12일 ~ 997년 10월 27일
양력 981년 8월 14일 ~ 997년 11월 29일 (16년)

고려의 제6대 왕.

왕건의 손자로, 왕이 되기 전부터 도학군자로 이름이 높아 주변의 선망을 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대대로 즉위한 이후에는 유교적인 정책을 펼쳐 왕권을 다지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는 등 많은 숱한 업적을 세운 명군이 되었다. 이 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고려는 지방관조차 없는 허수아비 호족연합국가에 불과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성종이 12목을 설치한 것도 후일 조선의 지방관 체계와 비교하면 바둑의 포석이라고 봐주기도 애매할만큼 조잡한 것이었고 그만큼 성종대 까지도 호족들의 힘이 강성했음을 의미한다.

1.1. 생애와 업적

태조의 제4비인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의 왕욱[1]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할머니인 황보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이미 어릴적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학문에 능했다고 한다.

경종이 말년에 정사에 뜻을 잃고 향락에 빠져있던 중에 병으로 쓰러졌는데, 당시 그의 아들은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을 염려한 경종는 자신의 사촌동생이자, 누이(문덕왕후)의 남편으로서 아들의 외삼촌이 되는 성종에게 선위를 하고 숨을 거두었다. 사실 성종에겐 후에 효덕태자라고 불리게 되는 친형이 있었으니, 광종의 사위라는 점이 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성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재위 후 학자 출신의 최승로를 등용, 그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대대적인 개혁에 힘썼다. 그런데 지금 남아있는 최승로의 주장을 크게 4가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신하우대, 불교약화, 중앙집권, 신분제 강화. 즉 개혁이라기보다는 고려에 귀족이 등장하게 되는 단초를 열게 된 셈이다. 단적으로 여기서 노비환천법이 등장해서 광종이 평민으로 풀어준 사람들이 다시 노비로 돌아가는 병크가 벌어진다.

성종은 또한 유교적인 정치를 지향해 불교의 폐단을 바로잡고, 3성 6부제를 도입하는 한편 12목(牧)을 설치해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을 향상시켰다.

이 때에 왕건의 훈요 10조를 깔끔히 씹어버리고(...) 즉위하자마자 과감하게 팔관회와 연등회를 폐지시켜 버렸다. 훈요 10조에서는 불교를 숭상하라는 조항이 있었다. 일단 성종이 유교적인 성향이 강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팔관회와 연등회는 전국적으로 치르는 거대한 종교 행사인 만큼 한번 지낼때마다 엄청난 국비가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 행사보다는 일단 고려의 기틀을 잡는 것을 더욱 우선시했던 것.

한편, 재위 도중 거란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평양 이북을 넘겨줄 뻔 했으나, 명신 서희의 정확한 판단과 재치있는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놓았다. 사실 이 대목은 서희의 개인 활약이 컸다. 서희를 제외한 조정의 대세는 할지론(땅을 떼어주자는 것)과 항복론뿐이었다. 이 때를 거란의 제1차 침입으로 치며, 자세한 것은 여요전쟁서희 항목 참고.

상기했듯 12목을 설치함으로써 고려의 지방관 체계의 기틀을 잡았다. 그러나 고려왕조 내내 지방관이 파견된 곳보다 아닌 곳이 많았던 만큼 조선시대의 지방관 체계만큼 정교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저 바둑에서 포석 깔듯 12구역에 걸쳐 임시로 체계를 다진 것에 불과하다. 성종의 치세에도 여전히 호족세력이 강대했기 때문으로 이 지방관들의 권한도 조선의 지방관들과는 비교하기 난처할 정도로 약했다. 이러니 지방 별로 제대로 된 징세나 징병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이후 고려가 전란을 겪으면서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쉽게 말해 징병이든 징세든 전국에 걸쳐 공정하게 골고루 시행하지 않고 되는 곳에서만 계속 뽑아먹은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지방 호족들의 불만을 억누르고 지방관 제도의 기반이라도 다졌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성종은 이렇게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과로한 탓인지 아쉽게도 38세라는 한창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죽기 직전에 왕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대사면을 내리자는 말에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렸는데 그래 봤자 뭐하며 나를 계승할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새 은혜를 베풀 것이냐."며 거절하고 죽었다. 조선의 왕 성종과 사망한 나이가 같은데 우연치고는...고려 초엔 정략 때문에 왕이 여러 부인을 맞아들였던 때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성종은 조선의 성종에 비하면 여성 편력이 화려하지 않다(...).

아들은 없었고 딸만 있었다. 이 때문에 선왕의 아들이자 성종의 조카인 개령군이 목종으로 즉위했다.

1.2. 평가

결론적으로 고려의 기틀을 잡은 왕이다. 고려 광종이 고려라는 나라의 토대를 잡았다면, 성종은 이를 계승해 기둥들을 세워 기틀을 잡았다고 보면 된다. 성종 때를 시작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고려 관료제의 기틀이 잡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유교적인 사상과 정책을 바탕으로 한 체제 정비에 의해 중앙집권체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왕권이 향상되고 고려의 통치 체계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초반 약했던 고려의 왕권이 광종 대에서 정점을 찍은 다음에 경종대의 반동정치를 거친 결과물이었다. 이부분도 어떤 점에서는 세조-예종으로 이어지는 성종과 유사하다.

이로 인하여 신분 제도의 질서로 확립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면에서는 고려의 특징인 중앙 문벌귀족정치가 확립되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유교적 중앙 귀족의 의도가 강했고, 성종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국가의 틀을 잡았다. 성종 정도 되는 인물은 이 시스템 속에서도 할 것 다했지만, 그렇지 못한 왕들은 귀족들에게 휘둘리기 시작하게 되는 단초가 된다. 여러모로 큰 업적을 남긴 왕.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여동생들이 유교사상과 어긋나는 일을 해 처벌해야 했다. 여동생들 모두 경종의 아내였지만, 경종 사후에 둘 다 다른 남자들과 정을 통했기 때문. 헌애왕후의 경우는 그녀를 한동안 유폐하고 남자 쪽을 귀양보냈고, 헌정왕후의 경우는 사생아를 낳은 후 사망했기에 남자 쪽을 귀양보내는 걸로 그쳤다. 그래도 조카이기 때문인지 헌정왕후의 아들은 한동안 궁궐에서 성장했다.

세간에는 유교적인 정책을 펼쳤다 하여 불교를 탄압했다는 이미지도 있는 듯 하지만 오히려 유교와 불교의 조화를 꾀하기도 하였다. 비록 백성들에게 유교적 사상을 권장하기는 하였으나 조선 시대 마냥 노골적인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는 것은 피하는 편이었다. 이러한 성종의 성향은 아버지와 태조의 제사를 지낼 때에 유교적인 제사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시켜 불공을 드리게 했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불교가 이미 수백년이 넘도록 백성들 사이에서 신봉되었기 때문이다. 유교 교리가 통치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에도 많은 백성들이 전통적인 불교와 민속 무교를 신봉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 초기에는 조정이 노골적으로 불교를 배척하지 못했다.

1.3. 조선 성종과의 유사점

여러모로 조선의 성종과 흡사한 면이 있다.
우선 아버지가 왕이 아니었으며, 위에 형을 둔 상태로 왕위에 올랐고, 사후에 받은 묘호도 같고,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정책을 펼쳐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는 공통점도 있으며 심지어는 사망했을 당시의 나이도 같다.(38세). 맹꽁이 서당에서도 이를 가르켜 신묘한 우연의 일치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사후에 나라 꼴이 막장이 되었다는 것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앙 귀족들의 권한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국가체제를 완성했다고 하지만, 그 기반이 된 것이 다름 아닌 의 시스템이었다.
때문에 문치주의가 극도로 강해졌고, 거란의 1차 침입에 할지론이 넘쳐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중앙집권의 과정은 동시에 중앙 귀족의 경쟁상대였던 지방 호족들을 향리로 굳혀버리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는데 이를 상징하는 것이 향직 개정이었다. 여기에 노비 환천법과 공신 자손 우대 등으로 중앙귀족을 강화했으니 왕권이 약해지면 바로 귀족 정치가 열리게 되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1.4.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천추태후(드라마)에서는 김명수가 성종으로 연기했다. 경종 생전에는 그래도 천추태후와 함께 고난을 견디는 사이였으나, 신라파 유학자 신료들과 친해지면서 천추태후와 대립하게 된다. 천추태후가 주인공이며 선역인 탓에, 그의 거의 모든 업적이 드라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목종이 어린 시절, 그녀와 따로 지내게 만들면서 목종의 정신병이나 성격 이상 등도 정황상 성종 탓인것처럼 묘사해버린다. 모든 업적을 천추태후에게 빼앗겨버린 목종보다는 나을지도 모르지만... 정리하자면 유학자 신료들의 감언이설에 동생과 적대하게 되는 안습군주.

1.5. 강릉(康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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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북한 판문군 진봉리에 남아 있는 성종의 강릉(康陵). 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왕릉 맞다. 원래는 병풍석과 석축이 있었는데 농지개발 과정에서 없어지거나 묻혀 버렸다고 한다.

2. 조선 성종 이혈

조선의 역대 국왕
8대 예종 이황 9대 성종 이혈 10대 연산군 이융

우승우 화백의 성종 어진
묘호 성종(成宗)
시호 조선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
(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강정(康靖)
혈(娎)
출생 한성 경복궁 동저
사망장소 한성 창덕궁 대조전
배우자 공혜왕후(恭惠王后) / 폐비 윤씨(廢妃 尹氏)[2] / 정현왕후(貞顯王后)
아버지 이장(李暲)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
생몰기간 음력 1457년 7월 30일 ~ 1494년 12월 24일
양력 1457년 8월 19일 ~ 1495년 1월 20일(38세)
재위기간 음력 1469년 11월 28일 ~ 1494년 12월 24일(25년)
양력

조선의 제9대 왕.
별명낮에는 , 밤에는 걸주(晝堯舜 夜桀紂).(?) 근데 밤의 걸주란 표현 자체가 너무 야사에 의존한 기록이라 신빙성이 그닥... 성종은 유학적으로 완벽한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대간의 압박으로 거의 죽을맛인 삶을 살았다. [3]

2.1. 왕위에 오르기까지

세조의 손자로,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됨)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한확의 딸인 소혜왕후 한씨.

의경세자가 세상을 일찍 떠난 뒤 어머니와 함께 궁을 나가 사가에서 생활했다. 군호는 잘산군(乽山君)(혹은 파자하여 자을산군(者乙山君))이었다. 조선에서 만들어진 봉호에만 쓰이는 한자이나, 이를 자을이라고 읽으면 더 이상해진다. 성종의 예를 제외하면 다른 예가 없는데, '둘째' 정도로 되는 군호이다.

예종이 스물 겨우 넘긴 나이에서 갑자기 족질에 걸려 승하하자 정희왕후는 신숙주와 한명회를 불러들여 후계를 논하게 했다. 중요한 문제라고 흔히 심부름을 하는 내관들이 아니라 승지들이 편지를 전달했는데 이 과정이 여러차례였다. 누굴 후계로 할지 상당히 오랫동안 고민을 했단 소리다. 결국 결론은 제안대군은 너무 어리고 월산군은 허약하니 자을산군이 능력도 출중하고 건강하다는 이유로 조선의 새 국왕으로 지명된다. 왕위에 올랐을 때의 나이가 13세라 아직 친정을 하기에는 이른탓에 조선 역사상 두번째로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성종은 예종이 죽은 당일에 왕이 됐다. 대개 선왕이 죽고 4~6일 정도 기다리며 소생하길 기다리는게 관례인데 취약한 정통성 문제로 서둘러 즉위한 것이다. 만약 예종이 다시 살아났다면? 이때 인수대비가 둘째를 왕으로 삼으려고 술수를 부렸다는 야사가 자주 나오는데 인수대비가 예종을 죽이고 반란을 도모할 작정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얘기다. 아님 예종이 일찍 죽을 줄 안 점쟁이거나

2.2. 치세와 치적

7년 후, 성인이 된 성종은 친정을 개시했고 세종세조의 치적을 계승하여 조선을 발전시키는데 진력했다. 세조가 편찬을 시작했던 조선의 헌법에 해당되는 "경국대전"을 완성해 반포했고[4], "여지승람","악학궤범","동문선"같은 서적을 편찬했다. 이런 면모는 세종과 비슷한데, 세조에 의해서 사라진 집현전을 대체할 홍문관을 새로 창설하고 독서당제도를 시행해 인재들의 육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외적으로도 북방의 여진족 소탕이나 남방의 일본과의 무역 확대 등을 통해 국력을 크게 진작시켜 전성기를 이루었다. 근데 여진족 소탕은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래 문약해진 군사력 소항목 참고.

한편으로 훈구파들과 대립 관계에 있던 사림파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기 시작했는데 세조에게 사대부가 잡학 따위를 익히면 쓰나요?라고 했다가 미움받아서 중앙에서 밀려났던 김종직이 성종 시절에 중용된 대표적인 사림파이다. 이러한 인재등용과 문화발전으로 조선은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임진왜란 전까지의 체제와 문물이 사실상 성종대에 정비되었다.

그러나 신하들이나 자신의 여자관계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부인의 질투와 여성의 재혼에 대해서는 매우 완고한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단적인 경우가 그 유명한 어을우동에게는 사형을 내렸으나 정작 그녀와 어울렸던 남성들은 대부분 사면했으며, 더욱이 신료들도 반대한 과부 재가 금지법을 통과 시킨 것을 보면 성종의 여성관은 뚜렷해진다. 성종은 '굶어 죽는 것은 작은 일이나 정절을 잃는 것은 큰 일'이라며 과부의 재혼 금지를 <<경국대전>>에 명시하여 법으로 정했는데"[5], 이 법은 조선 후기까지 여성 억압과 통제의 구실로 작용한다.

성종대에 대표적 흑역사는 바로 폐비 윤씨 사건.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원자를 낳은 숙의 윤씨를 왕비로 봉했지만, 성종이 다른 후궁의 처소를 자주 드나드는 것에 화가 난 중전 윤씨가 투기를 벌였고 야사에서는 성종과 중전이 다투다가 그만 중전이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바람에 인수대비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생각하지 않는 점이 대비 들 중에서 폐비 윤씨를 끌어내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정희왕후였으며 대비들은 초반에는 애당초 윤씨가 중전이 되는 데 적극 찬동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폐비 윤씨 항목 참조. 그녀의 패악이 너무 심하여 1년도 안되 폐비론이 대두되고 성종이 그 여자 당장 내쫓아! 라고 길길이 날뛰는데 임사홍이 눈물을 흘리며 세자를 생각하라고 간하여 정국이 바뀌었고 윤씨는 중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느나 불과 몇달 후 임사홍이 실각하고 윤씨의 행동은 잠잠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과감해지고 과격해졌다.독약을 상비하고 다니는가 하면 주상의 발자취를 다 깎아버리고 싶구나! 같은 무서운 말을 하여 인수대비가 수라상 근처에는 아예 얼씬도 못하게 조치를 했을 정도였고 결국에는 폐비되고 만다.

폐비 윤씨가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데 인수대비가 나 저년 싫어 하고 후궁들과 공모하여 허위 보도를 올린다음 성종으로 하여금 윤씨를 죽이게 했다는 야사가 상당히 많은데 적어도 실록을 보면 별로 그렇지도 않다. 애당초 성종은 윤씨가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도 없었으며 윤씨를 예우하라는 상소가 올라오면 콧방귀나 뀌었다. 윤씨의 집이 도둑맞았다는 소식에 담장을 쌓아주고 이웃들을 조사하라는 요구가 오자 "옘병, 지가 잘못해서 털린걸 왜 나보고 난리냐? 이딴 논리면 나라에서 서울의 도둑맞은 집은 다 고쳐줘야 하냐?"라고 비웃었고 윤씨가 쫓겨나기가 무섭게 윤호의 딸을 중전으로 들이는 등 윤씨의 자리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리고 윤씨의 죽음의 정황을 보자면 반성이니 참소니 하는 얘기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연산군의 나이가 어언 일곱살이 되자 경연 중에 권경우 등에 의해 명색이 한때나마 국모였는데 좀 곱게 대우하는게 좋지 않을까염? 하는 의견들이 나왔다.

시독관(侍讀官) 권경우(權景祐)가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죄를 지어 외방에 있었다가 조정에 돌아와서도 시종(侍從)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생각한 것이 있"어도 감히 상달(上達)하지 못하였습니다. 폐비(廢妃) 윤씨(尹氏)는 지은 죄악이 매우 크므로 폐비하여 마땅합니다만, 그러나 이미 국모(國母)가 되었던 분이니, 이제 무람없이 여염(閭閻)에 살게 하는 것을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떨어진 장막을 버리지 아니함은 말을 묻기 위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사용하던 물건은 비록 수레와 말이라도 감히 무람없이 처리를 하지 못하는 것은, 지존(至尊)을 위해서 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따로 한 처소를 장만하여 주고 관(官)에서 공급(供給)을 하여 줌이 좋을 듯합니다."

성종이 경들 생각은 어떻소? 하고 묻자 사헌 채수영의정(영사(領事) 겸직) 한명회가 '지존이 썼던 물건도 함부러 안하는 법인데 배우자는 두말할 것이나 있나요?' 라고 윤씨에 대한 예우를 청했다. 한명회가 성종의 옛 장인임을 생각하고 보면 원칙론 적임에도 매우 묘한 발언이다!

채수가 아뢰기를, “윤씨(尹氏)의 죄를 정할 때에 신이 승지(承旨)로 있으면서 이창신(李昌臣)과 더불어 궁내에서 나온 언문(諺文)을 번역하여 그의 죄악상(罪惡狀)을 길이 후세에까지 보이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윤씨의 죄악상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미 지존(至尊)의 배필(配匹)로서 국모(國母)가 되었던 분인데, 이제 폐위되어 여염에 살게 하는 것은 너무나 무람없는 듯하니,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누구라도 애처롭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금년은 흉년이 들었는데, 아침저녁으로 공급되는 것이 또한 어찌 넉넉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처음 폐위를 당하였을 때에도 따로 처소를 정하여 공봉(供奉)하기를 청하였었습니다.”

하니, 한명회는 말하기를, "신 등은 전일에는 이러한 뜻을 아뢰었습니다. 대저 지존께서 쓰시던 것은 아무리 미소(微小)한 것이라도 외처(外處)에 두지 못하는데, 하물며 일찍이 국모가 되었던 분이겠습니까?"

꼭지가 돈 성종이 "이것들이 윤씨 신하냐? 내 신하냐? 윤씨가 나한테 뭘 했는지 알아? 백성들이 윤씨를 불쌍하게 여겨? 어떤 새낀지 나오라 그래! 그리 불쌍하면 너네들 녹봉으로 예우를 하던가?"라고 일갈했다.


임금이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윤씨의 죄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당초에 그의 시비(侍婢)를 치죄(治罪)하였을 적에 내 마음에는 폐비를 하고자 하였지마는, 대신(大臣)들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참아서 중지하고 그가 허물 고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도 오히려 허물을 고치지 않으므로 내가 삼전(三殿)12531) 에 품지(稟旨)하여 위로는 종묘(宗廟)에 고하고 아래로는 대신들과 의논하여 폐출(廢黜)시켜서 외처로 내보낸 것이다. 내가 어찌 사사로운 노여움이 있어서 그러하였겠느냐? 옛적에는 참소(譖訴) 때문에 폐비를 한 것이 있으니, (驪姬)가 야반(夜半)에 운 것[6]과 같은 일이 이것이다. 나도 전고(前古)의 일을 약간 알고 있으니, 어찌 감히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움이 있어서 그렇겠는가? 만일 국모(國母)로서의 행동이 있었던들 마땅히 국모로서 대우하였을 것이다. 이미 서인(庶人)이 되었는데, 여염에 살게 하는 것이 어찌 무람없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경들이 어찌 국모로서 말을 하느냐? 이는 다름이 아니라 원자(元子)에게 아첨하여 후일의 지위를 위하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윤씨가 나에게 곤욕을 준 일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심지어는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하였다. 그러니 나를 어떠한 사람으로 여기기에 이러한 말을 하였겠는가? 또한 차고 다니는 작은 주머니에 항상 비상(砒礵)을 가지고 다녔으며, 또 곶감(乾柿, 건시)에 비상을 섞어서 상자 속에 넣어 두었으니, 무엇에 쓰려는 것이겠는가? 만일 비복(婢僕)에게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나에게 쓰려는 것일 텐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어찌 편안하였겠는가? 나는 당 중종(唐中宗) 과 같이 됨을 거의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7] 지난번 삼대비전(三大妃殿)에 문안하였더니, 대비께서 말씀하기를, ‘이제 윤씨와 비록 거처를 달리하고 있으나 마음은 편하다.’고 하였다. 부모 된 마음으로도 이와 같은데, 그대들의 마음만 유독 어찌 그러한가? 그대들의 말이 이러하니, 나를 당 중종(唐中宗)처럼 만들려는 것이냐? 또한 윤씨는 내가 거처하는 곳의 장막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소장(素帳)이다.’[8]라고 하였으니, 그의 부도(不道)함이 이런 유(類)인데 목숨을 보전한 것만도 다행이다. 이제 내 나이 젊으나 사람의 장수(長壽)와 요사(夭死)는 알기 어려우니, 만일 일찍이 계책을 도모하지 아니한다면 한(漢)나라 여후(呂后)나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같은 화(禍)가 없겠는가? 그러니 후일의 화를 미리 헤아릴 수는 없다. 공자(孔子)가 아내를 내쫓았는데, 그가 죽자 이(鯉)가 통곡하였는데, 공자가 그르게 여겼다. 원자(元子)도 효자(孝子)가 아니라면 그만이지만, 효자가 되고자 하면 어찌 감히 어미로 여기겠느냐? 비록 나의 백세(百歲) 뒤에라도 저를 어찌 감히 내가 거처하던 집에 살게 하겠는가?”[9]

(중략)..윤씨의 죄악에 대하여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단죄(斷罪)해야 하겠지마는, 내가 참고 그를 단죄하지 않았으니, 그가 목숨을 보존한 것만도 다행이다. 그런데 공봉(供奉)하고자 함은 어째서인가? 그대들이 만일 그 가난하고 헐벗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그대들의 녹봉(祿俸)으로써 공급하지 않는가? 윤씨가 궁(宮)에 있을 때에 항상 가난하지 않다고 말하여 호부(豪富)함을 자랑하였으니, 어찌 굶주리고 헐벗는 데에 이르렀겠느냐? 그대들은 경연관(經筵官)으로서 나의 뜻을 알 만한데도 말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그대들은 윤씨의 신하인가, 이씨(李氏)의 신하인가? 나는 알지 못하겠다. 이는 반드시 윤씨의 오라비 등 불초(不肖)한 무리들이 붕반(朋伴)을 인연하여 서로 퍼뜨려서 말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나 강하게 윤씨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 보인 다음에 윤씨가 살아있다간 이런 얘기가 또 나올 것이고 윤씨 성격상 자신이 죽은 이후에 조정이 고요할리가 없다고 판단, 신하들과 며칠에 걸쳐 논의한 다음에 8월 16일에 이세좌를 보내서 사사시켜버렸다. 성종실록의 1482년 8월 11일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종이 스스로의 비교적 짧은 수명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열무(閱武)하고, 드디어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가서 삼전(三殿)에 문안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영돈녕(領敦寧) 이상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대전(臺諫)들을 명소(命召)하여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인견하고 말하기를,

“윤씨(尹氏)가 흉험(凶險)하고 악역(惡逆)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초에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하겠지만, 우선 참으면서 개과 천선하기를 기다렸다. 기해년12579) 에 이르러 그의 죄악이 매우 커진 뒤에야 폐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지마는, 그래도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는 아니하였다. 이제 원자(元子)가 점차 장성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안정되지 아니하니, 오늘날에 있어서는 비록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각기 사직(社稷)을 위하는 계책을 진술하라.”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이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발호(跋扈)12580) 할 근심이 있으니, 미리 예방하여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는 말하기를,

“신이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았을 때에는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아니한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정창손이 아뢰기를,

“다만 원자(元子)가 있기에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만일 큰 계책을 정하지 아니하면, 원자(元子)가 어떻게 하겠는가? 후일 종묘와 사직이 혹 기울어지고 위태한 데에 이르면, 그 죄는 나에게 있다.”

하였다. 심회(沈澮)와 윤필상(尹弼商)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결단을 내리어 일찍이 큰 계책을 정하셔야 합니다.”

하고, 이파(李坡)는 말하기를,

“신이 기해년(己亥年)에는 의논하는 데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대저 신첩(臣妾)으로서 독약을 가지고 시기하는 자를 제거하고 어린 임금을 세워 자기 마음대로 전횡(專橫)하려고 한 죄는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옛날 구익 부인(鉤弋夫人) 12581) 은 죄가 없는데도 한 무제(漢武帝)가 그를 죽인 것은 만세(萬世)를 위하는 큰 계책에서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마땅히 큰 계책을 빨리 정하여야 합니다. 신은 이러한 마음이 있는 지 오래 됩니다만, 단지 연유(緣由)가 없어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일에 그가 발호(跋扈)하게 되면 그 후환이 어찌 크지 않겠느냐?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조정의 신하들을 많이 죽였던 것은, 자기 죄가 커서 천하(天下)가 복종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위엄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좌우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니, 재상(宰相)과 대간(臺諫)들이 같은 말로 아뢰기를,

“여러 의견들이 모두 옳게 여깁니다.”

하였다. 이에 곧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賜死)하게 하고, 우승지 성준(成俊)에게 명하여 이 뜻을 삼대비전(三大妃殿)에 아뢰게 하였다. 이세좌가 아뢰기를,

“신은 얼굴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내관(內官)과 함께 가고자 합니다.”

하니, 조진(曺疹)에게 명하여 따라가게 하였다. 이세좌가 나가서 내의(內醫) 송흠(宋欽)을 불러서 묻기를,

“어떤 약(藥)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니, 송흠이 말하기를,

“비상(砒礵)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므로, 주서(注書) 권주(權柱)로 하여금 전의감(典醫監)에 달려 가서 비상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전교하기를,

“이세좌는 오지 말고 그 집에 유숙하라.”

하였다.

그리고 추가로 베푼 예우라 해봐야 군인들을 보내 관나르는 것이나 돕게 하고 4년 후 무덤에 무너져 여우와 삵들이 몰려와 뼈를 갉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기에 무덤 보수와 사당 건립을 허용했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연산군은 이때 세자의 자격으로 이 결정을 내려질 때 현장에 있었다는 것. 과연 연산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여하튼 이 일이 조선 왕조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촉발시키는 갑자사화의 동인이 된다.

폐비 윤씨가 손톱자국을 냈다는 이야기도 일견 이해가 가는 것이, 실제로 부인이 폐비를 포함해서 무려 12명이었다(…). 자녀는 12남 16녀(28명)로 자녀복 많은 조선 군주 랭킹 3위(…). 외척들의 세력확장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정실부인 입장에서라면 유난히 질투심이 강하지 않더라도 화날 만 하다. 실제로 랭킹 1위인 태종은 정실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가 엄청 안 좋았다고 하니까. 폐비 윤씨는 죽으면서 자신은 "엄씨와 정씨의 모함 때문에 죽는다"고 했지만 정작 그 책임은 성종과 인수대비에게 있었으며, 더 궁극적으로는 남성은 자유롭게 여색을 즐기나 여성에게는 질투도 허용되지 않았던 유교사회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모순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반대로 여자가 열 사내 처첩 거느리면 그 처첩들끼리 서로 죽고 물어뜯고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걸 떠나서 만약 윤씨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맞다고 가정하면 윤씨의 행동이 완전 막나간건 사실이긴 하다. 더욱이 <내훈>을 쓴 인수대비였다면 그 분노는 말할 것도 없다. 단순히 질투만 하는 것이었다면 원경왕후를 정종이 거들었던 것처럼 동정론이라도 있었을 텐데 그걸 넘어서 역모로 해석될 행동까지 했으니...

2.3. 문약해진 군사력

사실 폐비 윤씨, 사림파 등용에 묻혀지기 쉬운데, 성종때 군사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윤필상(연산군갑자사화에 희생당한 대신)이 장수들이 진법을 모르고 있다고 상소를 올렸고, 왜구 토벌 성과가 약해지고, 보루각의 관리가 소홀해졌으며, 6진이 약해있었고, 병선을 조운으로 쓰는등. 군사력이 약해지는 현상들이 있다.[10]

그리고 성종의 업적(?)중 하나인 여진족 토벌이 심각하게 어이없다. 여진족들을 토벌하려고 병사 4만을 모았는데, 대간이 군량이 부족한 초겨울이라서 반대하였으나 성종은 이 말을 듣지 않고 허종에게 명을 내렸다. 허종이 이끄는 토벌대가 여진족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는데, 만난 여진족들은 200명. 4만임에도 불구하고 여진족 겨우 4명만 사로 잡았다. 이후 여진족의 마을에 쳐들어갔지만, 마을엔 사람이 없었다. 결국 거기서 여진족을 토벌하려고 진지를 세웠으나, 병사들이 얼어죽고 군량이 부족해서 아사하고 탈영이 일어나는 막장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허종은 후퇴하고 성과를 위조했다. 이 때 대간이 허종의 논공행상을 반대하는 상황까지 있다. 이것과 비슷한 피로스의 승리인 제2차 대마도 정벌은 적어도 왜구를 많이 잡았고 승리라고 보기엔 애매하더라도, 왜구들의 침략을 완화시켜주는 성과라도 있었는데, 성종의 여진족 토벌은 그런 것도 없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성종의 변명없는 실책 중에서 하나이다.

2.4. 믿는 도끼에 발등?

성종 하면 단연 사림을 어엿한 정치 세력을 부상시킨 인물이고 김종직을 비롯한 이들을 중용했으며 대간 권력을 크게 키워 조선식 비판 정치를 활성화시킨 인물로 유명하지만 정작 자신이 키운 대간 권력에 의해 거의 죽기 일보 직전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조선 초만 해도 대간은 미래의 대신들이고 대신들은 과거의 대간들로 이해관계가 상당부분 일치했으며 세조 때는 마음에 안 드는 말을 했다고 정청에서 관이 벗겨지고 상투를 틀어쥔채 끌려나가는 등 대우가 매우 처참해서 거의 구실을 못하던 판국이었다. 이에 성종은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여 대간을 채웠고 유명무실해진 사헌부, 사간권의 권력을 회복시키고 새로이 홍문관에게도 비판 기능을 부여하여 비판을 활성화시켰는데 초기에는 대간이 대신들을 장악하고 깨끗한 정치를 불러일으키는 듯 했다.

그런데...대간들이 하는 말이 거의 성종이 아니었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수준의 말들이 상당했다. 대간들의 자질이 부족하여 간언의 내용이 너무나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한,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변질되버렸다.

활을 쏘거나 시를 쓰면 취미에 빠져 나랏일 팽개칠 징조라고 태클, 창경궁에 구리통으로 수조를 만들었더니 '너 사치하는구나!' 라고 태클을 걸었다. 그래서 구리통 수조를 뜯어내고 석재 수조를 만들었는데 전자보다 후자의 비용이 더 많았다. 또 성종의 무신 등용 정책에는 '온 조정을 군인들로 채울 생각이냐?' 라고 태클을 걸었다. 그 바람에 무신 등용 정책은 대실패로 돌아갔고 중종반정의 주도자인 박원종을 마지막으로 무신 출신으로 힘을 썼던 사람들은 반정공신 이서, 신경진까지 합쳐도 없다...거기에 중종 시기에 박윤문 등이 무신의 난을 꾸몄다는 혐의를 받고 죽으면서 무신의 힘은 안드로메다로... 또 역관, 의관에게 동,서반 직을 주랬더니 '위 아래도 없는 왕이구만' 하고 태클을....왱알앵알

심지어 말년에는 다리 셋 달린 닭이 태어나자 요물이 태어나는 것은 왕이 여자의 말을 들어 정치를 했다고 옛말에 있으니 왕이 여자의 말을 들었구나! 라고 몰려와서 왕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성종이 "이 미친놈들이 미신을 가지고 왕을 핍박하네? 내가 잘못을 했어야 반성을 하지 안한것가지고 반성을 하라니 어쩌라고?"라고 항변하자 대간들이 "하라는 반성은 안하고 어디서 말대꾸예요!"라고 막무가내로 물러서지 않았다. 성종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오냐 요즘의 재이는 다 내가 불러들였다 이것들아!"라고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11]

비슷한 시기에 성종이 대간들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자꾸 거절하자 대사헌이 "요즘 우리말이면 다 물리치네?"라고 불평을 했다나.

영조의 경우에는 아니되옵니다 한마디만 상소에 있으면 "저 새끼 당장 섬으로 유배 보내버렷!"이라고 외치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성종은 짜증은 낼 지언정 오냐 내가 잘못했다면서 끝내 양보를 해버렸다.

그래도 유학적 수양을 잘 갖춘 성종이었기 때문에 말을 안 듣기는 해도 어쨋거나 대간들은 아무 말이나 하면서 잘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대간의 지나친 행동은 이후 연산군의 철퇴를 맞게 된다. 특히 성종에게 제일 딱딱거렸던 정성근 등은 끔살당한다.

2.5. 수성의 군주

그러나 후대가 폭군, 권신들의 발호, 의 발발 등 혼돈스러운 시대가 계속 이어지고 사실상 선왕인 세조(예종은 1년만에 죽었으므로)가 비록 지나치게 까이는 점도 있다 하더라도 집현전을 날려버리고 공신들을 대거 등용해 훈구파라는 변질된 정치세력을 만드는 등 기존 조선의 시스템에 심각한 손상을 가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만큼 나름 자신이 할 수 있는 내에서 세조 치세의 싸지른 똥 병폐를 최대한 뒷수습을 해내고 기틀을 닦은 왕으로 평가할 수 있다. 조선과 비슷한 시기 세워진 동아시아권 국가들의 경우 명나라무로마치 막부는 결국 300여년도 가지 못하고 망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성종이 수성군주로서 기틀을 닦앗다고 볼 여지는 충분하다.

2.6. 인물됨과 일화

학문을 좋아했다. 통역이 마음에 안든다고 직접 중국어를 배워버렸다...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미행을 많이 했다고 알려져 있다. 야사에는 성종의 미행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여러 전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어우동과의 이야기. 성종이 어우동을 만나려고 미행을 했다는 야사와 소문이 전할정도면 성종이 꽤나 미행을 많이 했다고 생각해볼수 있을듯 하다. 다만 정사에서의 성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우동에게 단박에 교살형을 내려버렸다. 배신감 때문에? 아니면 윤씨에 대한 불신 때문에? 판단은 알아서.

또한 미행중에 한 군졸이 왕에게 보내는 상소 비슷한것을 쓰는걸 보고 그 군졸에게 큰 상을 내리고 벼슬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물론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항목 서두에 언급한 별명이 나온 이유는 정치는 잘하고 똑똑하지만, 여색을 밝혔기 때문이다. 성종은 25년 재위기간 동안 총 12명의 왕비와 후궁 등에게서 16남 12녀를 얻었다. 물론 자식의 숫자로는 조선왕으로는 첫째가 아니다. 태종이 18년 재위하면서 12남 17녀를 두어 1명이 많다. 세종, 중종도 자식이 20명이 넘는다. 놀라운 것은 성종이 사망할 때 나이가 고작 38세임에도 28명의 자식을 얻었다는 것은 가히 이 분야에서 태종을 제외하고 권위자라고 볼 수 있다. 공식적으로 거느린 여인은 성종 12명, 태종 12명, 세종 6명, 중종은 10명이다. 성종 때는 일종의 교조주의가 팽배해 서예, 활쏘기 같은 육예도 정치하는데 반대된다고 대간들이 상소를 올렸을 정도였다. 한 번은 현판을 친필로 써서 내린 적이 있었는데 대간들이 잡기에 빠져 나라 망치게 한다고 상소질 해서 열뻗친 성종이 현판을 뜯어다가 불태워 버린 적마저 있을 정도. 오죽하면 매사냥을 좋아하는데 직접 가진 못하고 뒷간에서 대간들 몰래 조용히 매날리기나 해야 했다고 하니 취미 생활은 술과 여자 말고는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더 뭘바라냐고 생각한다면 지는것이다! 왕이 여자를 밝히는 것은 후사를 볼 수 있기에 연산군 같은 짓을 안하고 정당한(?) 여성들을 상대할 경우 오히려 장려되는 행위였다.

인수대비에 눌려 살았다고 하는 말들이 많은데 애당초 폐비 윤씨 사사는 성종이 주도한 일이었고 성종은 인수대비가 거의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뛰며 반대한 금승법을 통과시켜버린 장본인이다. 애당초 유학자이면서도 불교에 매우 심취한 인수대비가 아들을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성종조에 조선 시대 중 가장 혹독한 불교 박해 정책이 시행됐을지는 의문.

동물을 유달리 좋아했는지 궁궐에서 동물들을 많이 기르기도 했다. 고양이, 사슴, 노루, 는 물론 심지어는 백조원숭이까지 길렀다고 한다. 성종 때가 성리학적 유교정치의 전성기였던 만큼 이런 점을 당시 정계에 진출하고 있던 사림 간관들에게 크게 비판받기도 했고 성종 본인도 간관들과 이 문제로 설전을 벌인 기록도 있다. 특히 성종의 원숭이는 류큐에서 보내온 원숭이였는데 이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는 문제로 좌부승지와 설전을 벌였다. 좌부승지 손비장은 "원숭이에게 입힐 옷 한 벌로 하나의 백성을 추위에 떨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라는 논리로 공격하자 성종은 "외국에서 바친 것을 추위에 떨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반박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융단폭격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놔 준 동물들도 많다고 한다. 사슴이나 매는 실록에서도 놔 주었다는 기록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래도 사냥을 위해 동물원을 차린 지 아들보다는 훨씬 낫다. 참고로 신하들이 동물 문제로 시비를 걸 때마다 "난 원래 동물 안 좋아하니까 괜찮다"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고... 나 괜찮아. 진짜 괜찮아 신경쓰지마

연산 시절에도 일본에서 원숭이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연산은 선왕 시절에 저놈들이 앵무새 따위를 바친 적이 있었는데 돈만 들지 뭐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된거나 있었는가? 그냥 돌려보내거라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답을 한 적이 있었다. 왜 뒤에는 이렇게 못했니?

풍류를 좋아한 사람답게 술도 좋아했는데 할아버지 세조처럼 신하들과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 그런데 술버릇이 최악의 술버릇 중 하나인 아랫사람에게 술 먹이기. 특히 할아버지처럼 신하들에게 벌주를 먹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며 신임 관료들을 불러 신고식을 하는 것마냥 술을 먹이고 신임 관리들을 직접 조롱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상한 것만 할아버지를 닮았다. 알고 보니 악덕상사였다.

2.7. 사후

그가 죽은 후 묘호를 정하는 시비가 있었는데 성종과 인종(仁宗)이 경합했다. 오히려 "시법에 '백성을 편하게 하고 정사를 바로 세운 것'을 成이라 하는데 이걸론 대행왕의 성덕을 다 표현 못합니다"라든지, "成은 仁에 미치지 못하옵니다"라는 발언이 속출하는 등 인종으로 하자는 여론이 매우 우세했는데, 정승들의 "중국의 묘호를 범하는 것(명 4대 황제 홍희제의 묘호가 인종)은 옳지 않으며, 성종도 뜻 자체로는 훌륭한 이름입니다."라는 의견과 "송나라 인종은 물러터져서 오랑캐의 화를 겪었더만. 그게 울 아빠의 성덕에 견준다고 생각해?"라는 연산군의 의견이 맞아떨어져 결국 성종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막상 성종은 묘호는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것인데 제후국인 조선이 묘호를 쓰는 것은 참람하다고 생각하여 선왕들의 묘호도 삭제하려고까지 했다.

당대는 물론 후세의 선비들에게 모범적인 군주의 롤모델로 굉장히 높이 평가받았다. 하다못해 조선 중기 이후 간관들의 전용 멘트 중 하나가 "세종대왕과 성종대왕의 예를 본받으소서"였을 정도. 오늘날까지도 이 평가는 이어져서 그의 치세는 조선의 제도가 완성되었고 국력도 전성기였던 태평성대로 많이 평가되곤 한다. 성종의 인품과 능력을 칭송하는 야사가 여럿 전해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백성들이나 재야 선비들의 인식도 좋았던 모양이다.세종 대에는 천재지변이나 큰 국가사업으로 현대 한국인듫이 생각하는 태평성대의 시대는 아니였다. 성종 역시 조선 초기의 중요한 군주로 다뤄진다.당장 5학년 사회 교과서만 봐도 경국대전과 흥문관을 설치했다며 중요하게 다룬다. 다만 조선 정치체제의 문제점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도 바로 성종의 치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성종은 의지와 능력을 고루 갖춘 임금이였기때문에 그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그 뒤를 이은 연산군의 실정 이후 조선의 문제점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신하들에 의해 추대된 중종은 그 눈치를 살펴야 했고 강력했던 형이 쫓겨나는 꼴을 본지라 왕권 강화에만 집착하여 조광조, 남곤, 심정, 이행, 이항, 김안로 등을 내세웠다 차례로 숙청하기만을 반복했다. 뒤를 이은 인종은 1년도 재위못하고 승하했고 명종은 문정왕후가 꽉 잡고 있어서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하다시피했다.[12] 선조가 즉위하고 나서야 이이 등이 주도가 되어서 이런저런 중기적 문제들을 고쳐나가고 있었으나...남쪽에서 일본군이 침략해왔다.

박시백의 경우 '성종이 비록 사림이나 선비들에게 높이 평가받기는 했지만 선비들의 평가처럼 세종에 비견되는 군주로 평가받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밝혔으면서 '본래 수성군주는 화려하지 않은 법이고, 그래도 권력화한 대간들의 지나친 잔소리를 대할 때의 스트레스를 삭이면서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을 억제하고 제도를 범하지 않은 것은 한편으론 높이 평가해줘야 할 대목'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 성종실록편 작가 후기를 보면 성종이 "세종 할아버지와 비교해서 부족하지 않은 임금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고 말하는 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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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릉 정현왕후의 릉

능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선릉(宣陵). 서울 지하철 2호선선릉역은 이 능에서 역명을 따 왔다. 흔히 옆에 있는 중종의 '정릉'과 묶어서 '선정릉'이라고 부른다. '선정릉'이라는 명칭은 분당선서울 지하철 9호선의 환승역이 될 선정릉역의 유래가 되었다. 이곳에는 '삼릉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와 동원이강 형식으로 묻혀 있다. 할아버지 세조는 검약을 강조해 자신의 능에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도록 했지만, 성종의 능은 병풍석이 설치되었다. 선릉은 유난히 수난을 많이 겪었는데 임진왜란 때 정릉과 함께 파헤쳐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으며 인조 때에는 화재를 두 번이나 겪기도 했다.

3. 오월의 성종

  • 3대 충헌왕(忠獻王) 전홍좌 (錢弘佐)

4. 남당의 성종

  • 추존황제 효평황제(孝平皇帝) 이초(李超) - 남당 열조 이변 추존.

5. 성종 야율문수노/야율융서

다른 군주들은 모두 成宗이지만 이 황제만 聖宗이다.

6. 원 성종 보르지긴 테무르

몽골 제국의 역대 대칸
5대 쿠빌라이 칸 6대 테무르 울제이 칸 7대 카이산 퀼리그 칸
원의 역대 황제
1대 세조 쿠빌라이 2대 성종 테무르 3대 무종 카이샨

묘호 성종(成宗)
시호 흠명광효황제(欽明光孝皇帝)
칸호
(몽골식 군주 칭호)
올제이투 테무르 칸(ᠥᠯᠵᠡᠶᠢᠲᠦ ᠬᠠᠭᠠᠨ)
(完澤篤 鐵穆耳汗 / 완택돈 철목이한)
보르지긴(ᠪᠣᠷᠵᠢᠭᠢᠨ)
(孛兒只斤 / 패아지근)
테무르(ᠲᠡᠮᠦᠷ)
(鐵穆耳 / 철목이)
연호 원정(元貞) : 1295년 ~ 1297년
대덕(大德) : 1297년 ~ 1307년
생몰기간 1265년 10월 15일 ~ 1307년 2월 10일
재위기간 1294년 5월 10일 ~ 1307년 2월 10일

몽골 제국의 제6대 카간이자 의 제2대 황제.
쿠빌라이 칸의 장남인 황태자 친김의 3남.

쿠빌라이 사후 아리크 부케의 아들 요부르크와 몽케의 손자 울루스 부카가 코타이 칸국을 이탈해서 카이두 칸[13]의 세력이 약화가 되긴 했으나 지속적으로 위협해왔다.

특히 1301년 카이두가 아리크 부케의 차남 멜릭 테무르와 차가타이 칸국의 칸 두아와 함께 대규모 원정을 감행해 위기를 맞았으나 성종의 조카 카이샨(훗날의 무종)의 군대가 막았고, 결국 카이두는 이 때 부상을 당해 죽고 말았다.

그리고 1306년엔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 칸과 함께 오코타이 칸국을 정복하였다. 하지만 그가 후계자 없이 죽자 원 황실은 후계자를 둘러싼 분쟁에 빠지게 된다.

7. 의 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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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성종 즉위 후 대종으로 추존
  • [2] 연산군이 제헌왕후(齊獻王后)라고 추숭했으나 중종반정이후 삭탈되었다.
  • [3] 실제로 성종은 문종보다도 일찍 죽었다. 다만 성종의 경우 소년기에 왕위에 올라 재위기간이 제법 길었기 때문에, 또 아들인 연산군이 어느정도 장성한 상태였기에 부각되지 않는 편이다.
  • [4] 하지만 사실 이건 세조 때 이미 기틀이 완성되어 있었고 예종이 조금만 오래 살았다면 아마 예종 때 반포되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성종의 업적으로 주로 알려져 있으니 성종만 득을 본 셈.
  • [5] 그 악명 높은 "과부재가금지법"이다. 신료들이 삼가 금지법을 주장하고 재가 금지법을 대부분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밀어붙여서 통과.
  • [6] 진나라 의 첩으로, 자신의 아들을 태자 삼으려고 다른 자식들을 모함을 해 을 죽이고 (진문공)을 내쫓은 것을 말한다.
  • [7] 항목을 보면 알지만, 당중종은 아내 위황후와 딸 안락공주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비유는 성종이 윤씨가 자신을 독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 [8] 장례를 치를 때 을 덮는 흰 천을 말한다(!)
  • [9] 채수는 여기에 대해 “쫓겨난 어미라면 범인(凡人)들도 오히려 어미로 여기지 못하는데, 하물며 원자이겠습니까? 다만 신 등은 특별한 처소에다 높이 받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 금(金)나라의 임금 (亮)은 천하의 폭군(暴君)이었습니다. 금나라의 임금 (雍)이 즉위하였을 적에 양은 실지로 원수의 사람이었지마는, 양의 후비(后妃)인 도단씨(徒單氏)에 대하여는 또한 배고프고 헐벗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근자에도 이영(李瓔, 금성대군에 연류되어 죽은 의군)과 이준(李浚, 구성군)은 죄가 종묘·사직에 관계되었으므로 국가에서 외방에 추방을 하였지마는, 또한 그에게 옷과 음식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윤씨도 유폐(幽閉)시키되 옷과 음식은 공급함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성종은 또 디스(...)
  • [10] 다만 판옥선 등장 이전에 조선의 주력 병선인 맹선은 원래가 조운 겸용이었다.
  • [11] 사실 요즘 기준으로보면 성종은 진짜 심각한 수준의 '남성우월주의자'(…)다. 이런 사람에게 여자한테 조종당한다고 비판했으니 빡칠 수 밖에 없다.
  • [12] 문정왕후가 섭정을 거둔 이후부턴 윤원형을 조지는 모습을 보이지만 역시 왕권 강화와 외척 약화를 빼고는 그다지 주도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13] 오고타이 칸국의 칸. 오고타이 칸의 4남의 아들로, 쿠빌라이 칸을 지속적으로 위협해오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