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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last modified: 2015-04-15 20:16:06 Contributors

로마 4대 대성당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
산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대성당(성 베드로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성모 마리아 대성당)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

정면 사진
실내 전경
위 사진의 가운데 보이는, 교황미사를 집전하는 제대와 발다키노[1]

건설과거의 대성당현재의 대성당
착공(정초식)326년 11월 18일(실베스테르 1세)1506년 4월 18일(율리오 2세)
완공(축성식)360년경1626년 11월 18일(르바노 8세)

가톨릭의 총본산. 동시에 바티칸의 돈 먹는 하마. 동시에 엄청난 예술적 가치를 지닌 건물 아무래도 팔면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을거야...

기본 정보
위치 바티칸
종교 가톨릭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지위 대성전(Major Basilica)
건축 정보
축성 1626년 11월 18일
건축가
(공사기간)
도나토 브라만테(1506~1513)
줄리아노 다 상갈로(1513~1515)
프라 조콘도(1513~1515)
라파엘로 산치오(1514~1520)
발다사레 페루치(1520~1527)
안토니오 다 상갈로(1520~1546)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547~1564)
자코모 델라 포르타(1585~1602)
카를로 마데르노(1602~1629)
로렌초 베르니니(1629~1674)
양식 르네상스, 바로크
착공 1506년 4월 18일
완공 1626년 11월 18일
건축 내역
전체 길이 220m
전체 너비 150m
전체 높이 138m
전체 면적 21,095m²
내부 면적 15,160.12m²
신랑 너비 27.5m
후진 너비 24m
정면 너비 114m
정면 높이 51m
외부 돔 직경 42m
내부 돔 직경 41.5m
드럼 둘레 190m
드럼 높이 20m
채광탑 높이 19m
 
unesco-worldheritage.png
[PNG image (Unknown)]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름 바티칸
Vatican City / Cité du Vatican
국가·위치바티칸 시국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4년
등재기준 (i)[2], (ii)[3], (iv)[4], (vi) [5]

Contents

1. 개요
2. 역사
2.1.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2.2. 과거의 대성당
2.2.1. 연혁
2.2.2. 세속 군주의 대관식
2.2.3. 옛 대성당에 있던 교황들의 무덤
2.3. 건축가들의 개축 계획
2.3.1. 도나토 브라만테
2.3.2. 줄리아노 다 상갈로, 프라 조콘도, 라파엘로
2.3.3. 발다사레 페루치
2.3.4. 안토니오 다 상갈로
2.3.5.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2.3.6. 자코모 델라 포르타
2.3.7. 카를로 마데르노
2.3.8.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
3. 주요 건축
3.1. 성 베드로 광장
3.2. 성 베드로 대성당
3.2.1. 마데르노의 정면
3.2.2. 나르텍스
3.2.2.1. 현관
3.2.2.2. 5개의 문
3.2.3. 마데르노의 신랑
3.2.3.1. 북쪽 측랑
3.2.3.2. 남쪽 측랑
3.2.4. 중앙 건물
3.2.4.1. 중앙부
3.2.4.2. 왼쪽 교차랑
3.2.4.3. 오른쪽 교차랑
3.2.4.4. 계상랑
3.2.4.5. 중앙부 남동쪽
3.2.4.6. 중앙부 남서쪽
3.2.4.7. 중앙부 북동쪽
3.2.4.8. 중앙부 북서쪽
3.2.5. 수도회 설립자 39명의 석상
3.2.5.1. 측랑 북쪽
3.2.5.2. 측랑 남쪽
3.2.5.3. 교차랑 서쪽
3.2.5.4. 교차랑 동쪽
3.2.5.5. 계상랑 남쪽
3.2.5.6. 계상랑 북쪽
3.2.6. 신랑 바닥에 새겨진 31개 대성당의 길이
3.2.7. 무덤
3.2.7.1. 지하 무덤
3.2.7.2. 교황들의 무덤
3.2.8. 외벽의 벽감에 설치된 성인들의 석상
3.2.8.1. 요한 바오로 2세 때 축성
3.2.8.2. 베네딕토 16세 때 축성
3.3. 인접 건물
3.3.1. 시스티나 경당
3.3.2. 사도 궁전
4. 관람시 주의사항
5. 유사품(?)
6. 기타
7. 대중 매체

라틴어 Basilica Sancti Petri(바실리카 상티 페트리)
이탈리아어 Basilica Papale di San Pietro in Vaticano(바실리카 파팔레 디 산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프랑스어 Basilique Saint-Pierre(바질리크 생 피에르)
스페인어 Basílica de San Pedro(바실리카 데 산 페드로)
영어 Papal Basilica of Saint Peter(페이펄 바실리카 오브 세인트 피터)
독일어 Petersdom(피터스돔)
중국어 聖伯多祿大殿(셩보더루따띠엔)
일본어 サン・ピエトロ大聖堂(산 피에토로 다이세도)








1. 개요


이탈리아 로마 교황청, 곧 바티칸에 있는 크고 아름다운 가톨릭 성당. 실제로도 세계에서 제일 큰 가톨릭 성당이기도 했지만 1989년 아프리카코트디부아르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모델로 지어진 평화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등장함에 따라 가장 큰 성당의 타이틀은 넘겨주게 되었다. 콩라인 다만 예술성과 역사성에서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넘사벽. 1984년 바티칸의 일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전세계 가톨릭 교회는 11월 18일을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바오로 대성전 봉헌 축일(In Dedicatione basilicarum Ss. Petri et Pauli, apostolorum)로 기념하며, 로마 보편 전례력상 해당 축일은 선택적으로 기념할 수 있다.

2. 역사

2.1.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TV ES PETRVS(Tu es Petrus, 너는 베드로이다)

Et ego dico tibi: Tu es Petrus, et su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 et portae inferi non praevalebunt adversum eam.(라틴어)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가톨릭 성경)
마태오 복음서 16장 18절

세계 최대의 단일 종교의 수도나 다름없는 위상답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성당 자체는 콘스탄티누스 1세 때인 약 4세기 경에 세워진 바실리카식 성당에서 기원하며, 초대 교황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전설 정도로만 여겨지다가 1950년 12월 23일, 교황 비오 12세성당 지하실의 기저 공간에서 성 베드로의 무덤을 확인했다고 공표했다.

여기서 출토된 유골을 감정한 결과 서기 1세기에 사망한 60대 중반 남자로 보인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발견 당시의 유골이 금실로 수놓인 자주색 천에 싸여 있었던 점[6], 유골이 발견된 곳 주위의 벽면에 베드로라는 글자가 새겨진 낙서가 많았던 점 등을 볼 때 교황청에서는 베드로의 유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1968년 6월 26일,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유골이 베드로의 유해가 거의 확실해 보인다고 발표한 후 그 다음날 처음 발견된 자리에 다시 매장했다.

2.2. 과거의 대성당

2.2.1. 연혁

복원 상상도
평면도 : 칼리굴라 경기장, 과거의 대성당, 지금의 대성당 옛 대성당의 평면도 (추정)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테베레 강 너머 바티카누스 언덕 위에 있던 성 베드로의 처형장인 칼리굴라 경기장 자리에 세워졌다. 90년경 교황 성 아나클레토베드로의 무덤 위에 작은 기념 성당을 지은 것이 그 시초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 치세인 326년 11월 18일 교황 성 실베스테르 1세가 정초식을 거행한 후 완공까지 약 30년이 걸렸으며, 당시의 통상적인 교회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라틴 십자가 모양의 바실리카 양식이었다. 길이 118m, 너비 64m, 1열당 22개의 기둥이 총 4열로 늘어선 이중 측랑의 5랑식 바실리카 구조로 목조 트러스 지붕을 올렸는데,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과 비교했을 때 익랑이 굉장히 짧은 편이었다.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대성당 바깥의 장방형 정원에는 역대 교황의 무덤이 자리했다. 이곳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모후 성녀 헬레나예루살렘 성지순례 때 가져온 성 십자가, 성녀 베로니카의 수건, 롱기누스의 창과 같은 성유물이 봉헌되어 각국의 순례자들로 붐볐다.

이외에도 여기에서는 800년 카롤루스 대제의 서로마 황제 대관식이 열리는 등,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톨릭성지로 자리매김 했으나 로마를 침략한 서고트족, 반달족, 사라센족, 노르만족과 같은 이민족들에게 잊혀질 만하면 약탈당해 그때마다 만신창이가 되었다. 더욱이 천 년이 넘도록 너무 오랫동안 사용한 데다, 아비뇽 유수교황청이 대성당을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황이 지속되자, 낡을대로 낡은 건물은 틈틈이 계속된 보수 공사에도 결국 붕괴 직전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옛 대성당의 모습을 추체험할 수 있는 회화 자료로, 라파엘로 산치오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사도 궁전의 보르지아 아파트에 프레스코화로 그린 보르고의 화재(火災)의 방(Stanza dell’Incendio di Borgo) 현존하고 있다.

2.2.2. 세속 군주의 대관식

카롤루스 대제가 800년 12월 24일 교황 레오 3세가 집전한 서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거행한 이래 1452년까지 600년 넘는 세월 동안 옛 대성당에서는 23명의 황제가 교황이 머리에 얹어주는 왕관을 통해 권위를 과시했다. 이들 23명의 대관식이 거행된 날짜, 이름, 대관식을 주재한 교황은 다음과 같다.

카롤루스 대제 대관식, 라파엘로 산치오, 1516~1517년, 프레스코, 670cm, 바티칸 사도 궁전
대관식 거행일 황제 대관식 주재자 대관식 거행일 황제 대관식 주재자
800년 12월 24일 카롤루스 대제 성 레오 3세 823년 4월 5일 로타르 1세 성 파스칼 1세
850년 12월 5일 루트비히 2세 성 레오 4세 875년 12월 25일 카를 2세 요한 8세
881년 12월 25일 카를 3세 요한 8세 891년 2월 21일 귀도 3세 스테파노 5세
896년 2월 22일 아르눌프 포르모소 901년 2월 루트비히 3세 베네딕토 4세
915년 3월 24일 베렌가리오 1세 요한 10세 962년 2월 2일 오토 1세 요한 12세
967년 12월 25일 오토 2세 요한 13세 996년 5월 21일 오토 3세 그레고리오 5세
1014년 2월 14일 하인리히 2세 베네딕토 8세 1027년 3월 26일 콘라트 2세 요한 19세
1046년 12월 25일 하인리히 3세 클레멘스 2세 1111년 4월 13일 하인리히 5세 파스칼 2세
1155년 6월 18일 프리드리히 1세 하드리아노 4세 1191년 4월 15일 하인리히 6세 첼레스티노 3세
1209년 10월 4일 오토 4세 인노첸시오 3세 1220년 11월 22일 프리드리히 2세 호노리오 3세
1312년 6월 29일 하인리히 7세[7] 1355년 4월 5일 카를 4세 오스티아 주교 피에르 베르트랑[8]
1433년 5월 31일 지기스문트 에우제니오 4세 1452년 3월 19일 프리드리히 3세 니콜라오 5세

2.2.3. 옛 대성당에 있던 교황들의 무덤

옛 성 베드로 대성당 건물이 완성된 후 이곳에 처음 묻힌 교황은 461년에 선종한 성 레오 1세였다. 이후 1591년에 선종한 인노첸시오 9세에 이르기까지 1,000년 넘는 세월 동안 교황 100여명이 성당 내부 곳곳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대성당 건축을 목적으로 교황 율리오 2세에 의해 수석 책임자로 임명된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는 옛 대성당을 철거하면서 새 건물의 기반을 다졌고, 이 과정에서 교황들의 무덤 대부분이 파괴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옛 대성당에 있던 무덤 중에서 현존하는 것, 즉 무덤 또는 석관 자체를 옮겼거나 석관의 파편 또는 유골(…)만이라도 남은 경우는 음영표시로 나타냈다(참고).

옛 대성당에 있던 교황 무덤 및 현존 여부
성 레오 1세 성 심플리치오 성 젤라시오 1세 아나스타시오 2세 성 심마쿠스 성 호르미스다스성 요한 1세
성 펠릭스 4세 보니파시오 2세 요한 2세 성 아가피토 1세 펠라지오 1세 요한 3세 베네딕토 1세
펠라지오 2세 성 그레고리오 1세 사비니아노 보니파시오 3세 성 보니파시오 4세 아데오다토 1세 보니파시오 5세
호노리오 1세 세베리노 요한 4세 테오도로 1세 성 에우제니오 1세 성 비탈리아노 아데오다토 2세
도노 성 아가토 성 레오 2세 성 베네딕토 2세 요한 5세 코논 성 세르지오 1세
요한 6세 요한 7세 시신니오 콘스탄티노 성 그레고리오 2세 성 그레고리오 3세 성 자카리아
교황선출자 스테파노 스테파노 2세 성 바오로 1세 스테파노 3세 하드리아노 1세 성 레오 3세 스테파노 4세
에우제니오 2세 발렌티노 그레고리오 4세 세르지오 2세성 레오 4세 베네딕토 3세 성 니콜라오 1세
하드리아노 2세 요한 8세 마리노 1세 스테파노 5세 포르모소 보니파시오 6세 스테파노 6세
로마노 테오도로 2세 요한 9세 베네딕토 4세 세르지오 3세 아나스타시오 3세 란도
레오 6세 스테파노 7세 요한 11세 레오 7세 스테파노 8세 마리노 2세 레오 8세
베네딕토 6세 요한 14세 요한 15세 그레고리오 5세 베네딕토 8세 요한 19세 그레고리오 6세
성 레오 9세 복자 우르바노 2세 복자 에우제니오 3세 하드리아노 4세 그레고리오 9세 첼레스티노 4세 니콜라오 3세
보니파시오 8세 우르바노 6세 보니파시오 9세인노첸시오 7세 니콜라오 5세 바오로 2세 식스토 4세
인노첸시오 8세 비오 3세 클레멘스 7세 바오로 3세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그레고리오 13세
그레고리오 14세 인노첸시오 9세

2.3. 건축가들의 개축 계획

이에 교황 니콜라오 5세(Nicolaus V, 생몰년: 1397.11.15~1455.3.24, 재위기간: 1447.3.6~1455.3.24)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2.18~1472.4.20)와 베르나르도 디 마테오 델 보라 감베렐리(Bernardo di Matteo del Borra Gamberelli, 1409~1464) 두 건축가에게 보수 공사를 맡기면서 성당을 신축하는 수준의 설계도를 작성하도록 했으나 교황이 선종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16세기경 교황 율리오 2세(Iulius II, 생몰년: 1443.12.5~1513.2.21, 재위기간: 1503.10.31~1513.2.21)에 의해 옛 건물을 완전히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새 성당을 짓기로 결정해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21명의 교황이 재임한 120년 동안 쉴새없이 계속된 이 과정에서 최고의 예술가들을 그야말로 갈아넣어 만들면서 숱한 역사를 남겼다. 예를 들면 천문학적인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몇몇 지역 교구에서 돈 받고 흔히 면벌부로 불리는대사를 남발하면서 일부 신학자들의 어그로를 끌어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든가(...)

2.3.1. 도나토 브라만테

브라만테가 수석 책임자였던
1506~1513년까지의 교황
율리오 2세[9] 브라만테의 설계안에 따른 입면도

사진 설명
새로운 성당의 건설을 위한 설계 공모에 응모한 수많은 후보작들 가운데서 도나토 다뇰로 브라만테(Donato d' Aguolo Bramante, 1444~1514.3.11)의 작품이 최종 선정되었다. 1506년 4월 18일 교황 율리오 2세가 성녀 헬레나의 성상이 놓일 북서쪽 벽기둥의 초석을 놓으면서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고대 로마의 건축을 연구한 브라만테는 포로 로마노에 있던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에 판테온을 얹고 싶다고 말했고, 자신이 언급한대로 판테온을 참고해 건물을 설계했다. 성당의 평면을 그리스 십자가 형태로 삼고 4개의 거대한 기둥벽이 하중을 지탱하는 중앙부의 커다란 주변에 작은 돔 4개와 종탑 4개를 배치해 대칭성을 강조했다. 공사 부지의 지반이 약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건물을 올리기에 앞서 토대부터 단단히 다지는 작업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하에 매장된 역대 교황과 성인들의 무덤이 파괴되어 오늘날에는 옛 대성당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물론 무덤이 파괴되기 전에 유해는 미리 발굴해 옮겨둔 상태였으나 이유야 어떻든 콘스탄티누스 이래 천년간 존속하던 성당 건물과 무덤들이 파괴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브라만테는 '파괴자(Il Rovinante)'라는 별명을 얻었다. 단, 브라만테가 옛 대성당 건물을 한번에 허물어뜨린 것은 아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미사를 보아야 했기 때문에 옛 건물은 순차적으로 철거되었다.
브라만테는 베드로의 무덤을 대성당 내부의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권했지만 교황베드로의 무덤이 원위치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고 잘라 말하며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한편 교황은 신축될 대성당의 중앙부에 자신이 안장될 거대한 대리석 영묘를 세우려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설계를 맡겨, 영묘를 장식할 조각상 제작에 필요한 대리석을 고르러 미켈란젤로가 직접 카라라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교황이 영묘에서 관심을 돌려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를 그리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영묘 건설은 흐지부지 되었다. 그러던 와중 1513년 2월 21일 교황 율리오 2세가 선종하고 교황 레오 10세(Leo X, 생몰년: 1475.12.11~1521.12.1, 재위기간: 1513.3.9~1521.12.1)가 즉위하면서 브라만테는 수석 책임자 자리에서 교체되었짤리고 1년 뒤인 1514년 3월 11일 브라만테도 세상을 떠났다.

2.3.2. 줄리아노 다 상갈로, 프라 조콘도, 라파엘로

라파엘로가 수석 책임자였던 1514~1520년까지의 교황
레오 10세[10] [11]

사진 설명
1513년 브라만테가 죽자 그를 대신해 줄리아노 다 상갈로(Giuliano da Sangallo, 1443~1516)와 프라 조반니 조콘도(Friar Giovanni Giocondo, 1433~1515), 라파엘로 산치오 다 우르비노(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4.6~1520.4.6)가 성당 건축에 참여했다. 그렇지만 채 2년이 지나지 않아 상갈로와 프라 조콘도가 잇따라 사망했고, 1514년 4월 1일 교황 레오 10세라파엘로 산치오를 수석 책임자로 임명했다.
브라만테는 동향 출신인 라파엘로가 건축 분야에서 경험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후임자로 추천했는데, 정작 라파엘로는 선임자의 설계안을 전면적으로 수정해버렸다. 배은망덕 평면구조를 그리스 십자가에서 라틴 십자가로 바꿔 신랑의 길이를 늘리고 성당 모서리에 설치된 탑의 크기를 줄여 외벽의 경계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냈으며, 반원형의 후진을 복도로 둘러 각각의 공간을 명확하게 구획했다. 또한 신랑에는 5개의 공간을 나누고, 경당의 위치를 측랑 외부 양쪽으로 설정했다. 하지만 그가 단독 책임자로 설계에 참여한 지 5년만인 1520년 4월 6일, 이번에는 라파엘로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3.3. 발다사레 페루치

페루치가 수석 책임자였던 1520~1527년까지의 교황
레오 10세 하드리아노 6세 클레멘스 7세 1527년 로마 약탈[12]

사진 설명
라파엘로가 요절하자 발데사레 톰마소 페루치(Baldassare Tommaso Peruzzi, 1481.3.7~1536.1.6)가 수석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라파엘로의 설계안이 담고 있던 주요 후진 세 곳의 내부 배열 변경은 그대로 유지했으나, 평면구조는 라파엘로의 라틴 십자가 형태에서 브라만테의 그리스 십자가 형태로 회귀해 신랑의 길이가 다시 축소된 것과 같은 변화가 있었다. 그가 책임자를 맡는 동안 1521년 12월 1일 교황 레오 10세가 선종하고 교황 하드리아노 6세(Hadrianus VI, 생몰년: 1459.3.2~1523.9.14, 재위기간: 1522.1.9~1523.9.14)의 짧은 재위기간을 거쳐 교황 레멘스 7세(Clemens VII, 생몰년: 1478.5.26~1534.9.25, 재위기간: 1523.11.26~1534.9.25)가 즉위했으나, 1527년 신성 로마 제국황제 카를 5세(Karl V, 생몰년: 1500.2.24~1558.9.21, 재위기간: 1519.6.28~1556.8.27)가 자행한 사코 디 로마로 인해 카스텔 산탄젤로로 피신한 교황은 7달 동안 사실상 연금당했고 로마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아직 공사중인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계단에서는 카를 5세의 제국군이 교황청에 고용된 스위스 용병의 항전을 제압했고, 하느님의 심판을 예언하며 잘못을 회개하라고 외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을 천장화에 그려 넣어 미켈란젤로교황청에 경종을 울리려 한 지 고작 1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스티나 경당도 제국군과 폭도들의 약탈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뒤숭숭한 시대적 상황과 열악한 재정 문제 때문에 성당 공사는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고, 결국 페루치는 자신의 설계안을 실현시키지 못한 채 1536년 1월 6일 세상을 떠났다.

2.3.4. 안토니오 다 상갈로

안토니오 다 상갈로가 수석 책임자였던 1520~1546년까지의 교황
클레멘스 7세[13] 바오로 3세[14] 안토니오 다 상갈로의 설계에 따른 목조 모형[15]

사진 설명
이렇듯 어수선한 와중에 1527년부터 중단된 공사는 1539년이 되어서야 다시 진행되었다. 이때 등장한 새 수석 책임자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Antonio da Sangallo il Giovane, 1484.4.12~1546.8.3)는 전임자 브라만테, 라파엘로, 페루치의 설계안이 의도한 특징을 살려 정면의 폭을 넓게 하고 열주 현관을 넣었으며, 페루치가 늘렸던 신랑의 길이를 다시 줄여서 그리스 십자가 평면으로 설계했다. 한편 그는 판테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구조를 바탕으로 브라만테가 처음 구상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원안보다 더 크고 정교하게 재설계해 바깥에 가로로 된 보를 추가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가 제작한 목재 모형은 현재 성 베드로 대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안토니오 다 상갈로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전임자들의 설계안을 융합시키고자 했으나, 그로 인해 도리어 벽체와 기둥이 너무 많이 배치되었기 때문에 설계가 난잡해지고 내부도 어두워져 조명에 문제가 있다는 비난을 받아 그의 설계안은 전임자들의 것과는 달리 실제로 공사에 반영되지는 못했다. 비록 설계 작업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40여년 동안 여러 차례 수석 책임자가 바뀌면서 금이 가기 시작한 브라만테의 네 기둥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보강했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대성당 공사에서 중요한 입지를 차지한다. 그동안 교황 레멘스 7세가 1534년 9월 25일 선종하고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 생몰년: 1468.2.29~1549.11.10, 재위기간: 1534.10.13~1549.11.10)가 즉위했다.

2.3.5.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가 수석 책임자였던 1547~1564년까지의 교황
바오로 3세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 비오 4세

[16] 미켈란젤로의 작업장을 방문한 교황 바오로 3세 파르네제[17] 돔의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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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년 8월 3일 안토니오 다 상갈로가 사망하자 다음 수석 책임자로 내정된 사람은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 1499~1546.11.1)였지만 사망해버렸고, 그 다음으로 내정된 자코포 산소비노(Jacopo Sansovino, 1486.7.2~1570.11.27)가 거절하자 교황 바오로 3세는 당시에 이미 70세를 넘긴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3.6~1564.2.18)에게 억지로 자리를 떠맡겼다. 본디 조각가로 자부하던 미켈란젤로에게는 내키지 않는 작업이었으나 곧 마음을 바꿔 정력적으로 공사에 참여했으며, 그의 설계안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는 안토니오 다 상갈로의 설계대로 건축할 경우 언제 공사가 끝날지 모르는 데다가 비용은 비용대로 눈덩이처럼 불어날 게 뻔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외부에는 불필요한 열주가 늘어서 있고, 내부는 과도하게 장식적으로 분할되어 조명이 불충분한 탓에 어둡고 은밀한 장소가 너무 많아 범죄의 소굴로 전락할 것이라고 비판디스했다. 자신이라면 상갈로보다 더 적은 비용을 들여 더 멋진 건물을 더 빠르게 지을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미켈란젤로는 물갈이 작업에 들어갔다.

미켈란젤로가 상갈로 휘하에서 공사에 참여했던 건축가 난니 디 바치오 비기오(Nanni di Baccio Bigio, 151~1568)를 비롯한 사람들을 내쫓고너 숙청, 설계에 개입하려는 건축 위원회의 시도를 저지하는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자 상갈로 지지자를 포함한 기존의 공사 관계자들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미켈란젤로와 대립각을 세웠다. 일부에서는 미켈란젤로가 노망이 났다거나, 나이가 너무 많기 때문에 책임자가 된다 한들 얼마 못가서 죽을 거라고 악담을 퍼부었으나 정작 미켈란젤로는 말짱한 정신으로 17년 동안 공사를 담당했다(…).
결국 교황 바오로 3세는 불협화음을 끝내기 위해 대성당 공사에 관한 전권을 미켈란젤로에게 부여하면서 건축 당국은 오직 그의 설계에 따라서만 공사를 진행해야 하며 그 누구도 설계에 간섭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보수를 받지 않고 공사에 임하겠다고 밝혀 교황의 신뢰에 응답함과 동시에 공사비로 사욕을 채우려 한다는 상갈로 지지자들의 비방을 차단했다.
공사에 참여했던 이전까지의 어떠한 건축가들도 받지 못한 특권을 얻은 미켈란젤로는 전임자들이 남긴 설계안들을 참고해 신랑의 길이를 줄여 성당의 평면구조를 다시금 브라만테의 그리스 십자가 형태로 회귀시켰다. 또한 상갈로의 설계안에 장식적인 벽체와 열주가 많다고 판단해 군더더기를 쳐내고 내부 공간을 나누는 구획을 최대한 단순화시켜, 그가 회귀시킨 브라만테의 설계안보다도 더욱 중앙 집중성이 극대화되어 가톨릭의 총본산이라는 상징성에 걸맞는 웅장함과 장중함을 강조했다. 한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당을 올려다 보았을 때 거대한 중앙 돔이 관람자의 시선에 곧바로 들어오게끔 했는데, 신랑의 길이를 줄인 것도 이 작업의 일환이었다. 다만 광장을 설계할 때는 성당 주변에 각종 부속 건물을 덧붙여 브라만테와 라파엘로의 설계안이 갖는 기하학적인 특징을 축소했다.
미켈란젤로는 기존의 설계안을 모두 참고해 돔을 다시 설계했다. 두 겹의 벽돌 외피로 된 타원형 모양의 돔은 두 겹으로 늘어선 기둥들이 돔 하부의 원통형 드럼을 떠받치는 형태로, 성당 건물 서쪽 정면에는 열주랑으로 이루어진 현관을 설계에 덧붙였다. 이를 위해 그는 노구를 이끌고 조수 두 사람과 함께 피렌체로 건너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구조를 살피고자 돔의 꼭대기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미켈란젤로였지만 건설 당시부터 경이로운 위업으로 평가받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만든 돔을 두고 자신이 설계할 돔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에 필적할 수는 있어도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아흔이 다 된 고령의 미켈란젤로는 자기가 죽은 후에 책임자 자리를 넘겨 받을 후임자가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설계를 임의로 수정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건물의 중요한 부분들을 동시에 공사했다. 돔을 받칠 원통형 벽체 부분 공사만 끝난 상태에서 1564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교황 바오로 4세를 이은 교황 비오 4세(Pius IV, 생몰년: 1499.3.31~1565.12.9, 재위기간: 1559.12.25~1565.12.9)는 미켈란젤로가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라도 절대 바꾸지 말라고 명하면서 미켈란젤로의 조수 자코모 바로치 다 비욜라(Giacomo Barozzi da Vignola, 1507.10.1~1573.7.7)를 미켈란젤로의 친구이자 열렬한 찬미자였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7.30~1574.6.27)와 함께 감리로 임명해 설계안대로 공사를 진행했다.

2.3.6. 자코모 델라 포르타

델라 포르타가 수석 책임자였던 1585~1602년까지의 교황
비오 5세[18] 그레고리오 13세[19] 식스토 5세 우르바노 7세 그레고리오 14세 인노첸시오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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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4세의 후임자인 교황 성 비오 5세(St. Pius V, 생몰년: 1504.1.17~1572.5.1, 재위기간: 1566.1.7~1572.5.1)는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 1533~1602)를 수석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는 조수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 1543~1607.6.28)와 함께 미켈란젤로의 돔을 높이만 약간 수정해 두 겹의 돔 중 외부를 내부보다 더 높게 올리고 세부적인 장식을 추가시켰다. 교황 성 비오 5세 선종 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Gregorius XIII, 생몰년: 1502.1.7~1585.4.10, 재위기간: 1572.5.13~1585.4.10)를 거쳐 교황 식스토 5세(Sixtus V, 생몰년: 1520.12.13~1590.8.27, 재위기간: 1585.4.24~1590.8.27)가 즉위했는데 그의 치세 마지막 해인 1590년에서야 비로소 돔이 완공됐다.
이후 교황 우르바노 7세(Urbanus VII, 생몰년: 1521.8.4~1590.9.27, 재위기간: 1590.9.15~1590.9.27), 교황 그레고리오 14세(Gregorius XIV, 생몰년: 1535.2.11~1591.10.16, 재위기간: 1590.12.5~1591.10.16), 교황 인노첸시오 9세(Innocentius IX, 생몰년: 1519.7.20~1591.12.30, 재위기간: 1591.10.29~1591.12.30)의 단명한 교황들을 거쳐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 생몰년: 1536.2.24~1605.3.3, 재위기간: 1592.1.30~1605.3.3) 때 돔의 완성과 더불어 대성당 내의 첫 십자가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성대한 축하행사를 거행했다.

2.3.7. 카를로 마데르노

마데르노가 수석 책임자였던 1602~1674년까지의 교황
클레멘스 8세 레오 11세 바오로 5세[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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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138m, 외부 직경 42m, 내부 직경 41.5m에 달하는 중앙부의 거대한 돔이 완공된 이후에도 막바지 공사는 진행되었고, 그동안 교황 클레멘스 8세와 교황 레오 11세(Leo XI, 생몰년: 1535.6.2~1605.4.27, 재위기간: 1605.4.1~1605.4.27)를 지나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 생몰년: 1552.9.17~1621.1.28, 재위기간: 1605.5.16~1621.1.28)가 즉위했는데 그는 돔의 공사에 참여했던 도메니코 폰타나의 조카인 카를로 마데르노(Carlo Maderno, 1556~1629.1.30)를 수석 책임자로 임명했다. 바오로 5세가 선출된 지 5개월이 지난 1605년 9월 17일, 미사 도중 옛 대성당의 일부가 붕괴되자 그때까지 남아 있던 옛 대성당 건물은 모두 철거되었다.
마데르노가 수석 책임자로 임명될 당시 성당 건물은 신랑과 정면의 공사만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신랑 길이를 늘리지 않은 그리스 십자가 평면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신랑 길이를 늘린 라틴 십자가 평면으로 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마데르노의 설계를 채택한 바오로 5세와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훗날의 교황 르바노 8세)이 치열한 키배논쟁을 벌였다. 논쟁 끝에 바르베리니 추기경은 "다른 교황이라면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지키기 위해 마데르노의 설계를 파기했을 것"이라 말했고, 이에 대해 바오로 5세는 "짐은 앞으로 어떤 교황도 마데르노의 설계를 파기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맞받아쳤다.
새로운 성당 건물이 옛 대성당이 있던 자리를 모두 포함해야 한다는 교황의 요구에 따른 마데르노는 2개의 종탑과 교황 전용 발코니가 설치된 화려한 정면을 포함하여 기존의 신랑을 확장시켜 더욱 웅장하고 권위있게 보이는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이 공사는 1607년에 시작해 1614년에 끝났는데, 신랑의 확장으로 인해 성당의 평면구조가 그리스 십자가에서 라틴 십자가로 바뀌게 되어 정면부가 돔을 가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성당에서 어지간히 멀리 떨어지지 않고는 광장에서 미켈란젤로의 돔을 올려다보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는 비판을 시공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사람이 다름 아닌 교황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마데르노에게는 미켈란젤로에 부여되었던 것과 같은 자유로운 설계상의 재량권이 없었다. 마데르노는 로마 시내에 있는 일 제수 성당의 정면을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했던 경험을 되살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정면을 설계했지만, 정면 좌우에 세우기로 예정했던 종탑이 원안보다 훨씬 축소된 형태로 세워지는 바람에 대성당 정면의 너비가 높이보다 길어지면서 비례가 깨지고 말았다.
한편 교황 율리오 2세 때 옛 대성당 지하에서 발굴했던 역대 교황성인들의 유해 및 보물과 예술품이 교황 바오로 5세의 명령하에 새로운 대성당의 지하 묘소로 속속 이장되기 시작했다.

2.3.8.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

베르니니가 수석 책임자였던 1629~1674년까지의 교황
그레고리오 15세[21] 우르바노 8세[22] 인노첸시오 10세[23] 알렉산데르 7세[24] 클레멘스 9세[25] 클레멘스 10세[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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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전체적인 모습이 거의 완성되어가는 동안 교황 바오로 5세가 선종하고 교황 그레고리오 15세(Gregorius XV, 생몰년: 1554.1.9/15~1623.7.8, 재위기간: 1621.2.9~1623.7.8)를 거쳐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 생몰년: 1568.4.5~1644.7.29, 재위기간: 1623.8.6~1644.7.29)가 즉위했는데 그의 재위기간 중인 1626년 11월 18일에 대성당의 축성식이 거행되니, 교황 성 실베스테르 1세가 옛 대성당의 정초식을 거행한 326년 11월 18일로부터 정확히 1300년 뒤의 일이었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1626년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2.7~1680.11.28)를 마데르노의 후임 수석 책임자로 선정했다. 베르니니는 교황의 전폭적인 지원에 따라 이후 반 세기 가까이 성당의 세부적인 장식을 설계했다.
우선 돔 아래에 있는 중앙 제단과 제단 위를 덮은 발다키노를 1625년부터 1633년까지 8년여에 걸쳐 제작했다. 마데르노의 설계를 토대로 베르니니가 완성시킨 발다키노는 당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기에 발다키노답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우르바노 8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또한 베르니니는 중앙 제대 주변의 네 벽감을 장식하기 위해 1629년부터 1640년에 걸쳐 성인들의 대형 조각상을 만들었다. 한편 마데르노가 기초만 만들어 놓고 아직 완공하지 못한 정면의 종탑을 건설하기 위해 1636년 설계안을 제출했는데, 베르니니는 마데르노가 애초에 의도한 낮은 종탑이 아니라 높이 30m에 달하는 웅장한 종탑을 설계했다. 교황과 건축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베르니니는 1638년 5월 20일에 종탑을 건축하기 시작해 1641년 상당 부분을 완성했으나 도중에 종탑 기초에 금이 발생해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르니니를 후원한 교황 우르바노 8세가 1644년 7월 29일에 선종하고 베르니니에게 냉담했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Innocentius X, 생몰년: 1574.5.6~1655.1.7, 재위기간: 1644.9.15~1655.1.7)가 즉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노첸시오 10세는 건축가들을 불러들여 종탑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하도록 했다. 여기에 참여한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9.25~1667.8.2)는 베르니니를 신랄하게 혹평했고, 보로미니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결국 베르니니의 종탑은 1646년 모두 철거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에서 승승장구한 베르니니의 유일한 흑역사(…)로, 이전부터 라이벌 의식이 강했던 베르니니와 보로미니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후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이은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 생몰년: 1599.2.13~1667.5.27, 재위기간: 1655.4.7~1667.5.22)는 베르니니가 그동안 쌓은 성과를 높게 평가하여 그에게 다시 중책을 맡겼다.
이에 따라 그는 성 베드로 광장을 1656년에 착공해 1667년에 완공했다. 광장 입구에서부터 성당 입구까지의 길이가 300m, 폭 246m에 달하는 성 베드로 광장 둘레에는 16m 높이의 대리석 기둥 284개가 각각 네 열로 늘어선 대회랑이 있고, 그 위에는 3.24m 높이의 역대 교황과 성인들의 조각상 140개가 장식되어 있다. 카를로 마데르노가 미켈란젤로의 설계안에 추가시킨 신랑에 이 가려지게 되어 관람자가 성당 정면에서 멀찌감치 떨어지지 않고서는 돔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 가운데, 베르니니는 광장의 평면을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으로 설계해 성당 건물 본체의 수직성을 돋보이게 하는 시각적 효과를 연출했다. 광장 가운데에는 1586년에 교황 식스토 5세가 칼리굴라 경기장 한가운데 있던 것을 옮겨온 오벨리스크가 있다. 그 양쪽에는 분수대가 하나씩 있는데, 오른쪽은 카를로 마데르노의 작품이고 왼쪽은 도메니코 폰타나의 작품이다.
이외에도 1666년 베드로의 의자를 제작하고 1676년 성체 경당의 장식을 맡아 시공했는데 이것이 그가 참여한 마지막 설계였다. 베르니니는 오랜 기간 수석 책임자를 맡으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1680년 11월 28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주요 건축

내부에는 시원하고 미켈란젤로피에타를 비롯해 수많은 조각상들이 있고, 벽화도 많이 있다. 그야말로 대성당의 한구석한구석 모두 예술품이라고 할 만 하다. 이게 다 엄청난 크고 아름다운 규모 덕분. 실제로 수많은 저술가들이 이 성 베드로 대성당의 내부를 두고 엄청나게 거대하다라고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곳이 건물의 내부인지조차 헷갈린다고(…).

3.1. 성 베드로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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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광장(Piazza San Pietro)
베르니니가 1656~1667년에 걸쳐 설계한 크고 아름다운 광장으로 최대 30만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으며, 광장에 운집한 보다 많은 군중들이 대성당 정면의 발코니와 사도 궁전에서 거행되는 교황의 강복 장면을 볼 수 있도록 원 두 개를 겹친 타원형으로 평면을 만들었다. 성 베드로의 대표적인 지물이 열쇠이기 때문에 광장의 모양이 열쇠 구멍 모양이다. 광장의 북서쪽에는 1981년 5월 13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저격당한 위치가 붉은색 반암으로 표시되어 있다. 로마 시내의 좁고 골목길을 지나다가 광활한 광장이 갑자기 시야에 펼쳐지게 해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 베르니니의 의도였으나, 1929년 2월 11일 체결된 라테란 조약으로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가 화해한 것을 기념해 베니토 무솔리니가 카스텔 산탄젤로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이어진 화해의 길(Via della Conciliazione)이라는 대로를 개통하면서 그 길목에 있던 궁전과 성당 및 여러 고택들을 모두 철거해 베르니니의 의도가 빛을 바랬다.(...)
대회랑(Colonnade)
베르니니의 설계로 1656~1667년에 걸쳐 만들어진 광장 주변을 둘러싼 타원형 열주 회랑이다. 마데르노가 설계한 대성당의 화려한 정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기둥 양식 중 가장 단순한 도리아식 중 토스카나식을 사용했다. 16m 높이의 토스카나식 대리석 기둥 284개와 벽에서 돌출된 기둥 88개가 4개의 열을 이루며 회랑을 형성하고 있다. 대회랑 위에는 난간과 함께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제작한 역대 교황성인들의 3.24m 높이 조각상 140개가 늘어서 있다.
분수대(The Fountains)
원래 대회랑이 건설되기 전에는 오벨리스크 오른쪽에 마데르노가 설계한 바로크 양식의 화강암 분수대 하나만 있었지만 좌우대칭의 균형미와 조화를 살리기 위해 도메니코 폰타나가 오벨리스크 왼쪽에 마데르노의 분수대와 똑같은 디자인으로 설계해 완성했다. 대성당 앞에 설치한 분수대는 성전에 들어가기 전 흐르는 물로 신체를 정화한다는 의미를 상징화한 것이었다. 뒷날 베르니니가 설계한 대회랑이 들어서면서 마데르노와 폰타나의 분수대는 오벨리스크와 함께 광장을 장식하게 되었다.
오벨리스크(Obelisk)
광장 중앙에 있는 높이 25.5m(기단부까지 합친 높이는 41m), 무게 320t의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30년경쯤 이집트에 있던 로마 총독 코르넬리우스 갈루스(Cornelius Gallus)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을 받들어 알렉산드리아의 포룸 율리움(Forum Julium)에 세운 것이다. 로마 총독이 로마 황제의 명으로 세웠으므로 이집트 상형문자는 처음부터 없었다. 37년 칼리굴라 황제가 로마로 가져와 테베레 강 서안에 만든 개인용 전차경기장에 세웠는데, 자르지 않고 통째로 운반하기 위해 길이 105m, 너비 20m짜리 대형선을 건조하기도 했다.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주변이 황폐화되면서 오벨리스크는 옛 대성당 옆에 그대로 방치플레이되었고, 1500년 뒤 교황 식스토 5세의 명령에 따라 도메니코 폰타나가 1586년 4월 30일부터 9월 10일까지 900여 명의 인부와 140여 필의 말 등을 동원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세웠다. 오벨리스크 위에 올려진 청동제 십자가 내부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모후인 성녀 헬레나예루살렘 성지순례 때 발견해서 가져온 성 십자가[27]의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 1817년 이 오벨리스크의 길쭉한 그림자를 이용해 태양이 황도에 들어가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주변에 둥근 돌들을 설치했다. 오벨리스크 기단부 4면과 상단부에 새겨진 라틴어 명문은 아래와 같다.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라틴어 명문
방위 명문
서쪽면
(대성당 정면쪽)
CHRISTVS VINCIT·CHRISTVS REGNAT·CHRISTVS IMPERAT· CHRISTVS AB OMNI MALO PLEBEM SVAM DEFENDAT·
(Christus vincit christus regnat christus imperat christus ab omni malo plebem suam defendat: 그리스도 승리하시고, 그리스도 군림하시며, 그리스도가 지배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악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지키신다.)
남쪽면
(자니콜로 언덕쪽)
SIXTVS·V·PONT·MAX OBELISCVM VATICANVM DIS GENTIVM IMPIO CVLTV DICATVM AD APOSTOLORVM LIMINA OPEROSO LABORE TRANSTVLIT ANNO M·D·LXXXVI PONT·II·
(Sixtus quintus pontifex maximus obeliscum vaticanum dis gentium impio cultu dicatum ad apostolorum limina operoso labore transtulit anno millesimo quingentesimo octogesimo sexto pontificatus secundo: 한때 불경한 미신에 바쳐졌던[28] 바티칸의 오벨리스크를 많은 어려움을 헤치고 교황 식스토 5세가 12사도의 앞으로 이동시켰다. 교황 재위 제2년, 1586년.)
동쪽면
(화해의 길쪽)
ECCE CRVX DOMINI· FVGITE PARTES ADVERSAE· VINCIT LEO DE TRIBV IVDA·
(Ecce crux domini fugite partes adversae vicit leo de tribu iuda: 보라, 주님의 십자가를. 반역의 무리들은 물러들 가라. 다윗의 뿌리, 유다 지파의 사자가 승리하셨도다.)[29]
북쪽면
(사도 궁전쪽)
SIXTVS·V·PONT·MAX CRVCI INVICTAE OBELISCVM VATICANVM AB IMPVRA SVPERSTITIONE EXPIATVM IVSTIVS, ET FELICIVS CONSECRAVIT ANNO M.D.LXXXVI PONT·II·
(Sixtus quintus pontifex maximus cruci invictae obeliscum vaticanum ab impura supersririone expiatum iustius et felicius consecravit anno millesimo quingentesimo octogesimo sexto pontificatus secundo: 교황 식스토 5세가 바티칸의 오벨리스크를 불경한 미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정당하고 순조롭게 불패의 십자가에 바쳤다. 교황 재위 제2년, 1586년.)
상단부
(대성당 정면쪽)
SANCTISSIMAE CRVCI SYXTVS·V·PONT·MAX· CONSECRAVIT· E PRIORE SEDE AVVMLSVM ET CAESS· AVG· AC TIB· I· L· ABLATVM M·D·LXXXVI·
(Sanctissimae cruci syxtus quintus pontifex maximus sacravit e priore sede avulsum et caesaribus augusto ac tiberio iure licitio ablatum millesimo quingentesimo octogesimo sexto: 이 오벨리스크는 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동안에 이집트에서 로마로 옮겨졌다. 1586년 교황 식스토 5세가 예전의 자리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동시키고 성 십자가에 봉헌했다.)

3.2. 성 베드로 대성당

3.2.1. 마데르노의 정면

사진 설명
정면(Facade)
대성당의 정면은 마데르노의 설계안에 따라 1608년 2월 10일부터 공사를 시작해 1612년 7월 21일에 건설이 대부분 마무리되었다. 미켈란젤로의 그리스 십자가 설계안이 라틴 십자가 형태로 바뀌면서 신랑 길이가 늘어나게 됐고 이에 교황 바오로 5세는 우선 정면부터 짓도록 해, 정면 공사가 끝난 1612년 기준으로 봤을 때 로마 시민들은 성가대석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홀로 서 있는 정면의 얇은 벽체를 봤을 것이다(…). 정면의 높이는 45.44m, 너비는 114.69m이고, 여기에는 높이 27m, 직경 3m짜리 대리석 기둥 8개가 세워져 있다. 어지간한 궁전 못지 않은 장려한 규모를 자랑하지만 그 규모 때문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을 가리게 되었다. 성당 정면은 건설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미켈란젤로의 돔은 대성당 정면을 제외한 로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빈정거림이 끊이지 않았으며, 프랑스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정면 자체는 아름답지만 돔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성당 건물의 진짜 목적은 돔이었는데 그것이 가려지고 말았다"고 혹평했다. 1985년부터 1986년까지 1년여에 걸쳐 보수 공사가 있었다.
정면의 프리즈에는 "IN·HONOREM·PRINCIPIS·APOST·PAVLVS·V·BVRGHESIVS·ROMANVS·PONT·MAX·AN· MDCXII·PONT·VII(In honorem principis apostolorum paulus quintus burghesius romanus pontifex maximus anno millesimo sescentesimo duodecimo pontificatus septimo: 사도들의 으뜸의 영예로 선출된 바오로 5세 보르게세 교황, 교황 재위 제7년, 1612년)"이라는 라틴어 명문이 새겨져 있고, 박공벽에는 교황 바오로 5세의 문장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 위에는 유다 타대오, 마태오, 필립보, 토마스, 大 야고보, 세례자 요한, 예수 그리스도, 안드레아, 사도 요한, 小 야고보, 바르톨로메오, 시몬, 마티아의 순서로 총 13개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데 각각의 높이는 6m이다. 베드로의 조각상은 바오로와 함께 대성당 정면 앞 좌우에 있기 때문에 베드로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세례자 요한이 대신 위치하고 있다.
발코니(Balcony)
대성당의 정면 2층에는 모두 3개의 발코니가 광장을 향해 돌출되어 있는데 그 중 중앙부의 발코니는 '강복의 발코니(Loggia delle Benedizioni)'로 불리며 원로 추기경단이 콘클라베에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음을 선언하는[30] 장소이자, 새 교황이 광장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첫 강복을 하는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가 열리는 장소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매년 성탄절부활절 정오에 교황이 전세계에 보내는 우르비 에트 오르비 또한 여기에서 이뤄진다. 강복의 발코니 아래에는 조각가 암브로지오 부온비키노(Ambrogio Buonvicino, 1552~1622)의 작품인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가 있다. 사진
종탑(Campanile)
마데르노는 성당의 정면을 설계하면서 그 양쪽 끝부분에 종탑을 세우고자 했으나 지반이 침하되고 1621년 1월 28일 교황 바오로 5세가 선종하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20여 년이 지난 1646년 베르니니가 종탑의 재공사에 들어갔지만 그동안 방치되었던 왼쪽 종탑에 균열이 발생하자 격렬한 논쟁 끝에 해당 부분을 철거했고, 현재와 같은 모습의 종탑은 1790년 주세페 발라디에르(Giuseppe Valadier, 1762.4.14~1839.2.1)의 설계에 따라 마데르노의 계획보다 축소된 규모로 건설되었다.
정면 양쪽의 종탑 중 왼쪽의 종탑은 1931년부터 전자식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종탑에 걸린 종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옛 대성당에서 사용하던 종으로 1288년에 주조되었다. 콘클라베에서 교황 선출이 확정되었을 때 시스티나 경당에서 피워올린 흰 연기의 색깔이 불분명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31]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선출된 2005년 콘클라베부터는 이 종탑의 종도 타종한다.

3.2.2. 나르텍스

3.2.2.1. 현관
사진 설명
열주랑(The Portico)
길이 71m, 폭 13m, 높이 20m의 길다란 열주 회랑으로 된 현관의 대리석 바닥에는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 생몰년: 1590.7.13~1676.7.22, 재위기간: 1670.4.29~1676.7.22), 교황 성 요한 23세(S. Ioannes XXIII, 생몰년: 1881.11.25~1963.6.3, 재위기간: 1958.10.28~1963.6.3), 교황 레오 13세(Leo XIII, 생몰년: 1810.3.2~1903.7.20, 재위기간: 1878.2.20~1903.7.20)의 문장이 박혀 있고, 상층부에는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6?~1337.1.8)가 1298년 옛 대성당에 만든 나비첼라(Navicella)라는 이름의 모자이크 작품의 17세기 복제품이 있다(사진).
천장에는 베드로의 생애를 나타낸 46개의 부조가 있고, 뤼네트(lunette)에는 시성된 교황 38명의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열주랑의 벽면에는 조각상들과 함께 여러 교황들이 남긴 비문이 있으며, 현관의 왼쪽과 오른쪽 끝에 있는 공간에는 각각 대리석 기마상이 놓여 있는데 왼쪽은 아고스티노 코르나키니(Agostino Cornacchini, 1686.8.27~1754)가 1670년에 제작한 카롤루스 대제 기마상, 오른쪽은 베르니니가 1725년에 제작한 콘스탄티누스 1세 기마상이다. 현관에서 신랑으로 통하는 청동문은 모두 5개가 있는데 왼쪽부터 오른쪽의 순서로 다음과 같다.

3.2.2.2. 5개의 문
사진 설명
죽음의 문(Door of Death)
장례행렬이 통과하는 문으로 1950년 희년(禧年)을 맞아 교황 가경자 비오 12세(Pius XII, 생몰년: 1876.3.2~1958.10.9, 재위기간: 1939.3.2~1958.10.9)가 설계안을 공모해 입찰에서 선정된 자코모 만추(Giacomo Manzu, 1908.12.22~1991.1.17)가 1961년부터 제작에 들어가 1964년 완성했다. 청동 패널에는 예수, 마리아, 아벨, 성 베드로, 성 요한 23세, 스테파노, 성 그레고리오 7세 등의 죽음이 묘사되어 있다.
선악의 문(Door of Good and Evil)
교황 바오로 6세(Paolo VI, 생몰년: 1897.9.26~1978.7.6, 재위기간: 1963.6.21~1978.8.6)가 자신의 80세 생일을 기념해 대성당에 기증한 문으로 루치아노 민구치(Luciano Minguzzi, 1911.5.24~2004.5.30)가 1977년 완성했다. 청동문의 오른쪽 패널에는 비둘기를 포함한 선(善)을 나타내는 상징물들이, 왼쪽 패널에는 를 포함한 악(惡)을 나타내는 상징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필라레테 문(The Filarete Door)
현관의 다섯 개 문 중 가운데에 있는 문이자 옛 대성당에 있었던 가장 오래된 문으로 '중앙 문'이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Eugenius IV, 생몰년: 1383~1477.2.23, 재위기간: 1431.3.3~1447.2.23)가 '필라레테'라 불린 피렌체 출신의 안토니오 아베룰리노(Antonio Averulino, 1400~1469)에게 제작을 의뢰해 1445년 완성했다. 청동 패널에는 중세 때 널리 사용된 종교미술의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성모 마리아, 베드로바오로를 찬미하는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성사의 문(Door of the Sacraments)
일반적으로 대성당 출입에 사용하는 문으로 높이 7.43m, 너비 3.80m이다. 베난치오 크로체티(Venanzio Crocetti, 1913.8.4~2003.2.3)가 1965년에 완성했으며 가톨릭성사(聖事, sacramentum)를 주제로 했다. 왼쪽 청동 패널에는 천사가 성찬식을 알리는 장면, 세례성사, 견진성사, 고해성사가, 오른쪽 청동 패널에는 성체성사, 혼인성사, 신품성사, 병자성사가 묘사되어 있다.
성문(The Holy Door)
다섯 개의 문 중 가장 오른쪽에 있는 높이 3.65m, 너비 2.30m 크기의 문이다. 1749년에 만든 나무 패널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1949년 비코 콘소르티(Vico Consorti, 1902~1979.7.1)가 청동 패널로 교체한 것으로 1950년 스위스 가톨릭 교회에서 기증했다. 원래는 100년마다 문을 열었으나 그 간격이 50년으로, 다시 25년으로 줄었다. 25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의 첫 날, 교황이 은망치로 벽돌벽을 두들겨 이 문을 열고 순례자들이 출입할 수 있게 한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S. Ioannes Paulus II, 생몰년: 1920.5.18~2005.4.2, 재위기간: 1978.10.16~2005.4.2)가 대희년인 2000년을 기념하여 1999년 12월 24일에 개문해 2001년 1월 6일에 폐문한 것이 가장 최근에 개폐된 일시이다.

3.2.3. 마데르노의 신랑

사진 설명
신랑(Nave, 身廊)
마데르노가 설계한 신랑은 미켈란젤로의 설계안보다 길이를 더 늘려 6만명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바닥에는 붉은색 원형 대리석이 박혀 있는데, 이는 800년 12월 24일 옛 대성당에서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이 거행된 장소를 나타내는 표시이다. 또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부터 미국의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 31곳의 길이가 바닥에 새겨져 있다.
남쪽 측랑과 북쪽 측랑의 금빛으로 장식된 위쪽 벽면에는 검은색으로 각각 "EGO ROGAVI PRO TE, O PETRE, VT NON DEFICIAT FIDES TVA: ET TV ALIQVANDO CONVERSES VS CONFIRMA FRATERS TVOS(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는 루카 복음서 22장 32절과, "QVAODCVMQVE LIGAVERIS SVPER TERRAM, ERIT LIGATVM ETIN COELIS: ET QVODCVMQVE SOLVERIS SVPER TERRAM, ERIT SOLVTVM ET IN COELIS(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는 마태오 복음서 16장 19절이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맨발의 가르멜회'를 설립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조각상(측랑 남쪽)과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의 프란치스코회'를 설립한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 조각상(측랑 북쪽)의 아래에는 아기 천사 한쌍으로 장식된 성수반이 각각 설치되어 있다. 대성당 자체가 워낙 광대하고 내부의 시설물도 하나같이 거대한지라 이에 비하면 성수반은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보이지만, 그래도 보통 성당에 있는 것보다는 월등하게 커서 성수반을 장식하는 아기 천사의 높이가 2m에 육박한다.
성 베드로 청동상(Statue of St. Peter)
신랑의 북쪽 측랑 끝부분에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 1240~1300/1310)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성 베드로 청동상이 있다. 대성당 내의 유일한 고딕 양식 유산으로, 왼손에 열쇠를 들고 오른손을 세운 채 의자에 앉은 베드로의 모습을 나타냈다. 이 청동상은 이미 중세 때부터 유명세를 탔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대성당을 찾은 수많은 순례자들이 베드로의 오른쪽 발에 입을 맞추고 손으로 만지며 기도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다보니 발가락이 닳아서 밋밋하게 변해버렸다.(...)
청동상의 위쪽에는 살레시오 수도회의 설립자 성 요한 보스코(Giovanni Melchiorre Bosco, 1815.8.16~1888.1.31)와 1857년 임시 희년을 선포하면서 이 청동상의 발에 입을 맞춰야 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한 교황 복자 비오 9세(B. Pius IX, 생몰년: 1792.5.13~1878.2.7, 재위기간: 1846.6.16~1878.2.7)의 모자이크 초상화가 장식되어 있다. 성 베드로의 축일인 6월 29일에는 금실로 수놓은 제의를 이 청동상에 입히고 미사를 집전한다.

3.2.3.1. 북쪽 측랑
사진 설명
피에타 경당(Chapel of the Pieta)
피에타 경당은 대성당 내부에 들어섰을 때 오른쪽에 있는 북쪽 측랑의 첫 번째 경당이다. 여기에는 1499년 당시 24세였던 미켈란젤로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 랑그로사이오 추기경의 의뢰를 받아 조각한 피에타가 있다. 피에타그리스도교 예술에서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로, 이탈리아어로 슬픔이나 비탄을 뜻한다. 주로 성모 마리아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이 묘사되는 작품을 피에타라고 하나, 미켈란젤로피에타넘사벽으로 유명해 일반적으로 피에타라고 하면 이곳의 조각상을 가리키게 되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성모 마리아의 얼굴은 예수보다 젊게동안 묘사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그의 전기를 쓴 제자 아스카니오 콘디비(Ascanio Condivi, 1525~1574.12.10)에게 '순결한 여자들이 순결하지 않은 여자들보다 젊음을 더 잘 유지하는데, 티끌만큼도 추잡한 욕망의 때가 묻지 않은 육체를 가진 동정녀라면 말할 것도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 특히나 피에타가 유명한 이유는 미켈란젤로가 남긴 수많은 조각들 중에서 그의 서명이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으로, 성모 마리아의 어깨띠에 "MICHAEL·ANGELVS·BONAROTVS·FLORENT·FACIEBAT(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세계적인 걸작 예술품이다보니 파괴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 결국 1972년 5월 21일 헝가리 출신의 똘아이지질학자 라슬로 토트가 "내가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다!"자칭 신 돋네를 외치며 10여 차례나 망치를 휘둘러 성모의 얼굴과 한쪽 팔을 박살낸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전문가들이 바닥에 흩어진 작은 부스러기까지 수거해 7개월만에 복원했지만, 그 이후로는 두께 19mm, 높이 4.5m, 너비 5.4m 크기의 방탄유리에 둘러싸여 엄중하게 보호받고 있다. 이 때문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에 보관된 수많은 예술품들 중 유일하게 방탄유리의 보호를 받는 작품이다.
복원작업에 대한 1973년 1월 17일 동아일보 기사 복원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리석 가루와 조각을 붙일 접착제로는 폴리에스테르 수지를 사용했고, 절단된 팔 부분은 산화 방지 철근을 끼워 넣어 몸체와 접합시켰다. 또한 1749년 피에타를 지금의 자리로 옮길 때 깨져서 절단면을 갈아 붙였다가 1972년에 다시 깨진 손가락 부분은 최초 조각 당시의 길이와 관절의 모양을 확인하는 게 불가능하므로 대리석보다 가벼운 재료를 사용해 복원 사실이 드러나게 처리했다. 토트가 휘두른 망치에 입혀진 녹 방지 물질이 성모의 눈썹에 묻어 생긴 얼룩은 화학 용제로 녹여내거나 칼로 긁어낼 경우 대리석에 더 큰 타격이 가해질 수 있었지만, 의외로 쉽게 제거할 수 있었다. 바로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가 떼어내 얼룩을 제거한 것. 아랫쪽 사진은 범행 직후 토트가 체포되는 장면으로, 자세히 보면 성모의 왼팔이 부서져 있다. 피에타 경당의 왼쪽 벽감에는 교황 레오 12세(Leo XII, 생몰년: 1760.8.20~1829.2.10 , 재위기간: 1823.9.28~1829.2.10)의 기념물이 있다. 경당의 아치 윗부분 좌우에는 자비(Mercy)와 용기(Fortitude)를 의인화한 조각상이 있다.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Chapel of St. Sebastian)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의 제대 윗부분을 장식하는 성화는 3세기 로마 제국의 군인이었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발각되어 화살형에 처해졌다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교 박해를 비판해 처형당한 성 세바스티아노(Sebastiano, ?~287.1.20)의 순교 장면을 도메니코 참피에리(Domenico Zampieri, 1581.10.21~1641.4.16)가 1628~1631년에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이를 다시 피에트로 파올로 크리스토파리(Pietro Paolo Cristofari, 1685~1743)가 1730~1736년에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제대의 아랫쪽에는 교황 복자 인노첸시오 11세(B. Innocentius XI, 생몰년: 1611.5.16~1689.8.12, 재위기간: 1676.9.21~1689.8.12)의 유해가 유리관 내부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는 원래 대성당 지하 무덤에 안장되었지만 1956년 10월 7일 비오 12세 때 시복되면서 관을 열었는데 사후 267년이 지났음에도 유해가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로부터 55년 뒤인 2011년 5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을 기념해 사람들이 보다 가까이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여기에 대리석 석관을 마련하고 대성당 지하 무덤에 있던 유해를 이장했다(사진1사진2복자(BEATVS)에서 성인(SANCTVS)으로 묘표가 바뀐 사진#1#2). 이에 따라 기존에 모셔졌던 인노첸시오 11세의 유해는 변용 제대로 이장되었다.
제대의 양 옆에는 20세기에 제작된 2개의 기념물이 서 있는데, 왼쪽은 교황 가경자 비오 12세의 동상이고 오른쪽은 교황 비오 11세(Pius XI, 생몰년: 1857.5.31~1939.2.10, 재위기간: 1922.2.6~1939.2.10)의 동상이다. 두 교황 모두 제2차 세계대전나치즘에 반대했던 인물이다. 성 세바스티아노 제대의 왼쪽 벽감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12세(Innocentius XII, 생몰년: 1615.3.13~1700.9.27, 재위기간: 1691.7.12~1700.9.27)의 기념물이, 오른쪽 벽감에는 왕위를 포기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 아우구스타 바사(Kristina Augusta Wasa, 생몰년: 1626.12.8~1689.4.19, 재위기간: 1632.11.6~1654.6.6)의 기념물이 있다. 경당의 아치 윗부분 좌우에는 관용(Clemency)과 지조(Constancy)를 의인화한 조각상이 있다.
성체 경당(Blessed Sacrament Chapel)
성체 경당은 베르니니가 1676년 대성당에서 맡은 마지막 내부 장식이다. 성체가 봉안된 경당은 도금한 청동으로 제작했으며, 그 형태는 1502년 브라만테가 로마의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 중정에 세운 로톤다 형식의 성당인 템피에토(Tempietto)를 축소시켰다. 경당의 돔 꼭대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올려져 있고 그 둘레의 지붕에는 12사도의 조각상이 놓여 있다. 왕관은 쓴 16명의 천사가 경당을 장식하는데 큰 조각상 8개는 팀파눔(tympanum)을, 작은 조각상 8개는 코벨(corbel)을 꾸민다. 경당의 양 옆에는 무릎을 꿇은 두 천사가 손을 모으고 경당을 향해 경배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Pietro da Cortona, 1596.11.1~1669.5.16)가 그렸는데, 이는 현재 대성당 내부에 있는 그림 중 유일하게 모자이크화가 아닌 그림이다.
성체 경당 왼쪽 감실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3세(Gregorius XIII, 생몰년: 1502.1.7~1585.4.10, 재위기간: 1572.5.13~1585.4.10)의 무덤이, 오른쪽 감실에는 카노사의 굴욕 때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를 지지했던 카노사의 마틸데(Matilda of Canossa) 여백작의 무덤이 있다. 경당의 아치 윗부분 좌우에는 순수(Innocence)와 평화(Peace)를 의인모에화한 조각상이 있다.
3.2.3.2. 남쪽 측랑
사진 설명
세례 경당(Baptistery Chapel)
세례 경당은 도메니코 폰타나의 종손인 카를로 폰타나(Carlo Fontana, 1634/1638~1714)가 설계했다. 여기에 놓인 지름 4m의 자색 반암 세례대는 카스텔 산탄젤로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위에 덮인 도금한 청동 덮개 장식은 카를로 폰타나가 설계한 것을 조반니 지아르디니(Giovanni Giardini, 1646~1721)가 완성시켰다.
세례대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예수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하는 장면으로 카를로 마라타(Carlo Maratta, 1625.5.13~1713.12.15)가 1696~1698년에 그린 것을 1722년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경당의 스펜드렐(spandrel) 4곳은 프란체스코 트레비사니(Francesco Trevisani, 1656.4.9~1746.7.30)가 디자인한 것으로 의인화된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유럽의 4대륙이 장식되어 있다.
경당 오른쪽 벽감에는 영국 국왕 제임스 2세의 아들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James Francis Edward Stuart, 1688.6.10~1766.1.1)의 아내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Maria Clementina Sobieska, 1702.7.18~1735.1.18)의 무덤이 있다. 경당의 아치 윗부분 좌우에는 정의(Justice)와 용기(Fortitude)를 의인화한 조각상이 있다.
자헌 경당(Presentation Chapel)
경당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성모 마리아의 부모인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가 어린 성모하느님에게 바치는 장면을 조반니 프란체스코 로마넬리(Giovanni Francesco Romanelli, 1610~1662)가 1638~1642년에 그린 것으로 파비오 크리스토파리(Fabio Cristofari, ?~1689)가 1726~1728년에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제대 아랫쪽에는 교황 성 비오 10세(St. Pius X, 생몰년: 1835.6.2~1914.8.20, 재위기간: 1903.8.4~1914.8.20)의 유해가 유리관 내부에 안치되어 있는데 얼굴과 손에 은으로 만든 가리개를 덮어 놓았다. 제대 왼쪽에는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XV, 생몰년: 1854.11.21~1922.1.22, 재위기간: 1914.9.3~1922.1.22)의 기념물이, 오른쪽에는 교황 성 요한 23세기념물이 있다.
그리고 제대의 왼쪽 벽감에는 스튜어트 왕조의 일족으로 예 혁명 이후 자코바이트가 영국의 정당한 왕위계승권자라고 주장한 영국 국왕 제임스 2세의 아들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및 그의 두 아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Charles Edward Stuart, 1720.12.31~1788.1.31)와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 추기경(Henry Benedict Stuart, 1725.3.11~1807.7.13)의 기념물이 있고, 제대의 오른쪽 벽감에는 교황 성 비오 10세기념물이 있다. 경당의 아치 윗부분 좌우에는 겸손(Humility)과 인내(Patience)를 의인화한 조각상이 있다.
무염시태 제대(Altar of Immaculate Conception)
무염시태(無染始胎, Immaculate Conception) 제대는 교황 바오로 5세의 명에 따라 1477~1479년에 만들어져 같은 해 12월 8일 성모 무염시태 축일에 축성되었다. 제대 아랫쪽에는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탈취해온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었으나 8백년 후인 2004년 11월 27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정교회에 유골을 반환해 지금은 이스탄불의 성 게오르기오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제대의 뒷배경에는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것을 나타낸 성화가 있다. 이는 피에트로 비앙키(Pietro Bianchi, 1694~1740)가 1740년에 그린 것을 1744~1747년 모자이크화로 교체한 것이다.
성화에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o, 1182~1226.10.3) 및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Antonio, 1195.8.15~1231.6.13)가 왕관을 쓴 성모를 경배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성모의 머리에 얹혀진 왕관은 1854년 12월 8일 교황 복자 비오 9세가 봉헌한 황금관에 1904년 12개의 다이아몬드 장식이 추가로 봉헌된 것이다. 이곳에서는 성모에게 바치는 성무일도(聖務日禱, Divine Office)가 행해지며, 무염시태 제대와 함께 있는 성가대 경당(Chapel of the Choir)의 파이프오르간은 1626년에 설치된 것으로 상당히 오래된 편에 속한다. 경당의 아치 윗부분 좌우에는 순결(Virginity)과 복종(Obedience)을 의인화한 조각상이 있다.

3.2.4. 중앙 건물

3.2.4.1. 중앙부
사진 설명
교황 제대(The Papal Altar)
베드로의 무덤 바로 위에 있는 교황 제대는 오직 교황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공간으로 1594년 6월 5일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 생몰년: 1536.2.24~1605.3.3, 재위기간: 1592.1.30~1605.3.3)가 봉헌했다. 제대에 올라설 수 있도록 하는 일곱 층계의 계단은 네르바 포룸에 있던 거대한 대리석을 옮겨와 조각한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제대를 보수하거나 새로 만들기도 했지만, 제대의 위치만큼은 옛 대성당과 지금의 대성당 모두 현재의 위치에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발다키노(Baldacchino)
교황 제대를 덮은 발다키노는 천개(天蓋)라고도 불리며, 교황 우르바노 8세가 20대 청년 베르니니에게 명해 1625년부터 1633년까지 8년에 걸쳐 청동을 주재료로 금박을 입혀 제작된 바로크 양식의 걸작품이다. 높이 29m, 무게 37t에 달하는 발다키노의 제작을 위해 이탈리아 전역은 물론 베네치아에서도 청동을 끌어모았지만 그래도 부족하자 판테온에까지 손을 뻗쳤다는 이유로 로마 시민들의 조롱거리가 된 걸로도 유명하다. 완성 당시에는 기존의 발다키노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라 이도저도 아닌 키메라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오는가 하면, 로스트왁스법(lost wax process)을 이용해 실제 동식물을 밀랍 속에 넣고 청동 주물을 만들어 실물을 모방해야 할 예술가가 실물 자체를 이용해 효과를 내 예술가답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정작 주문자였던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결과물에 매우 만족해하면서 베르니니를 더욱 신임하게 된다. 주물 작업에는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큰 역할을 담당했는데, 극적인 효과를 추구해 발다키노 꼭대기에 부활한 그리스도의 조각상을 올리려던 베르니니의 계획대로 진행할 경우 기둥이 하중을 지탱하지 못할 것이라고 계산해 십자가를 얹은 원구를 올리도록 하기도 했다.
발다키노의 지붕을 떠받치는 네 개의 물결무늬 나선형 기둥은 인간의 영혼이 천상에 도달하는 것을 형상화했는데 기둥의 굵기를 가늘고 날렵하게 처리해 미사를 집전하는 교황의 시야를 가리지 않게 했고, 내부 중앙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조각되어 있다. 이외에도 화관을 들어올린 네 명의 천사가 있으며, 우르바노 8세의 출신 가문인 바르베리니 가문의 상징인 , 베드로를 상징하는 교황관열쇠 및 바오로를 상징하는 복음서를 든 천사들도 함께 장식되어 있다.
콘페시오(The Confessio)
교황 제대 밑에는 베드로의 무덤이 자리해 있어 대성당 내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로 손꼽힌다. 베드로가 순교한 이래 2,00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진짜 매장지인지는 알 수 없었는데, 오랜 탐사와 연구를 거쳐 1950년 12월 23일 교황 가경자 비오 12세가 성당 지하실의 기저 공간에서 성 베드로의 무덤을 확인했다고 공표했다.
이곳으로 내려가는 대리석 계단과 주변을 두른 난간에는 청동제 램프 100개가 장식되어 불을 밝히고 있으며, 교황 제대 아랫쪽의 벽감에는 교황 성 리노(St. Linus, 생몰년: ?~76/79, 재위기간: 64/67~76/79)가 사용했다는, 성녀 아녜스 축일에 봉헌된 양털을 축성한 뒤 그것을 실로 만들어 제작한 영대(Pallium)가 봉헌되어 있다. 베드로의 무덤을 기점으로, 대성당의 지하 무덤에 내려갈 수 있다.
돔(The Dome)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자신이 설계한 돔의 기단부만 완성되는 걸 보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설계안을 이어받은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원안을 약간 수정해 교황 식스토 5세의 마지막 치세인 1590년 완공했다. 돔의 내부 둘레에는 "TV ES PETRVS ET SV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 TIBI DABO CLAVES REGNI CAELORVM(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는 마태오 복음서 16장 18~19절이 2m 크기로 새겨져 있고, 아랫쪽 채광창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4세가 식스토 5세를 기념한 "S·PETRI GLORIAE SIXTVS PP·V·A·M·D·XC·PONTIF·V·(Sancti petri sixtus papa quintus anno millesimo quingentesimo nonagesimo pontificatus quinto : 성 베드로의 영광을 위하여, 식스토 5세 교황, 교황 재위 제5년, 1590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돔의 내부에는 537개의 계단이 있어서, 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채광 정탑으로 향할 수 있다. 돔을 지탱하는 네 모서리 기둥벽 위쪽에는 사복음서의 저자인 마태오·마르코·루카·사도 요한과 이들을 상징하는 사람·사자··독수리가 묘사된 원형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으며, 기둥벽 아래쪽의 벽감에는 대성당에 봉안된 성유물과 그에 연관된 성인들, 즉 성 십자가의 파편과 성녀 헬레나(중앙부 북서쪽), 성창성 론지노(중앙부 북동쪽), 성 안드레아의 두개골[32]과 성 안드레아(중앙부 남동쪽), 예수의 얼굴이 찍힌 수건과 성녀 베로니카(중앙부 남서쪽)의 대리석 조각상이 있다. 기둥벽 위쪽에 있는 원형 모자이크와 기둥벽 아래쪽에 있는 조각상의 사진과 위치, 조각상 상단부 둘레에 새겨진 라틴어의 의미, 조각가와 조각연도에 관한 사항은 아래쪽을 참조 바람.

기둥벽 위쪽
북서쪽 남서쪽 북동쪽 남동쪽
마태오(사람) 사도 요한(독수리) 마르코(사자) 루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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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벽 아래쪽
성녀 베로니카 성녀 헬레나 성 론지노 성 안드레아
HINC VNA FIDES MVNDO REFVLGET HINC SACERDOTII VNITAS EXORITVR
여기에서 하나의 믿음은 세상에 빛난다
(HINC VNA FIDES MVNDO REFVLGET)
여기에서 사제의 단일성이 탄생한다
(HINC SACERDOTII VNITAS EXORITVR)
프란체스코 모치(1629) 안드레아 볼기(1635) 잔 로렌초 베르니니(1635) 프랑수아 뒤케누아(1635)

3.2.4.2. 왼쪽 교차랑
사진 설명
성 요셉 제대(Altar of St. Joseph)
성 요셉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아킬레 푸니(Achille Funi, 1890.2.26~1972.7.26)가 1961년에 그린 것으로 1963년 모자이크화로 교체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며 전세계 교회의 주보성인인 성 요셉이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무릎을 꿇은 천사와 하늘에 떠 있는 천사가 경배하는 내용으로, 1963년 3월 19일 교황 성 요한 23세가 축성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처음부터 아킬레 푸니의 그림이 걸려 있던 게 아니라 구이도 레니(Guido Reni, 1575.11.4~1642.8.18)가 그린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의 모자이크 복제화가 있었지만 1822년 성 요셉 제대의 왼쪽에 있는 제대(현재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제대)로 위치가 옮겨졌다. 성 요셉 제대의 아랫쪽에는 12사도 가운데 두 사람인 사도 시몬과 사도 유다 타대오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으며, 제대의 양 옆에는 각각 시몬과 유다 타대오의 원형 초상화가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다.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제대(Altar of the Crucifixion of St. Peter)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구이도 레니의 작품으로 베드로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장면을 표현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제대가 위치한 곳이 바로 베드로가 순교한 칼리굴라 경기장의 한복판이라고 하며, 이를 통해 베드로의 순교지에 대성당이 세워졌음을 나타냈다. 이 성화는 1779년 8월 21일부터 1784년 4월 10일까지 모자이크화로 교체되었으며, 본래 성 요셉 제대에 걸려 있었으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른 성화가 걸리게 되면서 지금의 제대 자리로 옮겨졌다.
제대 왼쪽에는 필리핀 출신으로 일본에서 순교해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1987년 10월 18일 시성한 성 로렌초 루이스(Lorenzo Ruiz, 1600~1637.9.29)의 원형 초상화가, 오른쪽에는 교황 가경자 비오 12세1951년 10월 21일 시성한 성 안토니오 마리아 지아넬리(Anthony Maria Gianelli, 1789~1846.6.7)의 원형 초상화가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다.
사도 성 토마스 제대(Altar of St. Thomas the Apostle)
사도 성 토마스 제대는 대성당 내의 제대들 가운데서도 가장 이른 시기인 1621년 1월 30일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12사도 중 하나인 성 토마스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다가 예수의 손바닥 난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서야 데꿀멍하고 부활을 믿게 되었다는 요한 복음서 20장 24~29절의 내용을 나타낸 것으로, 빈센초 카무치니(Vincenzo Camuccini, 1771.2.22~1844.9.2)가 1806년에 그린 것을 1822년에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제대 아랫쪽에는 교황 바오로 5세가 옛 대성당에서 이장한 교황 성 보니파시오 4세(St. Bonifacius IV, 생몰년: 550~615.5.8, 재위기간: 608.8.25~615.5.8)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제대 왼쪽에는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1988년 10월 2일 시성한 카노사의 성녀 막달레나 가브리엘라(Maddalena Gabriella, 1774.3.1~1835.4.10)의 원형 초상화가, 오른쪽에는 교황 가경자 비오 12세1951년 6월 24일 시성한 성녀 마리아 도미니카 마차렐로(Maria Dominica Mazzarello, 1837.5.9~1881.5.14)의 원형 초상화가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다.

3.2.4.3. 오른쪽 교차랑
사진 설명
성 프로체소와 마르티니아노 제대(Altar of Sts. Processus & Martinian)
1628년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축성한 이 제대는 성 프로체소와 성 마르티니아노에게 바쳐진 것이다. 원래 두 사람은 베드로가 로마의 마메르티노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를 감시하던 간수였으나 베드로로부터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이 사실이 발각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처형되었다.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두 성인이 순교하는 장면을 발렌틴 데 볼로뉴(Valentin de Boulogne, 1591~1632)가 1630년에 그린 것을 1712년에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는데 이 과정에서 원화보다 색상과 분위기가 더 어둡게 바뀌었다.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이 자리에 바오로에게 봉헌할 제대를 만들고자 세부적인 계획까지 세웠으나 백지화 되는 바람에 지금의 제대가 자리잡게 되었다. 제대의 양 옆을 떠받치는 옅은 황색의 기둥은 지알로 안티코(giallo antico)라는 희귀한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클레멘스 8세가 계획했던 바오로 제대의 흔적 중 일부이다. 제대의 아랫쪽에는 옛 대성당에서 이장한 성 프로체소와 성 마르티니아노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성 에라스모 제대(Altar of St. Erasmus)
1628년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축성한 이 제대는 성 에라스모[33]에게 바쳐진 것으로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3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체포되어 권양기로 내장을 끄집어내 뽑히는 고문을 받다가 처형당한 포르미아의 성 에라스모(Erasmus, ?~303)의 순교 장면을 나타냈다.
기존의 성화가 너무 낡아서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6.15~1665.11.19)이 1628~1629년에 새로 그린 것을 1739년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는데, 푸생이 17세기 프랑스 회화의 거장이자 프랑스 근대 회화의 시조라는 유명세 때문인지 이 성화의 원본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 파리강탈가져갔다가 나중에 반환된 흑역사가 있다. 푸생이 그린 원본은 현재 바티칸 미술관에 소장중이다. 제대의 아랫쪽에는 옛 대성당에서 이장한 성 에라스모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성 벤체슬라오 제대(Altar of St. Wenceslaus)
성 벤체슬라오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독일에 대한 타협 정책과 함께 국내에서의 그리스도교 진흥을 통해 슬라브인의 통합을 추진했으나 여기에 반발한 동생 볼레슬라프의 부하에게 피살당한 뒤 순교자로서 공경받은 성 벤체슬라오(St. Wenceslaus, 생몰년: 907~929/935.9.28, 재위기간: 921~929/935.9.28)의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안젤로 카로셀리(Angelo Caroselli, 1585~1653)가 1627~1630년에 그린 것을 1740년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제대 아랫쪽에는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Maria, 344?~421/522?) 등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제대 왼쪽에는 성 치릴로(Kyrillos, 827~869.2.14)의 원형 초상화가, 오른쪽에는 성 치릴로의 형인 성 메토디오(Methodius, 826~885.4.6)의 원형 초상화가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슬라브인의 사도'로 불린 이들은 모라비아의 슬라브인 전도에 종사했으며 슬라브인의 구어를 적을 수 있도록 키릴 문자를 창안해 성서와 기도서를 번역하고 이를 교황으로부터 인정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3.2.4.4. 계상랑
사진 설명
성 베드로의 의자(Cathedra Petri)
중앙 제대 뒷부분에 있는 성 베드로의 의자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선교할 때 앉았던 나무 의자라는 전설이 있어 그 조각들을 모아 5세기에 상아로 장식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875년 서프랑크의 카를 2세(823.6.13~877.10.6)가 로마에서 서로마 황제로 대관식을 거행할 때 교황청에 기증한 의자이다. 하지만 이 의자가 베드로를 상징하는 중요한 성유물로 간주됨에 따라 순례자들이 경배를 바쳤기 때문에 이미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게 된 듯(…).
베르니니는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 생몰년: 1559.2.13~1667.5.22, 재위기간: 1655.4.7~1667.5.22)의 의뢰에 따라 1647년부터 1653년까지 6년 동안의 작업을 거쳐 기존의 의자에 약 75t에 달하는 청동을 입히고 금박과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했다. 무게 39t, 높이 5m에 육박하는 4개의 청동상이 의자의 네 다리를 잡고 서 있는데, 앞쪽의 두 사람은 서방 교회의 교부인 성 암브로시오(St. Ambrosius, 340?~397.4.4)와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us, 354.11.13~430.8.28)이고 뒤쪽의 두 사람은 동방 교회의 교부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Ioannes Chrysostomus, 347?~407.9.14)와 성 아타나시오(St. Athanasius, 293?~373.3.2)로, 이는 동서 교회의 통합을 의미함과 동시에 서방 교회의 교부를 앞에 배치함으로써 동방 교회에 대한 우위를 드러냈다.
의자 위쪽에 있는 황금빛 타원형 창은 유리가 아니라 대리석을 얇게 깎아서 유리처럼 비치게 만든 것으로 한가운데에 새겨진 길이 1.75m의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하고, 비둘기를 둘러싼 타원이 3겹인 것은 삼위일체를 상징하며, 창이 12부분으로 나뉘어진 것은 12사도를 상징한다. 사진 그 주변에는 구름에 둘러싸인 천사들의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의자를 중심으로 그 뒤쪽 왼편에는 'O PASTOR ECCLESIAE TU OMNES CHRISTI PASCIS AGNOS ET OVES'라는 라틴어가, 오른편에는 'ΣΥ ΒΌΣΚΕΙΣ ΤΑ ΑΡΝΙΆ ΣΥ ΠΟΙΜΑΊΝΕΙΣ ΤΑ ΠΡΟΒΑΤΙΑ ΚΡΙΣΤΟΥ'라는 그리스어가 새겨져 있는데 둘 다 '교회의 목자여, 그대는 모든 어린 과 양떼를 목장으로 넣으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 복음서 21장 15~17절에서 예수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말한 것과 의미가 통한다. 계상랑의 좌우 벽감에는 각각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 생몰년: 1468.2.29~1549.11.10, 재위기간: 1534.10.13~1549.11.10)의 무덤과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 생몰년: 1568.4.5~1644.7.29, 재위기간: 1623.8.6~1644.7.29)의 무덤이 있다.

3.2.4.5. 중앙부 남동쪽
클레멘티나 경당(Clementine Chapel)
경당의 아치 윗부분 좌우에는 교권(Ecclesiastical Authority)과 신성한 정의(Divine Justice)를 의인화한 조각상이 있다.
사진 설명
변용 제대(Altar of Transfiguration)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의 내용은 이러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하기 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해 얼굴과 옷이 눈부시게 빛나며 모세엘리야와 대화하자,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고 베드로가 청했다. 하지만 빛나는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자 제자들이 엎드려 두려워했다는 마태오 복음서 17장 1~6절의 내용을 나타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인 라파엘로가 1517년에 작업에 착수해 그가 사망한 해인 1520년에 완성한 것을 1767년에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성화의 원본은 니콜라 푸생이 그린 '성 에라스모의 순교'의 원본처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797년에 프랑스 파리로 가져갔다가 1815년에 바티칸으로 반환되었다. 제대의 맞은편에는 교황 복자 인노첸시오 11세의 무덤이 있지만 그의 유해는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의 제대 아랫쪽에 안장되어 있었다. 2011년 5월 3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유해가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으로 이장됨에 따라 원래 그곳에 있었던 교황 복자 인노첸시오 11세의 유해는 변용 제대로 이장되었다.
대교황 성 그레고리오 제대(Altar of St. Gregory the Great)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1명이자 뛰어난 학식을 바탕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그레고리안 성가를 편찬하고 598년 롬바르드족의 위협으로부터 로마를 지켜내 '교회의 구세주', '로마의 보호자'로 불린 '하느님의 종들의 종'[34] 대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St. Gregorius I, 생몰년: 540~604.3.12, 재위기간: 590.9.3~604.3.12)가 성유물을 요청하는 황제의 대리인에게 순교자의 유골을 닦은 천을 건네줬지만 하찮다며 받지 않자 교황이 칼로 그 천을 찌르니 피로 얼룩졌다는 기적을 나타냈다.
안드레아 사키(Andrea Sacchi, 1599.11.30~1661.6.21)가 1625년에 그린 것을 1772년에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선종 즉시 시성되어 대교황으로 격상된 성 그레고리오 1세의 유해는 옛 대성당에서 이장해 이곳 제대의 아랫쪽에 안장되어 있다. 제대의 왼쪽에는 교황 비오 7세(Pius VII, 생몰년: 1740.8.14~1823.8.20, 재위기간: 1800.3.14~1823.8.20)의 무덤이 있다.
거짓 제대(Altar of the Lie)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이런 내용이다. 하나니아스가 땅을 팔아 생긴 돈을 감추고 아내인 사피라도 그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돈의 일부만을 사도에게 바쳤는데, 베드로는 "하나니아스, 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일부를 떼어 놓았소? 그 땅은 팔리기 전에도 그대 것이었고, 또 팔린 뒤에도 그 돈은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 아니오? 그런데 어쩌자고 이런 일을 하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라고 말하자 하나니아스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사람들이 시신을 메고 장사지내러 나간 사이, 남편의 죽음을 알지 못한 사피라가 들어오자 베드로는 그녀에게도 돈이 이것뿐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거짓말을 하자 "어쩌자고 그대들은 서로 공모하여 주님의 영을 시험하는 것이오? 보시오, 그대 남편을 묻은 이들이 바로 문 앞에 이르렀소. 그들이 당신도 메고 나갈 것이오."라고 말하기 무섭게 사피라 또한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는횡령자의 최후 사도행전 5장 1~11절의 내용을 나타냈다. 크리스토포로 론칼리(Cristoforo Roncalli, 1552~1626)가 1599~1604년에 그린 것을 1725~1727년에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제대의 맞은편에는 교황 비오 8세(Pius VIII, 생몰년: 1761.11.20~1830.12.1, 재위기간: 1829.3.31~1830.12.1)의 기념물이 있으며, 기념물 밑에는 성물 안치소 및 재무 박물관으로 향하는 문이 자리하고 있다. 대성당과 성물 안치소 및 재무 박물관을 연결하는 이 통로에는 대성당에 안장된 교황들의 명단이 있다.
3.2.4.6. 중앙부 남서쪽
원주의 성모 경당(Our Lady of the Column Chapel)
사진 설명
원주의 성모 제대(Altar of Our Lady of the Column)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것으로, 옛 대성당 입구 옆에 있던 원기둥 위에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원주의 성모'라는 이름이 붙었다. 1581년에 지금의 대성당으로 옮겨졌으며, 1607년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설계한 희귀한 대리석과 설화석고 장식이 성화 주변에 덧붙여졌고, 1645년 성화 속 성모자의 머리 위에 금관이 봉헌되었다. 1964년 11월 21일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났을 때 교황 바오로 6세는 원주의 성모를 '교회의 어머니(Mater Ecclesiae)'라 선언하고, 1981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걸 모자이크화로 복제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잘 보이는 외벽에 설치했다.
제대의 아랫쪽에는 교황 성 레오 2세(St. Leo II, 생몰년: ?~683.7.3, 재위기간: 681.12~683.7.3), 교황 성 레오 3세(St. Leo III, 생몰년: ?~816.6.12, 재위기간: 795.12.26~816.6.12), 교황 성 레오 4세(St. Leo IV, 생몰년: ?~855.7.17, 재위기간: 847.1~855.7.17)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성심 제대(Altar of the Sacred Heart)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수녀인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uerite-Marie Alacoque, 1647.7.22~1690.10.16)의 앞에 발현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예수 성심(聖心) 신심 전파에 공헌한 것이 인정되어 1864년 9월 18일 교황 비오 9세가 시복했고, 1920년 5월 13일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시성했다. 이 성화는 카를로 무치올리(Carlo Muccioli, 1857~1933)가 1923년에 그렸는데, 원래 여기에는 프란체스코 바니(Francesco Vanni, 1563~1610)가 그린 '시몬 마구스의 추락'이 걸려 있었으나 그림의 상태가 악화되어 무치올리의 작품으로 대체되었다.
제대의 맞은편에는 베르니니가 완성한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 생몰년: 1559.2.13~1667.5.22, 재위기간: 1655.4.7~1667.5.22)의 무덤이 있다. 바로크 양식으로 된 걸작 조각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 무덤을 장식하는 4개의 여인상 중 '진실'을 상징하는 조각상은 지구를 밟고 있는데, 이 여인상의 발치에 놓인 지역은 성공회를 내세워 가톨릭과 갈라선 영국이다.(...) 사진
대교황 성 레오 1세 제대(Altar of St. Leo the Great)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조각은 대교황 성 레오 1세(St. Leo I, 생몰년: 400~461.11.10, 재위기간: 440.9.29~461.11.10)가 452년 로마 코앞에까지 침입한 훈족을 저지하고자 아틸라를 만나기 위해 병력 없이 성직자 차림으로 로마 교외에 나갔는데, 성 레오 1세의 뒤쪽에서 칼을 든 베드로바오로 두 사도가 나타난 환시를 본 아틸라가 군대를 퇴각시켜 로마를 구원했다는 전설을 나타냈다. 실제로는 뒷돈 주고 협상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암튼 당시 로마 황제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대성당 내의 제대를 장식하는 성화 중 프레스코화나 모자이크화가 아닌 유일한 조각 작품으로, 알렉산드로 알가르디(Alessandro Algardi, 1598.7.31~1654.6.10)가 1645~1653년에 대리석으로 제작했다. 제대의 아랫쪽에는 그 이름에 걸맞게 대교황 성 레오 1세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베드로의 불구자 치유 제대(Altar of St. Peter Healing the Cripple)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불구자를 사람들이 날마다 메고 성전 앞 미문(美門)에 갖다놔 앵벌이구걸을 시키던 중 불구자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사도 요한에게 구걸하자, 베드로가 "나는 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말하며 일으키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걷고 뛰며 성전으로 들어가 하느님을 찬미했다는 사도행전 3장 1~10절의 내용을 나타냈다.
처음에는 토마소 라우레티(Tommaso Laureti, 1530~1602.9.22)에게 작업을 맡겼으나 1602년에 사망하자 그를 대신해 루도비코 카르디(Lodovico Cardi, 1559.9.12~1613.6.18)가 그림을 그려 1606년에 완성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의 상태가 나빠져 훼손되었고, 결국 프란체스코 만치니(Francesco Mancini, 1679.4.24~1758.8)가 1748년에 그린 것을 1751~1758년에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3.2.4.7. 중앙부 북동쪽
그레고리오 경당(Gregorian Chapel)
경당의 아치 윗부분 좌우에는 자애(Charity)와 신앙(Faith)을 의인화한 조각상이 있다.
사진 설명
성 예로니모 제대(Altar of St. Jerome)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이자 교회학자이며 성서라틴어로 번역한 에우세비우스 소프로니우스 히에로니무스, 즉 성 예로니모(St. 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340/347~420.9.3)를 주제로 했다. 죽어가는 성 예로니모의 손에 입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굽힌 바오로와, 화면 왼쪽에 앉아 있는 성 예로니모의 발치에 머리를 대고 있는 사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도메니코 참피에리가 1614년에 그린 것을 1744년에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제대의 아랫쪽에는 교황 성 요한 23세의 유해가 유리관 내부에 안치되어 있다. '선하신 교황 요한'으로 불리며 많은 존경을 받았던 그는 1963년 6월 3일 선종한 뒤 대성당 지하 무덤에 매장되었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 시복 절차가 진행됨에 따라 관을 열었는데, 30여년이 지났음에도 유해가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따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요한 23세를 2000년 9월 17일 시복하면서 새로운 매장처로 이 제대를 선택해 그의 거룩함을 기렸다.
도움의 성모 제대(Altar of Our Lady of Succour)
도움의 성모 제대를 장식하는 성화는 왕관을 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나타낸 것이며 나무판에 프레스코화로 그려졌다. 이는 대성당 내의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모자이크화가 아닌 그림들 가운데 하나이다. 12세기에 그려진 이래 오늘날까지 8백년이 넘도록 보관된 귀중한 유물로 원래는 옛 대성당에 있었으나 1578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지금의 대성당으로 옮겨 지롤라모 무치아노(Girolamo Muziano, 1532~1592)가 설화석고, 자수정과 같은 준보석, 아프리카산 대리석, 초록색 반암을 사용해 성화가 걸린 벽면을 장식했다.
제대의 아랫쪽에는 카파도키아의 교부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Gregorio Nazianzeno, 329?~389/390.1.25)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고, 제대의 오른쪽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Gregorius XVI, 생몰년: 1765.9.18~1846.6.1, 재위기간: 1831.2.2~1846.6.1)의 무덤이 있다.
성 바실리오 제대(Altar of St. Basil)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한 성화는 카파도키아의 교부이자 교회학자인 성 대 바실리오(St. Basil the Great, 330~379.1.1)가 372년 1월 6일 주님 공현 축일(Epiphany)을 맞아 신하들을 대동하고 카파도키아 교회를 방문한 발렌스 황제(Valens, 생몰년: 328~378.8.9, 재위기간: 364.3.28~375.11.17, 375.11.17~378.8.9)를 거들떠보지도 않생까고 신자들에게 의식을 집전하는 장면을 나타냈다.
위 장면은 당시 로마 제국에 퍼진 아리우스파에 대해 발렌스 황제는 아리우스파를 신봉한 반면 성 바실리오는 아리우스파에 반대한 것과 관련이 있다. 황제는 한때 그를 죄주려 했으나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당당하게 나서자 그 용기에 감탄해 카이사레아 인근의 영지를 하사하고 그가 벌이던 자선 활동을 재정적으로 도왔다. 이 성화는 세속의 권력에 대한 기독교회의 우위를 나타냄과 동시에 아리우스파에 대한 아타나시우스파의 우위를 상징하며, 피에르 쉬블레라스(Pierre Subleyras, 1699.11.25~1749.5.28)가 1745년에 그린 것을 1748~1751년에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제대의 맞은편에는 교황 베네딕토 14세(Benedictus XIV, 생몰년: 1675.3.31~1758.5.3, 재위기간: 1740.8.17~1758.5.3)의 무덤이 있다.

3.2.4.8. 중앙부 북서쪽
사진 설명
나비첼라 제대(Altar of the Navicella)
나비첼라(Navicella)는 이탈리아어로 '작은 배'를 뜻하는 단어로, 종교미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한다.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제자들이 탄 배가 호수에서 풍랑에 휩싸이자 이들의 안전을 걱정한 예수가 물 위를 걷는 기적으로 배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고 이를 본 베드로가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해 예수처럼 물 위를 걸었으나 시선을 돌려 파도치는 호수를 보고 겁이 나쫄아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걸 예수가 구해주며 그의 믿음이 약함을 꾸짖었다는 마태오 복음서 14장 22~33절의 내용을 나타낸 것이다.
이 내용을 주제로 한 조토의 작품이 이미 대성당 현관에 있었지만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제대를 장식하기 위해 베르나르도 카스텔로(Bernardo Castello, 1557~1629)에게 작업을 맡겨 1604~1605년에 그림을 그렸으나 그의 작품은 채택되지 못했고, 20여년 뒤 조반니 란프란코(Giovanni Lanfranco, 1582.1.26~1647.11.30)가 1627년에 다시 그리기 시작해 1628년 9월 17일에 완성시켰다. 하지만 그림의 상태가 악화되어 1640년, 1662년, 1687년, 1684년 네 차례에 걸쳐 보수했으며, 최종적으로 1726년에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제대의 맞은편에는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 생몰년: 1683.3.7~1769.2.2, 재위기간: 1758.7.6~1769.2.2)의 무덤이 있다.
대천사 성 미카엘 제대(Altar of St. Michael the Archangel)
처음 이 제대는 성모와 아기 예수 및 성녀 안나에게 바쳐져 그 뒷배경을 장식한 성화 또한 이들을 그린 것이었으나 1606년 4월 14일에 걸렸다가 이틀 만에 내려지고 말았다. 안습.
그 뒤로 이곳은 대천사 미카엘에게 바쳐진 제대로 바뀌어 산타 마리아 델라 콘체치오네 데이 카푸치니 성당에 있던 구이도 레니의 작품을 1627~1628년에 모자이크화로 복제해 1628년 9월 29일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축성하면서 제대 위에 설치했지만 1756년에 내려져 1772년 교황 클레멘스 14세(Clemens XIV, 생몰년: 1705.10.31~1774.9.22, 재위기간: 1769.5.19~1774.9.22)의 명으로 다른 성당에 걸리게 되었다. 이후 1757~1758년에 새로 모자이크화를 만들어 다시 제대를 장식했다. 처음에는 벽화로 그려졌다가 나중에 모자이크화로 교체된 대성당 내부의 다른 그림들과 달리, 이 성화는 처음 제작할 때부터 모자이크화로 만들어져 제대에 설치된 유일한 작품이다.
성녀 베드로닐라 제대(Altar of St. Petronilla)
성녀 베드로닐라는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은 뒤 그의 영적인 딸이 되었고, 이후 로마 귀족 플라쿠스의 청혼을 거부하고 3일간 단식하다가 사망했다는 전승이 있다. 그녀의 유해는 도미틸라 카타콤에 매장되었으며, 그녀가 베드로의 딸이라고 믿은 프랑크 왕국의 국왕 피핀 3세(Pepin III, 생몰년: 714~768.9.24, 재위기간: 751~768.9.24)가 750년 교황 바오로 1세(Paulus I, 생몰년: ?~767.6.28, 재위기간: 757.5.29~767.6.28)에게 그녀를 베드로의 무덤과 가까운 곳으로 이장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받아들여져 유해가 옛 대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되었고 성녀를 위한 제대가 세워졌다. 이 제대는 1606년 옛 대성당을 허문 뒤 지금의 자리로 옮겨 1623년 축성되었다. 피핀 3세의 역할과 함께 781년 카롤루스 대제가 아들 카를 1세로 하여금 이 제대에서 세례를 받게 했던 것이 맞물려 역대 프랑스 국왕들은 이 제대를 '프랑스 왕국의 경당'이라고 여겼으며 성녀 베드로닐라는 프랑스의 수호성녀로 공경 받았다.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성녀 베드로닐라의 순교와 그녀가 천국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에게 환대받는 장면을 나타냈는데, 조반니 프란체스코 바르비에리(Giovanni Francesco Barbieri, 1591.2.8~1666.12.22)가 1623년에 그린 것을 1730년에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지금도 성녀 베드롤리나의 축일인 5월 31일에는 프랑스인들이 이곳을 순례해 미사를 드리고 있다.
성 베드로의 다비다 소생 제대(Altar of St. Peter raising Tabitha)
이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평소 착한 일을 많이 하던 야포의 다비다라는 여인이 병들어 죽자 시신을 씻겨 다락방에 모신 상태에서, 마침 인근에 있던 베드로가 이 소식을 듣고 야포로 와서 다비다의 집을 방문해 다락방에 올라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던 과부들을 모두 내보낸 뒤 무릎을 꿇고 기도한 다음 시체를 향해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하자 그녀가 소생해 눈을 뜨고 일어나 자리에 앉는 기적을 일으켜 신도들과 과부들이 이를 목격하고 많은 야포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는 사도행전 9장 36~44절의 내용을 나타낸 것이다.
이 성화의 원본은 조반니 발리오네(Giovanni Baglione, 1566~1643.12.30)가 1604~1606년에 그렸으나 18세기 중엽에 이르자 너무 낡아서 닳아 훼손될 지경에 이르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플라치도 콘스탄치(Placido Costanzi, 1688~1759)가 1757년에 새로 그린 것을 1758~1760년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제대 맞은편에는 교황 클레멘스 10세의 무덤이 있다.

3.2.5. 수도회 설립자 39명의 석상

대성당 내부에는 수도회들을 설립한 성인 39명의 조각상이 늘어서 있다. 각각의 조각상들은 한꺼번에 설치된 게 아니라 1706년부터 1954년까지 순차적으로 설치되었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방문한 말시오르 드 폴리냑 추기경[35]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36]

이탈리아의 화가·건축가인 조반니 파올로 판니니(Giovanni Paolo Panini, 1691.6.17~1765.10.21)가 그린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방문한 말시오르 드 폴리냑 추기경(Le cardinal Malchior de Polignac visite Saint-Pierre-de-Rome)'을 보면 측랑 남쪽 아랫부분 벽감에만 조각상이 있고 그 윗부분 벽감은 빈 상태인데, 화폭 가장 오른쪽에 있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조각상이 이탈리아의 후기 바로크~초기 신고전주의 조각가인 필리포 델라 발레(Filippo della Valle, 1698.12.26~1768.4.29)에 의해 제작되어 1754년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이 그림이 그려진 연대를 1754년 이후부터 화가가 사망한 1765년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3.2.5.1. 측랑 북쪽
설립자 국적 출생 사망 축일 수도회 제작 조각가
위쪽
성녀 루치아 필립피니 이탈리아 1672.1.13 1732.3.25 3월 25일 자비로운 교사회 1949년 실비오 실바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프랑스 1673.1.31 1716.4.28 4월 28일 마리아 선교회 1948년 자코모 파리시니
성 안토니오 즈카르야 이탈리아 1503 1539.7.5 7월 5일 성 바오로회 1909년 체사레 아우렐리
성 베드로 푸리에 프랑스 1565.11.30 1640.12.9 12월 9일 노트르담 수도회 1899년 루이 노엘 리콜리
아랫쪽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 스페인 1499 1562.10.18 10월 19일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의 프란치스코회 1713년 프란체스코 베르가라
성 가밀로 데 렐리스 이탈리아 1550.5.25 1614.7.14 7월 14일 병자들의 봉사자회 1753년 피에트로 파실리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스페인 1491.12.24 1556.7.31 7월 31일 예수회 1733년 카밀로 루스코니
주세페 루스코니
파울라의 성 프란치스코 이탈리아 1416.3.27 1507.4.2 4월 2일 가장 작은 형제회 1732년 조반니 바티스타 마이니
3.2.5.2. 측랑 남쪽
설립자 국적 출생 사망 축일 수도회 제작 조각가
위쪽
성 요한 보스코 이탈리아 1815.8.16 1888.1.31 1월 31일 살레시오 수도회 1936년 피에트로 카노니카
성 요한 세례자 드 라 살 프랑스 1651.4.30 1719.4.7 4월 7일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 1904년 체사레 아우렐리
성 요한 에우데스 프랑스 1601.11.14 1680.8.19 8월 19일 예수 마리아 수도회 1932년 실비오 실바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 프랑스 1779.12.12 1865.5.25 5월 25일 성심 수녀회 1934년 엔리코 콰트리니
아랫쪽
성 필립보 네리 이탈리아 1515.7.22 1595.5.25 5월 26일 오라토리오회 1737년 조반니 바티스타 마이니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프랑스 1581.4.24 1660.9.27 9월 27일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1754년 피에트로 브라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스페인 1515.3.28 1582.10.15 10월 15일 맨발의 가르멜회 1754년 필리포 델라 발레
3.2.5.3. 교차랑 서쪽
설립자 국적 출생 사망 축일 수도회 제작 조각가
위쪽
베르첼리의 성 굴리엘모 이탈리아 1085 1142.6.25 6월 25일 몬테 베르지네 수도회 1878년 주세페 프린치
성녀 안젤라 메리치 이탈리아 1474.3.21 1540.1.27 1월 27일 우르술라회 1866년 피에트로 갈리
십자가의 성 바오로 이탈리아 1694.1.3 1775.10.18 10월 19일 예수 고난회 1876년 이냐치오 야코메티
성 보나필리오 모날디 이탈리아 1040 1115.9.27 2월 17일 성모의 종 수도회 1906년 체사레 아우렐리
아랫쪽
성 노르베르토 독일 1080 1134.6.6 6월 6일 프레몽트레 수도회 1767년 피에트로 브라치
성녀 율리아나 팔코네리아 이탈리아 1270 1341.6.12 6월 19일 성모의 종 수도회 1740년 파올로 캄피
성 브루노 프랑스 1035 1101.10.6 10월 6일 카르투지오회 1744년 미켈란젤로 슬로트
성 요셉 데 갈라산즈 스페인 1558.7.31 1648.8.25 8월 25일 그리스도교 교리 형제회 1755년 인노센초 스피나치
3.2.5.4. 교차랑 동쪽
설립자 국적 출생 사망 축일 수도회 제작 조각가
위쪽
성녀 요안나 앙티드 투레 프랑스 1765.11.27 1826.8.24 8월 24일 성녀 요안나 앙티드 자선 수녀회 1949년 엔리코 콰트리니
카를로 콰트리니
성녀 프란치스카 카브리니 미국 1850.7.15 1917.12.22 11월 13일 성심의 전교 수녀회 1947년 엔리코 타돌리니
성녀 마리아 펠레티에르 프랑스 1796.7.31 1868.4.24 4월 24일 착한 목자 수녀회 1942년 조반니 니콜리니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 프랑스 1591.8.12 1660.3.15 3월 15일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1954년 안토니오 베르티
아랫쪽
성 예로니모 에밀리아니 이탈리아 1486 1537.2.8 2월 8일 소마스카의 성직 수도회 1757년 피에트로 브라치
티에나의 성 카예타노 이탈리아 1480.10.1 1547.8.7 8월 7일 테아티노 수도회 1738년 카를로 모날디
천주의 성 요한 포르투갈 1495.3.8 1550.3.8 3월 8일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1745년 필리포 델라 발레
성 베드로 놀라스코 프랑스 1189 1258.5.31 1월 28일 속량의 성모회 1742년 파올로 캄피
3.2.5.5. 계상랑 남쪽
설립자 국적 출생 사망 축일 수도회 제작 조각가
위쪽
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 이탈리아 1384 1440.3.9 3월 9일 토르 데 스페키의 오블라티회 1850년 피에트로 갈리
성 알폰소 데 리구오리 이탈리아 1696.9.27 1787.8.1 8월 1일 구속주회 1839년 피에트로 테네라니
아랫쪽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 이탈리아 480 547.3.21 7월 11일 베네딕도회 1735년 안토니오 몬타우티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이탈리아 1182 1226.10.3 10월 4일 프란치스코회 1727년 카를로 모날디
3.2.5.6. 계상랑 북쪽
설립자 국적 출생 사망 축일 수도회 제작 조각가
위쪽
성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 이탈리아 1563.10.13 1608.6.4 6월 4일 작은 수행 성직자 수도회 1834년 프란체스코 라부레
인노센초 프라카롤리
성 프란치스코 드 살 프랑스 1567.8.21 1622.12.28 1월 24일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 1845년 아다모 타돌리니
아랫쪽
성 도미니코 스페인 1170 1221.8.6 8월 8일 도미니코회 1706년 피에르 르 그로
엘리야 7월 20일 카르멜회 1727년 아고스티노 코르나키니

3.2.6. 신랑 바닥에 새겨진 31개 대성당의 길이

대성당의 신랑 바닥에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부터 미국 뉴욕의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에 이르는 31개의 크고 아름다운 대성당이 길이순으로 새겨져 있다.

순위 소재지 대성당 길이
01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TEMPLVM VATICANVM) 186.36m
02 영국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LONDINENSIS·S·PAVLIS·FANVUM·) 158.10m
03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FLORENTINA·METROPOLITANA) 149.28m
04 벨기에 브뤼셀 사크레쾨르 대성당(ECCLESIA SS. CORDIS JESV BRVXELLIS) 140.94m
05 미국 워싱턴 D.C.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국립 대성당(SANCTVARIVM IMMACOLATAE CONCEPT. WASHINGTON.) 139.14m
06 프랑스 랭스 랭스 대성당(ECCLESIA CATHEDRALIS RHEMENSIS) 138.69m
07 이탈리아 밀라노 밀라노 대성당(PRIMARIVM·TEMPLVM·MEDIOLEANENSE) 134.94m
08 독일 쾰른 쾰른 대성당(TEMPLVM·CATHEDRALE·COLONIENSE) 134.94m
09 독일 슈파이어 슈파이어 대성당(ECCLESIAS CATHEDRALIS SPIRENSIS) 134m
10 이탈리아 볼로냐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BASILICA·S·PETRONII·BONONIAE) 132.54m
11 스페인 세비야 비야 대성당(TEMPLVM·METROP·HISPALEN·SEVILLA) 132m
12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BASILICA METROP·B·.M·V·PARISIEN) 130m
13 이탈리아 로마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BASILICA·S·PAVLI·VIA·OSTIENSI) 127.36m
14 체코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ECCLESIA CATHEDRALIS S·VITI PRAGAE) 124m
15 스페인 톨레도 톨레도 대성당(PRIMITIALIS ECCLESIA TOLENTANA) 122m
16 이탈리아 로마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S·S·ECCLESIA·LATERANENSIS) 121.84m
17 미국 LA 천사들의 모후 대성당(ECCLESIA CATHEDRALIS B.V.M. ANGELORVM) 120.62m
18 아르헨티나 라플라타 라플라타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ECCLESIA CATHEDRALIS METROPOLITANA PLATENSIS) 120m
19 멕시코 멕시코시티 멕시코시티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ECCLESIA CATHEDRALIS METROPOLITANA MEXICANA) 119.55m
20 벨기에 안트베르펀 안트베르펀 대성당(ECCLES.CATHED.B.M.V.ANTVERPIENSIS) 118.60m
21 이탈리아 파도바 산타 주스티나 대성당(ECCL·S·IVSTINAE·V·M·PATAVIN) 118.50m
22 헝가리 에스테르곰 에스테르곰 대성당(BASILICA CATHEDRALIS ESZTERGOM) 118m
23 이탈리아 페라라 페라라 대성당(ECCLESIA CATHEDRALIS FERRARIENS.) 118m
24 이탈리아 아시시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BASILICA ASSISIEN·S·MARIAE ANG·) 114.76m
25 호주 시드니 세인트 메리 대성당(BASILICA CATHEDRALIS SYDNEYENSIS) 114.61m
26 브라질 브라질리아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CATH·METROP· SANCTI PAVLI BRASILIA) 111.45m
27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ECCLESIA CATHEDRALIS WESTMONASTERIENSIS) 110m[37]
28 터키 이스탄불 하기아 소피아(CONSTANTINOPOLITANA DIVAE SOPHIAE ECCLESIA) 109.57m
29 미국 보스턴 홀리 크로스 대성당(CATHEDRALIS SANCTA CRVCIS BOSTONIENSIS) 109.14m
30 폴란드 그단스크 동정녀 마리아 대성당(BASILICA GEDANENSIS BEATISSIMAE VIRGINIS MARIAE) 103.50m
31 미국 뉴욕 인트 패트릭 대성당(ECCLESIA METROPOL·S·PATRITII NEO EBORACEN) 101.19m

3.2.7. 무덤

어느 교황의 무덤 변천사 지하에서 지상으로 일반인에서 성인으로
BEATVS IOANNES PAVLVS PP.II (2011.5.3~2014.4.27)
IOANNES PAVLVS PP.II (2005.4.8~2011.5.3) SANCTVS IOANNES PAVLVS PP.II (2014.4.27~현재)
3.2.7.1. 지하 무덤
대성당 지하에는 역대 교황의 무덤이 있는데, 가장 인기 있는사람이 많은 곳은 아무래도 요한 바오로 2세의 무덤.[38] 91명에 이르는 교황들의 무덤 뿐 아니라, 여러 성인들과 세속 군주들, 유명인들의 무덤도 있다. 아래의 지도에 표기된 번호 중 무덤과 그곳에 안장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

번호 안장자 번호 안장자
1 성 베드로(?~64)# 3가경자 비오 12세(1876.3.2~1958.10.9)#
11 비오 6세(1717.12.25~1799.8.29)# 14 비오 11세(1857.5.31~1939.2.10)#
15 성 요한 바오로 2세(1920.5.18~2005.4.2)# 16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1626.12.8~1689.4.19)#
17 키프로스 여왕 샤를로트(1444.6.28~1487.7.16) 18 제임스 스튜어트(1688.6.10~1766.1.1)
찰스 스튜어트(1720.12.31~1788.1.31)
헨리 스튜어트(1725.3.11~1807.7.13)#
19 베네딕토 15세(1854.11.21~1922.1.22)# 20 인노첸시오 9세(1519.7.20~1591.12.30)#
21 인노첸시오 13세(1655.5.13~1724.3.7)# 22 요한 바오로 1세(1912.10.17~1978.9.28)#
23 마르첼로 2세(1501.5.6~1555.5.1)# 24 우르바노 6세(1318~1389.10.15)#
25 복자 바오로 6세(1897.9.26~1978.8.6)# 27 요한 7세(650경~707.10.18)
28 비오 3세(1439.5.9~1503.10.18)# 29 바오로 2세(1417.2.23~1471.7.26)#
30 하드리아노 4세(1100~1159.9.1)# 31 인노첸시오 7세(1336~1406.11.6)#
32 니콜라오 5세(1397.11.15~1455.3.24)# 33 그레고리오 5세(972~999.2.18)
34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2세(955~983.12.7)# 35 율리오 3세1487.9.10~1555.3.23)#
37 니콜라오 3세(1210/1220~1280.8.22)# 38 보니파시오 8세(1235~1303.10.11)#
39 갈리스토 3세(1378.12.31~1458.8.6)#
3.2.7.2. 교황들의 무덤
대성당 지하 무덤이 아니라 대성당 내부에 무덤이 있거나 유해가 안치된 교황은 음영표시로 나타냈다(참고).

SVMMI PONTIFICES IN HAC BASILICA SEPVLTI(대성당에 묻힌 교황들)
안장자 선종 안장자 선종 안장자 선종 안장자 선종 안장자 선종
성 베드로 64/67 성 리노 76 성 아나클레토 88 성 에바리스토 105 성 알렉산데르 1세 115
성 식스토 1세 125 성 텔레스포로 136 성 히지노 140 성 비오 1세 155 성 아니체토 166
성 소테르 175 성 엘레우테리오 189 성 빅토르 1세 199 성 레오 1세 461 성 심플리치오 483
성 젤라시오 1세 496 성 아나스타시오 2세 498 성 심마코 514 성 호르미스다 523 성 요한 1세 526
성 펠릭스 4세 530 보니파시오 2세 532 요한 2세 535 성 아가피토 1세 536 비질리오 555
펠라지오 1세 561 요한 3세 574 베네딕토 1세 579 펠라지오 2세 590 성 그레고리오 1세 604
사비니아노 606 보니파시오 3세 607 성 보니파시오 4세 615 성 아데오다토 1세 616 보니파시오 5세 625
호노리오 1세 636 세베리노 640 요한 4세 642 테오도로 1세 649 성 에우제니오 1세 657
성 비탈리아노 1세 672 아데오다토 2세 676 도노 678 성 아가토 681 성 레오 2세 683
성 베네딕토 2세 685 요한 5세 686 코논 687 성 세르지오 1세 701 요한 6세 705
요한 7세 707 시신니오 708 콘스탄티노 715 성 그레고리오 2세 731 성 그레고리오 3세 731
성 자카리아 752 성 스테파노 3세 757 성 바오로 1세 767 스테파노 4세 772 하드리아노 1세 795
성 레오 3세 816 성 스테파노 5세 817 성 파스칼 1세 824 에우제니오 2세 827 발렌티노 827
그레고리오 4세 844 세르지오 2세 847 성 레오 4세 855 베네딕토 3세 856 성 니콜라오 1세 867
하드리아노 2세 872 요한 8세 882 마리노 1세 884 스테파노 5세 891 포르모소 896
보니파시오 6세 896 보니파시오 6세 896 스테파노 7세 897 로마노 897 테오도로 2세 897
요한 9세 900 베네딕토 4세 903 세르지오 3세 911 아타스타시오 3세 913 란도 914
레오 6세 928 스테파노 8세 931 레오 7세 939 스테파노 9세 942 마리노 2세 946
베네딕토 6세 974 요한 14세 984 요한 15세 996 그레고리오 5세 999 요한 18세 1009
베네딕토 8세 1024 요한 19세 1032 성 레오 9세 1054 복자 우르바노 2세 1099 복자
에우제니오 3세
1155
하드리아노 4세 1159 그레고리오 9세 1241 첼레스티노 4세 1241 니콜라오 3세 1280 호노리오 4세 1287
보니파시오 8세 1303 우르바노 6세 1389 보니파시오 9세 1404 인노첸시오 7세 1406 에우제니오 4세 1447
니콜라오 5세 1455 갈리스토 3세 1458 비오 2세 1464 바오로 2세 1471 식스토 4세 1484
인노첸시오 8세 1492 알렉산데르 6세 1503 비오 3세 1503 율리오 2세 1515 바오로 3세 1549
율리오 3세 1555 마르첼로 2세 1555 그레고리오 13세 1585 그레고리오 14세 1591 인노첸시오 9세 1591
레오 11세 1605 우르바노 8세 1644 알렉산데르 7세 1667 클레멘스 10세 1676 복자
인노첸시오 11세
1689
알렉산데르 8세 1691 인노첸시오 12세 1700 클레멘스 11세 1721 인노첸시오 13세 1724 베네딕토 14세 1758
클레멘스 13세 1769 비오 6세 1799 비오 7세 1823 레오 12세 1829 비오 8세 1830
그레고리오 16세 1846 성 비오 10세 1914 베네딕토 15세 1922 비오 11세 1939 가경자 비오 12세 1958
성 요한 23세 1963 복자
바오로 6세
1978 하느님의 종
요한 바오로 1세
1978 성 요한 바오로 2세 2005

3.2.8. 외벽의 벽감에 설치된 성인들의 석상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조각상 설치 과정
설치(2005년 8월 30일) 축성(2005년 9월 14일) 조각상 세부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에 있는 39개의 벽감에는 수도회를 설립한 성인들의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1706년 성 도미니코부터 시작해 1954년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을 끝으로 대성당 내부에는 빈 벽감이 남지 않게 되었다. 이렇듯 만원이 된 내부의 벽감과는 달리 외벽에 있는 30여 개의 벽감은 3세기 넘도록 빈 상태였으나, 교황청에서 1999년부터 이곳에도 조각상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교황청은 1) 조각상의 대상이 된 성인을 교황이 승인할 것, 2) 대성당 관리소가 디자인을 감수할 것, 3) 석재는 이탈리아 카라라산 대리석을 사용할 것, 4) 조각상 설치 제안자가 모든 비용을 부담할 것(...) 등을 설치 조건으로 제시했다. 관련기사 한편 2010년에 나온 다른 기사에 따르면 조각상 설치에 약 25만 달러(2010년 기준 약 2억 5천만원) 이상의 비용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성당의 외벽에는 아직까지도 빈 벽감이 많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조각상이 설치될 때마다 이 항목에 관련 정보가 추가될 예정이다.
3.2.8.1. 요한 바오로 2세 때 축성
성인 국적 신분 출생 사망 축일 조각상 축성일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 스웨덴 과부, 설립자 1303 1373.7.23 7월 23일 1999년 11월 13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이탈리아 수녀, 교회학자, 신비가 1347.3.25 1380.4.29 4월 29일 2000년 10월 28일
성 마르첼리노 샴파냐 프랑스 신부, 설립자 1789.5.20 1840.6.7 6월 6일 2001년 9월 20일
성녀 마리아 솔레다드 스페인 설립자 1826.12.2 1887.10.11 10월 11일 2002년 11월 13일
안데스의 성녀 데레사 칠레 수녀 1900.7.13 1920.4.12 7월 13일 2004년 10월 6일
아르메니아의 성 그레고리오 아르메니아 주교, 증거자 257 331 6월 9일[39]/
9월 30일[40]
2005년 1월 19일
3.2.8.2. 베네딕토 16세 때 축성
성인 국적 신분 출생 사망 축일 조각상 축성일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스페인 신부, 설립자[41] 1902.1.9 1975.6.26 6월 26일 2005년 9월 14일
성녀 제노베바 토레스 모랄레스 스페인 설립자, 수녀원장 1870.1.3 1956.1.5 1월 5일 2006년 10월 4일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 독일 수녀, 철학자, 순교자 1891.10.12 1942.8.9 8월 9일 2006년 10월 11일
성 루이지 오리오네 이탈리아 신부, 설립자 1872.6.23 1940.3.12 3월 12일 2008년 6월 25일
성녀 라파엘라 마리아 포라스 스페인 설립자 1850.3.1 1925.1.6 1월 6일 2010년 1월 21일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 이탈리아 신부, 설립자 1851.7.5 1927.6.1 6월 1일 2010년 7월 7일
성 마론 시리아 수도원장 ? 410 2월 9일 2011년 2월 23일

3.3. 인접 건물

3.3.1. 시스티나 경당

프로토스교황을 선출하는 선거인 콘클라베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항목 참조 바람.

3.3.2. 사도 궁전

아비뇽 유수 이후 현재까지 600년 넘게 교황의 거처로 사용된 궁전으로, 바티칸 궁전 또는 교황 궁전이라고도 불린다. 2013년에 선출된 교황 프란치스코교황청 내부의 성녀 마르타의 집(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면서 2020-05-26 현재는 교황이 거주하지 않고 있다. 물론 외교 사절 접견, 삼종기도 때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강복하는 것과 같은 공식 업무는 사도 궁전에서 수행한다. 항목 참조 바람.

4. 관람시 주의사항

성당이니까 당연히 미사도 볼 수 있는데, 미사 시간에 맞춰서 맨 안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너무 늦게 가면 안 들여보내주기도.

물론 주제대에서 사제가 봉헌하는[42] 미사에 참례하려면 미사 시간에 맞추어 성당에 들어가야 하지만, 성당의 허가만 있다면 사제가 주제대를 제외한 성당 내 부속제대에서 자유로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다. 보통 해외에서 성당 단위로 성지순례 온 신자들이 미사에 참례할 때 쓰는 방법. 그래서 일부 배낭여행자들은 "나 성 베드로 성당에서 한국어 미사에 참례했음"이라는 말인증이 종종 들리기도 한다.

입장시 엄격한 복장 제한이 있어서[43] 기본적으로 이곳에 들어가려면 단정한 복장이 요구된다.[44]민소매탱크톱, 미니스커트, 반바지 등 노출이 많은 옷을 입고 들어갈 수 없으며,[45] 슬리퍼 종류의 신발도 입장불가. 이 때문에 성당 앞에 복장 제한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으며, 입구에서 입장객들의 복장을 육안으로 일일이 검사한다. 이곳에 다녀온 여행객들의 경험담을 보면 이 복장 규제 때문에 성당 주변에 얇은 스카프 등을 파는 상인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또한 주의해야 할 점으로, 성당 주변에서 줄을 서 있는 여행객들에게 접근해서 '줄 안서고 빨리 들어가게 해 주겠다'거나, 특히 교황이 직접 주관하는 미사 티켓이라며 정체불명의 티켓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 사기니 절대 구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46][47]

5. 유사품(?)

크고 아름다운 규모와 세계구급 유명세에 걸맞게 성 베드로 대성당의 외관을 베낀본뜬 성당이 여럿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1801년부터 1811년까지 10년에 걸쳐 세워진 러시아 정교회상트페테르부르크카잔 대성당(Каза́нский кафедра́льный собо́р), 1875년부터 1894년까지 19년간 건설된 캐나다 퀘벡의 마리 렌 뒤 몽드 대성당(Cathedrale Marie-Reine-du-Monde)[48], 1985년부터 1989년까지 4년 동안 지어진 코트디부아르 야무수크로의 평화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이외에도 대한민국 울산광역시 선암호수공원에 있는 초미니 종교시설 중 '성 베드로 기도방'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축소해 2011년 10월 4일에 세워졌다. 최고높이 3.4m, 너비 1.4m, 길이 3.5m, 면적 4.8㎡의 아담한(...) 규모로 겉보기에는 미니어처와 다를 게 없으나 내부에는 성모 마리아 성상이 있고 성인 1~2명이 기도할 수 있는 엄연한 성당이다. 성 베드로 기도방은 바로 옆에 자리한 사찰 '안민사' 및 교회 '호수교회'와 함께 한국기록원으로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종교시설로 인증받았다. 사진

6. 기타

여담으로 로마 교구의 주교좌 성당은 여기가 아니고, 로마 시내에 있는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따라서 사실 가톨릭의 가장 으뜸가는 성당은 라테라노 대성당이 맞다. 이는 라테라노 대성당이 '모든 성당의 어머니'라는 위치를 차지한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으며, 유일무이한 교황좌 역시 라테라노 대성당에 있다.

다만 이제는 교황궁이 더이상 라테라노가 아닌 바티칸에 있으며, 따라서 교황의 주요한 업무나 미사, 전례는 모두 이곳에서 거행된다. 이에 따라 일반인들의 인식 역시 이곳이 라테라노 대성당을 포함한 로마 4대 대성전 중에서도 넘사벽의 인지를 갖추게 된 것이다.

바티칸의 최고 수입원이자 동시에 최대 지출 요인. 관광 수입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 들이지만 그 이상의 돈이 미술품 및 건물 보수에 지출된다(…). 사진에서 성당에 도배를 하다시피 그려진 그림들부터 살펴봐도 하나같이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걸작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모자이크 작품의 경우 벽에 박힌 돌이나 유리가 떨어지면 동일한 자재로 같은 자리에 다시 붙이는 작업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해야 한다. 이는 베네딕토 16세 이후 바티칸 재정의 악화 요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로마에 있는 4대 대성당과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을 포함한 5개의 성당들은 고대 기독교 세계의 5대 총대주교 관구(Pentarchy)들과 각각 연계되어 로마가 다섯 개의 총대주교 관구들 가운데서도 그 정점에 있음을 나타냈는데, 성 베드로 대성당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연계되었다.

스페인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젊은 시절인 1770년에 로마를 여행했을 때,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꼭대기까지 장비 없이 맨몸으로 올라갔다는 일화가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거행한 교황 요한 23세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시성식, 2014년 4월 27일
어떤 사람을 복자성인의 반열에 올리는 시복식, 시성식이 거행되는 곳이다. 시복식은 반드시 이곳이 아니더라도 다른 장소에서 거행할 수 있지만, 시성식은 교황이 직접 주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만 거행하는 것이 수 세기 동안 이어진 원칙이었다. 아비뇽 유수 때를 제외하고 이 원칙을 깬 거의 유일한 예외는 바로 1984년에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한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시성식이다. 당시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는 교황 방한에 맞춰 시성식을 한국에서 열 수 없겠느냐고 교황청 시성성과 협의했지만, 시성성은 한국 103위 순교복자 시성에 매우 협조적이었음에도 '성 베드로 대성당 이외의 장소에서 시성식이 열릴 경우 다른 지역 교회와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그 상징성이 퇴색할 수 있다'며 시성성 명의로 허가했을 때 혹여 전례로 남아 나중에 말썽이 되지는 않을까 우려해 반대했다.

그런데 시성성의 입장과 상관없이 교황이 친히 내린 결정으로 사안이 해결되면서 '한국에서 거행된 시성식은 어디까지나 1984년 교황 방한 때의 부대 행사이지 주된 행사가 아니고, 시성성의 동의 없이 교황의 의지로 관철한 극히 예외적인 사례이므로 이는 시성식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대한 변경이 아니며, 다른 교회가 한국 교회를 전례로 들어 자국에서 시성식을 거행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구조가 정립되었다. 실제로 시성성 장관 피에트로 팔라치니 추기경(Pietro Palazzini, 1912.5.19~2000.10.11)과 차관 트라이안 크리산 대주교(Traian Crișan, 1918.5.21~1990.11.6), 차관보 파비얀 페라야 주교(Fabijan Veraja, 1923.1.20~2014.10.28)는 한국에서 열린 시성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몇몇 시성청원인이 바티칸 이외의 지역에서도 시성식이 가능한지 문의했을 때 시성성에서는 예외는 한 번뿐'''이며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2013년 2월 1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2월 28일에 퇴위한다고 밝혀 전세계 여론이 바티칸으로 집중된 가운데, 퇴위 발표 직후 성 베드로 대성당 돔 채광 정탑에 벼락(...)이 치는 장면이 촬영되어 화제를 모았다.(기사, 사진).

7. 대중 매체

이 건물 자체가 바티칸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니, 천사와 악마처럼 교황청을 무대로 한 작품에선 반드시 등장한다. 또한 콜로세움 등과 함께 로마 시내의 주요 랜드마크 중 하나이기도 해서 로마 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편.

찰턴 헤스턴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로 등장한 영화 <고통과 환희>(1965년)에서는 새로 지어지기 전의 옛 성당 건물이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영화 2012에서는 성당이 지진 때문에 통째로 무너져서 [49]돔이 굴러가며 베드로 광장의 사람들을 깔아뭉개(!)버린다. 물론 성당에 있던 교황과 추기경단은그리고 성당 앞 광장에서 기도드리던 이탈리아 대통령까지 모두 사망.(...)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도 주인공 안토니오 꼬레아가 상사의 명을 받고 이곳의 건축에 쓸 유리를 납품하는 임무를 맡는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입찰을 따내고 승진하는 계기가 된다.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에서는 로마 정교의 본거지로 등장하는데, 우방의 피암마를 막기 위한 로마 교황의 술식이 깨지면서 박살나고 말았다.성당이 죽었음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 2에서는 마지막 미션의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에치오 아우디토레로드리고 보르지아를 암살하기 위해 향한다. 그러나 여기는 알고보니 먼저 온 자들의 창고가 있는 곳이었고, 선지자였던 에치오만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만난 미네르바는 에치오를 통해서 미래의 데스몬드 마일즈에게 앞으로 닥칠 위험을 경고한다.

후속작 어쌔신 크리드 : 브라더후드에는 게임 내에서 보르지아 가문을 필두로 한 교황청 세력의 하수인인 '로물루스의 추종자들'의 소굴로 등장한다. 게임을 하면서 바티칸 영역을 가볼 기회는 꽤 있지만 성 베드로 대성당을 갈 수 있는 건 이 소굴을 통해서 뿐. 하지만 공사가 막 실시될 즈음인 1500년대 초반이라는 시기상, 공사중이기에 웅장한 모습은 잘 볼 수가 없다. 들어가면 보르지아 가문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추기경을 잡기 위해 한창 공사 중인 성당 내부를 뛰어다니게 된다.(...) 시작은 추기경들이 미사를 보는 교회당인데, 여기도 나무로 막아놓은 벽들이나 공사 현장을 가리기 위한 천들 등 공사의 흔적이 곳곳에 존재한다. 물론 추격과 파쿠르 위주의 진행이기에 그것을 위한 지지대나 발판이 즐비해 있을 뿐, 맨 처음 장소를 제외하고는 성당 본면의 느낌은 거의 없는 상태. 곳곳에 인부들이 위치해있어, 주변으로 뛰어가면 놀라서 연장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마지막에 추기경을 쓰러뜨리고는 꼭대기에서 아래쪽 호수로 다이빙(...). 교회 지하에 이단의 보물 '로물루스 추종자들의 두루마리'가 있다는 게 유머.

무흐테솀 유즈이을에서는 1500년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나온다. 여기서는 쉴레이만 1세오스만 제국을 방해하는 악의 소굴(...)인것 마냥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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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걸 만들기 위해서 교황 우르바노 8세가 판테온 현관의 청동판을 모조리 벗겨내도록 명령했는데, 당시 로마 시민들은 "Quod non fecerunt barbari fecerunt Barberini(바르바로이(야만인)도 하지 않은 짓을 바르베리니(우르바노 8세의 가문)가 한다)"며 비꼬았다. 라임 돋네 그렇지만 판테온에서 뜯어온 청동교황청 성채인 카스텔 산탄젤로에 배치할 대포 주조에 사용되었으며, 발다키노에 소요된 청동베네치아에서 들여왔다는 주장도 있다.
  • [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 [3]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 [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 [5]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 [6] 자주색(보라색)은 로마 제국 시대에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귀한 색깔이었다.
  • [7]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5세가 로마를 비운 상황이라 추기경들이 교황을 대신해 대관식을 거행했다.
  • [8] 인노첸시오 6세를 대신해 대관식 거행.
  • [9] 율리오 2세, 라파엘로 산치오, 1511~1512년, 목판에 유채, 108 × 80.7cm,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 [10]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 라파엘로 산치오, 1518~1519년, 154 × 119cm, 목판에 유채,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11]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게 바티칸과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주문하는 교황 율리오 2세, 에밀 장 오라스 베르네, 1827년,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 [12] 1527년 로마 약탈, 요하네스 린겔바흐, 17세기, 캔버스에 유채
  • [13] 클레멘스 7세,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1526년경, 캔버스에 유채, 145 × 110cm, 이탈리아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
  • [14] 바오로 3세, 티치아노 베첼리오, 1543년경, 캔버스에 유채, 113.7 × 88.8cm, 이탈리아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
  • [15] 안토니오 다 상갈로, 1539~1546년, 목재, 736 × 602 × 468cm ,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 [16] 교황 비오 4세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모형을 보여주는 미켈란젤로, 도메니코 크레스티, 1618~1619년, 캔버스에 유채, 236 x 141cm, 이탈리아 피렌체 카사 부오나로티
  • [17] 미켈란젤로의 작업장을 방문한 교황 바오로 3세 파르네제, 페테르 리티쉬, 1834년, 캔버스에 유채, 190 x 138cm
  • [18] 비오 5세, 엘 그레코, 1605년경,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 [19] 그레고리오 13세, 라비니아 폰타나, 캔버스에 유채, 116.5 × 97.5cm, 개인 소장
  • [20] 바오로 5세,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1505~1506년경, 캔버스에 유채, 203 × 119cm, 이탈리아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 [21] 그레고리오 15세, 조반니 프란체스코 바르비에리, 1622~1623년경, 캔버스에 유채, 133.4 × 97.8cm, 미국 로스앤젤레스 장 폴 게티 미술관
  • [22] 우르바노 8세,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1624~1627년경, 캔버스에 유채, 199 × 128 cm, 이탈리아 로마 카피톨리니 미술관
  • [23] 인노첸시오 10세, 디에고 벨라스케스, 1650년경, 캔버스에 유채, 141 × 119 cm, 이탈리아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 [24] 알렉산데르 7세,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1667년경, 캔버스에 유채, 90.1 x 76.7 cm, 이탈리아 로마
  • [25] 클레멘스 9세, 카를로 마라타, 1669년, 캔버스에 유채, 158 x 119 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 [26] 클레멘스 10세,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51.3 × 43cm, 캔버스에 유채, 73.5 × 59.5 cm, 바티칸, 주바티칸 영국대사관
  • [27]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
  • [28] 이 오벨리스크를 고대 이집트인들이 만들었다고 잘못 알았기 때문에 나온 말. 로마 총독이 로마 황제의 명을 받들어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기록한 라틴어 명문을 후대에 덮어버렸기 때문에 잊혀져 버렸다. 실은 로마 총독이 만들었음은 현대에 들어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 [29] 이 구절은 13세기 초, 프란치스코회의 초기인물인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가 만든 기도문이다. 가톨릭 엑소시즘에서도 십자가를 내보이며 읊는 기도문으로도 사용한다.
  • [30]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
  • [31] 실제로 성 요한 23세가 선출된 1958년 콘클라베 때 젖은 짚이 제대로 연소되지 않으면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
  • [32]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성유물로 봉안되어 있다가 357년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명령으로 그리스 파트라이로 옮겨졌다. 오스만 제국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자 콘스탄티노스 11세 황제의 동생이자 모레아의 전제군주였던 토마스 팔라이올로고스는 1461년 로마로 망명하면서 두개골을 챙겨 교황 비오 2세에게 선사했다. 그때부터 줄곧 성 베드로 대성당에 모셔졌던 두개골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정교회와의 공존과 화해를 위해 그리스 파트라이로 반환해 500년만에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 [33] 과거 지중해를 항해하던 선원들은 폭풍우가 칠 때 마스트 꼭대기에서 반짝거리는 불꽃을 보고 '성 에라스모의 불'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 나오는 성 에라스모가 바로 이 사람이다.
  • [34] Servus servorum Dei.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스스로를 '세계총대주교'라고 지칭했을 때 그레고리오 1세가 사용한 칭호. 교황에게 덧붙여지는 여러 가지 칭호들 가운데서 후대의 교황들이 자주 애용했다.
  • [35]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방문한 말시오르 드 폴리냑 추기경, 조반니 파올로 판니니, 1754년 이후, 캔버스에 유채, 150 x 225cm,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 [36]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필리포 델라 발레, 1754년, 대리석,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 [37] 웨스트민스터 사원 항목에도 적혀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Westminster Cathedral로 웨스트민스터 대성당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지하철로 두 정거장 떨어져 있다.
  • [38] 요한 바오로 2세의 유해는 교황의 시복을 기념해 2011년 5월 3일 지하에서 올라와 대성당 내부의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으로 이장되었다.
  • [39]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 [40] 정교회, 가톨릭
  • [41] 오푸스 데이의 설립자.
  • [42] 운 좋으면 교황 성하가 직접 봉헌한다.
  • [43] 이런 복장 규제는 유럽의 다른 유서깊은 성당들에서도 실시하고 있다.
  • [44] 사실 꼭 성 베드로 대성당을 포함한 유럽의 다른 오래된 성당이 아니라도, 성당에 들어갈 때 단정한 복장을 갖추는 것은 기본적인 예절이다.
  • [45] 민소매나 탱크톱 상의의 경우 카디건 등 노출을 가릴 수 있는 별도의 겉옷을 준비해서 입으면 입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 [46] JTBC의 한 여행 프로그램에 따르면, 애초에 교황이 직접 주관하는 미사는 인터넷을 통해 사전 예약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무료로 참례할 수 있다고 한다. 해당 방송 제작진도 멋모르고 구입했다가 이걸 본 성당측 관계자들이 대번에 이건 사기라고 했고, 막판에는 현지 경찰까지 출동하기에 이르렀다.
  • [47] 베드로 대성당 뿐만 아니라 로마 시내의 모든 성당은 바티칸이 직접 관리하며, 일단 들어간 이후에 내부의 사적에 대한 입장료를 받는 경우는 있지만 성당 자체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료는 없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요구하는 경우 무조건 사기이니 속지 않도록 하자.
  • [48] 이쪽은 아예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절반 크기로 축소해 지은 건물이다. 사진
  • [49] 이 장면에서 지진으로 성당 벽화들이 갈라질 때 <아담의 창조> 그림에서 하느님과 아담의 맞닿은 손가락에 균열이 일어나며 갈라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인간을 상징하는 연출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