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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last modified: 2019-08-29 19:32:21 Contributors

Contents

1. 宣宗
1.1. 고려 선종 왕운
1.1.1. 황금기의 지속기
1.1.2. 유교와 불교를 발전시키다
1.1.3. 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
1.1.3.1. 거란과의 관계
1.1.3.2. 송과의 관계
1.1.4. 사후
1.1.5. 기타
1.2. 조선 선조가 처음에 받은 묘호
1.3. 당나라 선종 이침
1.4. 금 선종 완안오도보/완안순
1.5. 명 선덕제 주첨기
1.6. 청 도광제 아이신기오로 민닝
2. 禪宗
2.1. 선종의 교파
2.2. 일본 선종
3. 善終
4. 腺腫
5. 善宗

1. 宣宗

1.1. 고려 선종 왕운

고려의 역대 국왕
12대 순종 왕훈 13대 선종 왕운 14대 헌종 왕욱

묘호 선종(宣宗)
시호 관인현순안성사효대왕
(寬仁顯順安成思孝大王)
왕(王)
운(運)
계천(繼天)
배우자 정신현비(貞信賢妃)[1], 사숙왕후(思肅王后)
아버지 왕휘(王徽)
어머니 인예왕후(仁睿王后)
생몰년도 음력 1049년 9월 10일 ~ 1094년 5월 2일
양력 1049년 10월 9일 ~ 1094년 6월 17일 (46세)
재위기간 음력 1083년 10월 24일 ~ 1094년 5월 2일
양력 1083년 12월 6일 ~ 1094년 6월 17일 (11년)

고려의 제 13대 왕.

고려의 황금기를 연 명군 문종의 둘째 아들이다. 형 순종이 1083년에 왕위에 오른지 3개월 만에 죽자 왕위를 계승했다. 사실 즉위하기 전에 아버지와 형님까지 줄초상 치르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어찌보면 다소 얼떨떨한 상황에서 보위에 올랐다. 이름도 이잖어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재위 기간 내내 무난하게 왕위를 다스린 걸 보면 능력은 출중했던 듯 싶다.

1.1.1. 황금기의 지속기

이 시대는 큰 변화보다는 기존의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보는 게 좋은데 전임 군주들인 현종에서 부왕 문종에 이르기까지 명군들이 줄줄이 왕위를 계승해 가며 워낙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갔기 때문에 굳이 새로운 일을 벌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탓인지 선종의 재위기간도 별 큰 사건 없이 태평성대가 계속되었다. 다만 재위 초반엔 가뭄이, 중간에 한파와 같은 기상이변이 문제가 됐다. 역으로 기상이변 말고 문제가 될 게 없었다는 것.

1.1.2. 유교와 불교를 발전시키다

이 시대의 특이사항은 문종의 넷째 아들이자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이 활약하기 시작하여 불교문화가 크게 발전했는 점이다. 이미 국가 시스템은 이미 선왕 11대 문종 때 거의 다 완성된 터라, 대각국사 의천을 중심으로 불교의 계파인 교종, 선종을 통합하는 종교통합사업 천태종 사업을 주도했다. 이는 제도가 완비된 조선 성종 시대 전국 곳곳에 유교 장려 정책을 펼친 것과 유사하다 볼 수 있다. 제도가 다 갖춰졌으니 사상 통일.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왕실이 화엄종&천태종을 밀어줬지만 지방세력들과 다른 승려들은 귀족 중심의 정치를 이루기 위해 법상종을 밀어줬기 때문. 더더군다나 천태종은 백성들을 끌어들이지 못한데다 이후 조계종이 갈라져 나가기까지 한다. 결정적으로 의천이 죽자 천태종이 쇠퇴해서 망했어요.

선종 본인도 불교에 심취해 있었는데 본인이 아픈 와중에 부처님 곁으로 가고싶다는 시를 쓰기도 했다.

是月 王憂勞萬機 頗覺不豫 移御文德殿 命內醫進養性方藥。忽有感 作古風長篇 其末云 藥效得否何敢慮 浮生有始豈無終 唯應愿切修諸善 淨域超昇禮梵雄。王春秋鼎盛 而有此作 見者驚恠。
○ 이 달에 왕이 정무로 인한 과로로 몸의 이상을 느끼고 문덕전으로 처소를 옮긴 다음 내의를 시켜 양성방약(養性方藥)을 바치게 했다. 이때 왕 자신의 소회를 장편 고시로 읊었는데 그 뒷 연은 이러했다.

“약효야 있든 없든 무엇을 걱정하리(藥效得否何敢慮)
뜬 구름 같은 삶, 태어남이 있으니 어찌 죽음이 없으리.(浮生有始豈無終)
다만 간절히 바라노니 많은 선근 쌓아서(唯應愿切修諸善)
서방 정토로 올라가 부처님 뵈오리.(淨域超昇禮梵雄)”

왕의 나이가 한창인데도 이런 시를 지으니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고려사》선종 9년 3월 병진일 기사

그러나 선종이 불교만 장려한 것은 아니다. 선종은 국학에 공자의 제자 안회(안자)를 비롯한 72현의 상을 그린 벽화를 만들었으며, 72현에 대하여 제사를 올렸다. 절차는 송나라의 국자감의 것을 본받고, 복장은 중국 십철을 본받았는데 이는 고려 유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것이다. 이로서 유학은 하나의 통치철학에서 불교와 같은 종교적 반열로 서로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의 치세에는 고려가 불교에만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통치 이념인 유교와 균형을 이루며 서로 발전해 갈 수 있었다.

1.1.3. 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

1.1.3.1. 거란과의 관계

문화 뿐 아니라 주변 국가들인 거란, , 여진, 일본과의 활발한 교역으로 나라 재정도 튼실해졌다. 그만큼 국력도 강해져 거란에 대해서도 외교 면에서 당당한 자세를 견지했다. 그 증거라 할 만한 사례로 선종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다가 생일날에 도착하지 못하고 늦게 온 거란 사신을 대놓고 놀리는 장면도 있다. #.

10일. 왕이 친히 순종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요나라에서 어사중승(御史中丞) 이가급(李可及)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게 했는데,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하자 사람들이, "사신의 이름은 가급(可及. 가히 이를 만함)인데 어찌하여 불급(不及. 이르지 못함)이 되었는가?"라고 조롱했다. - 《고려사》선종 2년(1085) 9월 10일 기사
 
9월 요가 사신을 보내와 생일을 하례하였다. 사신 이가급(李可及)이 왔으나 기일에 닿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조롱하기를, "사신의 이름은 가급(可及)인데 어찌 불급(不及)했는가?" 하였다. -《동사강목》선종 2년

거란이 압록강에 시장을 설치하려 하자 서희 때의 담판을 근거로 무산시키고 사과의 답례품을 받아내기도 했다. 일본과의 교역은 1084년 이후에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1.3.2. 송과의 관계

문종대에 송나라와 수교한 후 고려의 국력이 급격하게 상승해서 송나라와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대부분 송나라가 좀 안습한 에피소드다.(...)

원우(元祐) 5년 2월 17일에 왕백호(王伯虎) 병(炳)을 만났더니 그는 말하기를, “옛날에 추밀원(樞密院)예방(禮房)검상문자(檢詳文字)로 있을 때 비로소 고려 공안(高麗公案)을 보았는데, 처음에 장성일(張誠一)이 거란 이야기를 하면서 거란의 군막 속에 고려 사람이 있어 자기 나라 임금이 중국을 사모하고 있다는 뜻을 말하더라고 하는 말을 듣고 돌아와 이를 황제에게 아뢰었더니,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비로소 고려 사신을 불러볼 뜻을 갖게 되었다. 추밀사(樞密使) 이공필(李公弼)이 뜻에 맞추어 친필로 문서를 황제에게 올려 고려 사신을 부르자고 청하여, 드디어 발운사(發運使) 최극(崔極)에게 명령하여 상인을 보내어 부르게 했다. 세상에서는 최극의 그른 것을 알면서도 공필의 잘못은 모르고 있으며 장성일 같은 자는 족히 이야기할 것도 없겠다.” 하였다.
“회동제거(淮東提擧) 황실(黃實)의 말로는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의 이야기로서, 보낸 선물 중에는 가짜 금은(金銀) 알이 있었는데, 고려인들은 모조리 깨뜨려 알맹이까지 쪼개보니 사신들은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때 고려 사람들은, ‘감히 우리가 오만한 것이 아니라, 혹시 거란 사람들이 보고 진짜로 여길까봐 걱정스러워서 그러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고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보낸 선물을 거란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이 일을 상세히 알지 못하고는 말하기를, 거란이 고려가 우리에게 내통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고, 더러는 다른 기회에 고려로써 거란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니, 이 어찌 틀린 것이 아니랴.” 하였다. - 《동란섭필(銅蘭涉筆)》

송나라가 보내준 선물이 의심스러워서 송나라 사신 앞에서 금은알을 모조리 다 깨버리는 짓을 저질렀는데 송나라에선 "고려 놈들이 거란과 내통하는 게 아니냐"며 끙끙 앓기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원우(元祐) 7년(1092년)에 (고려가) 황종각(黃宗慤)을 보내와 《황제침경(黃帝鍼經)》을 바치면서 구입해 가겠다는 서적이 매우 많았다. 예부상서 소식이 "맥적(貊狄)[2]이 들어와 조공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송나라에)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만 있습니다. (첫째 돈이 너무 많이 들며, 둘째 백성이 힘들며, 셋째 고려가 받아간 문물들을 거란에 넘기고, 넷째 고려가 예의는 고사하고 실리만 챙겨가는데다 송의 허점을 탐구하며, 다섯째 고려와의 관계가 거란이 트집잡을 거리가 된다.) 지금 요청한 서책과 수매해 가는 금박(金箔) 등은 모두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아뢰니, 조칙을 내려 금박만을 사서 (고려로) 가져가도록 했다. 그러나 끝내 책을 사지말라는 송 황제의 말을 씹고 《책부원귀(冊府元龜)》[3]도 구입하여 귀국했다. - 《송서》 외국열전 고려전

위의 얘기를 풀어보면, 고려의 사신이 송나라에 가서 "책을 포함해서 이것저것 살께요"라고했다. 그러자 송나라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시인면 고려를 굉장히 싫어하던 소동파가 "고려 저 오랑캐 놈들이랑 교역하면 우리만 손햅니다. 저 무식한 놈들이 우리 것을 사가서 똑똑해지면 우리에게 얻는 이익이 뭡니까? 저 새퀴들 달라는거 절대 주지 마세요." 라는 이야기로 엄청나게 딴지를 걸었다. 하지만 당시 송나라는 요나라의 성장으로 압박이 심했고 그 때문에 요나라가 (군사적인 압박이든 정치적인 압박이든)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고려와 손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송나라는 고려의 요구를 웬만하면 다 받아주는 상황이었고, 위의 사건때 제대로 대처 못한것 뿐 아니라 후에 의천대사가 불교를 배우기 위해 송나라를 방문했을때 고려를 싫어했던 소동파는 고려의 왕족이자 스님인 의천대사의 개인 가이드 노릇까지 해야했다.(...)

1.1.4. 사후

五月 壬寅 王薨于延英殿內寢 卽日遷殯于宣德殿。壽四十六 在位十一年。 謚曰思孝 廟號宣宗 葬于城東 陵曰仁陵 仁宗十八年 加謚寬仁 高宗四十年 加顯順。
5월 임인일. 왕이 연영전의 침소에서 죽자 그 날로 시신을 선덕전(宣德殿)으로 옮겼다. 향년 46세로 11년 동안 재위했다. 시호를 사효(思孝)라 하고 묘호를 선종(宣宗)이라 했으며 성의 동쪽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인릉(仁陵)이라고 했다. 인종 18년에는 관인(寬仁)을, 고종 40년에는 현순(顯順)이라는 시호를 덧붙였다.

번영한 나라를 큰 사변 없이 잘 이끌어 나가다가 1094년 5월에 병사. 향년 46세였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고려 왕실에는 한 차례 피바람이 불게 된다. (헌종,숙종 항목 참조.) 근데 그도 책임이 부분적으론 있는 게, 후궁 원신궁주의 오빠 이자의[4]가 원신궁주의 아들 한산후 왕윤을 밀면서 숙종(당시 수태보 왕희(왕옹))과 대립했기 때문. 이거 뭔가 문종 필이 난다? 근데 아빠가 문종이잖아

1.1.5. 기타

찬이슬에 가을 바람 불어오니(露冷風高秋)
이 맑은 밤 달은 밝구나.(夜淸月華明)
피향전(披香殿)은 이제 삼경이 되려는데(披香殿裏欲三更)
노래 소리 아직도 요란쿠나.(沸歌聲擾擾)
인생은 모두가 허깨비 같으니(人生都似幻)
부귀영화 탐내지 마라.(莫貪榮)
좋은 술 금잔에 가득부어(好將美醁滿金觥)
기쁨을 나누는 게 좋으리.(暢懽情)
-『하성조사(賀聖朝詞)』
 
시를 쓰기 좋아한 왕인 듯하다. 위에 아픈 와중에도 부처님 찾은 시뿐 아니라 선종 6년인 1089년 9월 정축일에 요나라 사신을 맞이한 잔치에서 지은 『하성조사(賀聖朝詞)』가 있다.

1.2. 조선 선조가 처음에 받은 묘호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가 처음에 받은 묘호. 임진왜란 극복의 공이 있다는 이유로 조(祖)로 격상되었다.이게 무슨 소리야!

1.3. 당나라 선종 이침

당나라의 제 16대 황제. 항목 참조.

1.4. 금 선종 완안오도보/완안순

금나라의 제8대 황제의 묘호. 금선종 항목 참조.

1.5. 명 선덕제 주첨기

명나라의 제5대 황제 선덕제의 묘호.

1.6. 청 도광제 아이신기오로 민닝

청나라의 제8대 황제 도광제의 묘호.

2. 禪宗

중국에 온 서역승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된 불교의 종파. 선종 내에서는 인도에서 법맥이 이어져 중국에 전래됐다고 보지만, 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이 많다. 자세한 것은 달마 항목 참조. 선종은 이후 6대 조 혜능에 의해 발전하였다.

선종은 종파 면에서는 대승 불교의 한 갈래로 분류되며, 대승불교와 같이 '불성(佛性)'을 중요시한다. 초기불교에서는 불성을 찾는 것이 절대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초기불교에서 그나마 불성에 가장 가까운 개념은 '열반으로 가는 데 필요한 순수한 마음' 정도가 전부라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불성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한 것이지, 특정한 존재론적 개념을 상정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인도 불교에서 별 인기가 없던 불성 개념이 동아시아 등지에서 크게 확산된 데 기여한 경전은 법화경이라고 한다.

선종은 수행법도 후대에 생겨난 몇 가지(임제종의 화두수행 등)를 제외하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심념처 수행을 기반으로 하는 등 여러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한국 선종의 대표인 조계종에서도 대승불교의 경전인 금강경을 소의경전(근본경전)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심전심,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로는 도를 설명할 수 없다는 뜻), 견성오도(見性悟道, 진리는 스스로 사색하여 개인적인 심적 체험을 통해 깨닫는 것이라는 뜻)를 중심 가르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종과 비교되며, 그래서 참선과 수행을 중심으로 한다. 사실 등장부터 수행과 직관을 중시하는 것이 도교 등 타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으며, '염화미소'라는 유명한 선종의 일화가 등장한 경전<대범천왕문불결의경>은 위경이라는 설이 주류인 등 교종 계통의 불교와 많은 배치점을 보여 성향에 따른 분류에서는 교종과 따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불교는 힌두교 등과 함께 인도 계통 종교로 묶이나 선종만은 따로 도교 등과 함께 도 계통 종교로 엮인다.

한국사에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후 도의선사에 의해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종 전체로 봤을 때 제일 먼저 들어온 시기는 서기 8세기 후반에 신행대사가 단계적 깨달음을 중시하는 북종선을 들여온 것이 최초다.(도의선사는 우리가 잘 아는 돈오=즉각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남종선을 들여왔다.)

선종이 들어오던 서기 820년대, 이 시기는 한국사의 3대 반란으로 칭해질 만큼 기세가 무시무시했던 그 유명한 김헌창의 난이 일어났던 시기고 그 규모는 신라 9주중 4주를 점령할 만큼 막강했으나 상당히 빨리 진압된다. 거기다가 일부 주에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공로로 7년간 면세(이 단어를 강조하는 이유는 890년 이후에 일개 지방의 독립선언도 못 막는 안습한 상황과 너무 대비되기 때문이다.)의 혜택을 주었을 정도다. 그 정도로 이 시기까지만 해도 신라 정부의 여력이 충분하고 권위도 있었기 때문에 민중들 입장에서도 권위에 의지하지 말라는 선종의 가르침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북종선은 말할 필요도 없이 더 주목받지 못했다.

때문에 도입되던 당시에는 선종이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라 말기인 서기 890년대 이후, 흔히 말하는 국가 막장 테크 시기에 9산 선문이 호족들의 지원을 받고 성장하면서 보편화되었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신라 정부는 선종과의 제휴를 시도했다. 이유는 선종을 통해서 떨어지는 권위를 다시 세우려고. 물론 호족의 지원이 더 커서 선종 측은 이를 거절했다. 일본에는 남송을 통해 12세기경 유입되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가톨릭 교회의 라틴어 성경에 질린 평민 신도들이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성서에 폭발적으로 반응한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간단하게 말해 원효대사의 정토종보다도 파격적인 효과를 불러온다. 그 때문인지 '무식한' 호족과 무신정권기의 무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이 표현은 조금 비약이긴하다. 교종은 본래 문벌귀족 사회와 연결되어 있었기에 무신정권으로 문벌귀족 사회가 무너지자 이들을 지원했으며 심지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때문에 최충헌 시기 지눌과 같은 승려가 무신정권의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고 한다.

호족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선종을 지원할 경우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쉬웠다는 점, 그리고 교리가 그들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선종은 교종과 달리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일종의 열린 교리를 내세웠는데, 이를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면 도 누구나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당연히 이는 풍수지리와 함께 자신들의 봉기를 정당화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반면 교종(특히 화엄종)은 권위를 강조하기 때문에 현 신분제도를 정당화 하는 경향이 커서 왕실과 귀족사회에서 인기를 끌었다.

고려 중반기가 되면 교종과 선종을 합치려는 노력이 자주 일어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왕족 출신의 의천이 만든 천태종(교종 중심의 통합)과 지눌 국사의 조계종(선종 중심의 통합)이다. 지금의 한국 불교는 조계종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교종보다는 선종에 가까운 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교단의 완전한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티벳불교을 거쳐 들어와 불교계의 사치가 심해진다. 경천사 10층 석탑이나 다포식 건물의 화려한 장식은 이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자 보우가 남아있던 9산 선문의 전통을 임제종의 이름 아래 통합하려 했으나 좌절되었다.

다만, 교종과 선종이란 표현은 조선 세종 때에 와서야 보편화된 것이다. 화엄종, 법상종을 비롯한 경전을 중시하는 4개 종파는 교종으로, 나머지는 선종으로 분류되었다. 신기한건 천태종이 선종에 들어갔다. 천태종은 크게 분류하면 교종이고 정확히 분류하자면 밀교가 많이 포함된 교종이다.

수행 방법에 따라 묵조선과 간화선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묵조선은 좌선을 중심으로 하며, 당장 깨달음을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마음 속에 내재된 자성에 모든 것을 의지하는 방식이며, 조동종 쪽의 수행법이다. 반면 간화선은 특정한 하나의 화두(話頭)에 대한 강한 의심을 통해 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며, 임제종의 방식이다. 한국의 선종은 대부분 임제종의 영향을 받아 화두 수행을 하는 곳이 많다.

베트남에서도 선종이 전해지는데, 중국 선종의 3대 조사 승찬과 함께 수행하던 인도 승려 비니타루치(Vinitaruci)가 베트남에 선종을 처음 전파했다고 한다.

2.1. 선종의 교파

  • 북종선 - 현재는 대가 끊겼다.(...) 점진적인 깨달음을 중시한다.
  • 남종선 - 순간적인 깨달음을 중시한다. 현재 남아있는 선종은 전부 남종선 계열.
    • 위앙종
    • 임제종 - 이른바 '간화선(看話禪)을 중시하는 종파, 현대 한국의 조계종도 이쪽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일본에도 임제종 종파가 있긴 하나 조동종에 비해서는 2인자 취급.
      • 황룡파
      • 양기파
    • 조동종 - 일본에서 가장 큰 선종 종파이기도 하다. 또한 티벳불교와 함께 서구권에 가장 먼저 들어간 불교도 이 일본식 조동종이다.
    • 운문종
    • 법안종
  • 우두선 - 우두법융(牛頭法融) 선사로부터 비롯된 교파. 교리나 수행법 면에서는 대승불교의 중관학파의 것과 크게 차이가 없다. 당나라 초기에 대가 끊겼다.

2.2. 일본 선종

일본의 선종의 경우 가마쿠라 시대에 도겐(道元) 등에 의해 중국에서 들어오면서 불교의 한 종파로써 크게 융성하였다. 한국과 달리 묵조선이 주류인 점도 특징. 특이한 점은 일본의 선종이 건축(예:긴카쿠지), 가레산스이 정원 등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 크게 영향을 줬다는 점이다. 인테리어 등에서 말하는 젠 스타일Zen style의 젠이 선종의 선이다.

3. 善終

가톨릭에서 임종 때에 병자성사를 받아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일. '착하게 살고 복되게 생을 마친다'는 뜻을 가진 선생복종(善生福終)에서 유래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 선종'이나 '김수환 추기경 선종' 등의 기사를 통해 이 단어를 접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4. 腺腫

위, 장관, 젖샘, 침샘 등 분비선이 많이 분포돼 있는 상피조직에서 주로 발생하는 혹.

양성종양이지만 그냥 놔두면 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수술로 제거하면 치료되기 때문에, 만약 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 이게 나왔다면 지체하지 말고 제거해버리자.

5. 善宗

자칭 신 땡초궁예의 법명. 옛 기록에는 궁예란 표현보다 이 이름으로 서술된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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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선종의 1비지만 혼인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기 때문에 서열에 비해 품계가 낮은 것으로 추정된다.
  • [2] 고려를 비하하는 말.
  • [3] 책부원귀라는 책은 《책부원구》라고도 하는데 북송(北宋)의 왕흠약(王欽若), 양억(楊億) 등이 송진종의 명을 받들어 1005년에 편집에 착수, 1013년에 완성한 책. 총 1000권으로 구성되어있으며 후에 편찬되는 《삼국사기》에도 인용되는 서적이다. 이때 황제 말대로 책을 안사갔다면 지금의 삼국사기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 [4] 사숙왕후와 이자겸의 사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