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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last modified: 2015-11-08 06:09:13 Contributors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올스타 베스트10
선동열
(투수)
이만수
(포수)
장종훈
(1루수)
박정태
(2루수)
김재박
(유격수)
한대화
(3루수)
양준혁, 이순철, 장효조
(외야수)
김기태
(지명타자)

선수 시절 모습 18+11=29
다시는 볼 수 없는 KIA 타이거즈 각동님 감독 시절

KIA 타이거즈 영구결번
No.18

이름 선동열(宣銅烈)
국적 대한민국
생년월일 1963년 1월 10일
출신지 광주광역시 광산구[1]
학력 송정동초-무등중-광주일고-고려대
포지션 투수가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5년 1차지명 3순위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5~1995)
주니치 드래곤즈 (1996~1999)
지도자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 (2004)[2]
삼성 라이온즈 감독 (2005~2010)
KIA 타이거즈 감독 (2012~2014.10)
LG 트윈스 감독 (2013.7.19)[3]
응원가 Jimmy Davis & Charles Mitchell - 'You are my sunshine'[4]
종교 천주교 (세례명 타데오)[5]

역대 감독 전적
년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2005 삼성 라이온즈 126 74 48 4 1위 우승
2006 126 73 50 3 1위 우승
2007 126 62 60 4 4위 4위
2008 126 65 61 0 4위 4위[6]
2009 133 64 69 0 5위 -
2010 133 79 52 2 2위 준우승
통산 770 417 340 13
년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2012 KIA 타이거즈 133 62 65 6 5위 -
2013 128 51 74 3 8위 -
2014 128 54 74 0 8위 -
통산 384 167 213 9
총계 1158 584 553 22

2005 ~ 2006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감독
김재박(현대 유니콘스) 선동열(삼성 라이온즈) 김성근(SK 와이번스)

1986년 한국프로야구 MVP
김성한(해태 타이거즈) 선동열(해태 타이거즈)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1989 ~ 1990년 한국프로야구 MVP
김성한(해태 타이거즈) 선동열(해태 타이거즈) 장종훈(빙그레 이글스)

1986년 한국프로야구 투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김시진(삼성 라이온즈) 선동열(해태 타이거즈) 김시진(삼성 라이온즈)
1988 ~ 1991년 한국프로야구 투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김시진(삼성 라이온즈) 선동열(해태 타이거즈) 염종석(롯데 자이언츠)
1993년 한국프로야구 투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염종석(롯데 자이언츠) 선동열(해태 타이거즈) 정명원(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역대 감독
김응용 (2001~2004) 선동열(2005~2010) 류중일 (2011~)
KIA 타이거즈 역대 감독
조범현 (2008~2011.10.18) 선동열(2011.10.18~2014.10.25) 김기태 (2014.10.28~)

Contents

1. 소개
2. 아마추어 시절
3. 프로 선수 시절
3.1. 해태 타이거즈 시절
3.2.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3.3. 선수 시절 연도별 주요 성적
4. 지도자 시절
4.1.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4.2.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4.2.1. 2011년
4.2.2. 2012년
4.2.3. 2013년
4.2.4. 2014년
4.2.5. KIA 감독 시절 특이사항
5. KIA 타이거즈 감독 이후 행보
6. 그 외
7. 각종 기록들
8. 기록 관련 여담
8.1. 선발투수 선동열 논란
8.2. 시기 논란
9. 대중문화

1. 소개

대한민국의 前 투수, 前 삼성 라이온즈 감독 및 KIA 타이거즈 종신감독.

주로 알려진 별명은 무등산 폭격기, 국보급 투수, 멍게(피부가 안좋아서), 선뚱 , 각동님 등이 있다. 주니치 시절엔 나고야의 태양(성이 'Sun'이라서)이라고 불렸지만 이는 국내용이고 실제 일본에서는 호빵맨(앙팡만)이었다고 한다.[7]

커리어를 요약하자면, 스타 플레이어는 명감독이 되지 못한다는 클리셰에 완벽히 부합한 인물이다.

선수시절, 80년대 최고의 에이스였다.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에 6번[8]의 우승컵을 안기고. 선발로써 단일 시즌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고 MVP 3번에 투수 골든글러브를 6번 수상하였으며, 선수인생의 황혼기에 일본에 진출해 마침표를 찍는다.

삼성 감독 시절, 라이벌 현대의 주축선수들을[9] 모조리 FA로 빼와 전력을 약화시키고, 팀의 대들보가 될 투수들을 불펜으로 갈아넣어 2번 우승했을 뿐,[10] 타격의 팀이었던 삼성에 스몰볼과 불펜야구를 도입해 팀에 암흑기를 가져다 주었다. 그나마 투,타에서 리빌딩을 해내며 준우승까지 해냈던 임기 마지막 해, 영원한 푸른피의 사나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며 삼성팬덤의 적이 된다.

KIA 감독 시절, 역사는 반복된다를 입증하듯 해태-KIA의 혼이나 다름없던 선수강제 은퇴를 시키고, 타이거즈는 어떻게 다시 강팀이 되었나 쇼를 보이며 KIA를 웃음 후보로 만들었으며, 노장들의 호투 없이는 팀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며 588의 암흑기를 선물했다. 그럼에도 프랜차이즈의 이름으로 재계약에 성공했으나, 그토록 자신을 응원했던 팬덤의 반대에 부딪혀 자진사퇴하며 흑역사로 남고 말았다. 타이거즈 역대 감독들 중 4강을 올려놓지 못한 유일한 감독이라는 평과 함께. 참고로 2005년과 2007년에 최하위를 선사한(...) 유남호 전 감독과 서정환 전 감독도 그 전해(2004, 2006) 팀을 쥐어짜내면서 4강에 올려놓은 전적은 있다.[11] 하지만 선동열그렇게 팀을 쥐어짜고도 재임 3년 내내 단 한 차례도 가을야구를 못시키는 바람에 감독도 아닌 수준으로 금지어에 근접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역대 최악의 감독.광주팜이 부럽다던 선동열, 광주 팜.

어찌보면 과거 친정팀 감독으로 왔다가 거하게 말아먹었던 LG의 이광은, 김재박, 그리고 기아의 유남호, 서정환과 똑같은 루트를 탄 인물. 더욱이 선동열이 현역 시절 타이거즈 구단 역사에 있어 대표적으로 언급되던 인물인만큼 그의 처절한 몰락은 더욱 더 그 여파가 크다.타이거즈의 일그러진 프랜차이즈 스타 각동니뮤.

2. 아마추어 시절


광주일고 1학년 시절에는 약간 뛰어난 선수 수준이었으나, 2학년때부터 각성하여 3학년때는 이미 전국무대를 초토화하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고려대학교 입학 이후, 만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미국, 중화민국, 일본전에서의 거듭된 호투로 대한민국 우승의 주역이 된다. 참고로 이 대회에서 찍은 평균 자책점은 0.31. 다만 이 대회 방어율 1위는 0을 찍은 임호균이었다.


84년에 동아일보를 통해 LA 다저스에서 오퍼를 받았다는 발언을 하였고, 본인도 여러 인터뷰를 통해 82년도에 LA에서 영입을 제안받았다는 발언을 하고 있다.[12] 84년 한/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4차전과 6차전는 부진했지만, 84년도에 LA 올림픽에서는 꽤 호투했다. (16이닝 자책점 1점, 1승1패 방어율 0.56) 다만 토너먼트제에서 선동열이 1패를 한 것은 문제(자책점은 1점)였고, 쿠바가 빠졌는데도 한국팀이 메달을 따지 못했기 때문에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다. 초특급인 투수를 놓치지 않으려는 해태는 구단의 사정이 좋지 않아 최대한 계약금을 깎아보려고 이런저런 수를 썼다. 하지만 선동열측은 최소 3억을 요구했고, 해태는 난색을 표했다. 이 과정에서 군면제에도 실패하고[13], 안되면 대학원이나 가버리겠다고 대학원 시험을 쳤는데 이것마저 떨어져 버린다. 해태는 이제 고개 숙이고 오겠구나 했는데 선동열은 한국화장품 야구단과 계약해버린다.(...) 당연히 해태팬들은 난리가 났고 해태 사무실과 선동열의 집에 있는 깨질만한 물건들은 죄다 박살이 나는(...) 분위기 속에서 85년 새해로 넘어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태와의 협상은 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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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선동열은 한국화장품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선다. 해태팬들은 이제 해태 사무실과 선동열의 집에 있는 깰 수 없는 물건들까지 죄다 박살을 내기에 이르렀고(...) 결국 선동열의 어머니가 간곡히 설득한 끝에 1억 5천에 해태유니폼을 입는다.

그러자 이번엔 한국화장품 측에서 반발. 그도 그럴것이 엄연히 입단한 자기 선수가 계약 해지도 안했는데 이중계약을 맺은 꼴이니...당시엔 아마야구 선수는 최소 2년을 플레이해야 프로에 진출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아마야구연맹은 이 규정을 들이댔고, 프로입단계약무효 가처분소송까지 제기했지만 어째어째 해결되고 85시즌 후반기부터 등판하게 된다.[14]

이렇게 복잡하게 한국프로야구에 입성한 후 그의 전설이 시작된다.

3. 프로 선수 시절

다른 거 다 필요없고 문서 상단의 수상내역과 스탯만 봐도 된다.

3.1. 해태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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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투수라 불렸던 사나이.[15]

무등산 폭격기

무등산 각도기

데뷔 첫해(85년) 한국화장품 야구단과의 이중 계약 파문으로 후반기부터 출전했다. 첫 프로 경기엔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줬으나 평균자책점 1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상대팀이 이기고 있어도 선동열이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으면 상대 타자들이 기가 죽었을 정도로 막강한 능력을 자랑했다. 그래서 김응룡 감독은 선동열이 컨디션 난조로 나오지 못할 때도 불펜에서 몸을 풀게해서 일부러 타자들 기를 죽이곤 했다고...[16]

또한 등판 전날까지 술을 퍼마시고 등판해서는 완투승까지 하는 괴물. 한때 많이 돌아다니던 인터넷 소설 한가지 소개한다. 농구계의 대표적 주당이자 천재 허재가 광주 경기를 오게돼서 선동열과 술을 마시게 되었다. 저녁 9시쯤 허재 왈 "형 저 내일 경기라 이만"하면서 일어나자 선동열이 붙잡으며 "왜 이래. 난 내일 선발이야!" 그래서 둘이 밤새 계속 퍼마셨다. 새벽에 귀가한 허재가 한숨 자고 오후에 경기 출전 30득점을 기록했다. 경기를 마치고 "아우 나도 이정도면 아직 쓸만한걸"하면서 숙소에 돌아와서 TV를 켜자 스포츠 뉴스 첫 마디가 오늘 선동열 완봉승(...). 허재가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부인했다지만 워낙에 자기 종목에서 다른 선수들을 무참하게 압도하던 포스때문에 진실처럼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당연히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닌 이유는 야구는 봄부터 가을까지 펼쳐지고, 농구는 겨울에 펼쳐져서 시즌이 겹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선동열이 해태에 있던 시절 광주에는 농구팀이 없어서(부산 KT 소닉붐의 전신 나산 플라망스가 광주 연고를 가진 적이 있지만 1997~1999년까지만 있었고, 이 시기면 선동열은 일본에 있다가 은퇴했을 때다.) 허재가 광주에 농구 경기를 하러 오는 건 불가능. 누가 퍼트린 이야기인지 지금도 알 수 없는 이야기.

박찬호 이전에 미국 MLB에서 관심을 가졌던 한국 야구선수가 딱 2명이었는데 바로 최동원과 선동열이라고 한다. 물론 전자는 토론토 현지 언론에서 거론이 됐다는 건 알 수 있는데, 후자는 선동열의 주장과 선동열이 이야기를 들은 언론 및 주변 몇 몇 야구관계자의 발언 이외에는 구체적인 증거가 현재로서 나온 것이 없다.

통산 평균자책점이 1.20이고 이걸 능가하는 기록은 더 이상 나오기 힘들 전망이며, 역대 평균자책점 2위인 최동원이 2.46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실로 엄청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애초에 KBO 역사상 선동열의 통산 방어율보다 낮은 방어율을 1시즌이라도 기록해 본 선수는 1993년에 1.13의 방어율을 기록한 OB의 김경원밖에 없다. 통산 WHIP도 0.80 인데, 2위인 이상훈 선수의 1.05와는 제법 차이가 많이 난다. 1993년 시즌에는 평균자책점 0.78, WHIP는 0.54로 역대 시즌 최고의 평균자책점WHIP을 기록했다. 게다가 0점대 평균자책점을 3시즌 이나 기록했다.

그의 선수경력 기간 동안 선수생활 초반의 나이 차가 좀 있던 최동원을 제외하면 라이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선수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최동원과의 맞대결에서는 1승 1무 1패로 호각. 이 경기들에 대해서는 선동열 VS 최동원 항목 참조.
평균자책점 외에도 인간 같지 않은 기록이 많다. 90년대 초 KBS 이병훈 해설이 선수시절 선동열의 공을 쳐서 홈런을 때린 뒤 다음날 스포츠신문 1면에 자기 사진이 나올까 설레었으나 정작 다음날 스포츠신문 1면의 기사는 선동열 홈런 맞다.(…)

그러나, 92시즌 이후 선동열은 선수생활에 중대한 기로를 맞게 된다. 1992년 4월 11일 잠실 OB전에 그가 선발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전날 일기예보에 다음날 비가 온다고 되어있어서 경기 취소를 확신하고 마음놓고 술을 마셨다. 하지만, 의외로 경기가 시작할 무렵에는 비가 잦아들어서 경기가 강행되었고, 선발로 등판해서 경기를 치르던 도중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는 가운데 식어가는 어깨로 무리하게 투구를 했다. 그는 이 경기에서 완봉승을 따냈지만 그 결과 어깨에 건초염이 생기면서 부상으로 거의 시즌을 접다시피 했다. 당시에는 예상도 못했지만 이 경기가 결국 선동열 선수 커리어의 마지막 완봉승이 되었고, 결국 그의 야구 인생과 해태 타이거즈의 행보에 거대한 전환점을 가져다 줬다. 이후로, 선동열이 거의 시즌을 거의 공치다시피 한 해태는 플레이오프에서 롯데의 기적의 행진의 제물이 되는 이변의 희생자가 되었으며, 선동열은 이 경기 이후로 어깨의 근지구력 약화로 93년에는 전업 마무리로 뛰었다.[17]흔히 이 부상 이후 선동열이 완전히 마무리로 전업했다고들 하나 실제로 선동열은 94년에 선발 재전환 시도를 했다. 하지만 이 시즌에 커리어 로우 평균자책점을 찍고근데 그게 2.73(...), 그 다음해이자 한국 프로야구 마지막 시즌이었던 95년까지는 전업 마무리로 뛰게 된다. 그리고 해태 선발진의 축은 선동열에서 조계현으로 이어지게 된다.

위에서의 김응룡의 기용법 덕분에 한국에서의 통산 146승 중 딱 절반인 73승이 구원승이다. 그래서 통산 최다 완투 및 완투승 타이틀은 롯데의 윤학길이 가지고 있다. 단, 통산·시즌 완봉승 기록은 선동열이 가지고 있는 게 맞다. 86 시즌의 8완봉과 통산 29완봉승. 참고로 최동원 역시 개인 최고 성적을 올린 1984시즌 후반기에 구원으로 더 많이 등판했다. 김응룡 강병철 두 감독 모두 '저렇게 잘던지는 놈을 선발내서 4,5일에 한번씩 써먹으니 그냥 불펜대기 시키다가 위급하면 막 써먹는게 더 좋겠네' 싶어서 불펜으로 돌렸고 실제로 대충 몇점차 안났는데 선발이 좀 휘청댄다 싶으면 몇 이닝이 남았든 그냥 올라가서 던지고 다음날도 그렇게 던지고 뭐 그런 시절이었다. 게다가 이는 강병철 감독의 경우엔 본인이 직접 인정했을 정도.

문제는 전설의 감독님께서는 이런 야구관을 20년이 다되가는 지금도 고수하고 계시다는 것. "잘 던지니까 선발로 쓰긴 아까워" 같은 마인드... 그러나 송창식은 선동열이 아니었고 타자들도 그때의 타자들이 아니며 스트라이크존도 그때의 스트라이크존이 아니기 때문에 지켜보는 야구팬들은 그냥 눈물만 난다. 좀 말려줘요

이렇듯 한국에서 선수 시절 선동열은 완벽에 가까운 투수였으나, 포스트시즌에서만큼은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하였다. 풀타임 선발로 뛰었던 86년~91년을 기준으로 할 때 5번의 한국시리즈와 3번의 플레이오프에서 그가 거둔 성적은 72이닝, 방어율 2.50, 피홈런 6개. 결코 나쁜 성적은 아니나, 그의 프로통산 방어율과 통산 피홈런을 생각하면, 매우 나쁜 기록이다. 또한 풀타임 선발로 뛴 이 기간 동안의 8번의 포스트시즌에서 겨우 2차례의 선발승을 기록하였다는 것도 선동열로서는 의외인 점.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선동열의 압도적인 페넌트레이스 성적에 비한 성적일 뿐 저 기록 또한 당연히 충분히 훌륭한 기록이다.

3.2.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커리어 처음으로 굴욕을 겪은 시절. 그리고 그 굴욕을 이겨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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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km 찍고 신문일면에 실리던 내가 아니야![18]

첫 해에는 국내 프로야구와는 다른 스트라이크존 적응 문제와 더 높은 레벨의 일본 타자들을 상대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타자들이 헛스윙하기 급급하던 공을 일본타자들은 가볍게 안타를 만들어내니 속수무책일 수 밖에. 특히 붉은 악마 군단, 빅 레드 머신 등으로 불리는 히로시마 핵타선에 유난히 약해서 히로시마와의 경기에서는 0.1이닝 7실점이라는 대기록까지 세웠다(...). 그 후 2군을 전전하며 패전처리로 주로 활약했다. 사실 일본 진출 첫해에도 FIP는 2점대였으니 세이버매트릭스의 관점으로 평가하면 운도 따라주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 진출한 첫해인 1996년에 K/9이 가장 좋았다는 점을 볼 때[19] 빠른 공의 구위에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니다. 즉 해태시절보다 구위가 떨어져서 털렸다는 말은 근거가 없는 얘기. 정작 문제는 국내에서는 그렇게 빨아주던 주자견제능력과 제구가 일본에서는 기초도 안되는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1996년도 BB/9은 주니치 시절 중 가장 좋지 않은데 3.6을 조금 넘어간다. 국내 마지막 커리어인 1995년도 BB/9이 1.15였으니 1년만에 BB/9이 3배나 폭등했다. 거기다 타자가 1루에 나가기만 하면 그린 라이트였다. 구위는 좋아서 삼진은 잘 잡는데 좋지 않은 제구에 볼넷으로 주자가 출루하면 도루하고 불안한 경기운영으로 장작이 쌓이며 큰거 하나 맞고 대량실점 패턴이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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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공의 구위가 아닌 다른 원인을 지적하시는 위원님 결론은 선동렬을 제대로 상대하지 않은 국내타자들 탓!

굴욕을 맞본 96년도 시즌이 끝나고 겨울이 되자 마음을 다잡고 투수코치에게 직접 개인훈련을 부탁해서 대대적인 수정에 들어간다. 이때 어찌나 독하게 훈련했던지 김응용 감독이 "한국에서 저렇게 훈련했으면 30승은 했을거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하루 3000개 투구와 하체단련으로 제구력을 다잡고 투구폼을 수정하여 주자견제능력을 보완하는 등 본인의 피나는 노력과 때마침 개장한 홈구장이 투수들의 천국 나고야돔이라는 이점 덕분에 1999년 시즌까지 좋은 활약을 보였다. 1999년 시즌은 논란이 조금 많은 편이지만, 일본시절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던지 훗날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만큼 훈련해보자.'는 각오로 훈련에 임했으며 '자신의 전성기는 한국 시절이 아닌 일본에서 뛴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사실 선동렬이 정말 대단한 점은 성적도 성적이지만 이렇게 자존심을 내려놓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한 점과 변화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제 감독으로서의 변화가 필요하다. 국내에서 선동렬은 상대팀 타선을 초토화시키며 절대자로 군림했지만 일본에서는 구위는 괜찮지만 제구도 경기운영도 부족한 2군을 들락거리는 패전처리조일 뿐이었다. 이러한 성적에 뒤따르는 냉정한 시선이나 대우를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했으니 여간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을것이다.[20]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위치를 냉정하게 돌아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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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그 각동님이 아닌데?


그의 변형 종슬라이더의 별명은 멍라이더. 하지만 정작 투구 스타일은 KBO시절 오승환과 비슷하게 패스트볼로 승부하고 슬라이더는 간간히 던지는 수준이었다.

국내에서도 커리어 하이 수준이었지만 일본에서도 2년간은 최상위권 마무리의 성적을 냈다. 사실상 KBO가 탑클래스 선수들의 일본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전락한 시발점이 선동열의 이적이었다. 그 후 이종범(해태->주니치->KIA), 이상훈(LG->주니치->보스턴->LG), 구대성(한화->오릭스->뉴욕 메츠->한화->시드니 블루삭스), 정민철(한화->요미우리->한화), 타이론 우즈(두산->요코하마->주니치), 세스 그레이싱어(KIA->야쿠르트->요미우리->지바롯데), 호세 페르난데스(SK->세이부->라쿠텐), 이승엽(삼성->치바 롯데->요미우리->오릭스->삼성), 이병규(LG->주니치->LG), 다니엘 리오스(두산->야쿠르트), 이혜천(두산->야쿠르트->두산), 임창용(삼성->야쿠르트->시카고 컵스->삼성), 김태균(한화->치바 롯데->한화), 켈빈 히메네스(두산->라쿠텐), 이대호(롯데->오릭스->소프트뱅크), 오승환(삼성->한신) 등의 사례가 이어지면서 KBO 탑클래스 선수의 일본 유출 사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KBO에서 활동하다 일본에 건너가서 다시즌 동안 좋은 모습을 보인 선수는 선동열, 타이론 우즈, 이승엽, 임창용, 이대호 정도로 압축된다. 특히 90년대~2000년대 초반 일본에 진출한 선수들 중 유일하게 선동열의 경우가 2시즌으로, 구대성의 경우는 한시즌 동안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이때는 오릭스가 막장을 달리던 시절인데다 기복이 있고 분식회계도 자주 한 터라 성공이나 실패라고 딱히 단정짓기 어려운 성적(단 구대성이 래빗볼 시대에 선발투수로 뛰었다는 점은 감안하자.)이다. 이상훈 역시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선동열과 활약하긴 했지만 좋은 모습을 보였던 시즌은 1999년 시즌밖에 없다. 언급한 선수를 제외한 나머지, 정민태, 정민철, 다니엘 리오스, 이혜천,이범호,이종범,이병규등은 확실히 일본 프로야구에서 망했고, 조성민은 첫해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선수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은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이야 명예로운 은퇴였다고 하지만 시즌 막판부터 주니치와의 협상과정에서 잡음이 많아 매끄럽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된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선동열이 99시즌 중반에는 3경기 연속경기를 블론하며 2군에 다녀오며 구위가 점점 떨어지며 이닝 소화율도 낮아지게 되었다. 1999년의 성적은 1승 2패 28세이브 2.61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여 표면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성적이지만 97, 98년의 성적과 비교하면 확연히 떨어진 성적을 기록했다. WHIP으로 봐도 1997, 1998년에 0.76, 0.86을 기록한 반면 1999년은 1.32로 확연히 불안해졌다는걸 스탯으로도 확인할수 있다. 당시 주니치의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가 역시 전년에 비해 불안한 모습을 보인 사사키 가즈히로와 함께 선동열과 사사키 모두 올해는 구위가 아닌 얼굴로 마무리를 하고있다고 발언을 했을 정도. 전성기를 지난 피칭을 하지만 그 투수의 이름값으로 타자들에게 부담을 주어 피칭을 한다는것을 은유적으로 언급한 것. 하지만 사사키는 미국에 진출해서 스플리터 낚시질을 계속했다.

그 후 주니치에서는 새로운 마무리 투수 에디 게일러드를 영입했고, 선동열의 다음 시즌 계약 때는 야마다 수석 투수코치를 비롯한 코칭스태프가 "내년 시즌에는 마무리로 기용할 수 없다. 미들맨으로의 보직 변경은 물론 때론 2군행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게다가 이 시절 주니치의 불펜 투수진은 선동열을 굳이 아쉬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매우 좋았다.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를 맡는 오치아이 에이지, 이후 부동의 릴리프투수로 떠오른 이와세 히토키등 일본인 불펜 투수진이 매우 충실했다.

그 후 보스턴 레드삭스로의 진출을 꾀했지만 테스트를 받아야 하고 가족들의 집을 포함한 주거비를 자비로 부담해야 된다는 다소 굴욕적인 이야기를 듣고 부친의 종용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사실 명예로운 은퇴라고 보기에는 다소 잡음이 끼인건 사실, 하지만 그는 나쁘게 상황이 돌아가자 깔끔하게 은퇴를 결심하고 추해지기 전에 KBO의 레전드로 남았다.

은퇴식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대표타자였던 AV 매니아마쓰이 히데키와 상대하게 되는데, 야동보고 휴지소비하는게 인생의 낙인 고질라가눈치없는(?) 마쓰이가 안타를 때리게 된다. 하지만 웃으면서 포옹. 참고로 마쓰이는 선동열의 공을 가장 잘 공략했던 타자중 한 명.[21] 여담이지만 마쓰이가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후에 천적으로 군림했던 선수가 바로 박찬호다. 마쓰이가 스스로 박찬호의 공의 칠 수 없다고 말할 정도.

경기가 끝난후 마쓰이에게 선동열의 은퇴경기에서 어째서 안타를 쳤는가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현역을 은퇴하는 선수에 대한 내가 보일수 있는 최대의 예의이다. 오히려 일부러 치지 않았으면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누군가의 은퇴식에서 3삼진을 잡은 누군가가 생각난다

참고로 일본내에서의 별명은 앙팡맨(호빵맨)

임창용의 일본 성적을 비교하면서 논쟁이 자주 일어난다. 확실히 고전 스탯으로 볼때는 임창용의 우위가 보이지만 세이버 스탯으로 보면 오히려 선동열이 한참 앞선다. 파크팩터의 경우 피홈런의 경우 임창용이 불리하고 BABIP의 경우 선동열이 불리하고 나고야돔 외에도 주니치 스타즈 아무 구장 사용등으로 차이가 적고 시대를 감안한다면 극악한 투고타저의 시대의 임창용의 스탯보다는 선동열 세부 스탯이 좀 더 좋은편이고 특히나 1997년도 WAR은 탑에 속한다. FIP의 경우 임창용의 커리어 하이가 선동열 통산에도 못 미치고 FIP+의 경우 195와 150으로 차이가 심하다.[22] 여기에 대해서 "10년도 더 전의 투수라서 비율스탯이 큰 의미가 없다"는 의견과 "그러면 페드로 전성기 비율스탯은 10년전 성적이니까 의미없냐?"는 의견이 대립중이다.[23] 과연 선동렬의 세이버 스탯이나 고전 스탯이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임창용보다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을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문제. 다만 선동렬이 일본에서 보였던 특급 마무리로써의 좋은 모습은 2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다년간 활약한 임창용이 선동렬보다 현지에서의 평가는 비교우위에 있다고 한다.

3.3. 선수 시절 연도별 주요 성적

  •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5 해태 타이거즈 25 111 7 4 8
(3위)
- 0.636 1.70
(1위)
74 2 23 103
(5위)
30 21 0.847
1986 39
(6위)
262⅔
(2위)
24
(1위)
6 6
(4위)
- 0.800
(2위)
0.99
(1위)
153 2 59 214
(1위)
38 29 0.780
1987 31 162 14
(2위)
2 6
(3위)
- 0.875
(1위)
0.89
(1위)
89 2 50 144
(2위)
21 16 0.840
1988 31 178⅓
(3위)
16
(2위)
5 10
(4위)
- 0.762
(3위)
1.21
(1위)
116 3 42 200
(1위)
29 24 0.847
1989 36
(10위)
169 21
(1위)
3 8
(4위)
- 0.875
(1위)
1.17
(1위)
82 2 55 198
(1위)
27 22 0.769
1990 35 190⅓
(5위)
22
(1위)
6 4 - 0.786
(1위)
1.13
(1위)
121 1 58 189 35 24 0.898
1991 35 203
(4위)
19
(1위)
4 6
(8위)
- 0.826
(1위)
1.55
(1위)
135 8 33 210 42 35 0.788
1992 11 32⅔ 2 0 8
(6위)
- 1.000 0.28 20 0 12 42 1 1 0.918
1993 49
(2위)
126⅓ 10 3 31
(1위)
- 0.769
(2위)
0.78
(1위)
48 2 26 164
(2위)
11 11 0.538
1994 27 102⅓ 6 4 12
(5위)
- 0.600 2.73 81 5 29 94 31 31 0.997
1995 48
(2위)
109⅓ 5 3 33
(1위)
- 0.625 0.49 49 1 17 140
(6위)
9 6 0.576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6 주니치 드래곤즈 38 54 5 1 3 - 0.833 5.50 62 4 28 67 35 33 1.611
1997 43 63⅓ 1 1 38
(1위)
- 0.500 1.28 36 0 13 69 9 9 0.758
1998 42 48⅔ 3 0 29 - 1.000 1.48 31 4 11 58 8 8 0.863
1999 39 31 1 2 28 - 0.333 2.61 31 1 11 34 9 9 1.355
KBO 통산(11시즌) 367 1647 146
(4위)
40 132 - 0.785 1.20 968 28 404 1698
(3위)
274 220 0.795
NPB 통산(4시즌) 162 197 10 4 98 - 0.714 2.70 160 9 63 228 61 59 1.112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5 1 0
1986 19
(1위)
8
(1위)
1987 7 4
(1위)
1988 9
(3위)
1
1989 8 6
(1위)
1990 8
(4위)
6
(1위)
1991 12
(2위)
3
(2위)
1992 1 1
1993 0 0
1994 3 0
1995 0 0
KBO 통산(11시즌) 68완투
(4위)
29완봉
(1위)

4. 지도자 시절

4.1.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4.2.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KIA 타이거즈 No.90
선동열(宣銅烈)

4.2.1. 2011년

2011년 10월 18일, 조범현이 KIA 타이거즈 감독직에서 자진사퇴라고 쓰고 경질이라 읽는다함에 따라 후임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팀에서는 당연하게도 선동열 감독이 선수 시절 달았지만 지금은 영구결번이 된 18번을 주려고 했으나, 그렇다면 영구 결번의 의미가 없다면서 90번을 달았다. 더불어 세트로 딸려온 수석코치는 이순철. 해태 전설들이 모여들고 있어! 그리고 이 기사도 성지가 되었다.

기아의 약점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게 불펜이고, 선동렬이 삼성 감독 시절 잘한 일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게 철벽불펜 구축인 만큼, 당연히 선동렬이 불펜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관심이 가장 높았다. 선동렬 본인도 그걸 아는지 스포츠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투수진 전원이 마무리훈련부터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발언을 했다. 불펜 한두명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리고 임명되기가 무섭게 한 기자의 개드립오타로 졸지에 부동산 폭격기라는 별명을 득한다. 광주 일대에 막대한 양의 실탄을 뿌리며 알박기 포탄을 투하하는 선동렬 실제로는 광주 주위에 땅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으나, 땅값이 내려가는 바람에 손해만 보고 그다지 재미를 못봤다고 한다. 그래서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받은 거금의 연봉도 대부분 날렸다고... 부동산왕의 몰락

10월 21일 취임식을 가졌고 바로 마무리훈련 일정을 변경, 1.5군 위주로 들어가던 훈련을 개편, 10월 23일부터 1, 2군 선수 전원을 훈련시키겠다고 밝혔다. 윤석민, 이종범, 최희섭 등 예외는 전혀 없으며 훈련을 통해 바로 옥석가리기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었다.

KIA 타이거즈의 감독이 되고 나서도 삼성 라이온즈가 전지훈련장으로 사용하는 일본 오키나와의 온나손 아카마 구장을 KIA 타이거즈의 전지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접촉하였다는, 소위 '멸치 두 박스 소문'[24]이 돌기도 하였으나 김평호 코치가 트위터를 통해서 전지훈련장은 아카마 구장이 아니라고 인증했다.* 그래서 멸치 두 박스는 거짓으로 알려졌으나.. 선감독이 결국 아카마 구장을 며칠 이용할 권리를 얻어냈다는 기사가 떴다.* 삼성팬들에게는 그저 충격과 공포.

다만 선 감독의 취임으로 삼성 팬과 기아 팬은 시즌 초에 그야말로 개싸움 모드였다. 선동열 감독을 6년간 직접 경험한 삼성 팬들은 너네도 직접 경험해봐라라면서 비아냥댔고[25], 그에 대해서 기아팬들은 너네 팀이나 잘하세요라는 반응을 보였다.망했지. 멸치 사건은 그 와중에 나온 해프닝. 그리고 기아팬들은 삼성팬들의 비아냥에 격하게 공감하게 되는데

4.2.2. 2012년

해당 항목 참조.

4.2.3. 2013년

해당 항목 참조.

4.2.4. 2014년

해당 항목으로.

4.2.5. KIA 감독 시절 특이사항

성적이 좋지 않았던 2012년, 이래저래 타이거즈 팬은 물론이요 타팀 팬들에게도 주목받는 것은 선동열의 감독으로서의 행보가 아니라 표정 변화(…)였다고 한다. 득점 여부에 관계없이 카메라가 비춰주는 선동열의 뚱한 모습이 그림자와 특유의 푸짐한 얼굴살이 겹쳐서 한껏 무서워 보이는 게 포인트라면 포인트.

KIA에 부임하고 부쩍 오랄질 자극적인 인터뷰가 늘었다. 2012년에는 성적이 좋지 않아서 더 부각되었다. 이게 다 이선호 때문이다

KIA 감독에 부임하고 유독 삼성전에 성적이 좋지가 않다. 2012년 9월 26일, 27일 추가 일정으로 편성된 대구 2연전에서 김진우완투윤석민의 완봉으로 2연승을 한 것을 제외하고, 부임 이후 정규 3연전에서는 삼성에게서 위닝시리즈를 가져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푸른 피의 멍게 직구와 조크볼에서도 이 모습을 묘사하였다. 심지어 2013년에는 삼성전에서 트리플 스윕패를 당하고 시즌 상대전적 4승 12패를 기록중이며(...) 8월 11일 광주에서 이기기 전까지는 삼성전 11연패를 하고 있었다. 그 두 번 이긴 것 중 한 번은 선발 투수가 아네우리 로드리게스(...). 괜히 삼성 팬들이 선동열이 KIA 종신감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0선발 드립까지 나왔다. KIA 팬들은 이 정도면 선동열이 삼성에서 보낸 산업스파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2014 시즌에도 4승 12패로 전년도 성적을 똑같이 복사했다.

프랜차이즈 레전드 출신이라고 2012 시즌엔 욕은 덜 먹고 있었지만 2013-14 시즌 내내 욕을 흠씬 쳐먹고있다. 감독으로서의 밑천이 슬슬 드러나고 있다는 평. 투수조련 1인자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평이었지만 2013년 전반기 종료 현재 팀 평균자책 4.53(7위), 팀 WHIP 1.53(8위), 팀 피안타율 0.285(8위), 팀 피출루율 0.364(8위), 팀 피장타율 0.402(8위), 팀 피OPS 0.766(8위)라는 처참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가장 높은게 평균자책 7위일 정도. 투수 교체로 그렇게 욕먹었던 조범현도 4년간 팀 평균자책 4, 2, 3, 3위다. 사실 조원수박차를 지켜본 삼성 팬들이라면 투수조련 1인자라는 평에는 코웃음칠 수밖에 없다 안정권KO를 기대했는데 현실은 조원수박차

게다가 약한 불펜으로 역전패도 빈번하며, 선수들의 멘탈 문제와 잇단 실책성 병맛 플레이, 이전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한 박자 늦은 투수교체 타이밍, 경기를 쉽게 포기한다는 점과 희생번트에 대한 집착 등등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투수력을 강화하려면 수비를 강화해야 하거늘 수비에 소홀하다고 하여 언행불일치라고 까인다.

2013 시즌 하반기로 들어갈 수록 점입가경. 7월 23일 대패로 팀 평균자책도 8위가 되었다. 신생팀인 NC만도 못한 성적. 바로 밑이 팀이리고 부르기도 뭐한 경기력을 보여주는 한화니 사실상 최하위.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 결국 그동안 인내했던 KIA 팬들도 결국 한계를 보이고 선동열을 가루가 되도록 깠다.

여기에 매년 즉전감, 인성 등을 운운하면서 대책없이 대졸몰빵 픽을 하면서 차기 감독이 군 문제로 골머리 썩게 만들었다는 점은 덤이다. 지역출신을 포함한 모든 고졸픽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신 대졸덕후 [26] 이렇게 지명한 대졸중에 즉시전력 주전으로 자리잡은 선수는 아무도 없어서진정한 폭격기 ㄷㄷㄷ 미래마저 폐허 ㄷㄷㄷ [27] 권윤민 스카우트팀장과 함께 쌍으로 더까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비판받는 건 자기 스타일을 너무 고집한다는 점. 스타 출신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자신의 야구관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답답하다 싶을 정도로 밀고나가며, 부진한 성적에 대해서 반성하거나 주변의 조언을 구해서 변화를 시도하는 모습은 전혀 없다. 하루가 다르게 모든 게 바뀌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야구계라고 예외일 수는 없는데, 발전이 없이 자기 방식만 고집하다가는 이대로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28] 일각에서는 삼성에서의 초보 감독 시절 2연속 우승을 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평도 있다.

우천연기를 너무 많이 시킨다고 타 팀빠들로부터 졸렬하다고 까인다. 사실 우천연기 자체는 KBO 리그 경기감독관이 결정하는 일이라 크게 까일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천연기와 별도로 계속되는 입놀림으로 스스로 비호감지수를 올리는 것은 사실이다. 자기 팀 상황이 개차반인데 한가롭게 국내선수들의 해외진출에 관련한 인터뷰나 하고 있으니, 야구팬들한테 오지랖도 넒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13게임 만에 모가지를 당한 김동엽 감독을 제외하고, 역대 타이거즈 감독 중에서 유일하게 팀을 4강 못보낸 감독이 되었다. 타이거즈의 최하위란 큰 굴욕을 안긴 두 감독인 유남호서정환은 적어도 각각 2004년과 2006년에 팀을 쥐어짜듯이 4강에 보낸 적이 있다. 둘 다 그 다음해에 거하게 말아먹어서 문제였지만.(...) 2013년엔 타어강이라는 현실이자 비아냥마저 들으며 신생팀 NC에게까지 밀려 8위로까지 추락해버렸다.

그리고 설령 그가 경질된다 하더라도 KIA 팬들은 이후 6668587667급의 암흑기가 올 것이라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2013 시즌 이후에도 결국 살아남았다. 구단에서 계약기간은 채워주기로 했다는듯. 하지만 이순철 수석코치가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대신 경질당했다.뭔가 앞뒤가 바뀐듯...

그리고 2014년. 예상과 기대대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2014년을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날 것으로 보다.

그러나..

선동열 감독, 2016년까지 KIA맨…2년 10억 6천만원 재계약 10월 19일 준플레이오프 1차전 경기도중에 뜬금포로 연임발표!!!!!!! 기아팬들 멘붕. 갸갤 멸망의 날 실제로 발표가 난 지 30분도 안 되어서 호랑이 사랑방이 터졌다(...). 묻어가려고 준플 경기 중에 발표했는데 준플을 묻어버렸다 카더라

기아팬들은 말그대로 충격과 공포에 빠졌고 타팀팬들은 축제분위기. 진짜로 종신각동님 되는건가 팬들 중 일부는 2년 재계약 소식이 혹시 오보가 아닐까 생각하며 희망고문 속에서 정정기사가 뜨기를 기다려 보았으나 역시나. 많은 기아팬들이 떠날 것이 예상되며... 3년동안 눌러참고 있던 광주아재들의 활약이 기대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계약 기간이나 연봉으로 봐서는 애초에 3+2 계약이 아니였나 하는 의견도 올라 오는 중 대체 +2의 조건이 뭐였길래 588을 찍었는데도 발동을???

다만 세간의 평과는 반대로 선수들과의 관계는 별다른 트러블이 없는 편. 비록 이종범 등 기존 노장들과의 마찰이 있었긴 했지만 타자들에게 방망이를 선물해주고 과감하게 장비를 제공해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주니치에 뛰었던 연이 닿으면서 일본에서 물품을 공수해와서 선수들에게 선물해주기까지도 했다. 다만 이런 모습도 그냥 물품을 지원해 주는 정도에서 그칠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선 감독이 맘에 들어하는 선수들에게는 한없이 베푸는 성격이기는 하지만[29] 모든 사람에게 그랬다면 많은 선수들과의 트러블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예상됐지만...

2014년 10월 24일자 매일경제에서 23일자 광주일보 기사를 인용하여 군입대를 하겠다는 안치홍에게 임의탈퇴를 시킬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한 사실을 기사로 냈다.
매일경제 기사: 상처 투성이, 名家 KIA는 실종됐다
광주일보 기사: 선동열 “소통” … 선수들 “분통”

결국 악화된 팬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사퇴를 결정했다. 그리고 이 항목에 존재했던 소항목 선동열/2015년도 지워졌다 이번 재계약 직후 자진사퇴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 관련기사 이종범과 함께 타이거즈 역대 최고 프렌차이즈로 꼽히는 그가 다른 무엇도 아닌 팬들의 반대로 물러났다는게 심히 씁쓸한 부분. 그러나 또 한명의 역대 최고 프렌차이즈는 선동렬 때문에 물러났지

사퇴 후 인터뷰 기사가 나왔는데, 가족들이 문자메세지 테러를 당하는 등 고통을 당한게 사퇴의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또한 이 기사에서 '안치홍 임의탈퇴' 발언에 대해 해명을 했는데, 평소 선수들과 격의없이 대화하는 한대화 코치가 안치홍에게 "자꾸 그러면 임의탈퇴 시킨다"고 농담을 했고, 이 드립을 주워들은(...) 선동렬이 "구단이 임의탈퇴를 생각하는 상황까지 가면 안되지 않느냐"고 말한 것이라고 한다. 이 기사대로 실제 사건이 일어났다고 가정하면 협박은 아닌 셈. 다만 그래도 갸갤러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5. KIA 타이거즈 감독 이후 행보

현재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자택에서 가족들과 많은 시간들을 보낸다고 한다. 감동님 오래 쉬지말고 빨리 현장으로 복귀해 다른 프로팀들도 맡아 감동님의 지도력을 보여주세요ㅠㅠ 선동열의 현재 근황

2015년 4월 12일 있었던 이동걸 - 황재균 빈볼 논란과 관련하여 뜬금없이 재평가되었다.

2015년 '프리미어 12'를 앞두고 김인식 감독에 의해 투수 총괄 코치로 임명되었다.

6. 그 외

  • 은퇴 후 수년이 지난 상태이지만 신체 능력은 여전히 괴물급으로, 차범근과 비슷한 케이스이다. 특히 절정에 이르렀던 1986년의 기록은 인간이 세운 기록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 물론 바다 건너면 진짜 괴물들이 우글거리지만

  • 선동열의 일대기를 다룬 불암콩콩코믹스 레전드 선동열편

  • 은퇴를 한 상태이나 아직 130km/h대의 공을 던질 수 있다고 한다. 삼성/기아 계투진이 무너지면 우스갯소리로 차라리 선동열이 올라오라고 할 때도 있다. 실제로 은퇴한 후 몇 년이 지나고 감독과 코치들이 특별전을 펼쳤을 때, 선동열이 마무리 투수로 등판해서 130km/h대의 직구를 꽂아넣는가 하면 전성기 때와 흡사한 슬라이더를 보여 주며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기도 했다. 뭐 메이저리그의 투수 제이미 모이어같은 경우 선동열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130km/h대 공으로 현역 선발 투수로 커리어를 지속하는걸로 보면...

  • 삼성 라이온즈에 있을 당시 박한이에게 "지금 던져도 너 정도는 문제없다."라고 허세일침을 가했다. 영원히 고통받는 박한이.

  • 지금이 현역이라면 붙어보고 싶은 타자로 이대호를 꼽았다. 본인은 삼구삼진으로 잡을 수 있다고 허세장담했다. 주니치 시절이라면 가능할지도. 해태시절이면 택도 없다.#선동열 "현역때 공이면 이대호 삼진 잡겠지"

  • 2006년도에 오승환은 아직 자신과 비교하려면 멀었다는 발언을 한적이 있다. 자신은 16m 지점에서 공을 뿌렸지만 오승환은 말 그대로 18.44m 지점에서 공을 놓는다고.#선동열 감독, "오승환 나보다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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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고무!

  • 2006년 올스타전 식전행사로 열린 25년 올스타 vs 연예인야구단과의 경기에서 1회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하체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던지면서도 130km/h가 넘는 공을 던졌다. 결과는 1이닝 3삼진... 이 2006년 경기는 준비를 거의 하지 않고 던져서 저런 공이 나온 것이다. 몇 주간 준비를 하고 나왔던 2005년 올드스타전에서는 경기 전 구속 측정 이벤트에서 139km/h로 2위를, 경기를 마무리하러 나와서는 무려 140km/h를 던졌는데, 다음날 올스타전 방송인터뷰에서 손민한권오준은 전날 경기를 보고 자신들에게 한숨이 나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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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경질된 이유는 꼴찌를 해서다. ㅋㄲㅈㅁ
    사실 재신임된 이유는 2등을 해서다.
    정작 자신은 2등도 못했지.
    물론 KIA 감독으로 두 시즌 연속 2등을 하긴 했다. 뒤에서.

  • 이름을 표기할 때 선동렬(宣銅烈)과 선동열 양쪽을 왔다갔다하지만, 한국어 문법상 사람이름에서는 두음법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고[30] 본인의 습관에 따라 결정하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문법적 원칙은 선동렬이 맞지만 선동열이라고 해도 문법상 전혀 하자가 없다. 따라서 본인이 어릴 때부터 선동열로 사용해오고 KBO에서도 '선동열'이라는 이름으로 등록이 되어있으므로 선동열이라고 적어야 될 것이다.

  • 소싯적에 말술을 자랑하는 굉장한 술꾼이었다. 특히 프로에 들어와서는, 예컨대 상대 선발이던 MBC 청룡정삼흠(고대 시절 둘도 없는 절친)을 경기 전날 저녁에 불러내서 역시 부엉이 다음 날 새벽까지 부어라 마셔라 해놓고, 그 날 저녁 그 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마운드에 올라 사이좋게 무실점의 투수전을 이어갔다는 ㅎㄷㄷ한 일화도 있을 정도...선동열도 대단하지만 같이 마신 정삼흠도 대단하긴 마찬가지.

    그리고 학창시절 태릉선수촌에서 친분을 쌓은 농구계의 대표 말술 농구선수 허재농구대잔치 일정 차 광주로 내려왔을 때, 경기를 마친 허재를 불러내어 밤새도록 술을 펐다고 한다. 물론 계산은 선동열이 했고... 술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허재도 3차, 4차까지 가는 강행군에 기진맥진 하며 선동열에게 끌려다녀야 했고, 후에 허재는 처음으로 '술 먹다 죽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아득해졌다고 회고했다. 그러던 차에 야밤이 되어 광주시내에 문을 연 술집이 눈에 띄지않게 되자, 허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선동열이 어떤 주점 앞에서 내려진 셔터를 두들기며 "나 선동열이요. 문좀 열어 주소" 하자, 주인이 셔터를 벌컥 올리고 반색을 하며 선동열과 허재를 안으로 들였다고(...). 결국 견디지 못한 허재는 화장실 간다는 핑계를 대고 바로 숙소로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이렇게 실력과 주량으로 리그를 평정했던 두 종목의 대표가 붙은 전설의 매치업은 선동열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전날 그렇게까지 마신 선동열이 걱정이 되어 신문을 확인해보니 "해태 선동열, 오늘도 완봉승!" 이란 기사가 떡 하고 올라왔다고 한다. 다만 완봉승에 대해선 허재가 무릎팍도사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했다(말이 안되는게, 농구대잔치는 겨울에 하는데 프로야구 시즌과 겹칠 리가 없지 않은가).

    이런 천하의 주호(酒豪)인 선동열이었지만, 마실 술 다 마시고도 몸 관리만큼은 철저했고 시합에서도 꾸준히 제 실력을 보여주었기에, 철권통치의 아이콘 김응용 감독도 선동열에겐 절대로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김응용은 야구만 잘 한다면 그 선수의 사생활에 관해선 절대로 터치하지 않았다. 반면 실력은 그저 그런 선수가 일탈을 저지르면 말 그대로 헬게이트를 여는 권능을 보여줬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양승호[31].

  • 다만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에 간이 나빠졌다는 진단을 받았고, 이후 그동안 즐겼던 술과 담배를 모두 끊었다고 한다. 이후로는 건강에 신경쓰면서 개인운동도 많이 하고 있다고.

  • 몸관리 부분을 추가하자면, 지금은 고인인 아버지 선판규가 선동열이 어릴 때 부터 몸에 좋다는 것은 천리 밖에서라도 구해와 먹였다고. 이나 개구리 정도는 양반이었고, 심지어 오소리생피까지 들이킬 정도였다. 잘못 섭취했다간 기생충 크리 그 덕분에 선동열은 누구보다도 강골을 자랑할 수 있었다.

  • 1980년대 전성기 시절 흑역사 광고를 찍었는데, 선동렬은 당시 국약품[32]이 생산하고 판매한 '투수코친'이라는 약품 광고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런데 선동열이 약품에 효능에 대해서 말하는데, 선동열의 목소리가 아니라[33] 성우 한상덕이 더빙한 목소리다. 이 더빙은 디시인사이드에서 합성으로 가끔 사용되기도 한다.

  • 한국프로야구에서 굵직한 기록과 사건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이름이 유명하긴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보기 드문 성씨( 씨)이기 때문에 선동열과 관련된 기사에서 헤드라인을 뽑을 때 그의 이름 대신 성씨를 영어로 바꾼 'SUN'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 선동열이라는 이름은 대학교에서도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선동열 학점. 선동열 학점이라 함은 바로 선동열의 최전성기 시절의 방어율이 학점으로 나오는 현상이다. 평균적으로 1.3 정도면 선동열 학점 확정.

  •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많은 경기에서 오심이 많이나와 선동열의 항의가 빈번했다. 그때 당시엔 비디오판독제도가 활성화 되지 않았고 선동열의 항의부분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방송카메라로 애매한판정을 확인할때 덕아웃에서 본 선동열의 눈이 경기를 바로 앞에서 판단하는 심판보다 정확한 판단을 했다. 다시 프로야구로 돌아오시면 심판으로 돌아오셔도 괜찮으실꺼 같다능..


  • 아들이 특전사 부사관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2015년 1월 임관식 때 참석해서 한 부사관에게 계급장을 달아주는 장면.

7. 각종 기록들


2012년 7월 20일 한-일 프로야구 레전드매치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이 때 TV에 소개된 투수 선동열의 통산기록이 새삼스럽게 화제가 되었다.

  • 해태 타이거즈 시절
    367경기 146승 40패 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

  •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162경기 10승 4패 98세이브 평균자책점 2.70

  • 한국프로야구 입상내역
    • 평균자책점 1위 통산 8회 85~91년 7년연속 포함
    • 다승 1위 4번 89~91 3년연속 포함
    • 승률 1위 4번 89~91 3년연속 포함
    • 삼진 1위 5번 88~91 4년연속 포함
    • 구원 1위 2회 (93, 95)
    • 골든 글러브 6회 수상 (86, 88~91, 93 투수부분 최다 수상자)
    • MVP3회 수상 (86, 89~90)
    • 투수 트리플 크라운 3회 달성(89~91 평균자책점, 다승, 삼진, 승률 모두 1위, 86년의 경우 다승, 평균자책점, 삼진은 1위였으나 승률이 2위였고 당시의 트리플 크라운은 삼진이 아닌 승률이 포함된 의미였다. 오늘날의 의미로 보자면 트리플 크라운을 4회 달성하였다. 참고로 투수 트리플 크라운은 선동렬을 제외하면 류현진윤석민단 1회 달성했을 뿐이다.) 승률 2위가 된 이유는 이 시즌 승률 1위는 최일언. 김형석이 최동원을 상대로 마지막 경기에서 3루타를 쳐내며 최일언이 패전을 면했고, 승률 타이틀을 차지하였다.
    • 노히트 노런 89년 7월 6일 대삼성전에 달성
    • 2005, 2006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한국시리즈 우승 2회 달성.

  • 보유 기록들(역대 10위 내 기록만 기록)
    • 역대 단일 시즌 평균 자책점 1, 2, 3, 5, 6, 7, 9위
    • 역대 단일 시즌 R/9(9이닝당 실점) 1, 2, 4, 5, 6, 7, 8위
    • 역대 단일 시즌 WHIP(이닝당 출루 허용) 1, 3, 4, 5, 6, 7, 8위
    • 역대 단일 시즌 K/9(9이닝당 탈삼진) 2, 3, 4, 9위
    • 역대 단일 시즌 K/BB(볼넷 대 삼진 비율) 1, 2, 5, 6위
    • 역대 단일 시즌 OAVG(피안타율) 1, 2, 5, 6, 9위
    • 역대 단일 시즌 이닝 5위
    • 역대 단일 시즌 탈삼진 5, 6위
    • 역대 단일 시즌 다승 6, 9, 10위

10위권내의 기록이다. 50위 권으로 확대되면 더 많은 선동열의 이름을 볼 수 있다.

8. 기록 관련 여담

8.1. 선발투수 선동열 논란


에이스 투수를 선발등판으로 고정시킨다는 현대야구의 상식과는 달리 선동열은 선발보다는 계투 등판이 더 많다. 이를 가지고 계투로 낸 성적이므로 순수 선발스탯보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지만, 계투가 선발보다 가치가 낮다고 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소화 이닝이 선발에 비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동열은 전업마무리로 뛰기 전까지는 대부분 시즌 규정이닝을 채웠으며, 1985년부터 1995년까지 등판 경기수 2위, 이닝 3위로 상위권에 있다. 등판일지를 보면 현대야구 기준으로 보면 오마이숄더!를 외칠만 한 등판기록을 볼 수 있다. 팀내 최고 투수를 마구잡이로 등판시키면 혹사논란이 나오는게 일반적인 상식인데(80년대에는 보편적인 기용법이었지만) 선동열의 경우에는 기록 폄하의 논리로 작용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최동원처럼 계륵인 경우는 물론 예외. 애초에 국내에서 선발투수 불펜투수 마무리 투수 세분화한것은 90년대 중반 LG 트윈스 이광한 감독이 최초이고, 다른 감독들의 반응은 "왜 잘 던지는 투수를 4일씩이나 썩혀??" 였고 94년 엘지트윈스가 우승하면서 조금씩 다른팀에도 퍼진것이다.

또한 얼마 안 되는 선발 출장 기록에도 불구하고 한국야구 통산 최다 완봉 기록은 선동열이 제일 많다. 프로 6년차까지인인 91년까지 선동열은 29번의 완봉승을 기록했고 밑에 있는 공동 2위는 완봉 20개로, 이를 달성한 사람은 100완투를 한 윤학길과 300경기 넘게 선발등판한 정민철이다.

현재의 시각으론 선동열이 선발로 출장한 횟수가 적어 선동열의 전체 커리어상 포지션을 스윙맨이나 구원투수로 볼 수는 있겠지만,90년대 마무리 투수는 현재의 1이닝이 마무리가 아니었고 7회 심하면 6회에도 올라와서 경기를 책임지는 중무리였다. 임창용의 경우만 중무리로 알지만 원조는 선동열이었다. 둘다 코감독이... 93년에는 시즌 후반 한경기를 선발로 뛰고 나머지 경기는 모두 불펜으로 나왔는데 정규 이닝을 채울정도 였다. 또한 선발로 등판했을 때는 최고의 선발로 활약했으므로 선동열이 선발로서 부족하다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또한 선동열의 커리어 하이인 86년의 경우에는 선발등판 횟수가 가장 많았던 시즌이라는 점을 생각하도 마구잡이 등판이 오히려 악영향으로 작용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이 부분은 선동열뿐 아닌 80년대 투수 대부분에게 해당한다.

또한 이닝과 실점을 함께 평가하는 전체평가 스탯이라 할 수있는 WAR스탯에서도 선동열이 통산, 단일시즌 모두 1위이다. 단일시즌 투수로 가장 높게 평가되는 장명부의 83시즌보다 86년도의 선동열이 높은 WAR을 기록하는 것에 대한 논쟁이 이미 여러차례 있어왔는데, 사실 한국의 세이버매트릭스 커뮤니티 내에서 이에 대한 논쟁은 이미 지나간 떡밥에 가깝다[34].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장명부의 이닝과 자책점에서 선동열의 이닝과 자책점의 차 만큼의 이닝과 자책점을 기록한 가상의 투수A가 대체 선수 미만의 투수이기 때문. 다시 말해 선동열의 WAR+기여도가 음수인 가상의 투수의 WAR=장명부의 WAR 이다.

8.2. 시기 논란

간단하게 말해 선동렬이 활약한 시대는 야구수준이 매우 뒤떨어졌기에 그의 기록에는 거품이 끼었다는 주장이다. 사실 그 시절에 태어나 자신의 시대에 전설이 된 선동렬의 기록을 이런식으로 평가절하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런데도 이런 좀 억지스런 주장이 제기되는 것은 전형적인 빠가 까를 낳은 케이스이다. 열성적인 팬들이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최동원, 김시진 등과 비교하는데 그치지 않고, 역대 한국최고 투수인 박찬호와 비교하며 그들이 선동렬만 못하다는 주장을 해대는 탓에 이런 논쟁이 생겨난 것이다. 류현진은 좀 다른게 국내야구팬들은 기록상으로 비교해도 조정방어율을 감안하면 선의 근소우세, 미국 진출하기전엔 엠팍을 비롯한 야구 커뮤니티에서 선과 류를 비교하면 선의 약간 우세였고 미국진출 후인 현재는 평가가 달라진것... 한국 야구 수준을 높게 보지 않았던 엠엘비 팬들이 류현진 포스팅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고 트리플A 수준급으로 쳐주는 NPB[35]에서 어느정도 성적을 찍어준 선동열을 좀더 높이 평가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선동열을 높게 쳐주던 논거가 류현진이 상위리그에서 더 좋은 성적을 내면서 완전히 뒤집어 졌다.

선동열이 KBO 역사에 남을 방어율을 기록했던 시절, 그에 가려 방어율 타이틀을 따지는 못했지만 방어율 순위 수위권을 기록했던 다른 투수들의 성적도 2000년대 중후반의 방어율 1위 투수들보다 훨씬 뛰어났던 점을 생각하면 선동열의 전설적인 0.대 방어율이 조금은 현실감 있어 보이는게 사실이긴 하다. 86년 방어율 순위는1위 선동열: 0.99 2위 최동원: 1.55 3위 최일언: 1.58 4위 김용수: 1.60 5위 김건우: 1.80 6위 장호연: 1.90 그러나 스탯티즈가 폐쇄되기전 86 선동열 시즌은 83 장명부 99 이승엽 03심정수를 제치고 역대 WAR 최고 시즌을 찍었기에 압도적이었다는걸 부인하기 어렵다. 108여경기 시즌에서 262이닝 던지고 0.99 찍은것은 역대금 투고타저 시즌이라하더라도 압도적인것은 맞다.조정방어율이 높아도 80년대라 인정 안한다고 하는 개드립이 있는데 조정방어율은 시대를 감안하는 보정으로 그런데 쓰라고 만든 스탯이다. 스탯에 대한 이해 자체가 떨어져서 개념을 모르는 사람들의 개드립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70년대 투고타저 시절에도 1점대 2점대가 수두룩 했지만 역대급으로 조정해서 현재의 스탯과 비교해 거품낀것이라곤 해도 그 당시 리그 수준이 허접했다는 표현은 하지 않는다.

선동열이 외국인 타자를 접해보지 않았다고 폄하 받는데 선동열은 국내에서 외국인 타자들을 상대한 적은 없지만 96년에서 99년까지 외국인 영입이 무제한[36]인 일본프로야구에서 뛰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은 그냥 맹목적인 까에 가깝다.. 98년 첫 KBO 외국인 선수가 한국에 왔을때 NPB에서 1996년엔 털렸지만 1997~1999년에는 양호한 활약을 했고 양리그의 용병 수준차이는 말하면 입아픈 정도...

역사가 유구한 메이저리그에서도 19세기 스핏볼 시절 스탯까지 인정하고 2차대전 이전 투수 월터 존슨을 역대 최고 투수로 뽑는데 그 시절 수준드립으로 폄하하지 않는다. 사이 영의 100년전의 511승도 현대 야구에선 나오기 불가능하지만 기록은 기록으로 존중해 준다. 동시에 월터 존슨사이 영의 기량이 시대를 초월해서 랜디 존슨이나 클레이튼 커쇼보다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다. 있는게 신기한거지 피지컬&훈련법이 다른데

9. 대중문화

한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투수로 알려져서 대중문화의 등장인물로 나오는 일이 좀 있다. 2012년 영화 퍼펙트 게임에는 양동근이 선동열 역을 맡았다. 2005년 영화 스카우트에서는 선동열이 사건의 주된 모티브가 되며 등장씬은 거의 없다. 거의 유일한 등장신으로는 마지막에 갈비 15인분을 먹는 장면 뿐... 한지붕 세가족의 순돌이 역의 아역배우 출신 이건주가 선동열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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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광산구 송정동 출신이다. 출생 당시에는 전라남도 광산군이었다.
  • [2] 사실 수석코치로 오기 전인 2001~2003 시즌은 김응용 감독의 부름을 받아, 스프링캠프에서 인스트럭터로 선수들을 지도한 적이 있다.
  • [3] 2013년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LG 선수들로 채워지면서 졸지에 일일 감독을 하게 되었다. G-STAR 참고로 류중일 감독도 전년 올스타전에 비슷한 일을 겪었다. 하지만, 현재윤이 부상을 입어 김태군이 대신 선발되는 바람에 결국 LG 싹쓸이는 실패... 하지만 김태군은 LG 출신이란게 함정(...)
  • [4] 세상에... 감독에게도 전용 응원가(?)가 있다! 승장 감독 인터뷰 시에 관중석에서 응원가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KIA 한정. 삼성 시절에는 그런 거 없었다. 이 곡은 오정복이 삼성 라이온즈 시절에 잠시 쓴 적이 있었으며, 안양 KGC인삼공사 농구단에서 공격시 응원가로도 쓴다.
  • [5] 대구 대교구 100주년 기념 성당의 건립에 1억원을 기부한 바 있다.
  • [6] 페넌트레이스 3위팀 롯데를 꺾음.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두산에 패배
  • [7] KIA 감독을 부임한 후 대 삼성전 승률이 3할에도 못미치면서 푸른피의 멍게라는 별명도 추가되었다.
  • [8] 86, 87, 88, 89, 91, 93
  • [9] 둘다 2004년말 선동열 감독 취임 즈음에 FA로 삼성이적. 이미 그 전해에 박진만의 키스톤 콤비인 박종호도 빼온 상태
  • [10] 더군다나 2006년 한국시리즈, 삼성은 그 해 우승의 대가로 팀 역사상 최강의 에이스를 잃게 된다. 그리고 445라는 암흑기에 잠기게 된다.타 팀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삼성에게 445는 팀 역사상 2번째 찾아온 암흑기 성적이다...
  • [11] 물론 이렇게 쥐어짜낸 후유증은 상당히 오래갔다. 특히 팀의 대들보가 되야할 신용운, 한기주를 단기간에 망가트린 서정환의 투수 혹사는 지금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 [12] 정작 메이저리그에서 그에게 오퍼를 했었다는 자료가 있는지조차 미지수다. 메이저 오퍼 발언도 선동열 자신의 주장과 그 이야기를 들은 국내 스포츠 언론들만 언급하는 정도일 뿐이다.
  • [13] 징병검사에서 현역 판정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는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경력으로 오늘날의 예술체육요원 격인 병역특례를 받았는데, 당시의 병역특례는 국내에서 5년간 활동해야 해외진출이 가능했다. 결국 해태에서 이 기간을 채우고 현역으로 가진 않았다. 당시 치질이 있었는데 제대로 치료 안 받고 술을 마셔가며 악화를 시켜서 내심 면제 판정도 기대했다고 한다. 선동열 본인은 해태 구단 관계자와 병무청이 짰다고 주장한다. 어차피 현역은 안 갈 것이지만 현역 판정을 내려야 현역 안 가기 위해서 해태에 갈 것이라는 판단으로. 보통 검사 즉시 판정을 내리는데, 자신이 신검을 받을 때는 즉시 판정 결과를 통보하지 않고 기다리라 하고는 귀가 후에 현역 판정으로 연락을 받았다고. 농구의 이충희가 그것 때문에 스페인 진출에 실패하고, 축구의 김주성은 서른이 넘어서야 독일에 진출할 수 있었다.
  • [14] 그러나 사실은 전기로 배정된 경기를 하나 뛰었다. 85년 9월 22일 MBC전으로 원래는 전기에 치러져야 했을 경기인데 우천 등의 이유로 후기에 치러졌으나 분류상으로는 '전기' 경기가 되었다.
  • [15] 이승엽을 국민타자, 서장훈을 국보급 센터라 칭하는 것과 동일하다.하지만 선동열 자신이 자신의 감독 커리어로 이미지를 아주 크게 깎아먹었다. 물론 기아 타이거즈를 제외한 타 팀 팬들에게는 국보급 감독이다(...)
  • [16] 실제로 선동열이 불펜에서 몸을 풀면 타자들이 스윙을 서둘렀다는 증언이 있다.
  • [17] 그러나 '마무리'라기에는 3~4이닝 마무리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 [18] 흑역사인 1996년 시즌 중간계투로 나와 던진 모습. 결국 점수는 내줬다. 보다시피 구위는 문제가 없던 시절. 오히려 해태시절보다 구속은 더 빨라졌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 [19] 1996년도 K/9는 11을 조금 넘는다. 또한 주니치 시절 탈삼진을 두번째로 많이 잡은 시즌도 1996년도다. 주니치 시절 기록 참고바람
  • [20] 2군에 내려가서 자기 빨래도 직접해야하고 적응이 어려웠던지 1996년 시즌이 끝나자 짐싸서 바로 귀국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이러한 심리적 압박과 적응의 어려움은 지바 롯데로 이적했던 이승엽도 겪었다.
  • [21] 통산 15타수 5안타(모두 단타) 무볼넷이기 때문에 타율은 .333이지만 가장 잘 공략했다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 수도.
  • [22] 여담으로 의외로 임창용은 일본시절 세이버스탯이 클래식보다 많이 떨어진다. 노블론을 찍은 시절도 FIP로 따지면 동시즌의 마무리중 탑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의외로 아이큐피쳐이신듯
  • [23] 페드로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 메이저리그 타자들과 지금의 타자들은 차원이 다르다는 건 누구나 안다. 90년대 후반 NPB 타자들과 2000년대 후반 NPB 타자들이 다르다는 것도 누구나 다 안다....
  • [24]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 한 누리꾼이 자신이 지금 오키나와에 있는데 지금 선동렬이 촌장에게 멸치 두 박스를 주고 있다고 제보했다.
  • [25] 이 당시에 삼성팬들 사이에서 나온 드립이 '선동열이 삼성을 우승시킨게 아니라, 삼성의 시스템이 선동열을 우승시켜준거다'지금와선 맞는말인거같아...
  • [26] 참고로 신인드래프트에서 즉시전력 운운하면서 (대수비급) 어정쩡한 대졸들만 몰빵지명하는 것은 한화 이글스가 암흑기로 접어들기 직전에 나타났던 모습이다. 어정쩡한 대졸몰빵 지명 => 원툴(혹은 무툴) 대졸로만 가득한 2군 => 군입대기한에 따른 병역문제 => 주전은 노쇠화 되가는데 올라오는 신인은 없고 => 종이장처럼 얆아지는 뎁스. 이게 한화 이글스가 암흑기에 접어드는 과정이었는데 KIA 타이거즈가 거의 똑같이 따라가고 있다.
  • [27] 박지훈이 입단 1년차에 맹활약했지만, 그 뒤론 개점휴업 상태이다. 입단동기인 홍성민도 첫 해에 3점대 방어율을 기록하였으나 김주찬의 보상선수로 롯데로 가게되었다.
  • [28] 스승인 김응용도 21세기에 20세기의 야구를 버리지 못해 결국 한화 이글스에서 또 다른 의미의 전설을 써내려가고 있다. 한편 김성근치바 롯데 마린즈에서의 코치 경험 등으로 자신의 야구관을 과감히 보완해나가면서 7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명감독으로 칭송받고 있다. 이에 대해 한 한화 이글스 갤러리의 모 갤러가 남긴 일침이 있는데, 바로 김응룡도 과거의 김응룡이 아니고 김성근도 과거의 김성근이 아니다다. 어찌 보면 두 감독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것 같지만 전자는 그대로 멈춰 있었지만 후자는 진보했기 때문에 둘은 다르다. 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 [29] 특히 조영훈의 경우에는 삼성-KIA 시절 선동열 감독이 기회를 많이 부여했던 경우이다.
  • [30] 라틴 문자로 표기할 때도 제각각. 이런 거야말로 통일하고, 짜장면을 돌려달라.!
  • [31] 어느날 양승호가 훈련 시간보다 일찍 야구장에 들어왔는데 그 이유가 낮잠 좀 자려고였다고 한다.(...)
  • [32] 비콤을 만드는 그 회사 맞다.
  • [33] 참고로 인터뷰 등을 보면 실제 선동열의 목소리는 의외로 괜찮은 편이다.
  • [34] 다만 이를 두고 '내가 보기엔 장명부가 더 뛰어난데 WAR은 과연 엉터리 스탯이구나'(...)라는 주장 덕택에 논쟁이 더 커진 감이 없지 않다.
  • [35] 선동열이 활약한 90년대 NPB는 메이저 진출이 본격화 되기전 수퍼스타들이 많아서 미국과 수준차이면에서 보면 오히려 현재보다 수준 높다는 평이 있다.
  • [36] 1군 엔트리는 3명 출전 제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