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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last modified: 2018-10-17 20:15:04 Contributors

신라의 역대국왕
26대 진평왕 김백정 27대 선덕여왕 김덕만 28대 진덕여왕 김승만

[1]
시호 선덕왕(善德王)
칭호 성조황고(聖祖皇姑)
연호 인평(仁平)
김(金)
덕만(德曼)
생몰년도 음력 580년 ~ 647년 1월 8일 68살
양력 580년 ~ 647년 2월 17일
재위기간 음력 632년 ~ 647년 1월 8일 [2]
양력 632년 ~ 647년 2월 17일 (15년)

Contents

1. 개요
2. 왕위에 오른 뒤의 행보
3. 죽음에 대하여
4. 대외적인 압박에 시달린 이유
5. 얼굴마담 설에 대해
6. 기록들
6.1. 삼국사기의 기록
6.2. 삼국유사의 기록
6.3. 지귀 설화
7. 각종 매체에서의 선덕여왕
7.1. 드라마 선덕여왕의 선덕여왕
7.2. 드라마 대왕의 꿈의 선덕여왕
7.3. 외국 대중문화에서의 선덕여왕
7.3.1. 햄버거(?)
7.3.2. 디아블로3

1. 개요

신라의 제27대 . 연호는 인평(仁平). 진평왕마야부인의 딸로 한국 역사상 최초로 여왕이 되었다.

사실 역사서에서는 모두 '선덕왕'으로 기록하는 데도 선덕여왕으로 부르는 것은 37대 왕인 선덕왕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보면 될 것이다.[3] 다만 삼국유사 기이 제1의 '선덕왕 지기삼사'에서는 '선덕여대왕(善徳女大王)'이라는 표기도 나온다.

정사와 야사의 기록이 다른데 삼국사기에는 장녀, 화랑세기에는 차녀로 기록되어 있다.[4] 신라는 골품제로 인해 성골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어서[5] 여성이었음에도 성골이란 이유로 그녀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서동 설화 내용을 생각해보자면, 조카가 계속 신라를 침략하는 바람에 싸워야 하는 구도가 성립한다. (선화공주의 아들인 의자왕은 선덕여왕의 조카가 된다.) 물론 서동 설화 역시 논란에 휩싸여 있다. 해당 문서 참고.

그녀가 왕위에 오르기 전 해에 대규모 반란기획 사건이 있었다.

진평왕 53년
" 여름 5월,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반란을 꾀하였다. 임금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붙잡아 동쪽 시장에서 목 베고 아울러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에 이르렀으나, 처와 자식을 보고 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걸어 총산(叢山)까지 돌아오다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헤진 나무꾼의 옷으로 바꿔 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것이 단순 반란인지, 아니면 여성인 선덕여왕의 즉위를 반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사건이 있은 후 진평왕이 세상을 떠난 것을 보았을 때 진평왕이 몸이 좋지 않고, 후계자로 선덕왕이 지목 된 상황이라 유추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진압한 것은 진평왕으로 되어 있는데 이 진압에 여왕과 김춘추가 동참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흔히 선덕여왕의 자비롭게 따뜻한 모습과 달리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는 세력을 몰살시킬 만큼 용의주도하고, 냉혹함 일면을 가진 전제군주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훗날 아버지와 비슷하게 비담의 반란으로 생을 마감했다.

2. 왕위에 오른 뒤의 행보

선덕여왕이 몇 살에 왕위에 올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버지 진평왕이 굉장히 오래 재위한 것과 조카인 태종무열왕이 603년생이었던 것으로 보아, 왕위에 올랐을 때 아무리 나이를 젊게 잡아도 40대 후반의 장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국인들이 바친 칭호라는 '성조황고(聖祖皇姑)'에서 굳이 '할머니'를 뜻하는 '姑'자를 쓴 것을 지적해서, 이 칭호도 선덕여왕이 즉위했을 때 고령이었음을 암시한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단순히 존경의 의미에서 굳이 '姑'자를 썼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고령이었기 때문일지 즉위 5년(서기 636) 3월, 임금이 병이 들었는데 의약과 기도가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생각보다 몸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선덕여왕은 즉위한 뒤 기록으로 남을만한 대사면을 단행하여 자신이 왕이 된 것을 널리 알리게 된다. 그러나 백제고구려가 여왕이라는 이유 때문에 만만하게 보고는, 신라에 대한 정치적인 압박을 개시한다.

다만 상대국 왕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공세가 강했을지는 의문이다. 진평왕 기사를 보면 즉위 40년 대 부터 고구려와 백제가 맹공을 가했다. 특히 백제는 신라 변경을 쳐서 주요 성을 함락하고, 백성을 300명 가량 잡아 갔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당나라에게 고구려의 침공으로 길이 막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고구려와 백제의 공세는 강했다. (그나마 김유신이 낭비성을 함락한 기사가 있다.)

하지만 나라 사정은 좋지 않았다.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고, 지진이 일어나는 등 여러 재해가 끝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6] 그런데다 선덕여왕 즉위로 촉발 된 귀족들의 대립으로 대규모 반란 사건까지 있으니 선덕여왕은 매우 혼란스러운 나라를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선덕여왕 3년(634)에는 분황사를 건립하고, 당나라사신을 보내 "주국낙랑군공신라왕"으로 인정 받았으며, 7년(638)에는 백제가 칠중성(오늘날의 파주 적성면)을 공격했으나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한다. 하지만 11년(642)에는 의자왕의 역습으로 미후성을 비롯한 40여개의 을 빼앗겼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공격으로 당항성까지 빼앗아 사실상 당나라와의 외교라인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다. 이에 마지막 수단으로 직접 사신을 당나라로 보냈지만 당태종"나의 사촌을 보낼 테니 신라의 국왕으로 삼아 섬겨라."라고 말했다.(...) 이놈 봐라?

영토를 뺏기고 외교라인도 끊어진 상태에서 내외의 공포가 가중되자, 이를 불교의 힘을 빌어 해결해 보고자 하여 자장 법사를 당나라로 보내 불법을 구하게 했고, 이후 재위 14년(645)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의 건의로 신라삼보의 하나가 되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기도 했다.

비록 나라가 위기에 몰리기는 했지만, 선덕왕 나름에 자구책을 내놓았다. 바로 김유신이었다. 그 전까지 대장군은 알천이었는데 선덕여왕 13년 가을에 김유신이 대장군이 된다. 그리고 백제 변경을 쳐 일곱 성을 빼앗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백제가 쳐들어오자 김유신은 두 차례나 가서 공방전을 벌여야 했다. 그리고 당나라와 고구려가 전쟁을 벌이자 3만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치는 등 나름 군사적 행동을 단행했다. 문제는 이 틈을 타 백제가 일곱성을 빼앗았다.

고구려를 친 배경에는 고구려와의 외교라인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선덕여왕 때 김유신이 등장하는 시기도 이 때이다. 고구려와의 동맹이 실패로 끝나고 김춘추가 위기에 빠지자 선덕왕은 김유신에게 명을 내려 구출하도록 하였다. 그 후 김유신은 대장군이 되어 백제를 치고, 선덕여왕이 나라의 운명이 김유신에게 달려 있다 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신하들의 반발을 이기기 어려웠는지 비담을 대등으로 삼았다. 하지만 16년(647)에는 신하인 비담염종이 "여왕이 무능하여 나라가 혼란하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며(비담의 난), 이 반란은 김유신에 의해 제압되나 선덕여왕은 그 해 세상을 떠났다.

3. 죽음에 대하여

선덕여왕의 죽음에 대해선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아 논란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선덕여왕이 죽은 날을 1월 8일이라 기록하고 있고, 진덕여왕조에선 "비담이 1월 17일에 목이 베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김유신 열전에서는 "비담과 김유신이 10일간 공방전을 벌였다"고 전한다.

그렇게 본다면 비담이 선덕여왕을 시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선덕여왕이 나이가 많이 들었고 약과 기도도 효험이 없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선덕여왕이 노환으로 죽을 날이 다가오자 이를 노리고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쇼크로 인한 죽음의 가능성도 있다.

또는 비담과 염종이 화백회의에서 선덕여왕의 퇴위를 결정하자, 자신들의 입지가 위태로워짐을 염려한 김유신과 김춘추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비담이 난을 일으킨 명분이 "여왕이 무능하다"라는 것이었으니, 잇단 나라의 혼란으로 귀족 세력들이 선덕여왕을 퇴위시키고 비담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명확한 근거가 없으므로 이 또한 가설의 영역.

4. 대외적인 압박에 시달린 이유

선덕여왕의 치세가 혼란했던 이유는 고대 국가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고대 국가의 왕은 뛰어난 장수이기도 해야 했는데, 전쟁에 나갈 수 없었던 여자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고대에 장수를 맡으려면 일단 체력이 남달라야 했다. 주요 측근인 김유신 등이 이를 어느 정도 대처하였지만, 역시 본인이 직접 나가는 것만큼의 효과를 보진 못했다.

다만 다르게 볼 수 있는 견해도 존재한다.

선덕여왕 통치시기 때 비교적 백제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특히 선덕여왕 5년에 개구리 소리를 듣고 필탄과 알천을 보내 백제군을 격멸시킨 이야기는 비교적 유명하다. 그리고 칠중성 전투에서 천지가 흔들렸다는 것은 그만큼 고구려가 맹공을 펼쳤다는 것인데, 이를 알천을 보내 막아내고, 반격하여 많은 고구려군을 죽이고 생포했다는 기록에서 단순히 여왕이 직접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 후 신라가 하슬라주의 군사력을 배치했다는 기사가 있기에 칠중성 전투로 신라가 군사력을 북쪽에 집중시켰고, 상대적으로 서쪽의 방위력이 떨어졌을 수 있다. 그리고 이 틈을 노려 백제가 총공격을 가했을 것이다. 그리고 낙하산 인사인 김품석의 실책이 맞물려 대야성은 함람된다. 곧바로 백제가 고구려와 같이 당황성을 함락하려고 했다. 이때 신라 사신이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우리 왕은 일의 형편이 궁하고 계책이 다하여, 오직 대국(大國)에게 위급함을 알려 온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선덕여왕 개인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형편이 궁하다 했으니, 신라의 국력으로 백제와 고구려 두 강대국을 동시에 막기에는 역부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 상황은 선덕여왕이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라는 두 강대국을 상대하는 것이 신라로서 상당히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고구려가 나제동맹의 힘에 밀려 점차 국경선을 뒤로 물린 것이나, 아버지(근초고왕)를 도와 백제의 전성기를 도모한 근구수왕이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에 여러 번 북진의 좌절을 맛보았다는 것은, 한 나라가 두 나라를 맞이해 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5. 얼굴마담 설에 대해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역사자료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재위할 당시 정권의 실권자는 진골 중에선 그나마 혈통이 성골에 가까웠던 김용춘, 김춘추 부자일 가능성이 있다. 신라는 골품제로 인해 성골에게만 왕위 계승권이 있었기 때문에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실권은 김용춘이 갖고 있었다는 것. 참고로, 신빙성이 떨어지는 화랑세기 필사본에 의하면 성골의 수를 늘리기 위해 남편을 3명 두었는데, 그 중 하나가 김용춘이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 가설에 대해선 반대 근거도 만만치 않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3호 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선덕여왕의 20살 때의 모습을 본딴 것이라 추정한다. 신라의 왕즉불 사상과 더불어 추측해 본다면, 덕만공주(선덕여왕)를 보살에 비유한 것은 진평왕의 후계 작업이라는 추정인 것이다. (진평왕은 똑같은 모양의 목상을 스이코 여왕이 지배하던 일본으로 보냈으며, 그것이 현재 국보 1호인 고류지 반가사유상이라는 해석이 있다. 자세한 건 반가사유상 항목 참조.)

그 당시 신라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있었던 상태다. '덕만'이라는 이름 자체도 불교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6. 기록들

6.1. 삼국사기의 기록

一年春一月 선덕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二月 대신 을제가 정치를 총괄하다
一年夏五月 가물다가 비가 왔다
一年冬十月 백성들을 진휼하다
一年冬十二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秋七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年秋八月 백제가 침략하다
三年春一月 연호를 인평으로 바꾸다
三年 분황사가 완성되다
三年春三月 우박이 내리다
四年 당나라에서 왕을 책봉하다
四年 영묘사가 완성되다
四年冬十月 이찬 수품을 보내서 위문하다
五年春一月 이찬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다
五年春三月 왕이 병이 들다
五年夏五月 옥문곡에서 백제의 군사를 치다
五年 자장이 당나라에 들어가다
六年春一月 이찬 사진을 서불한으로 삼다
六年秋七月 알천을 대장군으로 삼다
七年春三月 큰 돌이 저절로 옮겨갔다
七年秋九月 누런 꽃이 비처럼 내리다
七年冬十月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다
七年冬十一月 알천이 칠중성에서 고구려 군사와 싸우다
八年春二月 하슬라주를 북소경으로 삼다
八年秋七月 동쪽의 바닷물이 붉게 되다
九年夏五月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을 청하다
十一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一年秋七月 백제가 서쪽의 40여 성을 빼앗다
十一年秋八月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을 빼앗다
十一年秋八月 대야성이 함락되다
十一年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다
十一年 김유신을 압량주의 군주로 삼다
十二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二年春三月 자장이 돌아오다
十二年秋九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三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三年 당태종이 상리현장을 고구려에 보내다
十三年秋九月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다
十四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四年 김유신이 백제의 침입을 막다
十四年春三月 황룡사 9층 목탑을 창건하다
十四年夏五月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다
十四年冬十一月 이찬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다
十六年春一月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키다
十六年春一月八日 왕이 죽다

선덕여왕부터 삼국사기 5권이 시작된다.

6.2. 삼국유사의 기록

삼국유사에서는 이른바 '지기삼사(知幾三事)'라는 고사로 알려진 신비한 능력을 지닌 여왕으로 묘사되는데, 당태종나비 없는 모란꽃 그림을 보내자 자기가 여왕이라는 걸 비웃는다고 간파했다든가[7] 백제의 별동대가 서라벌까지 잠입하자 개구리가 우는 걸로 이를 간파해 내고는 특공대가 숨어있는 곳을 가르쳐줘서 섬멸했다든지[8][9], 자신의 무덤을 도리천에 써달라고 하여 낭산에 장사지냈더니 후에 문무왕이 선덕여왕릉 밑에 사천왕사를 세워 선덕여왕의 예언이 적중했다[10]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거 봐서는 대무당이었을지도 모른다.

6.3. 지귀 설화

선덕여왕과 관련된 설화 중 하나다. 선덕여왕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 지귀가 선덕여왕이 불공 드리는 에서 여왕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탑 아래에서 지쳐서 잠이 들자, 선덕여왕이 안쓰러웠는지 자신의 팔찌를 지귀의 가슴 위에 놓고 갔다. 지귀는 너무 기쁜 나머지, 가슴부터 온몸이 불타올라 탑까지 태우고 결국 귀신이 되었다고 한다.

7. 각종 매체에서의 선덕여왕

정작 선덕여왕 본인은 결혼을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배역을 맡은 배우들은 배역을 담당할 당시 죄다 유부녀들 뿐이다.

7.1. 드라마 선덕여왕의 선덕여왕

선덕여왕(드라마) 항목 참조.

7.2. 드라마 대왕의 꿈의 선덕여왕

배우는 박주미홍은희(아역 : 선주아).

진평왕의 차녀이자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공주의 여동생이다. 김유신과도 외사촌 사이이다. 그래서 작중에서 김유신을 부를 때 공식 석상이 아닐 때는 격의 없이 "유신아"라고 이름을 부른다.[13]

항상 나라의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신중하고 사려깊은 행동으로 아버지인 진평왕으로 부터 무한신뢰를 받고 있으며, 백성들로부터도 관음보살의 현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광기를 보이는 삼촌인 국반 갈문왕과의 혼인도, 본인의 안위보다는 국가를 우선시하는 생각에서 결정했던 것. 진평왕이 덕만공주가 아들이 아님을 한탄할 정도. 또한 극중에 진평왕이 덕만공주의 자문을 구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된다.

극 초반의 모습만을 봤을 땐 청순가련형의 캐릭터 같았지만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나, 그 누구도 꼼짝하지 못했던 증조할머니 사도태후 앞에서 자기 할 말을 다하는 등, 상당히 강단있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해당 역할을 맡고 있던 박주미가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으로 하차가 불가피해지면서 담당 배우가 홍은희로 교체되었다.

뭔가 즉위 전후로는 비담의 이간질에 순간적으로 흔들리거나, 다소 어긋난 애국심과 지나친 혈기로 독선적인 행보를 보이는 비담을 통제할 엄두도 못내다가 화가 쌓여서 성질을 내는 등, 미묘하게 무능한 인상을 준다.(…)

현 담당 배우인 홍은희가 박주미에 비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박주미가 일찍 하차하게 된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다소 있다(…).

7.3. 외국 대중문화에서의 선덕여왕

놀랍게도 WOD 시리즈의 제작사인 화이트 울프 사의 Exalted와 werewolf :The Appocalypse에 등장한다. Sondok, Queen of Silla로써... 물론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는 창작 캐릭터로 변신여우 종족의 여왕이다.

7.3.1. 햄버거(?)

드라마의 붐을 타고 등장한 햄버거 상품. 희한하게도 햄버거빵 부분이 고로케로 되어 있다. 덕분에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기름이 뚝뚝 떨어진다고 한다.

참고로 캐치프레이즈(?)는 드라마의 그것을 패러디한 "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고, 시대의 몸짱이 된다."

7.3.2. 디아블로3

2.1패치로 등장한 전설 보석 신속의 곡옥에 그녀의 언록[14]이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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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대구 부인사 숭모전에 안치된 선덕여왕 어진. 1990년대에 전각을 다시 지으면서 유황(당시 경북대 교수)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것이다.
  • [2] 재위기간이 정사와 야사에 5년정도의 차이가 있다.
  • [3] 본 문서에서 가리키는 인물은 德王이고 37대 왕은 德王이다.
  • [4] 다만 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위가 의심되는 상황이라... 해당 문서 참조.
  • [5] 여기에 대해서 진위가 검증되지 않은 화랑세기는 "진평왕이 마야부인과 사별한 뒤 새로 승만부인을 아내로 맞이했고, 승만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저 아들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 [6] 여러 이상현상은 반란을 은유한 것일 가능성도 높다.
  • [7] 당태종이 그러한 그림을 보낸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당나라에서는 모란꽃과 나비가 같이 그려진 그림을 선물하는 것은 대단한 실례로 여겨졌다. 당시 당나라 사람들은 모란꽃을 부의 상징으로, 나비를 '영원하지 못함'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즉 모란꽃과 나비가 한 그림에 같이 그려진 것은 '영원하지 못한 고갈될 부'였으며, 선물을 할 때는 반드시 나비를 뺀 모란꽃 그림을 선물했다. 결국 문화의 차이로 생긴 해프닝이라는 것이다.
  • [8] 삼국유사에 보면, 영묘사에 한겨울인데도 개구리가 울어대자 선덕여왕이 군사 2천을 보내 여근곡에 숨어있는 백제 군사 500을 섬멸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떻게 아셨냐는 신하들의 질문에 "개구리가 성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군사의 형상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부다. 여자는 음이요, 그 빛은 흰빛이니 흰빛은 곧 서쪽 방위이다. 이로 인해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생식기가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곧 죽는 것이니, 적병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라고 했다는데... 신라가 성에 대해 아무리 개방적이었다 해도, 여왕이 공식석상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 [9] 하지만, 이 이야기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백제의 별동대가 서라벌까지 잠입하는 것을 허용할 정도로 신라의 국방 경비가 지못미였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 [10] 도리천은 불교에서 사천왕천의 위쪽을 이야기한다.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선덕여왕릉 밑에 세웠으니, 선덕여왕릉은 도리천이 되는 셈. 일부에서는 문무왕이 사천왕사의 권위를 높이려고 지어낸 이야기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 [11] 이요원은 결혼을 아주 일찍 했다.
  • [12] 배우 유준상의 아내.
  • [13] 진평왕과 만명부인은 아버지가 다른 남매 사이다. 진평왕은 만호부인과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태자 사이에서 낳았고, 만명부인은 진흥왕의 동생인 김숙흘종 사이에서 낳았다. 잠깐, 그럼 얘들은 촌수가 어떻게 되는 거야.
  • [14] "두뇌와 신체가 적보다 빠르기만 하다면, 적보다 강할 필요는 없다." - 선덕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