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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last modified: 2015-10-25 16:54:57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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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太后(Xī tàihòu, 시타이호우)

  • 생몰년 : 1835년 11월 29일 ~ 1908년 11월 15일 (72세)
  • 청의 황태후 : 1861년 11월 11일 ~ 1908년 11월 15일 (47년 4일)

Contents

1. 일생
1.1. 칭호
1.2. 후궁에서 황태후로
1.3. 권력 독점
1.4. 무술정변과 의화단 운동
1.5. 죽음
2. 평가
2.1. 중국의 마리 앙투아네트?
2.2. 이화원 문제
2.3. 사후에 당한 재난
2.4. 후대의 평가
3. 2차 매체에서의 등장

1. 일생

1.1. 칭호

중국 나라 말기의 인물. 청나라 말기 보수파의 대표격. 실사판 진구황후.

청의 제9대 황제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후궁이라 약간 미묘하지만)이자 큰이모.

서태후는 그녀의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별칭으로, 공식 명칭은 효흠현황후 예허나라씨(孝欽顯皇后 葉赫那拉氏). 그 외에도 자희태후(慈禧太后), 노불야(老佛爺)[1] 등의 이명이 있다.

시호는 다 써놓자면 효흠자희단우강이소예장성수공흠헌숭희배천흥성현황후(孝欽慈禧端佑康頤昭豫莊誠壽恭欽獻崇熙配天興聖顯皇后)로 이걸 줄여서 효흠현황후(孝欽顯皇后)라고 한다. 중국 황제들 시호는 다 저렇게 길게 써놓는 거야?! 조선도 김

영미권에서는 보통 'Empress Dowager Cixi'라고 부른다. Cixi는 위의 시호 중 자희(慈禧)의 중국발음.

본명은 행정(杏貞), 혹은 행아(杏兒)라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상술했듯이 별명은 저렇게나 많은데 정작 본명이 확실하지가 않다(…). 펄 벅의 소설 '서태후'에서 본명이 예허나라로 나오긴 하지만 이건 이름이 아니라 성씨이다.

심지어는 출신지도 확실하지 않아서 안후이성 우후설, 내몽골 자치구 후허하오터설, 산시성 창치설의 3가지 출신설이 있다. 그 외 그녀의 부친인 혜징이 당시 베이징에서 근무하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베이징의 피차이 후통(劈柴胡同)이 그녀의 출생지라는 주장도 있다.

부친은 만주 양람기인(鑲藍旗人) 예허나라 혜징(惠徵)이고, 모친은 푸차씨(富察氏)이다. 후일 그녀의 친정은 만주 양람기에서 만주 양황기(鑲黃旗)로 편입되었다.

1.2. 후궁에서 황태후로

본래 의귀비(懿貴妃)란 직첩을 받은 후궁이었지만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 동치제를 낳자, 후계자의 생모로서 황후에 준하는 지위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함풍제가 1861년 사망하면서 아들 동치제가 6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함풍제의 정식 황후인 동태후[2]와 같이 섭정을 행하면서 권력을 잡게 된다. 서태후는 동치제의 생모이기에 성모황태후가 되었고, 동태후는 함풍제의 황후인지라 모후황태후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권력은 대부분 권력욕이 있었던 서태후가 가지고 있었다고 하나, 두 태후 간의 알력 다툼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태후가 어느날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뇌진탕으로 사망하면서 권력은 서태후가 장악하게 되었다.

두 태후 외에도 황실의 어른으로서 정치에 관여하고 있던 공친왕(함풍제의 동생) 때문에 청황실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동치제가 장성하여 친정을 시도하자 이번엔 모자간의 갈등이 벌어졌다. 이는 서태후가 매우 엄격하여 모자간의 사이가 멀어진 탓도 컸다. 이런 혼란이 계속 되는 가운데 동치제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1.3. 권력 독점

동치제~광서제 연간에는 양무운동이 진행되었다. 서태후 본인도 청나라의 정신은 그대로 간직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지만 결과는 뭐... 청일전쟁에서 다 나온다.
단, 양무개혁 당시 군함을 살 돈을 서태후가 유용하여 베이징에서 유명한 이화원을 지었다는 말은 근거가 부족하다. 정확히 말해서 그 돈은 다시 메워졌기 때문이다(더구나 이화원은 청이 아직 쇠하지 않았음을 보이는 과시용 건축이기도 했다). [3]사실 청일전쟁의 패배 원인은 지휘관의 삽질 때문으로, 청나라 해군의 전력은 규모면에서 매우 거대했다.

동치제 사후엔 1875년 순친왕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즉 동치제의 사촌동생이자 자신의 조카뻘인 아이를 양자로 들여 즉위시켰는데, 이 사람이 광서제다. 당시 황제는 4살 정도에 불과했기에 서태후가 다시 섭정을 했다. 순친왕은 서태후에게 설설 기었으며, 1881년에는 동태후가 급사하였는데, 암살이었다는 추측이 있으나 증거는 없다. 이후 광서제가 16세가 되면서 명목상의 친정을 시작했지만 서태후는 물러나지 않았고, 고로 정권은 여전히 그녀의 차지였다.

1.4. 무술정변과 의화단 운동

광서제는 유웨이와 같은 젊은 사상가들을 곁에 두었고, 이들은 변법자강운동을 통해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비롯한 근대적인 개혁을 꿈꾸었다. 그러나 광서제가 자신의 군대를 가지려하자 처음에는 지지하던 서태후는 곧 지지를 철회하게 된다. 이에 변법파는 서태후를 제거하려 했고, 위안스카이는 변법파를 배신하여 이를 서태후에게 알린다. 서태후는 자신을 따르던 청 왕조의 보수파들과 함께 "무술정변"을 일으켜서 광서제를 유폐하고 그를 따르던 변법파들을 대거 숙청, 결국 변법자강운동은 100일 천하로 끝나고 만다.

개혁 세력은 그저 황제와 측근들이 이런저런 법안을 제정하고 그를 공표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줄 알았지만, 청나라의 행정이 이를 소화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또한 당시 청나라는 18~19세기의 인구 폭증으로 인해 이미 행정력에 큰 문제가 있었고, 이런 상태에서 소위 "개혁"을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덧붙여 광서제는 어린 시절 부모와 헤어져 황제 교육을 받아야 했고, 엄격한 서태후에게 눌린 탓인지 자기의 의지를 강하게 밀고 나가지 못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한 예로 후궁을 들일 때마저도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서태후가 권하는 여자가 다르자, 잠시 고민 후 말없이 포기, 고르기로 한 후궁 전부를 서태후가 권하는 여자들로 들였다는 일화가 있다.하지만 광서제 항목을 보면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어디까지나 이야기인 듯. 여하간 서태후는 정치엔 나름대로 능했지만 자식 농사는 완전 수준 미달이었다.

반청운동단체인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서태후는 이들을 살살 구슬려서 구호를 청을 북돋아 서양 오랑캐들을 몰아내자라는 부청멸양(扶淸滅洋)으로 바꾸게 한다. 이후 서양열강들이 자신을 몰아내고 광서제를 복귀시키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선전포고를 했다가, 그게 헛소문임이 밝혀지자 부랴부랴 취소한다. 하지만 이미 성질이 뻗친 열강들은 8개국 연합국으로 베이징을 점령했으며, 서태후는 시안까지 도주했다가 불평등 조약 크리(...).

1.5. 죽음

어떤 정적도 두렵지 않고 외세의 압박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철의 여인 서태후도 이겨내지 못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월이었다. 노쇠해졌어도 지속되는 극심한 사치와 향락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며칠간 계속되는 만한전석 형식의 본인 생일잔치에서 과식한 서태후는 이질에 걸린다. 그보다 며칠 앞서 10년간 유폐되어있던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 위안스카이가 보낸 보약을 먹고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위안스카이가 보낸 약은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었으며 광서제는 시해당한 것이다.[4] 조카였던 광서제의 죽음을 전해들은 서태후는 매우 담담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역시 독단으로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의 불과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였다. 세 살짜리 푸이를 선택했을 때 서태후는 곧 병을 털고 일어나 수렴청정을 이어갈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령은 이질을 이기지 못했고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은 다음날인 1908년 11월 15일 그토록 핍박했던 조카를 따라 유명을 달리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유언은 "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였다. 그렇게 4년 후인 1912년 청나라는 멸망한다(...).

일각에서는 서태후도 위안스카이에게 암살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2. 평가

2.1. 중국의 마리 앙투아네트[5]?

사치스러운 생활로 유명하다. 정치에서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였던 만큼 그녀는 사치를 즐겼다고 한다. 그녀가 먹는 음식은 한 끼에 128가지나 되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백은 100만 냥이었다. 이것은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의 끼니에 해당하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이를 현대 돈으로 계산하면 800만원이라고... 옷은 3000여 상자나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다녔고 특히 보석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였다. 언제나 비취와 진주로 머리 장식을 했으며. 비취 구슬과 진주를 매단 옷을 입었다. 비취 팔찌, 비취 반지뿐 아니라 손톱에까지 비취 보호판을 달았다. 식탁도 비취로 만든 식기들로 차리게 했으며, 비취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게 하였다. 그녀는 버선에도 굉장히 신경을 썼는데, 문제는 아무리 예쁜 버선이라도 한 번 신고 나면 다시는 신지 않았다(...) 그녀의 버선을 만드는 데만 매년 3천 명 가량이 동원되었고, 그 비용은 매년 1만 냥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여후, 측천무후(또는 가남풍) 등과 함께 중국 역사상의 3대 악녀 중 하나로 불리고 있다. 이게 청 황실에 할당된 예산 하에서 이루어진, 원래 쓰던 정도의 사치라는 얘기도 있지만 나라가 망국지란의 위기에 있는데 이런 사치를 한다는건 좋게 보기 어려운게 사실. 밑에서 설명할 이화원 문제만 봐도 그러하다.

어떤 의미에선 서태후는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던 청나라의 마지막 버팀목이기도 했다. 사실 서태후 생전에는 청이 불안불안하며 무력했지만 서태후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있었기 때문에 허약할지언정 분열되진 않았다. 또한 양무운동과 동치중흥을 있게 한 것이 서태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녀는 인권(특히 여성인권)과 교육, 전족 등의 악습을 폐하는 것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양 문물에도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작금에 조선의 영,정조가 탕평책을 내세워 신권을 제압한 것이 조선 시대 정치의 근간인 '군신의 상호 견제 체제'를 무너뜨림으로써 19세기의 세도 정치 시대를 야기했다는 주장들을 보라.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한 체제는 그만큼 취약하다.

황실 웃어른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시작하면서 유행하거나 알려진 패션 등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정치적인 면과는 별개로 당대 청나라 백성들에게는 많은 존경을 받은 모양이다. 서태후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쓴 펄 벅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골 농촌같은 곳에서는 그녀가 아직도 살아있는 줄 알고 있었다고. 서태후가 사망한지 수십 년이 지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농부들은 '이제 우리를 누가 돌봐줄 것인가?'라 외쳤다고 한다.

의화단 운동으로 피난 생활을 할 때의 야사. 피난 생활로 인해 변변한 음식을 먹지 못해 서태후 일행이 곤란을 겪자 청나라 백성들이 평소 먹던 옥수수빵을 바쳤고 허기에 지친 서태후는 이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이후 자금성으로 돌아온 뒤 서태후는 그 맛을 떠올려서 황실 요리사들에게 옥수수빵을 만들어 올리라고 했다. 하지만 피난 시절 때 허기진 채 먹었던 그 맛이 나올 리 없었다. 궁리 끝에 요리사들은 원래의 옥수수빵에다 견과류와 설탕을 넣어 맛을 더한 음식을 만들어 바쳤고 그제서야 서태후가 만족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옥수수빵이 중국에서 흔히 먹는 워워터우(窝窝頭)라고 한다. 선조도루묵 이야기를 연상하게 하는 이야기.

2.2. 이화원 문제

사실 서태후가 까이는 원인의 9할은 역시 이화원에 쓴 은전 3000만냥이다. 북양함대의 예산을 유용하여 이화원을 지었다는 말은 중국에서도 예전부터 전해져 왔지만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북양함대의 예산 부족은 러시아를 막기위해 육군으로 돌려졌을 가능성이나, 광둥해군 예산으로 돌려졌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이 돈은 당시 중국 해군 예산의 절반에 달하는 수치이다. 해군의 예산을 유용했다는 것에는 명확한 증거가 없지만 이 정도로 큰 돈이 정원건설에 사용된 점은
해군의 예산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당시 중국의 정세를 보건데 일본과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국가지도자라면 당연히 국방에 힘을 써야했다. 해군의 예산을 유용하지 않았더라도 마땅히 정원따위에 쓸 돈이 있었으면 국방비로 돌려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 결단이었다. 청일전쟁의 패전의 원인은 물론 총체적인 청나라 군대의 난맥과 지휘관의 무능 때문이었지만, 이 돈이 헛되이 낭비 된 것이 청일전쟁 패배의 원인중 하나라는 점은 중국은 물론 일본의 사학자들조차 인정하는 바이다.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이건 절대 작은 문제가 아니다. 당시 서구 열강도 갖지못한 최신식 장비로 무장한 북양함대는(당시 청나라가 독일 조선소에 발주한 함선은 독일 해군도 발주못한 최신예함이었다. 괜히 대륙의 기상이 아니다.) 지휘관이 원균이어도 수병 숙련도만 어느정도 받쳐주면 일본의 함대따윈 손안대고 발라버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쉽게 표현하자면 월오탱 4티어가 동수의 6~7티어를 상대로 싸우는 것과 비슷했다.) 정작 훈련할 포탄과 연료부족으로 수병들의 훈련상태가 바닥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일본 무관이 청나라 함대를 방문했을때 두가지 놀란게 있는데 하나는 배와 포의 거대함이고 다른 하나는 포사이로 널려있는 빨랫감들이었단 일화가 있다.) 전함은 전장에서 쓰는 가장 거대한 기계이고 자동화가 되기전인 2차세계대전 이전의 모든 함선은 수병 숙련도가 절대적이었다. 특히 포술의 발달로 포의 사거리가 점점 길어지던 시기였기에 이는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일본이 국운을 걸고 전함대를 긁어모아 필사적으로 싸웠던 것에 비해 청나라의 전시준비는 말그대로 개점휴업 상태였다. 이런 군의 무능은 거국적인 시야와 통찰력없이 권모술수만으로 정치적 생명만을 연장시켜온 서태후의 책임이 막중하다. 다시 말해 평균도 못해 먹었다는 거다. 특히 동북아에서 청일전쟁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자면 서태후는 어떻게 쉴드를 칠 수가 없다.

당연히 청일전쟁을 국치중의 국치로 생각하는 중국에서 서태후에 대한 평가는 아주아주 안 좋다. 중국 CCTV에서 2003년에 방영한 근현대사 TV드라마인 주향공화((走向共和)에서는 이 부분을 묘사하면서 서태후를 제대로 까버렸다.

2.3. 사후에 당한 재난

청나라가 멸망한지 얼마 안된 1920년대에 중국 북부에 군벌이 난립하면서 북경 인근에 있던 청나라의 황릉은 여러 번에 걸쳐 대대적으로 도굴을 당했다. 서쪽에 청서릉, 동쪽에 청동릉이 있었는데 심양에 있던 천명제숭덕제의 무덤을 제외하면 역대 황제와 황족의 무덤은 모두 여기 있었다. 결국 순치제를 제외하면 이 지역에 있던 무덤은 죄다 털린다.

이 때 시범 케이스로 군벌 손전영에 의해 맨 처음으로 그녀가 안장된 정동릉(定東陵)이 털리면서 갖은 수모를 다 당했다. 손전영은 국민당의 북벌로 상황이 불리해지자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덤을 도굴하기로 작정했다. 무덤에는 늙은 병사 하나만 지키고 있어서 쉽게 들어갈 수 있었고 아예 폭약으로 입구를 폭파하고 들어갔다. 그의 엄청난 부장품을 챙길 때 서태후의 시신은 옷이 벗겨지는 것은 물론, 도굴하던 군인들이 입에 넣어진 야명주를 꺼내기 위해 시신을 입에서부터 목구멍까지 세로로 갈라버린 후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렸다고 한다.[6] 손전영과 그의 참모들이 먼저 자신들의 몫을 챙긴 다음 손전영은 부하 장병들에게 나머지를 약탈하도록 허가했다. 결국 조금이라도 더 가지기 위해 서로 싸우고 밟고 엉망진창으로 약탈하다가 밟혀 죽은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손전영은 약속한 약탈 시간이 다하자 자신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가지고 갈 정도였으나, 이 사실은 선통제에게도 알려져 큰 충격을 줬다.

당시 찍은 도굴 후에 참혹한 모습혐짤 주의

위의 도굴 사건 때문에 당대 중국인들이 모두 서태후를 증오했다고 보는 것은 금물이다. 당대 다수의 인민들은 서태후를 청의 상징이자 자신들의 보호자로서 사랑했다. 지금의 악한 이미지는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그 후 손전영은 도굴을 얼버무리기 위해 국민당 간부들에게 엄청난 뇌물을 바쳤는데 물론 거기에는 서태후 등 청 황릉에서 나온 보물들도 끼어있었다. 심지어 서태후의 보관에 박혀있던 진주가 쑹 메이링(장제스의 아내)의 신발 장식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선통제 푸이는 이 일을 계기로 국민당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고 일본에 협조하게 된다.

2.4. 후대의 평가

서양에서의 이미지는 굉장히 나쁜 듯하다. 의화단 사건에서 의화단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데다 죽을 때까지 통상 개화에 소극적이었고 동양식 전제군주제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니 아무래도 곱게 보였을 리 없다. 특히 선통제의 영어교사를 맡고 나중에는 절친한 친구가 된 레지널드 존스턴은 자기 책에서 이 여자가 청 황실을 망친 여자다고 맹렬하게 깠다. 또한 서태후가 달라이라마와 만났는데 이에 중국 민중들이 관세음보살의 현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둘이 만났으니 하나는 곧 죽을 것이라 했는데 서태후가 곧 죽었다며 깠다.[7]

나쁜 점이 과장되었다는 게 밝혀진 현대에 들어서도 서태후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서태후가 권력을 잡은 이후 국가 최고수반인 황제는 서태후의 바지사장격으로 변해버렸고 뭘 해보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데다 계속해서 자기가 권력을 쥘 수 있도록 갓난 아기를 갓 벗어난 황제들을 계속 즉위시키니 결국 마찬가지로 갓난아기였던 선통제가 즉위한 후 급사한 다음에는 권위있는 어른이 없는 청 황실의 지도력은 진공상태가 되어버렸다. 특히 광서제를 동정하는 쪽에서는 서태후를 좋게 보지 못한다. 단종세조의 관계?

먼나라 이웃나라 저자 이원복은 서태후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는데...#

사실 이원복이 지적한 1차 사료의 문제는 이미 이전에 나온 이야기이고, 문제는 그렇게 1차 사료의 허구성을 지적한 학자들도 위에서 설명한 이유로 서태후의 이미지를 대단히 나쁘게 본다는 점이다. 이원복의 논리대로 서태후가 인정받은건 중화인민공화국, 그것도 문화대혁명때부터이다. 철저한 반서방 논리로 무장한 시대였으니 의화단 사건에 불을 지른 서태후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볼수 밖에[8]

3. 2차 매체에서의 등장

  • 한제국 건국사에서는 친왕 혁흔의 언급을 통해서만 간접 등장.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공친왕과 증국번 등을 매국노라고 매도한다.

  • 프랑스에서 제작되어 한국 SBS를 통해 방영한 애니메이션 '쌍둥이 줄루줄리'에서는 그야말로 다크포스의 절정을 보여주는 만악의 근원처럼 묘사되었다.

  • 만화 방과 후의 카리스마에서는 그녀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복제인간이 주인공의 클래스메이트 중 하나로 등장. 1권에서 색기담당역할을 맡았고 그 뒤로는 묻혔는지 계속 안나온다. 일단 미모만은 확실히 절륜하게 묘사됐다.

  •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시작부터 어린 주인공 선통제를 불러다 그의 천진난만함을 지켜보며 "남들이 다들 노불야라 두려워하며 죽기만 바라는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쳐다보는구나"라며 흐뭇함인지 안쓰러움인지 모를 대사를 한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사망. 실제로 서태후는 선통제가 즉위한 지 며칠 후에 사망했다. 비록 잠깐 나왔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 이 영화 마지막 황제가 한국에서 대박을 거두자 부랴부랴 중국에서 만든 서태후란 영화가 마지막 황제 연관작처럼 홍보되어 개봉했으나 1989년 당시 관객 집계조차도 없을 정도로 쫄딱 망하고 막을 내린 바 있다.

  • 장서희가 출연했던 중국 드라마 경자풍운(庚子風雲; 庚子西京記)에서도 악역으로 등장.

  • 서태후가 주인공이었던 작품인 홍콩 드라마 소녀자희(少女慈禧)도 있다. 다만 액션신이 들어있는 등 각색이 많다.



  • 신 중화일미에서는 최종보스...가 아니라 마지막 대결의 심판으로서 등장한다. 작가의 그림체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회춘(...). 내 서태후님이 이렇게 아름다울 리가 없어 뒷요리계 최종보스 카이유의 "인격지배독선요리 파마팔진"으로 산송장이 될 뻔 했지만 유마오신(비룡)의 만리장성까지 냄비로 응용한 '어머니의 태양볼'요리로 기력을 회복한다. 마오의 요리에 대단히 감명을 받았기 때문인지 이 작품에선 내내 자비로운 모습으로 나오는데 작가의 후속작인 드 헌터에선 기존의 이미지대로 음험한 실루엣으로 나온다(...). 달랑 한 컷뿐이긴 하지만.

  • 펄 벅의 소설인 <연인 서태후>에서는 고뇌에 찬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서태후의 아들인 동치제도 연인인 환관(환관이 되기전) 영록대부와의 사이에서 나온 아들로 나온다. 의화단 사건이나 무술정변은 한 때의 잘못된 생각이 되었다. 말년에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기품 있게 늙어가면서 중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노인으로 나온다. 다시 말하지만 소설이다[9].

  • 홍콩배우 숙정이 주연한 에로영화 전 혜옥란이 바로 서태후 라이징을 다룬 영화다. 여기서 서태후는 황제의 승은을 입지 못하다가 황제의 동생과 불륜의 관계를 맺어 임신을 하여 출산한다.

  • 확산성 밀리언 아서에서는 희우형 서태후라는 기사 카드로 등장. 이 게임 카드들이 대개 그렇듯 미소녀 버전으로 능욕 변신당했다. 이 게임에서 실존 인물들 중 기사 카드로 등장한 것은 그녀 외에도 잔 다르크, 마리 앙투아네트, 어우동 등이 있으나, 그 캐릭터들과 비교해서도 서태후는 미소녀 이미지와의 괴리가 지나치게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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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늙은 부처라는 의미. 서태후의 활약상과는 괴리가 있어서 경악스럽겠지만 사실 중국에서는 황제의 모친, 황태후에게 부처라는 호칭을 붙여서 극존칭을 쓴다. 그래서 중국드라마(ex: 황제의 딸)에서 '숭경황태후'를 '부처님'이라고 하는 자막이 자주 등장해서 한국인들이 어리둥절해했다.
  • [2] 효정현황후 니오후루씨(孝貞顯皇后 鈕祜祿氏). 함풍제의 두번째 황후로, 슬하에 자식이 없다고 한다.
  • [3] 하지만 영국에서 신식군함 2척을 사라고 제의했을 때 청국은 서태후의 생일비용때문에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 2척은 일본에 팔렸고 그중 1척이 청일전쟁때 맹활약한 요시다. 2척의 전함(!) 정원(定遠), 진원(鎮遠)을 도입하여, 정원을 함대 총기함으로 삼았으나, 주포 포탄의 구입 비용을 생일비용때문에 조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 [4] 실제로 광서제의 머리카락을 조사한 결과 비소 반응이 나왔다.
  • [5]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서태후와 비교될정도로 사치를 누린 여인이 아니었는데, 반대파의 날조공작 때문에 골빈 된장녀 기믹으로 역사에 남아버려 이 항목에서처럼 사치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 [6] 항간에는 야명주가 입안에 있을 때만 해도 멀쩡했던 시체가 빼자마자 순식간에 썩어버렸다는 말도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손전영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야명주가 시신의 부패를 막아준다고 하는데 내가 들어갔을 때는 이미 썩어있었다'고 한다.
  • [7] 존스턴은 입헌군주국가인 영국 출신으로 변법운동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니 변법운동의 원수인 서태후와 위안스카이를 열심히 깔 수 밖에. 물론 이 인간은 청나라를 멸망시킨 쑨원도 미워했다.
  • [8] 의화단 사건때 민중의 활약을 그린 붉은 등의 소녀는 당시 대단한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다.
  • [9] 펄 벅이 당대에 페미니즘 작가로 이름을 떨쳤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여성 지배자상을 보여주기 위해 조금 심하게 각색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