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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환

last modified: 2015-04-13 23:59:50 Contributors


이름 서정환
생년월일 1955년 7월 5일
출신지 대구광역시
학력 경북고-건국대
포지션 내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멤버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1982)
해태 타이거즈(1983~1989)
지도자 경력 해태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1990~1994)
삼성 라이온즈 1군 수비코치(1996~1997)
삼성 라이온즈 1군 감독(1998~1999)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2001~2002)
KIA 타이거즈 2군 감독(2003)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수비코치(2004~2004.6.)
KIA 타이거즈 2군 감독(2004.6.~2005.5.)
KIA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2005.5.~2005.7.)
KIA 타이거즈 1군 감독 대행(2005.7.~2005 시즌 종료)
KIA 타이거즈 1군 감독(2006~2007.1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6번(1982)
팀 창단 서정환(1982) 정진호(1983~1986)

삼성 라이온즈 역대 감독
백인천 (1996~1997) 서정환(1998~1999) 김용희 (2000)
KIA 타이거즈 역대 감독
유남호 (2004~2005) 서정환(2006~2007) 조범현 (2008~2011)

Contents

1. 소개
2. 선수 시절
2.1. 연도별 성적
3. 지도자 시절
3.1. 코치 시절
3.2.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3.3.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서토라레
3.4. 평가
4. 이후

1. 소개

해태 타이거즈 내야수, 삼성 라이온즈KIA 타이거즈 감독. 현재는 KBO의 경기 감독관.

1998년~1999년,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을 맡았고, 이는 삼성 라이온즈 선수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다. 2005년 7월~2007년까지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있던 인물. 선수 시절의 포지션은 유격수2루수. 등번호는 삼성과 해태에서 6번을 계속 달았다.

대구 출신임에도 해태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된, 특이한 케이스다. 초창기 해태의 구멍 포지션이었던 내야를 맡으며 해태가 강팀으로 도약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하지만 감독이 되고 나서 이미지를 왕창 까먹었다. 삼성에서는 당대 최고의 퍼포먼스를 찍던 이승엽임창용을 앞세우고도 우승을 하지 못했으며, KIA에서는 한기주, 신용운 등의 투수들을 혹사시키며 KIA의 고질적인 불펜火펜 불안의 근본 원인을 제공하였다.

도루왕 계보.. 정확히 말하면 타이거즈이 도루왕 계보하면 주로 김일권-이순철-이종범....... 등등을 얘기하는데
이사람 빼버리면 안된다
86년의 도루왕이자 타이거즈의 어엿한 1번타자였다.

2. 선수 시절

1982년 삼성의 창단 멤버였으나, 당시 싸이클링 히트를 치기도 했던 유격수 오대석에 밀려 주전 확보가 힘들게 되자 트레이드를 자청하여 원년 시즌을 마치고 그 해 말 해태 타이거즈에 현금 트레이드되었다.[1] 이후 5번의 우승을 맛보게 된다. 당시 선수 대부분이 군산상고-광주일고 동문으로 이루어져서 지역색이 강했던 팀인 해태에서 대구 출신으로 선수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으로 봐서는 친화력이나 적응력은 매우 뛰어났던 듯하다.[2]

해태 내야진의 한 축이었으며, 호수비와 주루센스로 1980년대 해태의 우승에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해태는 내야수가 부족하여 원년 시즌을 시작하고 몇 달 후에 실업 농협에 있더 임정면이라는 선수를 급히 스카웃하여 내야로 돌릴 정도였다. 투수를 했던 역사에 가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성한이 3루를 보는 일도 허다했다.

1991년에 은퇴. 선수 시절에는 차영화와 함께 나름대로 안정적인 키스톤 콤비를 꾸몄고, 1987년 백인호가 입단하자 유격수 자리에서 밀려나 주로 2루수로 출전하였다. 굉장히 마른 체형으로 김응룡 감독 이하 당대의 해태 선수 출신치고는 왜소한 체형으로 전 경기 출전을 할 만한 체력이 되지 못해 고생했다고. 1988년에 딱 한번 3할을 치게 되는데, 이 때 홈런 개수는 0. 최초 무홈런 3할 타자의 탄생이었다.

2.1.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82 삼성 라이온즈 47 124 .202 25 1 1 2 19 18 9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83해태 타이거즈 98 319 .257 82 11 3 3 34 33 13
1984 94 324 .250 81 11 0 5 27 38 9
1985 104 371 .275 102 13 0 3 21 46 17
1986 108 375 .256 96 12 1 3 24 55 43
(1위)
1987 102 335 .278 93 12 3 3 28 38 19
1988 95 297 .323 96 11 1 0 29 45 22
1989 64 132 .258 34 4 0 3 17 16 4
통산 712 2277 .267 609 75 9 22 199 289 136

3. 지도자 시절

3.1. 코치 시절

해태에서 은퇴한 후, 코치로 있다가 199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나서 삼성의 수비코치로 1996년에 부임한다. 당시 해태에서 허락없이 빼갔다고 항의했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던 코치였다.[3] 삼성에서도 백인천 감독 체제에서 새로운 내야 체제인 이승엽-정경배-김태균-김한수를 구축하는데 이바지했고,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3.2.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이후 1998년, 이전 시즌을 무난하게 잘 소화했던 조창수 감독대행 대신 삼성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조창수 대행이 슬슬 백골프로 퇴화되기 시작했던 백인천의 자리를 메꾸며 괜찮은 모습을 보였음에도 굳이 그가 감독 자리에 오른 것은 당시 삼성의 우승을 향한 갈망 때문이었다. 매번 한국시리즈에서 물을 먹던 삼성으로서는 경북고 출신이라 연고 지역 선수이기도 했으며,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이 많았던 그를 통해 한국시리즈에서의 한을 풀고자 했던 것. 일단 부임 첫 해에는 정규 시즌 2위로 무난한 데뷔를 한다. 단, PO에서는 LG 트윈스에게 1승 3패로 업셋당한다.

문제는 1999년. 애니콜 임창용을 미친 듯이 부려먹으며 삼성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으나, 임창용이 5차전과 7차전에서 혹사 후유증이 몰려오면서 결국 무너지고 말았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 결국 2000년에 김용희 수석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겨주고[4] 짤린다.

당시 막강한 타격에 비해 투수진이 시원찮았던 삼성은 이를 메우기 위해 간판 스타였던 양준혁해태 타이거즈에 내주는 대신 임창용을 데려오고, 쌍방울 레이더스로부터는 김기태[5]김현욱을, 두산 베어스에서는 김상진을, 한화 이글스에서 노장진까지 데려왔다. 여기에 시즌 중에는 진갑용도 돈 주고 영입했다.[6] 한 마디로 우승 못하면 모든 게 감독 탓이 될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정규시즌 성과[7]에도 중도 해임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8]

사실 위의 평가는 상당히 후하게 쓰여진 것이고 삼성팬들에게는 김성근, 선동열과 함께 3대 암흑군주 취급을 하면 그나마 좋게 평가받는 것이고 올드 삼빠들에게는 김성근과 천하의 개XX 2위 자리를 다투는 인간 취급을 받고 있다.[9] 자세한 이유는 하단에서 서술.

3.3.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서토라레


2001시즌 다시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으로 복귀하였다. 2004년 김성한KIA 타이거즈 감독이 불미스러운 일로 해임되고 유남호 코치가 감독대행 → 감독으로 1년을 생활하다 성적 부진을 이유로 사임하자 다시 감독대행으로 2005년 시즌을 소화한 후, 2006년 정식 감독이 되었다. 그 뒤에는 처절한 안습의 팀 배경이 존재한다.

구단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불리며(응?) 일명 돌정환, 서토라레라 불리며 남에게 모두 읽히는 작전구사능력의 소유자라 불리며 팬들에게 엄청나게 까였다. 그래도 06년 기아가 4강까지 올라가서 4위의 성적으로 마감하게 되고 내년에 기대를 걸었지만 07년 최하위인 8위로 팀성적이 폭락하며 그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된다. 사실 서정환이 06년에 기아를 4강까지 끌어올린 것은 신용운, 한기주를 필두로 한 불펜진과[10] 어깨 통증을 안고 있던 김진우를 엄청나게 굴려먹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차정민, 이상화, 정원 등이 서정환 체제 하에서 굴려졌고 한기주가 불펜의 핵이 되기 전엔 윤석민이 호되게 당했다. 결국 그 혹사 여파로 07년 시즌을 시작하자마자 투수진이 줄부상당하고 꼴찌로 추락한 것. 거기에 보너스로 섬머리그 우승 드립을 치면서 무릎부상 상태의 장성호까지 날려버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정환이 혹사시킨 투수들이 제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감독으로써의 평가는 완전히 시궁창에 쳐박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안치홍이 기아에 입단한다


같은 시기에 막장테크를 탄 이순철, 강병철 감독과 셋이서 싸잡아서 까였으며 공교롭게도 이 세팀이 바로 엘롯기.(…) 아무튼 이 세 분들이 얻어먹은 욕만 해도 불로불사가 가능할 정도니 말 다했다. 하지만 당시 서정환이 무능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연패를 끊으면서 팬들에게 절하는 모습을 회상하면서 조범현 감독 지휘하에 16연패를 당했던 KIA 타이거즈의 팬들로부터 재조명을 받았다.[11]

3.4. 평가

대구 출신임에도 감독 재직 당시 지역적인 팬심을 이해하는 말을 여러번 했으며, 스스로도 "난 전라도사람이여..."라는 말도 자주 했다고 한다. 해태 프랜차이즈로서 혁혁한 활약을 했기 때문에 KIA팬들 중에는 그를 호남 출신으로 아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인지 적어도 감독으로서의 서정환만 아니면 KIA팬들로부터 그다지 반감을 사는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감독 서정환이라면 이야기는 다르게 나온다. 2005시즌 유남호가 시즌 도중에 경질이 되면서 감독대행으로 남은 시즌을 치른 뒤에 2006시즌에는 상기의 신용운과 한기주, 김진우 등을 앞세워서 페넌트레이스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오히려 다음 시즌에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즉 2007시즌의 서정환 감독은 빼도박도 못하는 흑역사. 조범현 감독도 대구출신에 해태 프랜차이즈가 아니어서 많은 어그로를 끌긴 했지만, 적어도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팀에 우승을 안겨주었고 무엇보다도 김선빈-안치홍으로 이어지는 젊은 키스톤 콤비와 윤석민, 양현종 등의 투수를 발굴하여 강팀의 기반을 닦아놓은 감독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반면에 서정환 감독은 우승 강박증으로 신용운, 한기주 등의 유망주들을 쥐어짜 수년간 재활병동에서 세월을 보내게 만들어서[12] 조범현과 비교를 더 당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KIA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선동열과 함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감독임에도 팀을 말아먹은 케이스.
사족으로, 삼성에서 방출당하고 경찰청 야구단에서 화려한 성적을 찍은 최형우의 영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한 적이 있었다. 물론 경질되면서 없던 일이 되었고, 결정적으로 본인이 친정팀 복귀를 원했으니 무의미하다.

삼성 감독 시절의 괜찮았던 페넌트레이스 성적과는 별개로[13] 삼성 팬들의 평판도 좋지 않는 편이다. 1997년 삼성 타선의 한 축이자 20-20까지 했던 최익성을 저니맨으로 만들어놓고[14], 임창용을 무지막지하게 부려먹은 결과 플레이오프 7차전 역전패의 빌미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최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우승에 대한 압박으로 선수층을 쥐어짜며 어떻게든 성적을 내려 했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고, 팀만 어수선해졌던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이런 비판을 받고 있다. 다만 삼성은 기반이 탄탄했던 강팀이었기에 2007년 KIA처럼 암흑기로 굴러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15]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감독으로서의 단기전인 포스트시즌의 성적이 안 좋은데 단적인 예로 99년 플레이오프를 꼽을 수 있다.(삼성 시절 98년 VS LG : 1승 3패, 99년 VS 롯데 : 3승 4패, KIA 시절 06년 VS 한화 : 1승 2패)

강병철, 김성근, 김인식, 김응룡 등과 함께 혹사의 대마왕으로 이름난 감독이다. '애니콜'소리 까지 듣던 임창용이나 불펜투수로 한 시즌 140이닝이라는 전무후무한 등판기록[16]을 남긴 한기주, 신용운 등 여러 선수들이 서정환 감독 밑에서 혹사당하다 아작났다.

4. 이후

자신보다 1년 빨리 퇴임한 이순철 전 감독과 비슷한 길을 걸었는데, 이순철 전 감독이 2007년 MBC ESPN에 새 해설위원으로 혜성같이 등장해 비난해설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로 본좌칭호를 얻은 것처럼 2008년의 해설 트렌드는 서정환 전 감독이었다. 처음엔 예전 안 좋은 이미지와 더불어 굴곡 심한 억양,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우물우물거린다며 사정없이 까였지만 곧 수정하여 특유의 구수한 해설과 더불어 불타는 친정사랑해설(=감정이입해설)로 2008년의 히트해설로 통하게 되었다. 타 해설위원들이 은근히 자기가 좋아하는 팀을 두둔하는 그런 편파해설이 아닌, 해설시엔 나름대로 중립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기아 타이거즈가 지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에 겨워 무의식중에 탄식을 내지르는 그런 인간적인 면이 현재 서정환 해설위원의 인기원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자신을 매몰차게 쫓아내고 사정없이 욕한 기아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진정한 대인배가 아닐 수 없다.[17] 정도는 약하지만 삼성 경기에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고.

서정환 해설위원 특유의 구수한 해설은 동네 할아버지같은 편안하지만 전문성은 적은, 그래서 호불호가 갈리는 임주완옹 캐스터하고 할때 싱크로율이 매우 좋다고 한다. 젊은 세대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지만, 프로야구 시청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장년층, 노년층에게는 서정환&임주완의 인기가 제일 높다고 하며, 역시 둘이 할 때 제일 높다고 한다.

2009년에는 방송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으나, 2010 시즌 개막을 앞두고 엑스포츠가 뉸에 먹히는 바람에 MBC Life에서도 프로야구 중계를 하게 되면서 해설자로 복귀하였다. 다만 2012시즌부터 해설직에서 그만두었고, 현재는 KBO의 경기 감독관으로 재직 중이다.


서정환이 해설을 맡은 기아 경기 중 각종 승부처에서.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3분 7~8초 쯤에 투수와 2루수가 연달아 포구에 실패했을 때 내뱉은 감탄사어우!...야!...와 4분 15초쯤에서 1루 주자가 런다운에 걸렸을 때 지른 탄성어→어↗어↑???.(...) 외에도 승부처마다 각종 탄성을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모습이 보는 사람을 실소하게 만든다.
위 동영상은 서정환의 어록(?) 중 극히 일부로, 외에도 LG전에서 내뱉은 "분위기에 반전을... 아~ 아~ 뭐야 이거?" 등이 유명하나, 자료가 꽤 오래되어서인지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이 항목에서도 위 동영상 빼고 다 잘려버렸다

2013년 1월 18일, 뜬금없이 사기 혐의로 피소되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후배 명의로 허위 전세자금 대출 기사에 따르면 사회인 야구장을 짓다가 돈이 부족해 이자가 싼 전세자금을 빌려서 들라는 전세는 안 들고 야구장 만드는 데에 쓴 모양.

현재는 KBO 경기운영위원으로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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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는 한국프로야구 사상 첫번째 현금 트레이드 사례로 기록된다. 최초의 선수 간 트레이드는 1983년 6월 27일 동열정영기 간에 이루어진다.
  • [2] 양준혁, 손혁 등은 해태로 트레이드되자 이를 거부하다가 어쩔 수 없이 갈 정도로 해태는 타 지역 출신 선수가 적응하기 어려운 팀으로 알려져 있었다.
  • [3] 이순철과 비슷한 것이 수비코치로서는 정말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주루 및 작전 코치로 호평을 받아 감독에 오른 이순철과 거의 유사하다.
  • [4] 김용희도 김응룡 감독이 오기 전까지 땜빵으로 있었던 터라 감독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고, 결국 2000년 시즌 후 김응룡이 오자마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 [5] 양준혁을 내주고 빈 좌타 거포 자리를 메꾸기 위해 데려왔다. 재정난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던 쌍방울이라 삼성 입장에서는 별 무리 없이 쉽게 데려올 수 있었다.
  • [6] 당시 삼성은 투수진뿐 아니라 이만수를 이을 주전포수도 마땅치 않았다. 현대 유니콘스박경완을 데려가 1998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던 모습을 본 삼성은, 이를 귀감으로 삼아 당시 두산 베어스에서 홍성흔의 등장으로 입지가 흔들리던 진갑용을 현금 트레이드로 데려오게 된다. 그리고 2010년 이후, 이번에는 또 진갑용의 후계자를 찾느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 [7] 이승엽이 54홈런으로 홈런왕 자리에 오르며 본격적으로 홈런타자의 반열에 들기 시작했으며, 김한수3루수 골든글러브를 2번이나 타는 등의 성과는 있었다. 다만 이쪽은 백인천 감독의 공이라 보는 이들이 많다.
  • [8] 이에 대해서는 우승에 대한 미련으로 김응용 감독을 데려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임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 삼성은 꾸준한 성적에 비해 한번도 포스트시즌에서 우승한 적이 없었기에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물론 김응용을 데려온 것도 서정환이 우승을 못 해서(...)라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결국은 야만없.
  • [9] 1순위는 당연히 양준혁, 김한수, 전병호등등을 은퇴시키고 박한이, 임창용의 은퇴를 종용했으며, 2년뒤 한일통산 500홈런을 기록한 타자보고 와도 자리없다고 했으며, 연속 가을야구 진출기록까지 중단시킨 4452의 그 멍게인간
  • [10] 이른바 신한카드 카드깡.
  • [11] 절을 하게 된 비화는 서정환 감독의 부인이 연패중인데도 더운 날씨에 나와서 응원하는 팬들이 안쓰럽다고 말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12] 이 후유증은 조범현 감독 시절은 물론 선동열 감독 재임기까지 내려온다. 수준급 롱 릴리프와 든든한 마무리(구단의 철저한 관리를 받았다면 한기주는 선발 투수로도 자리잡을 수 있었다)로 자리잡았을 두 선수가 나가떨어졌으니...
  • [13] 98년 2위, 99년 매직리그 1위였다.
  • [14] 최익성 본인에 의하면 서정환과의 궁합이 잘 안 맞았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서정환은 최익성의 타격폼에 대놓고 디스를 했다는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이에 최익성은 스승인 백인천이 떠나고 신인이었던 강동우가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출장기회를 조금씩 잃어가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한화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때부터 최익성 본인의 저니맨 생활이 시작되었다.
  • [15] 사실 팀 타선을 리빌딩한 백인천 감독의 공이 컸다. 2000년대 초 삼성은 임창용, 배영수, 김현욱, 김진웅, 노장진 정도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투수가 별로 없었지만 대신 이승엽을 위시한 강타선으로 성적을 냈던 팀이었다.
  • [16] 댓글을 보면 알겠지만, 2달동안 70이닝을 던지게했다. MLB에서 어지간한 불펜이 한 시즌에 소화하는 이닝수가 약 70이닝 정도라는 걸 감안하면, 그냥 대놓고 굴렸다는 소리다.
  • [17] 쉬는 날에 직접 경기장을 찾아 관람하고 있는 모습이 타 방송사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