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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학살사건

last modified: 2015-04-04 15:52:22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사건의 진행 과정
2.1. 당시 국내 상황
2.2. 학살의 시작
2.3. 엽기/잔인함
2.4. 학살 이후
2.5. 비슷한 사례
3. 비판
4. 변호?
5. 여담

1. 개요


2010년 6월 4일 거행된 희생자 추모식.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남침 초기 서울로 진주한 시점에서 서울대학교 부속 병원으로 난입하여 벌인 학살극.

2. 사건의 진행 과정

2.1. 당시 국내 상황

개전 직후 서부전선 일대의 교전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된 한국군 부상병 다수는 서울대병원을 포함한 서울시내의 여러 병원에 분산 후송되어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이중 상당수가 심한 부상을 입은 중환자였다.

그러나 개전 3일만에 북한군이 서울까지 밀고 내려오자, 서울에 남아있던 대다수 민간인들은 아비규환에 빠져 피난길에 올랐으나[1] 환자가 있는 병원 근무자들이나 경비병들은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병원을 빠져나갈 수 없었던 부상병들과 경비병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의료진, 그리고 일반 환자들과 가족의 병수발을 위해 남아있던 민간인들이 학살의 피해자가 되었다.

2.2. 학살의 시작

6월 28일 아침, 북한군이 미아리를 뚫고 중앙청을 지나 서울대병원까지 들이닥쳤다. 당시 병원 내부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 환자들로 만원이었으며, 병원 경비를 위해 남아있던 국군보병 1개 소대와 움직일수 있는 전상병 80여명을 데리고 한 장교[2]의 지휘하에 뒷산에서 응전하였으나 모두 전사하였다. 저항하는 국군을 전멸시킨 북한군은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병력을 산개시켜 병원을 둘러쌌다. 이제 병동 안에는 저항이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을 입은 부상병들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비무장의 의료진과 민간인 환자들, 그리고 환자 가족들만이 남아있었다.

이윽고 한 북한군 중좌가 "원쑤놈들의 앞잡이들이 여기 누워있다!"며 선동을 시작했고, 이내 한국군 부상자를 사살하기 위한 학살극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병동을 순회하며 총을 갈겨 죽였으나, 이것도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는지 나중에는 환자들을 밖으로 끌어내어 구석으로 몰아넣고 대량으로 총을 쏴 죽였다. 일단은 한국군 응징이라는 명분이었으나 사실 군인이나 일반인이나 환자복을 입은 채로는 별로 구분이 가지 않아서 일반인들도 다수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학살은 서울대 병원에서만 일어난게 아니라 서울시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여러병원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졌고 희생자들 명단과 숫자는 역시 파악되지 않는다.

2.3. 엽기/잔인함

시간이 좀 지난 뒤엔 총알도 아까웠는지 모신나강에 착검해서 직접 찔러 죽이는 식으로 학살을 벌였다. 그리고 정신병동까지 들이닥쳐 그 환자들도 죽였다. 이렇듯 소음이 울리자 다른 병동에 남아있던 환자들은 급히 대피 시도를 했지만 많은 수가 북한군 보초들에게 걸려 참혹한 꼴을 당했고, 일부는 살해당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흥분한 북한군은 심지어 위문차 남아있던 환자의 가족들까지도 살해했다.

학살은 오후까지 이어졌고, 마지막까지 숨어 있다가 적발된 이들은 본보기로 보일러실로 끌려가 석탄 더미에 생매장되었다. 이렇게 살해된 희생자들은 정확한 희생자들의 숫자를 알 수 없으나 우리측의 기록에는 부상병 100여명으로 되어 있고 서울대병원에서 세운 추모비에는 1000여명으로 되어있다.
학살을 당한 시체들은 한곳에 쌓인 채로 20일 동안 방치되어 병원에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한다. 그리고 창경궁 인근으로 실려나가 소각되었다.

2.4. 학살 이후

환자들이 죽은 뒤 병원은 북한군 부상병들의 후송 기지로 쓰였고, 3개월 뒤 서울이 수복된 뒤에야 끔찍한 참상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게다가 밀려나기 직전에 또 한차례 학살을 벌인 정황이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또한 근무하던 의사, 간호사, 군의관, 의무병 상당수가 납북되었고, 저항하던 일부는 본보기로 공개처형되었다.

2.5. 비슷한 사례

돈의문의 적십자병원에서도 한국군 부상병이 대량 수용되어 있었는데, 여기서는 서울대병원처럼 곧바로 학살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여기는 한국군 경비병도 없어서 인민군이 느긋하게 병원을 점령한 다음 "동무들은 죄가 없다. 치료가 끝나면 다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장교가 나서서 안심을 시키고 남아있던 한국군 군의관에게 계속 부상병들을 돌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지켜질 리가 없었고, 당장 그날 오후에 북한군 부상병에게 침대를 비워주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여기 그대로 있으면 학살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직감한 일부 장병이 탈출을 시도, 성공했다. 이 시점에 이미 군의관은 구금되어 있었으며, 이후 병원에 남아있던 부상병들은 전원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에 전주에서도 이와 비슷한 학살극이 있었고 이후 한국군 병사들은 어지간해서는 항복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저항하는 게 당연시되었다. 한마디로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과 같은 상황에 내몰린 셈이다.

3. 비판

분명히 말해 이 사건은 제네바 협약을 위반한 명백한 전쟁범죄다.[3] 저항 불능의 환자들을 잔혹히 유린한 정황만으로도 잔혹하지만, 북한군은 이에 대해서 전혀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적극 권장하는 희대의 막장 군대로 북한과 전쟁을 벌일 경우 이런 일은 얼마든지 되풀이될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사건이다.

한마디로 북한군과의 전쟁에서 항복 및 포로 대우는 절대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학살은 불과 개전 3일만에 빚어진 사건이다. 이는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짧은 시간 사이에 광포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같은 공산군이라도 국공내전 때의 마오쩌둥포로들 대우라도 잘 해줬지, 이건….[4]

4. 변호?

이 사건에서 어떻게든 북한군을 옹호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참 신기하다 이런 것들이 있으면 사뿐히 즈려밟아주자. 그런데 종북주의자들은 말이 안통하잖아. 안될거야 아마

첫째, 극렬한 종자들은 6.25 때 학살된 민간인의 대부분은 국군과 미군이 죽였고, 북한군은 지주와 자본가 계급만 탄압했지 일반 민간인들에게는 피해도 끼치지 않고 잘 해줬다고 주장하며 이 사건 자체를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 이들에게 있어서 이 학살사건은 반공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조작사건에 불과하다. 당연히 개소리.

둘째, 국군 부상병들이 순순히 했으면 아무 일 없었을 것을 공연히 저항하여 북한군에게 피해를 입혀 상대를 자극했기 때문에 당한 사고였다고 주장한다. 전쟁 법규에서도 부상병이 대우를 받으려면 저항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얼핏 맞는 말 같다. 문제는 과연 북한군이 투항할 만한 상대냐는 것이다. 38선 일대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던 무력분쟁에서 북한군의 포로로 잡힌 한국군 장병이나 경찰관들은 인수분해를 당해 내걸리는 일이 흔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어느 정도 포로 대우를 받기 시작한 건 중국군이 개입하고 나서부터다. 북한군은 정당한 포로 대우를 해주리라고 믿고 투항할 수 있는 상대 따위가 아니었으며 이를 시정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이들은 모르거나 고의로 무시한다. 그리고 애시당초 경상을 입은 부상자와 경비부대는 전투에서 다 전멸당했고 이후 죽어간 학살 희생자들은 저항할 능력이 없는 중상자와 의료진. 그리고 부상자의 가족들이었다.

5. 여담

현재 서울대병원 내에는 당시의 희생자들을 위한 '자유전사의 비' 가 세워져 지금도 당시의 참극을 웅변하고 있다.

1950년 6월 28일. 여기에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를 위해 싸운 시민이 맨처음 울부짖은 소리 있었노라
여기 자유 서울로 들어오는 이 언덕에 붉은 군대들이 침공해 오던 날
이름도 모를 부상병, 입원환자.
이들을 지키던 군인 시민투사들이 참혹히 학살되어 마지막 조국을 부른 소리 남겼노라
그들의 넋은 부를 길이 없으나 길게 빛나고 불열의 숲속에 편히 쉬어야하리
겨레여 다시는 이 땅에 그 슬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게하라.

강신재의 장편소설 진강의 민들레에서 여주인공 이화의 남친이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다. 땅에 파묻혔는데. 간신히 살아나와서 여친의 집에 숨어산다. 당시의 참극을 그린 거의 유일한 소설.

또한 역사학자 故김성칠(1913~1951)의 1950년 6월 30일자 일기 말미에도 이 학살 사건이 등장한다.

창경원 담모퉁이를 돌아 대학병원 영안전(靈安殿) 근처를 지나노라니 행인들이 웅기중기 모여 서서 철망 너머로 무엇을 들여다보면서 수군수군하고 있기에 호기심에 끌려서 그 옆으로 가 보니 거적으로 아무렇게나 덮어둔 시체를 보고 그러는 것이고 그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수군대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인민군이 들어와서 대학병원에 들어 있는 국군 부상자들을 끌어내어 총살해버린 것이라 하니 설마 그럴 리가 있을 것 같지 않고 지나가는 풍설이라 종잡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조선 사람의 명예를 위하여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김성칠의 바람과 달리 학살은 사실이었다. 너무나 참혹한 사건현장에 당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서울대병원 인턴들과 동기였으나 서울대의대 졸업 후 결핵으로 수련을 시작하지 않아 학살 및 납북을 피한 사람으로 인제대학교 이사장 백낙환이 있다.

당시 학살을 지휘했던 부대는 경수 105 전차여단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뒤에는 류경수와 김일성이 있는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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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러나 일찍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북한군을 격퇴하고 있다는 정부의 발표를 믿고 있다가 뒤늦게 피난을 시도한 대다수의 일반 시민들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강교가 폭파되면서 한강을 건널 수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 [2] 이 장교가 누구인지 알려진 바가 아직 없다.
  • [3] 1949년 8월12일 제네바 회의에서 채택된 1949년 제네바 협약 중 '전지(戰地)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 제12조 군대의 구성원과 기타의 자로서 부상자 또는 병자인 자는 모든 경우에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그들은 성별, 인종, 국적, 종교, 정견(政見) 또는 기타의 유사한 기준에 근거를 둔 차별없이 인도적으로 대우 또는 간호되어야 한다. 그들의 생명에 대한 위협 또는 그들의 신체에 대한 폭행은 엄중히 금지한다. 특히 그들은 살해되고 몰살되거나 고문 또는 생물학적 실험을 받도록 되어서는 안된다.
  • [4] 국공내전시 공산군은 국민당군 포로는 대체로 자군에 편입시켰고, 그걸 원하지 않으면 그냥 여비를 줘서 돌아가라고 석방시켰다고 한다. 당시 국민당군이 막장이라서 이렇게 석방시켜줘도 아무도 국민당군에 돌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것이 알려지면서 국민당군은 통채로 투항자가 속출했고, 결국 70개 사단이 3개월만에 제대로 싸움도 못해보고 붕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