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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7세

last modified: 2014-09-16 11:08:15 Contributors

프랑스의 역대 국왕
샤를 6세 샤를 7세 루이 11세

이름 승리왕 (le Victorieux)
생몰년도 1403년 2월 22일 ~ 1461년 7월 22일 (58세)
재위기간 1422년 10월 21일 ~ 1461년 7월 22일
출생지 프랑스 파리
사망지 프랑스 므앙



젊은 시절 모습

Contents

1. 개요
2. 계승을 박탈당한 왕세자
3. 절체절명의 위기
4. 오를레앙의 처녀, 그리고 정식즉위
5. 소극적인 행보, 그리고 배신
6. 승리왕이 되다
7. 그 후
8. 평가
9. 기타

1. 개요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5대 왕. 샤를 6세와 그의 아내인 바이에른의 이자보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

프랑스의 멸망 위기까지 몰리던 백년전쟁을 결국 승리로 종결시켰으며, 귀족들이 강세를 보이던 중세시대 봉건제도에서 벗어나 중앙집권 정책을 폈다. 이에 따라 승리왕(le Victorieux)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프랑스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백성들에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과 귀족들간의 갈등은 상당했고, 자신의 목적과 이익 달성을 위해서 냉혹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등 어두운 면도 있었다.

2. 계승을 박탈당한 왕세자

당시 프랑스 왕실을 둘러싼 상황은 평탄치 않았다. 먼저 아버지는 정신병에 걸려 제대로 왕 노릇조차 하지 못했고 그 정신병에 걸린 남편으로부터 구박을 받던 어머니는 사치에 빠졌다. 그리고 위로 있는 네 명의 형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이것만 해도 막장인데 설상가상으로 정신병에 걸린 샤를 6세의 섭정을 둘러싸고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끼리의 권력다툼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란을 끝내고 안정세에 접어든 잉글랜드가 프랑스와의 휴전을 끝내고 다시 쳐들어왔다.(...) 프랑스 왕실에서는 협상을 하려고 했으나 잉글랜드에서는 샤를 5세 때 빼앗긴 영토를 되찾겠다고 주장하여서 당연히 결렬이 되었다.

급기야 1415년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숫적 열세를 딛고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의 대규모 기사군을 궤멸시켜버린다. 그 와중에도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는 계속해서 치열한 다툼을 벌여, 1417년에는 아르마냑 백작이 부르고뉴파에게 암살당했다. 1419년 왕세자 샤를은 이들의 다툼을 해결하고 잉글랜드에 대항하기 위해 부르고뉴 공작과 회의를 하려고 했으나 아르마냑파가 복수랍시고 부르고뉴 공작을 암살하는 병크가 벌어진다. 이렇게 권력다툼은 계속 치열해지는 가운데 잉글랜드의 압도적인 우세가 돋보이자 기어코 원래부터 잉글랜드에게 우호적이었던 부르고뉴파는 아르마냑파의 지지를 받는 샤를을 비난하며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결국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의 주도 아래 1420년 트루아 조약이 맺어진다.

조약의 내용은 헨리 5세가 샤를 6세의 딸인 프랑스 공주 카트린과 결혼을 해서 그들 사이에서 낳은 왕자가 샤를 6세의 사후에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공동군주가 된다는 조약이었다. 샤를 6세가 병에 걸려 오래살지 못할 운명이 명백했기 때문에, 사실상 헨리 5세가 계승받기로 확정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부르고뉴파는 왕세자 샤를이 샤를 6세의 적자가 아니라 이자보와 오를레앙 공작 사이에서 불륜으로 낳은 가짜 왕세자라고 떠들었고, 이 와중에 이자보는 자기 아들을 거부하고 사위인 헨리 5세의 편을 들게 된다.

트루아 조약에 따라 마침내 부르고뉴파는 헨리 5세의 잉글랜드군에게 수도 파리의 성문을 열어주고, 샤를은 쫓겨나면서 아르마냑파와 함께 시농으로 피신했다.
급기야 샤를의 누나 카트린은 결혼과 함께 곧바로 임신을 했고, 이듬해인 1421년 샤를과 아르마냑파의 기대와 달리 공주가 아닌 왕자를 낳았다. 이 왕자가 바로 헨리 6세. 이제 할아버지가 죽으면 프랑스와 잉글랜드 거대 왕국을 다스리는 왕이 될 아기. 원수같은 누나, , 그리고 조카

3. 절체절명의 위기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 1422년, 헨리 5세가 샤를 6세보다 먼저 죽은 것이다! 헨리 5세가 죽고나서야 곧 샤를 6세도 죽어서, 이제 만 1살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아기인 헨리 6세가 왕위 계승을 해야할 상황이 온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기가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가 없고, 헨리 5세의 동생인 베드포드공이 섭정을 한다고 나섰으나, 이것에 대해 부르고뉴파를 제외한 프랑스 귀족들의 반발이 상당했기 때문에 샤를은 그들의 지지를 받아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에 저항했다.

하지만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북부가 모조리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에게 점령당했고, 심지어 대관식을 할 수 있는 랭스까지 점령당한 상황. 대관식을 해서 프랑스 왕이라는 정통성을 갖춰야 귀족들,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얻어 반격을 할 수 있는데,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동맹군의 공세는 더 거세어져 연속해서 샤를의 군대를 뭉갰고, 결국 1428년에는 샤를과 아르마냑파의 핵심도시인 오를레앙을 포위했다.
루아르 강 북부에 위치해있고 파리에서 멀지 않은 교통의 중심지인 이 곳까지 점령당하면 영토 수복이 문제가 아니라 샤를의 본거지 시농까지 위험해지는 상황. 남서부의 잉글랜드 영토 가스코뉴에 있는 군대까지 협공할 가능성도 있어, 사실상 게임이 끝나는 셈이다. 구원군을 보내봤으나 여의치 않았고, 오를레앙 성의 식량은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 조건부 항복의사도 밝혔으나 이기고 있는 전투를 하고 있는 적군이 응할 리가 없었다. 버틸 수가 없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항복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빠질 때,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인물이 나타난다.

4. 오를레앙의 처녀, 그리고 정식즉위

1429년 2월, 뜬금없이 로렌 지방의 시골에서 온 한 양치기 소녀가 샤를을 찾아온다. 오를레앙을 포위하는 잉글랜드군을 물리치고 샤를을 왕위에 즉위시키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주장을 하면서. 샤를은 그녀가 적이 보낸 첩자나 암살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믿을 수가 없어 자신의 부하에게 화려한 옷을 입히고 자기 자리에 앉혀놨고 자신은 대신 초라한 옷을 입고 신하들 사이에 숨었다. 그런데... 소녀는 변장한 샤를이 누군지 알아보고는 그를 왕세자라고 불렀다! 그녀가 바로 잔 다르크.

그녀의 신통력에 놀란 샤를은 그녀와 독대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아직도 그녀가 마녀, 첩자일지도 모른다며 경고를 하여, 여전히 믿지 못한 샤를은 잔을 푸아티에로 보내 성직자들의 심문을 받게 한다. 결과는 이상없음.
마침내 샤를은 잔 다르크의 부탁대로 그녀에게 갑옷과 깃발, 군사를 주어 오를레앙을 구원하게 한다. 그리고 잔 다르크는 그것을 해냈다. 오랫동안 포위된 오를레앙이 불과 한순간에 시골처녀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해방된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잔이 이끄는 군대는 오를레앙 주변의 영국군 점령지를 탈환하고, 명장 존 탈보트가 훨씬 더 많을 수의 군대를 이끌고 버티고 있던 파타이에서는 아쟁쿠르 전투와 반대로 영국군을 쓸어버리며 아예 탈보트를 붙잡아온다.

잔의 활약으로 결정적인 위기를 넘긴 샤를은 랭스에서 대관식을 올려야 한다는 잔의 설득을 듣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다. 사실 랭스는 적진의 복판 깊숙히 있어서 대관식은 커녕 샤를의 안전조차 보장할 수가 없었다. 특히 영국왕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약속을 맺었던 장소인 트루아도 랭스로 가는 길목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잔이 이끄는 군대는 막힘없이 옥세르, 트루아, 샬롱 등 랭스로 가는 길목에 있는 북부도시를 어렵지 않게 탈환 및 무혈입성하여 마침내 랭스까지 도달, 1429년 7월 17일 랭스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린다. 헨리 6세보다 먼저 대관식을 거행해서 프랑스 왕이라는 정통성을 확보한 것이다. 그 소식을 접한 곳곳의 도시들이 샤를에게 충성을 맹세, 잔의 성공적인 활약으로 샤를은 프랑스를 다스리는 정식왕, 샤를 7세가 되었다.

5. 소극적인 행보, 그리고 배신

잔 다르크와 잔의 수행자들은 프랑스 전역을 돌며 영주나 국민들을 새로운 프랑스 왕 샤를 7세에게 돌아올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의 성녀 타이틀을 보고 황태자 파를 지지한 사람들인 만큼 잔 다르크의 말 한 마디에 왕실을 흔드는 내부의 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왕실은 긴장했다.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전투 및 곧바로 이어진 랭스의 진격처럼 공격적인 전략과 신속한 공세를 취했는데 이는 대관식 이후 비용이 많이 드는 전투를 통한 승리보다는 협상과 조약 등으로 이득을 취하려 하는 왕실과 상반되는 입장이었다. 거기다가 귀족들은 교역을 위해 이득이 되는 노르망디 쪽을 먼저 탈환하기를 바랬다.
물론 잔 역시 협상을 시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저 부르고뉴에 협력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샤를은 몇 주만 기다리면 파리를 바치고 항복하겠다는 부르고뉴의 제안에 낚이는 삽질을 하고 만다. 그래서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의 원군이 파리에 들어오도록 시간을 벌게 해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걸 알아차린 잔 다르크는 샤를 7세를 설득하여 생드니 등 파리 주변지역을 탈환한 다음 1429년 9월 8일 파리의 생 토노레 성문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을 물리치며 성문을 열고 맞아주리라는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파리 시민들은 잔을 여자의 모습을 한 괴물, 마녀, 창녀, 탕녀로 욕하면서 입성을 거부하며 오히려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과 합류하고 말았다. 결국 전투가 벌어지고 잔 다르크는 허벅지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지휘를 멈추지 않았지만 공성전이 조금씩 장기화될 듯하자누가 바보 같이 낚이지만 않았어도 불과 이틀 만에 냉랭해진 왕실의 지원부족으로 퇴각하였다. 물론 샤를 7세가 영지를 저당잡힐 정도로 프랑스 왕실의 재정난은 당시 상당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파리 함락이 성공할 경우 잔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경우를 두려워해서 일부러 이른 날짜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는 음모론도 있다. 어차피 왕으로 즉위한 이상 부르고뉴파가 영국과의 동맹을 포기하고 자신의 편에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게 5년 정도 걸리고 부르고뉴 공작의 비위를 맞춰서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와 휴전을 하면서 잔의 뜻에 반대함을 대놓고 드러냈다. 사실 샤를 7세는 이전부터 잔 다르크를 껄끄러워 하고 있었다. 중세 시대에는 잔 다르크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한 것 자체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이 무렵 서양에서 왕이 되려면 형식적이게나마 교황의 승인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오직 교황만이 신성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홀연히 나타난 잔 다르크가 앞으로의 왕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는 교황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논란이 일기에 충분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가 진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지 확신할 수 없는데 마지못해 선택한 상황에서 섣불리 교황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파리를 비롯한 영국과 부르고뉴가 점령한 지역을 공격해야 한다는 잔 다르크와 달리 샤를 7세는 전쟁을 계속할 의지가 없었다. 되도록이면 전쟁을 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서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외교는 힘의 논리로 통한다는 것을 샤를 7세는 몰랐던 것이다. 그는 조용히 끝내고 싶었다. 한편으로 전쟁으로 잔 다르크의 명성이 계속 올라간다면 역으로 자신의 왕권이 추락할 것을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1430년 5월 23일, 휴전한 사이에 다시 힘을 키운 부르고뉴 선량공 필리프 3세 휘하의 부르고뉴파 군대가 콩피에뉴에 침입하자 잔 다르크는 왕실의 무관심 속에 대략 200명에서 400명으로 추정되는 자기 휘하의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급파, 부르고뉴군을 기습했다. 초반에는 이들을 물리쳤지만 증원군 6천 명이 나타난 뒤 상황이 역전되어 성으로 후퇴하면서 후방을 방어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가 들어오기 전에 성문과 연결된 다리가 끌어올려져 고립되었고, 룩셈부르크 백작 소속의 병사가 쏜 화살에 맞은 뒤 옷을 잡혀 낙마당하면서 포로로 잡힌다. 훗날 지원군이 뒤늦게나마 오면서 콩피에뉴의 방어에는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잔 다르크 본인에겐 치명적인 상황을 맞은 것이다. 룩셈부르크 백작은 샤를 7세에게 전형적인 중세유럽식 포로 처리법대로 몸값을 내고 그녀를 데려갈 것을 제의했지만 왕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정치적인 용도는 다 사라져 버린 후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체포당하는 과정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왕의 측근들이 콩피에뉴 전투 당시 체포되도록 배신 혹은 방관했다는 말도 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룩셈부르크 백작은 잉글랜드 측에 잔 다르크를 1만 리브르 트르누아(Livre tournois)에 팔아버린다. 1431년 5월 30일, 잔 다르크는 마녀라는 죄목으로 루앙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6. 승리왕이 되다

하지만 1431년 릴에서 부르고뉴의 선량공 필리프 3세와 샤를 7세 사이에 6년 간의 휴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를 기회로 샤를 7세는 부르고뉴의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파기를 획책하여 1435년 프랑스, 잉글랜드, 부르고뉴의 삼자협의에 의해 잉글랜드의 주장을 물리치고 프랑스-부르고뉴 동맹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1436년 파리를 수복하고 본격적으로 영국군을 몰아내기 시작한다. 영국군은 설상가상으로 요크파와 랭커스터파의 대립이 슬슬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어서 제대로 전력 투입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1] 1436년 4월 파리에서 잉글랜드 주둔군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을 때 아르튤 드 리슈몽 원수가 파리로 진군해 파리를 탈환하는데 성공하면서 승기를 잡기 시작한다. 프랑스는 서서히 이르 드 프랑스를 제압하고 아키텐에 대해선 그 주변부터 압력을 걸기 시작했다. 1444년에는 상파뉴까지 점령하고 상당수의 영토를 이미 회복했다.

1439년 오를레앙에서 소집된 삼부회에서 프랑스군의 편성과 과세를 결정하여 1444년 이루어진 로렌느 원정의 용병대를 재편성해 1445년 상설군인 <칙령대>를 설립했다. 귀족은 예비군으로 등록되고 평민은 각 교회구의 일정 숫자만큼 징병이 이루어져 훈련, 군역과 맞바꾸어 세금이 면제되었기에 자유(franc)라는 이름이 붙여져 자유사수대(francs archers)로 조직되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군비편성으로 샤를 7세는 노르망디를 지배하는 잉글랜드군 토벌의 군대를 파견했다. 1449년 동부방면대, 중부방면대, 서부방면대로 각각 나뉜 프랑스군은 세 방향에서 노르망디를 공격해 12월 4일에는 루앙을 함락시켰다. 이에 대해 쉘부르에 상륙한 잉글랜드군은 1450년 리슈몽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과 격돌했다. 폴미니 전투에서 대포를 이용하여 영국군을 격파했다. 사실 대포 자체가 살상력이 어마어마했다기 보다는 프랑스군이 대포로 포격하자 영국군이 언덕 위에서 버티다가 더 이상 못 버티고 언덕 아래로 내려왔고 그 상황에서 우세한 프랑스 병력과 기마대에 쳐발리는 식이었다.[2] 8월 폴미니 전투를 끝으로 오랫동안 영국령이었고 영국왕의 근거지였던 노르망디마저 프랑스 손에 떨어졌다.

샤를 7세는 잉글랜드군의 재정비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아키텐과 가스코뉴 점령에 나서 카스티용 전투에서 장 뷔로가 이끄는 군대가 마지막으로 존 탈보트 경이 이끄는 영국군의 분전을 분쇄하고 보르도를 포함한 가스코뉴를 점령했다. 1451년 6월 19일 보르도를 함락시킬 때 탈보트와 그의 아들을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보르도는 이듬해 10월에 잉글랜드군에게 빼앗겼지만 잉글랜드군은 열세를 회복하지 못해 1453년 10월 19일 다시 보르도가 프랑스군에게 함락되면서 백년전쟁은 끝났다. 결국 영국군은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완전히 쫒겨나게 되었다. 샤를 7세는 나라를 구원한 승리왕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7. 그 후

영국의 마지막 대륙영토로 남은 칼레는 그 후로도 약 100년 정도인 1558년까지 영국의 영토로 남아 있으면서 영국산 양모를 집산하는 항구로 기능하면서 왕실 재정 수입의 35%를 담당하는 노른자 땅이었지만 이후 영국의 '피의 메리' 메리 1세가 남편 펠리페 2세를 도와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와 전쟁했다가 이 지역을 빼앗기고 만다. 이후 되찾지 못하면서 영국은 진짜로 섬나라가 되었다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지브롤터를 차지하면서 유럽 개입 교두보를 다시 확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년전쟁 와중이었던 1440년 맏아들인 도팽(왕세자) 루이가 귀족의 반란에 참가하는 막장 패륜 사건도 있었다. 반란은 진압되고 왕세자 루이는 도피네의 국왕 직할령에서 17년을 지냈다. 그 후에도 부왕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아 1456년 부왕의 군대에게 쫓겨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 샤를 7세는 백년전쟁이 끝나고 복구에 전념하다가 1461년 죽었다.

8. 평가

백년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끝내고, 중앙집권적이고 조세를 확보할 수 있는 정책을 펴서 봉건시대를 사실상 끝내게 만들고 근세로 나가게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계산적인 행보로 부하들을 매몰차게 버리고 그로 인해 주변사람들과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 그의 평가를 높게 만들지 못하고 있다.
왕위 계승의 정통성 논란, 외침으로 나라가 멸망 직전까지 갔으나 신하들의 분전으로 극복해냈고, 외침을 극복하게 해준 그 공신들을 숙청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선조와 자주 비교되는 군주. 그리고 특정신하를 밀어주다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이용가치가 없어졌다고 느끼는 순간 한방에 내치는 모습은 중종과 유사하다.
아들과의 불화로 전쟁까지 일으킨 경우를 보면 견훤, 이성계의 경우와도 비슷한데, 이 쪽은 반대로 아버지가 승리한 경우다.

9. 기타

샤를 7세의 치세는 조선세종대왕문종, 단종, 그리고 세조의 시기와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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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훗날 장미전쟁으로 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 [2] 대포가 기병한테 쳐발렸다는 점에서 "읭?"하는 의구심을 가질법도 하지만, 중세의 대포는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니다. 굉장히 무겁고 불편한데다 많이 쏴봐야 고작 7발이다. 걸핏하면 쏘다가 폭발할 위험이 높아 유럽의 군대에서 기피대상이었다. 살상력도 강하지도 않았다. 대포가 발달하고 주력 무기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되는 15세기에 접어들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