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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식잠항수송정

last modified: 2015-03-21 13:27:42 Contributors



1943년 히다치 제작소에서 건조중인 유I형 유1급 1번함 유1. 왼쪽 끝에 서 있는 일본인 기술자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다.


三式潜航輸送艇

Contents

1. 개요
2. 왜 만들어졌나
3. 만들어낸 과정
4. 성능
5. 이후 행보
6. 그 외 트리비아


1. 개요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절정에 달한 결과 만들어진 삽질의 두 결과물 중 하나로, 일본군 육군 소속 잠수정이라는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있어서도 안 될 출신성분을 가지고 있다.[1][2]

통상형인 유1형과 개량형인 유2형이 계획되었고, 유1형의 경우 유1급/유100급/유200급/유300급 4종류로 나뉘어져 대전 중 총 38대가 제작되었다. 유2형은 우시오라는 이름을 달고 시작함인 1번함이 건조중이었으나, 결국 완성되지 못하고 종전을 맞이했다.

통칭 마루유라고 불리며, 함대 컬렉션에서도 마루유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마루유라고 검색하면 이 항목으로 리다이렉트된다.


2. 왜 만들어졌나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해군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수송용 잠수함이 필요했기 때문.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쟁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에 수많은 수송선들을 잃었고, 대책에 골몰하던 일본 육군은 잠수함이라면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물자를 수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물건을 만들었다. 정확하게는 분명히 해군에서는 미 해군 함대를 격멸시켰다고 했는데 이상하게 수송선의 피해가 자꾸 늘어나게 되니 육군 측에서 고육지책으로 따로 바다를 통해 물자를 보급할 방법을 만들어낸 것.

이미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기 한참 전부터 일본 육군과 해군은 따로따로 자체적인 수송선단을 꾸리고 있었으며, 서로 상대방의 수송선단을 호위하던 육군 전투기가 격추되거나 해군 호위함이 격침될 때마다 네놈들 때문에 아까운 전력이 날아간다고 서로 디스질하던 상황이므로 이렇게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야말로 집안싸움의 최종 테크트리라고 할 수 있다.

3. 만들어낸 과정

설계/제작 단계에서 완전 극비로 아군인 해군에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독일의 수송용 잠수함[3] 도면을 참고하거나 민간 잠수함 기술자 등의 협력을 받아 만들어졌다. 이후 이 사실이 해군의 귀에도 들어갔고, 설계도를 본 해군 관계자는 '이거 안 만드는 게 나을걸ㅋ'이라는 반응이었다고(…). 건조는 주로 육군 기관차 공장에서 이루어졌는데, 나중에 해군이 '이것들이 뭘 하나' 싶어서 보러 갔더니, 그 당시 해군에서도 활용하지 못했던 모듈식 건조공법[4]을 이용해 효율적인 건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데다, 개발이 나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이게 뜨면 뜨는 대로, 침몰하면 침몰하는 대로 해군의 위신에 금이 간다는 이유까지 겹쳐져 후반부에 마지못해 해군 측에서 제작과 승무원들의 훈련에 도움을 주었다.[5] 사실 원래 해군 스스로 잠수 수송선을 건조할 계획을 세우면서 해군 인원이 부족하니 잠수함 운용 인원은 육군에서 해군에 넘겨달라고 주장했고, 육군이 자기네 병력을 해군에 넘겨주기 싫어서 자체 건조를 추진한 것이 이 잠수정의 건조 배경이기도 했다. 때문에 육군이 직접 수송용 잠수정을 건조한다고 하자 해군도 내심 반기는 분위기였다. 다만 육군이 해군의 잠수함 건조용 강재를 갈취해서 배를 건조할까봐 전전긍긍했는데, 그 자재를 육군이 스스로 전차 생산량을 줄이면서[6] 강재를 조달했기 때문에 그나마도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결국 진수를 마치고 훈련을 겸하는 시험항해를 해군 참관단이 보는 앞에서 실시하게 됐는데, 해군이 운용하는 잠수함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7]이었던지라 성공을 기뻐하며 만세 삼창을 부르는 육군 관계자들의 옆에서 해군 관계자들은 배가 침몰했다며 훈련 중지하고 구출하라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8]

4. 성능

40m의 전장에 배수량 230t, 한쌍의 1,850마력 디젤엔진과 1,200hp 전기배터리를 장착했고 수상에서 13노트 수중에서 6.5노트로 항해가 가능했고 최대 80m의 잠항심도를 기록하며 10노트로 15,000해리를 항해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당시 일본군 해군에서 운용하던 다른 잠수함들에 비해서 약 1/10, 본격 잠수항모I-401에 비하면 거의 1/20에 가까운 수준이다. 오늘날 운용되는 것들과 비교하면 돌고래급상어급의 중간 사이즈 정도.

오로지 수송을 위해 만들어진 수송선인지라 어뢰도 없었고 4식 37mm 함포 1문과 경기관총 5정이 무장의 전부. 사실상 전투에 대한 대비는 거의 전무했다. 그런데 너무나도 작은 사이즈였던지라 애초에 요구됐던 만족스러운 물자 수송이 불가능했고, 느린 속도에 잠항이 가능한 거리도 매우 짧았으며, 무장이 기관포와 전차포밖에 없었던 등 문제투성이의 물건이었다. 기술력 부족은 함내 설비에도 영향을 주어, 제대로 된 화장실이 없어 드럼통을 썼다고 한다.[9]

다만 무게중심이 아래에, 부유중심이 위에 있어 절대로 함이 전복 되지 않는 구조였고, 이를 이용해 일반적인 함선으로는 항해가 불가능한 태풍 속을 데굴데굴 굴러가며 항해해(…) 수송작전을 성공시킨 사례도 있는 모양. 또한 내압갑으로 육군 전차에 사용되는 16mm 장갑을 사용했던지라 이론상으로는 해군의 몇몇 잠수함보다도 깊이 잠수할 수 있었다고. (테스트심도 100미터) 다만 그 깊이에서 항해는 불가능


5. 이후 행보

초반에는 주로 해군의 정규 잠수함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수송작전에 참가했지만, 날이 갈수록 미군의 대잠전력에 시달리며 엉뚱한 해군 잠수함의 손실이 늘어나자 해군 측의 눈칫밥이나 먹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고, 결국 잠수함을 이용한 육해군 합동 수송작전은 완전 취소되었다.[10]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나름대로의 메리트(?)를 가지고 있었고, 해군 눈치를 안 보고 육군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잠수함이었기에 전장 여기저기에 투입되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였다. 특히 해군 잠수함의 반도 안 되는 크기 덕분에 제공권을 미군에게 장악당한 상태에서도 활발히 수송&장병 구출작전을 펼친 덕에, 일본 육군에게는 행운의 여신 취급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6. 그 외 트리비아

경순양함 키소의 승무원들에게 통신으로 "그거 잠수는 하냐?"라는 소리[11]를 듣거나[12] , 수직잠항 때문에 두더지라고 놀림받거나, 적군으로 오인받아 수송함에게 충각 공격을 당하거나,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나뭇가지와 수풀로 위장을 한채 항해를 했다거나, 당당히 일장기를 내건 채 미군함의 코앞을 스쳐지나갔음에도 미군이 오히려 당황해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했다거나, 하여튼 이런저런 기묘한 일화가 많았던 함.

야마토의 마지막 출격 시 마루유급 한 척이 등현례[13]를 실시한 적이 있는데, 그걸 본 야마토 승무원들이 그에 답하면서 답례 경례를 하자 보잘것 없는 배에게 경의를 표해준다고 승무원들이 울고 있다가 그 직후에 야마토가 일으킨 파도가 마루유를 덮치는 바람에 전부 다 젖어버렸다고 한다(...)

참고로 이 등현례 때문에 또 하나의 일이 있었는데, 한 마루유급 정장이 실수로 육군 고관 앞에서 해군식 경례를 해 버리는 바람에 좌천, 그 바람에 다른 동료들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로 영전하러 갈 때 배웅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진정한 새옹지마

마루유를 발주한 4군데의 회사 중 3군데가 일본 내지의 군산업체[14] 였고, 그리고 나머지 1군데가 인천 소재의 조선기계제작소였다. 조선기계제작소에는 유300번대의 건조가 할당되어 유3001번부터 유3010번까지 총 10대의 주문이 들어갔고, 그 중 유3003까지 3대가 완성되어 일본으로 조달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양의 자재 수탈이 있었다. 얼마나 악랄하게 수탈했는지 유300번대의 3척이 나머지 자매함들보다 훨씬 좋은 퀄리티로 완성되었다며 노고를 치하받을 정도였으며, 이 중에서 유3001번이 위에 언급된 수송함의 충각 공격을 받은 함선으로 제대로 들이받혔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퀄리티 덕분에 살아남아 이후 연습함으로 전용되었다. 참고로 조선학자인 김재근 박사(1999년 졸)가 제작에 참여하면서 조선(造船)의 역사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네이버캐스트 링크

참고로 조선기계제작소는 원래 철도차량, 엔진등을 주로 만들던 회사였다. 조선기계제작소는 해방후 한국기계로 바뀐뒤 대우그룹으로 시설이 넘어가서, 지금 대우계열 후신인 두산인프라코어의 공장으로 고스란히 쓰이고 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조선기계제작소에서 마루유를 짓던 노무자들이 거주한 조선소 인근 쪽방촌은 오늘날의 행정구역상으로 동구 만석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속칭 '아까사끼(赤崎)촌'이라는 이름으로 2014년까지 남아 있다. 언젠가 재개발 예정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 지 기약이 없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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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나머지 하나는 육군 항공모함특종선 병형으로, 흔히 아키츠마루급이라 불리는 그것이다.
  • [2] 남북전쟁 당시 남군이 운용한 수동잠수정 헌리 호가 육군 소속 잠수함으로는 최초이지만, 이 쪽은 시험제작기 1척만 만들어지고 양산 계획이 애초부터 없었으며 첫 항해에서 바로 침몰했기에 진정한 의미의 군함으로 보기에는 애매한 상황.
  • [3]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초반에 중립국이었던 미국과의 교역을 위해 2천톤급 잠수 수송선을 3척 건조했었다.
  • [4] 함체를 머리/몸통/꼬리 3파트로 나누어 부분적으로 건조한 뒤 레일로 운반해서 최종 건조장에서 전기용접으로 마무리했다. 오늘날의 모든 잠수정들과 잠수함들이 이런 모듈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된다.
  • [5] 육군의 부탁을 받아 육군에서 차출된 잠수함 승무원들을 히로시마 잠수함 학교에 입학시켜 훈련을 받게 했다고.
  • [6] 실제로는 전차를 증산해봤자 의미도 없는데다 생산 페이스 자체가 실제로 조달된 자재를 소화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 [7]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서서히 전진하며 미끄러지듯이 잠수하는 해군 잠수함과는 달리 수직으로 가라앉는 듯한 모양새. 원래 그런 방식으로 잠수하는 민간용 잠수정이 설계 베이스라 그런 식으로 잠수하게 됐는데, 덤으로 육군 조작요원들도 처음 조작하는 거라 시험항해 현장에서도 트림 조절을 잘 못해서 심하게 흔들렸다고 한다.
  • [8] 이 부분의 서술에 대한 내용은 사실 신빙성이 많이 떨어진다. 일본 위키피디아에는 이 시험항해에 대하여 '배가 침몰하여 실험이 실패했고 승무원들은 구출되었다'는 식으로 적혀있었지만 지금은 이 부분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교체돼 있다. 여기에 이 내용에 대해 삼식수송잠항정을 다루고 있는 서적들이나 프라모델 설명서조차 육군과 해군의 반응이 판이하게 달랐다는 언급만이 있을 뿐, 침몰로 인한 실험 실패 등의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침몰설에 관한 소스는 예전 위키피디아 하나뿐. 애초에 진짜 최초의 시험항해는 해군 잠수함 교관과 해당 잠수정의 원형이 된 민간 잠수정 설계가의 협조를 받아 이미 끝나 있었다고.
  • [9]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일본제 잠수함들은 어느 정도 규모가 되면 거의 대부분 화변기를 설치했기 때문. 그러다 보니 당시 다른 나라의 잠수함들과 달리 드럼통을 쓰는 게 기술력 부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증거가 되었다.
  • [10] 사실 육군에서 마루유 만들고 있을 때 해군에서도 수송용 잠수함으로 波101형과 伊361형을 건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괜히 예산만 2배로 잡아먹은 셈.
  • [11] 당시 키소에 타고 있었던 승무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조롱 반 걱정 반으로 물어봤다는 듯.
  • [12] 그런데 자료에따라서는 키소는 그때(1944년 7월 18일) 요코스카에서 입거한 상태였다보니 키소가 아닌 그날 마닐라에서 싱가포르로 출발하려고 했던(출발한 다음날에 미군잠수함에게 격침당함) 오오이였을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 [13] 일반적으로 해상 사열시 승무원이 제복을 입고 경례하는 그것.
  • [14] 유1번대는 위의 사진에 나온 대로 히다치 제작소, 유100번대는 일본제강소 히로시마 공장, 유200번대는 안도철공소 츠키시마 공장에 각각 배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