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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last modified: 2014-10-18 22:43:39 Contributors

산하이관(山海關)

Contents

1. 위치
2. 형태
3. 역사

1.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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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만리장성관문중 하나로 만리장성의 관문 중 최동단이자 시작점에 위치한다. 허베이 성(河北省) 친황다오(秦皇島) 시의 동쪽 산하이관 구(山海關區)에 있다. 수도 베이징으로부터는 동쪽으로 300km 거리이고, 베이징과 선양을 잇는 경심고속공로(京瀋高速公路)와 연결되어 있으며,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의 옌산(燕山) 남쪽에 위치한다.

2. 형태

산해관은 주변 둘레가 4km에 이르는 사각요새다. 벽의 높이는 14m에 이르고 두께가 7m이다. 동쪽과 남쪽 북쪽은 깊고 넓은 해자(垓子)가 파져 있고, 도개교(跳開橋)가 설치되어 있다. 산해관의 중앙에는 종탑이 서 있다. 산해관 4면에는 모두 문이 있는데, 동, 서, 남, 북쪽으로 각기 진동문(鎭東門), 영은문(迎恩門), 망양문(望洋門), 위원문(威遠門)이다.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황폐화되어 진동문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이 중 산해관의 외부로 접한 진동문은 그 위치 때문에 중요한 곳이다. 진동문에 걸린 현판의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은 산해관을 대변하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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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본성 동쪽 4Km에 있는 만리장성이 발해만(渤海灣)과 접하는 부분은 노룡두(老龍頭)란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노룡두 자체는 북제시절부터 있었다고 한다.

3. 역사

산해관은 일찍이 ,나라 시절에는 임유관(臨制關), 나라와 나라 때는 천민현(遷民縣)·천민진(遷民鎭) 등으로 불렸다. 수나라 때는 현재보다 약간 서쪽에 위치하였고, 수문제 시절에는 고구려의 장군 강이식이 산해관을 선제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당시는 산해관으로 불리지 않았으니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점이 든다. 임유관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11세기 초 요나라 때이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이름이 산해관으로 붙게 된 것은 1381년 의 명장 서달(徐達)이 관문을 개축하고 산과 바다 사이에 위치한다 하여 산해관이라 칭했을 때부터다. 이후 산해관을 관리하는 산해위를 두었으며, 척계광(戚繼光)이 요새화를 시작하고 산해관의 동쪽, 남쪽 그리고 북쪽에 도시와 요새를 건설하면서 산해관을 군사도시로 만들었다. 그래서 산해관은 중국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의 하나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만리장성에서 가장 잘 보전된 관문들 중 하나로 남아있다.

명나라 후기에 이르러 산해관은 더욱 중요해졌는데 후금을 세운 여진족이 명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산해관을 공략해서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산해관의 특성상 한쪽 면은 바다라 제대로 된 해군이 없으면 돌파가 불가능하며(후금이 조선수군을 몹시 탐낸 이유), 나머지 한 쪽은 산악지대에 만리장성과 함께 거용관등 역시 난공불락의 주요 관문이 있어서 우회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르도스 초원 쪽으로 우회하는 루트도 있지만 이렇게 되면 보급로가 길어져서 북경 공략은 어렵고 약탈이나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누르하치는 몇번이나 산해관을 공격했지만 포르투갈에서 도입한 홍이포로 무장한 원숭환에게 번번히 참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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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원숭환이 모문룡 처형 문제로 처형된 후, 산해관 장령(將領)에 있던 오삼계는 그의 애첩 진원원이 이자성측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게다가 북경이 이자성에게 함락당했다는 소식까지 듣자 격노한 그는 청의 섭정인 도르곤과 접촉했다. 오삼계가 산해관의 문을 스스로 열어주면서 청군은 무혈입관, 산해관 전투에서 청군과 오삼계군은 이자성에 맞서 함께 싸웠다. 이 싸움에서 청나라의 승리는 이자성의 정치력 약화를 가속화했고 결국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나라 시절에는 심양과 북경 사이에 위치한 산해관은 신구 수도를 잇는 요충지 중의 요충지가 되었다. 아편전쟁 때도 산해관에서 전투가 일어났으며,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때도 전투가 벌어졌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930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만든 이후, 일본군은 지속적으로 하북 방면으로 공략해 1933년 1월 30일에 산해관을 함락시켰다. 산해관의 함락으로 북경 공략의 길이 열린 셈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인 1961년,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주요관문 중 하나인 욕관(嘉峪關)과 거용관(居庸關)과 함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