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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

last modified: 2015-02-02 11:13:02 Contributors

Contents

1. 소개
2. 디스코그라피
2.1. 1기: 독보적인 창작
2.2. 2기: 김창완의 솔로 체제
2.3. 3기: 김창훈과 김창익의 복귀, 인기 절정
2.4. 4기: 산울림의 종언
2.5. 재결성과 김창익의 죽음
2.6. 정규 앨범이 아닌 편집 앨범과 기타 앨범들
3. 산울림 박스셋 사태
4. 2014 트릴로지 박스세트 사태


1. 소개

youtube(YAYk3Il31P0)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 San Woollim - Laying silks and satins on my Heart, 산울림
-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Saturday Night Music Show(토토즐), 509회, EP509, 1996년/12/14, MBC TV

대한민국 대중 음악사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밴드.
그야말로 전설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밴드.




밴드 초창기 시절.


(...) 왼쪽부터 창완-창익-창훈

김창완(보컬, 기타), 김창훈(기타, 베이스, 키보드), 창익(드럼) 형제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그룹. 1977년 <아니 벌써>로 데뷔했다.

서울대학교 2명(김창완, 김창훈)에 고려대학교 1명(김창익)의 가족밴드. 아니, 이건 뭐 후덜덜엄친아 밴드.

산울림 삼형제는 어릴 적에 주말마다 방에 계란판을 붙여서 방음실로 만들고 싸구려 기타로 자기들이 만든 곡을 연주했다고 한다[1]. 이후 1977년에 MBC 대학가요제가 처음으로 개최된다고 하여 삼형제가 무이(無異, 평소와 다름없음)[2]라는 밴드로 대학가요제에 참가한다. 당시 김창훈은 샌드페블즈 5기 멤버로 있었는데 샌드페블즈를 탈퇴하고 무이로 들어오면서 "나 어떡해(이 곡은 산울림 2집에 리메이크되어 다시 실린다)" 라는 곡을 샌드페블즈에 주고 나온다. 대학가요제 예선에서 무이는 "문 좀 열어줘(산울림 1집 수록곡)" 로 1위, 샌드페블즈는 "나 어떡해" 로 2위를 기록했는데 김창완이 1975년 졸업생이라 재학생만 참가할 수 있는 규정에 걸려서 무이는 결국 탈락하고 제 1회 MBC 대학가요제의 대상은 샌드페블즈가 타게 된다. 이후에 "나 어떡해" 가 김창훈이 쓴 곡임을 알고 음반을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왔는데 삼형제는 프로페셔널한 음악을 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이제 사회 생활을 할 나이가 되었기에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을 마지막으로 기념하는 의미에서 음반 제안에 응했고 이렇게 해서 산울림 1집이 나오게 된다. 이때 레코드 판이 40만 장 팔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기준에서는 상당한 대박이었다고 한다.

초기(1~3집)에는 펑크 록 느낌의 디스토션이 강한 공격적인 사운드를 많이 보여줬는데 이 스타일은 영미 록의 프로그레시브나 사이키델릭 성향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어떠한 선대 록 음악의 성향도 받아들이지 않은 산울림만의 독창적인 작법이었다. 실제로 삼형제는 데뷔 전 대학 그룹 사운드가 흔히 하던 카피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에 처음 밴드를 시작할 때부터 작곡에 몰두 데뷔 시점에 이미 상당한 분량의 창작곡이 있었다.[3] 산울림의 초반이 그야말로 전설로 남게 된 것은 미숙한 실력과 부족한 장비를 가지고도 도달하였던 파격에 가까운 독창성 때문인 것이다.[4] 오로지 외국 음악 카피만 하면서 자체 창작은 도외시하고 연주력에만 목 매달던 일부 음악인들에게 산울림의 등장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직접적으로는 3집까지는 한국식 러지 록의 탄생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이들의 초기작은 "대한민국 헤비메탈의 시작" 이라고도 평가된다[5] 어떤 음악에도 영향받지 않았으나 한국 거의 모든 록커들에게 영향을 준 것이다. 지저분한 퍼즈톤 위에 깔리는 김창완의 나레이션에 가까운 나지막한 노래와 관조적인 가사는 그 당시의 대중들에게 상당히 충격이었다고. 실험적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뛰어넘어서 사랑받는 강한 음악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중기와 후기를 거쳐가면서 산울림은 포크락과 디스코 등 딱 하나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하였고 계속적으로 많은 한국 록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때의 발라드 노래들은 초기의 록적인 감성을 후퇴했지만 대중들의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러면서도 정규 앨범 사이사이에 <개구쟁이>[6]나 <산할아버지>와 같은 동요 앨범을 내기도 한다. 산울림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로 비관적이고 시니컬한 노래와 어린이를 위한 동요를 동시에 작곡할 수 있는 다양한 감성을 소화할 수 있는 밴드라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산울림은 신중현과 함께 대한민국 록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며 이에 영향받은 후배 뮤지션들이 헌정 앨범을 내게 된다. 참고로 신중현이 대한민국 최초 첫번째 헌정 앨범이고 그 두번째가 산울림이다. 여담으로 산울림의 영향력은 한국을 넘어 일본으로도 전해졌는데 산울림과 중현과 엽전들의 일본인 카피밴드 '곱창전골' 이 있었을 정도.[7]

2008년 1월 29일 드럼을 담당하고 있는 막내 창익캐나다 직장에서 눈길에 지게차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지게차에 깔려 사망하는 불의의 사고가 있었다.[8] 이로 인해 김창완은 "산울림은 가족 밴드다. 막내가 이렇게 떠나 버린 이상 예정되어 있던 것 이상의 산울림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건 없을 것이다" 라고 언급했다. 이로써 산울림은 해체하고 긴 전설의 막을 내린다.

여담이지만 활동 당시 유난히 심의 태클을 많이 받은 밴드 중에 하나다. 당시는 악보 검열, 가사 검열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산울림 음악을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아니 이게 왜 심의야" 하고 놀라겠지만 이게 다 그 심의 필터에 걸러져서 나온 물건이라고... 참고로 심의 사유는 퇴폐 내지는 가사가 너무 슬프다 등등(...) 대표적으로 1집은 모든 곡이 싸그리 심의에 걸렸고 "아니 벌써" 의 경우 가사를 전체적으로 갈아 엎었다고 한다.[9] 김창완 본인의 말로는 개작 전 가사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굉장히 비관적이고 우울한 가사였다고. 이외에 3집의 "내 마음" 도 원래 "황무지" 라는 제목이었다가 바뀌었다.

2. 디스코그라피


2.1. 1기: 독보적인 창작

그야말로 파격을 통해 전설의 반열에 오른 산울림의 초기 앨범들. 현재도 1~3집 앨범은 외국 록 음반 수집가들에게까지 수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담이지만 영문 위키피디아에 산울림을 치면 영어로 쓰인 Sanurlim 항목으로 리다이렉트될 정도이다.# 대표곡은 "아니 벌써",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는 이미 나"[10]

1977년 1집 <아니 벌써>
1978년 2집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1978년 3집 <내 마음>

2.2. 2기: 김창완의 솔로 체제

두 아우의 군 입대로 하는 수없이 김창완 혼자 활동한 시기로 1기와 3기의 과도기적 성향을 보인다. 대표곡은 "빨간 풍선", "오솔길",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찻잔". 동요 1집의 "개구쟁이" 도 유명하다.

1979년 동요 1집 <개구쟁이>
1979년 4집 <특급열차>
1979년 5집 <한낮의 모래시계>
1980년 6집 <조금만 기다려요>

2.3. 3기: 김창훈과 김창익의 복귀, 인기 절정

1기의 퍼즈톤은 완전히 사라지고 사운드가 세련되어졌으나 그만큼 원초적이고 거친 에너지도 감소되었다. 10집을 끝으로 사실상 산울림의 공식적인 활동이 중단되었다. 대표곡은 "가지 마오", "독백", "청춘", "먼 나라 이야기", "회상", "너의 의미" 등으로 오늘날까지 불리는 아름다운 발라드 노래들이 이 시기에 많이 작곡되었다.

1981년 7집 <가지마오>
1981년 동요 2집 <산할아버지>
1982년 8집 <새야 날아>
1982년 동요 3집 <운동회>
1983년 9집 <웃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어>
1984년 10집 <너의 의미>
1984년 동요 4집 <동심의 노래>

2.4. 4기: 산울림의 종언

아우들이 각자 사업 등을 이유로 빠지고 김창완 혼자 활동한 시기이다.

1986년 11집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1991년 12집 <꿈꾸는 공원>

2.5. 재결성과 김창익의 죽음

신해철 등의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 산울림의 재조명이 시작되고 트리뷰트 앨범이 제작되었고 다시 결성된 산울림의 13집은 초기 감성으로 회귀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다. 마침 국내 인디씬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면서 아마추어적인 음악과 차가운 관조, 어린아이와도 같은 낙관의 정서가 떠오르던 시기기도 한데, 말할 필요도 없이 70년대에 산울림이 가지고 있던 바로 그 모습이다. 그러나 김창익의 불의의 사고로 전설은 막을 내렸다. 대표곡은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무지개".

1997년 13집 <무지개>

2.6. 정규 앨범이 아닌 편집 앨범과 기타 앨범들

1978년 <산울림 제 2집>(맥시싱글)
1978년 <산울림 빨간 풍선>(옴니버스)
1978년 <X-mas carol>
1979년 <산울림 영화음악집: 내일 또 내일>
1982년 <애니메이션 슈퍼삼총사 OST>
1983년 <이티 이야기>
1983년 <사랑의 발라드>
1983년 <산울림 BEST - 산울림 ROCK WORLD>
1983년 <산울림 러브 사운드(경음악)>
1983년 <산울림 록 사운드(경음악)>
1984년 <산울림 동요 BEST - 산울림 동요왕국>
1986년 <산울림 스페이스 사운드 디스코>
1986년 <산울림 귀여운 소녀의 디스코>
1986년 <산울림, 김범룡 Disco Mix>
1987년 <산울림 BEST - 산울림 Greatest Hits>
1989년 <산울림 BEST - Best of Sanullim>
1996년 <산울림 동요 BEST - 하늘색 꽃병>
1997년 <The Complete Regular Recordings>
1998년 <하늘색 꽃병>
1998년 <초록색 대문>
2005년 <산울림 다시 듣기 : 청춘, 위로, 추억>
2008년 <The Story of Sanullim: Complete Studio Recordings>

3. 산울림 박스셋 사태

산울림 박스셋은 1997년에 나온 <The Complete Regular Recordings>, 일명 "지구레코드" 판본이 있었다. 그런데 이 박스셋은 발매 이후에 나온 13집이 없고 무엇보다도 앨범 세 개 분량을 CD 두 개로 쪼개서 나눠놓는 만행을 저질렸다. 그래서 2008년 산울림의 새로운 박스셋이 나온다는 소식에 많은 팬들이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오리지널 마스터 테입을 발굴하고 리마스터링을 거쳐서 제대로 된 LP 미니어쳐 형태로 나온다는 소식으로 "뭔가 제대로 하고 있구나" 라는 기대를 가지게 했다.

하지만 이것이 지구레코드 판본은 비할 바 못되는 최악의 사태로 치달을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선 박스 문제. 인터넷을 통해 우선 박스셋을 받아본 사람 중에 바깥 박스와 안 박스가 너무 꽉 끼어서 빠지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엔 17만 8천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산 그것을 로 째고 손으로 뜯은 처참한 몰골이 올라왔다.

시작부터 삐걱거린 박스셋 문제는 레코딩의 실수 발견으로 최악의 국면을 맞았다. 최첨단 기술력을 동원하여 완성했다던 CD 레코딩의 마지막 순간에 곡의 볼륨을 서로 맞추지 않아 볼륨이 들쑥날쑥한 것이 발견된 것이다. 그것도 17장 CD 중 15장이 그랬고 로엔엔터테인먼트 측에서는 결국 전 CD의 을 단행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리콜된 씨디 중 1집과 10집에서 또 다른 문제(노이즈 문제와 트랙 문제)가 발견되었고 로엔측은 절절한 사과문과 함께 1집과 10집을 재리콜하였다.

사태는 계속되었다. 7집에서 노이즈가 섞인 트랙이 또 다시 발견되었고 구매자들이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더 이상의 리콜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사태는 한국의 음반 시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취지는 매우 좋았으나 전설의 록밴드의 역사를 관통하는 CD 17장 분량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마감에 쫓겨 제대로 확인되지도 않은 상품을 출시하여 결국 두 번의 대규모 삽질로 끝내고 말았다는 사실은 한국 음반 업계의 최악의 흑역사로 남을 수밖에 없다.

4. 2014 트릴로지 박스세트 사태

그리고 2014년 2월에 첫 3장만을 엮은 '산울림 트릴로지'라는 새 박스세트가 나왔다. 이번에는 전 박스셋의 흑역사를 넘어 제대로된 재발매반이 나올것이라 기대되었지만, 발매 첫날부터 불만이 나오고 있다. 500장 한정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500보다 큰 숫자가 새겨진 세트가 발견되었다. (댓글 참고) [11] 또, 전곡 오리지날 마스터 테입 사용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로엔 박스세트의 음원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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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때 만든 곡이 1~3집에 있는 곡들로 그 덕에 1집이 나온 후 1년만에 2, 3집이 연달아서 나올 수 있었다. 또 이 때 카피하지 않고 자신들의 음악을 했기에 더 독특한 음악이 나올 수 있었기도 하다.
  • [2] 어릴 적의 김창완은 매우 염세적인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밴드명에서도 그 느낌이 뿜어져 나온다.
  • [3] 이때문에 데뷔 직후 1, 2, 3집을 거의 연달아 발표할 수 있었다.
  • [4] 들국화의 드러머였던 '주찬권' 은 인터뷰에서 산울림에 대해 "창작력은 와방(최고)인데 연주가... 좀..." 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런 산울림에 자극받아서 창작과 연주과 완벽히 조화된 들국화가 등장한 것인지도...
  • [5] 3집의 '내 마음' 이라는 곡이 이런 인식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 같다.
  • [6] 훗날 갤럭시 익스프레스가 리메이크하기도 한다.
  • [7] 밴드 곱창전골의 기타리스트 양평이횽 하세가와 요헤이는 곱창전골 이후 이후 밴드 뜨거운 감자에서 활동한다. 그리고 이후 김창완 밴드에서 김창완과 함께 음악을 하게 된다! 팬질의 끝
  • [8] 김창완 밴드의 EP 앨범 <The Happiest>에 수록된 'forklift' 가 이에 대한 노래다.
  • [9] 고친 가사도 '자살을 하려고 했는데 벌써 날이 밝았네'라는 뉘앙스라고 한다.
  • [10] 러닝타임이 무려 18분 40초에 달하는 한국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긴 노래. 3집 B면을 이 곡 하나로 채웠다(당시 LP판 한 면의 최대 재생시간이 20분 쯤이라 그 정도로 멈췄다고 한다). 게다가 A면에는 9분짜리 노래가 하나 들어가 있어서 3집에는 5곡의 노래밖에 없다. 김창완은 훗날 인터뷰에서 당시 회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제 이런 피시도를 해보겠냐' 는 생각으로 강행했다고 회고했다. 실제 1970년대 수많은 록밴드들이 'Iron Butterfly' 의 17분짜리 싸이키델릭 'In-A-Gadda-Da-Vida' 를 즐겨 연주했고 기타리스트의 실력을 재는 하나의 척도였다. 산울림은 카피만 하지 말고 우리가 직접 만들자는 방향을 보여준 것이다.
  • [11] http://m.dcinside.com/view.php?id=disc&no=140976&page=1
  • [12] (로엔반은 마스터 유실때문에 몇몇곡은 지구 레코드 cd음원을 그대로 사용했다.)http://m.dcinside.com/view.php?id=disc&no=140990&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