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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코 디 로마

last modified: 2015-12-11 09:20:26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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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의 인물들은 독일 용병인 란츠크네흐트들이 피난 간 클레멘스 7세를 조롱하기 위해 가마에 가짜 교황을 태운 채 행진하는 모습을 그린 판화다.

중세 교황청 주요사건
사건 아비뇽 유수 사코 디 로마
벌어진 일 교황권 분열, 콘클라베 제도 정착 교황권의 몰락
Sacco di Roma. 이탈리아어로 '로마에서의 약탈' 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Sack of Rome이라고 쓴다.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로마의 붕괴
4. 학살과 파괴
5. 여파


1. 개요

교황령 역사상 최악의 수난이자 굴욕. 아울러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마감시킨 대사건.

1527년 카를 5세의 군대가 교황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도시로서의 로마 성립 이후 사상 최악의 피해.[1] 역사가들의 추산에 의하면 타격이 네로 시절의 로마 대화재마저 능가한다. 대화재 당시엔 어떻게든 불을 끄려했지만, 이 사건은 로마 일대가 폐허화한 후에야 끝을 보았기 때문이다.

14세기 아비뇽 유수가 교황권이 내리막길로 향하는 분기점이었다면 이 사건은 바닥까지 치달은 교황권 실추의 정점이자 몰락기라 할 만하다. 대한민국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딱히 통일된 용어는 없고 로마 대약탈, 로마의 약탈, 로마의 침탈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16세기 근세로 이행하는 격변기 속에서 황제권이 교황권을 역전한 이래 가장 확실한 쐐기를 박은 사건으로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교황이 세속 군주로부터 이렇게까지 굴욕을 겪은 바는 없었다. 이에 비하면 카노사의 굴욕은 사실 굴욕 축에도 끼기 어려울 정도. 또한 기독교 군대가 교황령을 침공하여 괴멸적 타격을 초래했던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권력의 정점을 상징하는 사건인 동시에 교황권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

2. 배경

1520년대의 유럽종교개혁의 횃불이 타오른 이래 가톨릭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동쪽으로는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이 1526년 동유럽 최후의 보루 헝가리를 멸망시키고 유럽 내륙까지 진출해 있었으며 교황령이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를 둘러싸고는 유럽 최대의 두 강대국합스부르크신성 로마 제국과 발루아의 프랑스가 치열하게 격돌[2] 중에 있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재임하고 있던 40대의 젊은 교황 레멘스 7세[3]는 요동치는 국제 정세에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를 교대로 오가며 줄타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4].

그는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에 맞서 프랑스, 영국,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를 끌어모아 냑 동맹을 창설했다. 즉 '합스부르크 제국[5]' vs '反 제국 연합' 의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이미 1525년의 파비아 전투에서 제국군에게 왕이 사로잡히는 참패를 겪은 프랑스는 이미 자력만으로 제국과 맞설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흔쾌히 동맹 제의에 응했으며 과거 제국과 혼인을 통해 친분 관계를 맺었던 영국의 왕 헨리 8세조차 이를 놓칠 수 없는 대륙 진출의 호기라 여겼기에 몇 차례 퇴짜를 맞아가면서까지 기어이 동맹에 가담했다[6]. 십자군 전쟁 이래 교황 중심의 동맹 세력으로서는 가히 최대 규모라 할 만했다[7].

이렇듯 교황이 몸소 프랑스와 손잡고 연합 진영을 구성해 로디를 함락하는 등 북이탈리아를 장악해나가자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 및 그 식민지 일대를 통치하던 20대의 젊은 황제 카를 5세는 격노. 이탈리아로 군대를 투입하여 실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이에 카를은 할아버지이자 선대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 이래로 합스부르크 황가에 변함없는 충성을 바쳐온 장군 게오르그 폰 프룬츠베르크[8]부르봉 공작 샤를 3세[9]에게 3만 5천의 용병을 고용할 것을 명하고 전례가 없던 교황령 침공을 명했다.

카를의 명령을 받은 제국군[10]은 곧바로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의 밀라노공국[11]을 공격. 간단히 무너뜨리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교황은 황제가 아무리 분개했기로서니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알려진 황제의 군사들이 설마 교황령, 그것도 성도(聖都) 로마까지 들이닥치리라 싶었으나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다만 제국군이 로마로 쳐들어간 것은, 이전 항목과는 달리 카를의 분노나 루터파로서 교황에게 반감이 있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이유에서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경제적인 이유였는데, 애초에 카를이 프룬츠베르크에게 주었던 용병료가 크게 부족한 수준이어서 프룬츠베르크의 아내의 보석 장신구와 프룬츠베르크 개인 소유의 은식기들을 모조리 팔아 용병료를 마련했을 정도였던 것. 그런 데다 이탈리아 깊숙히까지 진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밀라노를 함락한 것 이외에는 이렇다할 전투가 없어 전리품도 없었기에, 용병료를 기다리다 못한 용병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던 것이다. 란츠크네흐트의 창설자이자 지휘관이었던 프룬츠베르크는 친자식들처럼 끔찍히 아꼈던 부하들을 달래기 위해 나섰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사태에 절망한 프룬츠베르크는 뇌진탕으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12] 그리고 부사령관인 부르봉 공작은 이들을 통솔할 재능도 권위도 없었고, 결국 그들이 바라는 대로 로마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13].

제국군 본대가 교황령에 이르는 동안 현지의 방어군은 말 그대로 손놓고 보고만 있었다. 코냑 동맹은 그야말로 모래알과 같은 결속력을 자랑했는데, 우선 프랑스는 변변한 군대를 보내지도 않았고[14], 베네치아 군은 자국의 안전만 확보하면 그만인 입장이어서 제국군이 베네치아를 비켜가자 사실상 손을 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교황군이 제대로된 군대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마키아벨리의 강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은 교황령의 정규군을 편성하는 것을 꺼려했는데, 시민들에게 무기를 쥐어주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시의 이탈리아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르네상스 시기동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대부분 정규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전쟁의 대부분은 각국이 고용한 용병들끼리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요즘의 상식과는 달리, 당시의 통념으로서는 국민군을 주장한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매우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따라서 교황군은 제국군의 침공이 임박하자 여기저기서 허겁지겁 끌어모은 어중이떠중이들의 집합이었고, 우유부단한 최고결정권자의 영향을 받아 전쟁내내 그야말로 당나라 군대의 면모를 자랑했다. 기록에 보면 말도안되는 군기에 어이상실한 마키아벨리가 대놓고 비웃었다고 한다.

동맹군의 저지선을 제국군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넘어서자 그제서야 더이상 방법이 없는 동맹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볼일이 없어진 베네치아군은 그대로 베네치아로 돌아갔고, 아쉬운 교황군과 소수의 프랑스군이 제국군의 뒤를 쫓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도 그야말로 촌극이었는데, 제국군에 합류한 페라라 국의 신형 대포가 무서워서 제국군과 40km의 간격을 유지한채 추격을 한 것이다[15].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도 제국군을 추격하는 교황군은 피렌체에서 이틀동안 머무는 놀라운 여유도 보인다. 이유인즉슨, 로마를 향하는 제국군이 도중에 피렌체를 약탈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인데, 피렌체인이었던 교황군 지휘관의 애국심의 발로였다. 그리고 이 이틀의 여유는 대참사를 막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린 셈이었다.

후에 교황군은 로마까지 이틀이면 도달할 수 있던 거리에서 로마함락의 비보를 받는다.

사실 교황군으로서도 할말이 있던게, 로마가 역사상 유래가 없을만큼 너무 빠르게 함락되었다는 것이다. 임박한 제국군에 형편없이 겁에 질린 클레멘스 7세가 제국군의 요구대로 로마방위군을 해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이 형편없는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아녀자들과 아이들의 손을 빌려서까지 오스만투르크의 16만 대군을 상대로 50일을 버틴 일화를 생각한다면, 9만의 로마 시민이 얼마나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져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때 보다도 상황이 더 절망적이었던 롱고바르드 족 침입[16]에도 어떻게든 민병대를 조직해서 로마를 지켜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안구에 습기가 찬다.

3. 로마의 붕괴

이탈리아 최대의 패권 가문인 메디치 가문이 영도중인 로마였고 또한 일찍이 기독교 군세에 침공당해본 경험이 없던 교황령이었기에 시민들은 제국군의 대대적 침공 소식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 평화가 계속 지속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교황령 접경에서 제국의 군대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비보가 날아들자 시민들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공교롭게도 같은 때 메디치 가문의 본영인 피렌체에서 반 메디치 봉기가 일어났다. 교황령을 사수하기 위해 메디치 군대가 빠져나가 치안에 공백이 벌어지자 마침 불만을 가진 피렌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애꿎게도 메디치 가문은 제국군이 아닌 봉기한 시민군에게 몰려 아레초로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27년 5월 6일, 마침내 2만의 제국군과 로마 결사대의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제국군과 맞닥뜨린 로마는 스위스 용병 5백명과 시민군 5천이 성벽과 대포를 방패삼아 결사적으로 방어에 들어갔다. 부르봉 공작 샤를 3세가 인솔하는 제국군 본대는 바티칸 언덕을 넘어 침공했고 이 과정에서 시민군은 지휘관 샤를 3세를 저격해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린다[17]. 그런데 지휘관을 잃은 제국군은 대오가 흐트러지긴 커녕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날뛰기 시작했다[18].

용병들의 규율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가까스로 억제하고 있던 샤를이 전사하자, 용병들의 규율이니 질서니 하는 것들은 개발살.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해 더 기를 쓰고 싸웠다. 샤를의 뒤를 이어 필리페르트가 사령관의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차석이 해내지 못한 일을 3등이 해낼 수는 없는 일.

결국 단 하루만에 로마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천여구에 달하는 수비군의 시체를 딛으며 제국군은 로마 시내로 들이닥쳤다. 이렇듯 시민군이 패주하는 와중에도 충성스런 스위스 용병들은 교황을 지키기 위해 바티칸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막고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이미 이전 파비아 전투 때 그랬듯이 거의 몰살당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에서의 마지막 항전을 끝으로 고작 42명의 생존자를 제외한 나머지 스위스 근위대 모두가 제국군에 학살당해 주검이 되었다. 다행히 목숨을 부지한 교황은 정작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이면서도 로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옛 로마 황제들의 영묘로 중세에 들어와 요새로 개조된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하는 추태를 보였다.

마침내 로마 시내로 진주한 제국군이 목도한 것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교황령다운 엄숙함은 간데 없고 폭도로 변한 시민들과 무질서함만이 팽배했다. 자신들을 통제할 지휘관마저 전사한 이상 이제 용병들의 탐욕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5월 6일의 대전투 이후 성도 로마는 지옥이 되었다.

4. 학살과 파괴

제국군은 전사한 지휘관의 복수라는 미명하에 본격적인 침탈을 개시했다. 먼저, 로마를 함락한 직후 포로로 잡은 1,000여명을 공개 처형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성당의 재산들을 남김없이 약탈했다. 현지의 여자들은 어린 아이부터 수녀까지 누구나 할 것 없이 강간을 면치 못했다. 남자들도 군인이며 사제 할 것 없이 분풀이로 고문을 받고 참혹하게 죽었다. 강간당한 여자들도 그 직후 대부분 살해되었고 어린아이들도 학살되었으며 시체가 성벽에 못박혀 꽂히는 등 남아있던 시민들은 매우 잔혹하게 유린당했다. 그 유명한 시스티나 소성당도 건립된지 고작 반 세기만에 참화에 휩싸였다. 게다가 제국군 중 상당수 차지하고 있던 루터교 신자들은 [19] 로마를 적그리스도의 본거지로 보고 있어서[20],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침탈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승자이자 제국의 지배자인 카를 5세마저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습의 필요성을 느낄 정도였다.

이와중에 클레멘스 7세 교황과 적대하던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도 제국군에 호응하고자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로마에 입성했다. 그러나 추기경은 제국군과 공통의 적을 두고 있었음에도 로마의 아비규환을 목격한 후 경악을 금치 못했고 살아남은 로마 시민들을 보호하려 노력했다.

장장 반년이나 이어진 제국군의 로마 점거 과정에서 피해는 손을 쓸 수 없이 쌓여갔다. 무법 천지속에 로마 인구는 1/3로 줄어버렸고 나머지 2/3은 살해되거나 타 도시로 망명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코냑 동맹에 가담했던 이탈리아 각 도시국가들은 걷잡을 수 없이 패닉에 빠져버렸다. 그 이전까지 건립된 르네상스풍의 건축물들은 무참히 파괴되었다. 교황 본인도 말이 피신이지 사실상 제국군에 포위되어 구금된 처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인명과 재산 피해는 계속 늘어만 갔고 교황은 현지의 이같은 소식을 듣고 크게 비통해했다.

물론 그 사이에도 교황을 수호하고 로마를 수복하고자 이탈리아 전역에서 각지의 의용군이 속속 로마로 진격했다. 그러나 강대한 제국군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살아남은 추기경들[21]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피신하거나 돈을 구해 바쳐야 했다.

결국 교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울트레흐트 교구의 재산을 합스부르크에게 넘겨주는 등[22] 배상금을 지불하여 근 1년 만에 간신히 로마로 돌아왔지만 이미 로마는 털릴 대로 탈탈 털린 상태였다. 방화와 약탈로 시가지는 초토화되고 인구는 격감했으며 건물들은 파괴되었다.

무참한 폐허가 된 로마로 돌아온 교황은 남은 전의마저 상실했다. 게다가 언제 카를 5세가 재침공해올지 몰라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그나마 실낱처럼 기대했던 동맹 프랑스 역시도 제국군에 상대가 되지 않았고 1529년에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파비아 전투 이후로 또 한번 굴욕적인 협상[23]을 맺고 발을 빼고 말았다.

최대의 우군인 프랑스마저 물러나자 교황 클레멘스 7세도 결국 카를 5세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교황은 체면을 무릅쓰고 직접 볼로냐까지 나아가 카를 5세와 만났다. 그리고 로마에서 발생한 약탈을 모두 용서하고 카를을 공식적인 황제로 인정하며 제관을 씌워줄 것을 서약[24]했다. 이 볼로냐의 협약으로 인해 교황의 권위는 황제권에 무릎 꿇고 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5. 여파

메디치 가문의 본진인 피렌체는 로마가 무너지고 교황이 적대 세력으로 돌변하는 상황에서까지 홀로 카를 5세에 대해 항전을 계속했다[25]. 마침내 1530년 비나라 전투에서 피렌체는 일주일 간의 격심한 교전 끝에 결국 신성 로마 제국에 패배하고 말았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역시 이 전투에서 55세의 나이로 피렌체측에 종군[26]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때는 로마 약탈 때와는 달리 황제군의 주력군이 용병이 아니었던 덕분에 피렌체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같은 참상을 피할 수 있었고, 덕분에 피렌체에는 오늘날까지 르네상스 시대의 고건물들과 예술품들이 즐비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피렌체 사람들을 먹여 살려주고 있다. 이리하여 교황이 야심차게 결성한 코냑 동맹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실상 교황권이 몰락했다. 교황의 영향력은 교황령으로 축소되었고, 예전과 같은 영광은 두번 다시 누리지 못하는 '이빨빠진 호랑이'가 되었다. 물론 이후에도 종교와 관련한 문제는 존재했지만, 종교적인 탄압은 교황이 아닌 세속 군주들 차원에서 벌어진데다가[27] 종교적인 문제 또한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부터는 명목상의 권한마저 축소되어 잇몸(...)까지 빠져버리고 말았다.

종교개혁의 기수였던 마르틴 루터환호하였다. 수많은 무고한 인명이 살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교황이 황제를 통해 루터파를 핍박하였듯 똑같은 방식으로 황제를 통해 교황을 징벌하게끔 하셨다" 고 이 사건에 의의를 두었다. 정작 그 이후에는 교황이 카를 5세에게 굴종하여 교황이 아닌 황제의 권한으로 신교가 더 탄압을 받았음에도 말이다.

한편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에게도 엉뚱한 불똥이 튀었다. 가톨릭 교도였던 그는 첫 아내인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혼인 무효에 교황의 허락을 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사코 디 로마' 와 볼로냐 협약으로 인해 교황은 카를 5세의 영향력에 짓눌린 상태였기에, 카를의 이모인 캐서린과의 혼인 무효를 허락할 리 만무했다. 헨리 8세[28]의 간곡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카를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어 혼인 무효를 불허했고 그렇다고 잉글랜드가 군사력으로 제국을 어찌 해볼 입장도 아니었던지라 결국 헨리 8세는 가톨릭과 인연을 끊는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성공회가 생겨난 것이다.

교황 레멘스 7세 본인도 로마에서 입은 트라우마는 죽을 때까지 해소할 수 없었다. 그는 당시의 비극을 잊지 않고자 1534년 과거 시스티나 소성당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렸던 당대의 거장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다시 초빙하여 성당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했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는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선종했고 다음 대 교황인 바오로 3세 때에 가서야 완성을 보았다.

15세기 유럽의 문예를 주도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이 사건으로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고 평가된다. 오늘날 로마에 르네상스 당시 양식 건물을 찾기 힘든 반면 후대 바로크 양식의 고건물이 즐비한 것도 그 영향이다. 실로 역사적 도시 하나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것이다.

이 사건은 스위스 용병들의 활약상 중 1792년 8월 10일 봉기 당시 튈르리 궁에서 혁명군에게 전멸당한 786명의 프랑스 근위대와 더불어 가장 장렬한 사수전을 보여준 일화로서 지금까지도 매년 로마가 제국군에 함락당했던 5월 6일마다 바티칸에 주둔하는 신참 스위스 용병들이 1527년에 최후를 맞은 수백명의 선배들을 기리며 충성 서약의 의식을 치른다. 비록 패배했음에도 그 용맹에 그 경의를 바치는 것이니 빈사의 사자상과 비슷한 의미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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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역사상 로마는 여러번 함락 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건 3개 정도 꼽을 수 있다. 처음은 켈트족에게, 그 다음은 서로마 후기. 게르만족들은 로마는 여러번 털고 나중엔 아예 로마를 멸망시키고 눌러산다. 이 때 반달족도 등장. 그리고 이 샤코 디 로마. 샤코 디 로마 때의 파괴는 서로마 붕괴와 비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참혹했다.
  • [2] 이를 이탈리아 전쟁이라 하는데, 황제 카를 5세가 스페인의 왕이기도 했으므로 '프랑스 대 신성로마제국+스페인' 의 구도였다.
  • [3] 위대한 로렌초라 불리는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의 동생 리아노 디 피에로 메디치가 파치 가의 음모에 휘말려 살해되기 전에 관계하던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그나마도 줄리아노 사후에 태어난 서자였지만 로렌초는 그를 조카로 인정하여 아들들과 함께 키웠다.
  • [4] 이전 항목에서는 선대 교황들이 합스부르크와 친교를 유지했지만 클레멘스는 교황령의 독자 노선을 걸으려 했다는 내용이 있었지만, 이전 편집자에게는 미안하지만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오히려 알렉산데르 6세와 율리우스 2세가 독자 노선을 채택했으며, 클레멘스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힘의 균형을 맞추려고만 했을 뿐 독자 노선을 걸을 만한 재능은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알렉산데르 6세율리오 2세 항목 참고.
  • [5] 같은 합스부르크 황가가 통치하는 신성로마제국+스페인
  • [6] 다만 의회의 반대를 끝내 꺾지 못해, 군대 파견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 [7] 이로써 결성된 코냑 동맹과 합스부르크 제국간의 전쟁을 코냑 동맹전쟁이라 한다.
  • [8] 유명한 란츠크네흐트 용병대의 창설자로, 이탈리아 전쟁 시대 신성로마제국을 대표하는 장군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인 카를의 명에 따라 프랑스와 대결한 장군들은 거의 대부분 스페인이나 저지대 국가, 이탈리아 출신들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프룬츠베르크는 눈에 띄는 존재였다.
  • [9] 원래 프랑스인으로, 몽팡시에 백작의 아들이었지만 아내가 부르봉 공작의 딸이었기에 부르봉 공작령을 상속받았다. 하지만 군자금에 쪼들리던 프랑스 왕이 리카 법을 적용하여 샤를의 영토를 몰수(정확히는 자신의 모후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선언), 이에 반발하여 카를의 신하가 되었다. 이전 항목에서는 '신임하는' 이라 되어 있었다만, 규율이 잡힌 군사들을 통솔하는 데에는 뛰어났던 무장이지만 딱히 신임받았던 듯 하지는 않다.
  • [10] 이라고 쓰고 용병대라고 읽는다. 이전 항목에서는 정규군인 것처럼 서술했으나, 당시 제국군의 총수가 2만 명에 란츠크네흐트만 1만 4천이었다. 게다가 이탈리아 출신 용병대도 많았으니, 거의 대부분이 용병이었다는 말이다.
  • [11] 파비아 전투로 끝난 1521~1526년의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신하국이 되었지만, 당시 밀라노 공국의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2세는 황제 덕분에 공작이 된 것은 고맙지만 내정간섭은 극구 사양하겠다고 선언. 사실상 독자 노선을 걸었다.
  • [12] 즉사한 건 아니고, 신성로마제국으로 급히 이송되었으나 끝내 사망했다.
  • [13] 일찍이 루터는 교황의 사치스러움과 호사스러움을 비난한 바 있는데, 용병들이 보기에 사치와 호사를 누린다는 건 곧 쌓아놓은 재물이 많다는 뜻이었다. 즉 로마는, '타락한 도시' 인 동시에 '보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도시' 였던 것. 교황의 허울 뿐인 권위 따위도,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 [14] 교황령이 함락당했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부지런히 군대를 움직였다. 결속력 문제라기보다도, 파비아에서의 패배를 어떻게든 복원하여 군대를 재정비하는 참에 로마 함락이라는 비보를 접한 것일지도.
  • [15] 이전 버전에서는 페라라 공국이 코냑 동맹에 가담할 의사가 있었지만 회유가 적극적이지 못했다 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회유가 부족하기도 했지만, 당시 공작이었던 알폰소 데스테 스스로가 이전까지 페라라 공국의 전통이었던 친프랑스정책을 파기한 것이다.
  • [16] 동서 대분열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사건이다. 안 그래도 성상파괴주의 때문에 개판이 나있던 것에 결정타를 먹인 게 롱고바르드 족의 침공으로 인한 로마 함락 위기다. 이 사건은 동로마가 기어코 서로마를 또 버렸다는 한탄을 주었고, 로마 교회가 버틸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면서 결국 동서 교회가 완전히 분열되는 참사가 터지고 만다. 이전까지는 제 아무리 로마 교회가 기적적으로 야만인들을 개종해왔다해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동로마의 가호를 받아야했으므로 라벤나 총독부에 복종했으나, 정작 믿었던 동로마가 롱고바르드족의 침공을 방관하자 피꺼솟...
  • [17] 지휘관용으로 착용한 흰 망토가 적병의 눈에 딱 띄어, 총을 맞고 전사했다. 안습
  • [18] 이전 버전에서는 이 다음에 샤를 3세의 '두터운 명망과 위엄' 에 대해 서술하였으나, 그것은 오히려 뇌졸중으로 사망한 게오르그 폰 프룬츠베르크에 대한 설명에 가깝다. 당시 부르봉 공작 샤를은 무작정 '로마로!' 를 외치는 용병들에게 떠밀려 로마까지 간 것에 불과하며, 앞장서서 싸웠던 것도 이왕 로마를 점령할 바에는 코냑 동맹군이 달려오기 이전에 서두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 [19] 루터교가 힘을 얻기 전까지는 종교재판에서 이단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개종하지 않으면 온갖 고문과 수치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형을 당했다. 또한 같은 가톨릭 신자들도 마녀, 마법사 그리고 이단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은 경우도 있었다. 여러모로 종교재판이 많은 사람을 빡치게 했다.
  • [20] 물론 이탈리아 출신 용병대에게는 해당이 없지만, 프룬츠베르크가 쓰러진 시점에서 이미 종교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 로마의 부를 약탈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 [21] 친 합스부르크파 추기경도 예외가 아니었다.
  • [22] 그 외에도 많은 영지를 넘겨주기로 서약했으나 모데나만이 합스부르크 영토가 되었다.
  • [23] 이후로도 두 차례 카를과 전쟁을 벌이지만, 번번이 힘이 미치지 못하여 불리한 강화를 체결한다.
  • [24] 사족으로, 이로써 카를 5세는 교황에게 황제의 관을 받은 최후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클레멘스 7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관을 씌워준 마지막 교황이 되었다.
  • [25] 피렌체공화국의 최고 의결기관인 10인 위원회에서조차 '교황에게 항복하는 형태로 항복하자' 라는 결의가 나온 속에서의 항전이었다.
  • [26] 뛰어난 건축가이니만큼 일개 병사로 싸운 것은 아니고, 공방전 도중 무너진 성벽을 복구하는 일을 감독했다.
  • [27] 물론 교황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주체는 세속 군주들이었다.
  • [28] 이전 버전에서는 카를이 헨리를 괘씸히 여겼다고 되어 있었지만, 카를에게 헨리는 '괘씸한 놈' 이 아니라 '쓰고 버리기 딱 좋은 장기말' 정도였다. 백년전쟁 때 잉글랜드가 북부 프랑스 전역을 점령했던 것을 잊지 못하는 헨리는 치세 내내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고, 막시밀리안 1세와 그 뒤를 이은 카를 5세는 그런 헨리를 이용. 프랑스를 함께 공격하고는 적당한 때에 단독 강화를 체결하기를 반복했던 것. 그러고 나면 잉글랜드 단독으로 프랑스를 굴복시키기는 어려웠으므로, 헨리도 울며 겨자 먹기로 강화조약에 서명할 밖에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