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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last modified: 2015-03-29 20:08:03 Contributors

일본프로야구
세리그 / 퍼시픽리그(Pacific League)
Rakuten1.png
[PNG image (Unknown)]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Tohoku Rakuten GoldenEagles)
S-Lions.PNG
[PNG image (Unknown)]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Saitama Seibu Lions)
Buffaloes.PNG
[PNG image (Unknown)]
오릭스 버팔로즈
(Orix Buffaloes)
C-Marines.png
[PNG image (Unknown)]
치바 롯데 마린즈
(Chiba Lotte Marines)
H-Fighters.PNG
[PNG image (Unknown)]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Hokkaido Nippon-Ham Fighters)
S-hawks.png
[PNG image (Unknown)]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Fukuoka Softbank Hawks)

leo_raina.png
[PNG image (Unknown)]
로고 마스코트 레오&라이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Saitama Seibu Lions
埼玉西武ライオンズ
구단 법인명 ㈜세이부 라이온즈
(株式会社西武ライオンズ)
창단 1950년
연고지 사이타마 현 도코로자와 시
현재 연고지로 이전 1979년
구단 연고지 변천 후쿠오카 현 (1950~1978)
사이타마 현 (1979~)
구단명 변천 니시테츠 클리퍼스 (1950)
니시테츠 라이온즈 (1951~1972)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1973~1976)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 (1977~1978)
세이부 라이온즈 (1979~2007)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08~)
홈 구장 카스가하라 구장 (1950)
헤이와다이 구장 (1951~1978)
세이부 프린스 돔 (1979[1]~)
2군 구장 세이부 제2구장(1979년~현재)
모기업 세이부 철도
감독 타나베 노리오[2] (田辺 徳雄)
킷 스폰서 나이키
일본시리즈 우승
(13회)
1956, 1957, 1958, 1982, 1983, 1986, 1987, 1988, 1990, 1991,
1992, 2004, 2008
퍼시픽리그 우승
(21회)
1954, 1956, 1957, 1958, 1963, 1982, 1983, 1985, 1986, 1987,
1988, 1990, 1991, 1992, 1993, 1994, 1997, 1998, 2002, 2004,
2008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
(1회)
2008
플레이오프 우승
(2회)
1982, 2004
아시아 시리즈 우승
(1회)
2008
공식 홈페이지

Contents

1. 소개
2. 역사
2.1. 니시테츠 시절
2.2. 고난의 시기 : 다이헤이요 클럽-크라운 라이터 시절
2.3. 세이부의 인수
2.3.1. 1980년대 황금기
2.3.2. 황금시대 이후
2.3.3. 2013년 시즌
2.3.4. 2014년
3. 홈구장 : 세이부 돔
4. 이모저모
5. 유니폼
6. 주요 선수들
6.1. 현역
6.1.1. 투수
6.1.2. 포수
6.1.3. 내야수
6.1.4. 외야수
6.2. OB
6.2.1. 투수
6.2.2. 포수
6.2.3. 내야수
6.2.4. 외야수
6.2.5.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6.3. 영구결번
6.4. 준영구결번


1. 소개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사이타마 현. 1980년대 왕조를 구축했던 퍼시픽 리그의 과거 강호다. 한국 언론에는 예전에도 그랬고 현재도 '세이부 라이온즈'라고 쓰지만, 이 이름은 2008년부터 쓰이지 않고 있다.

2. 역사

2.1. 니시테츠 시절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최다 우승팀으로, 1950년 2리그제 시행 이후 후쿠오카를 연고지로 한 니시테츠 클리퍼스를 시작으로 이듬해 센트럴리그 니시닛폰 파이리츠와 합병하여 니시테츠 라이온즈가 되었다. 애초에 후쿠오카 정도의 지방도시에 야구팀이 두 개나 있는게 무리였으나, 당초에는 철도회사인 니시테츠와 신문사인 니시닛폰 신문의 합작으로 후쿠오카의 단일연고팀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센트럴, 퍼시픽 중 어느 리그에 속할 것인가를 두고 두 회사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결국 따로따로 팀을 창단했고 결국 1년만에 니시닛폰이 GG를 치고 니시테츠와 합병하여 퍼시픽리그 소속이 되었다. 1950~60년대의 강팀으로 군림하면서 1956~1958년에는 명투수 이나오 카즈히사와 강타자 오시타 히로시, 나카니시 후토시의 활약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물리치고 일본시리즈 3연패를 차지했다.

그 후 1963년 리그 우승을 끝으로 우승권에서 멀어졌다. 원래 지방 사철이 모기업이라 재정도 넉넉하지 않은데다 당시 비인기팀들이 모여있던 퍼시픽리그 소속에 소규모 지방도시를 홈으로 쓰는 덕분에 관중동원도 여의치 않아 팀의 부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프로야구 최악의 흑역사인 검은 안개 사건으로 주전들 대부분이 줄줄이 구속→영구제명 크리를 먹어 팀이 순식간에 약체화되었고, 그 때문에 니시테츠가 더이상 팀을 유지할 수 없어서 구단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2.2. 고난의 시기 : 다이헤이요 클럽-크라운 라이터 시절

이후의 사정은 현대 유니콘스넥센 히어로즈가 짬뽕된듯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니시테쓰는 1972년 시즌을 끝으로 구단에서 손을 떼면서 기시 노부스케의 비서이자 롯데 오리온즈의 구단주였던 나카무라 나가요시[3]에게 구단 매각을 의뢰했는데, 인수하겠다는 기업이 나타나지 않자 자신이 직접 후쿠오카 베이스볼(주)라는 구단 운영법인을 만들어 팀을 인수하고 팀 운영비는 롯데 오리온즈 시절처럼 팀의 명칭을 팔아 조달했다.

이렇게 해서 스폰서의 변천에 따라 1973년 다이헤이요 클럽(太平洋クラブ)라이온즈[4], 1977년 크라운 라이터[5] 라이온즈로 이름을 바꾸면서 라이온즈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롯데와는 달리 라이온즈의 스폰서로 나선 기업들은 업종을 보면 알겠지만 프로야구 구단을 인수할만한 능력은 전혀 되지 않아서 이 당시의 라이온즈는 넥센 히어로즈 최초 2년간과 거의 비슷한 안습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6]

결국 미덥지 못한 스폰서의 쥐꼬리만한 재정지원으로 강팀을 만들 수도 없거니와 팀의 막장화만 가속되어 1970년대 후반의 헤이와다이 구장[7]쌍방울 레이더스의 말년을 연상시킬 정도로 썰렁해졌다. 끝내 얼마 안되는 스폰서 자금과 나카무라의 개인 인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에 이르러 GG를 치고 팀 해체의 수순을 밟을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처해있을때 한 줄기 빛과 같은 광명이 비추었으니 당시 부동산, 사철 재벌로 막강한 자금력을 보유한 세이부 그룹이 구단 인수에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마침내 후쿠오카의 시민들도 든든한 구단주를 얻어서 옛 영광을 다시 재현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세이부가 관심을 표명했을때만 해도 이것이 일본판 현대 유니콘스, 아니 현대 유니콘스의 선구자적 사건이 될 줄은...

2.3. 세이부의 인수

2.3.1. 1980년대 황금기

1978년 말 구단 인수를 표명한 세이부 그룹은 구단인수의 조건에 자신들이 한창 부동산 개발중이던 도쿄 근교의 사이타마로의 이전을 조건으로 내걸었다.[8] 그 조건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팀 해체밖에는 길이 없었던 라이온즈 구단으로서는 무조건 조건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팀은 세이부 그룹에 인수되어 후쿠오카를 떠났고, 후쿠오카의 팬들은 옛 영광의 재현은커녕 크나큰 상실감만 맛보아야 했다. 결국 후쿠오카는 1989년 서로 죽이지 않고는 못살던 예전의 라이벌 호크스가 후쿠오카 이전을 발표할 때까지 무려 10년동안의 세월을 연고팀 없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야 했다.

세이부에게 인수된 뒤 인기 만화였던 밀림의 왕자 레오레오를 마스코트로 삼았다. 레오의 일러스트는 실제로 데즈카 오사무에게 저작권료를 주고 정식으로 사용권을 승인받았다. 후쿠오카에서 도쿄 근교로 이전해 오면서 일단 기존 팬층은 개척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만화주인공을 마스코트로 해서 어린이들부터 공략하자는 마케팅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공략당한 어린이들이 밑에서 기술한 세이부 황금시대를 거치면서 3, 40대 성인으로 성장한 지금 세이부 팬층의 주축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계약이 끝난 2009년부터 이 로고는 폐기되고[9] 클래식 유니폼 데이 때만 일 단위로 계약하고 있다. 아무리 사용 못 한다 해도 아주리 블루까지 버릴 필요는 없는데.

세이부 라이온즈로 바뀐 이래, 오로지 이기는 것만이 팬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일념하에 구단주인 츠츠미 요시아키는 감독 겸 관리부장(GM 역할) 이던 네모토 리쿠오(1982년 부터는 관리부장 직에만 전념) 에게 구단 운영의 전권을 위임했고, 네모토는 각종 방법을 동원[10]하여 팀의 전력을 강화시켰다. [11] 결국 이러한 전력보강으로 1982년부터 1992년까지의 기간동안은 가히 세이부 황금시대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아키야마 코지-키요하라 카즈히로-데스트라데 일명 AKD 클린업 트리오와 와타나베 히사노부-쿠도 키미야스 원투펀치와 '오리엔탈 특급' 타이위엔(곽태원)를 앞세운 세이부는 이 기간에만 리그 우승 9회, 일본시리즈 우승 8회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일본시리즈 진출 후 패한 경우는 한신 타이거즈의 2리그제 이후 유일한 우승이었던 1985년... 이래저래 한신 타이거스만 여러 의미로 안습

그렇게 해서 세이부(西武) 라이온즈로 30년 가까이 이어지다, 인기도 떨어지고 모기업 상태가 영 좋지 않게 되자 2008년 지역 이미지 부각을 위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가 되었다. 도쿄에 미련이 남아있던 세이부 그룹으로서는 끝까지 사이타마라는 명칭의 사용을 거부해왔으나 (이것도 수도권의 수원구장에서 경기를 치르면서 끝까지 서울 연고를 포기하지 않은 모 구단과 비슷하지 않은가!) 결국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팬베이스가 자신들이 원하던 자이언츠 네이션 도쿄 중심부가 아닌 사이타마의 베드타운 지역에 형성된 탓에 결국은 고집을 꺾었다. 오죽 사이타마라는 명칭을 쓰기 싫었으면 세이부(西武)라는 명칭은 과거 전국시대의 도쿄와 그 주변지역을 의미하는 무사시노(「武」蔵野)의 서부지역을 의미하는 이름이라면서[12] 본거지와 팬베이스가 도쿄의 서부지역이니 세이부라는 명칭도 지역명칭이라는 해석을 굳이 강조하기하면서까지 사이타마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거부하면서 버텼다.

2.3.2. 황금시대 이후

1992년 이후 세이부 황금시대 주역들이 노쇠하거나 타 팀으로 트레이드[13] 및 주축 선수들의 FA(자유계약선수) 선언[14]으로 80년대의 황금기는 끝난다...라고는 하지만, 90년대 중후반에도 세이부는 여전히 파리그의 강호였고, 첫 번째 리그 우승을 이룬 1982년부터 2007년[15]까지 B클래스로 떨어진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일본시리즈 우승을 못 해서 그렇지. 1997, 98년에는 리그 우승을 하였지만, 당시 일본시리즈에서는 각각 노무라 카츠야야쿠르트 스왈로즈와 '머신건 타선'을 앞세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게 발목을 잡혔다. 그 이후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제4대 괴동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명 유격수 마쓰이 카즈오, 대형 슬러거 렉스 카브레라 등이 투타의 기둥으로 활약하면서 2002년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2004년에는 1992년 이후 12년만에 다시 일본시리즈를 우승하게 된다.

2008년 일본시리즈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대결하여 4승 3패를 기록, 우승을 거머쥐었다. 전신인 니시테츠 시절을 포함하여 1950년 2리그제 시행 후 현재까지 리그 21회, 일본시리즈 14회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원정 유니폼이 희대의 좆망 유니폼으로 바뀐 뒤에는 2009년에는 B클래스를 기록하였고 2010년에는 퍼시픽리그 2위를 기록했지만 PS에서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패배하며 탈락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2011년과 2012년에서 UTU을 하다가 각각 2011 클라이맥스 2스테이지에서, 2012클라이맥스 1스테이지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2.3.3. 2013년 시즌


2013년에는 페넌트레이스 막판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제치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였으며, 치바 롯데 마린즈를 제치고 퍼시픽리그 2위를 하였다. 그러나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1승 2패를 당하여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에 실패하였다. 더 압권인 건 잔루가 넘쳐났으며 8회에 교체 된 와쿠이 히데아키가 불을 지르면서 2실점으로 방화를 했다는 것. 서드 유니폼을 원정 유니폼으로 승격해야 할텐데

이 팀은 2000년대 들어와서는 하는 입장이든 당하는 입장이든 묘하게 플레이오프/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하위팀이 상위팀을 이기는 업셋 승부가 많다. 2004년부터 시작된 퍼시픽 리그의 플레이오프/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이 팀이 얽힌 업셋 승부만도 2004, 2006, 2010, 2011, 2012, 2013년으로 8번 출전 중에 무려 6번이나 되며 전적은 2승 4패로 업셋을 당하는 편이 많은 편.[16] 이 팀도 은근히 포스트시즌에서 은근히 달갑지 않은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결국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서의 업셋 패배의 책임을 지고 와타나베 히사노부 감독이 자진 사임했다. 후임으로는 2002~2003년에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팀을 2002년 리그 우승으로 이끈 이하라가 복귀해서 팀 재정비를 노리게 됐다.

2.3.4. 2014년


2014년 시즌에 노히트 노런 기록이 나왔다. 5월 2일 치바와의 원정경기에서 기시 다카유키가 달성에 성공했다.

일본 진출 후 안정궤도를 달리던 한신 타이거스의 오승환에게 첫 블론세이브와 패전 철퇴를 날렸다.

그러나 이런 단편적인 성과와는 대조적으로 팀 자체는 팀 인수 첫해인 1979년 이래 최악의 성적을 내면서 꼴찌를 달리는 중. 교류전에서의 분발로 5위인 라쿠텐과의 승차를 좁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최하위 근처에서 헤매는 중이다. 결국 황금시대를 재건하겠다던 감독 이하라가 성적 부진으로 6월달에 시즌 도중 사임하고 황금시대의 주전유격수로서 츠지 하츠히코와 키스톤을 형성하던 수비코치 타나베 노리오가 감독대행자리를 맡게 되었다. 감독이 시즌 도중에 사임하고 대행이 지휘를 잡는 건 세이부 그룹의 라이온즈 구단 인수 이후로 사상초유의 사태. 이 부진의 원인은 감독이 경기 외적으로는 선수들의 사생활까지 일일이 통제하고 경기 내적으로는 볼배합까지 일일이 지시하는 시대착오적인 관리야구라는 평이 대세이다. 히로오카 감독 시절부터 시작된 치밀한 관리야구가 이 팀의 황금시대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시간이 흐른 현재 야구의 경향과는 맞지 않는 낡은 방식이라는 것.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실패의 원인이 과거의 성공 매뉴얼에서 벗어난 지도방식이라고 생각해서 과거의 인물을 감독자리에 앉힌 프런트의 오판이 자칫하면 1979년시즌 이후 35년만의 최하위를 기록할 가능성까지 만든 상태. 일단 2009년 이래 5년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지만 5위인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시즌 최종전에서 이기면서 라쿠텐이 남은 경기를 전패함으로서 어부지리로 탈꼴찌에 성공했다. 회색 유니폼의 희망고문

다만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 리 토모야 포수[17][18]가 3경기 연속 홈런에 베테랑 투수와의 승부에서 고의사구로 경원당할만큼의 활약을 선보였고, 파리그 홈런왕 메히아 내야수와의 잔류교섭에 성공하는등 다음 세대의 세이부는 희망이 있다는걸 팬들에게 어필했다.

3. 홈구장 : 세이부 돔

세이부 돔항목 참조.

4. 이모저모

  • 참고로 한국프로야구 히어로즈가 하고 있는 네이밍 마케팅의 원조가 바로 라이온즈다. 다이헤이요클럽과 4년, 크라운라이터와 2년간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네이밍마케팅은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후에 세이부 철도가 인수, 세이부 라이온즈로 바뀌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다이헤이요를 한자로 번역하면 태평양이다. 흠좀무

  • 팀명에 '사이타마'라는 지역명이 들어가 있으나 정작 사이타마시즈오카와 함께 '일본 축구의 성지' 라고 불릴 정도로 축구의 인기가 야구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그런 의미에서 사이타마 현은 우리나라의 수원시와 비슷한 동네인듯 하다. 실제로도 사이타마 현에서 세이부는 현대 유니콘스보다는 아주 조금 나은 대접을 받고 있다.[19] [20] 그래도 오릭스보다는 인기 좋다

  • 역사적으로 드래프트에서 제비를 잘 뽑는 팀이기도 하다. 특히 일본프로야구의 판도를 바꿀만한 초대형신인[21]이 나오는 해의 경우 유난히 제비를 잘 뽑아서 팀 전력유지에 큰 도움이 된다. 대표적인 예로 키요하라 카즈히로마쓰자카 다이스케가 있고 2009년에도 6팀의 경쟁을 뚫고 코시엔 여름 대회에서 154km/h를 뿌린 좌완 투수인 키쿠치 유세이를 뽑아내는 강운을 과시했다. 2010년에도 또다기 6구단 경합이 벌어진 와세다 대학의 마무리 투수였던 오이시 타츠야를 한방에 뽑아서 2년연속 6개 구단경합에서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확률로 보면 2.7%. 이정도 되면 사기같다(...). 사이타마 파워 주입!

    노모 히데오가 나왔던 1989년[22]다르빗슈 유가 나왔던 2004년[23]의 경우에는 아예 지명자체를 하지 않아서 제비뽑기에 참가하지 않았다. 지명을 안 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만, 일단 뽑겠다고 달려들면 사기라고 생각될 정도로 제비뽑기운이 좋은 팀이다.

  • 예전에 쓰던 로고는 만화 캐릭터를 로고 겸 마스코트로 사용했는데, 밀림의 왕자 레오의 레오의 아버지 판쟈가 마스코트이다. 자주 레오와 헷갈리는 사람들이 일본에도 있다.


    라이온킹으로 치자면 "심바가 아니라 무파사였다."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데즈카 오사무가 자신은 마스코트로 판쟈를 그렸는데, 세이부 라이온즈 측에서 멋대로 레오라고 주장한다더라하는 카더라 통신도 있다.(사실 레오나 심바나 성장하면 아버지들과 너무 닮긴했다.)[24]

  • 유니폼 교체 이후 응원문화가 점차 바뀌고 있다. 과거 1루 외야 홈 시절엔 작은 배트를 사용한 비교적 전통적 응원이었는데, 같은 현 안의 축구단 보고 꼴린 건지 서포터즈들은 배트를 놓고 손뼉응원을 많이 하고 있으며, 한 손으로 드는 작은 깃발이 완전히 정착되었다. 거기다 게이트기도 심심찮게 보여 축구장이 다 되어가고 있다. 샄카현 인증 연고지 정착은 23년이나 빠른데 응원은 대놓고 치바 롯데 파크리

  • 2013년에 비교적 가까운 치바 롯데 마린즈와 라이벌전을 선포하고 양 측 홈에서 3연전을 아노하나 vs 오레이모[25] '사이타마 vs 치바 라이벌 시리즈'로 각 한번씩 치뤘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클라이맥스 퍼스트에서 도호쿠행 티켓을 놓고 붙게 되었다.

  • 왠지 최근 몇 년 간은 '중간계투불을 지르는 팀'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졌다. 니코니코 동화 같은 곳에서는 '세이부의 중간계투'라는 전용 태그가 따로 있으며, 2군에서는 통하는데 1군에서는 중요한 순간에 볼질에 불만 지르는 중간계투의 모습을 풍자한 '우리들'(俺達, 오레타치)라는 네타가 정리되기도 했다.오레타치

  • 유달리 보복성,고의성 빈볼 및 사구(死球)가 많은 팀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빈볼 공세는 후쿠오카시절 말기~세이부 인수 초창기 팀의 에이스였던 가시오 오사무의 전매특허였고, 히가시오가 1990년대 중~후반 7년동안 감독을 맡으면서 투수들을 육성한 영향도 어느정도 있다. 문제는 이 팀의 배터리가 대체적으로 이러한 빈볼투구를 비신사적인 행위가 아니라 상대팀의 심리를 흔들기 위한 전략의 일부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히가시오와 배터리를 이룬 이토, 선수시절 선후배로서 히가시오로부터 이러한 투구술을 배운 와타나베 히사노부가 차례차례로 감독을 맡으면서 "몸쪽 공을 공략 못하거나 못 피하고 맞는 쪽이 병신 기술이 없는 것"이라는 식의 태도가 코칭스탭과 선수뿐만 아니라 팬들 사이에까지 만연해 있다. 또한 팀에 입단하는 투수들에게 신인시절부터 그러한 인식을 주입시켜오기 때문에 이 팀의 투수들이 대체적으로 빈볼에 대한 죄의식이 없다는 게 문제이다.
    그 결과, 2012년에는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 FA를 선언하고 라이벌 팀에 입단한 호소카와에게 4번연속(...)으로 상반신에 140km 볼을 던졌지만, 이를 호소카와가 모두 회피해 결국 포볼로 진출시킨적도 있다.[26] 또한 오릭스와 사이가 안좋을때는 오릭스 타자에게 예고 빈볼을 맞춘후 사과도 안하고 당당하게 퇴장해 빈축을 산적도 있고, 홈런 세레모니가 요란한 모 타자는 세레모니가 거슬린다는 이유로 빈볼을 맞은 적도 있다. 또한 한이닝에 빈볼을 3연발을 한적도 있어서 상대팀이 항의하러 뛰어나오자 세이부 팬들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세이부 선수들은 씩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힌바 있다.[27]
    이상 나열한건 일부 사례일 뿐이고 수개월의 한번씩 매번 다른구단과 고의사구(死球)로 벤치 클리어링을 벌이고 있다.[28]

5. 유니폼

/유니폼 항목 참조.

6. 주요 선수들

6.1. 현역

6.1.1. 투수

6.1.2. 포수

  • 10. 리 토모야
  • 27. 미타니 긴지로

6.1.3. 내야수

6.1.4. 외야수

6.2.1. 투수

6.2.2. 포수

6.2.3. 내야수

6.2.4. 외야수

6.3. 영구결번

24. 이나오 카즈히사 : 하느님, 부처님, 이나오 님. 이나오가 은퇴한 때부터 1972년까지 24번을 달고 감독직을 지냈다. 그런데 구단이 다이헤이요로 매각된 1973년에 이나오 자신은 81번으로 번호를 바꾸고 24번을 후배 선수들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하며 준영구결번으로 남겼다. 이후 라이온즈 24번의 계보는 고가 마사아키(古賀正明)-아키야마 코지-히라노 켄(平野謙)-마츠나가 히로노리(松永浩典)로 이어지다, 결국 2012년에 이나오 탄생 75주년을 맞아 동년 5월에 구단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6.4. 준영구결번

3. 오시타 히로시 : 1960년 은퇴 후 오시타의 커리어를 기리기 위해 당시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구단사장이었던 니시 마다지로(西亦次郎)가 '당분간 오시타의 3번을 결번으로 처리하겠다'라고 해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으나, 1968년 오시타가 토에이 플라이어즈에 감독으로 내정되면서 슬그머니 영구결번을 해제했다. 이에 대해 오시타의 동의가 있었는지는 불명이라고. 어쨌든 세이부가 구단을 인수하고 나서는 라이온즈의 3번은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6. 나카니시 후토시 : 1970년에 은퇴 당시 나카니시에 견줄만한 선수가 등장하면 그 선수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여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위의 이나오 카즈히사와 비슷한 이유로 해제가 됐고, 당시 감독이었던 이나오가 추천한 키쿠카와 소지로(菊川昭二郎)가 이 번호를 사용했다. 세이부로 바뀌고 나서 그나마 이 등번호를 달만한 자격이 있던 플레이를 했던 선수는 90년대 초반 유격수로서 황금시대를 떠받친 수비의 핵 타나베 노리오.

27. 이토 쓰토무 : 은퇴 후 이토 스스로가 인정한 후배 포수에게 넘겨주기로 하여 준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이후 2006년 호소카와 토오루(細川亨)가 사용했으나 2010 시즌 종료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FA 이적하면서 결번 상태였다가, 2012년부터 스미타니 긴지로(炭谷 銀仁朗)가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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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개장 당시에는 야외 구장이었으나 이후에 지붕을 덮었다.
  • [2] 2014년 6월, 성적부진을 이유로 이하라 하루키 감독이 시즌 도중 사임이라고 쓰고 해임이라고 읽는다한 자리를 이어받아 감독대행으로 시즌을 마치고 정식으로 취임.
  • [3] 당시 오리온즈는 마이니치가 손을 뗀 후에 영화회사 다이에이의 사장인 나가타 마사이치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팀 이름도 마이니치 오리온즈에서 도쿄 오리온즈로 바꾸었고 다시 롯데의 자금지원을 받아서 현재 넥센 히어로즈 방식으로 롯데 오리온즈로 이름을 바꾼다. 롯데는 1970년 퍼시픽리그 우승 이후 팀 운영에 자신을 보이고 정식으로 구단을 인수했다. 이 롯데가 오리온즈의 스폰서만 맡던 시절에 구단주를 맡은 사람이 나카무라였다.
  • [4] 골프장, 리조트 개발회사이다.
  • [5] 도시가스 회사라고 이전 편집자가 언급했지만, 우리가 아는 그 담뱃불 붙이는 라이터 만드는 회사 맞다. 80년대에 타업체에 인수되면서 업종변경으로 회사의 자취가 소멸됨.
  • [6] 하지만 주력선수를 팔아서 연명하지는 않았다. 물론 자금난을 버티지 못해 가끔 주력선수를 팔아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도 있었다. 라이온즈 프랜차이즈의 레전드 중 한 명인 히가시오 오사무(東尾修)는 저무는 니시테츠-고난의 행군기-세이부의 최전성기를 두루 거쳤던 팀의 간판이자 에이스였다. 팀이 막장이던 시절 타선의 빈타 때문에 시즌 20패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은퇴할때까지 한 팀에서만 선수생활을 해 일본 프로야구계에서도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평하기도 한다.
  • [7] 후쿠오카 시절의 홈구장. 후쿠오카 돔이 지어지기 전까지 잠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홈구장이기도 했다.
  • [8] 세이부 그룹은 라이온즈 프랜차이즈를 인수하기 전에 두 차례나 야구단 스폰서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일본프로야구가 양대리그로 나눠지기 이전에 존재했던 일본야구연맹(JBL)에 참여했던 도쿄 세네터스(東京セネタース)-츠바사군(翼軍)의 재정적 스폰서를 해줬다. 그 당시 귀족원 의원이었던 아리마 요리야스와 세이부 그룹의 모종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후 2차 세계대전 이후 세너터스가 재건에 실패하자 1970년대에는 다이요 훼일스요코하마 스타디움 건립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다이요의 2대 주주로 경영권을 행사하기도 했다.문제는 후원하는 팀마다 성적이 시망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렇게 머니게임에 집착했는지도 세이부가 야구단을 인수한뒤 도쿄 근교로 연고지를 옮기고 싶어했던 이유이기도 바로 이러한 과거도 있었기 때문이다.
  • [9] 다만 걸어놓는 팀 깃발에서는 잘만 쓰고 있다. 물론 영리 목적 사용은 금지이므로 판매하고 있지는 않다.
  • [10] 대형선수 트레이드는 기본이고 드래프트에 지명이 확실한 전국의 고교 유망주를 뒷공작과 다른 구단과의 물밑 협상으로 선수자격이 아닌 구단직원 채용의 형식으로 확보해둔뒤, 드래프트외 선발로 입단시키는 방법(20년간 세이부의 안방을 지켜온 이토 쓰토무치바 롯데 마린스 감독이 이런 케이스)이나 그룹 계열사 내의 사회인 야구팀인 프린스 호텔 야구부로 빼돌려서 아예 다른팀의 지명을 포기하게 하는 방법(세이부 황금기의 팀의 주장을 맡은 시게 히로미치가 이런 케이스. 방법은 간단하다. 학교를 졸업할때 난 프로 안 갈래 하고 일단 프린스 호텔에 입단한다. 그리고나서 다른 팀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다음 드래프트 때는 미리 포기하는 것.)까지 동원했다.
  • [11] 1990년대 후반의 모 팀이 생각나지 않는가?
  • [12] 세이부라는 그룹 명칭의 기원인 것은 맞다. 하지만 타지 철도회사이자 도시권이나 공업 지대 지역 이름으로도 많이 쓰이는 '한신'과는 달리 '세이부'는 어떤 곳에서도 지역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 [13] 대표적으로 1994년 오프시즌의 세이부 - 다이에 간 2-3 트레이드. 아키야마 코지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건너갔다. 참고로 당시 다이에의 단장은 공교롭게도 80년대 세이부의 황금기를 구축한 그 네모토 리쿠오였다.
  • [14] 쿠도 키미야스가 FA로 다이에로 이적하고, 키요하라 카즈히로도 1996년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게 된다.
  • [15] 이토 쓰토무의 세이부맨 커리어가 이로 인해 끝장나게 된다.
  • [16] 업셋을 한 해는 2004, 2011, 당한 해는 2006, 2010, 2012, 2013.
  • [17] 출신자체는 오릭스 버팔로스의 유소년팀 출신이다.
  • [18] 다만 포수로써의 실력은 아직 많이 미숙해서 실책이나 리드 미스가 눈에 띄었다.
  • [19] 참고로 사이타마 시는 세이부 철도의 영업구간이 아니라 토부 철도의 영업구간이며, 야쿠르트와 롯데 2군 구장이 오히려 사이타마 시에서 더 가깝다. 그리고 세이부의 홈구장은 사이타마 시에서 접근하기 좀 골룸한 위치에 있는데, 평일에도 경기가 있는 야구는 경기장 접근성이 관중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히려 세이부를 지지하는 팬층은 사이타마 현보다도 도코로자와 시에 인접한 도쿄 도의 시 지역부분(우리가 생각하는 도쿄가 아닌 그 외곽의 위성도시들로 이루어진 도쿄 도의 영역)에 더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세이부가 도쿄에 집착한 것도 일리는 있지만 홈구장이 사이타마 현에 있어서...
  • [20] 일각에서는 사이타마를 연고로 하는 J리그 최고의 인기구단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의 존재와 그에 못지 않은 미야 아르디쟈의 인기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둘의 더비는 '사이타마 더비'로도 불릴 정도다.) 실제로는 같은 사이타마현이지만 세이부 라이온즈가 있는 도코로자와시와 사방에서 우라와 레즈깃발이 펄럭이는 사이타마시는 완전히 다른 동네다. 베드타운인 사이타마현의 특징 덕분에 도쿄로 가는 교통시설만 잘 정비되 있기 때문에 사이타마 동부와 서부는 같은 현이라도 교류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장 사이타마 시에서 야구를 보러 가려면 도쿄 돔이 오히려 더 가깝고 가는 시간은 세이부돔의 절반 정도밖에 안걸린다.(무사시노선 참조)
  • [21] 당연히 복수의 구단이 1순위로 지명한다.
  • [22] 대신 1990년대 세이부 불펜진의 핵심인 오자키 테츠야를 지명했다.
  • [23] 대신 쿠이 히데아키를 지명했고 세이부의 에이스가 되었다가 FA선언하고 롯데로 튀었다.
  • [24] 프로야구 초창기 삼성라이온즈 어린이 회원 잠바의 마스코트가 저 마스코트를 약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하는 수준에서 모방된 것이었다. 어느 어린이 회원은 삼성라이온즈 잠바 입고 민속촌에 갔다가 일본 관광객들이 '세이부 라이온즈네' 하는 바람에 약간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 [25] 2013시즌 당시 타이업한 작품들.
  • [26] 2012년에만 50개가량의 빈볼을 던져 리그 탑순위의 빈볼을 기록했다. 심지어 빈볼의 대부분은 중간계투가 아닌 선발투수의 의한 고의성 빈볼
  • [27] https://www.youtube.com/watch?v=TJJNaP7ZscM&feature=related
  • [28] 2013년 6월 라쿠텐의 앤드류 존스에게 고의사구로 벤치클리어링을 유발했고, 2010년 닛폰햄전에서는 연전중 3명을 고의사구로 병원으로 보내버렸다.
  • [29] 괄호 안은 재적 연도
  • [30] 한자: 郭泰源. 일본에서의 등록명은 가쿠 타이겐. 한국식 한자독음으로는 곽태원으로 나이든 일본야구 전문가들은 이 명칭이 더 익숙하다.
  • [31] KIA 타이거즈에서 타격코치를 지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