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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last modified: 2015-03-30 13:04:06 Contributors

司馬遷

중국 전한의 역사가.《사기》의 저자.

생몰년도 기원전 145~ ?

Contents

1. 개요
2. 생애
3. 최후
4. 평가
5. 기타
6. 관련 항목

1. 개요

동양 역사학의 시조, 아니 동양에서 역사라는 학문을 정립한 사람이라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닌 위인. 서양의 헤로도토스 정도를 빼면 역사학계에서 그 정도로 찬사받는 인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특히 사기를 쓰기 위해 영 좋지 않은 곳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더욱 유명하다. 그야말로 잃을 게 없다의 표본을 보여 준 사람.

2. 생애

사기의 맨 마지막 부분인 《태사공자서》는 사마천 자신이 쓴 자서전의 성격을 띄고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기본적인 공부를 마친 후 관직으로 나가기 전인 10대에서 20대의 긴 기간을 중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적을 탐방하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전해듣는데 썼다고 한다.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은 천문, 역법과 학문을 연구하는 직책인 태사령[1]이었다. 한무제을 거행하자 이 역사적인 현장에 자기도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참석하지 못하고 태산 아래에서 대기하란 명을 받게 되었다. 사마담은 실망한 나머지 몸이 급속도로 쇠약해져 아들 사마천에게 자기가 집필하던 역사서를 완성할 것을 부탁하고 사망하고 만다.

참고로 봉선은 중국의 황제들이 하늘에 대해 지내던 일종의 제사로, '나같은 위대한 황제면 봉선 지낼 정도로 잘났음'이란 일종의 자뻑질이다. 그 시초는 나라 때부터라고 하나 정치적 행사(?)가 된 것은 진시황이 처음이고, 한무제가 규모를 더욱 키웠으며 이후 후한광무제, 송진종명군 혹은 시대를 잘 탄 행운아들이 봉선 의식을 거행했으므로 진짜 시대를 잘 만나고, 황제의 신임이 두터워야 간신히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런 것을 놓친 사마담이 실의에 빠질 만 하다.

그 후 아버지의 직책인 태사령을 물려받아 사기를 집필하던 도중, 보병 5천으로 분전하다가 흉노족 8만에게 포위당해 항복한 장군 이릉(李陵)을 변호하자 한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사실 사마천은 이릉과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지만[2], 그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제의 미움을 사 옥에 갇히고 만다.

당시 사마천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돈 50만 전을 내고 풀려나기, 그냥 죽기, 고자되기 셋 중 하나였는데, 당시 50만전은 병력 5천을 1년동안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거금이었는데 권세가가 아니었던 사마천이 이를 감당할리는 만무했고, 결국 부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궁형을 받고 고자가 되었다. 《태사공자서》에 의하면 궁형을 당했을 때 "이것이 나의 죄인가! 이것이 나의 죄인가! 내 몸이 훼손되어 쓸모가 없어졌구나!"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이후 친구 임안(任安)[3]에게 보내는 편지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죽고만 싶다고 쓴 기록이 보인다. 이후 옥중에서도 역사서를 계속 집필했으며, 훗날 무제의 신임을 되찾아 중서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사실 한무제가 대노한 이유도 꽤나 찌질했는데 이릉과 같이 출전한 이광리는 여동생 이부인이 무제의 애첩이라 '편애 모드'가 없다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반면 이릉은 조손 삼대가 무제와 꼬인 관계였는데 그의 할아버지 이광은 비장군으로 불리며 손꼽히는 명장이었지만 무제의 사주를 받은 위청에게 힐문을 당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했다. 또 아버지 이감도 나름 흉노를 토벌하여 공적이 있었지만 이를 위청에게 따졌다가 사냥터에서 곽거병에게 사살(…)당한다.[4] 물론 공식적으로는 사슴뿔에 찔려 죽었다고 했지만 이릉이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총대장 이광리는 패했는데 이릉은 압도적인 열세를 무릅쓰고 8일 동안 발악하다 끝내 투항한다.

이릉의 활약이 얼마냐 대단한거냐면 초원에서 보병들로만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몇 배나 되는 흉노의 대기병을 수 차례나 격퇴하다 결국 피해가 누적되어 항복한 것이다. 오죽했으면 서양 학자 중에서 이 사례를 보고 "이 때 중국 보병 ㅎㄷㄷ"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5] 그러자 무제는 반역자 이릉의 어머니와 처자는 사형(…)이라고 길길이 날뛰었으니 사마천이 태클을 날린 것도 당연하다. 물론 그 자신의 신변에 관한 한 현명한 처사는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결국 졸지에 가족을 잃은 이릉은 평생 귀국하지 않고 흉노 선우의 사위가 되어 고위직인 우교왕까지 올랐다. 그러다가 선우의 정치, 군사 자문을 맡는 고문직을 맡으면서 살다가 기원전 74년에 흉노 땅에서 죽었다.

이런 일로 고자되기를 택해야 했던 사마천은 그야말로 안습크리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 총대장이었던 이광리 또한 나중에 무제 말년의 후사문제에 휘말리게 되자 흉노와 싸우라고 준 군사들을 끌고 망명해버렸고, 사마천을 고자로 만들면서까지 이광리를 두둔했던 무제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장안에 남아 있던 그의 일족을 모두 죽여 버렸다. 투항한 이광리는 호록고 선우의 사위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오래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호록고의 모친인 전대 선우 저저후연지가 병에 걸리자 산 제물로 바쳐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먼저 투항해서 정령왕이 되었던 위율이 호록고에게 받던 총애를 이광리에게 뺏기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꾀를 써서 무당을 매수했고, 무당은 선우에게 이광리를 제물로 바치면 모친이 나을거라고 꼬드겼기 때문(…).

3. 최후

사기》 작성 이후의 기록은 전무해서 알 수가 없다. 다만 한서 사마천 열전에 그 재능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고통을 당했으니 그 최후가 평안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으로 볼때 말년이 영 좋지는 않았는듯. 그의 사망연도는 90년대 국내 서적에서는 기원전 86년 경으로 나와서 만으로 59세로 죽었다고 나왔으나 확실치 않다.

사마천의 고향이라는 섬서성 한성시에는 그의 후손들인 동(同)씨와 풍(馮)씨들이 거주하고 있다. 사마(司馬)라는 성이 아니어서 이상할 듯 하지만 동(同)은 사(司), 풍(馮)은 마(馬)를 변형한 것인데 이것은 사마천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사마천의 죽음에는 자살설을 비롯해 여러 설이 있는데, 그 후손들은 사마천이 상기 행적 이후 또 한번 황제를 비판해 노여움을 사 처형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일족들은 성씨를 둘로 나누어[6] 사(司)씨, 마(馬)씨, 아니면 성씨 한자를 변형시켜 동(同)씨, 풍(馮)씨 등으로 바꾸면서 숨어 살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상당히 먼 후대에 와서야 사마천의 후손으로 다시 공인되었기 때문에 가문의 역사에 비해 대수가 상당히 적다. 《사기》가 걸출하긴 하지만 후한시대까지도 방서(謗書), 즉 정부를 비방하는 위험한 책으로 불렸다는 점, 그리고 한무제의 까탈스러운 성격만 보더라도 개연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미 전한 말기에 세상에 나와 <사기>를 면학하고 초사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며, 다행히도 지금까지 <사기>는 전해지고 있다.

4. 평가

죽음 대신 치욕스러운 궁형을 택한 선택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를 멸시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더욱 발분해 기원전 90년 경, 중국 역사서 중 가장 중요한 책으로 손꼽히는《사기》를 완성한다. 사기는 그 책이 사찬서(私撰書)임에도 중국의 정사인 24사에 항상 포함되면서 나머지 사서를 압도하는 위엄을 뽐냈다. 사기와 한서, 삼국지, 후한서의 이른바 '전사사(前四史)'를 제외한 다른 정사서는 모두 관찬서(官撰書)이다.

《사기》는 그동안 춘추로 대표되는 편년체(編年體) 역사 서술 방식을 본기(本紀)·열전(列傳)·지(志)·연표(年表) 등으로 구성하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인 기전체(紀傳體)로 확립하는 시발점이 되었고 이후 동양 역사서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사기》에는 한무제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아무리 자신을 고자로 만들었다고 해도 당대의 권력자이며 황제인 한무제를 사마천 자신이 비판했으리란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후세의 가필이란 의혹을 받는다. 하지만 사마천은 잃을 게 없는 인물이었기에 (본인 스스로도 자기는 궁형을 받고도 "치졸하게"[7] 살아있는 이상 자기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란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어차피 죽을 마당에 황제를 욕한다 해도 별 패널티는 없었기 때문에 이판사판으로 나왔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데다가 결정적으로 가필이라는 물증도 없다.

그 외에도 한무제의 전 황제인 한경제 본기도 그 내용도 너무 단조롭다는 이유로 가필 의혹을 받고 있다.

참고로 사마천 이전에 역사라는 개념은 주로 역(歷)이라는 한자로 표기했는데 이것은 1년의 개념을 준 달력에 중심을 둔 생활중심의 개념이었다. 하지만 사마천 사후로 역사(歷史)라는 단어가 탄생했는데 이는 역사의 개념이 도덕적인 평가를 중심으로 한 지금의 역사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자 태사공 사마천의 업적을 기리겠다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사마천의 위대함을 엿볼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상징이다.

5. 기타

  • 궁형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수술 후 생존확률이 줄어드는데 당시의 수술기술로 40대 후반인 사마천이 궁형을 택했다는건 자존심과 목숨 둘 다 잃을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궁형을 받은 후에도 '하루에 9번씩 창자가 뒤틀린다'라고 할 정도로 고통을 당했으나 그는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이 수모를 감당하였고 결국 동양 역사학의 시조로 평가받는 대업을 이루게 된다.

  • 돈을 내고 형을 면제받지 못한 것이 너무나 큰 아쉬움으로 남았는지, 사마천은 경제적인 면을 주로 다룬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여러 부자들의 이야기와 함께 돈만 많으면 황제 부럽지않게 떵떵거리며 살 수 있으니 가급적 돈을 많이 버는게 좋다는 식의 서술을 써놓는다.

  • 사료 문제로 공자의 견해에 대놓고 반대하기도 했다.유학자들이 이 글을 싫어합니다

  • 그의 아내는 유씨(柳氏)였고 그 딸이 낳은 외손자 양운(楊惲)[8]은 사기를 보관하고 있으면서 이를 익히다가 세상에 내놓았으며 전한을 멸한 왕망이 사마천의 후손을 찾아서 사통자(史通子)라는 사관 벼슬을 주었다.

  • 후대의 환관들에게는 강철장군이라는 칭호와 함께 환관들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물론 사마천 훨씬 이전에도 환관은 있었지만 상징적 의미의 시조.

  • 그의 이름을 딴 도 있다. 소행성 12620 쓰마첸(Simaqian)은 바로 사마천의 중국어식 발음에서 이름을 따왔다.

  • 그를 소재로 한 시들도 있다.
사마천 (司馬遷)[9]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10]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더 튼튼하고
좀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 끌 수 없는
제 눈 속의 불
천년의 역사에다 당겨 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 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 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 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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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지금의 과학기술부 차관과 국가기록원장을 겸한 직책으로 볼 수 있다.
  • [2] 기록에 의하면 사마천과 이릉은 그때까지 서로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다.
  • [3] 임안의 자는 소경(少卿)이며. 형양(滎陽)사람으로 청년시절 매우 가난하였으나, 후에 대장군 위청(衛靑)의 시종(侍從)이 되어다가 그의 추천으로 낭중(郎中)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은 익주자사(益州刺使)에 이르렀다. 그런데 B.C. 91년, 여태자(戾太子) 유거의 반란, 즉 무고(巫蠱)의 난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임안은 경성(京城) 금위군(禁衛軍)의 북군(北軍)을 관리하는 군관으로 있었다. 그는 여태자의 출동 명령을 받고도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는데도 뜻밖에 그는 북군의 한 말단 관리의 모함으로 이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처형될 위기에 몰렸다. 임안은 처형되기 전에 사마천에게 구원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사마천은 자신의 처지 때문에 답장마저도 제 때에 하지 못하였다. 결국 안타깝게도 그해 겨울, 임안은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腰斬刑)에 처해져 죽음을 당했다 친구끼리 한무제한테 쌍으로 못볼 꼴을 당하고 말았다
  • [4] 위청은 한 무제의 처남이고, 곽거병은 처조카라 한무제와는 인척이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이광 못지 않은 명장이긴 했다.
  • [5] 존 린, 배틀-전투의 문화사
  • [6] 제갈씨를 제씨, 갈씨로 나눈 것과 비슷한 경우로 보면 될 것이다.
  • [7] 본인 표현.
  • [8] 전한 경조(京兆) 화음(華陰) 사람. 자는 자유(子幼)고, 사마천(司馬遷)의 외손이다. 『사기(史記)』를 익혀 세상에 널리 전파했다. 선제(宣帝) 때 좌조(左曹)에 임명되어 곽씨(霍氏)의 음모를 고발해 평통후(平通侯)에 봉해졌고, 중랑장(中郞長)이 되었다. 신작(神爵) 원년(기원전 61) 제리광록훈(諸吏光祿勳)에 올랐다. 관직에 있는 동안 청렴하여 재물을 경시하고 의로움을 좋아했다. 그러나 각박하고 남의 나쁜 비밀 등을 들추어내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의 원한을 많이 샀다. 태복대(太僕戴) 장악(長樂)과 사이가 나빴는데, 장악이 고발당하자 그가 시킨 것으로 잘못 알아 평소 언어가 불경하다고 상소를 올림으로써 면직당해 서인(庶人)이 되었다. 직위를 잃고 집에서 일하며 집안을 일으켜 그 재산으로 생애를 즐겼다. 친구 손회종(孫會宗)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충고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편지에 원망하는 내용이 많았는데, 선제(宣帝)가 이것을 읽고 미워한데다가 참소와 중상모략을 당해 대역 무도죄로 요참형(腰斬刑)을 당했다.
  • [9] 박경리,《못떠나는 배》(1988, 지식산업사).
  • [10] 문정희,《남자를 위하여》(1996,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