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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

last modified: 2017-02-13 21:51:39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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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 매의 눈!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 (아랍어, 사담 후사인 압드 알마지드 알티크리티, 1937년 4월 28일 ~ 2006년 12월 30일)

마치 옆집아저씨처럼 친근한 인상이 사람 좋아보이지만 속지말자.[1] 다른 나라들의 여러 독재자들과 비교하여 더 악랄하면 악랄했지 절대로 선한 사람이 아니다.
이라크를 이 지경으로 만드신 장본인.

Contents

1. 개요
2. 생애
2.1. 젊은 시절
2.2. 정계입문
2.3. 부통령 후세인
2.4. 대통령 후세인
2.5. 이란-이라크 전쟁
2.6. 포악한 독재자
2.7. 걸프전
2.8. 이라크 전쟁
2.9. 죽음
2.10. 후세인 정권의 말로
3. 가족
4. 평가
5. 미디어

1. 개요


이름이 하필 '후세인'이라서 국내에서 이를 잘 모르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후세인(後世人 = 그러니까 후세의 인물)이라는 뜻으로 통했던 적이 있었다(...). 막상 또 널리 알려지니 '이름에 후세인이 들어가는 인물들은 모두 아랍계'라는 말이 널리 퍼졌는데, 재미있게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풀 네임에 '후세인(Hussein)'이 들어간다(...). 이걸 알았을때 충격 먹은 사람들이 적잖이 있었던 모양.

후세인(حسین)이란 이름 자체는 멋진, 아름다움의 의미를 지니는데, 시아파의 성자인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의 비극적인 죽음을 기려 후세인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 아랍인 뿐만 아니라 이슬람을 믿는 사람이라면 많이 사용하는 이름 중 하나. 기 들릴의 굿모닝 예루살렘을 보면 자기 아이를 집에 태워준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극렬유대인이 당연히 이번 선거는 존 맥케인을 찍어야 한다고 설치는 장면이 나온다. '어떻게 감히 우리 위대한 유대인들에게 저 더러운 아랍인들과 공존할 것을 요구하면서 우릴 비판하는 거지?'라면서 오바마에 대한 개드립 비난을 퍼부어대더니 '오바마의 진짜 이름이 후세인인거 아슈? 그 새끼 아랍인들과 한패임. 절대 찍으면 안됨!' 하고 한참을 욕하며 가버린 일화가 나온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1947년의 후세인

이라크 티크리트의 수니파 이슬람교도 중에서 하층민 출신이었다. 어려서는 재혼한 어머니의 의붓아버지[2]와의 불화로 어려서부터 집을 나가 사촌인 하이랄라 탈파의 집으로 거처를 옯겼다. 젋어서부터 친척인 하이랄라 탈파 등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받았고, 아랍 통일의 이념을 가지고 반정부 활동에 참여했다. 이에 따라 기독교도인 미셸 아플라크가 창설한 아랍 사회주의 부흥당, 즉 바트당(부흥당)[3]에 가입하여 초급 당원으로써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의 후세인

이때 당시 이라크의 수상이었던 압둘카림 카심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라크는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아랍통일주의를 지지하는 민중들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에 성공한 카심이 아랍통일을 등한시하고 서구와 협력하여 이라크 내정 발전을 꾀했기 때문에 반역자로 받아들였으며, 이에 따라 바트당은 카심 암살을 기획하였으나 사담 후세인이 포함된 암살팀이 작전의 허술함으로 실패, 사담 후세인과 동료들은 부상을 입은 채로 시리아로 탈출하여 해외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아플라크의 눈에 들어 바트당에서 주목을 받게 되고 나세르 정권의 지원을 받아 이집트에서 학교에 다니며 망명 생활을 계속하였다. 이곳 카이로의 카스르 알닐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그는 공부에 열중했다.

2.2. 정계입문

그리고 1963년의 이라크 군부의 쿠데타로 카심 정권이 붕괴되고 압둘살람 아리프 정권이 들어서자 바트당과 후세인은 이라크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아리프 정권의 우유부단한 정책과 내부 갈등 봉합 실패로 바트당과 시아파 등 내부 세력과 대립국면에 들어갔으며 이때 사담 후세인은 체포,수감되었다. 후에 어렵지 않게 탈출하고 군부를 설득하여 1968년 당시 대통령이였던 압둘 라흐만 아리프(전 대통령인 아리프의 형)에 대한 쿠데타를 결행, 바트당 정권이 집권하였다. 허나 이때만 해도 사담 후세인은 그가 존경하던 이오시프 스탈린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존재는 아니었다.

당시 아랍 특유의 '피의 복수'[4] 관습을 의식하여 치안첩보를 전담하는 '일반 사무국'의 수장 자리는 아무도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5] 그때 사담 후세인이 '악역을 맡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가 모든 책임을 지고 일하겠다'고 공언하여 그가 일반 사무국, 즉 첩보치안기구의 수장이 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호랑이에게 이빨과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이 또한 스탈린이 아무도 맡지 않으려던 혁명 자금책(=은행, 열차 강도)을 맡아 레닌의 신임을 얻었던 것과 비슷하다.

2.3. 부통령 후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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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크르와 후세인

이미 대통령으로 취임한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대통령을 비롯해 군부의 수장이 된 하이랄라 탈파흐와는 친척 관계였던 사담 후세인은 첩보기구의 능력을 이용하여 반정부운동을 효과적으로 차단함과 동시에 정적들의 약점을 잡아두기 시작했고 내각 요인 중에서 위협이 되거나 그리 판단되는 사람을 처형하거나 암살하는 작업을 통하여 바트당의 독재권력을 강화시켜나갔다. 안으로는 바크르의 신임을 받으며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에 사무실을 두고 정권 수뇌부와의 연대를 더욱 키워나갔으며, 이리하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부통령 자리에 오른다. 순순히 대통령 자리를 내준 바크르는 1982년까지 살다 68세를 일기로 조용히 죽었다.

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그의 업적이 이루어진다. 가장 큰 업적은 IPC(이라크석유조합)의 국유화를 들 수 있다. 이라크 석유조합은 서방 석유화학기업의 이라크 유전개발 조합으로써 이라크 유전의 수익은 모두 그들이 나눠 가지고 있었다. 사담 후세인은 서방국가의 반발을 각오하고 IPC의 국유화를 단행하면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소련이나 폴란드 등의 공산국가들, 프랑스 등의 일부 국가를 새로운 수출고객으로 준비해놓고, 서구의 위협에 대응하여 소련의 지원을 약속받는 등 매우 주도면밀하고 다방면에서 철저한 준비를 했다. 당시 전문가들조차도 놀랄 만큼 세부적인 면까지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석유조합의 국유화는 후세인의 의도대로 성공하였으며, 기존의 고객과 새로운 고객이 더하여 수출처는 늘어났고 파리만 날리던 이라크 국고는 70년대 고유가라는 정세를 타고 황금으로 가득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의 근대화를 개시하였다. 대표적인 정책은 문맹퇴치, 고속도로와 전기사업, 전화보급, 여성의 사회참여 강화, 의무교육 확대, 과학기술 발전, 사막화되어 가던 이라크 국토를 다시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옥토로 부활시키는 거대 프로젝트, 시아파와 쿠르드족에 대한 사회간접자본 우선보급을 통한 이라크 통합정책 등이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서방세계에 큰 인상을 주었고 이라크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며, 특히 문맹퇴치 운동은 성공리에 마무리되어 유네스코에서 극찬을 받고 수상까지 하게 되었다.

바크르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 부통령의 뛰어난 성과, 자신을 깍듯이 모시는 예절 등을 통해 후세인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으며 모든 것을 후세인에게 맡기고 자신의 측근들의 불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모른체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담의 권력이 점차 강화되어가자 위기를 느낀 바크르 대통령이 사담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정치공작을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시리아와 이라크의 분열된 바트당 통합과 국가통일에 대한 논의가 그 계기가 되었다.

바크르는 대통령이라는 대표성으로 이 논의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서 차후 통일국가에서 사담 후세인을 제3인자로 끌어내리되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제1인자로 삼으려는 방향으로 논의를 하였다. 그런데 알 아사드와 후세인 모두 실질적으로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아사드 대통령은 이라크가 강대한 국력과 인구 수로 시리아를 집어삼킬 것이라 생각했으며, 사담은 바크르와 아사드가 전면에 나선다면 자신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버릴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결국 통일논의는 결렬되었다.

사담은 자신에 대한 바크르의 견제가 확실해지자 결국 바크르에게 퇴임을 강요했고 내각 구성원들과 군부마저 사담을 지지했다. 때문에 바크르는 표면적으로 건강과 가족들의 죽음 등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발표하는 동시에 부통령 사담 후세인을 차기 대통령으로 지목하며 정권을 내놓고 하야한다.

2.4. 대통령 후세인

대통령이 된 사담 후세인은 전 정권에서 일했던 관료를 비롯해 하급 공무원에까지 이르는 대대적인 숙청을 개시하며 이전부터 공고화되었던 국민감시체제를 한층 강화했다. 이렇게 숙청된 사람들 중에는 사담 후세인의 경제개발계획을 함께 이끌어왔던 유능한 관료들도 상당수 있었다. 특히 혁명평의회의 주요 임원 가운데 반역자로 지목된 의원들의 머리를 동료 의원들이 직접 총으로 쏴죽이게해서 거대한 공범 의식을 만들어내어 아랍의 보복 정서를 봉쇄하는 치밀한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이자 바트당의 인텔리이며 후세인 집권을 도운 절친한 친구, 아드난 함다니를 이유도 없이 총살시켰는데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친한 친구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약점이 없다."가 그의 논리였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부통령 시절의 치밀하고 심사숙고하며 예의바른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권위적이며 즉흥적이고 앞뒤 생각 없는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IPC국영화 시절에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반대되는 대표적인 것이 이란-이라크 전쟁이었다.

2.5. 이란-이라크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은 호메이니의 이슬람혁명 이후 이라크의 시아파에 가해지던 시아파 혁명 선동과 그에 따르는 온건 시아파 성직자 알 사드르의 반정부 항쟁 등에 대해 내부적으로는 치안첩보의 강화를 통해 대처함과 동시의 혁명 선동의 본거지인 이란에 대해 군사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정치외교적 우위를 명백히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결행된 것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중동 전쟁의 6일 전쟁처럼 전쟁이 진행되어 초기 군사적 승리를 통해 이란이 바로 협상에 나설 것으로 기대하였고 다른 상황 전개에 대한 대책은 세워놓지 않은 채로 군사적 준비만 한 채 무작정 침공을 결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란은 전국민이 애국심으로 단결했고 호메이니는 초기의 열세에 기가 꺾이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게다가 이란과 이라크는 기본적인 국력의 레벨 자체가 달랐으니 이 점에서부터 사담의 주도 면밀하지 못한 준비 및 대책 마련 능력이 드러났다. 이라크군은 초반에만 앞섰을 뿐 얼마 가지 않아 이란군의 반격에 밀려나 패전하기 시작했으며 사담 후세인은 이러한 열세를 타개해보기 위해 여러 정세를 활용해 보았지만 상대가 상대인데다 주변국들도 그다지 적극적인 지원은 하지 않은지라 장기전으로 흐르는 흐름을 타개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종전을 맞는다.

2.6. 포악한 독재자

80년대의 후세인은 극도로 무자비하고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보였으며 내각 관료들은 그와 차를 마실 때에 절대로 먼저 차를 마셔서는 안 되었으며 그가 말하기 전에는 함부로 입을 놀려서도 안 되었고 항상 정자세로 경청을 해야만 했으며 나갈 때에는 등을 보이지 않고 뒷걸음질로 나가야만 했다. 심지어 국회 연설 중 한 의원이 동료 의원에게 쪽지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서 음모를 꾸민다며 즉석에서 그 의원을 사살해버렸다. 의원들의 두려움 섞인 박수소리가 이어졌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설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의 이복동생인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그리티도 이즈음에 후세인 카멜 알 마지드에게 밀려서 숙청되었다. 원래 후세인의 어머니 수브하 툴하는 바르잔의 아들과 후세인의 딸을 결혼시켜 집안을 결집시키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후세인은 그걸 씹고 자신의 딸을 후세인 카멜과 결혼시킨 다음에 바르잔의 권력을 빼앗고 이라크에서 추방한다. 바르잔은 후세인이 자신을 숙청할 것을 눈치채고 그의 신임을 다시 얻기 위해 발악했는데 그 중 하나가 1982년의 두자일 학살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헛되이 그는 쫓겨났고 2003년에 이라크가 붕괴되자 체포되어 두자일 학살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79년에 살해된 의원들만 60명이었고 집권 이후 3천명 이상의 정치가들이 처형당했다.

게다가 북한처럼 흔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대항하거나 잘못 보인 자들의 가족까지 죽여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시아파 마을 두자일에서 발생한 암살시도에 대해 마을 전체를 통째로 파괴해 버리고 무려 148명을 학살했으며, 쿠르드족의 반란에 대해서도 독가스와 화학무기로 진압하였다.

곳곳에 비밀경찰들이 도사리며 반정부 인사들을 고문했는데 여자와 아이들도 예외는 없었다. 경고로 사람들의 귀를 베고 전기로 지지고 거꾸로 매달아 뼈가 부러지게 구타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이런 공포 정치가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이후 많은 이라크 인들이 미군을 환영한 이유로 꼽힌다.

2.7. 걸프전

이라크는 막대한 전쟁비용에다 저유가로 인한 국고수입 저하까지 더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쿠웨이트가 이런 이라크의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석유생산을 늘려 국제유가를 하락시키자 또다시 즉흥적인 판단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하였지만 이번에는 걸프전이라는 사상 최악의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이 때 이라크는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하였고 정상적인 수출입마저 중단당하는 경제봉쇄를 당해 <가난한 돌의 왕국>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전락한다.

하지만 미국이 쿠웨이트를 해방하고 정전 협정만 맺고 신속히 철수했기 때문에, 후세인은 권력을 지킬 수 있었고 오히려 이 틈을 타서 반기를 든 쿠르드족을 독가스로 학살하는 등 폭정을 거듭하며 10년간 권좌를 유지한다.

2.8. 이라크 전쟁

2001년 어떤 미친놈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를 들이받는 짓을 하면서 이성을 잃은 미국에게 "신의 천벌을 받았구나 ㅋㅋㅋ"라고 조롱하면서 새로운 표적이 되었고[6], 본인도 위험을 직감했는지, "우리 이라크도 테러로 고생하는데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협조할 용의가 있다."고 물밑접촉을 시도했지만 분노로 인해 눈이 뒤집힌 미국에게는 기만책으로 밖에 안 보였고, 결국 2003년 벌인 2차전에서도 비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쳐맞고 패배하면서 결국 권좌에서 쫓겨난다.

지하 저항세력으로 전환하여 전쟁을 이어갔지만 민심이 이미 등을 돌린 상황에서 한계는 명백했고, 두 아들까지 전사하는 등 계속 궁지에 몰려서 최후의 순간에는 어느 민가의 지하 땅굴에 숨어 있다가 레드 던 작전(Operation Red Dawn) 때 미군 특수부대에 체포되어[7] 기소되었다.

2.9. 죽음

1년간에 이르는 긴 재판을 받았는데 주된 공판 내용은 두자일 학살을 비롯 이라크인에게 저지른 학살에 대한 처벌 문제였다. 시아파 정부는 그의 모든 혐의를 증명하고 싶어했지만, 70이 가까워진 상황에서 사형을 시키려면 단기간 내에 사형이 가능한 혐의를 유죄로 입증해야 했으므로 일단 두자일 학살 등 몇 가지로 국한시켜 기소했고[8] 사담 후세인은 체포되어 수감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논리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간의 나약한 독재자들의 최후와 대비되어 깊은 인상을 주었다. 사형을 당할 때도 용수(사형 집행 때 사형수 머리에 씌우는 일종의 두건)를 거부하는 등, 비교적 의젓한 자세로 최후를 맞았다.


위의 사진은 미군에게 잡혀서 끌려나오는 장면이다. 이 당시 지하 비밀장소에 후세인은 난로 및 가스 오븐 전문 업체 한국 <파세코> 제품인 한국산 난로로 서늘한 지하에서 추위를 이겨내고 있었다...파세코 대표이사가 월간 신동아 인터뷰에서 이 소식을 듣고 농담조로 홍보를 할까 우스개 소리를 했다가 후세인이 별로 듣기 좋은 소리 못 듣으니 그냥 넘어가자고 간부들이 진지하게 말한 바 있었다고...

사담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사담의 두 아들인 우다이와 쿠사이는 미군의 공격으로 신체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채 전사했으며, 미군은 이들의 신분을 확인하고자 시신을 다 짜맞추고 봉합수술까지 해야 했다.

재판 과정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기합리화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의 말만 들으면 서방과 특히 미국 영국은 천하의 개자식이자 아랍의 독립을 두고 못보는 제국주의자이며 사담 후세인은 이러한 자들의 방해공작에 맞서 이라크를 지키려고 하였으나 희생된 불우한 처지이며, 죽인 사람들의 여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거나 "그들은 반역자이고 이란인들"이라고 주장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에 대해서는 "나는 그러한 명령을 하지 않았으며 억울한 피해자를 피하라고 항상 강조하였다."라고 하거나 "당신들 중 누구가 도둑이자 반역자들인 이란인들에게 물어보았는가?"라며 책임소재에서 벗어나려 들거나 증언 자체가 허위라는 식으로 몰고 갔다. 그의 학살명령으로 온 식구를 잃은 쿠르드인 노인이 법정에 나와 진술한 적이 있는데 그가 울면서 후세인에게 대놓고 분노할때 후세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꼬박꼬박 반론을 한 탓에 그 노인은 인터뷰에서 기가 막혀 "뻔뻔하면서도 논리적인 말빨이 쎈 놈이다."라고 혀를 차기도 했다. 물론 후세인이 처형당했을 때 굉장히 기뻐했지만.

항상 재판정에 코란을 들고 나와서 신앙인임을 강조하면서 판사와의 싸움이 격해지면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면서 분위기를 자기 주도로 몰고 나갔고[9] 때문에 사담을 재판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아무튼 자기가 항상 잘했거나 아니면 나는 잘하려고 했는데 다른 놈들이 지 멋대로 굴었다는 식이었고, 또 이러한 논리가 완전 허위가 아니라 상당 부분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었기 때문에 피고를 굴복시키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했을 정도이다.

심지어 분노한 이라크 민중들이 이에 사담측 변호인들을 사살하거나 할 정도였는데, 결국 사담 후세인이 자기 성질을 못 이기고 변호인단의 조언을 뿌리치고 자신이 예나 지금이나 오직 단 한명뿐인 이라크 대통령이며 지금의 대통령은 가짜이고 이라크 정책의 모든 책임자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여 재판은 유죄 입증의 가닥을 잡았고, 결국 사형 판결이 내려졌으며 검사측의 사형 구형이 낭독되는 때에는 이복동생인 바르잔과 함께 썩소를 지으며 같잖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어댔고, 사형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에도 사담 후세인은 종교적 구호를 외치고 재판정과 부시에게 죽음을 내리라는 소리를 치며 끝까지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당당뻔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후세인을 포섭하여 후세인 지지세력의 저항을 막기 위해 도널드 럼즈펠드를 보내서 후세인과 살아남은 가족들의 안위를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협상을 제시했지만 후세인은 럼즈펠드를 비웃으며 "죽은 국민들 목숨을 돌려주면 생각해보겠다."라고 협상을 사실상 거부했다. 그는 럼즈펠드에게 "대량살상무기는 찾았냐?"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이후 항소했지만 기각되고 눈엣가시 같았던 후세인에게 이라크 정부는 항소를 기각한 다음 고작 3일만인 2006년 12월 30일에 사형을 집행해 버렸다. 31일에 집행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담의 유언은 "이란을 믿지 말라."였다.

이렇게 무리하게 급히 사형 집행을 한 이유는 보통 미국이 사주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전혀 아니다. 당연히 미국은 후세인을 급하게 처형하면 이라크 반군들에 의해 성자(聖者)가 되어 이라크 치안이 더 불안해진다는 이유 때문에[10] 빠른 사형 집행을 반대했고 오히려 교도소에서 일생을 마치기를 원했다. 이라크의 당시 정치고문은 무와파크 알 루와이에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이라크인들의 의지이며 미국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천명했다.

우세스쿠와는 달리 후세인의 경우는 죽는 그 시점까지도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이 명백히 나눠져있는 경우이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후세인을 죽여봐야 득은 적고 오히려 현실과 같이 손해만 많았을 뿐이다. 그래서 미국이 선택한 전략이 과도정부에 신병을 인도해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선에서 적당히 무기징역이나 미결수로 남겨놓는건데 문제는 과도정부에 신병을 넘기고 얼마 안돼서 후세인의 반대파들이 성급하게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해 버린 것. 쉽게 말해 전후처리 전략이 완전히 빗나가 버린 사례 중 하나.

사형 집행을 그렇게 빨리 한 진짜 이유는, 전후 이라크 정권의 주요 세력이 후세인이 밀어주던 수니파의 철천지 원쑤 시아파였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안 그래도 후세인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던 데다 이슬람 율법상 70세가 넘으면 사형 집행이 불가능해서 빨리 죽이지 않으면 자기들 법 때문에 못죽이기 때문에 저질러 버린 것이다. 사형 집행일이 12월 30일이었고, 이틀뒤면 후세인이 70세가 되는 상황이었으며 31일에 집행하는 건 시아파 입장에서 봐도 지나치게 가혹한 데다 꼼수 쓰는 게 눈에 보이니 확실히 그 당시에 후세인을 죽일 수 있던 시간은 30일이 마지막이었다. 따라서 바로 사형을 시키지 않고 쿠르드족 학살 같은 다른 재판으로 넘어가면 자칫 사형을 못 시키는, 시아파 입장에서는 안습한 상황도 생길 수 있었다.

심지어 처형 동영상이 유출되기도 했다. 다만 이건 시아파 정부의 잘못이 아니며 사형 집행 과정은 준수했다. 실상은 사형 집행인들이 멋대로 한 것으로, 원래 사람들이 후세인을 데리고 나와 교수대에 세우고 유언도 물어보고 용수를 씌우는 것까지는 공개되었다. 하지만 곧 용수를 도로 벗기고[11] 처형한 후, 사망한 후세인 얼굴까지 나오는 충격적인 동영상이 나돌았고, 그야말로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수사결과 당시 처형 감독관의 휴대전화로 촬영한 것으로 밝혀졌고 무더기 처벌이 내려졌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래서 후세인의 처형 목적을 정의라기보다는 복수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가 죽은 후에 시아파가 다수인 도시에선 주민들이 축포를 쏘면서 만세를 불렀으며 바그다드의 시민들은 그의 죽음을 차분하게, 그리고 대체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후세인의 고향인 티그리트에서 후세인은 순교자가 되었다고 애도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 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막 취임한 후였는데, 이 일을 크게 비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재자였던 그가 죽자 이라크는 각종 반군 단체 및 과격파 종교 단체들의 무장 봉기 및 테러로 인해 오히려 더 큰 혼돈속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최악의 형태로 변하고 말았다.

사담 후세인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판사가 최근 반군 수니파에게 잡혀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라오프 압둘 라흐만 판사는 6월12일 ISIL의 위협이 닥쳐오자 수도 바그바드에 위치한 거주지역에서 분장한 채 탈출하다 붙잡혔으며 이틀만에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특히 그의 처형 사유는 바로 후세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알려졌다.# 

2.10. 후세인 정권의 말로

후세인의 동생 바르잔 이브라힘은 2007년에 사형당했는데 목이 잘려서 참혹하게 죽었다.

독가스로 사람을 하도 죽여대고 할리브자에서만 5천명 이상을 죽인 후세인의 사촌 "케미컬 알리" 알리 하산 알 마지드는 2010년 1월에 처형당했다. 원래 2003년 이라크 전쟁이 터진 직후 영국군이 자신을 알리 하산 알 마지드를 죽였으며 시체도 확인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멀쩡히 살아서 이라크 정부의 손에 죽었다. 대체 뭘 보고 그리 확신한겨(...).

후세인 치하에서 부통령을 지낸 타하 야신 라마단은 2005년에 체포되어 처음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에서 사형으로 뒤집혀서 처형당했다.안습[12]

외무장관이자 부총리를 지냈고 후세인 정권의 유일한 기독교도였으며 후세인이 가족이라고 불렀던 타리크 아지즈는 바그다드가 함락된 후에 체포되었는데 워낙에 순순히 붙잡혀서 후세인을 배신하여 투항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고 지금은 2010년에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후세인의 경호실장이자 비서실장을 지냈고 쿠사이 후세인과 함께 공안기구의 담당자였던[13] 아비드 하미드 마흐무드는 2003년에 체포되어 2012년에 처형당했다.

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 전 혁명평의회 부의장은 아직까지도 잡히지 않은체 반미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2014년, 이라크 내전에서 양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그의 세력은 ISIL과 손을 잡고 이라크군을 조지고 있다.

이라크 전쟁 당시 서방에게 독설을 여러 차례 날려 유명해진 공보장관 무함마드 사이드 알사하프는 이라크가 미국에 의해 함락된 뒤 잠적했다가 미군에게 체포됐다. 자살설이 돌기도 했지만, 포로로 잡히고 얼마 뒤 석방되어 현재 자기 집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

3. 가족

가족으로는 두 아들인 우다이 후세인쿠사이 후세인이 있으며 나머지는 죄다 딸들이다. 그리고 손자로 무스타파 후세인(쿠사이 후세인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우다이와 쿠사이는 사담이 잡히기 전에 미군과 교전 중 포격을 맞아 죽었고 무스타파는 항복을 거부하고 교전을 계속하다가 미군에게 사살되었다. 이때 우다이는 향년 40세, 쿠사이는 향년 38세, 무스타파는 향년 15세였다.

오사마 빈 라덴의 집안과 마찬가지로 장신으로 유명하다. 오사마 빈 라덴의 신장이 194cm에서 198cm쯤이고 팔레스타인 출신의 어머니도 2m가 넘는걸로 유명한데 사담 후세인도 190cm에 육박하고 다른 가족들도 모두 큰걸로 유명하다. 사이 안 좋은 옆동네 누구씨는 160도 안 되는데

4. 평가

이슬람 국가들이라도 지역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달라진다.

시리아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사담 후세인을 반대한다. 바트당의 분열을 고착화시켰다는 점도 있고 물밑으로는 첩보전을 비롯해 대립관계가 심각했기 때문. 그래서 이란-이라크전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이란에 무기를 제공하는 중간 상인 역할을 수행했고, 걸프전 당시에는 이라크를 공격하는 아랍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으며, 이라크가 무너진 이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협력하면서 난민을 수용하고 저항세력에 대한 첩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리아 국민들은 반미정서가 매우 강한 편이어서 사담 후세인을 어느정도 동정하는 정서가 있으며, 사담 후세인이 잡히지 않았을 때 그를 사칭하는 저항방송(...)을 송신했을 정도였다.

이집트도 반 후세인 정서가 크다. 이들도 역시 걸프전에 아랍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아라비아반도 국가들은 사담 후세인을 매우 증오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은 이란 이슬람 혁명에 대항하는 대리전을 사주하고 치루게 한 장본인들이지만 그 결과로 이라크가 부도 위기에 몰리자 채무 상환을 독촉하며 전쟁을 초래하였다는 사실은 깔끔하게 잊어버리고 물심 양면으로 도와준 자신들을 배신한 천하의 개쌍놈으로 여기는 수준. 특히 독립 직후부터 이라크의 끊임없는 영유권 주장에 시달리고 심지어는 침략, 합병에 유전 폭파까지 당한 쿠웨이트는 사담 후세인을 매우 증오한다.

종파적으로도 다르고 9년에 걸친 전쟁으로 피폐된 이란의 입장은 그야말로 악마, 사탄(...). 애초에 전쟁 자체가 이라크의 기습으로 시작된데다가 사망자가 너무 많아 지금도 이란-이라크전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 시아파 교단 입장에서는 시아파 이슬람 혁명 수출을 좌절시킨 장본인이기도 하기 때문에 도리가 없다.

심지어 아랍, 이슬람권 국가들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서방세계 국가들에서도 독재자, 전쟁 범죄자로 지탄을 받고 있다. 안 그래도 이 국가들은 잘 아시다시피 걸프전쟁, 이라크 전쟁때 후세인과 직접적으로 전쟁 죽어라 싸우기도 했었고...

비록 한국이나 이외 다른 나라에선 후세인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아서 서방이나 아랍권보다는 악감정은 덜하지만 이 쪽에서도 엄연히 멀쩡한 나라를 전쟁, 가난으로 말아먹은 독재자인 이상 평판은 좋지 않다.[14] 특히 한국에선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사건과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등으로 촉발된 전국적인 반미 분위기로 인해 후세인을 쉴드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한국의 경우 이라크의 후세인 독재정권 버금가는 최악의 독재꼴통집단 북한과 휴전, 대립하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후세인을 옹호하는거 자체가 그야말로 비상식적이고 정신병자 받기 십상이다.

우습게도 미국이 과거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후세인 편을 들어줬고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이 손수 이라크로 가서 후세인과 반갑게 악수하면서 우애를 과시하던 적도 있다. 물론, 이란을 견제하기 위함이었지만. 이 사진이나 영상은 이라크 전쟁 당시 럼즈펠드를 비난하는 측에서 쓰면서 실컷 럼즈펠드를 놀렸다.

하지만, 후세인이 죽고 이라크에 남은 기독교같은 소수 종교인들이나 집시들은 지금은 애절하게 후세인을 그리워하고 있다. 적어도 후세인은 종교 꼴통은 아니었기에 이들이 따르기만 하면 종교를 인정하고 경제적 기초나 치안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세인이 죽은 뒤 미국이나 과도정부는 이들에게 일절 무관심이라서 학살과 약탈을 당하며 온갖 지옥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더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랍의 세속주의 독재자들이 일관적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알 아사드도 기독교도와 알라위파를 비롯한 소수 종파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무바라크, 사다트 등의 이집트의 독재자들도 콥트 교도들을 보호했다. 아랍은 아니지만 이란의 팔라비 국왕도 조로아스터 교도, 유대인, 아르메니아 인들을 우대했고 이후 호메이니 시대까지 그게 이어진다.[15]

그리고 후세인 사형에 관련된 에피소드로, 후세인이 사형을 선고받은지 단 4일만에 집행되는 이례적인 일이 있었는데 앞뒤 다 자르고 말하자면, 전후 이라크 정권의 주요 세력이 시아파였기 때문(…). 일단 이 사람들은 미국 못지 않게 후세인 죽이고 싶어서 벼르는 사람들이었고, 게다가 이슬람 율법상 70세가 넘으면 사형 집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이목과 상관없이 2일 뒤에는 사형 못 시키니까 순식간에 처리해 버렸다는게 이유라고 한다. 참고로 사형 집행일은 12월 30일이었고, 그 이틀뒤면 후세인이 70세가 되는 상황이었다. 사실 하루 더 시간이 있었지만 31일에 처형하는 것은 시아파들이 봐도 지나치게 가혹하니[16] 그 전날로 결정한 셈.하루건 이틀이건 충분히 가혹하다

한마디로 후세인은 어떻게든 조금만 더 도망다녔거나 재판 절차를 최대한 이용했으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후세인 본인이 이를 포기하고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이 때문에 권력을 잃은 후세인이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이라크 시아파 정부를 약화시키고 수니파를 결집시키려 했다는 추론도 있다. 살아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 그의 악행에 비해 관용을 베푼 게 되면서 그만큼 동정론도 옅어지지만 죽는 바람에 지금까지의 악행이 대부분 잊혀지고 오직 시아파 보복의 희생자로만 기억되어 버렸기 때문.

빠르게 사형시킨 게 미국의 사주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오히려 미국은 후세인을 죽여버리면 '성자'가 될 거라면서 반대했다. 그리고 후세인을 죽이고 나서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5. 미디어

걸프전 이후 10년간 미디어에서 '아랍의 독재자' 이미지로서 수도 없이 후세인을 자신, 혹은 그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 등장했다. 죽은 뒤에는 관심이 줄어든 편이다.

  • 못말리는 람보에서 아무리 봐도 후세인인 악당이 등장한다.

  • BBCHBO의 합작 4부작 드라마 하우스 오브 사담이 이 사람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이 사람 가정은 알고 보면 콩가루 집안이다. 유대계 이라크 배우 이갈 나오르가 후세인 역을 맡았다.

  • 우다이 후세인의 대역인 라티프 야히아를 다룬 영화인 데블스 더블에선 필립 쿼스트가 후세인 역을 맡았는데 이갈 나오르만큼의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 2011년 10월 6일 AVGN의 "다크캐슬" 에피소드에서 고인드립 당했다. 액션52에도 땅딸막한 사담 후세인이 등장한다.(...)

  • 미국의 밀덕판 VS놀이라 할수 있는 프로그램 deadliest warrior에선 폴 포트크메르 루쥬와 후세인의 국경수비대가 가상으로 맞붙는 에피소드가 나온 바 있다. 폴 포트의 기습공격으로 5:5에서 2:1로 밀려 버리지만 크메르 루쥬 대원을 뒤치기 해서 죽이고, 그 시체에 자신의 상의를 입히는 훼이크로 폴 포트를 낚아 사살해서 승리한다. 메리야스 입고선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는 모습이 은근히 패기넘친다(...).

  • 사우스 파크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캐나다를 계속 정복하려 하다가 결국에는 야생돼지들에게 물려 죽었다(...). 극장판에서는 지옥에서 사탄과 함께 지옥을 정복한다고 나와있는데 사탄과 섹스만 하려는 사담 후세인이 지구를 혼자 정복하려 하다가 사탄이 결국 사담 후세인을 죽여버리고 지옥으로 다시 돌아간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도 다시 지옥으로 돌아와 있어서[17] 사탄이 하느님과 얘기한 후에 사담 후세인은 천국으로 추방당한다.[18] 하지만 사담은 천국에서도 무기 공장을 만들면서 다시 캐나다를 정복할 기회를 노린다. 나중에 천국에서 탈출하고 캐나다의 새로운 국무총리가 된 후에 이상한 법들을 적용하다가 결국에는 사담 후세인이였단 것이 들통나서 처형됬다. 이 후로는 소식이 없지만 다시 지옥으로 돌아간 걸로 추정된다.

  • 메탈슬러그의 주적 모덴군의 지도자 도널드 모덴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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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사진들은 좀 뚱하게 나와서 별로 좋은 인상을 받기 힘들지만 구글 등지에서 보이는 활짝 웃는 사진들을 보면 그냥 성격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로 보일정도.
  • [2] 거짓말쟁이 하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유는 이 사람이 이슬람신도로써 성지 메카를 순례해야만 받을 수 있던 명예로운 칭호인 '하지'라는 칭호를 순례도 안하고 자처하고 다녔기 때문.
  • [3] 아랍어로는 حزب البعث(Ḥizb Al-Ba‘ath)라 하는데 아랍어 발음은 '바트'보다는 '바스'에 가깝다.
  • [4] 부족사회인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구성원이 살해당하면 반드시 보복을 해야만 부족의 명예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보복을 면하려면 정당한 이유가 있던지 사죄와 보상이 함께 이루어져야만 했다.
  • [5] 카심, 아리프 정권은 정보기구를 이용하여 반정부 세력을 잡아들이거나 죽였고, 당연히 그 수장은 피의 복수 규율에 의해 나날이 생명 위협에 시달리는 처지였다. 또한 국민감정도 그런 기구를 증오하고 있었으며 아랍인으로써의 사회 규율이나, 개인적인 보신 차원에서 맡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맡는 순간 수천수만명의 살해 위협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이었다.
  • [6] 부시는 집권초에 "사담은 이제 맛이 갔다."라고 하더니 이라크 전쟁 직전엔 "그 놈은 위험하다."고 말을 바꾸어서 마이클 무어 등의 조롱을 받았다.
  • [7] 후세인 소재파악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미군이 공식발표 기자회견장에서 던진 첫마디는 Ladies and gentlemen We got him!(신사숙녀 여러분, 드디어 그를 잡았습니다!) 이 표현은 영문위키백과의 공식 항목인 http://en.wikipedia.org/wiki/Operation_Red_Dawn에도 병기되어 있다. 미군의 선전효과와 쇼맨쉽을 엿볼수 있는 대목.
  • [8] 나머지 학살극은 나중에 다른 측근들에게 적용되어 이들이 사형 선고를 받는 증거로 사용되었다.
  • [9] 판사든 검사든 어차피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신은 위대하다." 등의 구호를 외치면 그에 대놓고 일침을 놓거나 반대할 수가 없는 정서가 있다. 사실 법정 소란때 판사들이 쿠란의 구절을 인용하거나 해서 피고들을 진정시키는 방법도 자주 쓰이던 거라 사담 후세인만 탓할 수는 없다. 특히 쿠르드 판사 라우프 압델 라흐만은 이 방식으로 소란을 막아보려다 사담이 오히려 신은 위대하다는 구호를 외쳐 조용히 수긍하고 마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 [10] 스타크래프트 2에서 멩스크짐 레이너케이트 록웰을 죽이지 못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 [11] 다만 사형집행인들이 처음부터 용수를 씌우지 않고 멋대로 집행한 것은 아니고 후세인이 용수를 씌우는 것을 거부하여 그냥 안 씌운 채로 했다고 한다.
  • [12] 기사는 대통령이라고 오타를 냈지만 내용은 정확하다.
  • [13] 한때 국가 서열 4위였는데 후세인, 쿠사이, 우다이 다음이었다.
  • [14] 사실, 후세인이 집권하기 이전에도 이라크 역시 군부의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서 정권이 뒤엎어지고 바뀌는 등 그다지 멀쩡한 나라는 아니었다.
  • [15] 다만 무바라크가 시위로 쫓겨나갈 당시, 콥트 교도 다수가 되려 시위에 참여하며 지지했는데 무바라크 시절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지고 이들도 차별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팔라비 왕이 퇴위당하여 추방당할때 되려 아르메니아인들이 호메이니를 지지하던 것같이 소수파들도 이득에 따라 갈라지기야 하지만.
  • [16] 다음날 집행이면 살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아 죽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 보자.
  • [17] 이때 사담이 "내가 어디로 갔을거 같았어, 디트로이트?"라고 말한다(...).
  • [18] 참고로 사우스 파크의 천국은 몰몬교 교도인들만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