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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라쿠민

last modified: 2018-08-28 01:00:55 Contributors

部落民(부락민)

부락해방동맹의 전신격 단체인
수평사(水平社)의 깃발[1]
현 부락해방동맹의 깃발

Contents

1. 개요
2. 역사
2.1. 왜 아직까지도 존속되었는가?
2.1.1. 과연 내전이나 혼란이 없어서 존속한 것인가?
3. 인구
4. 차별
4.1. 차별 현황
5. 대책
6. 인터넷상의 부라쿠민
7. 관련
8. 부라쿠민 차별사례


1. 개요

전근대 일본의 신분 제도 아래에서 최하층에 위치해 있었던 천민.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서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명목상으로만 폐지된 일본 사회의 계층. 물론 다른 자본주의 국가처럼 그 중에서 재벌[2], 상류층, 중산층, 서민층, 극빈층 하는 식으로 자본에 따라 다양한 계층이 존재하지만, 문제는 부라쿠민의 경우 다른 계층과는 달리 재산이나 인맥 등이 아닌 혈통에 따라 결정된다는 데 있다. 즉 극빈층이 특출난 재능에 더해 노력해서 최대한 출세하고 머리도 잘 굴리면 최소한 자식이나 손자 대에는 재벌 이나 상류층에 속할 소지가 있지만 부라쿠민은 영원히 부라쿠민으로 남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다.

2. 역사

어원은 피차별부락민(被差別部落民). 이게 앞에 말들이 줄고 줄다 보니 부라쿠민, 즉 부락민이 된 것.

한국어로 부락이라 하면 그냥 마을을 일컫는 한자어이다. 일본어에서도 원래는 마찬가지였지만, 이 부락이란 단어가 시간이 지나면서 잘 안 쓰이게 되고 그 파생어인 부라쿠민만 부정적인 뜻으로 남아서 쓰이다 보니, 시나브로 상위 개념인 '부락'의 어감마저 안 좋게 변질되어 버렸다. 일본에서 정말 금기시되는 단어이니 혹시 일본어 문장을 취급할 일이 있다면 주의하기 바란다. 실제로 소설 등에서 '부락'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시민단체에서 항의가 들어와서 이미 전국 서점에 풀린 책을 전량 회수하거나, 심지어 판매가 금지되는 일도 매우 빈번히 일어난다. 그래서 부락을 대체할 집락(集落)이란 단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인터넷에선 부라쿠민(burakumin)의 라틴 표기 앞글자만 딴 B라는 은어가 주로 사용된다. 또한 강 건너(川の向こう)라는 식의 속어도 쓰이고 있다. (부라쿠민 출신이라고 판단되는) 소설가 나카가미 켄지는 "골목길(路地)"이라는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부라쿠민의 기원은 확실한 것이 없다. 이것은 근대 일본이 군국주의화되면서 야마토 사상을 꺼내들었던 것의 여파라고 추정되는데 당시의 일본은 아이누를 비롯해서 일본 인근 지역을 실은 전부 일본땅이다는 식으로 우겼고 환빠? 이들과 이들의 토지를 흡수하면서 일본이 위대하다는 쪽으로 날조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자료들이 사라졌고 이에 따른 연구의 진보는 미미한 상태.

부라쿠민의 기원시점은 근대, 중세, 고대로 나뉘어지며 근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권 기간이었던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중세는 11세기라고 보는 것이 보편적. 그러나 근대 이론은 지나치게 중세 및 고대 일본을 미화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헛점이 좀 많고 따라서 보통 중세나 고대에 기원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부라쿠민이라는 계급의 탄생도 일본이 여러 국가나 부족 등으로 쪼개져 전쟁을 하던 시기에 피정복당한 세력이 그 바탕이라느니 외국에서 표류해온 무리를 노예로 삼은 것이라니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민속학자 아카마츠 케이스케[3]의 연구에 의하면 적어도 전국시대에는 이미 부라쿠민 내지는 그에 준하는 집단이 존재했다고 한다.

에도 시대에는 히닌(非人 비인, 불교불경 법화경에서 유래했다. 말 그대로 인간이 아닌 것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라고 불렸으며 터부시 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즉 망나니, 장의사, 백정 등이나 전쟁포로, 전염병 보균자 등이 여기로 분류되었다. 이름 그대로 일본에서 인간 미만 취급을 받아왔다.

특히 지배계급인 무사층에 불만이 몰리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계급간의 불화를 부추겼으며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민평등을 실현하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신분계급을 없애면서 이들을 모두 평민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라쿠민 출신 평민들을 '신(新)평민'이라 부르며 여전히 차별하였다. 애초에 메이지 시대 자체가 화족등의 소수의 사회고위계층에 이끌려갔던 시대였던 만큼 결코 차별이 사라지지는 않았고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2차대전 패전 이후 달라진 건 상당히 돌아이스러운 일부만 잘라내고 나머지 시스템은 그대로 이어간 것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2.1. 왜 아직까지도 존속되었는가?

여기까지라면 고려의 향·소·부곡민, 조선백정, 노비한센병 환자 또는 인도카스트제도 중 불가촉천민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인도의 경우 1950년대에 카스트 제도를 법적으로 완전히 철폐했다. 물론 말 그대로 법적으로만 없어진 것인지라 아직 시민들의 뇌리속에 카스트의 잔재는 상당히 남아있지만, 타고난 직위 보다는 경쟁력이 더 중요시되는 21세기 사회의 물결 아래 인도 정부가 경제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하위 카스트에게 복지, 세금 감면 등 많은 사회적 혜택을 제공하는 식으로 계층간 평등화를 꾀했고, 인도로 진출한 많은 외국계 대기업들이 '카스트? 그거 먹는 건가요? 신분이 낮으면 어때, 일 잘하는 사람이 장땡이지.' 하면서 그런거 전혀 신경 안쓰고 어디까지나 능력만으로 사람을 뽑아다 쓰다 보니 점차 인도 대중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아닌 능력과 사회적 지위를 더욱 인정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퍼져 나갔다. 다만, 이러한 외국계 기업과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적은 시골 중심으로 카스트의 악습은 아직 남아 있으나, 분명 과거 인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한국에도 이런 집단적인 신분 차별이 고려시대까지 향, 소, 부곡 등의 지역명을 붙여 존재하였고, 신분 제도 자체도 갑오개혁때까지 계속되었다. 이후에도 일부 직종, 특히 백정들은 일제 강점기까지 숱하게 차별을 받아왔고, 이에 저항하고자 형평운동(衡平運動)을 전개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완전히 망하고 일본에게 국권이 침탈당하며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면서 조선의 전통적 양반층이 몰락하고 개화지식을 익힌 사람들이 출세하며 신분구조의 변동이 일어났다. 다만 일제강점기때만 해도 형평운동이 상당한 영향을 발휘하고, 기생 권번 제도가 남아 있는 등. '천민'이라는 부류가 사회적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4]

한국사에서는 결정적으로 6.25 전쟁이란 전례없는 초대형 사태가 터졌고 혼란과 치열한 포격 속에 일제강점기때와 건국 초기 쌓아 놓았던 행정 자료와 호적 등 기반 전부가 싸그리 날아갔다. 이러한 농촌 지역 역시 각지에서 학살, 사건이 일어나면서 대규모 사회 계층 유동이 일어나면서 향촌의 작은 사회가 붕괴했다. 때문에 사람들은 양반 가문 출신이던 천인 가문 출신이던 모두가 똑같이 피난민, 실향민, 이재민으로 뒤섞이게 되었고, 전쟁후에도 당장 먹고 살기 급급했던지라 신분과 출신 성분에 집착하기 보다는 허드렛일이라도 하며 살아 남고자 하였다. 결국 모두가 누가 누구인지 어느 출신인지 알 수 없게 되었고, 덕분에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던 계급의식이 뿌리채 뽑혀 나갔다.

지금도 계층이 갈린다고는 하지만, 돈이나 사회적 직위 등 개인 및 단체의 재량에 따라 얼마든지 뒤집혀질 수 있는 상대적 조건으로나 갈릴 뿐, 적어도 전통적인 의미(혈통, 고향, 직업 등)로 개인의 의지로 선택이 불가능한 영역에 중점을 둬서 구분되던 절대적 계급 구조는 완전히 사라졌다. 당장 '양반'이라는 칭호가 추락하여 '이 양반', '저 양반' 의사양반, 형사양반, 양반양반(…) 하는 식으로 상대방을 높여주기 위하여 흔하게 쓰이는 말로 전락했고, 신분이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정식 호칭이었던 '상놈'이 엄청나게 큰 욕으로 변모했다. 더불어 자신이 양반 혹은 양반 출신이라며 자랑하는 사람들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당장 권력자 내부조차 다수의 실력자들이 조상대까지 올라가면 천민, 심지어 노비 출신인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노예나 천민의 비중이 매우 낮고 실질적으로 신사계급(양반)과 평민의 2단계로 분리되어 있었기에[5] 천민계급 드물었으며 더구나 중국도 문화대혁명으로 계급의식이 완전히 와해되었기 때문에 천민출신에 대한 차별이 없다.[6]

반면 일본은 인도처럼 경제적으로 확 성장하면서 정부와 외국계 기업들이 필요성을 느껴 계층 간 차별을 적극적으로 철폐하려 한 것도 아니고, 태평양 전쟁 말기 원폭 투하를 비롯한 짧은 시기의 본토 폭격 외에는 한국처럼 국가 기반을 뿌리째 흔들 만큼, 범국가적 규모의 대전쟁이 장기화될 정도로 시스템이 뒤집힐 만한 변화를 겪지도 않았으며, 그나마도 빠른 항복 선언으로 기간 유지되어왔던 행정력이 박살나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남의 땅에서 범국가적으로 헤집고 다닌 적은 있지만, 외려 기본 사회 틀은 그대로 유지한 채 상대적으로 느리고 차분히 성장한 터라 기존 사회의 질서에 변화가 거의 없었다. 특히 농촌은 도시와는 달리 주된 폭격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에도 큰 피해를 받지 않았던 편이고, 향촌의 작은 사회 질서는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즉 몰락 작전이 차라리 이뤄졌더라면 일본 전역에 초토화가 되었을지언정 최소한 그 안에서 사회 구조가 바뀌었을 텐데, 그런 계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게 실행됐으면 지구상에서 일본인은 멸종했을텐데?

그나마도 비슷한 섬나라에 같은 군주국인 영국의 경우는 적어도 내부에서부터 끊임없는 개혁을 하려는 시도가 수차례 있어왔다.[7] 이렇게 영국처럼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일이 있기도 하지만 대개 한국이나 독일처럼 국민들 스스로 결단을 내려 구 체제를 청산하기 보다는 전쟁으로 인해 도입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일본은 어느 쪽에도 들지 못했다. 일본은 지방 명문가이니 하는 지역의 고유 특색이 매우 강한데다가 과거 천민, 중인, 양반들이 살던 거주지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누가 누구의 후손인지 구분도 쉬워져서 과거 천민들의 후손들은 격렬한 차별을 받는다. 다행히 현대에 와서는 취직이나 면접 따위에서 자신의 출신 성분은 어떻게 잘 감추면 해결되지만, 결혼 문제는 빼도 박도 못하니 결국 혼인을 통한 신분상승의 길은 영원히 막히는 것이다. 일반 서민은 그나마 자기 기량과 능력 여하에 따라 재벌집에 장가 혹은 시집을 갈 수도 있지만[8] 부라쿠민은 천년 만년 영원한 천민이니 절대 꿈도 꾸지 못한다.

2.1.1. 과연 내전이나 혼란이 없어서 존속한 것인가?

하지만 저것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점도 많으며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흔한 인식과 달리 계급제도의 잔재가 영국, 일본 이상으로 은근히 심하고 프랑스스페인[9], 오스트리아처럼 몇번이나 나라가 뒤집어졌음에도 옛 지방 토호나 왕족, 귀족들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지방의회에서 EU의회 의원까지 하는 사례들[10]은 생각보다 많다. (물론 일본처럼 대놓고 지역 정치인이 세습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다.) 또한 위에서 말한 독일도 2차대전에 패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도입되고 군국주의가 사라진 것은 맞지만 그 이전에도 주로 유대인, 집시등을 차별하고 학살했지 '독일인' 내에 천민계급을 만드는 일은 없었다.[11]

즉, 단순히 계층간 혹은 지역간 유동성이 떨어지는 사회라서 일본 사회에 부라쿠민이 존속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일반적인 일본인들의 인식수준이 떨어져서라고 보는 것이 더 옳다.

3. 인구

부라쿠민의 인구 수에 대한 정보는 자료마다 다르다. 1993년 일본정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4,533개 "동화지구(同和地區=부라쿠민 마을)"에 892,751명의 부라쿠민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 인구는 2 ~ 3백만은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화지구"는 주로 일본에 많으며, 각 동화지구의 세대 수는 적게는 5가구로부터 많게는 1,000가구까지 있는데, 평균 155가구 정도. 그 4분의 3은 농촌에 있다. 홋카이도, 도호쿠 일대, 도쿄, 도야마, 이시카와, 오키나와에는 동화지구가 없다.

4. 차별

일본사회는 근대가 되도록 한 가문이 계속해서 같은 지역에서 같은 직업에만 종사했다. 전후가 되어서 민속학의 연구가 활발해진 덕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일본의 무라[12] 사회에 있어서는 법률이나 제도적으로 명문화되지는 않았어도 강고한 신분계급이 존재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직업인데 예를 들자면 사람들이 꺼리는 이나 죽음에 관련된 직업을 가진 자는 사회적으로 직분이 낮아서 같은 무라 사회의 구성원이라도 차별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있었다. 말하자면 직업 = 계급인 셈으로 현대 일본에서도 가업을 몹시 중시하는 것은 그 잔재에 해당한다. 특히 이러한 차별의식에 대해서 이해하기 쉬운 예는 혼인인데 혼인은 집안끼리 격이 차이가 나지 않는 가업을 가진 가문끼리 맺었고 이에 따라서 계급이 대물림된 것. 그 밖에도 중병을 앓은 경우 원래의 가문의 격보다 한두 단계정도 낮게 계산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폐쇄적인 신분차별은 심지어는 무라단위로도 이루어졌는데 예를 들자면 동과 서에 각각 무라가 있다면 특정한 직업에 종사하는 구성원이 많은 쪽이 더 높은 격으로 쳤다. 따라서 무라와 무라는 기본적으로 소통이 되지 않는 폐쇄적인 사회였다. 일례로 에도시대에 어떤 마을이 인구때문에 둘로 갈렸는데 그 중에서 한 마을이 당시 유행하던 가부키로 사업을 벌였지만 가부키에 대한 수요는 어쨌거나 사회적인 인식은 안좋았기 때문에 심지어 무라단위로 차별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근대가 되기까지 출신지와 이름으로 어떤 정도의 삶을 알았는지 그 간략한 내력을 알 수 있었다.[13] 이점을 악용한 것이 바로 부라쿠민 차별인데 일본사회에서 최하위층에 속하는 부라쿠민과는 같은 부라쿠민 이외에는 혼인을 맺지 않고 당연히 주거도 제한되기 때문에 출신지를 보면 단 번에 부라쿠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점을 이용하여 이력서 등에 적힌 출신지를 보고 부라쿠민을 불합격시키는 것이다.

4.1. 차별 현황

부라쿠민은 아직도 이유없이 박해받곤 한다. 다른 일본 내 소수 집단들인 아이누, 재일 한국인, 재일 중국인, 오키나와인들은 각각 일본 정부 차원에서의 선주민 인정, 한류, 중화가, 동화정책 등으로 어느정도 사회 내 포용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아직도 불평등한 구석은 많이 남아있지만 과거에 비해선 장족의 발전이다. 그러나 일본은 부라쿠민에도 비슷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긴 부족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부라쿠민 출신은 노골적으로 차별받는 일이 다반사였고, 관동 대지진 때나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들은 특히 일본 극우세력들로부터 '화풀이'식으로 참혹하게 박해당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이에 대항해 차별 받던 부라쿠민들의 상당수가 좌익운동에 투신하기도 하였고 개중에는 아예 야쿠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역시 차별 받던 집단인 재일과 함께 같이 사회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 일본을 방문한 한 사업가는 당시 잔존해 있던 부라쿠민의 동네에 대해, 여자들은 가끔 관청의 허가를 받아서 감시 하에 일반인 동네로 나와서 생필품을 사 갈 수 있으나 남자들은 절대 나오게 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그 동네에 '일반인이 들어가면 살해당할 것이 자명하므로 절대 접근하지 말라'고 전하고 있다.

국토교통성 발간 지형도에서도 그 동네는 지도상에서 존재하지 않고 아는 사람만이 알음알음으로 알며, 일본의 언론 또한 국익수호 차원에서 지금도 잔존하는 부라쿠민 동네에 대해서는 기사를 쓰지 않기로 자율규제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구글 어스에서 고지도와 현재 지형을 겹쳐볼 수 있는 기능을 이용하면 부라쿠민이 살았던 마을을 볼 수 있다고 해서 한때 문제가 되었다. 구글 어스 기능 자체의 문제라기보단 2차 사용에 따른 악영향이 문제된 것. 일본 총무성에서도 처음에는 이 기능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았지만, 부라쿠민 단체들의 건의에 의해, 그들에게 악영향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구글에게 총무성 이름으로 요청한 것이다. 그에 대해 구글은 원천적으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기능을 삭제하였다.

오늘날은 일본 경제의 급성장과 정부 주도의 처우 개선 노력 등으로 인해 부라쿠민 거주지의 주거 환경은 상당 부분 개선되었으나, 현재까지도 암암리에 '부라쿠민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취직, 결혼 등에서 감당할 수 없는 불이익이 없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일본 사회의 민감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실제로 일본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이 특수부락지명총람 등 사립탐정사무소, 신소 등에서 비밀리에 발간, 유통하는 리스트를 구입하여 지원자의 출신지를 가려내는 데에 사용하는 등의 문제가 꽤 있었다. 특수부락지명총람의 존재는 일종의 도시전설로 여겨졌으나, 1975년에 최초로 부락지명총람사건이 언론에 드러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났고 최소 9종류의 책자가, 채용, 결혼 문제 등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시대의 정서에 역행함을 알고도 발간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게다가 부라쿠민 차별철폐운동이 진행될수록 색출작업도 고도화되어, 1990년에는 도쿄 도내의 행정서사들에 의한 부라쿠민 의심자 족보구매사건, 1998년에는 오사카 시내의 대형 흥신소가 기업들로부터 차별신원조사를 의뢰받은 사건 등이 일어났다. 위의 링크 기사에서도 대기업에서 부라쿠민으로 의심될 경우 추적해서 기어이 떨어뜨린다는 익명의 제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신상털기 시장이 버젓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필터링은 물론 믿기지 않지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우는 사례도 있다. 1963년 5월 1일 발생한 사야마 사건(狭山事件)으로, 사이타마 현 사야마 시에서 일어난 여고생 납치피살사건에서 경찰측이 납치범을 잡지 못하자 대신 시 근처의 부락에 쳐들어가서 당시 24세의 이시카와 카즈오(石川一雄)를 붙잡아 고문 후 엉터리 자백을 받아내는 대규모 병크를 저질렀다. 이시카와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94년에 가석방되었다.

아소 타로가 자기 파벌의 회합 자리에서, 자민당 총리 후보 중 하나였던 노나카 히로무를 비난하면서 한 발언이 "노나카 히로무 같은 부라쿠민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는 없다"였다고 한다. 격분한 노나카 히로무는 자민당 총무회에서 "장래의 총리대신 자리를 약속받은 아소 타로 정책조사회장[14], 당신은 파벌 회합 자리에서 "노나카 히로무 같은 부라쿠민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는 없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당시 회합에 참석한 의원 중 세 사람을 통해서 이미 확인했습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당의 정책을 담당하고, 잎으로 대신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앞으로 인권 계몽이 가능할 리가 없다. 나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라고 일갈했다. 아소 타로는 이 말에 반박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고 한다. [15] 부라쿠민에 대한 기득권 세력들의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16]

부락해방동맹[17], 전일본동화회[18], 전국부락해방운동연합회[19], 자유동화회[20] 등의 단체는 부라쿠민 차별 해소를 명분으로 정부 보조금을 받고 있는데, 이 중 부락해방동맹과 전일본동화회에서 엄청난 양의 비리를 저질러서 밝혀진 사건만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이런 단체들이 그리고 일본 최대의 사기 사건인 이토만 사건의 주범으로 유명한 재일교포 출신 사기꾼인 허영중도 부라쿠민 해방운동 계열에서 일을 했었다. 그러나 분명히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은 암암리에 남아있는 문제로, 단체의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을 "그래서 부라쿠민은 차별받아 마땅하다"라는 당위성으로 연결시키는 오류를 범해선 안 된다.

5. 대책

일단 일본 정부도 대책을 세우기는 한다. 그러나 아직 차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우선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소득 격차에 대해서는 교육 기회 확대, 일자리 제공, 공무원 채용 우대 등으로 격차를 좁혀 삶의 질을 올리는 것으로 부라쿠민과 다른 일본인들의 차이를 없애려고 하였으며 이러한 움직임을 동화대책사업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업에 상당히 많은 예산이 배정되고 이에 따른 이권도 상당하기 때문에 부락해방연대나 전일본동화회같은 권력화된 부락보호단체 측 간부가 횡령하거나 단체내에서 탈세, 사기를 치는 일들이 종종 발생했고 이런 사건들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부라쿠민들의 이미지를 떨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2000년대까지도 부라쿠민이라는 단어가 방송금지용어로 지정되어있고 따라서 부라쿠, 부라쿠민등이라는 단어가 방송에서 나오면 항의전화를 받거나 경고조치를 먹었다. 이 규정은 현재 해제되었지만 이에 따른 영향은 남아있어 보통은 동화라고 표현한다.

일본인과 대화를 할때는 "부락민"이라는 말자체가 절대 금지이다. 한 일본인이 비유를 들기를 미국에 방문해서 흑인차별 문제를 토론하면서 "미국에서는 깜둥이 차별문제가 심각하다면서요 ? "라고 말하는것과 같은 것이라고 "도와"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크게 싸움을 벌일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되는 말이다.그건 크게 싸움을 벌이려면 사용해도 된다는 의미

단, 이에 따른 대책 자체가 아예 효과가 없는건 아니어서 젊은층들 사이에서 차츰 차별의식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차별의식이 배제의식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6. 인터넷상의 부라쿠민

2CH 극우초딩들이 시도 때도 없이 비난하는 계층이기도 하다. 지자체로부터 온갖 특혜를 받고 있어 오히려 역차별을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부라쿠민이 되고 싶다는 식의 스레드가 2ch에서 자주 보이는데 직업이 없는 니트가 만드는 쓰레드로 나도 부라쿠민이 되면 니트신세에서 벗어나 지자체의 지원을 받고 자영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말 그대로 멍청한 소리로, 지자체에서 부라쿠민 자영업자에게 세금감면 등 혜택을 주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부라쿠민이 정상적인 직장에 취업할 수 없기 때문에 지원을 해주는 것이고, 지원해주는 자영업의 범주가 그동안 부라쿠민이 해오던 일, 즉 장의사나 음식 쓰레기 처리 같은 일이다. 어차피 부라쿠민은 부라쿠민이 운영하는 사업체에 취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자영업자를 지원해 주는 것 뿐이다. 즉 말이 같은 빈곤층이지 출세의 기회가 작게나마 존재하는 이들과 아예 일반적인 생활의 기회조차 막혀 있는 이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바보짓인 셈. 오히려 이런 얼간이들때문에 부라쿠민들이 일본사회에 소외된다는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기득권층도 부라쿠민에 대한 인식이 편파적이기는 해도 대놓고 이들에 대한 국가적 차별은 하지않는다. 그러나 혐한초딩이나 재일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모임 일명 "재특회"에서는 이들에 대한 강제추방과 국가적 차별을 주장을해 일본 정통 우익들에서도 국민 분열시키는 얼간이 집단으로 보고 있다.

다른 의미로는 지방도시를 비하하는 의미로 쓰인다. 예를 들어 지방도시에서 지자체 단위의 투자유치 사업을 벌이면 부라쿠민 따위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촌티는 못 벗는다라는 식으로 비하하고 조롱하는 의미로 쓴다.

7. 관련

  • 그레고리 하우스(House M.D.) - 그레고리 하우스 본인이 부라쿠민이라는게 아니고, 군 대위인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병원 청소부 취급을 받던 부라쿠민 출신 의사가 실력만으로 주변을 입다물게 만드는 것을 보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비슷한 경우로, 재일교포들이 의료계에 많이 진출해 있어서 오사카, 고베 등지에는 한국인 의사가 많다. 의료계는 어차피 실력만으로 승부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 영화 떠오르는 태양에서 부라쿠민이라는 말이 대사에 직접 나와서 일본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상기한대로 보통은 공적인 자리에서 언급하지 않기 때문.

  • 2008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영화 "굿바이"(원제 : 오쿠리비토-おくりびと)에 보면 전직 첼리스트가 고향으로 내려와 장의사가 되는데, 부인(히로스에 료코 분)을 비롯하여 모든 친척들이 수치스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 마을사람들도 장의사를 천대하는데,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 때문이다.

  • 2011년 말 오사카시장이 된 하시모토 토오루가 부라쿠민 출신이다. 아사히 신문 계열의 잡지인 주간이라는 아사히에서는 하시모토 토오루의 과격적인 행동은 그의 혈류에 있다.[21] 라는 취지의 칼럼이 올라와서 온갖 쌍욕을 먹은 적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지향하는 정치적 지향점은 극우 성향이다. 다만 이 부분은 하층민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이 반체제적인 경향을 보일 경우 빠르게 매장당하는 현실[22]을 고려할 때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

  • 2014년, 50년 전 사야마 사건의 용의자로 억울하게 피해를 보았던 이시카와 카즈오 씨와 그의 부인,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불명예를 떠안고 사는 그의 형 등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SAYAMA: 보이지 않는 수갑을 벗을 때까지'가 공개되었다. 예고편을 보면 그는 75살의 할아버지가 된 지금도 여전히 거리에서 무고함과 결백함을 주장하고 살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피해자 마을에서는 진범찾기로 마을사람들간의 갈등발생보단 부라쿠민출신 이시카와 카즈오를 희생시켜 마을 단결력을 유지 하려고 했다.

8. 부라쿠민 차별사례

사례를 연대순으로 기재.

  • 1963년: 야마 사건
  • 1975년: 부락지명총람사건
  • 1990년: 행정서사들에 의한 부라쿠민 의심자 족보구매사건
  • 1993년: 게이오대 학생의 협박투서사건: 부라쿠민 출신의 가정에 출신지를 폭로하겠다는 협박 투서를 하여 500만엔을 요구한 사건. 결국 범인은 체포되었고 2000년에 제적처분을, 2001년에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의 처분을 받았다.
  • 1998년: 차별신원조사사건
  • 2001년: 우체통, 공원 등에서 낙서사건
  • 2002년: 청소사무소, 공사현장 등에서 낙서사건
  • 2003년: 부라쿠민 해방동맹 회원 자택에 에타시네(エタ死ね: 부라쿠민 죽어라) 투서사건
  • 2005년: 행정서사에 의한 호적부정입수 신원조사사건
  • 2006년: 토지조사차별사건
  • 2008년: 연속대량 악질투서사건, 공원 낙서사건, 호적부정입수 신원조사사건
  • 2010년: NTT동일본 계열사 건물에 낙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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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부라쿠민들은 일본 주류 종교(불교, 신토)에서도 외면받았기 때문에 대안종교로 기독교를 선택한 경우가 많았고 그중에서 기독교 사회주의 성향이었던 니시코 만키치(西光万吉)가 '고난'과 '해방'을 상징한다 하여 예수의 가시면류관을 모티브로 만든게 이 깃발이다.
  • [2] 물론 구 재벌은 해체되었지만 이후 성장한 대기업의 소유자나 자수성가한 재벌이 존재. 구 재벌도 기업 소유만 못할 뿐 오늘날에도 사회 최상류층을 이루고 있다.
  • [3] 본제국주의를 학문적인 관점에서 지탱한 나기타 쿠니오의 일본미화사상을 비평한 양심적인 학자다.
  • [4] 약간 웃기는게, 기생들이 백정들이 중심이 된 형평사에서 잔치한다고 부르자 '거부'해서 백정들이 기생들이 우릴 차별한다고 난리가 난 적이 있다.
  • [5] 물론 노비가 있긴 하지만 자손이 아닌 1대에 한정되고 그나마도 대부분 죄인 신분이다. 조선에서는 19세기에야 일반화되는 궁정이나 양반집의 고용인 제도가 중국에서는 이미 고대 시대부터 일반화된 지 오래였다.
  • [6] 물론 그것과 별개로 6.25 전쟁과 문화대혁명의 결과가 매우 부정적이었음에는 변함이 없으나 대체로 이런 진통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 [7] 영국은 스스로 국왕과 의회가 대립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서 민주주의가 스스로 정착되었지만,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에 의해 반강제로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단 영국도 역시 뿌리깊은 계층에 대한 분리의식이 있다. 차별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상류층,중류층,하류층에 대한 분리가 분명하다. 은근히 영국사회에서도 이러한 계층적 분리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 [8] 실제로 자수성가해서 판사나 변호사, 의사가 된 사람이 잘사는 집 딸과 결혼하는 경우가 꽤 된다.
  • [9] 프랑스와 스페인은 혁명 이전에 '카고(Cagot)'라는 부라쿠민 비슷한 계급이 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졌다.
  • [10] 대표적인 사례로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있으며, 현대에도 불가리아 국왕이었다가 공산혁명으로 망명한 뒤 나중에 귀국해 총리 자리에 오른 '시메온 2세' 같은 인물이 있다.
  • [11] T-4 프로그램같은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전통적인 출신성분, 계급과 상관없이 장애인이면 다 거세하거나 죽인 케이스에 가깝다.
  • [12] 마을을 뜻하는 촌을 풀어서 읽은 것으로 학문적으로 무라라고 할 경우 일본 특유의 사회단위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 [13] 일본사 인물들을 연구하는데에도 출신지가 활용된다. 대표적으로 이가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닌자설이 있는 마츠오 바쇼.
  • [14] 원내대표 격
  • [15] 심이야 어쨌든 으론 상대방을 잘 챙기는 일본 정치인이 저 정도로 강경하게 발언했다는 것은 정말로 분노했다는 것이다.
  • [16] 아소는 정치 귀족 출신. 하지만, 세습의원이라고 해서 모두 아소와 같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차남 이즈미 신지로가 좋은 예.
  • [17] 親 민주당 성향의 단체
  • [18] 親 자민당 성향의 단체
  • [19] 부락해방동맹에서 공산당 지지자들이 나온 단체로 부락해방운동의 권력화나 부패상을 비판한다. 다만 이 쪽도 완전히 깨끗한 건 아닌게 교토지부쪽에서 공금횡령 사건이 일어난 바 있다(...)
  • [20] 親 자민당 성향의 단체인데, 1981년 전일본동화회에서 탈세사건이 밝혀지자 전일본동화회에서 탈퇴한 회원들이 만든 단체.
  • [21] 물론 이 사건을 보도한 언론에 의해 일부 과장, 왜곡된 측면이 있다.
  • [22] 실제로 세계 각국에서 개혁에 나선 사람은 하시모토 도루처럼 최하층 출신일 경우에는 대부분 외부에서의 과격, 강경 성향의 변화를 추구했고 내부 개혁은 오히려 기득권층 내 일부 깨어있는 이들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