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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last modified: 2015-03-01 15:49:52 Contributors

鳳梧洞 戰鬪

Contents

1. 개괄
2. 상세
2.1. 삼둔자(三屯子) 전투
2.2. 일본군의 월강추격대대 편성 및 두만강 월강(越江)
2.3. 결과
3. 미디어

1. 개괄

일제(日帝) 때인 1920년 6월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 대한북로독군부 한국 독립군 연합부대가 중국 지린 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 월강(越江) 추격대대를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전투이자 한반도 바깥 지역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전투이기도 하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 지역에서 조선 독립군의 무장활동이 활발해지게 되자 일제는 1920년 5월 독자적인 조선 독립군 및 독립 투쟁세력을 소탕 및 토벌을 하기 위한 작전을 펴게 되었고 이 때부터 만주 지역에서도 조선 독립군의 무장활동을 방해하고 소탕하기 위한 일제의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에 맞서 홍범도가 이끌었던 대한독립군은 간도 지역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고 만주 지린 성 봉오동으로 집결하여 한반도 진공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당시 적백내전에서 패배한 백군 소속의 체코군이 우수한 체코제 무기를 독립군에게 넘겼기 때문에 독립군의 화력은 이전보다 크게 배가된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평소에 독립군을 크게 우습게 보았기 때문에 '기껏해야 화승총이지' 하는 인식 하에 독립군의 매복 가능성마저 무시하고 전술을 전개했다. 독립군의 빈약한 화력으로는 매복 습격을 해와도 금방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신감은 산산히 부서지게 된다.

2. 상세

2.1. 삼둔자(三屯子) 전투

1920년 6월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에서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하고 일본군을 공격하자 일본군 소대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게 되자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은 삼둔자(三屯子)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군들이 사상(死傷)을 입기도 하였다.

2.2. 일본군의 월강추격대대 편성 및 두만강 월강(越江)

이 소식을 듣게 된 일본군함경북도 나남(羅南)에 주둔중이던 제19사단 병력을 차출하여 '월강추격대대' 를 편성하고 중국의 허가도 없이 무단으로 두만강을 건너 가 중국 영토로 침입하여 봉오동에 있는 독립군 본거지를 추적하였다.

이에 홍범도가 이끈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동 산지(山地)에 매복하였다가 일본군이 사지(死地)에 접근하게 되면서 곧바로 총격전을 시작하여 3면으로 포위하여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를 섬멸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본군은 이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일부는 숙영지로 도망하거나 탈영을 하는 등 독립군의 맹공에 놀라 참패하게 되었다.

2.3. 결과

봉오동 전투의 승리로 독립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가게 되어 대한독립의 의지를 더욱 불태우게 되었고 후에 청산리 대첩 등에도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나 일본군 사령부에서는 독립군이 더 많이 사상자를 냈다고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1]

이후로는 만주에 있는 독립군 부대의 토벌 및 소탕에 총력을 펼치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만주에 있던 조선인들을 학살하였다. 물론 일본 넷우익이니 극우그리고 답없는 일뽕이들도 같이는 폭동진압이라고 악쓰며 옹호한다.

3. 미디어

이 전투를 다룬 영화가 없던 터에 바로 명량김한민 감독이 차기작으로 제작,기획에 들어갔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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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부분은 좀 논란이 있다. 한일 양측의 연구결과가 상당히 상이하다. 청산리 전투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