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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last modified: 2016-06-08 18:27:51 Contributors

Wolfgang Amadeus Mozart


이 항목은 모차르트 또는 모짜르트로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다. 다른 모차르트들은 각각의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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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모차르트의 초상화.
오른쪽: 요제프 랑에가 그린, 죽기 한두 해 전의 모차르트를 그린 미완성 초상화. 그는 모차르트가 사랑했었던 알로이지아 베버의 남편이자, 또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의 형부이기도 하다. 콘스탄체는 이 그림이 남편과 가장 흡사하게 그려졌다고 평가했다. 모차르트의 원래 머리카락은 적갈색이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깔끔한 백발은 다 가발이다.[1]

Contents

1. 이름 및 짧은 소개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청년기
2.3. 성인기
2.4. 모차르트 사후
2.5. 요약
3. 모차르트에 관한 일화
3.1. 모차르트 부부
3.2. 사기적인 음감
4. 죽음을 둘러싼 의혹
4.1. 모차르트의 죽음
4.2. 살리에리의 독살설
4.3. 죽음의 원인에 대한 현대의학적 관점
4.4. 그의 장례식
5. 트리비아
6. 리그베다 위키에 등록된 모차르트 작품 목록
7. 모차르트 작품 연주


youtube(CDNENgxTJuM)
▲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Eine Kleine Nachtmusik) K.525 1악장. 게반트하우스 4중주단 연주. 이 곡은 전 악장이 모두 전설의 레전드 급으로 유명하므로, 이외의 다른 악장들도 찾아서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특히 3악장은 코레일노선에서 환승 할 수 있는 역 진입시 음악으로 수도없이 쓰였다.

1. 이름 및 짧은 소개

오스트리아의 고전 음악 작곡가.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출생, 1791년 12월 5일 에서 사망.

클래식계의 악동, 클래식계의 사기캐. 이른바 클래식계의 엄친아, 신동(神童)으로 불리운다. 외계인 35살 짧은 삶에도 무려 626곡에 이르는 곡을 남긴 굇수. 클래식 갤러리에선 모본좌로 칭하기도 한다. 추산 IQ는 220대 정도이며 제자리에서 뒤로 공중제비를 할 정도의 신체능력도 소유했다고 한다. 뭐지 이 사람……

가끔 음악 관련 서적에선 '모르트'라고 적혀있기도 했으며, 1980년대만 해도 이 명칭이 더 흔하게 쓰였다. 그러나 독일어 외래어 표기법 상 z를 ㅊ로 번역하도록 되어 있고, 더욱이 된소리를 쓰지 않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맞는 표현이다.

세례명이자 풀네임으로는 요하네스 크뤼조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 '요하네스 크뤼조스토무스'는 '황금의 입'으로 알려진 교부(敎父) 요한 크리소스토모이며, 그리스어 어원을 지닌 '테오필루스'는 대부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볼프강'은 모차르트의 어머니가 살던 고향의 호수 이름(이면서 동시에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에서 따온 것이고, '모차르트'는 motzen(남부 독일 방언: motschen)과 hart의 합성어인 '모츠하르트(Motzhardt)'의 변형으로, 뜻은 '험담하는 사람' 혹은 '조잡한 일을 하는 사람'(…). 음악은 조잡한 것입니다, 여러분!! 음악이나 하고 다니고!?

미들네임인 아마데우스는 대부의 이름 테오필루스, 나아가 독일어인 고틀리프(Gottlieb)의 라틴어 표현으로, 뜻은 '신의 사랑을 받은 자'. 본인은 프랑스식 표현인 아마데(Amadé)를 즐겨 썼다.

사실 보성군 벌교읍 출신이라 카더라. 자매품으로 '빈센트 반 고흐목포 사람'도 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음악가 및 바이올린 교육자인 요한 게오르크 레오폴트 모차르트(Johann Georg Leopold Mozart, 1719~1787)[2]와 아나 마리아 발부르가 모차르트(Anna Maria Walburga Mozart[3], 1720~1778) 사이에 태어난 3남 4녀 중 막내 아들이다. 형제는 5명이 모두 유아 시기 때 죽어버리고, 누나인 마리아 아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 모차르트(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통칭 나네를(Nannerl), 1751~1829)만 살아 있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3세 때 클라비어 연주를 터득했으며 다섯살 때 작곡을 시작했는데, 아버지인 레오폴트는 자기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보고 작곡을 그만둔 뒤 볼프강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데에 힘썼다고 한다(…). 그리고 17세까지 이어지는 전유럽 순회연주를 통해 본좌급 자리에 등극한다.

6살 때 오스트리아의 궁정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장난을 치다 넘어진 그를 마리 앙투아네트가 일으켜 세워주었더니 대담하게 청혼을 했다고. 혹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더니 '공주와의 결혼'을 당돌하게 말했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미소를 지으며 더 큰 후에 보자고 했다나. 사실 불행하게도 이 혼담은 아마 99%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4]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시 자신의 아들이 악단을 꾸리자, '돈도 없는데 그런 뻘짓을 왜 해'라고 편지를 보냈다(…).[5] 정치적인 이야기지만,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국제전쟁과 검소한 성품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긴 통치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긴축재정을 실시하는 국가가 되었다.

2.2. 청년기

25세 되던 때에 자신보다 4살 위인 다른 피아니스트 무치오 클레멘티와 피아노 배틀을 했던 적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클레멘티 항목 참고.

2.3. 성인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방탕한 삶을 살아 부유한 삶을 살진 못했다. 작곡료로 돈을 벌면 도박과 사치로 그 이상을 날리는 식이었으니 당연지사. 참고로 버는 돈은 많았다. 오스트리아 황궁 오르간 연주자로 일할 당시 받은 돈은 800굴덴이나 되었는데 이는 당시 공무원 봉급의 2배가 넘는 적지 않은 돈이며, 당시 모차르트 나이가 겨우 20살 때 일이다. 그럼에도 되려 프랑스에서 활약하며 2천 굴덴이 넘는 돈을 받는 대선배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를 언급하며 적다고 투덜거렸다가 궁내상서에게 욕을 한 바가지로 먹고, 이런 점 때문에 그를 안 좋게 보던 대주교와 갈등을 빚어 2년 만에 오르간 연주자에서 잘렸다. 당시 글루크는 모차르트보다 나이가 42살이나 많고 오랜 경력이 있는 유명 음악가였으니, 나이와 경력을 생각하면 되려 모차르트가 받는 돈이 거액인 셈이다. 이렇게 욕을 먹고 오르간 연주자에서 짤리긴 했지만 실력이 있다는건 인정받았기에 이후에도 유력가 자제들을 대상으로 피아노 과외를 하면서 제법 쏠쏠하게 돈을 벌여들였고, 작곡료나 연주료도 풍족하게 받아 하녀와 요리사, 미용사도 직접 고용하고 심지어 승마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살고 있는 집은 비록 자기소유는 아니었지만 빈 중심가에 위치하다 보니, 임대료가 비쌋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비싼 임대료를 충분히 감당해냈고, 그러면서도 자기 아들을 사립학교로 내보냈을 수준이었다. 즉, 왕족이나 고위 귀족급으로 떵떵거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부르주아로써의 라이프는 충실히 누렸다고 할만하다.

훗날 모차르트는 궁중음악가 시절에 받던 임금에 대해서 "하는 일에 비해서는 많고, 할 수 있는 일에 비해서는 형편없는 금액"이라고 평가했다. 자신의 음악성에 대한 엄청난 자신감과 동시에 궁중음악가 시절 의도적으로 태업을 했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런데 정작 궁에서 나와서 생활할때도 경제적 형편이 나아진 것은 또 아니었다. 도리어 사치와 도박에 포텐이 터져서(...) 벌이는 많이 안 늘었는데 씀씀이는 더 커졌고, 결국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다. 그래도 모차르트는 연간 1만 플로린을 벌었으며,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 중산층 소득의 약 22.1배 정도의 수준이었다. 즉, 지금으로 친다면 모차르트는 연봉 10억원 정도를 벌어들였지만 12억원 정도를 지출하다보니 빚쟁이가 된 셈(...)이라고 할수있다. 물론 물가차이나 당대의 소득과 계층간 격차같은건 고려해봐야되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이런 사회성 결여와 아래에서 자세히 언급할 스카톨로지 변태 성향 때문에 모차르트 아스퍼거 증후군이 진지하게 돈 적도 있었던 모양이나, 원래 2000년대 후반엔 그냥 재능 비범하고 사회성 떨어지는 천재들은 전부 다 아스퍼거로 몰아가는 무개념들이 상당히 판을 쳤음을 알아야 한다. (...) 당장 리그베다 위키에사도 2010년까지만 해도 온갖 뜬소문에 근거해서 아인슈타인뉴턴오다 노부나가에 여러 역사적 네임드들이 "아스퍼거 증후군 의심을 받는 사람들 목록"에 올라간 적이 있었으나[6] 싸그리 들어내진 적이 있었다.

26세인 1782년, 콘스탄체 베버(Konstanze Weber, 1762~1842)[7]와 결혼하여 4남 2녀가 태어났다.

하지만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네 아이는 유아기에 죽어버리고 차남인 카를 토마스(Karl Thomas Mozart, 1784~1858)[8]와 4남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Franz Xaver Wolfgang Mozart, 1791~1844)[9]만이 살아남았다. 그런데 이 두 사람 모두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아서, 모차르트의 가계는 여기서 다 끊겨버렸다. 안습….

2.4. 모차르트 사후

일반적으로 모차르트가 가난에 의해 죽었다는 말이 많은데, 사실 많은 빚을 남기고 죽었긴 했지만, 그 직전에 마술피리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참이다. 좀 과장을 섞어 말하면 말년까지 격무에 치여 살고 있었다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이건 그 이전에 내기당구와 카드도박으로 잃은 돈이 너무 크다보니 마술피리의 성공으로도 그 빚을 메꾸지 못했다고 보면 된다.

2.5. 요약

인생을 살펴보자면 매체에서 언급되는 일반적인 '괴팍하고 자유분방한 천재', 즉 천재 캐릭터클리셰의 오리지널 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모차르트의 서간집을 보면 어렸을 때는 스카톨로, 좀 나이 들고 나서는 검열삭제를 좋아한 듯. 내용이 참으로 아스트랄하다. 이 지저분한 소재는 당시 이 동네 보통 지식인들이 자주 써먹던 소재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런 행각은 서간집 외에 작품으로도 남아 있는데, 당시 작곡가들이 여흥 거리로 쓰던 장르인 짤막한 카논들 중에도 노골적인 스카톨로 메시지를 담은 곡이 몇 곡 있다. 대표적인 예로 '내 엉덩이를 핥아라(Leck mich im Arsch KV 231(382c)'(...). 모차르트의 카논 중 스카톨로지 성향이 있는 곡들은 당시 엄격했던 검열 제도 때문에 제3자가 상당히 순화된 건전가요풍 가사로 임의 개작하고 나서야 출판할 수 있었다.

여성 편력이 심했다는 이미지도 있고 영화《아마데우스》도 그런 속성을 상당히 부각시켰지만, 오페라《돈 조반니》작곡 중 찾아온 카사노바가 자신의 이야기를 써 달라는 부탁을 거절한 정도니 생각했던 것만큼 심한 것은 아니었다. 모차르트 본인도 오페라를 작곡하며 이런 부도덕한 호색한을 주인공으로 해야겠나 갈등하던 중이었으며, 어차피 오페라의 스토리는 돈 조반니가 벌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

그의 친구가 모차르트 아버지인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를 봐도 그의 괴팍한 점을 알 수 있는데 오죽하면 친구는 볼프강이 가진 음악적 재능이 절반으로 줄고 그 절반이 괴팍한 점을 덮으면 그 녀석은 완전한 사람이 될 겁니다. 그 당사자의 아버지 되는 사람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을까.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는 세대는 다르나 동시대의 인물이며, 그 탓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천재' 모차르트에 반해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신체적 약점마저 극복해 낸 '수재' 베토벤이라는 식의 대비가 잦다. 대중적으로는 "모차르트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재, 베토벤은 하늘로 올라간 천재" 라는 말도 있을 정도. 베토벤은 일생 단 한 번 모차르트를 만났지만, 그 당시 모차르트는 절정에 달한 명성을 누리고 있던 반면 베토벤은 수습 음악도였고, 그나마 베토벤의 어머니가 곧 돌아가셨기 때문에 두 사람은 생전에 그 이상 만날 수는 없었다. 모차르트 생전에도 이런 평가가 많았는지, 본인의 편지에서 "사람들은 나를 천재라고만 생각하는데 나처럼 연습과 노력을 많이 한 사람도 없을 거야"라면서 푸념했다고 한다.

하루는 베토벤이 거리를 걷다가 어느 집에서 연주되고 있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듣고, "이것은 누가 작곡한 것이란 말인가. 나는 절대로 이렇게 아름다운 곡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라고 푸념했다는 일화가 있다. 베토벤은 실제로 이 곡을 모차르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사랑했고, 자기 스스로 카덴차를 붙여서 연주할 정도였다고 한다. 베토벤을 기려, 지금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은 베토벤의 카덴차로 연주한 음반이 가장 많고, DG에서 나온 베토벤 전집[10]에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이 끼여 있기도 하다. 베토벤의 카덴차는 장대하고 화려하며, 이 작품의 성격을 제대로 짚어냈다. 인류 최고의 음악가로 칭송되는 두 사람이 함께 작곡했다는 것만으로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의 가치는 입증된다고 볼 것이다.

3. 모차르트에 관한 일화

3.1. 모차르트 부부

붉은 원 안의 여자가 콘스탄체

본인도, 부인인 콘스탄체[11]도 워낙 써제꼈기에 벌어도 벌어도 살림이 딱히 나아지질 않았던 것뿐인데, 나중에 난로 연료가 없어 춤을 췄다는 에피소드만 본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가난했다는 인상을 가진 경우가 많다. 뭐, 최소한 성향이 비슷해서였는지 두 사람은 그럭저럭 잘 살았다(…).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야말로 굉장히 저질인 글이 넘쳐난다. 언제나 당신의 소유물인 모차르트, 설탕처럼 달콤한 키스 세 개가 당신을 향해 날아가고 있어요, 지금 난 당신을 생각하면 발기(…)했다, 아아, 섹스하고 싶다(...) 이러쿵 저러쿵... 엄청나게 야한 글들이 넘쳐날 정도로 편지를 쓰고 이웃들에게 농담을 했다. 그런데 그의 아내도 천생연분답게 비슷한 답장을 보냈다.[12]

콘스탄체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의 이미지나 레오폴트가 사정없이 마음에 안 들어했던 기록으로 인해 오늘날에 상당히 저평가를 받는 인물 중 하나인데, 콘스탄체는 당대 여성으로선 드물게 악보를 쓰고 글을 쓰는 교육받은 여성으로, 레퀴엠의 경우 모차르트 사후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발표될뻔한 악보를 건져서 모차르트의 제자와 손을 봐서 발간한 능력자였다.[13] 종종 콘스탄체에게 모차르트가 음악과 관련된 대화를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콘스탄체와 모차르트의 결혼은 모짜르트가 콘스탄체에게 엉겨붙어서 한 결혼으로 장모님과 시아버지가 못마땅해하여 결혼까지의 우여곡절이 난리도 아닌 것은 영화와 같다.

참고로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콘스탄체를 맡은 성우는 KBS판은 서혜정. MBC판은 송도영.

3.2. 사기적인 음감

모차르트가 7살이었던 때, 악사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아버지에게 "왜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면 반음 올릴 때와 반음 내릴 때의 음높이가 다른 건가요?"라고 질문했고,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피아노를 쳐주며 "그건 네가 잘못 들은 거고 반음을 올리든 내리든 반음만큼의 음높이는 일정하다"고 가르쳐 주었다. 이를 두고 모차르트가 온음, 반음 개념을 초월하여 음을 18등분해서 들을 수 있었던 컴퓨터급 절대음감을 지니고 있었다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5/18반음(27 cents)과 4/18반음(22 cents)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절대음감이 아니라 오히려 예민한 상대음감 능력이라 볼 수 있다.흠좀무

당대 바로크 시대에는 바흐의 평균율이 표준적인 조율방식이 아니었으며, 음계를 구성하는 비율 뿐 아니라 기준음의 기저주파수 자체가 연주회 장소마다 달랐다. 구체적으로 현대음악에서 A4=440 Hz인데 17세기의 베니스에서는 465 Hz, 18세기 프랑스는 392 Hz, 독일은 415 Hz였으며,[14] 교회는 반음[15] 낮은 튜닝을, 연주회장은 반음 높은 튜닝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만약 상황이 이렇다면 현대음악에서 의미하는 절대음감의 소유자는 엄청 괴로운 음악적 환경에 놓이게 된다. 연주회 여행을 다녔던 모차르트가 매번 가는 곳마다 오케스트라를 갈아 뒤엎고 하프시코드까지 새로 두드려 맞추지 않은 이상 예민한 상대음감이었을 수 있다.

4. 죽음을 둘러싼 의혹

4.1. 모차르트의 죽음

명성은 나름대로 있었지만 35세 나이로 급서한다. 40을 못 넘기고 죽었기 때문에 '천재는 단명한다'라는 이미지에도 영향을 준 인물. 뭐 당시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모차르트는 살만큼 산 편으로 일단 영유아의 사망까지 합친 평균은 넘었다. 그러나 일단 살아서 청년기를 맞이한 사람치고 단명한 것은 맞으므로 전체 평균에 대입시키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모차르트는 병에 걸린 지 15일 만에 사망했는데, 주치의는 모차르트가 죽을 당시의 상태만 가볍게 기록하고 부검은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은 미스테리로 남고, 추측만 무성했다. 사인은 '열과 발진, 사지통(四肢痛)'.

4.2. 살리에리의 독살설

그 가운데에선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아직까지도 진실이라고 오해를 많이 받는 주장이 엄청나다. 한국이나 여러 나라에서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1984) 덕분에 그렇게 알려졌다고 아는 이들도 보이는데, 이 이야기는 살리에리가 살아있을 때조차도 거론되던 소문이다. 정작 그 영화와 그 영화의 원작이 되는 희곡에서는 독살은커녕 시도도 없으며, 그냥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심적 압박을 가해 죽게 만든 것으로 묘사된다. 오히려 독살이 나오는 극은 푸시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다.

1823년 11월, 베토벤의 제자인 이그나츠 모셀레스[16]는 당시 노환으로 투병중이던 살리에리를 만나 그 소문에 대한 진실까지 질문했을 정도였다. 당시 일제포르슈타트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살리에리는 처음에 면회를 거부했으나, 여러 번 설득한 끝에 그를 겨우 만날 수 있었던 모셀레스는 의사와 살리에리의 딸 요청으로 그를 흥분시키지 말라는 요구대로 부드럽게 말을 하면서 답변을 듣었다고 한다.

모차르트를 죽도록 싫어한 건 사실이지만 그가 죽는데 난 털끝만큼도 그 어디에도 끼어들지 못했다. 나에게 그런 오명은 반갑지 않다...

모셀레스는 베토벤에게 이걸 이야기했는데, 비서인 안톤 쉰들러[17]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어도 그를 미워하고 말이라는 칼로 그를 상처낸 범인에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말했었다. 이에 모차르트, 살리에리 모두에게 음악 교육을 받은 바 있던 베토벤은 나로선 누가 범인이니 뭐니 구분할 생각이 없거니와, 살리에리를 믿는다고 의견을 밝히며 그 소문을 못미더워했다. 또한 영화처럼 살리에리는 잊혀졌던 것도 아니다. 비록 지금은 모차르트에 견주면 묻혀진 이름이지만, 당시 75살이라는 엄청난 장수와 같이 늘그막까진 꽤 음악가로 인정받고 편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영화 덕에 늘그막을 아주 비참하게 죽은 걸로 아는 이들도 많다. 모차르트의 아들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이 바로 살리에리에게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세월이 지나 러시아 음악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Mozart et Salieri)》(1898)에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인 것으로 설정하고,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1979)가 영화화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이렇게 더 알려지게 된 것.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를 지독하게 괴롭히기만 할 뿐이지, 독약으로 직접 살해는 안한다. 그리고 정말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질투해서 살해하려했다면 정말 앞뒤가 안맞는게 그런 이유에서라면 먼저 하이든부터 제거했어야했다.

4.3. 죽음의 원인에 대한 현대의학적 관점

2001년 전염병 전문가 Jan V Hirschmann, MD가 Archives of Internal Medicine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돼지를 통해 감염되는 기생충인 선모충증이 모차르트의 사망원인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돼지고기를 날로 먹거나 덜 익혀 먹었을 경우 걸리며, 고열이 나고 근육통을 일으키며 쇠약해지는 지금도 적합한 치료법이 없는 무서운 질병이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바로 돼지고기를 매우 좋아했다.

어찌나 돼지고기를 좋아했던지 아내 콘스탄체에게 돼지고기를 찬양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사랑하는 아내 콘스탄체에게
내가 지금 무슨 냄새를 맡고 있는지 알겠소?
바로 포크커틀릿이지. 어찌나 맛이 좋은지!
나는 당신의 건강을 축원하며 먹는다오.

모차르트가 병에 걸리기 44일 전에 보낸 편지. 그런데 선모충증의 잠복기는 약 50일이다(…). 포크커틀릿은 튀겨서 먹는다. 선모충도 잘 튀겨서...

비록 선모충증 이론이 모차르트의 증세를 설명할 수 있지만, 증언들을 토대로 병의 진행 과정을 고려해 볼 때, 특히 선모충 감염의 최종 단계인 호흡곤란에 의한 사망의 흔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 모차르트의 사망원인은 오랜시간 관심을 끌고 온갖 설이 난무하는 주제로, Faith T Fitzgerald, MD는 Mozart의 사망원인에 대해 감별진단(differential diagnosis)하여 논문도 발표했다. 위의 BBC 기사에서 Dr. Fitzgerald는 선모충증 이론이 '150개의 가설더미 위에 그냥 하나 더 얹은 것 뿐'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했다. 그의 진단은 "acute theumatic fever, with carditis, polyarthritis, erythema marginatum, and possibly, chorea"(...)라고 한다.

모차르트의 가계에서 어떤 단명에 관한 유전적 요인을 찾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은 모차르트의 누나인 마리아 안나, 아버지 레오폴트가 전부 환갑을 넘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필요 없는 작업이었다.

모차르트 학자간에서 이견이 그나마 없는 죽음의 원인으로는 모차르트 그 자신이 몸을 막 다루었다는 사실이 있다. 모차르트는 주스가 되었든 물이 되었든 술이 되었든 과음하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결정타는 마지막 해 1791년, 오페라를 두 곡을 동시에 작곡하면서 레퀴엠까지 떠안은 결과 나타난 과로였다.

모차르트 부검 결과에는 '속립진열'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어떠한 병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의 여동생이 전하는 기록이다. 그녀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고열에 시달리면서 끊임없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크게 기침을 하더니 검은 밤색 액체를 뿜은 뒤 쓰러졌다.

이것과는 별개로, 모차르트의 사인에 큰 요소를 차지한것은 불규칙한 생활습관과 말년의 과로로 인한 면역력 약화가 사망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는걸로 굳어져가고 있다.

4.4. 그의 장례식

명성과는 달리 장례식에는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친척들을 포함한 일부만이 참석했는데, 눈보라가 치는 기상여건속에서 모두 빨리 돌아가 버리고 매장자 홀로 묘지로 향했다는 섬뜩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유해는 빈 외곽에 위치한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지금까지도 묘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빈의 많은 시민들이 참석했던 베토벤의 장례를 생각하면 엄청난 차이다.

그런데 이런 모차르트의 장례는 원래 당시 빈 중산층의 장례가 그랬던 것을 생각할 때 결코 초라하거나 막 치러진 게 아니다. 시신이 그냥 아무렇게나 버려진 게 아니다. 다만 매장지까지 아무도 동행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규칙에 따라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모르는 데다 사후 묘지 관리도 좋지 않아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모차르트가 모셨던 황제 요제프 2세는 전염병에 따른 피해를 막고자 전염병으로 죽었거나 죽었다고 의심되는 환자의 사체는 반드시 개인매장이 아닌 공동묘지에 묻히게 되어있었다. 물론 높으신 분들이 반대함에 따라 개인매장을 허하게 되는 방향으로 가닥이 나중에 잡혔지만, 그 때 티푸스 의심 환자로 보였던 모차르트는 그런 거 없었다.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서 모차르트는 열두 구 가량을 공동 매장하는 곳에 묻혔고,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 한해선 영화 아마데우스의 묘사대로다. 하지만 이건 아내가 무슨 돈을 엉뚱한 데 쓰고 다니느라 돈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고, 단지 그때 법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 뒤로 그가 유명해지자 뒤늦게 DNA 분석까지 해 가는 등 엄청난 노력을 들여 시신을 찾고 있으나, 아직까지 전혀 진전이 없다. 남아있는 건 적갈색인 그의 머리카락 일부분 뿐(…). 이걸 두고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5. 트리비아

35년이나 살았던 그의 생전 별로 관심을 주지 않았던 잘츠부르크는 그가 죽은 후 모차르트의 고향이란 이름으로 매년 막대한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일명 모차르트가 먹여살리는 도시. 모차르트가 그 쬐끄만 도시 하나 벗어나려고 몇 년 씩이나 발버둥 쳤다는 점을 고려하면 참 아이러니한 점이다. 국제 모차르트 재단의 본부도 있고, 음악대학의 이름은 아예 라틴어로 모차르테움(Mozarteum)이라고 지었다.

동계 올림픽 유치에서도 떨어졌지만 캐치프라이즈는 '모차르트의 고향'이었다. 이 잘츠부르크에는 모차르트에 관련된 기념품 이것저것이 많은데 특히 모차르트 초콜릿 혹은 모차르트봉봉이라고 불리는 모차르트쿠겔이 유명하다. 1890년 파울 퓌르스트(Paul Fürst)라는 사람이 개발한 초콜릿으로, 오리지널 모차르트쿠겔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가내수공업으로 하나하나 만들어지며 미라벨이나 레버 등 다른 브랜드에서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도 있다. 물론 오리지널은 잘츠부르크 현지에서만 살 수 있고 국내에서 많이 보이는 모차르트 얼굴 찍힌 초콜릿은 다 미라벨 같은 데에서 만든 유사품이다.

한편 독일 남부의 로텐부르크에서도 해마다 음악회가 벌어지는데 이곳은 모차르트와 인연이 딱 하나 밖에 없다. 모차르트의 여행 도중 마차의 말을 갈아타기 위해 커피 딱 한 잔을 마시고 떠났다는 것.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건가…. 그런 거 없다. 그저 마케팅일 뿐

독일 남서부 만하임에 있는 예수회 성당에는 모차르트가 이 도시에 며칠 거주하는 동안 미사를 드렸다는 표지석이 붙어 있다. 유명한 사람은 그냥 앉았다 일어서기만 해도 그 자리가 유적지가 된다

1991년, 그의 사망 200주기를 기념하여 전세계적인 모차르트 열풍이 불어닥쳤다. 우리나라에선 남양유업의 꼬모란 유산균 요구르트 광고에 모차르트의 초상이 미소짓는 걸 CG로 입히며,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를 연기했던 배한성의 '모차르트도 넘어간 맛'이라는 나레이션까지 삽입된 광고까지 나왔었다.

7. 모차르트 작품 연주

비교적 간단한 노트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의 곡은 난이도 있기로 유명하다. 한 음도 헛되이 연주할 수 없기 때문. 모차르트 곡은 한 음 틀리면 티가 확 난다. 기계적으로까지 들릴 수 있는 음악을 감정을 살려서 연주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쇼팽 에튀드를 암보하는 음대 입시준비생에게 모차르트의 소품을 들이밀었더니 욕을 먹었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 믿거나 말거나가 문제가 아니다. 전공하는 입장에서 진짜 지옥같다 음악계의 피카소

모차르트의 음악을 백조에 비유한 이들도 있다. 잔잔한 호수에 미끄러지듯이 수영하는 백조의 다리는 쉴틈없이 바둥바둥거리고 있다나? 이런 표현을 돌직구로 느끼고자 한다면 그 간단하다던 반짝반짝 작은별 변주곡을 들어보면 되겠다.

피아노를 조금 쳐 본 사람은 알겠지만, 모차르트의 곡들은 옥타브가 많다거나 하지 않다. 손이 작아도 무리없이 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거장 음악가 중 한 명이다.[18]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의 악곡들이 연주하기 힘든 것은 트릴과 어마어마한 노트들 때문.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모차르트는 피아노를 연주할 때 항상 즐겁고 가볍게, 신나게 연주하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모차르트의 악곡들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그런 느낌이 필요하다. 마치 날아가듯이 연주해야 듣는 사람이 모차르트 곡의 진가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마냥 가볍고 빠르게 치다 보면 음이 모조리 빠지고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 모차르트의 악곡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느낌을 살려 제대로 치기 위해서는 수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건반을 둥글게, 정확히 누르는 타건법, 그리고 손가락과 손목에 무리한 힘을 싣지 않고 자유자재로 치는 법, 악보에 표현된 이음줄과 붙임줄(의외로 모차르트 악곡은 이 이음줄 표현이 정말 중요하다. 이음줄 하나는 곡의 느낌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친다.)을 정확히 구사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모차르트 악곡은 거의 페달을 쓰지 않기 때문에 베토벤 이후의 악곡에서 느껴지는 페달을 사용한 장엄함은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이음줄 등의 악상 기호를 정확히 표현해야만 느낌을 살릴 수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수많은 연습과 훈련 위에 통통 튀는 느낌으로 연주하는 것이 모차르트 악곡 표현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다.

모차르트는 즉흥 연주를 많이 했다. 출판된 악보에 간단하게 표현된 노트는 그냥 기본적 멜로디를 표기한 것일 뿐, 본인이 연주할 때는 그것을 바탕으로 즉흥적으로 덧붙여서 야단법석일 정도로 화려한 애드리브를 펼쳤다고.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사람이 스승의 연주를 들리는 대로 적어놓은 종이 조각이 전해지는데, 음표가 엄청나게 많다. 불꽃 같은 애드리브를 시전한 모차르트나, 그걸 또 받아적은 제자나... 또한 모차르트의 악보는 고쳐쓴 흔적이 거의 없다. 한 마디로 머리 속에 있는걸 그대로 옮겼다는 뜻이다. 외계인 그래서 그 많은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는지도.

대중적이면서도 기억에 오래남는 선명한 멜로디를 기반으로 작곡한 곡에 조바뀜이 계속 일어나는 실험적인 시도도 많이 하는 등 청자에게는 굉장히 감정적이면서도 연주자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가교를 요하고, 생전 즉흥연주를 좋아 했다는 점이나 짧은 생애를 살았으면서도 당대 음악의 패러다임을 뒤바꾼 것이나 괴짜 기질도 포함해서 연주자의 면모는 지미 헨드릭스, 작곡가의 면모는 폴 매카트니, 퀸의 프레디 머큐리와 비슷한 점이 많다. 브라이언 윌슨은 오른쪽 귀가 안들리는 것,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강압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보면 오히려 베토벤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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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백발 가발은 당시 정장의 일부였다.
  • [2] 장난감 교향곡의 작곡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결국 원작자는 베네딕토신부이자 작곡가인 에트문트 앙게러(Edmund Angerer, 1740~1794)임이 밝혀졌다.
  • [3] 통칭 페르틀(Pertl).
  • [4] 앙투아네트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는 어린 모차르트의 당돌하고 조숙한 귀여움을 보여주는 일화로 유명하지만, 당대 유럽 사회의 사회상을 생각해 보면 99% 이루어질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절대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설령 마리아 테레지아가 큰 뒤에 보자고 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해도, 어린애의 귀여운 짓에 장단이나 맞춰준 것이지 진지하게 생각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당시 유럽의 귀천상혼 관습에 따르면 지배가문의 자식은 다른 귀족도 안 되고, 오직 다른 지배가문의 자식과 결혼해야 했다. 그런데, 지배가문은 커녕 봉신 영주나 가신도 아닌 평민 남성과 공주의 결혼이라는 건... 일단 교황의 특허장부터 받아와야 할 테고, 다른 국가들의 외교적, 정치적 조롱을 감당해야 하며, 왕가의 공주가 격이 맞지 않는 결혼을 했다는 데 대한 국내 귀족들의 격렬한 반발(심하면 반란)까지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된다.(...) 현대의 경우에 이런저런 차별이 실존한다 해도 일단은 '모든 인간의 평등'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여지는 것과는 달리, 근세 유럽에서는 격에 맞지 않는 결혼(귀천상혼)은 아예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여겨졌음을 명심하자.
  • [5] 만약 진짜로 혼사가 이뤄졌어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수명만 늘려줬을 가능성밖에 없었을 것이다.
  • [6] 똑같은 논리면 전투력 강화에 집착하고 부하들의 군율위반엔 웬만해서는 참형으로 대처했던 이순신 장군한테마저 아스퍼거 증후군 설을 뒤집어씌울 수 있다.
  • [7] 남편의 성을 따 콘스탄체 모차르트라고도 한다. 모차르트 사후 덴마크의 외교관 게오르그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 1762~1826)과 재혼하여 그와 함께 남편의 전기를 남기는 등 남편의 이름을 알리는 데에 기여했다. 카를 마리아 폰 베버와는 사촌지간이다.
  • [8]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차르트의 아들이 이 사람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탈리아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하다 중도 포기하고 공무원으로 살며 아버지의 명성을 살리는 데에 기여했다. 생몰년도를 보다시피 장수하셨다.
  • [9]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세라고도 하며 음악가 및 음악 교사로 일했다. 다만 아버지가 죽기 4달 전에 태어났으니 아버지 기억이 일절 없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등에 업고도 낭만파 세태를 따르지 못했다.
  • [10] ORIGINALS로도 나온 적이 있는 리히테르의 연주가 들어갔다.
  • [11] 1762-1842. 장수해서 사진의 발명이 이뤄질 때까지 살아남았다. 모차르트는 초상화의 시대에서 살았지만... 위의 사진은 1840년에 촬영된 것.
  • [12] 그러나 그것은 그 시대상에서 유행하는 것이였다.
  • [13] 원래 레퀴엠 오리지널 악보는 미완성이다.
  • [14] 참고문서 링크
  • [15] 이게 평균율에서처럼 f2과 f1가 반음 차이라면 f2/f1=2^(1/12)인 관계가 아닐 수도 있다.
  • [16] Ignaz Moscheles,1794~1870. 그도 음악가로 살아있을 때 꽤 인정받긴 했지만 지금은 듣보잡이 되어버렸다.
  • [17] 1795~1864. 제자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비서이다. 그도 음악가이긴 했지만. 베토벤 연구가인 레이너드 솔로몬이나 막시밀리안 타이어는 쉰들러를 베토벤이 왜곡되도록 연구를 가로막은 악당이라고 비난했다. 자세한 건 루트비히 판 베토벤 참고.
  • [18] 베토벤, 쇼팽, 나아가 리스트를 치다 보면 손이 작은 연주가들은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