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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전투

last modified: 2015-03-31 22:53:44 Contributors

Contents

1. 내용
2. 참고항목


1. 내용



동아일보의 보천보 전투 대서특필 호외보도(1937년 6월 5일) 2002년 동아일보는 이 기사를 황금판으로 만들어서 김정일에게 바쳤다.(...)

1937년에 김일성과 휘하 170여 명의 부대원들이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 주재소를 공격한 사건.

1937년은 일제가 상당히 기세를 높이고 있던 시기로, 독립군 내에 조금씩 비관주의가 감돌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후에 6.25 전쟁의 발발 과정에서도 드러난 바 있지만 김일성은 상당히 저돌적인 성격이었고, 팽배해 가는 비관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했던 보천보 주재소를 공격했다.

김일성 휘하의 인민혁명군 90여명과 내응한 국내의 조국광복회원 80여명등 170여 독립군이 동원되었으며, 주재소에 있던 일본인 경찰은 셋, 조선인 보조원이 둘.

휘하 170여명의 부대원들의 맹공이 실시되었으나 다섯 모두 무사히 도망치는데 성공, 결국 멋모르던 주재소의 민간인 요리사 한명을 사살하고 주재소의 주재원 다섯의 무장(소총 다섯정, 총탄 수백발)을 탈취하는 대전과(...)를 올린다. 실제로는 목적 자체가 선전에 있었던 만큼 전술면에서 큰 성과는 없었으며, 보천보 점령 후 토벌군이 본격적으로 오기 전에 허둥지둥 보천보를 빠져나갔으나,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다음날, 경찰대가 추격하던 중에 교전으로 일본측 사망자 7명 부상자 14명) 전투는 일제의 지배력이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 독립군과 국내의 패배주의를 일소하는 것에는 공을 세웠다.[1]

35년의 일제 지배하에서 조선 땅 중 유일하게 독립군에 의해 '해방'이 된 경우이기에 상징성도 꽤 컸는데, 당시 전국에 김일성 전설이 만들어지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 대대적으로 대서특필 하여 호외 기사를 내보내서 김일성은 조선 전역에서 유명해졌고, 중도파 여운형공산주의 노선과는 척을 졌던 김구도 이 사건에 주목했을 정도.

김일성 가짜설이 발생한 것에는 '이런 전설적 공로를 세운 사람이 이렇게 젊을 리 없다!' 정도이니 보천보 전투가 얼마나 당시에 명성과 전설을 가져왔는지 알만하다.

한 예로 일제강점 말기에 조언비어(造言飛語) 유포죄로 잡혀 들어온 사람의 약 80%가 김일성 얘기 했다가 잡혀왔다는 통계가 있다. 이 명성 때문인지 해방 직후 남한한정 여론조사에서 군사부장관 1순위는 늘 김일성이었다.[2] 실제로 일제와 전투를 벌였다고 알려진 유명인사 중에서 이 시기까지 살아있는 사람이 김일성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던 것도 있다. 김좌진은 1930년에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했고, 홍범도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된 후 소식이 끊겼다(1943년 노환으로 사망). 광복군에서 활약한 지청천이나 철기 이범석은 활약이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다. 청산리 전투 때는 김좌진 휘하 부하 B 정도 이미지였고.

다만 이후 일제의 만주 지역에 대한 압박이 극에 달해, 결국 독립군 세력 일부가 소련 연해주로 빠져나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스탈린의 강제 이주 계획 때문에...

현재 북한이나 일부 NL 계열에서는 김일성 우상화 차원에서 이 전투를 그야말로 신화로 포장하고 있다(솔방울로 수류탄 만들고 가랑잎 타고 두만강을 건너고 웃통을 벗고 모래밭을 구르니 모래가 쌀이 되었다는 전투가 이것. 진짜로 이러면 이미 사람이 아니라 NINJA잖아. 축지법까지 쓰니 딱이다.

2. 참고항목

  • 삼봉전투
  • 련극동군88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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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어차피 게릴라전 자체도 정규부대와 붙어서 상대를 섬멸시키는것이 아닌, 지겨울 정도로 적을 괴롭혀서 교란시키고 시설을 공격하는게 주 목표다. 그런 의미에서는 보천보 전투는 성공적이었다.
  • [2] 단순히 남한만 아니라 북한까지 더했으면 더 했을 것이다. 지도자 순위에도 올랐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