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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학살사건

last modified: 2015-04-01 16:40:06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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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보도연맹이란 어떤 조직이고 어떤단체인가?
3. 일부 보도연맹원들의 인민군 부역행위
4. 보도연맹원 대량 학살
5. 사건 진상 조사
5.1. 제2공화국 정부의 진상조사 노력과 좌절
5.2. 2000년대 진실화해위의 진상규명
5.3. 노무현 전 대통령 사과영상
6. 관련 작품/같이 보기


1. 개요



한국전쟁 중 벌어진 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과 더불어 한국전쟁 최악의흑역사로 꼽힌다.

참여정부 시절때, 노무현이 보도연맹에 희생된 유가족들에게 사죄를 하였다. 이때문에 수꼴세력들은 노무현을 '배신자'라고 개드립을 쳤다

박정희 정권에서 은폐시키고 금기시했었다. 이 끔찍한 사건에 대해 아는 이들은 실제로는 극히 적다. 1960년대에 진상조사 시도가 있긴 했는데, 5.16으로 묻혀버렸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 '과거사 진상 규명'등 활동하면서 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당대 많은 작가들의 한국전 회고담이나 소설에도 '어떤 단체'내지는 'B연맹'정도로 표시되기도 한다.

2. 보도연맹이란 어떤 조직이고 어떤단체인가?

국민보도연맹(정식 명칭은 국민보호선도연맹)은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 과거 좌익에 몸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이다.

대화숙을 모방해서 이런걸 만들자고 한 사람은 오제도이고 그의 아이디어로 임의로 설치된 단체이다.[1]

국민보도연맹은 실제 남로당 세력을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공무원들의 건수올리기 실적주의 때문에 가입에 강제수단이 포함되어 있었고 경미한 단순 동조자나 진짜 좌익 경력자가 아닌 사람들이 있었던 게 문제였다.

여기에 문학가,예술가들도 보도연맹에 반강제적으로 가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주동,황순원,정지용등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1949년 무렵에 접어들면서 보도연맹에 반강제적으로 가입된 사람들 가운데는 심지어 우파계열인 한국독립당계열 성향과 가까운 사람까지 있었다.(ex:정지용)

현대의 수구세력들은 '보도연맹 가입자들 대부분이 위장 전향한 공산주의자일 뿐이며, 무고한 양민이 가입한것은 근거가 없는 소리!'라면서 '보도연맹 학살은 당연히 죽여야 할 새끼들 죽인거니 잘한거!'라고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애초에 당시 신문을 보면 지식인과 일반인들의 전향 선언서가 광고면을 뒤덮었다. 박명림이 지적한데로 남한이 이념적으로 취약했거나 아니면 억울한 전향자가 많았거나의 둘중 하나이다.

10대인 중ㆍ고교생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것이 밝혀짐에 따라 보도연맹 가입은 '공무원들의 실적주의'와 '반 강제적 가입'으로 인해 생겨난 경우가 있음이 밝혀졌다.#

심지어 이장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도장을 걷어서다가 보도연맹 가입 문서에 한꺼번에 도장을 찍기도 했다.

국민보도연맹원 가입은 지역마다 경찰서별로 할당된 숫자를 채우기 위해 무리해 가입시킨 경우도 많았는데, 일단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소집되어 기합이나 체벌을 받아가며 반공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이들 전부다 남로당원 출신으로 전향자라고 생각할수도 있을텐데, 실제로는 남로당원과는 전혀 무관한 양민들이 과반수였다. 예를 들어서 김원봉의 가족처럼 공산당원의 주요인사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반강제로 가입한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공산당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우익 청년단 단원이 경찰이 마을 당산나무를 베어 파는 것을 막았다가 미움을 사 보도연맹 학살 와중에 잡혀가서 살해당한 일도 있었다.

여기서 재밌는건 전후 남한에서 꽤 유명한 인사들도 보도연맹에 들어있었다. 코주부 삼국지로 유명한 일러스트가 김용환 선생이나 '삼대'의 작가 염상섭, '카인의 후예'의 작가 황순원도 보도연맹원으로서 활약한다. 그들은 전후 남한에서도 대단한 지위에 오른다. 보도연맹에 소속되었다가 북에 생포돼서 재전향한 정현웅이나 이쾌대는 월북후 북한 예술계의 거두가 된다.

그런데 보도연맹이 효과를 발휘하여 남로당의 세가 확연히 축소되는 것으로 보이는 시점에서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이들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이 우려는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의 성격 때문이었다.

3. 일부 보도연맹원들의 인민군 부역행위

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보도연맹은 본래 공산당으로부터 전향한 조직이므로, 명백한 배신자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북한이 남한을 점령할 경우 이들의 배신행위에 대한 처벌이 있으리라는 예상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전쟁이 터진 후 말 그대로 순식간에 서울이 함락당했을 당시 서울의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북한군의 배신자에 대한 처벌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앞장서서 인민재판과 남한 정부인사 및 군경 패잔병 색출에 나섰다.

대표적인 인물이 . 정백은 공산당 최고참격 간부 출신으로 보도연맹 명예간사장을 맡았던 핵심간부였다. 그러나, 정백 역시 북한에 의해 인민재판으로 처형당한다. 이를 근거로 오늘날 수꼴들은 '보도연맹은 두말할거없이 위장으로 가입한 좌빨들, 다 때려 죽일수밖에없다'고 변명한다.

그리고, 이 보도연맹 입안 추진자였던 당시 사상검사 오제도氏는 '보도연맹 학살은 정부의 커다란 과오'라고 시인까지 했고, '이제라도 보도연맹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치뤄줘야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하나 단지 적에게 협력할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것은 국제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잔혹 행위임에 분명하다.

4. 보도연맹원 대량 학살

수도 서울을 버리고 부산으로 도망간 이승만 대통령은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행위 등 협조한다.'는 보고를 받는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는 "그 빨갱이 놈들은 역시 배신자였어!!!"를 외치며 아직 확보하고 있는 남부 지방에서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크리를 벌이게 되는데, 여기서 가장 주동적으로 활동한 인물이 김창룡이다. 이승만이 CIC 특무 헌병대장 김창룡에게 지시하여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지않은 지역'에 있는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 사진들은 전부 다 한 미군 소령이 촬영한 사진이다. 보도연맹에 관한 사진은 거의 이 미군 소령이 찍은 사진들이 유일하다.)

첫번째 학살 지역은 이천이었다.

전시나 특수상황에 민간인에 대한 살상은 그것이 법적으로 정당성을 부여받아도 사회문제가 된다. 베트남이나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이 대표적인 예이고 한국전쟁만 해도 즉결처분은 엄연히 군대 내에서 법적인 명령을 받고 행해졌음에도 전후 사회문제가 되었다. 보도연맹 살해는 사실상 그런 법적인 처형 명령도 없이 벌어진 일로서 국가 차원의 사과가 필요한 사항이다.

북진 중에 발생한 보복성 학살에도 보도연맹원들이 대량으로 희생되긴 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학살은 보도연맹원을 잡기보다는 적극적인 부역자를 색출, 처단해야 한다는 주장에 근거해서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 보도연맹원이 포함되었을 뿐이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보도연맹원은 일단 죽이고 보자는, 확실하게 정의 가능한 어떤 집단에 대한 학살이지만, 그 구체적인 명령체계가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정부는 이들을 학살한 것에 대해 빨갱이들이라고 얼버무렸으나, 일부에선 상부에서 내려온 일명 빨갱이 퇴치 퀘스트 숫자를 무슨 수단으로든 채우고 보고해 상부의 포상을 노리거나 재산 몰수를 위해서 살상하기도 했기 때문에 무차별적인 학살이 벌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최후방이었던 영호남의 보도연맹 학살[2] 이승만 친위대인 육군특무대(CIC)는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학살할 때 산 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했다고 한다.[3] ## 실제로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한창 진행되었을때, 경남 마산, 진해 일대에서 총으로 학살한 다음 학살당한 이들 손과 발을 묶어서 바다에다가 수장시켰던일이 비일비재했다.]


1950년 10월 12일자, 일본 대마신문(對馬新聞)

위의 보도를 토대로 보도연맹원들은 남해안 바다에 수장되어 일본 대마도 방면으로 밀려왔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이들을 위한 합장묘소도 일본에 안장 돼있음이 확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자모 가운데 부패한 시체 타살인가? 어선이 건져

야마구치현 고시가하마의 선장 스에다케 토라마쓰氏 소유인 마에마루(7명승선)가 9일 오후 4시께 츠츠무라 아자모와 고토의 중간에 위치한 아자모 서쪽 근해 35마일 부근에서 주낙 조업 중 해상에 표류중인 시체를 발견하여 어선에 올려, 10일 이즈하라에 입항하여 이즈하라마치 경찰서에 신고했다. 검시에 의하면 죽은지 1개월이 경과한 흉부와 복부에 걸쳐 부패하고, 인상은 판별하기 어렵지만, 신장 5척 5촌이고, 연령 추정은 30~40대 남자로 흉부를 굵은 새끼줄로 묶여 있었으며 양손에도 같은 흔적이 있었으므로 타살이 아닌가 하는 이즈하라 경찰서는 보고 있다.

비단 보도연맹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광기는 현대시대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하여 그야말로 닦치는데로 학살 하였다. 예를들어 남부지방에서 일어났던 일인데 우익단체에서 반은 인민군복을 입고 반은 묶인채로 한 마을에 북치면서 나타났다. 그러자 마을사람들은 김일성 만세를 외치면서 나타났는데 죄다 학살 크리. 혹은 또한 남은사람을 끌어내어 김일성 만세라고 외치라고 강요한다. 강압에 못 이겨 김일성 만세라고 하면 즉시 처형. 결국 목에 총이 들어와도 이승만 만세!라고 외쳐야 하는데 그게 말이 되나? 잘 이해가 안간다면 이글을 읽는 위키러 들이여. 인민군이 떼로 나타나서 그대에게 총을 겨누고 김일성 만세라고 외치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순간의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김일성 만세라고 외쳤는데 알고보니 서북청년당원들이었다면. 덜덜덜...)

한 소설에는 야간에 군인들이 나타나서 총을 겨누며 이승만 지지자인가? 아니면 김일성 지지자인가? 하고 물어보는 장면이 나온다. r군인들이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야간이라 잘 보이지도 않고 위에서 나온 일화처럼 인민군 복장을 갖추고 나타난 피에 굶주린 우익단체 들일수가 있으니 그저 세금 제때 내고 위에서 시키는데로 한 민초라고 말하며 덜덜 떨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과거사 규명 차원에서 몇 년간 발굴하고 있지만 무수히 많은 유골들이 아직도 발굴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의 민간인 학살이 국제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심지어 미국까지 민간인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자 그제서야 이승만이 보도연맹 학살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지금도 얼마나,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배우 이은주가 연기한 영신이 보리쌀 한 됫박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결국 한국전쟁 통에 배우 김수로가 연기한 반공청년단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다만 1.4 후퇴 직후의 서울에서 학살된 것으로 나와서 약간 부자연 스럽다.

5. 사건 진상 조사

5.1. 제2공화국 정부의 진상조사 노력과 좌절

4.19 혁명 직후 전국에서 보도연맹 학살 당한 희생자 유족들의 분노 여론이 들끓어오르자, 대한민국 제4대 국회(제2공화국)에서는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여 가장 많이 학살당한 지역인 경상남도경상북도등 학살현장을 돌며 실태조사를 벌였고, 정부에 진상조사와 피해배상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했다. 또 각 지역에서 합동위령제가 올려지자, 장면 총리는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조화와 부조금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듬해 터진 1961년 5.16 쿠데타는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고 말았다. 쿠데타 군부세력은 '소급법'을 만들어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의 혈육의 유골을 수습한 유족들을 '빨갱이'로 몰았고, '혁명재판'이라는 이름하에 유족들의 목소리를 묵살했다. 이후 군사독재정권은 유족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규정하여 항시 감시하고 이들 유족들을 연좌제를 적용해 오랫동안 유족들을 옥죄었다. 또 학살과 관련한 정부기록을 모두 소각해버려 진상을 철저히 은폐해버려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 '보도연맹'이라는 존재는 철저하게 금기시해버렸다.

5.2. 2000년대 진실화해위의 진상규명

결국 군사정권이 6월 항쟁으로 종결된 후인 1990년대 들어서 이 사건은 다시 밝혀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민간단체에 의한 유해발굴 정도였지만, 국가 주도가 된 것은 2007년 5월부터였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생겼다. 이들은 2007년 5월부터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충북 청원군에서 110여명의 민간인 유해들이 발굴되었다. 이 가운데 10대 청소년으로 추정되는 유해들도 발굴되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3년간 조사결과 확인된 것만 들어도 민간인 4934명이 군경에 의해 처형당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2000년 즈음에 방송된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사망자 수는 가히 충공깽 수준. [4]

또한 2006년 12월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려고 전국 154곳의 지표조사와 유해 발굴 가능성 조사 등을 실시해 59곳의 매장 추정지에서 유해 발굴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역별로 보면 경기·인천 21곳, 강원 1곳, 충북 19곳, 충남 9곳, 경북 28곳, 경남 41곳, 전남 27곳, 전북 6곳, 제주 2곳 등이었으며, 진실화해위는 2010년 14곳의 매장 추정지를 추가해 모두 168곳에 민간인 학살자들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사료 조사, 주민 증언 등을 종합해 우선 발굴 대상지를 39곳으로 압축했지만 실제 발굴이 이뤄진 것은 2007~2009년 경산 코발트광산, 충북 청원 분터골 등 13곳에 그쳤다. 당시 발굴을 통해 유해 1617구와 유품 5600여점을 수습했다.

2010년 12월 31일 위원회 해산을 끝으로 매장 추정지로 밝힌 168곳의 7.7%, 우선 발굴 대상지 39곳의 33%만 발굴이 이뤄진 채 모든 활동은 멈췄다.

발굴된 유해는 2007~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유해발굴단장이었던 박선주 전 교수가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에 재직했던 인연으로 충북대의 전산원 건물 2~3층을 새단장해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관'을 만들어 임시 안치되어있다.

2011년 6월 30일, 이 사건에 대한 의미있는 대법원의 결정이 나왔다. 울산 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냈는데, 등법원에서 시효가 지났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것. 그러나 대법원에서 이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는 피고(국가)가 진실을 은폐하여 원고들이 소송을 제기할 기회 자체를 박탈했기 때문에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는 법률해석이었다. # 그리고 2012년 8월 27일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왔다. #

2015년 2월에 대전에서 2차 유해발굴에 착수했다.##

20세기 한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비극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5.3. 노무현 전 대통령 사과영상

youtube(hERZRsmtRaQ)

2008년 1월 24일 울산 국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과거 국가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해 포괄적으로 사과하였다.

6. 관련 작품/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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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오제도는 사상검사로 당시 선우종원과 함께 보도연맹 입안추진자였다. 뒷날 1999년에 오제도는 '보도연맹 사건은 정부의 커다란 과오'라고 시인하고 '범국가적 차원에서 보도연맹 희생자들을 위해 위령제를 치러줘야한다.'라고 밝혔다.
  • [2] 그 가운데 부산 경우 금정구 노포동 뒷산에서 수천명이 집단학살 당하고, 부산 전역에서 1만 5천명 이상이 학살당했으며, 경북에서는 경산 지역에 코발트 광산에 약 3천 5백여명 모아두고 코발트 광산內에서 집단 학살한 뒤에 시멘트로 아예 콘크리트로 막아 철저히 사건 은폐까지 했다.#
  • [3] 경상도 말에 "골로 간다(죽는다)"는 표현이 보도연맹 학살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나 "골로 간다"는 말 자체는 전쟁 전에도 존재했다. 일설에 의하면 한양 서쪽에 "고태골"이라는 처형장이 있었던 데서 골로 간다는 말이 죽으러 간다는 뜻이 되었다.
  • [4] 제주도에서만 10만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4.3사건 당시의 피해자 수와 합쳐서 추산하더라도 불합리한 수치이며 아무 근거도 없는 조작에 불과하다. 해방 이후 제주도 인구가 30만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죽었으면 인구의 절반은 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