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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사리우스

last modified: 2015-03-02 14:11:23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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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여인에게 적선 받는 벨리사리우스, 크 루이 다비드作, 1780)[1]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 함께 묘사된 모자이크화의 일부.

Contents

1. 개요
1.1. 이력
1.2. 평가

1. 개요

505(?)년 ~ 565년. 풀네임은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

비잔티움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장대한 이상을 현실로 그려내보인 명장.
위키위키 사이트의 수호자
로마제국판 선조와 티격태격[2][3]
어쩌면 동족 혐오였을 지도 모른다. 유스타니우스도 벨사리우스도 별 볼일 없는 (...) 출신이었다. 그리고 둘다 공처가였지

1.1. 이력

13세 무렵에 일개 사병으로 입대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0년 정도만에 부대장의 지위에 오를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게다가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는데, 니케의 반란 당시 장군들과는 앙숙이라고 할 수 있던 환관들도 그를 지지했고, 527년 장군의 직위에 오르고 3년만에 동고트 전선 총사령관에 오를 정도로 황제 역시 그의 능력은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런 출중한 능력에 어울리게 수많은 전선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가 해내지 못한 유일한 임무는 당시 동로마 근해에서 날뛰는 고래를 잡는 일 정도였고, 이것도 휘하의 실수 때문으로 그의 실수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업적 중 손꼽을 만한 일은 역시 대제의 명을 받들어 로마 제국의 고토를 회복한 일이다. 그는 턱 없이 높은 이상에 비해 부실한 지원만을 해주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령을 받들어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에 1만 5천명만 데리고 상륙, 십만 대군을 이끌고 마중나온 반달족의 왕을 단숨에 격파하고 아프리카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였다.

이후에는 재차 이탈리아에 상륙하였는데 당시 지원받은 병력은 7천명으로 아프리카 상륙 당시보다도 적었다. 당시 이탈리아 지방에는 동고트 왕국의 15만 병력에 육박하는 세력이 버티고 있었음을 감안해본다면 그야말로 죽여줍쇼하고 간 정도였으나 전형적인 군인타입이었는지 군말 없이 명을 받들고 이탈리아에 상륙, 그야말로 한줌의 병력으로 연전연승하며 이탈리아의 로마까지 수복하는 성과를 거둔다. 이후 열린 휴전협상에서 로마 황제를 믿지 못한 동고트족은 벨리사리우스를 믿고 협상에 임해, 왕국 절반과 왕위를 주기로 제안했다. 물론 벨리사리우스는 왕위를 받는 하고 주동자들을 모조리 처형했지만...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질 못했다. 이미 젊어서 황제와 고토수복의 현실성을 두고 입씨름을 벌였고, 로마 정복 이후에도 통치방식을 두고 대판 싸웠다. 덕분에 의심병이 도진 황제는 단 한번도 그에게 제대로 된 병력지원을 해준 일이 없었다. 게다가 동고트 왕국과의 휴전협상에서 그가 왕위를 제안받은 사실은 결정타였다.

이탈리아 원정 종결 뒤, 벨리사리우스는 사산조 페르시아 전선에 투입되어 활약하고, 두번째 이탈리아 원정도 맡게 되었으나 그의 모반을 두려워한 황제는 거의 병력을 보내주지 않는 지경이었고, 겨우겨우 전선을 유지하던 벨리사리우스는 본인이 지친 탓도 있거니와 지원도 안해준 주제에 오랜 기간 실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비판에 지쳐서 총사령관직을 반납하고 귀국하게 된다.

이후에도 불가르족과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562년 횡령혐의를 받아 재산이 몰수되고 면직되었다. 물론 곧 혐의가 풀려 석방되었지만...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루머가 많은데, 횡령혐의를 받았을 때 황제가 올타꾸나 그의 양눈을 뽑아버려 장님이 되어 구걸로 연명하는 거지로 살다가 죽었다는 얘기도 널리 퍼졌다. 위의 그림은 이 설에 근거한 것. 하지만 실제로는 위의 일로 인해 한차례 면직되었다가 복권한 후 유스티니아누스와 같은 해 병으로 사망했다.

1.2. 평가

그가 이룬 정복적 업적만으로 봤을 때 고대 로마와 비잔티움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장군중 한 명이라고 볼수 있다. 이는 정복된 지역을 지키기 위해 떼어놓은 수비병을 제외하면 초기에는 단 1만명의 병력, 후기에는 몇천명의 병력만으로, 그것도 더 이상 아무런 지원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탈리아 반도와 크로아티아 지역,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부지역을 재탈환했기 때문일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게르마니쿠스 장군, 트라야누스, 후의 바실리우스 2세조차 이렇게 적고 부실한 병력만 가지고 후방에서 의심과 질책을 받으면서 그 정도의 영토와 적군들을 정복하진 못했다.

비잔티움 제국이 2류 제국으로 폄하당하던 시절에도 벨리사리우스만큼은 로마 제국 역사상 최강이자 고결하고 명예로운 장군으로 인정 받고 있었다.

불행한 삶을 산듯하지만 그나마 다행히도 당대에도 벨리사리우스는 고결한 명장으로 제국군만이 아니라 적군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의 부인은 당대 최고의 미인이자 황후 테오도라의 베프인 안토니나이다. 사실 벨리사리우스가 질투의 황제 유스티니아스(거의 조선선조만큼 질투가 심했다.)에게 살해당하지 않은 것은 안토니나 덕택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토니나가 바람을 피우고 테오도라가 안토니나의 뒤를 봐주면서 심적으로 심하게 시달리기도 했다.

프로코피우스의 소위 "숨겨진 역사"를 읽어보면 현대의 타블로이드 신문이 생각날 정도로 황당무계한 스캔들이 넘쳐나고 악의에 가득찬 개인적인 공격이 많은데 당대의 다른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책을 읽다보면 떠오르는 프로코피우스의 이미지는 악의와 성적 열등감에 가득찬 쪼잔한 인간이다(글재주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탈리아 공략전 당시 벨리사리우스만큼이나 뛰어난 명장 르세스도 함께 했지만 어째선지 그는 인지도가 한참 모자라다. 이 문서에 단 한차례도 언급되지 않았고 라그베다에 항목도 없다. 하지만 나르세스가 타기나에 전투나 카실리움 전투에서 보여준 전술적 안목은 벨리사리우스 못지 않았다. 하지만 나르세스는 황제가 확실하게 뒤를 밀어주었다

일단 이런 저평가를 받는 이유는 나르세스가 환관, 그것도 무늬만 환관이 아니라 권력가에서 한 힘 쓰는 대단한 환관이었던 탓도 크고, 나르세스가 투입된 시점이 이미 벨리사리우스가 적은 병력만 가지고 로마까지 수복한 후라 남의 공적에 숟가락 디밀기 식으로 투입된 문제점도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벨리사리우스보다 훨씬 풍부한 지원을 받고 싸운데다가 양자간에 협력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저평가 받는 이유 중 하나. 정말 안습인 건 벨리사리우스에 대해서는 거의 마지막 로마인 수준으로 띄워주던 시오노 나나미희대의 마초빠답게 나르세스가 대활약한 두 전투에 대해서는 연설 따위에 시간 낭비하지 않고 보물을 잔뜩 보여주어 사기를 높였다고 설명하고 끝내버린다(…). 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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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그림은 다비드의 초기 작품임에도 다비드의 걸출한 실력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젊은 작가의 미숙함이 표현되어 있다. 놀라는 로마 병사 좌 우의 바닥 각도가 잘 맞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큰 단점은 아니지만 말이다.
  • [2]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정치적 견제면에선 로마의 선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의심쟁이였다. 물론 벨리사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을 법한 위력을 가진 인물인지라 견제를 하지 않으면 그것도 문제지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이탈리아에서 벨리사리우스에게 한 짓을 생각해보면 견제의 수준이 선조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듯. (...) 저런 대우를 받으면서도 고토 회복에 성공한걸 보면 군사적인 역량이 대단하긴 대단하다고 할 수 있갰다.
  • [3] 유스타니우스에겐 선조의 원균 따위가 아닌, 문제일으킬 일 없는 환관 명장 나르세스가 있었으니 정치적 위험요소인 벨리사리우스는 가능하면 떨처내고 싶었을 것이고 나름 타당한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