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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한국군

last modified: 2018-06-30 01:32:34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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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준 금지구역 낙서가 인상적이다. 웃을 수만은 없는 게, 통신병저격수의 우선 목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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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구해내고 있는 육군 백마부대 장병들.

이 문서는 월남전/한국군, 월남파병으로도 들어올 수 있다.

Contents

1. 개요
2. 사실 그 이전에...
3. 파병 당시의 사정과 명분
4. 베트남 공화국의 반응
5. 월남 철수와 월남 패망
6. 한국군의 활약
6.1. 과장된 한국군?
6.2. 월남전 한국군 외신보도
6.3. 그 밖에
7. 각종 논란
7.1. 파월 자체의 정당성 논란
7.1.1. 명분없는 '침략' 전쟁?
7.1.1.1. '베트남 공화국'은 미국의 괴뢰 정권?
7.1.1.2. 미군과 한국군의 17도선 월경 시도?
7.1.1.3. 한국군 = 일본군 등치 시도?
7.2. 용병 논란
7.2.1. 용병이 맞다고 보는 시각
7.2.2. 용병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
7.2.3. 표현의 문제
7.3. 라이따이한 문제
7.4. 국제사회의 이미지
8. 학살 문제
8.1. 연구성과와 논란
8.2. 한국군과 남베트남군, 북베트남군, 베트콩, 근처 민병대 등과의 오인 가능성
8.3. 증언/자료 신빙성 문제
8.4. 그 밖에
9. 포로?
10. 주요 전투 기록
11. 파견 부대
12. 관련 인물
13. 창작물
14. 기타

1. 개요

베트남 전쟁은 한국과도 연관이 많은데, 당시 전투 병력이 모자라게 된 미군주한미군 제7사단을 빼내서 베트남으로 보냈고, 곧 이어 2사단마저도 빼내서 보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미군이 빠져나가 전력에 공백이 생겨 북한의 침공이 벌어질까 두려운 박정희 정부는, 미군 측에 먼저 '우리가 너네 대신 병력을 보내줄게!'라고 제안을 하게 되는데, 미국이 이를 승낙하여 우리나라도 수도사단(맹호부대), 해병 2여단(청룡부대)의 전투 병력을 보내고, 뒤이어 9사단(백마부대)을 파견한다.

미국은 단독으로 월남전을 치루기에는 국제여론이 좋지 않았기에 명목상 연합군이 형태를 취해야 했던 상황이었다.[1] 이에 미국은 미군부대를 철수시켜 월남에 투입하거나, 한국 측이 병력을 투입하는 대신 주한미군을 잔류시키거나 양자택일 중 하나인 상황이었다. 개발도상국인 한국 입장에선 60년대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북한에게 밀리는 상황이었고, 주한미군 철수는 국가안보상 엄청난 위협이었다. 군대 안보내고 국가의 존망을 걱정하는 상황 or 돈 받고 자국 군대참전+북한이 침공하려고 하면 미군의 즉시 투입(한미상호방위조약을 한국 측에게 유리한 개정)이었으니 대한민국은 후자를 택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긴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측은 미국 측에 '우리가 잘 싸우려면 너네가 돈도 잘 주고 장비를 잘 지원해 줘야 함!' 이라고 요구를 하여 군 현대화와 더불어 경제 지원을 약속받게 되는데, 이때 받은 어마어마한 물량의 장비와 자금이 대한민국 국군 장비의 현대화와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그것도 그냥 원동력 수준이 아니라, 60년대에는 공장이 없어서 군인들 전투복과 장비도 제대로 못만들고 지급 못하던[2], 고속도로 하나 없고 가발공장에서 만드는 가발이 수출 1등공신이던 한국에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대로 산업다운 산업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한국의 경이로운 경제 성장의 뒷면에서는 한국 장병의 피가 한 몫을 한 것이다.

이 당시 참전을 결의하면서 군과 정부는 물론, 국회까지 나서서 이를 악물고…반대했다. 왜냐하면 반대를 해야 미국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테니까(…). 이 과정은 "한국군 낚시전설" 같은 깔끔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눈물겨운 발악"(…)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처절해서, 정부여당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최측근인 차지철야당 의원들과 합세하여 앞장서서 반대 여론을 조성하고, "이렇게 상황이 안 좋은데 파병을 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건을 얻어내야 한다!"는 논리로 나서는 전위대로 활동할 정도[3]였다. 파병이 실행된 뒤에도 매달마다 문제를 지적할 정도로 여러 국회의원들이 열의와 성의를 다해서 베트남 전쟁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한국군의 대우는 미군은 물론이고 다른 참전 연합국에 비해서도 좋지 않았으며, 비슷한 경제사정이었던 태국군보다도 낮았다. #. 미군 측으로 참전한 다른 연합국(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군들보다 보급과 수당면에서 훨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에 나와있듯이 미군의 9대 1을 쌈싸먹는 25대 1의 사상자 교환 비율을 비롯하여 파병 한국군의 전과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2. 사실 그 이전에...

사실 '베트남전'이라고 하면 모두 북베트남 vs 미국 + 남베트남(+ 한국군 + ...)의 전황이 이루어졌던 2차 인도차이나 전쟁만을 생각하지만,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벌어진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도 한국에서 참전하려는 의사를 보였다고 한다.

1954년 1월 막 6.25 전쟁을 마친 이승만 정권은 1개 사단을 파병할 의사를 보였는데, 이는 이승만 정권에서 제시한 명분처럼 '6.25 전쟁 해외 파병에 대한 보답'뿐만 아니라 해외 파병을 통해 6.25 전쟁 이후 국군의 위상을 살리고 미국에 대한 발언권을 높이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남한에 주한미군 체제를 구축하고 대규모의 무상 지원을 하는 와중에 한국 군대를 해외 파병하도록 할 경우 여론의 반대가 일어날 것을 의식한 미국이 중단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1954년 6월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 문제가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공산권의 세력이 뚜렷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자리잡는 쪽으로 흘러가자 미국은 이승만 정권과 협의해 한국군 3개 사단의 파병을 고려했다. 하지만 식민지 문제의 당사국인 프랑스 측에서 이를 거부해 한국군의 파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4]

3. 파병 당시의 사정과 명분

다시 베트남 전쟁으로 돌아와서, 당시 미국이 단순히 전황이 안 좋아서 주한미군을 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동맹국에게 모조리 외면을 받았기에 한국을 압박해서 동맹군을 뜯어냈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주장 중에는 미국의 압박을 받은 만큼 그 당시의 한국 입장에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할 수 없이 파병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어느 정도 일리있는 이야기다. 이제는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베트남전에 투입된 병력과 전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쟁 중에 미국 행정부가 교체되면서 후임 국방장관이 확인해 본 바에 따르면, 의회 승인 안받고 유럽 주둔군 등 타 지역에 투입되어야 할 물자와 자금까지 빼다가 베트남에 쏟아부었다. 한마디로 한가하게 한국 사정 봐줄 시기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한국군 일부가 가지 않았다면, 미군이 더 많이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한 번 빠져나간 병력은 다시 돌아온 적이 거의 없다.

심지어는 그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가 자신의 정권을 미국에게 인정받기 위해 장병들을 팔아먹었다음모론도 있는데, 이 시점에서는 이미 박정희의 쿠데타가 끝나고 군인에서 물러나고 난 뒤에 대통령 국민 선거로 정식 대통령으로 부임한 이후, 민주화 운동으로 지지도에 의심이 가던 상황에서 박정희가 미국측에 먼저 파병 '제안'을 했다는 말은 있다. 1961년 11월, 5.16 직후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가 케네디를 만나 미국이 원한다면 병력을 월남에 파병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군이 월남에 파병되면 중국과 소련을 자극할 것이라 우려했고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월남전 상황이 시궁창으로 흘러가면서 케네디가 죽은 이후인 1965년 2월, 케네디를 승계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은 박정희를 미국으로 초청해 성대한 퍼레이드까지 해주면서 한국군의 전투병력을 파병해줄 것을 요청했다.[5] 린든 존슨은 1개 사단급의 병력을 우선 증파해달라고 요청하면서 댓가로 군 장비 현대화와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 이전에 베트남 공화국의 시궁창스러운 실상을 알지 못한 그 당시 국민들에게 파병에 대한 명분은 충분했다. 남베트남은 어쨌거나 냉전기에 한국과 같이 반공을 표방하던 나라였고, 또한 당시의 남베트남 정부는 한국과 국교도 제대로 맺고, 대사관도 서로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한국이 동남아에 '태극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파병한 것이 아니라, 외교관계 있는 동맹국에 원군을 보낸 것이다.

거기다 불과 10여년 전에 북한의 공격 때문에 말 그대로 헬게이트가 열릴 뻔 하다, 유엔군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 한국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남베트남 역시 마찬가지로 북베트남 공산 도당에게 핍박당하는 선량한 민주주의자로 보았다. 10여년 전에 자신들 스스로가 북한에게 당해봤으니 안 그러는게 이상한 것. 이래서 '미국이 우리를 한국전쟁때 도와줬으니 이제 우리도 미국을 도와주자', 또는 '이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를 공산주의자의 야욕으로부터 지켜주자!'라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진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생존해있던 독립운동가 겸 친일파[6] 박순천은 베트남에 가서 한국군을 칭송하면서 "이 땅이 우리땅이라면 얼마나 좋겠냐, 아니 이번 기회에 잘하면 한국이 차지할 수 있지 않느냐?" 이런 말을 하여 문제를 남겼지만 당시는 별다른 문제시되지 않았고 보수적인 정치가들도 매우 공감하는 뜻을 보였다고 한다. 민주당 창당에 이바지하던 그녀조차도 이런 말을 할 정도였으니 당시 한국에서 베트남을 어찌 여겼는지 알법하다.[7] 죄다 한국의 파병을 정당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명분은 명분이고 한국도 콩고물 먹고자 한 짓이라는 것. 실제로 미군이 쓰다버린 탄피도 한국군이 죄다 주워갔다는 미군 측 기록이 있다.

결론적으로, 미군은 베트남전 와중 한국군의 참전에도 주한미군 병력을 빼서(...) 베트남으로 파견했다.

4. 베트남 공화국의 반응

이 무렵 베트남 공화국은 아무튼 나라가 간당간당한 상황이라 한국군 참전에 대해서 공식적으로는 '환영' 일색이었다. 오죽했으면 베트남 기자들이 한국에 찾아와서 "병력 좀 더 보내줄 수 없느냐?"는 식의 질문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할 정도(…). 그리고 박정희는 베트남 기자들에게 "파병은 내가 마음대로 보내는게 아니고 국회에서 결의를 해야 한다."(…)고 답변하는 정치센스를 보여줬다.

월남의 우엔 반 티우 대통령은 1969년에 방한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상회담을 가졌으며, 시아 태평양 조약기구(APATO)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응우엔 반 티우는 박정희와 비슷한 집권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두 대통령은 공감하는 바가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5. 월남 철수와 월남 패망

한국군의 철수는 그다지 깔끔하게 끝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파리 회담에 남베트남이 배제되고 북베트남과 미군만이 참가한 것처럼, 한국 역시 외교적으로 베트남 전쟁의 종전에 개입하지 못하고 그냥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휴전 성립 뒤에 동맹에게 알리지도 않고 발뺌한다는 식으로 미국에 대한 불만이 정치계에서 터져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물주 미국이 전쟁을 그만두겠다는데 한국과 베트남 등이 단독으로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휴전에 동의하게 된다.

그리고 베트남 공화국은 멸망했다.(…)

나무나 갑작스러운 베트남의 멸망은 한국에 "월남쇼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거대한 충격과 공포를 가져다 주었다. 여러모로 베트남 공화국은 한국과 공통점이 많았으며, 고딘디엠 부패했다고 대놓고 까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많이 파병 지원을 해줬던 나라인데 너무나 허망하게 망해버렸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는 월남패망의 충격을 "정신력의 부족"이라고 주장하며 어떻게든 나라를 다잡으려고 했고 결국….

6. 한국군의 활약

당시 한국군의 대우는 미군측으로 참전한 다른 연합국(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군들보다 보급과 수당면에서 많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당시 한국군의 활약은 꽤나 인상적인 수준이었는데, 실제로 베트콩 및 북베트남 내부에서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없을 경우 절대로 한국군과 싸우지 말고 피하라'는 식의 명령을 내린 정황도 꽤 되며 동맹군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편이었다. 장비나 신체조건 상으로 보면 미군보다 활약이 떨어져야 정상인데, 도리어 정반대 결과가 나왔기 때문. 잘먹은 정예병이었겠지

한국군이 그냥 잘 싸운건 아니다. 초기 파월 병력 대부분은 각 사단에서 전투력 최우수자를 우선으로 뽑아서 파월사단 병력과 교체시키는 식으로 전투력 강화에 힘썼고 파병군 사령관인 채명신 중장은 아예 한국전쟁 당시 북한땅에서 게릴라전 부대를 지휘했던 사람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이라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해서 간데다, 공교롭게도 불교 문화나 남북이 갈라져 싸운다는 전쟁 양상도 많이 닮았다. 채명신 장군의 경험에 의해 한국군은 민심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두고 대민작전과 지원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로 인해 전투병으로서의 명성보다도 이 분야에서 더 널리 알려졌다.[8] 주로 싸운 대상인 베트콩들은 게릴라들이었고 이건 대 게릴라전의 기본 전략 중 하나다. 전공이 높은 건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한국군은 참전기간 중 대민진료 352만3,364명, 식량1만9,640톤, 의류 46만1,764점, 농기구 6,406대, 가옥 및 교실 3,319동, 교량 132개, 도로 394㎞, 태권도 보급 90만2,060명, 경로 및 어린이 잔치 6,848회, 연예 공연 2,304회 등 평정사업과 동시에 많은 대민 사업을 펼쳤다.

무기 면에서도, 원래는 뒤떨어지는 구식 무기인 M1 개런드를 들고 있던 한국군이, 채명신 장군이 미군 지휘부를 설득한 끝에 미군이 막 보급받던 M16을 약간 받아온 것을 시작으로, 몇년이 지나고 나서는 전군이 M16과 다른 미군 병기로 무장했기에 화력 면에서도 미군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사령관의 제대로 된 지휘 덕에 지구방위대 미군보다도 오히려 더 잘싸우는 이상한 결과가 나와버렸다.

주월 한국군은 게릴라 소탕, 대민지원, 영내수비등의 임무가 많았으나 사실 따지고 보면 게릴라 소탕이라고 하는게 헬기로 공중강습하고, 미군의 빵빵한(...) 화력지원에다가 포위망도 갖춘 정교하고 대대적인 작전이라는 점에다가 영내수비란 것도 따지고보면 두코 전투짜빈동 전투처럼 스케일이 크기도 하다.

또한, 본래 점령전이 아닌 베트남에서는 전장 환경(지상전 한정)상 게릴라 소탕, 대민지원, 영내수비가 주가 될 수 밖에 없는 전장이었다. 특수부대의 월경 작전도 따지고보면 정규전을 치르려는게 아니라 게릴라 활동을 차단시키려고 하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구정 공세도 게릴라전의 스케일이 남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된 것이고, 케산 전투도 영내수비가 엄청나게 큰 판으로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한국군은 베트콩 이외에도 두코 전투, 케페스 전투나 짜빈동 전투 등 월맹 정규군(북베트남군)과 여러차례 교전한 끝에 전과를 올림으로서 실제 정규군을 상대로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입증해냈다. 그 외에도 주월 한국군은 독수리 70-1호 작전, 독수리 71-1호 작전, 백호 9~12호 작전, 홍길동 작전,등 월맹 정규군과 주월 한국군이 전투를 치른 사례가 아주 풍부하다.

정리하자면, 주월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환경 속에서 충분히 자기 가치를 드러냈다고 보면 되겠다. 비록 주월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실제로 그 지원을 토대로 승전을 거두었지만 어디까지나 전투를 치르는 주체는 한국군이었다.

여하튼, '짜빈동 전투'만큼은 국군의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로, 자세한 전투 경과를 보고 싶다면 이쪽으로.

6.1. 과장된 한국군?

한국군의 베트남전에서의 무용담은 군사정권하에서 과장과 왜곡된 것이며 한국군은 무능하였고 부패했으며 잔혹했다고 한겨레신문이 주장한 바 있다.#

베트남전을 시찰한 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이 주월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니콜라스 손에게 보낸 해병대 청룡부대(2여단)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인 이 내용은

  • 대한민국 해병대는 주요 전투에서 베트콩 등 적들에 대한 주요 군사행동을 주도적으로 취하기를 꺼렸으며 미군과의 제대로 된 작전연계를 펼치지 못하였다.
  • 민간인 학살과 포로학살이 빈번하였으며 베트남 농민은 베트콩보다 한국군을 더 두려워하였다.
  • 암시장에 물건을 내다팔거나 물건을 훔치고 현지를 약탈하는등 도덕적 해이가 심각하였다.

등 한국군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려놓았다. 이에 대해 채명신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다만, 암시장에서의 부정행위는 일부 인정했다.
  • 베트남전의 성격 규정에서부터 한국군에 독자적인 작전권 행사를 허용할지 여부 등 크고 작은 문제를 두고 주월미군과 주월한국군 사이에는 심각한 의견대립이 있었다.
  • 미군이 아시아문화권을 이해하지 못하는데다 게릴라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탓에 나중에는 한국군이 채택했던 전술개념 등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었다
  • 해병대의 경우 적극적인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오히려 참전 초기 성급하게 공격에 치중한 나머지 베트콩들의 매복이나 기습공격에 다수가 사망한 사건 등을 허위보고하는 사례도 발견돼 3명 이상의 적군을 추격할 때는 사령관의 허가를 받으라는 무리한 지시를 내려야 할 정도였다

또, 이 평가는 제임스 맥이 일방적으로 생각한 해병 2여단에 대한 평가로 그것도 쿠앙남성 이남지역의 해병대에 대해서만 평가하고 있으므로 모든 한국군이 이렇다고는 할 수는 없다. 그 외의 미국 자료들은 거의 일관적으로 한국군의 군사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9][10] 채명신의 자서전에 의하면 초기의 해병대는 배트콩이 "깜온! 깜온!" 하고 도발하며 유인전술을 펼치면 왕성한 돌격정신으로 그대로 뛰어들어 적의 매복에 휘말려 피해가 컸다고 한다. 우리가 누구나 아는 해병대의 습성은 채명신의 자서전에 더 가깝지 미군 고문의 평가처럼 베트콩에게 주도적으로 공세를 꺼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여서 문제이지.

게다가 제임스 맥이 부정적 평가를 내린 해병 2여단은 짜빈동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한국 대통령 표창은 물론이고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까지 받았다.
또, 한국군의 베트남전 사상자 비율이 1:25로 미국의 1:9보다 크게 앞선다는 것 역시 미국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사상자 비율은 둘째치더라도 제임스 맥 외에 한국군의 군사적 활약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한 사람은 없고, 설사 해병 2여단이 그렇다 하더라도 베트남 전쟁에서 참전한 부대는 해병2여단만이 아니니 그게 파월 한국군 전체에 대한 평가라 할 수는 없다.

게다가 베트남에 파견된 미군 고문단이 모두 유능하고 정확한 것도 아니었다. 케네디 시절, 베트남 정세를 시찰하고 보고하라고 보낸 두 명의 저명한 고문이 있었는데... 당시 고딘 디엠의 실정과 남베트남군과 치안 상태를 보고 온 뒤 한 명은 가망이 전혀 없으니 그냥 때려치자고 했고, 나머지 한 명은 고딘 디엠은 아시아의 떠오르는 지도자고 남베트남군은 용감무쌍해서 영토 전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으니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보고했었다. 어이가 없어서 케네디가 ' 두 분, 같은 나라 보고 온 거 맞습니까?" 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물론 나중에 전쟁 나고 보니 전자가 맞았다.[11] 한마디로 고문의 성향에 따라서 판단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국공내전이 한창인 시절, 장개석의 실정을 보고도 당시 트루먼 행정부와 의회에서는 똑같은 견해차이를 보였다. 알다시피 우린 누가 옳았는지 이제는 다 알고 있지 않나... 미국 고문이라고 해도 사심은 있다. 그가 옳은지 틀린지는 100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가 옳은 말만 객관적으로 했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건 아니고 패배한 전투도 있다. 참고바람.

참전용사들에 의하면 당시 정부에서 승전보만 울리고 싶은 마음으로 승리한 전투들만 발표하고 패배하거나 피해를 입은 작전들은 제대로 안알리는 경우가 많은거 같아서 안타깝다고 전한다.

6.2. 월남전 한국군 외신보도

한국군에 대해 자세한 홈페이지
노획한 베트콩 문서에 의하면 베트콩은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도록 지시가 되어있다.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이니 비무장한 한국군인에게도 함부로 덤비지 마라. - 뉴욕타임즈, 1966년 7월 22일

월남의 모든 사람을 다 제쳐놓고 60만 한국군에게 전쟁을 맡겨 보는 것이 어떨까? 5만에 불과한 한국군은 적의 구정 공세 기간 중 전술 책임 구역 내에 침입한 적을 단 하루 만에 격퇴했다 베트콩의 항불전쟁 이래 베트콩에 장악되어 있던 중부 해안 지대가 지금은 한국군에 의하여 완전히 통합되고 있다. - 미국 에반스빌 저널, 1968년 3월

월남에 있는 미국인들은 전투에 있어서나 평정사업에 있어서나 한국군을 최고로 높이 평가한다. 사실 한국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해본 일부 미군들은 미군이 한국군의 방법(전술)을 배워도 좋으리라고 믿게 되였다. 뉴스 위크, 1967년 4월 10일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중부지역은 가장 안전한 곳이다.
한국군은 아주 특수한 전술을 가진 적과 대치하여 지역을 지키기 위해 충분히 용감한 군인이다. 또한 지방 농민과 잘 어울리고 농사일에는 모도 심어주고 우수한 군의관은 대민 진찰를 열심히 해주고 있다. - 월넘 띠엔, 반지에서. 1968년 2월 17일

한국군은 우군피해에 대해서 15:1 이라는 비율로 적을 사살했으며,프랑스와 월남이 20년간 시도하다 실패한 빈딩성의 늪지 해안으로 부터 적을 추격, 격파 시켰다.

기본적인 한국인의 특성으로 지적할 만 한 것은 불굴의 정신이다. 맹호.백마,청룡 용사들에 대하여 적이 조심하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다. 노획된 베트콩이니 북베트남군의 문서에 의하면 한국군과는 가급적 접전을 피하도록 전 병사들은 명령 받고 있는 것이다. - 사이공 포스트, 1968년 3월 20일

만일 한국군이 전 월남을 장악하였거나 미군들이 보고 이 교훈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월남전은 벌써 이겼을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96킬로나 자동차로 달려도 총격도 복병기습의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월남 지역의 그 어느 곳에서도 그와 같이 할 자는 한국군 이외는 아무도 없다. - 영국 런던 타임즈

6.3. 그 밖에

적군 시체가 아닌 무기를 통하여 공과를 확인했기에 일부에선 무기를 돈주고 사와서 적군 사살로 얻은 것으로 보고한 경우도 실제로 있었다. 그만큼 막장인 베트남에선 무기를 사는 게 어렵지 않았던 점.다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일부이며, 한국군이나 미군 헌병도 바보는 아닌지라 엄중히 조사했기에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게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개망신이라 쉬쉬하면서 처벌했다고. 김형배의 베트남전 만화에서도 이걸 다룬 바 있다.

7. 각종 논란

7.1. 파월 자체의 정당성 논란



7.1.1. 명분없는 '침략' 전쟁?

애초에 미국의 '명분없는 침략 전쟁'에 파병한 것부터 잘못 되었다는 주장이다.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의 명분이었던 통킹 만 사건이 2차 공세에 한해서 조작으로 판명된 시점에서 명분의 정당성이 퇴색되긴 했다. 또한 이제 막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신생 베트남의 '공산주의'를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참전한 것을 민족주의의 시각에서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군은 미 제국주의에 이용당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은 비판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알아둬야 할 것은, 지금이야 패망하고 없는 베트남 공화국이지만, 당시에는 엄연한 1개의 국가임이 분명했다. 우리나라의 참전명분은 우방국 원호[12]이며, 파병안 가결 전에 남베트남의 국가원수의 공식 요청이 있었으므로 (이론적으론) 명분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 파견 과정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1964년 5월 9일 존슨 미국 대통령 자유우방 25개국에 남베트남 지원 요청
1964년 7월 15일 응웬칸 남베트남 총리, 한국군 파병 요청
1964년 7월 31일 국회 제1차 파병동의안 가결
1964년 9월 12일 제1차 파병단 사이공 도착(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교관단)

이렇게 순서가 정리된다.

7.1.1.1. '베트남 공화국'은 미국의 괴뢰 정권?

'동맹국인 베트남 공화국의 지원 요청을 받아서 간 것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애초에 베트남 공화국은 호찌민 주도의 통일 베트남 정권 수립을 방해하기 위해 남베트남을 '침략'해서 세운 괴뢰정권으로 정권의 정당성조차 없다는 주장. 그러므로 '남베트남을 지키러 간다'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얘기인데...

어디서 많이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지만, 북한이 대한민국을 공격하는 논리와 비슷하다. '남조선은 미제의 지원을 받아 민족통일을 방해하는 괴뢰정권'이라는 식... 그러므로 저런 주장을 펼치는 것은 어느 정도 리스크가 있다. 게다가 다 양보해서 베트남이 정통성이라곤 조금도 없던 괴뢰국가라 쳐도 해방전쟁 운운하는 세력이 총들고 밀려올때 "그 나라는 괴뢰국가니까 정통성있는 니들 마음대로 침공하세요."라고 해줄 나라는 없다. 베트남의 현지인들의 동조라곤 1밀리그램도 없이 세워진 판지집같은 나라도 아니고 응오딘지엠과 카톨릭 계열을 비롯해 동조하는 세력도 분명히 있었고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성격 자체가 상당히 판이하다. 우리나라에 이 문제를 대입해보자 한반도에서 정통성 있는 국가는 대한민국이니 대한민국이 북한을 마음껏 침공해도 좋을까? 만약 북한에 정통성이 있다고 보면 국정원에 가서 자수하라 만약 남북한 중에서 어느 쪽에도 정통성이 있다고 못박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무슨 근거로 남베트남을 미제 괴뢰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그리고 부도덕하고 부패하여 민심을 잃은 남베트남은 지킬 가치가 없다는 위의 주장에서 약간 후퇴한 주장도 나오는데 당시 남베트남의 부정부패와 독재적 성향을 한국군 나아가 미군 참전의 부당성에 대한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조금 복잡한 문제다. 도덕적으로 '부당'한 것과 그걸 근거로 전쟁을 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도덕적으로 부당한 정권이 공격받는 것이 정당하다면 미국이 학살자이자 독재자인 후세인이 통치하던 이라크를 침공한 것도 전혀 문제없는 것이 된다.

7.1.1.2. 미군과 한국군의 17도선 월경 시도?

베트남 공화국이 주권국가였듯, 베트남 민주 공화국도 엄연한 주권국가다. 이 사실을 근거로 미군과 한국군이 국경을 넘어 북베트남에 들어왔다는 얘기인데... 이는 국제법상 침략행위가 될 수 있어서 문제가 된다. 그러나 미군 특수부대가 소규모 월경작전을 벌인 적은 있지만, 북베트남에 대한 공습을 제외하면 미군이나, 한국군의 지상군이 북베트남 영토에 직접 진격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다만 이 논리로라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얘초에 악랄한 식민지배로 원성을 사던 프랑스의 베트남 재식민화를 마치 지원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확실히 미국이다. 북베트남 영토에 진격한 적이 없으니 미군은 방어만 했다 - 그러므로 이건 전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당한 방어전쟁이다라는 논리가 성립하려면 얘초에 프랑스를 지원해서 핵협박까지 준비하던 것과 통킹만 사건에서 베트남군의 1차 공격 구실이 된 불법적인 34-A 작전을 지원하면서 베트남 해안에 대한 불법침입과 정찰을 한 것, 더구나 통킹만 이후에 국제법을 무시하고 선전포고도 하지않고 미국 상/하원의 동의도 없이 Pierce Arrow 작전으로 베트남 폭격을 시작한 것 등을 고려해 보자. 이런데도 굳이 '영토를 직접 침범하지 않았다'는 말이 면죄부가 될까?

하지만 여기에 대해 미국도 할 말은 있다. 통킹만 사건과 34-A 작전이 괜히 나온건가? 아니다. 위 작전의 발단은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북베트남군의 남파와 그들이 남쪽에서 자행한 촌락전쟁 때문이었다. 1960년대 초부터 북베트남은 북베트남 정규군을 호치민 루트를 따라 남파해 남쪽 반정부세력과 공산주의자를 규합해 베트콩을 창설하고 이들을 앞세워 사이공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외곽 농촌마을부터 접수해 나갔다. 이것이 이른바 촌락전쟁인데 이때 북베트남과 공산주의에 협조하지 않는 주민들이 무수히 죽어나가고 마을이 불태워졌다. 이 시기는 미군의 적극개입 훨씬 전의 이야기다. 이때 서방 언론사들이 대거 종군취재한 학살 사진이 지금도 인터넷에 떠돈다. 학살극의 시작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이었다.

이런 불법 남침이 자행되자, 남베트남과 미국도 침투부대를 양성해서 공중투하와 해상침투 작전을 병행했다. 이중 해상침투 작전이 34-A로 대표되는 작전이었다. 북쪽의 남파는 느슨한 남베트남의 사정상 손쉬웠지만, 북파는 공산주의 특유의 조직적 감시망 때문에 대부분 침투 직후에 체포되어 일부는 이중간첩으로 전향까지 했다.

미국이나 남베트남의 목적은 17도선 이남의 미국 지도하의 안정화였지 17도선 이북으로의 침공은 아니었다. 북쪽이 이겼으니 승자가 정당화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기밀해제된 자료와 당시 비밀작전 참가자들의 증언 등을 종합한 학술서적들에서는 양측이 서로 침투작전을 실시했고, 그 시작은 북베트남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이른바 한국이 냉전 시기에 북파공작원을 보내 남북 쌍방이 침투공작을 벌인 것의 베트남 판이다.

공세를 펼친건 죄다 북베트남군과 남쪽에서 양산된 게릴라가 일방적으로 싸움을 걸어오는 식이었다. 게다가 폭격 자체도 북베트남의 공세를 중단시키고 협상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정치적 고려로 결정된 폭격제한구역의 설정 등으로 흔히 생각하는 무차별 폭격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13]

7.1.1.3. 한국군 = 일본군 등치 시도?

간혹 '정당성 없는 전쟁에 파병되었다'라며 파월한국군 장병들을 비난하는 엉뚱한 사람들도 있는데 정당성 없는 전쟁이라는 것도 위를 봤듯이 웃긴 표현이지만 그렇다쳐도 그러한 책임이 있다면 당시의 행정부와 의회에 귀속되는 것이지 군이 자의적으로 혹은 정상적인 국가의 의사결정과정을 거슬러[14] 그 개입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이상은 군에 귀속될 성격의 것이 전혀 아니다. 베트남 전쟁 자체에 대한 침략전쟁 여부는 베트남 전쟁 항목을 참조하자. 무엇보다 한국군 파병은 남 베트남의 정식 파평 요청을 받아서 이뤄졌기 때문에 정당성없는 침략전쟁에 동조한 것이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파월 정당성을 무시하고 파월을 일본군의 침략전쟁과 비교하여 깍아내리려고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이들은 '한국의 파월이 정당하다니, 그럼 일본군의 침략전쟁도 정당하냐!'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주장은 역사 공부를 눈꼽만큼도 안 했다는 증거로, 애초에 일본군의 침략전쟁은 군부가 정치를 장악하여 정상적인 민주주의 의사 결정을 무시하고 침략전쟁을 벌여 점령지를 수탈 하러 간거고 식인과 학살 행위등을 여러 자료와 증언에서 교체 입증이 가능하나, 한국은 최소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의회와 국민들의 동의를 얻는 형태로 동맹국인 남베트남에서 요청을 받아 파병한 것이며[15] 수 많은 대민지원과 지휘부의 의지로(1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민간인 한 명을 보호하라 같은 명령, 또한 사람 머릿수가 아니라 무기의 숫자로 전과를 인정한 점 등) 적 섬멸이 아닌 남베트남인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선택하였다. 2차 대전시의 일본을 좀 더 설명 하자면 현역 군인인 도조 히데키가 원래 민간조직인 정부의 요직을 겸임하고, 군복입은 군인들이 의회에서 국가 정책을 결정하던 막장 국가였다. 심지어 당시 일본 정부는 군의 통제권이 없어서 원칙적으로 군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벌여도 정부가 어쩌지 못하는 수준으로, 실제로 대중국전의 시작이 되는 노구교 사건 역시 일선 부대가 멋대로 확전을 시작하여 본격적인 전쟁이 된 사건이다.

7.2. 용병 논란

당시 정권은 경제적 지원과 파병을 맞바꾸었고 많은 물자를 미군에게 직접적으로 지원받았고, 이는 엄연히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한국군은 베트남전에 용병으로 참전했다, 혹은 양심을 팔아먹었다는 비판이나, 비난을 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7.2.1. 용병이 맞다고 보는 시각

  • 아무튼 돈을 받고 전쟁을 했으니까 용병이라는 의견이 있다. 결과론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엄연히 파병의 대가로 파병 부대의 장비 현대화와 금전적/경제적 지원을 받은 만큼 용병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미국 의회에서는 '한국 놈들 돈 달라고 너무 징징대는데 어떻게 하나여?' 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전비를 그렇게 낭비해댄 주제에 용병 고용할 돈은 또 아깝더냐?

  • 파병은 한국 정부가 주도하긴 했지만, 중-근세 무렵에는 스위스나, 근대에도 쿠바 내무성 정보관리국 제5과 같은 예도 있듯이 국가적인 용병 사업도 드물지 않았으므로 정부가 주도한 파병도 용병 활동으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군은 정부에서 파견했으니 사설 단체인 용병관 다르단 주장이 있었나 보다. 그러니까 여기 적혔겠지

7.2.2. 용병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

  • 국가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동맹국으로서 파병했으므로 용병이 아니라는 의견. 파병의 대가로 미국에게 받은 여러 가지 지원은 '어차피 파병을 해야 할 상황인데 이거라도 얻어내자'의 결과지, 일부러 돈을 받기 위해 파병한 것이 아니므로 '용병'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애초에 쿠바처럼 여기 저기 손 벌려서 돈 벌려고 혈안이 된 것처럼 행동한 것도 아니고,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파병인데다, 20세기 중에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전투병이 직접 파견되어서 싸운 적은 한 번도 없다(일부 평화유지군이 있긴 하긴 하다).

  •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동맹국 지원 중 동맹국간의 경제적 지원을 근거로 용병이라고 부를수는 없다는 의견. 파병을 대신해서 해준 지원은 이런 것의 일환이라고 한다. 한국군이 소비한 상당수의 전투용 물자도 미군이 지원해 주기도 했다. 뭐 집안 사정이 별로 좋지 않은(대한민국은 그당시 산업이 별로 잘 돌아가질 않았다) 동맹이 굳이 자기 힘 들여서 도와주는 만큼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 당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한국 입장에서도 이왕 받을 기회가 생기면 악착같이 받아야 하기도 했다.
  • 과연 '침략 전쟁에 한몫 하면서 돈이나 벌러 간 용병'께서, 그 많은 대민 사업을 굳이 해야 할 필요 따위가 있는가? 라는 주장도 있다. 단순히 싸워서 돈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쪽에서 고생해서 굳이 남베트남에 이런 저런 시설을 만들 이유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주장인데 솔직히 말해서 이건 좀 무식한 소리인게, 대민지원은 실제로는 근대 이후의 전쟁에서 큰 전략적 효과가 있다. 특히 당시 게릴라전을 생각하면 모택동 말대로 게릴라가 민중 사이를 물과 고기마냥 숨어다니는데, 대민지원을 통한 현지 민심을 얻는 행위는 이런 숨은 거점을 막기 위해서라도 전략적으로도 중요하다.[16] 분명 윈윈이기는 하나, 이것은 전술,전략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기 때문에 그런것이지 안해도 될 것을 한것처럼 굳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좀 문제가 있다. 만약 안했어봐라, 사방이 베트콩으로 돌변하지 현재 미군 역시 일단 중동등 파병 나간지역에서 대민지원정도는 하고있다. 한국군만 특수한게 아니라.[17]

  • 제네바 규약에 의거하여 용병에 해당하는 독자적인 군복-계급장-표식-휘장등의 정규군 표식을 한국군은 미군과 다르게 갖고 있었다. 제네바 규약에서의 용병이란 정규군을 나타내는 표식과 전투복등에 해당하는 사항이 없는 전투원에 대해서는 용병으로 규약하고 있으며 이는 1977년 제3협약에서의 표식이 없는 용병 혹은 비전투원 표식의 용병에 대해서의 포로대우가 규정되어 개정된 이후에도 마찬가지 문제이다. 정규군의 표식을 분명히 하였던 한국군인 점이 감안된다면 한국군을 용병이라고 규정할수는 없다.

  • 파병되었던 호주군이나 필리핀군등의 경우 따로 독자적인 사령부를 구성하지 않고 MACV의 지휘를 받았다. 반면에 한국군은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하여 주월한국군사령부가 따로 설치되었고 지휘권에서의 문제에서 미군과 전혀 별개의 작전활동을 전개하였다.(실제 채명신 예비역 장군의 회고록인 =베트남전쟁과 나=에서도 이 지휘권 문제를 두고 논란을 심하게 겪었던 사례를 회고록과 공식 인터뷰에서 몇번이고 이야기한바 있다.) 이는 용병이라면 독자적인 작전지휘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한 조치일뿐더러 다른 기타 호주군과 같이 설령 MACV의 지휘를 직접적으로 받았다고 할지라도 용병이라고 할수 없다. 현재의 청해부대-오쉬노부대와 같은 ISAF사령부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고있음에도 한국군이 용병취급을 받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 하겠다.

  • 파병 규모가 커서 용병이 문제가 아닌게 호주군만해도 1967년에 7천명 수준이었고 태국군은 1969년~1970년까지 1만 2천명을 주둔시켰다. 필리핀군은 1966~1967년 간에 2천명 정도를 주둔시켰다. 한국군이 미군 다음으로 많이 보낸 것은 맞지만 한국군만 유독 많고 다른나라 우방국은 소수에 불과했다라는건 다른 시각으로 봐야한다.

7.2.3. 표현의 문제

용병 논란과는 별개로, 용병이라는 단어는 돈을 받고 살인을 하는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의 뉘앙스로 분명히 쓰일 수 있기 때문에 모욕감을 느낄 수 있다. 한국군을 용병으로 묘사 하는 사람들 중에는 용병이 가진 의미에 대해서는 모욕적이지 않다고 주장 하면서도, 또한 그 직후 한국군은 학살이나 강간을 저지른 용병이 분명하다며 용병을 강조하는 주장으로 결론지어 결국 모욕적으로 몰아가기에 진의를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용병 논란을 벌이기에 앞서 세간의 인식과 국제법상 용병의 정의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국제법상 한국군의 파병은 분명히, 적어도 현대적인 용병의 범주에 합치되지 않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굳이 한국군을 용병에 비견해야 한다면, 이들은 미국 독립전쟁에 고용되어 파병되었던 헤센군이 가장 유사한 사례가 된다. 이들은 "국가가 돈을 받고 자국의 정규군을 연합군 사령관의 통제를 받는 독자적인 부대로서 참전시킨 경우"이기 때문에,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과 비교할 때 유사한 점이 많다. 단지 한국군은 헤센군과 달리 돈 이외에도 많은 것을 고려하여 참전했기 때문에, 헤센군보다도 용병으로서의 색채가 훨씬 옅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실 헤센군은 스위스 용병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산업이 존재하지 않았던 헤센의 영주가 재정수입도 확보하고 영주민들에게 일자리도 마련하려는 차원에서 용병업에 뛰어든 경우이고, 그나마 헤센군을 고용하는 나라는 신교도 국가이거나 아니면 이교도들과 싸우는 기독교 국가여만 한다고 못박아 두었다. 때문에 헤센군의 실력이 유명세를 떨치던 17~18세기의 프랑스에서 헤센군을 고용하려고 시도했음에도 신교도 국가와 싸우는 구교도 국가였기 때문에 실패했다.[18]

7.3. 라이따이한 문제

베트남전 시기에 파월 한국군 혹은 한국인 노무자과 현지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을 베트남에서 부르는 명칭. 다른 항목과 달리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가장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 자세한 사항은 라이따이한 항목 참조.

7.4. 국제사회의 이미지

한국군 용병설이나 학살마 론을 펴는 사람들은 베트남 참전으로 인해 제3세계에 대한 한국의 인식이 나빠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일부에서는 양민 학살 문제가 '일제의 피해자인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아시아, 더 나아가선 세계에 인정받기 힘들게 한다고 말하고 심지어 라이따이한 문제는 한국군이 베트남 여성들에게 성적인 폭력을 가했다는 증거이며, 한국 정부는 이 부분에 대한 반성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의견도 말 한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갔는지 안 갔는지 관심도 없는 제 3세계의 등장과 증거도 자료도 없는 감정적인 여론조장 시도로서, 이는 이런 한국민의 원죄 자극이나 국제사회 이미지 드립이 원조를 담당하는 민간단체들이 지원금을 더 받기위해 벌이는 상투극이기 때문이다. 라이따이한 숫자가 5천에서 3만명까지 최대 6배까지 다른 이유중에는 민간 단체들이 서로 자기네가 자체적으로 파악한 라이따이한 숫자를 가지고 지원금을 받으려 하기 때문.

그리고 적극 참여한 나라들은 태국,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 등도 있는데 이들 나라를 학살자로 매도하는 의견은 없다. 특히 태국은 공산당에 맞서 조국을 수호하자는 반공 집회가 열렸고 승려들이 집단 입대하기도 했다. 즉 공산당에 맞서 자유진영 수호하자는 분위기는 한국 한정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진보단체를 중심으로 베트남에 우리 군인들이 잘싸워서 피해를(?) 줬다는 의식도 있으며 매년 한국의 봉사단이 베트남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김대중 대통령 때에는(98,01년) 대통령이 직접 공개적으로 베트남 정부에 사과를 했었으나,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사과에 반발하며 김대중 대통령을 규탄했다. 제대로 된 사과를 했던건 한 대통령뿐이었고, 그나마도 야당이 반발했던걸 보면 제대로 된 사과라고 보기 힘들다. 당장 일본만 해도 무라야마 담화간 담화 등으로 사과를 했으나 일부 정치인의 망언때문에 아직까지도 사과 요구를 받는걸 보면 이해가 갈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베트남은 이전(1992년) "우리가 승전으로 끝난 전쟁이므로 사과는 필요없고, 전쟁으로 인해 정 문제가 있으면 직접적인 전쟁 당사자인 미국과 협상을 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92년 베트남과 수교당시 과거사는 더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서로 동의한 상황이다. 이는 승전국으로써의 자존심도 있겠지만, 한국군과 교전이 거의 없었던 북베트남이 현 베트남 정부의 실세인 탓도 있다. 한국군과 주로 싸운 세력은 남베트남 공산당 소속 베트콩이었고 북베트남 정규군은 물자제공과 훈련 등을 돕긴 했지만 직접 한국군과 맞붙어 싸운적은 드물었다. 거기다 한국군과 주로 싸운, 남베트남 공산당인 베트콩의 지도층은 구정 공세 당시 괴멸당했다. 북베트남에다가 죽어라고 폭격을 한 장본인도 미국군이지 한국군이 아니기도 하고. 따라서 불필요한 마찰없이 이러한 반응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북베트남 입장에서도 이런 문제가 공론화되면 피곤할 수 있는 게, 자기들 역시 구린 구석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전쟁을 누가 시작했는지는 둘째치고 베트콩도 주도권 장악을 위해 무수한 학살을 자행했고 북베트남 정부가 미군 철수 및 파리 평화회담 이후 남베트남을 기습남침해서 점령한데다, 당시 월남 주재 한국 대사관 부대사였던 이대용 공사의 경우 면책 특권을 가진 외교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 당국이 체포해 투옥시킨 것도 모자라 북한으로 보내려고 공작하기도 했다.[19]

참고로 이명박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을 앞두고, 국가유공자법 개정 과정에서 베트남 참전 유공자들을 한국 전쟁 유공자와 동일하게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세계평화 유지에 공헌한 월남전쟁 유공자"라는 문구에서 베트남 전쟁을 〈민족해방운동〉으로 자부하고 있던 베트남 정부가 강력하게 항의를 하였다. 결국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10월 12일 하노이를 방문하여, 외무부 장관을 만나 "월남전쟁"이라는 문구를 삭제한 적이 있다.

8. 학살 문제

8.1. 연구성과와 논란

이전까지는 북베트남의 공식문서 정도에서 언급이 있었고[20] 윌프레드 버쳇 등의 언론인들의 증언[21], 그리고 한국에서의 일부 증언[22]으로 남아있었다.

지금도 언플로 추정되는 수많은 기록들이 남아있는데, 한국어 위키백과를 살펴보면 십수개에 달하는 한국군의 베트남인 '학살'사건에 대해 적혀 있으며 총합 학살 카운트가 무려 수천명 단위에 이른다. 밑의 셋은 토론란이 활성화되지 않은 문서이니 관련된 상세한 해석에 대해서는 추가적으로 조사하고 판단하는걸 권장한다.


美 NARA(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소장자료에는 RG 472라는 자료 그룹이 있고, 그중에서 한국군이 실제로 학살에 관여했는지에 대한 수사기록과 보고서가 있다. 한겨레21과 시민단체는 이 문건을 기반으로 2000년에 학살 사건 보도를 했다.

8.2. 한국군과 남베트남군, 북베트남군, 베트콩, 근처 민병대 등과의 오인 가능성


베트남 마을에 들어선 증오비, 혹은 베트남인들의 증언, 심지어 미군의 증언 중에도 상대가 실제로 한국군인지 아닌지 확인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군이라 단정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퐁닛 퐁넛 마을 사건의 경우, 웨스트모어랜드 장군과 채명신 장군간의 비밀서신[23]이 오고간 결과로 채명신 장군은 한국군의 위장복을 입은 베트콩의 소행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게다가 이게 아주 신빙성이 없지는 않은 것이...


월남전 당시 한국군 해병대가 입었던 덕 헌터 패턴 위장복은 원래 미해병대가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하던 위장무늬다. 60년대에는 미군, 남베트남군 특수부대등이 착용하면서 현지생산이 되고, 수요가 늘자 세계 각지에서 생산되어 베트남으로 판매가 되었기 때문에, 베트남전쟁 동안 사용된 덕 헌터 위장복 종류만도 수십종류다. 위장복을 섞어 놓으면 현대의 전문 컬렉터들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 게다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 역시 노획한 미군 장비를 다량 사용하고 있었기에 밀덕도 아닌 현지 인들이 알아보기 힘들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베트남어의 특징 중 하나로, 지역별로 방언이 표준어와 매우 차이가 나서 심지어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말도 안 통할 지경이라고 한다. 이는 학살이 일어났다는 마을의 정확한 지명을 파악하는 것 조차 힘들게 하는 요소 중 하나. 이런 상황에서 현지인들은 물론, 미군등이 학살을 저지르는 주체가 한국군인지 아닌지 조차 식별을 못 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 심지어 현재 베트남의 박물관에서도 덕 헌터 위장복에 남베트남군 특수부대 표식을 붙인 군인 그림을 갖고 한국군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발견된다.

물론, 이런 논지라면 한국군이 학살 저지르고도 다른 군대가 저지른 것으로 오인 되었을 수도 있겠네? 라는 반론 역시 가능하다. 이 역시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학살을 저질렀을 것이다 라는 측이나, 안 저질렀을 것이다 라는 측에서나 더욱 더 확실한 물증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8.3. 증언/자료 신빙성 문제


해당 수사기록과 보고서에는 몇 개의 학살 사건이 나와있다. 그 중에서 푹미(Phuoc My) 사건은 한국군, 미군, 남베트남군이 합동으로 조사하여 한국 해병 여단이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켰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외에도 여러 사건이 있으나 나머지 사건은 자료와 관련 증언을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도록 하자.
자료 링크 : #1#2 #3

또 네이버 캐스트, 그 시절 그 이야기에서 한국학살이 언급됐다. 동아일보 출신에 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닌 민병욱 기자에 따르면, 1966년 12월 6일 빈 호아사 꺼우 마을에서 131명을 살해한 것이 83년 외국 언론의 보도로 밝혀졌다고 하는데, 정작 그 외국 언론 보도의 기사 원문이나 링크는 없다.링크

이 문서들을 다 믿기는 힘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일단 영문 위키백과등에 올라와 있는 한국군의 학살 관련 항목과 숫자의 근거가 베트남이나 미국측 자료도 아니고 한국군이 학살을 했다고 주장하는 꾸준글 쓰는 한국인들 출처다. 그것도 원문 출처 상당수가 구수정과 한겨례 신문이고, 아닌 것들도 대부분 베트남에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한인 단체 사람들이 쓴 책이거나, 심지어 마을에 조성된 증오비관광비 따위인 식이다. 심지어 한국 위키피디아의 한국군 학살 관련 항목에 나와있는 자료, 특히 사진 자료등의 경우 출처가 영문 위키피디아로 되어 있었는데, 직접 영문 위키피디아를 들어가 보면 해당 사진을 찾아보면 출처가 한겨례 신문인 경우가 자주 발견 되었다.

증오비에 대해서는 아래에 설명되는대로 해당 지역이 베트콩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단 지역이라는 배경을 깔고 봐야한다. 게다가 위키피디아는 누구나 항목을 수정하고 작성한다는 점에서 저 사람들이 자기 글을 퍼나르는 식으로 썼을 가능성도 있다. 하물며 관련된 증언과 문서들은 일관되게 한국군이 베트남인들을 '최대한 잔혹하게 살해'나 '여자들을 강간하고 어린아이 배를 가르는'같이 패턴화 된 문장들이 등장하는 구도로, 잔인무도한 귀축 한국군 VS 무고하고 선량한 베트남인들의 희생 구도를 강조하기 위해 과장한 듯 한 주장들이 대부분이며, 그나마도 시신이나 학살 현장에 대한 현존하는 증거도 시신이고 당시 잔해고 아무것도 없이 오직 추모비 뿐이다.

기록물이나 역사적 사건은 때가 묻지 않아야 그 정당성이 유력하다.
그러나 고자이마을 등은 한국인과 그 재단에 의해 왜곡하고 임의로 시설물 설치하고, 돈을 받는 여행상품으로 변질시키고, 순례기라는 레파토리도 한국인이 만들어낸 주최자의 자기과잉으로 괴이한 형태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한국은 동양의 이름 없는 나라이니, 한국군이 학살을 벌여도 잘 안알려졌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당시 베트남 파병군 숫자 제 2순위가 한국군으로, 5만 명이 주둔했다. 그러니깐 미군 10명 당 한 명 꼴 숫자로 많았다는 것인데, 그런 한국군이 학살을 벌였으면 누군지 몰랐을리가 있나?기록도 안 찾아보고 헛소리를 주장하려니 앞 뒤가 안 맞는게 당연

참고로 월남전 기간 동안 최고로 유명한 학살 사건인 미라이 사건 당시 사망자 수가 300~500명 추산인데, 이 보다 더욱 큰 규모의 학살을 실제로 한국군이 수도 없이 벌였다면 선전거리 수집과 심리전에 필사적이던 당시 베트콩이나 북베트남, 그리고 현 베트남 정부가 자초지종과 학살 규모를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대형 사건이 여럿 터졌다면 베트남전쟁 당시에 남베트남 전역에서 한국군 몰아내자는 운동이 벌어지고도 남을 대 사건인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반전여론을 지지하며 베트남 전역을 들쑤시고 다니던 미국 언론부터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미라이 학살을 예로 들자면 미라이 학살 이후로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이미지는 완벽히 쓰레기로 전락해서 전쟁지속의 의지와 여론마저 바닥으로 끌고 간 사건이다. 학살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런 사건이 벌어졌으면 기밀로 남기는 것도 불가능할 뿐더러 이미 예전에 다 알려져서 이제와서 발견될 것도 없다는 거다. 미군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한 한국군이 그런 악행을 베트남 전역에서 시도때도 없이 벌이고 다녔다면 이미 진작에 미라이 학살 사건의 여파 뺨치는 대 특종이 되었을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몇 명의 생존자들과 기념비 혹은 추모비 이외에 이런 주장의 근거가 될 만한 학살의 흔적은 하다 못해 유골과 전투 흔적 하나 존재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일부 학살이 벌어졌다는 마을 이름들은 심지어 지도에서 지명조차 찾을 수 없는 마을들이거나, 미국 정부의 극비문서 출신이라는 자료 역시 자료 원본이 진짜 존재는 하는 것인지 입증조차 하지 못한다. 구수정이 밝혔다는 린선사 스님 학살 사건 같은 경우에는# 정작 한국군에게 누명 씌우기 위한 베트콩의 계략임이 수십년전에 밝혀 졌음에도 지금도 버젓이 사실인양 인용되고 있다.

물론 현장 부대에서의 우발적인 사건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베트남이라는 전장 특성상 불쾌지수가 MAX에 달하기 쉽고 게릴라전이 중심이며 그 게릴라들이 민간인 코스프레를 자주하고 민간인 구역같은 건 감안 안하며 오히려 이들을 이용해 숨어서 총이나 수류탄 공격 등을 이들을 상대하는 군대들은 자주 겪게 되는데. 지속적으로 이런 것을 겪다보면 민간인을 자주 의심하게 되고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어 신경이 날카로워지게 된다. 평시라면 그래도 어떻게든 민간인과 게릴라를 구별해서 대응하거나 참고 넘길 수는 있겠지만 전투 중에서까지 그러지는 못해서 결국 민간인 사상자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물론 민간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학살의 경우 전범재판에서 순간적으로 저지른 것과 명령에 의해 저지른 것은 죄의 측정 정도와 형벌의 정도가 완전히 다르다.

1969년 김종수 소위가 베트남 민간인 학살[24]로 인해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고, 후에 15년형으로 감형되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학살 주장 지역과 주월 한국군 주둔지역간의 관련성이다. 한국군의 경우, 초창기에는 남베트남의 동해안에서도 가장 남쪽 지역에 주둔했다가 서서히 북상해서 전쟁 절정기에는 베트남 중동부, 당시 남베트남 공화국에서는 상당히 북쪽 지역에 주둔하게 된다. 예로 맹호부대가 벌였다는 고자이 양민 학살 사건 같은 경우 그 당시 한국군은 다른 지역에 주둔하고 남베트남군의 관할이었는데 학살이 일어났다던가..

주월 한국군이 동해안 최남단 지역일대에 주둔하던 당시, 그 지역에서는 민간인 학살 같은 사고 이야기도 없고 민간인들의 칭송기사가 나타난다. 그러다가 부대가 북상해 중동부 해안지역에 위치하면서 민간인 학살 기록이 나타난다.

대체적으로 주장되는 학살지역들은 "쾅나이 성" 과 "쾅남성". 특히, 쾅나이 성의 경우 미군들은 그 곳이 게릴라가 매우 많고 주민들도 게릴라에 협조하는 친게릴라 성향이라서 "핑크빌(공산주의자 마을, 해방구)" 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유명한 "미라이 학살" 사건이 일어난 곳도 쾅나이 성으로 미라이 사건을 벌인 켈리의 소대가 포함된 중대는 제대로 된 교전 한 번 없이 부비트랩만으로도 부대원의 상당수가 전사상을 당해 독이 잔뜩 오른 상태였다가 대형 사고를 쳤었다.

쾅나이, 쾅남을 비롯한 베트남의 중부 동해안은 베트남 공화국(당시 북베트남 공화국)에서도 인정하듯 혁명가(공산주의자)들의 산실이라고 불릴 정도로 반골성향이 강했다. 게다가 쾅나이 성의 경우, 라오스를 타고 내려오는 호치민 루트가 처음으로 남베트남의 내륙 평야지대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만큼 게릴라는 많았고 게릴라에 협조하는 주민은 사방에 널려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은 베트콩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지만 증거도 없거니와, 그럼 협조해서 부비트랩 같은 거 만들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유사 지역에서 흥미로운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미해병 선무소대가 이 지역, 중부 동해안의 어느 촌락에서 촌락민을 돕고 숙영을 했었는데 다음날 병사 두 명이 실종됐다. 당장 난리가 났고 미군 수사대가 왔지만 촌락민들이 워낙 순종적이라서 그들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결국 실종자는 시간이 흘러 사망자로 처리된다. 그 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군 유해발굴 조사단이 현장 조사를 나오면서 탐문을 해보니 그제서야 마을 사람들이 사실을 밝혔는데, 당시 그 마을은 베트콩 마을이었고, 실종 병사 두 명은 당시 마을 처자 두 명이 해치워 땅에 묻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장소를 안내해 발굴조사 후 유해는 안장되었지만, 그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참가했던 당시 파견됐던 장병들은 자신의 동료를 해치운 마을 처자가 전날까지 매우 친절했던 아가씨였다는 걸 알고 충격을 먹었고 돌아가서 그 사실을 언론사에 소개해서 그것이 기사화된 사건이었다. 그 정도로 쾅남, 쾅나이 성 그리고 그 위쪽으로 비무장지대 쾅트리 성까지 지역은 베트콩이거나 베트콩 협조자인 민간인을 빼면 순수 민간인은 없다고 할 정도의 지역이었다. 이것이 파월 한국군이 주둔한 지역들 중에서, 초창기 주둔했던 베트남 동해안의 최남단 지역에서는 현지 주민들이 한국군을 칭송하고 이동하자 이동반대 시위를 할 정도였는데, 이후 이동한 중동부 베트남 지역에서는 한국군 증오비가 설치되었던 기이한 현상의 원인이다. 즉 이들 지역 주민들은 한국군이 뭔 만행을 저질러 증오하는게 아니라 애초에 북베트남에 충성했기 때문에 북베트남의 적인 한국군을 증오한 것이다.

애초에 지역적 성향이나 베트콩과 북베트남의 지역 장악도가 차원이 다른, 미군들이 괜히 "핑크빌(해방구)"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이해할 만한 곳이 한국군 증오비가 서 있는 지역이 되겠다. 즉, 그냥 증오한다는 뜻의 증오비다.

물론 학살사고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한 거짓말이겠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증오비에 씌여있는 대로 이들이 전부 북베트남군-베트콩과 연관이 없는 무고한 양민이라는 이야기 역시 신빙성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또 한가지, 이럼에도 불구하고 현 베트남 정부(당시 북베트남)가 이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못하는 것은 승전의 우월함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 베트콩이 자리잡던 1960년대 초반 남부 촌락지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25] 그들은 공포심으로 자신들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수하게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참고로 이건 미군이 전면 개입하기 전의 일로 당시 서방 각국의 통신사 종군 기자들이 남베트남 지역에서 촬영한 자료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북베트남의 공포심 활용 정책 때문에 자신들의 도덕성 역시 훼손되기에 함부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북베트남이 학살을 적극 주도한 북한 같은 급은 아니었다지만 베트콩을 어쨌든 우군으로 활용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26]

강창성의 일본/한국 군벌사에서 전두환이 양민학살을 주도했다고 증언했다. 이 사람이 전두환과 사이가 안 좋았다는 점에서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강창성은 전두환이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양민을 학살하고 신체 일부를 잘라갔다라고 했는데, 하급부대에서 사실인즉 거동 수상자를 확인도 안하고 묻지마 사살하고 신체 일부를 잘라간 사건이었다. 문제는 사살되었다는 민간인은 살아있었고 해당 지휘관은 고발 조치되어 처벌받았다. 전두환의 예하부대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전두환이 시킨 건 아니다.

문제는 베트남전의 지휘관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광주진압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광주의 학살은 베트남에서 배워온 것..류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당대의 외국 서적들에서도 베트남을 연상시키는 광주의 학살이나 베트남에서 악명높은 공수부대를 광주에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고 일종의 연상으로 벌어진 소문이었다. 하지만 노태우가 사단장으로 있던 육군 9사단은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광주엔 내려가지도 않았다. 애초에 광주에 간 것은 공수부대다. 사실관계가 증명된 걸로 까자. 다만 이런 소문이 난 것은 당시 참여했던 공수부대 탓도 있는데, 이 부대원들은 시민들에게 '베트남에서 유방 잘랐다'같은 허세, 허풍을 쳤다. 아래에서 보듯 베트남에 가본 적도 없는 군인이 허세로 '학살했다'고 떠드는 경우는 허다했고 당시 광주에서도 이런 허세, 허풍이 있었기에 그런 소문이 떠돈 것이다.

물론 많은 참전용사들은 전쟁 수행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있었을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베트공과 민간인을 구별하기 힘든 상황에서 일어난 사고거나 개별 병사가 저지른 범죄라고 주장해왔다. 특히, 당시 전쟁에서 공식적인 명령은 백 명의 베트공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민간인을 살리는 것을 우선하라였기 때문이다.[27]

노근리 학살 사건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미군은 당시 한국인 중 북한군이 섞여있을 가능성을 들어 이미 민간인임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학살사건을 자행했다.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특히 외국에서 수행하는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민간인임을 알면서도 학살을 자행하기 쉽게 만든다. 요즘 일본과 민간 토론을 진행해 일본의 사과와 배상문제를 언급하면 "너희가 베트남에서~"로 많이 대응하고, 이게 기사화된 적도 있다. 여기에 대한 제대로 된 대응은 위에서 나온대로 당시 일본군이 얼마나 썩었는지, 당시 일본이 얼마나 미쳐 돌아가던 나라인지, 한국은 어떤 과정을 통해 월남전에 참전했고 무슨 활동을 했는지 등을 조목조목 비교해주는 것이다. 또한 "베트남에서 학살이 일어났다면[28]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그것이 식민시기 일본의 만행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정작 동경 대공습이나 원폭 투하 들먹이면서 잘못 물 흐리는 건 일본 극우들이 잘하더라

다만 개별적인 학살이 저질러진 것 자체는 어느 정도는 사실로 보인다. 1969년 김종수 소위가 민간인 학살 죄건으로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고[29], 후에 15년형으로 감형된 적이 있다.

8.4. 그 밖에

오랜 전쟁으로 외부인에 대한 증오 및 소수민족과의 갈등으로 우거진 복잡한 문제 와중에 북베트남도 심리전으로 학살을 유도했다는 주장이 있다.

KBS 등에서 다큐멘터리로 만든적이 있고, 옛날에 조성모의 뮤직비디오에 관련 묘사가 나오자 월남 파병용사들이 소송을 건 적이 있다.[30]

또한 1999년 이래 대표적인 좌파언론 한겨레 신문에서 발간하는 주간지 《한겨레21》에서 대한민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에 대해 현지 취재를 하고, (자칭)관련자의 증언을 기사화하였으나, 참전자 단체들이 이에 반발하여, 2002년에는 사무실에 난입하기도 하였다. 일부는 MBC 방송국에 난입하기도 했다. 베트남 참전군들이 입을 열지 않고 부정만 하는 상황이라, 국내에서도 규명이 쉽지 않다.

채명신 장군의 인터뷰에서도 이를 어느정도 감안한 듯한 언급이 있어 완전히 없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당시 베트남에서의 대규모 작전에서는 미리 몇 차례에 걸쳐 삐라를 뿌려 '지정 일자까지 그 구역에서 소개하지 않으면 베트콩으로 오인받아 사살당할 수 있다.'고 밝혔고, 그런 대규모 작전에서는 삐라를 보고 게릴라들이 전투 지역을 빠져나갔기 때문에 부비트랩에 의한 사상자가 주였고 교전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정황상 마을에 설치된 부비트랩에 의하여 아군 사상자가 났을 때 작전 구역에서 소개하지 않은 민간인들이 살해당했을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론 이건 미군이나 남베트남군도 마찬가지다.[31]

평화박물관에서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옌떤런(64), 응우옌티탄(55)을 초청하여, 2015년 4월 7일 저녁 7시 서울 견지동 조계사 내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베트남전을 다룬 ‘하나의 전쟁, 두개의 기억’ 이재갑 사진전 리셉션 행사를 열기로 하였으나, ‘대한민국 월남전 참전자회’와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의 반발로 전시회가 취소되었다.

이에 대하여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우리가 베트남전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도 풀지 못한다. 베트남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참전군인들의 희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희생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국가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한국 정부가 민간인 학살에 대해 사과를 하는 순간, 참전군인들도 가해자가 아닌 국가동원 피해자가 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감정적 대응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세상 일이 그렇게 이상적으로 풀리지 않는다는게 문제.

9. 포로?

민간인 학살만큼이나 잘 안 알려졌지만 베트남 전쟁 당시의 한국군 포로 의혹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인류학 교수 전경수 교수가 최초로 베트남 전쟁 박물관의 사진을 토대로 수백명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다가 채명신 장군 등 참전 군인들의 노력으로 그 사진 자체는 의문시 되었다. 물론 한국군의 포로는 아니더라도 전사자들에 대한 영헌 회수를 위한 연대급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32] 하지만 여전히 전사한 영헌을 다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문제가 존재하며 동시에 한국군 포로문제에 대해서도 제대로 노력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1990년대 중반에 미국 실종자 관련 단체에서 3급 정보로 일부 전사로 처리된 장교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북한과 베트남 생존설을 주장해서 PD 수첩을 타기도 했다.

사실 당시 주월사의 기본 방침은 "한국군은 너무나 용감해서 포로가 없었다" 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공식적으로 실종자들을 발표한다. 그 중 몇명은 북한에서 생존한걸로 확인되었다. 사실 1973년 파리 협정 당시 북베트남이 억류중인 한국군 유종철 일병을 송환하였는데, 그의 집은 이미 전사 통지서를 받은 상태였고, 국방부조차 그의 존재를 몰랐다.

유종철 일병 사건후에 국방부의 공식 입장은 "현재 파악된 실종자들은 월북한 상태이고 그들은 반역자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소련군도 아니고...

2000년대 베트남에서 포로가 된 후 북한 생존이 확인된 안학수 하사에 대해서 한국정부는 공식적으로 월북을 부정하고 납북을 인정하게 된다. 당사자는 탈북자들의 말에 따르면 남으로 탈출하려다 실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PD 수첩에서 실종후 베트남 생존의혹이 제기된 한국군 장교는 90년대말 미국 실종자 협의회의 발굴로 전사 시체가 발견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기본적으로 한국군은 당시 유감스러운 이야기지만 실종자나 포로 잡힌 병력에 대한 관리가 매우 허술했다. 이는 실제 VC들에게 잡혔다가 자신이 탈출했던 태권도 교관단으로 파병경험이 있는 박정환씨의 =느시=라는 포로생활 및 탈출을 담은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탈출하고 나서 그의 병적기록부가 사라져서 당황했다는 일화가 분명하게 있다. 그외 한국군 실종자들의 대응을 봐도 이는 여러곳에서 한국군이 한국군 포로들이나 실종자들 관리에 매우 허술하거나 은폐하려고만 했다는 정황이 많아서 비판받을수 밖에 없다. 또한 한국군 포로는 이미 미군포로로 송환되었던 포로생존자나 CIA의 당시 정황보고에서도 들어나있다.

또한 한국군 포로들은 기본적으로 정당한 포로대우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음 혹은 북송을 강요받았다. 북송강요는 북한도 당시 베트남전에 북한군 심리전부대와 공군 전투기 조종사등을 파병하여 활동했다는 정황으로 볼때 북한의 요청에 의해서 북송을 포로들에게 강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북송을 포로들에게 강요했고 포로들 대부분이 북송을 선택할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33] 이는 나중에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처 피하지 못했던 한국 외교관 포로들에 대한 처우에서도 바로 들어난다. 저런 대우를 받았었기 때문에 한국군 포로들중에는 포로학대나 학살을 당했던 사례도 있으며 이는 참전자들 수기에서도 나타난다. 주로 공포심리를 유발하기위한 조치를 취한 모습으로 사체를 매달아 놓는등의 조치를 당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한국군 포로는 9~18명 정도의 정황상의 확인만 가능한 상태이다. 그리고 북한에 생존및 북송이 확인된 포로만 7명이었다가 위 기술대로 안학수 하사가 탈출에 실패하여 실종된 이후로 현재까지 북한에 확인된 공식적인 베트남전 한국군 포로는 6명이다.

10. 주요 전투 기록

12. 관련 인물

  • 채명신 - 초대 파월 한국군 사령관. 수도사단(맹호부대) 사단장
  • 박정희 - 당시 한국 대통령
  • 전두환 - 파견된 9사단 백마부대의 29연대장으로 복무[35].
  • 서경석 - 소대장 및 중대장으로 베트남에서 복무. 이때의 경험을 실감나게 그려낸 '전투감각'이라는 수기가 유명하다. 여기서 볼 수 있다.
  • 노태우 - 파월 수도사단(맹호부대) 제1보병연대 3대대장(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1기보여단 133기보대대[36])으로 파견된 백마부대의 연대장으로 복무.
  • 황석영 - 소설가. 해병 제2여단 소속으로 참전. 일반 전투병으로 복무하다가 후방으로 전출되어 군 수사대로 복무했다[37].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 기의 그늘 같은 소설을 집필했다.[38]
  • 영한 - 백마부대 29연대 보도병으로 참전. 머나먼 쏭바강을 집필, 후에 SBS에서 드라마화 됨.[39]
  • 안정효 - 백마부대 소속으로 참전. 훗날 안성기 주연의 영화로 제작된, 하얀전쟁 집필
  • 장태완 - 수기인 12.12쿠데타와 나에서 베트남전 경험이 수록돼 있다.
  • 남진 - 당시 파병가서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고 한다.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 불리는건 이런 이유도 있는듯.[40][41]
  • 허경영 - 1971년에 파병되어 나트랑 지역에서 복무하다가 죽을 뻔했다고 한다.공중부양도 하시는 분이 딴지일보에 허경영과 같이 베트남 참전했던 용사가 수기를 쓰면서 허경영 이야기를 했는데, 당시 사단 법무참모부에 근무를 했으며 부대밖 파견근무를 나갈때 배낭에 양복을 챙겨가서 갈아입고 사진을 찍는 등(...) 기이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고로 당시 박정희의 비밀보좌관이었단 말은 당연히 구라.

13. 창작물

  • 국제시장 : 남진의 베트남 파병시절이 나온다. 하지만 배경인 1974년 당시 남진은 이미 전역한 상황이었고 한국군도 철수해 있었다.
  • 알포인트 : 파병 당시를 배경으로 한 공포영화.
  • 구 람보

    그외 1970년대, 1980년대 창작물에는 조금씩 언급이 나온다.

  • 그때 그 사람들 : 대통령 암살에 투입됐던 요원이 월남에서 총 쏴봤다고 증언한다.
  • 화려한 휴가 : 월남 용사라고 허세 부리던 시민군이 알고보니 방위였고 망신만 당했다.

14. 기타

보통 영미권 국가들과 조금이라도 관계된 항목들은 당사국보다 오히려 영어 항목이 가장 상세한 경우가 많은 위키백과에서 해당 문서들은 일본어버전이 제일 자세하고, 내용도 과장되거나 한국군의 잔혹성을 부각하는 것이 많다. 물론 난징 대학살 같은 구 일본군의 전쟁범죄 관련 문서와는 완전한 정반대 태도. 혐한에게 완전히 점령당해 정신줄을 놓은 일본 위키백과의 슬픈 현실이다. 따라서 일본어 위키보다는 영어 위키를 보는 것이 더 낫다. 사실 일본어 위키백과에 있는 일본에게 민감한 정치적 문제와 연관된 모든 항목은 죄다 쓰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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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실 단독으로 전쟁할 수 있어도 연합군을 만드는게 이득이다.
  • [2] 과장이 전혀 아니라 탄입대, 수통, 철모 등등이 80년대 까지도 전부 US 마크가 붙은 미국제 원조물자였다. 그나마 육군이 국산 전투복을 입고 있었으나, 해병대의 경우는 60년대 초반까지 미해병대에서 쓰던 US마크 붙은 작업모와 전투복까지 입고 있을 지경이었다.
  • [3] 물론 나중에 파병결의할 때는 찬성으로 돌아섯다.
  • [4] 이상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을 참고해 서술
  • [5] 이미 태권도 교관을 비롯한 비전투 병력 일부는 파병이 된 상태였다.
  • [6] 1943년 3월 여학생들에게 정신대 종용을 하는듯 친일 행적이 뚜렷함에도 독립운동 기록만 내세우고 친일 행적을 숨기려한다는 비판이 있다.
  • [7] 야당이라고 해도 이 무렵 정계에 '좌파'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1990년대 까지 한국 정계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사상적으로는 우파-보수 일색이었다.
  • [8] 이라크 전쟁후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도 민사작전으로 유명하다.
  • [9] 참고 : Allied Participation in Vietnam. Department of the Army(1985) 저자(Larsen, Stanley)
  • [10] http://www.history.army.mil/books/Vietnam/allied/ch06.htm
  • [11] 다만 미국 정부는 남베트남에서 패할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았다. 애시당초 포기할 경우에 대비한 플랜 자체를 따로 마련해 둔 상태였으며 성공 확률도 낮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 [12] 베트남 공화국은 소위 '자유우방'의 일원으로 취급받았으며 한국에서는 '자유월남'으로 불리기도 했다.
  • [13] 단,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폭격이 상당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무차별 폭격이 아니라고 해도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폭격피해는 분명히 발생하였다.
  • [14] 쿠데타나 막후 정치공작 등
  • [15]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남베트남을 미국의 괴뢰정권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 [16] 극단적으로는 식민 지배도 평등하고 공평하게 할수록 반발이 적다는 것 역시 예를 들수 있다. 괜히 일본이 까이는게 아니다.
  • [17] 실제로 월남전 당시에 미군은 채명신을 비롯한 한국군 장성들에게 당신들은 여기에 싸우러 왔느냐 자원봉사하러 왔느냐?라고 조롱하면서 한국군의 대민지원사업을 비웃었으나 나중에 자기네들이 이걸 소홀히해서 엿먹게 된다.
  • [18] 굳이 용병의 통상적인 정의를 보고 싶으면, 군사관련 항목, 또는 드라마들을 유심히 보자, NCIS경우, 용병 관련 에피소드가 몇개 있는 데 그 경우, 용병들은 대부분 정규직으로 군대에 업무하는 사람들은 아니며, 국가와는 독립된 엄연한 회사이다.
  • [19] 물론 북베트남도 최소한의 판단력은 있었던지라 북송을 막무가내로 진행한게 아니라 북한측 요원들과 이대용 공사를 만나게만 했으며 나중에는 북한이 간첩 70명과 이 공사를 교환하자는 요구를 하자 북베트남 정보 당국자조차 이 공사에게 "북한의 억지가 심하다. 당신이 북송될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을 정도. 다행히 대한민국 정부의 노력 덕에 이 공사는 무사히 귀국했다.
  • [20] 월간중앙에서 어느 참전자가 이야기 한 것처럼 1주일에 남베트남군 20만 사살, 미군 함정 100척 격침수준이라는게 문제
  • [21] 한국에도 번역된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서 주요 증언자이다. 참고로 이 사람은 한국전쟁때도 북한을 취재했고 70년대 북한 취재기도 내었는데 이 사람의 저작들은 전부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금서였고 서강대학교등의 일부 학교에서는 아직도 대출제한 서적이다. "미국의 조직적인 북침음모"-판문점에서의 사건이나 베트남을 통해 남한에서 의거 귀순해서 북한에서 행복하게 사는 안학수 하사등의 기사를 쓰는 분이니 시각이나 신빙성은 각자 생각해볼 것.
  • [22] 이것이 반드시 옳다는 건 아니다. 월남스키부대식의 자기 자랑도 있고 그야말로 사돈의 팔촌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다른 주제이지만 베트남 군사박물관의 한국군 항복 사진을 맹호부대라고 기록한 기자에게 근거를 물으니 맹호부대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문이라고 할 정도였다. 사진은 해병대 복장을 하고 있고 조작의 냄새가 짙다.
  • [23] 해당 내용은 한겨례에서 발표한 RG 472 자료 일부에 나와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 '한국군이 학살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는데, 나는 이런 종류의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니 잘 알아보라'라는 내용이고, 채명신 장군은 '철저히 파악해서 알려주겠다'라는 답변 내용과, 그 이후 채명신 장군의 답변 결과다.
  • [24] 소대원들에게 베트남 민간인 6명을 죽이도록 지휘했다.
  • [25]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인 캣쉿원에서도 베트콩 하나가 무수한 민간인을 살육한 우리가 남베트남 괴뢰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라고 자괴감에 빠지는 장면이 나온다.
  • [26] 전쟁 이후 토착 남베트남 해방전선 소속 인사들을 숙청한 것도 그 때문일 수 있다. 이들은 남베트남 정부 못지않게 일반 베트남인들에게 원한의 대상이었다.
  • [27] 민간인 옷 입고있는 사람이 갑자기 총을 들이댈지 모른다는 공포감은 정말로 무시무시한 것이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서,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은 마을로 들어가는게 정글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무서웠다고 증언한다. 정글로 들어갔을때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과 교전을 피하거나 하더라도 피해없이 살아남을 수는 있어도, 마을로 들어가면 십중팔구 장병 중 한명이 죽는다 할 정도다. 선량해보이는 할머니가 갑자기 해병대를 향해 총을 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여진다는 것이다.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행해지는 비정규전은 정말로 위협적이다.
  • [28] 증오비 같은 날조 자료 말고 확실한 증거 말이다.
  • [2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20&aid=0000016564
  • [30] 사실 이 뮤직비디오는 양민학살보다는 군대 구타를 묘사했다는 게 더 문제였다.
  • [31] 애시당초 이런 사건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미라이 학살이 드러난 것도 워낙 저지른 스케일이 큰 데다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 [32] =지옥의 전장 베트남전쟁= 호비스트 출판 p131 출처
  • [33] 나중에 베트남전 실종자들이 북한에서 생존이 확인되었거나 탈출하다가 사망한 사례가 밝혀진바 있다.
  • [34] 가히 한국 해병대에게있어 베트남전 사상 최악의 전투였다. 작전중 얼마나 많은 피해가 있었는에 대해 한국 정부가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으며, 참전 용사들이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으로 피해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모아보면 한국 해병대가 제대로 철거하지 않고 버려둔 중대 전술기지가 적에게 넘어가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혀버린 전투로써, 중대 단위로 시작한 작전이 연대단위로 확산되며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작전 자체도 매우 허술했다. 역설적으로 군대들이 지금처럼 극도로 최첨단화되지 않았던 당시에 중대 전술기지가 얼마나 효과적이었지 다시 입증해준 셈.
  • [35] 당시 9사단장이자 이후 특전사의 2대 사령관인 조천성이 '사병들은 마실 물도 마땅치 않은데 전두환은 뜨거운 물로 샤워한다'고 29연대장에서 해임시켜야 한다는 보고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베트남전 파병 이후 복귀한 연대장급 이상은 모두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전두환의 경우는 직속상관인 9사단장 조천성, 그리고 주월사령관 이세호가 모두 전두환에 대한 훈장 수여에 반대한 일화가 존재한다. 이유는 인사오류+민간인 상대 문제 행위+작전지휘권을 참모 이하에게 맡겨놓은 사례 다수+전투수행능력 부족+연대장 부임 이후 파티가 너무 잦음 등 부정적 평가가 쏟아진 것이다. 결국은 훈장을 받았는데 이게 당시 정부에서 하나회를 키우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비판도 존재한다.
  • [36] 강재구 소령이 있던 그 부대이다. 재구대대
  • [37] 누나 애인 빽 덕분에 뒤로 전출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전출되기 이전까지 황석영은 전방에서 근무했으며 전투를 치렀던 경험도 있고 그 때문에 PTSD를 앓기도 했다.
  • [38] 여기서 탑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베트남 인민들의 토템을 두고 주인공이 속한 부대가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과 교전을 벌인다는 내용인데, 비슷한 내용이 논픽션인 그린베레에도 실렸다. 다만 이쪽에서는 미군이 전투를 벌이며 토템을 두고 민족전선과 전투를 벌인다는 단편적인 요소만 빼면 별 다른 유사성이 없다.
  • [39] 쏭은 강을 일컫는 베트남어다. 쏭바 또는 바 강이라 해야 함. 쏭바강은 역전 앞식의 중어 반복.
  • [40] 엘비스 프레슬리는 베트남에 파병간 적이 없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주독미군 부대에서 근무했다.
  • [41] 국제시장에서 그 시절 모습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