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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last modified: 2015-01-28 21:17:05 Contributors

독일어: Berliner Philharmoniker, 영어: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프랑스어: Orchestre philharmonique de Berlin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을 거점으로 하고 있는 관현악단. 홈페이지

영어권 국가에서는 '베를린 필하모닉', 한국일본에서는 '베를린 필' 이라고 줄여부르곤 한다. 독일 외에 유럽, 세계를 통틀어 봐도 이 만한 이름값을 가진 악단은 흔치 않다.

2006년 top ten European Orchestras에서 3위로 선정되었고, 2008년 그라모폰지에선 2위를 먹었다.

Contents

1. 역사
1.1. 창단부터 2차대전까지
1.2. 2차대전 후부터 지금까지
2. 역대 상임 지휘자
3. 특징
4. 음반/영상물
5. 흑역사/단점
6. 흑역사...는 아니고 충공깽
7. 한국인 지휘자/작곡가와의 연관


1. 역사

1.1. 창단부터 2차대전까지

지금이야 세계구급으로 먹어주는 악단이지만, 시작은 다소 초라하고 어떤 면에서는 찌질하기까지 했다. 1878년에 벤야민 빌제(Benjamin Bilse)라는 작곡가 겸 지휘자가 자신의 성을 따 '빌제 관현악단(Bilse-Kapelle)' 이라는 콘서트 전문 사설 관현악단을 만들었는데, 대부분의 관현악단이 오페라극장 혹은 궁정 등지에 종속되어 있던 공설+극음악 반주 전문 계통이었던 당대 상황에서는 굉장히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빌제가 차츰 인기를 얻으면서 점점 돈벌레가 되기 시작했는데, 돈 되는 공연이면 단원들 스케줄이니 뭐니 그딴 거 없이 마구 부려먹으면서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단원들은 3등칸 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독일 각지를 돌아다녔고, 제공되는 숙소나 음식, 봉급도 개차반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시기 적절하게 마이닝엔에서 온 궁정 악단이 자신들보다 빼어난 연주를 들려주는 것을 보고 예술적으로도 열폭하게 되었다.

결국 빡돈 일부 단원들이 1882년에 퇴단해 새로운 관현악단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베를린 필이었다. 첫 정기 콘서트는 그 해 10월에 있었는데, 다만 이 악단도 재정 자립도가 엄청 낮았던 것은 매한가지였다. 단원들의 노동 강도도 빌제 악단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심지어 대형 맥줏집 등지에서 대중들을 위한 음악회를 여는 등 안습 행보를 이어나갔다.

이런 와중에 베를린의 유능한 공연 기획자였던 헤르만 볼프라는 인물이 이 악단에 재정 지원을 약속했는데, 볼프는 자금 외에도 마이닝엔 궁정 악단 지휘자로 베를린에 와서 충공깽을 안겨준 당대 본좌 지휘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한스 폰 뷜로를 악단의 첫 상임 지휘자로 초빙해줬다. 뷜로는 최초의 직업 지휘자로 인정받는 사람으로, 바그너의 제자로써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초연했으며, 이후 마누라와의 이혼 때문에 브람스파로 선회했다. 뷜로는 엄격한 지도력으로 악단의 연주력을 크게 향상시켰고,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등 고전 혹은 초기 낭만 시대의 관현악 연주곡들을 고정 곡목으로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뷜로는 1892년에 건강 악화를 이유로 물러났다. 뷜로 이후 상임지휘자를 찾는데 다소의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 시기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구스타프 말러 등이 베를린 필의 정기연주회를 지휘했으며 유력한 차기 지휘자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불발되었다. 결국 후임으로 헝가리오스트리아인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슈가 발탁되었다. 니키슈는 뷜로의 연주 곡목을 이어받았고, 거기에 뷜로가 개인적인 문제[1]로 다루지 않았던 바그너리스트, 브루크너 등 후기 낭만 계통 작품들이나 차이콥스키, 드보르자크러시아/동유럽 작곡가들의 곡목을 추가했다. 그리고 창단 최초로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해외 순회 공연도 개최했다.

1922년에 니키슈가 이프치히에서 사망하자, 3대 상임 지휘자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임명되었다. 당시 30대에 불과한 뉴비라 노장 단원들이나 애호가들의 우려도 많았지만, 이내 전임자들의 카리스마에 지지 않는 지도력으로 잠재웠다. 푸르트벵글러 역시 전임자들의 레퍼토리를 거의 모두 이어받았고, 동시에 당대 작곡가들이었던 데미트르토크, 스트라빈스키, 라벨 등의 따끈따끈한 신작들을 독일 초연 혹은 세계 초연하는 등 한층 더 확장시켰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그 뒤 독일을 개발살낸 지독한 인플레이션, 그리고 크리티컬 히트였던 세계 대공황까지 겹쳐 자주 운영 악단으로 출발한 베를린 필도 심각한 운영난에 직면했고, 해체 위기까지 갔었다. 결국 악단이 택한 길은 베를린 시와 독일 정부의 보조금 지원을 요청하고, 그 대신 시와 국가에서 요구하는 특별 연주회들에 의무적으로 참가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시영/국영화 조치였는데, 그 시점이 하필이면 나치가 정권을 잡기 직전이라 문제였다.

결국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에는 정식으로 '제국 관현악단(Reichsorchester)' 이라는 칭호를 받아 국영화 되었고, 동시에 단원 전원의 병역 면제 혜택도 주어졌다.[2] 하지만 이 과정이 순탄한 것은 결코 아니었고, 특히 푸르트벵글러의 경우 유대인 혹은 유대계 단원들을 짜르고 멘델스존 등 유대인 작곡가 작품의 연주를 금하라는 정부 방침에 항의하며 개기다가 1934년에 사임크리를 먹었다.

악단 입장에서는 푸르트벵글러가 있고 없고에 따라 수익이 크게 달라지는 현실도 있었고,[3] 뉴욕 필하모닉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옮기려던 계획도 정부의 교묘한 방해와 푸르트벵글러 자신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취소되자 괴벨스와 명예 회복과 임금 인상 요구 등의 합의를 본 뒤 1935년에 무대에 복귀했다. 하지만 공식 상임 지휘자로서는 아니었고, 객원 지휘자의 역할이었다.[4]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에도 공연은 예정대로 계속 진행되었고, 국립화 계약 조건에 따라 정기 연주회 외에 나치 관제 노동 단체인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 주최의 특별 공연이나 점령지의 독일군, 히틀러 청소년단 등을 위한 위문 공연 등을 수행했다. 1942년 초반 부터는 제국 방송국이 새로 도입한 오픈릴 테이프 녹음기인 마그네토폰(Magnetophon)으로 정기 연주회의 실황이 녹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쟁 후반기에 들어 연합군의 폭격으로 주요 공연장인 필하모니와 국립오페라극장이 잿더미가 되었고, 특히 필하모니의 파괴로 악기와 악보가 상당 수 유실되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종종 비시즌기 동안 피난지에서 공연이나 방송 녹음을 한 것 외에는 계속 베를린을 본거지로 삼았고, 1945년 2월 푸르트벵글러가 스위스로 피신한 뒤에도 베를린 전투 종료 직전까지 다른 지휘자들의 객원 출연으로 계속 공연을 진행했다.

1.2. 2차대전 후부터 지금까지

베를린 함락과 대전 종전 후 살아남은 단원들이 다시 모여 활동 재개를 시도했는데, 다만 푸르트벵글러의 경우 나치 부역 혐의로 국외 여행이 제한되고 있어서 다른 지휘자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나치 당적을 갖고 있었거나, 친나치 성향이 강했던 단원들도 강제로 퇴단 조치를 받았다. 결국 나치 시기에 '달갑지 않은 인물' 로 찍혀 은둔하던 트 독일인 지휘자 레오 보르하르트가 임시로 상임 지휘자를 맡기로 했고, 소련군의 허가를 얻어 종전 후 불과 6주 뒤 영화관이었던 티타니아 팔라스트에서 전후 첫 공연을 개최했다.

보르하르트는 나치 시기 동안 연주가 금지되었던 유대인/적성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부활 공연하는 데 주력했지만, 몇 차례의 공연 뒤 한 연합군 병사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하면서 지휘자 자리가 또 공석이 되어 버렸다. 후임은 당시 베를린에서 갓 대학을 졸업한 루마니아 출신의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맡았는데, 첼리비다케 역시 임시직이었고 보르하르트와 마찬가지 역할을 맡았다.

1947년 5월에는 푸르트벵글러가 전후 처음으로 베를린에 복귀했는데, 다만 아직까지 상임 자리를 회복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정식으로 직책을 되찾은 것은 1952년의 일이었는데, 이 때는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아 출연 횟수는 다른 지휘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게다가 푸르트벵글러를 보필하는 역할로 계속 지휘대에 섰던 첼리비다케의 경우 성격이 하도 지랄맞았던 탓에 단원들과 계속 마찰을 빚었고, 결국 1954년 11월에 단원들로부터 역관광을 당하고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푸르트벵글러도 폐렴으로 사망했고, 후임으로는 1955년에 푸르트벵글러 사망 직후 베를린 필의 첫 미국 공연을 이끈 오스트리아 출신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임명되었다.

카라얀은 상임 지휘자에 오른 뒤 계약 연장을 계속 진행하면서 '종신 예술 감독' 이라는 ㅎㄷㄷ한 지위까지 겸했고, 이후 30년도 넘게 자리를 유지하면서 도이체 그라모폰EMI 등의 메이저 음반사에 수백 장의 음반을 취입해 명성을 떨쳤다. 동시에 영상물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기획과 주도로 '잘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 를 개최하면서 오페라 상연이나 녹음에 베를린 필을 기용하기 시작했다. 전임자들 중 어떤 인물도 이만큼 광범위한 활동을 펼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베를린 필을 세계구 급으로 올려놓은 지휘자로 카라얀을 꼽는 이들이 많은 것도 당연지사.

하지만 이렇게 거칠 것 없던 카라얀도 1970년대 후반 부터는 척추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영 좋지 않게 되었고, 1983년에는 여성 클라리넷 주자인 자비네 마이어를 억지로 입단시키려다가 다른 단원들이 대놓고 직권남용이라고 까는 바람에 망했어요 신세가 되었다. 게다가 해외 순회 공연이나 영상물 제작 때 카라얀이 악단 모르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꼬불친 사실도 발각되었고, 결국 1989년에 사임을 발표하고 몇 달 뒤 잘츠부르크에서 타계했다.

카라얀이 물러난 뒤에는 창단 이래 최초로 단원들의 투표를 거쳐 이탈리아 출신의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상임 지휘자로 발탁되었고, 아바도 역시 전임자들의 레퍼토리를 이어받으면서 슈톡하우젠이나 , 등의 현대 작품으로 영역을 확장하거나 문학/미술과 연계한 독특한 컨셉의 공연 등으로 화제가 되었다. 희대의 크로스오버 사례로 꼽히는 스콜피온즈와의 협연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는데, 다만 보수적인 단원들이나 청중, 후원자들은 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국 아바도는 위암 발병과 악단 운영진들과의 불화 등으로 계약 연장을 포기한 뒤 2002년에 사임했고, 후임은 역시 단원 투표로 영국 출신의 사이먼 래틀이 임명되었다. 래틀 부임과 함께 1930년대 이래 유지되었던 시와 국가의 보조금 제도도 폐지되었고, 창단 초기와 비슷하게 단원들이 자주적으로 운영하는 재단법인체로 독립했다. 동시에 독일어 공식 명칭도 'Berliner Philharmonisches Orchester' 에서 'Berliner Philharmoniker' 로 바꾸었다.[5]

래틀은 2018년까지 상임 지휘자 계약을 연장한 상태이며, 모국인 영국 음악과 아바도 때부터 적극 포함시킨 현대 작품, 고전 작품 등의 곡목을 균등하게 분배해 공연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다만 2012년 후반 들어 래틀이 2018년 이후 더 이상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사임하겠다고 공식 발표했기 때문에, 래틀 이후 누가 수장으로 뽑힐 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기연주회 외에도 빈 필의 신년음악회와 쌍벽을 이루는 송년음악회가 유명하며, 여름에 베를린 올림피아 슈타디온 근처의 대규모 야외 공연장인 발트뷰네(Waldbühne)에서 개최하는 특별 대중 음악회와 악단 창립 기념일을 전후해 유럽 각지의 유서 깊은 공연장/사적에서 진행하는 유러피언 콘서트도 유럽 전역에 중계되고 거의 매년 DVD로 발매될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2. 역대 상임 지휘자

비공식 상임 지휘자는 기울임체로 표기했다.

3. 특징

독일에서 사실상 최초의 자립 관현악단이자 연주회 전문 악단이었고, 지금도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상주 공연장도 무대 작품 상연과는 관계 없이 콘서트를 전문으로 하는 공연장을 사용하고 있는데, 첫 번째로 입주한 필하모니(Philharmonie)는 베른부르크 거리에 위치한 실내 스케이트장을 개축한 건물이었다. 베를린 시민들은 겉모습이 기차역 같다고 해서 철덕으로 유명했던 힌데미트를 풍자해 '힌데미트 역(Bahnhof Hindemith)' 라고 불렀는데, 1944년 1월에 연합군의 공습으로 박살났다.

이후 국립오페라극장, 아드미랄팔라스트, 베토벤홀 등 시내의 다른 공연장이나 티타니아 팔라스트 같은 영화관, 베를린 음악대학 콘서트홀 등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당시 음반 녹음은 대부분 베를린 달렘에 소재한 예수 그리스도 교회(Jesus-Christus-Kirche)에서 녹음했다. 두 번째 공연장으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새 필하모니는 1963년에 건축가 스 샤룬의 현대적인 설계로 건립된 건물이다. 겉보기에는 서커스단 텐트처럼 보인다고 해서 '카라얀 서커스(Zirkus Karajani)' 라고도 불리는데, 내부는 무대를 중심으로 모든 객석이 포도밭처럼 둘러싸는 혁신적인 형태로 배치되어 화제가 되었다.[6] 1987년에는 샤룬의 유작을 기반으로 제자인 에드가 비스니에프스키가 보완 설계한 부속 공연장인 실내악당(Kammermusiksaal)도 개관했고, 베를린 필 단원들의 실내악 모임 연주회 등에 주로 쓰인다.

푸르트벵글러 재임 시절 까지만 해도 단원 구성은 독일인 혹은 인근 국가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거기에 성별까지 죄다 남성이었다. 이 때문에 종종 라이벌로 여겨지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남자의 자존심' 을 상징하는 악단으로 간주되었는데, 자비네 마이어 사태도 이러한 보수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악단의 체질을 드러낸 것으로 여겨진다.

독일 출신 일색이었던 단원들의 국적은 카라얀 재임기의 오랜 시간을 거치며 국제적으로 면모했는데, 여기에 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1963~64년에 새로운 호른 수석 주자를 뽑을 때 카라얀이 가장 높이 평가했던 스웨덴 출신 연주자가 호른 단원들의 반대로 채용되지 못했던 경우가 있었다. 1969년 플룻 수석을 뽑을 때도 카라얀이 추천했던 제임스 골웨이에 대해 목관 단원들의 거부감이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심지어 전설적인 콘서트 마스터 미셸 슈발베를 뽑을 때도 단원들의 반발이 있어서 카라얀이 이를 무마하기 위한 발언을 해야할 정도였다. 그러나 카라얀 후기에는 실력이 뛰어나다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입단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 플루트의 제임스 골웨이(영국), 비올라의 츠치야 쿠니오(일본), 바이올린의 야스나가 토루(일본) 등이 들어가 점차 국제적인 형태로 변모하게 되었다. 특히 야스나가 토루는 이후 악단의 대빵인 악장(콘서트마스터)으로 선임되었는데, 베를린 필의 국제적인 특징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여성 단원과 관련해서는 자비네 마이어 사건 직후 페미니즘의 상승세와 여성 음악인들의 급증 등으로 베를린 필도 더 이상 '여성 불가' 의 입장을 고수하지 않고 있고, 카라얀 재임 후반기인 1982년에 스위스 출신의 마들렌 카루초가 제1바이올린 정단원으로 뽑힌 이래 지금까지 약 10여 명의 여성 연주가들이 정식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세계 연주자들을 상대로 하는 단원 모집도 계속되고 있는데, 특히 관악 단원들의 경우 대부분 비독일인들로 구성될 정도. 심지어 콘트라베이스의 에딕손 루이스(베네수엘라) 같은 경우 불과 18세의 나이로 정단원에 뽑혀 충공깽을 선사했다.[7] 모두를 더 경악시켰던 사실은 그가 최초로 남아메리카에서 뽑혔고 빈민가 출신이라는것... 참고로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 출신이기도 하다.

츠치야와 야스나가 이래로 일본인 혹은 일본계 현악 단원들이 수석/부수석급이나 악장(콘서트마스터)을 맡는 경우도 늘어났는데, 2009년에는 야스나가의 뒤를 이어 카시모토 다이신이 두 번째 일본인 악장으로 선임되었다. 한국인도 몇 명이 임시 단원으로 활동한 적은 있었지만, 견습 과정에서 '입단 수준이 안된다' 며 버로우탔다(...). 이걸 '정식 입단' 으로 보도한 몇몇 한국 언론들의 수준이란.

단원 수급은 걸출한 연주자를 오디션과 견습 기간을 거쳐서 뽑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카라얀 재임기부터 수석급 연주자들이 학생 연주자들을 지도하는 '관현악 아카데미(Orchester-Akademie)' 라는 제도를 마련한 이래로 이 쪽을 통해 입단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물론 이 아카데미를 거쳐간 연주자들은 굳이 베를린 필이 아니더라도 다른 악단들의 단원으로 채용되는 경우가 꽤 많아서, 관현악단 입단을 목표로 하는 연주자들의 등용문으로 여겨지고 있다.

악단 활동과 병행해 단원들이 꾸려나가는 실내악 활동도 활발한데,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을 따지자면 '베를린 필하모닉 12 첼리스트' 를 꼽을 수 있다. 이외에도 여러 악기 편성으로 구성된 실내악 그룹이 결성되어 있고, 1990년대 후반 부터는 시대 고증에 맞추어 연주하는 시대연주의 강세를 반영하듯 '베를린 바로크 졸리스텐' 등의 시대연주 계통 그룹도 인기를 얻고 있다.

한편, 단원 자주 운영 체제인 만큼 단원들의 자존심도 대체로 센 편이다. 카라얀 재임기 까지만 해도 카리스마 강한 지휘자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기 일쑤였지만, 아바도 취임과 함께 도입한 민주적인 방식이 오히려 깐깐한 지휘자들에게는 장애물이 된 셈. 심지어 상임 지휘자의 재선임이나 신규 영입 투표에서도 단원들의 의견이 엇갈려 논쟁이 발생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악단의 민주적인 운영 방식과 지휘자의 지도력이 공존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시험 과정이라는 성격도 있어서, 다른 관현악단들의 운영에도 참고할 수 있을 듯.

4. 음반/영상물

많다. 정말 드럽게 많다. 특히 카라얀 재임기에 만든 음반들은 현대 작품을 제외하면 웬만한 관현악 레퍼토리를 거의 다 커버할 정도로 종류도 많고, 한 곡을 여러 번 녹음한 사례도 많다. 베토벤 교향곡 전집의 경우 카라얀과 녹음한 것이 세 종류, 아바도와 녹음한 것이 두 종류[8], 그리고 드레 클뤼탕스가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에 EMI에 취입한 것까지 여섯 종류고, 브람스 교향곡 전집도 푸르트벵글러[9], 카라얀, 아바도, 래틀의 지휘로 만들어진 것을 모두 구할 수 있다.

물론 카라얀 이전에도 이 악단이 녹음한 사례를 꽤 많이 찾을 수 있는데, 최초 녹음은 알프레트 헤르츠라는 지휘자가 1913년 9월에 만든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 의 관현악 모음곡 편곡이다. 두 달 뒤에는 상임이었던 니키슈 지휘로 베토벤 교향곡 5번이 녹음되었는데, 제대로 된 편성으로 녹음된 첫 교향곡 전곡이라는 기록을 세워 유명하다.[10]

푸르트벵글러도 1926년에 베토벤 교향곡 5번 녹음으로 첫 음반을 취입했고, 1937년부터 2차대전 직전까지는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EMI로 이적해 음반 제작을 했다. 종전 후에도 도이체 그라모폰에 남긴 슈베르트와 하이든, 슈만의 교향곡 녹음이 명반으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녹음을 원체 싫어했던 만큼, 이외의 녹음들은 대부분 방송국에서 제작한 실황들이다.

정규 음반 녹음은 아니지만 2차대전 중에 제국 방송국이 방송용으로 테이프에 녹음한 실황이나 방송녹음도 꽤 중요한 자료인데, 훗날 '전시 녹음(Wartime Recordings)' 이라고 해서 LP와 CD로 숱하게 복각되어오고 있다. 전후에 제작된 실황녹음들도 차츰 정규 앨범으로 선보이고 있는데, 2000년대 후반 베를린 필 재단 측에서 독자 기획한 CD 시리즈가 나와 화제가 된 바 있다.

영상물의 경우 푸르트벵글러 시절에 주간뉴스나 기록영화 등의 형태로 남아 있는 흑백 영상물도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카라얀이 만든 것이다. 베토벤과 브람스 교향곡 전집, 차이콥스키 후기 교향곡(4-6번) 등 굵직한 것에서부터 각종 서곡이나 협주곡, 송년음악회 실황 등 굉장히 많은 수의 영상물들이 비디오 테이프, LD, DVD 등으로 계속 나오고 있다. 아바도와 래틀도 카라얀 만큼은 아니지만 음반과 병행해 종종 영상물을 내놓고 있고, 다른 객원 지휘자들이 만든 것들도 있다.

래틀 재임기에 들어서 인터넷의 보급률을 이용해 공연 실황 영상을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제공하는 '디지털 콘서트 홀' 이라는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물론 유료다.[11] 카라얀이 '공연장에서 맞이하는 청중은 기껏해야 2000명 정도지만, 음반과 영상물로는 수십 수백만 명을 맞이할 수 있다' 고 공언한 것이 점차 확장되고 있는 셈.

5. 흑역사/단점

물론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다고, 이 악단에도 흑역사는 존재한다. 특히 나치 시대에 '제국 관현악단' 으로 활동했던 전력이 흔히 떡밥으로 나오는데, 나치 관제 단체를 위한 콘서트나 점령지 순회 공연이 주요 부역 사례로 언급되곤 한다. 실제로 전후 미국에서 진행한 첫 순회 공연 때도 반나치 시위대들이 공연을 저지하려고 했으며, 카네기홀에서 공연했을 때는 비둘기를 홀 안에 풀어놓기도 했다.

이후 콘라트 아데나워 정부의 원점(Nullpunkt) 정책과 냉전 등으로 인해 이러한 비판은 잠시 소강 상태에 있었지만, 1960년대 후반 이후 신좌파의 세력이 커지면서 다시금 화두로 떠올랐다. 이는 상임 지휘자였던 카라얀의 나치 당원 전력과 더불어 베를린 필로서는 별로 회상하고 싶지 않은 치부였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덮어둘 수도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결국 2000년대 들어 악단 내부에서도 나치 시대를 비판적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왔고, 자신들의 흑역사를 여과 없이 까발리는 다큐멘터리 영화인 '제국 관현악단' 의 제작을 지원하는 대인배의 자세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에 앞서 1980년대에는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평화와 화해의 합동 공연' 을 개최하는 등, 나치 시대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기 위한 움직임이 계속 되고 있다.

현대 음악을 좋아하는 쪽에서는 비록 아바도와 래틀이 그 쪽에 조심스럽게 발을 담가놓은 결과물들이 있다고 하지만, 아직 그리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 듯 하다. 비록 시대가 지나면서 여러 면에서 체질 개선이 되고 있다지만, 아직까지 난해하고 고도의 정밀함이 요구되는 현대곡의 소화력은 앙상블 모데른 등 현대음악 전문 연주 단체에 비하면 넘사벽이라고 까이고 있다. 물론 이것도 세월이 지나면서 어떻게 될 지 두고봐야 할 상황이겠고.

6. 흑역사...는 아니고 충공깽

빈 필과 함께 관현악 지휘자라면 한 번쯤은 지휘해보고 싶어하는 악단이고, 실제로 객원 출연이라도 진입 장벽이 대단히 높아 수많은 지휘자들이 피눈물을 뿌리고 있는게 현실이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 않은데, 2000년에 베를린 중심가인 포츠담 광장에 세워진 소니 센터의 개장 기념 공연에서 전업 지휘자도 아니고 소니 회장과 CEO를 역임한 일본의 기업인 오가 노리오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하는 충공깽을 선사했다. 사실 오가가 대학 시절 성악을 공부했고, 베이스 가수로 무대에 몇 차례 서기도 했다지만 베를린 필이 이 '음악적으로 불확실한 인물' 에게 지휘 무대를 마련했다는 것 자체가 ㅎㄷㄷ.[12]

빈 필을 아예 돈주고 사서 녹음한 길버트 카플란의 사례와 비슷한데, 이 이벤트도 베를린에 강하게 불어닥친 일본 자본의 영향력을 반영한 거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실제로 베를린과 빈 모두 일본 대기업의 투자와 관광객 수입으로 먹고 산다는 예술 단체도 많고, 특히 베를린 도이치오페라극장과 빈 국립오페라극장은 정규 시즌에도 일본인 관람객들로 북적일 정도. 단적으로 디지털 콘서트홀 홈페이지를 볼 수 있는 언어가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 그리고 일본어다.

7. 한국인 지휘자/작곡가와의 연관

베를린 필을 처음 지휘한 한국인 지휘자로는 안익태가 꼽힌다. 하지만 시기 상의 문제가 있는데, 기존에는 1940년을 시작으로 몇 차례 지휘했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베를린 필 문서보관소의 협력을 얻어 진행된 사료 조사 결과, 1943년 8월 18일에 열린 '여름 특별 음악회' 때 딱 한 차례 지휘한 것으로 수정되었다. 그리고 넓게 보면 딱히 영예로운 것도 아닌데, 한국인 안익태가 아니라 일본인 에키타이 안(Ekitai Ahn)으로 지휘한 것이고 '강천성악' 의 프로토타입으로 여겨지는 자작 관현악곡 '에텐라쿠' 가 포함되는 등 친일파 논쟁의 떡밥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안익태 이후로는 한참 동안 사례가 없다가, 1977년 카라얀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4위로 입상한 금난새가 같은 해 10월 1일의 입상자 기념 연주회에서 두 번째로 베를린 필을 지휘한 한국인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하지만 등수가 등수였던 만큼 무대에서 지휘한 곡은 오페라 '마탄의 사수' 서곡 뿐이었고, 그나마 남아있는 녹음도 그 일부분에 불과하다.

금난새 이후로는 정명훈이 1984년 5월 30일 공연에서 세 번째로 베를린 필 무대에 이름을 남기기 시작했는데, 2001년 12월 8일의 공연까지 총 9회의 연주회를 지휘해 2010년 현재도 이 악단을 가장 많이 지휘한 한국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정명훈이 지금은 유럽 보다는 서울시향 활동에 더 버닝하고 있고, 몇몇 단원들과의 마찰 때문에 소원한 관계로 남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세 지휘자 모두 제대로 된 녹음이나 음반 기록이 없어서 안습. 정명훈의 경우 2012년 10월 18~20일의 공연에서 거의 11년 만에 베를린 필과 다시 대면하게 되어 화제가 되었지만, 급작스러운 사고를 당한 아들의 간병을 위해 출연을 취소하는 바람에 크리스티안 예르비가 대신 지휘를 맡았다. 결국 2014년 5월 8~10일에야 다시 출연했고, 이 무대에서는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서곡과 진은숙의 첼로 협주곡(알반 게르하르트 협연),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을 지휘했다.

베를린 필이 연주한 첫 한국 작품도 안익태 연주회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 쓴 대로 일본인으로서, 일본 가가쿠의 선율을 따서 만든 곡이라서 이걸 한국 작품으로 봐야하는 지가 우선 논란 거리. 안익태를 열외시킨다면, 처음으로 연주된 작품으로 윤이상의 '교착적 음향' 을 꼽을 수 있다(1963년 공연으로, 이탈리아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고프레도 페트라시 지휘).

이어 '예악' 과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 가 공연되었고, 1973년과 1984년, 1987년에는 각각 관현악 작품인 '서곡', 교향곡 1번과 교향곡 5번이 세계 초연되었다. 다만 카라얀이 동시대 음악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관계로, 이들 공연은 모두 라인하르트 페터스와 한스 첸더 같은 객원 지휘자가 맡았다. 현재 베를린 필이 연주한 윤이상 녹음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은 1981년의 '무악' 과 1987년 교향곡 5번 세계 초연(이상 한스 첸더 지휘), 1988년 '서주와 추상' (로린 마젤 지휘)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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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뷜로는 원래 바그너빠였지만, 첫 아내인 코지마를 바그너에게 빼앗기자 대번에 바그너까로 돌아섰다. 바그너 외에도 그 쪽 편으로 취급된 리스트나 브루크너, 말러도 대놓고 싫어했다고 한다(...).
  • [2] 이는 대단히 중요한 특권이었다. 2차대전의 전황 악화로 괴벨스가 '국민 총동원령' 을 선포하자 수많은 음악인들이 징집되어 전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전사의 위험은 면한 셈.
  • [3] 실제로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 필을 사임한다는 발표가 나자마자 공연 입장권 환불 소동이 벌어졌고, 잡혀 있던 해외 공연 일정도 취소되거나 축소되었다.
  • [4] 그렇다고는 해도, 대부분의 정기 연주회는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했고 악단 운영에 미친 입김도 상당했기 때문에 비공식적인 상임 지휘자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 [5] 사실 그 이전에도 많은 음반들에는 대부분 후자의 표기가 쓰였지만, 음반이나 방송 출연 때만 사용하는 비공식 명칭이었다.
  • [6] 이 설계는 이후 건립된 콘서트 공연장들이 많이 모방하고 있다. 일본 도쿄의 산토리홀은 아예 카라얀이 샤룬식 설계를 쓰라고 강하게 권하기까지 했고,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도 비슷한 방식으로 지었다고 볼 수 있다.
  • [7] 푸르트벵글러 재임 시절에도 바이올리니스트 게르하르트 타슈너가 19세의 나이로 악장에 선임된 바 있었는데, 아주아주아주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다.
  • [8] 아바도의 경우, 처음 나온 스튜디오 녹음의 전집은 지휘자 자신이 폐기한다고 선언했고 로마에서 진행한 전곡 연주회의 실황으로 만든 전집만 정식으로 유통되고 있다.
  • [9] 다만 전집 목적으로 만든 녹음은 아니고, 모두 실황 녹음이고 발매 회사들도 제각각이다.
  • [10] 물론 정말 '제대로 된' 편성은 아니었다. 빈약하기 짝이 없던 당시 녹음 기술의 한계 때문에 현악 주자는 10명도 채 안되었고, 몇몇 부분은 편곡을 통해 음향 균형을 맞춰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 [11] 다만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연주하는 다른 오케스트라의 공연의 경우는 무료로 열어두는 경우도 있다.
  • [12] 다만 베를린 필 홈페이지의 공연 기록에는 오가가 지휘했다는 공연을 찾아볼 수 없어서, 호사가들은 오가가 재력과 기업빨을 동원해 악단을 '사서' 지휘한 거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리고 이 공연 실황으로 비매품 한정판 CD가 제작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