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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last modified: 2015-03-04 22:44:45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역사
2.1. 야사와 역사적 인연
3. 지리
4. 인문
5. 교통
6. 통신
7. 각종 떡밥

1. 개요

대한민국으로 서해 5도의 일부이자 가장 큰 섬이다. 행정 소속지역은 인천광역시 옹진군. 원래는 경기도(남북분단 이전까지는 황해도였지만)에 속했던 지역이었으나, 옹진군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되면서 현재는 인천광역시 관할.

2. 역사

백령도에서도 선사시대부터 농경과 어로를 하며 사람이 살았다. 한사군의 일부였다가 고구려에 편입된 이후 곡도(鵠島, 따오기섬)라 불리었고(고려사), 고구려 멸망 후에는 일 신라의 영토( 장구진)가 되었다가 고려 태조때 백령진이 되어 '백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해주 소속). 유금필이 잠시 유배되기도 하였다.

현종 9년(1018년)에 을 설치하고 진장을 두었으나, 고려 말기 왜구의 침략이 심해지자 폐쇄되어 주민들은 육지로 이주되어야 했다. 고려 고종 때 백령진장 이세화에 의해 최초로 유교가 들어와 향교가 세워지고 과거 응시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최충헌이 박진재를 유배보냈고, 또 김경손의 유배지인데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니 백령도는 당시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었던 최악의 귀양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개국 후에는 세종대왕 때 잠시 수군진(영강진과 통합하여 강령진, 이후 강령현으로 해주 목사 관할)이 생겼으나 이후 다시 폐지, 광해군 때야 본격적으로 백령진이 제 구실을 하기 시작했다(지금의 진촌리 소재). 조선 중후기 백령도는 황해우도 옹진의 병마절도사 휘하로 있었으며, 백령진에 파견된 백령 진장()은 수군첨절제사(정3품, 상관)를 겸하며 수령이자 군사령관으로서 즉결심판권 까지 있었다. 첨사는 부장까지 두고 항상 군관 5인의 호위를 받았으니 백령진장은 가히 백령도의 군주였던 셈이다. #[1]

고종갑오개혁으로 진제가 폐지되고, 23부제에서 해주부에 속했으며, 이때 귀양온 반정부 인사들이 개신교를 전파한 게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중화동 교회의 시작이다(1898년 건립, 한국의 두번째 장로교회).

해방 이전까지 황해도 장연군 백령면이었다가, 해방 직후 38선으로 분단될 때 장연군 본토가 북한 관할이 되면서 경기도 옹진군으로 편입되었고, 한국 전쟁 이후 옹진반도마저 빼앗기면서 경기도에 소속한 이름뿐인 옹진군의 소속이 되었다. 남쪽의 청도청도가 같은 면에 속하였으나 1974년 대청면으로 분리되었다. 1995년 3월 1일부로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1. 야사와 역사적 인연

삼국유사 진성여왕 때의 "활을 잘 쏘는 타지"로 알려진 설화가 백령도를 배경으로 한다. 역사적 배경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며 후백제 해적을 막으려고 거타지를 함께 태웠다는 것인데, 풍랑으로 점괘에 따라 홀로 남겨져 신선의 딸을 넘보는 늙은 으로 둔갑한 여우를 퇴치하고 신선의 대접을 받으며 신선의 딸을 아내로 얻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후삼국시대인데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만은 그런 건 차치하자 심청전의 배경 무대로 이 섬과 황해도 본토 사이의 바다 일대를 인당수라고 불렀다고 하며 심청각이 이 섬에 존재한다. 때문에 심청전의 원본이 거타지 설화였을 것이란 추측도 존재한다.

광해군 때부터 귀양지로 종종 사용되었으며, 조식의 제자인 이대기(李大期.1551-1628)는 귀양 와 <백령도지(白翎島誌)>를 지으며 백령도를 '늙은 신의 손 끝에서 나온 마지막 작품'이라고 평했다. 1802년 간행된 <백령진지>는 두무진이 "해로의 지름길이요. 배 대기 편리하여 해적의 출입하는 문지방"이라고 표현했다.

3. 지리

서울과의 거리는 210km이지만, 북한 평양과의 거리는 150km이며 장산곶에서는 15km밖에 되지 않는다. 또 중국 웨이하이와는 226km이고, 산동 반도 최동단에서는 180km, 압록강에서는 215km 정도 된다.[2] 참고로 인천 연안부두까지의 항로 거리는 220km. 당연히 미국유엔의 대 공산권 거점으로 중요하며 그로 인해 대한민국 해병대 6여단이 주둔하고 있다. 중국 화북지역과 해외를 오가는 항로상에 버젓이 있기에 중국 입장에서도 피할 수 없는 섬.

백령도 서북단 항포구인 두무진[3]의 경도는 남한 최서단 지점이다. 의주 정도를 제외하고는 한반도 최서단이라고 해도 될 지경. 섬 전체 면적은 50㎢로 과거에는 46㎢ 정도였으나 90년대 초반 사곶과 콩돌해안 사이를 막고 간척과 더불어 내해를 담수화하여 면적이 넓어졌다. 면적으로 남한의 섬 중 8위에 들며(간척 전에는 12위) 옹진군 관내 섬 중 최대 크기를 자랑한다. 참고로 울릉도가 72.89k㎡ 정도이니 울릉도의 2/3 정도 면적이 되는 셈.

전체적으로 섬이 평탄하고 최고 지점이 200m도 되지 않는 등 고산 지대가 없다. 도서 지역이나 위도가 높고 대륙에 가까운 관계로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의 단점만을 고루 갖춰(…) 황해도 타지역과 비슷하게 연교차가 심하면서 안개나 해풍도 모질다. 해무가 연중 3분에 1을 차지할 정도로 심하다. 물안개로 배가 못뜨는 상황이 잦으니 유의. 게다가 대륙황사의 제 1저지선이기 때문에 황사로 인한 피해가 전국에서 가장 심하다. 그나마 위도가 높아 이 섬까지 오는 태풍이 드물어서 태풍의 영향은 거의 없다.

천연 활주로가 있다. 사곶해안으로 불리우며 전투기가 내려앉아도 모래가 아스팔트처럼 유지된다. 옛날에는 수송기가 이착륙을 주기적으로 했지만 담수화 과정으로 면적을 넓히며 모래 지반이 많이 약해져 지금은 관리만 되는중. 하지만 비상시에는 얼마든지 활주로로 이용이 가능한 백령도의 명물 중 하나다. 실제로 RKSE라는 ICAO 공항코드까지 부여받았다.참조

4. 인문

인구는 5000여명 정도로 주민의 대부분은 1차 산업(농어업)에 의존한다. 그러나 옹진군 관내의 다른 섬들의 주민이 어업에 강하게 의존하는 반면 백령 주민들의 어업 종사 비율은 10% 남짓으로 어업의 의존도가 낮다. 원래는 홍어잡이나 전복, 해삼 등으로 제주도 해녀까지 부를 지경이었으나 1980년대를 피크로 남획으로 인해 어업량이 극감하였다. 그 대신 평지가 많고 농업수의 공급이 풍부하기 때문에 농축산업이 상당히 활발하며 본토의 지원 없이도 농산물의 자급이 가능한 수준. 해병대원 수가 주민만큼 되는데 백령도내 해병대에서는 백령도의 농산물을 우선적으로 수매한다. 쌀은 거의 밖에서 들여오지 않고도 군인들까지 먹을 만큼 생산된다.

다만 상기한 군사적 문제로 인하여 이 곳의 민간인들은 군의 통제를 많이 받는다.

5. 교통

섬의 면적이 워낙 크기 때문에 버스택시가 운행하며, 섬 밖으로 가는 교통은 . 오전과 오후 각 1번씩 운항하는 여객선이 운항하고 있으나 (현재는 오전에 두번있는데 각각 7시와 8시다) 풍랑이나 시정주의보 같은 기상특보가 잦아 1주일에 하루씩은 결항된다고 봐야 한다.[4]

이런 문제로 인해 용기포 여객선 터미널 인근에 3,000톤급 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 신항만이 구축되었고 현재 대형 카 페리가 취항해서 웬만한 악천후에도 배가 오고갈 수 있지만 여전히 기상이 많이 좋지 않으면 카 페리마저 결항되고 있다.

도로 사정은 나쁘지 않은 편으로 90년대 말의 방조제 건설로 섬의 일주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해안가는 군사지역으로 통제되는 곳이 많아 아직까지는 내륙 순환에 그치는 수준.

6. 통신

지역번호는 인천광역시 고유번호인 032번. 인천 본토와 강화군, 경기도 부천시와 같은 번호이다.

7. 각종 떡밥

  • 복불복의 주요 아이템으로 우려먹히는 나리액젓이 바로 이 섬에서 나오는 특산품이다.

  • 한국의 도서 중 몇 안되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섬으로, 상상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본토 공수 없이 자체 생산한다. 특히, 농업이 가능하여 과 같은 식량의 경우 3년간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이 섬에서 본토 수급이 필요한 것들은 군인이나 경찰과 같은 제복 근무자, 의사양반,[5] (군 가족의 경우, 간단한 치료는 군부대 내의 의무실에서 치료받기도 한다..) 공산품이나 차량, 전자제품 같은 공장제 물건 정도이다.

  • 위에서 서술했듯이 황사와 해풍의 영향을 매우 심하게 받기 때문에, 각종 관광안내처에서는 백령도로 관광을 오고자 하는 이들에게 본토에서 차를 가지고 들어가기보다는 렌터카를 이용하기를 권하고 있다. 차량의 피로도가 쉽게 증가하고 차체도 쉽게 더러워지기 때문. 카페리가 2003년부터 중단되어 차를 가지고 갈 수가 없었으나 2012년 새로운 대형 카페리가 취항되어 현재는 차를 가지고 올 수 있다.

  • 천안함 피격사건과 연관이 깊은 섬으로 폭침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섬이다.

  • 람암이나 규사 해변 등으로 인해 지질학적으로도 가치가 높고, 이나 가마우지, 어새와 같은 동물들의 번식지이기 때문에 생태학적으로도 가치가 굉장히 높은 섬이기도 하다. 특히 사곶 해변은 항공기의 이착륙도 가능할 정도의 단단한 강도를 자랑하나, 사곶과 콩돌해안을 잇는 방조제의 건설 이후로는 해류의 변화로 강도가 약화되고 있다고 한다.

  • 천주교의 영향이 매우 강하다. 1970년대 이후에는 개신교 신자의 수가 천주교 신자를 추월했지만 천주교 신부님들의 영향력은 백령도에서 면장 이상이라고 할 만큼 절대적이다. 그 이유는 1959년에 백령도에 미국인 선교사 부(夫) 신부가 선교를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에서 소문난 부호의 아들이었고 존 F. 케네디 前 미국 대통령과 소꿉친구였다. 집안의 재산과 케네디 대통령과의 친분을 이용해서 백령도에 수많은 원조를 끌어올 수 있었고 전후 피폐했던 백령도와 대청도, 소청도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한 때 섬 전 주민의 95%(...로마인가? 아니면 바티칸인가?)가 천주교 신자였었고, 현재도 전 주민의 30%가 천주교 신자이다. 물론 현재 개신교 신자가 급증하면서 영향력이 그 때보다는 많이 줄기는 했으나 현재도 특이하게 주민들은 지역유지에 백령성당 주임신부, 해병 6여단의 군종신부를 꼭 집어넣는다. 이는 아직까지도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뜻이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성공적인 선교 때문에 섬 전통의 무속신앙은 거의 절멸한 상태이다.[6] 인접 연평도와는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 지렁이민달팽이 등의 작은 동물들의 평균 크기가 크다. 지렁이는 굵기와 길이가 으로 착각할 크기. 민달팽이는 엄지손가락 2배 굵기. 섬 왜소화 현상의 이론이 이 섬에서는 반대인 것 같다 섬 거대화 이론의 좋은 예이다

  • 백령도의 고등학생들은 1년에 2번씩 예비군 훈련을 받는다는 소리가 있지만 루머다. 대신 민관군 사격대회라는 것이 있어서, 주민들도 사격대회에 참가하며, 아줌마 스나이퍼도 존재한다는 소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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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정은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해병 6여단 병력이 백령도 주민을 먹여살린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라서, 해병 6여단장의 입지가 가장 강하다. 면장님 지못미
  • [2] 이상 직선거리 기준
  • [3] 하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항구다...
  • [4] 배가 뜬다고 해도 안심하지말자. 파도가 높다면 헬게이트를 맛볼 수 있다.
  • [5] 외과수술을 할 수 있는 민간 의사는 아예 없어서, 민간인이 크게 다치면 무조건 인천으로 후송해야 한다.
  • [6] 하지만 해병 6여단 신병들은, 귀신은 바다를 건널 수가 없는데 백령도에서는 귀신의 힘이 너무 세서(과거 섬 내 마을 간 극심한 좌우대립 등으로 죽은 사람이 많다) 무당들도 못 다스린다고 섬에 들어오지 않아서 무당이 없다는 말을, 부두에서 내린 직후부터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