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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last modified: 2015-04-11 19:56:57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단초
2.1. 왕위 계승권
2.2. 가스코뉴 지배권
2.3. 플랑드르 지배권
2.4. 스코틀랜드 문제
3. 경과
3.1. 시대 구분
3.2. 개전
3.3. 제1기(1337~1360)
3.3.1. 슬로이스 해전(1340년)
3.3.2. 크레시 전투(1346년)
3.3.3. 흑세자 에드워드 왕세자와 푸아티에 전투(1356년)
3.4. 소강기(1360~1415)
3.4.1. 프랑스의 재기와 화평 협상
3.4.2. 양국의 내전과 전쟁의 재개
3.5. 제2기(1415~1453)
3.5.1. 아쟁쿠르 전투(1415년)
3.5.2. 파죽지세 영국군
3.5.3. 풍전등화의 프랑스
3.5.4. 오를레앙 전투와 잔 다르크
3.5.5. 프랑스의 승리
4. 의의

1. 개요

영국프랑스 사이에서 1337~1453년, 116년간 벌어진 전쟁.

116년 다 싸운 건 아니고 싸우다 쉬었다를 반복하다가 전장이 일부 지역에 국한되기도 하고 이리저리 확대되기도 하는 등 116년 동안 내내 치고 박은 전쟁은 아니다. 빚 때문이다 100년 동안 내내 싸웠으면 나라 둘 다 절단났겠지 보통 가스코뉴 지방에서 벌어진 전면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같은 개념으로 17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엽까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미국 독립전쟁-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이어지는 양국간의 충돌을 제2차 백년전쟁(1701~1815)[1]으로 부르기도 하나 이 경우는 교전 당사국이 영-프 양국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어서 잘 통용되지는 않는다.

프랑스는 전쟁 초중기 개판 of 개판인 지휘로 영국군에게 처발리는 일이 많았다. 석궁병들이 파비스도 장비 못했는데 싸우라고 내몰고, 영국 장궁병들의 화살에 피해가 급증하자 파비스 챙기러 군장으로 돌아가는데 적전 도주라고 칼질하고, 석궁병들이 사격전 하는데 그 뒤로 기사들이 돌격하였으며, 석궁병들이 사격전을 위해 진형을 갖추는데 병대를 전진시키는 등 장궁병을 견제해줄 석궁병들의 발목을 열심히 잡고 늘어지다 못해 팀킬을 해줬다. 아~ 망했어요~ 보기궁 조합이 상성으로 개박살이 났죠!

특히 아쟁쿠르 전투에선 크레시 전투 등 지난 전투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 등 선대를 잃은 기사들이 헨리 5세를 조져 복수하겠다고 중앙으로 몰려들다 지들끼리 엉켜 진형이 무너지고 그들을 구하겠다고 돌격해온 후속 기사들은 장궁병들의 화살에 말을 잃고... 진형이 무너지고 기마병이 무너지고 진형이 황폐화되고 이러한 현실 속에 2열, 3열 개돌시켜서 뒤엉켜서 병맛이 된 상태에서 영국군 기사와 보병대, 그리고 진지구축용 도끼망치를 들고 온 장궁병들에게 모조리 한덩이 보쌈 세트가 되어 살당했다. 두 번의 패전 모두 개별 영주가 다수인 기사 들이 왕의 권위를 개똥만도 못하게 여기고 지휘,통제에 잘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준이 모호한 면은 있지만 일단 역사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간 전쟁. 335년 전쟁과 같은 전쟁도 있지만, 이런 전쟁들은 실제로는 교전이 없거나, 교전이 저 기간 중에서 극히 일부분에만 벌어졌기 때문에 국제법 상으로만 장기간인 전쟁이지 역사적으로는 최장기간의 전쟁이라고 볼 수 없다. 아마 국제법 상으로만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국제연합군과 조선인민군-중국 인민지원군 사이는 법적으로는 아직도 전쟁 중이지만 역사적으로는 1950년에서 1953년까지 벌어진 남한-북한 간의 교전행위만을 한국전쟁으로 파악한다. 당장 미국은 중국과 동맹관계는 아닐지라도 수교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한 점을 파악했다면 법적인 전쟁을 논하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치면 좀 극단적인 사례로는 2131년짜리 전쟁도 있다(...).

2. 단초

전쟁의 단초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2.1. 왕위 계승권

왕위 계승권 다툼은 기존 카페 왕가의 왕인 샤를 4세(재위 1322~1328, 단려왕)가 직계 없이 6년만에 사망하면서 시작된다.

샤를 4세의 뒤를 이을 후보로 외손자이자 영국 왕인 에드워드 3세(당시 15세)가 있었고 사촌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대한민국 민법대로라면 당근 에드워드 3세가 상속권자지만, 영국 왕이란 것도 있고 기존 살리카법에서 여성이 포함된 가계로의 상속을 부정하던 것도 있고 해서[2] 결국 필리프가 필리프 6세로 즉위, 왕위를 계승하여 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에드워드는 가만 있었냐고? 따지기는 했는데 하필 그때 로버트 1세(로버트 브루스, 1274 ~ 1329, 재위 1306~1329)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대에게 처절하게 발려버리면서 스코틀랜드의 독립마저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 귀족들이 에드워드 3세에게 호응하지 않았던 것도 더 나서기가 어려운 요인이 되면서 방치, 묵인하고 있었다가 나중에 이를 명분 삼아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아무리 상황이 불리해도 당근 외손자가 계승해야 한다는 명분은 실제로도 그럴 듯한 명분으로 작용했다. 반면 필리프 6세는 필리프 6세 대로 왕위에 위협이 되는 영국 왕의 봉지를 통제하려고 했다. 그 두 떡밥이 가스코뉴와 플랑드르였다.

2.2. 가스코뉴 지배권

노르망디 공작이던 윌리엄 1세가 영국 왕이 된 이후 영국의 왕은 왕이긴 한데 프랑스 왕의 신하기도 하다는 기묘한 위치였다.[3] 여기에 가스코뉴가 더해졌다.

스코뉴 지방은 아키텐 영지의 일부로 플랜태저넷 왕가의 창시자인 헨리 2세가 아키텐의 상속녀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이 지방을 가져갔다. 여긴 프랑스 남서부의 노른자 같은 땅에다 당시 가스코뉴의 포도주 무역 세금이 영국 전 지방의 세금과 맞먹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서 프랑스와 영국은 오래 전부터 이 땅을 놓고 티격태격했다. 이런 노른자위 땅을 두고 양국이 치고박은 건 당연히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서 1201년 ~ 1259년, 1226년 ~ 1243년, 1294년 ~ 1298년, 1324년 ~ 1327년에도 이미 전쟁이 있었다. 특히 필립 2세가 벌인 첫 전쟁은 프랑스가 부비뉴 전투으로 영국을 관광보내고 1215년 왕세자 루이(후의 루이 8세)가 런던을 일시 점령해 대관식을 목전에 둘뻔도 했다. 이는 존 왕의 급서와 헨리 3세의 즉위로 저지되었으나, 훗날 헨리 5세가 파리를 점령하고 프랑스의 왕이 되려고 한 것을 생각하면 프랑스는 200년만에 역관광을 당했던 것이다. 영불제국의 꿈은 망했다

2.3. 플랑드르 지배권

플랑드르는 지금의 벨기에 지방으로 북부 유럽 상권의 중심지로 유명한데 일단 필리프 4세 이후 프랑스가 이 지역에 세력을 갖고 있었지만 영국과 워낙 경제적으로 밀접한 지방이라(영국은 양모 수출국이었고 플랑드르는 유명한 모직물 제조 지역이었다) 항상 대립이 존재했다. 결국 1300년 플랑드르는 프랑스에 합병되었지만 플랑드르 도시들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하여 1302년 트레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긴장은 지속되고 있었다.

2.4. 스코틀랜드 문제

여기에 더 불을 붙인 건 스코틀랜드 문제였다. 영국은 샤를 4세가 죽은 다음해 바로 로버트 1세가 죽자 스코틀랜드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로버트 브루스의 아들인 이비드 2세(1329 ~ 1371)가 1334년 프랑스로 도망치자 영국은 데이비드 2세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영국은 맞불을 놓는 식으로 필리프 6세(1328~1350)의 이복동생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아토이스 백작 로베르 3세를 영국에 데리고 왔고 양국의 갈등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3. 경과

3.1. 시대 구분

대부분의 시기 구분에서 1360년의 휴전까지를 1기로 두는 건 합의가 이루어진다. 가끔 1380년대로 두는 케이스도 있는데 이런 경우엔 간헐적인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에드워드 왕세자의 사망을 휴전기의 기준으로 한 것.

그러나 이후 구분이 문제인데, 심재윤의 <서양중세사의 이해>는 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2기(영국 우위)와 3기(프랑스 우위)를 가르고 있고, 위키피디아와 Osprey 출판사는 1429년 잔다르크의 활약을 계기로 2,3기와 4기를 가른다.[4] 끝으로 임브릿지 대학은 1396년[5]과 양측의 왕이 모두 사망한 1422년을 기준으로 나누고 있다. # 뒤에보듯 휴전으로 취급되는 여러 기준도 1340년~1355년도, 1375년, 1396년도 등이 있어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다.

이 항목에서는 영국 왕의 프랑스 상륙 여부를 기준으로 시기를 제1기 - 소강기 - 제2기로 가르고 있다.

3.2. 개전

이런 저런 갈등이 씨앗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필리프 6세아비뇽 유수를 통해 확립한 프랑스 국왕의 기독교 군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십자군을 준비한다. 그 과정에서 십자군 원정에 대한 교황의 인가를 기다렸으나 필리프 6세의 십자군 준비에 대해 과도한 부담(...)을 느낀 교황이 오히려 십자군 원정을 인가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종교적 열정 하나만 가지고 교황이 십자군을 가라고 부추겼다면 이제는 교황이 십자군을 말리는 시대가 온 것이다.

덕분에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에 대해 과도한 빡침을 느낀 필리프 6세는 일종의 무력 시위를 위해 마르세유에 집결시켰던 함대를 자신의 본거지인 북부 프랑스 지방으로 이동시키려고 했는데 문제는 이들 함대에는 프랑스와 함께 영국의 앙숙이었던 스코틀랜드 소속의 함선들이 동맹 명목으로 포함되어 있었고 지중해에 있는 함대를 북부 프랑스로 이동시키려 하자면 바로 영국의 앞마당인 도버 해협을 통과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안그래도 언제든지 한 번은 싸우게 될 것 같아 노심초사하던 차에 코 앞에서 대규모의 프랑스 함대를 구경하게 된 영국의 입장은 당연히 . 이에 에드워드 3세는 필승의 일념으로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명목으로 의회의 동의를 얻어 1336년 프랑스 왕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이 때 보낸 선전포고의 시작 문구가 걸작인데 "자칭 프랑스 왕이라는 발루아의 필립은 봐라..." 안그래도 말 안듣는 교황 때문에 빡쳐 있었던 필립 6세는 난데없는 영국 왕의 어그로에 눈이 뒤집히고 만다. 결국 필리프 6세는 1337년 무력으로 아키텐 영지를 점령하고서 자신의 신하인 노르망디 공작 에드워드 3세의 아키텐 영지를 적법한 프랑스 왕으로서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3.3. 제1기(1337~1360)

3.3.1. 슬로이스 해전(1340년)

선전포고 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에 를 수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모직산업으로 먹고 살던 플랑드르에게 이것은 심각한 타격이 되었고 결국 플랑드르 도시들은 살기 위해 프랑스에 맞서기로 결심했다. 1337년 야콥 반 아르테베르테가 겐트 강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래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 결국 플랑드르 백작이 쫓겨나고 1338년 에드워드 3세가 앤트워프에 상륙하면서 1340년 플랑드르 도시들은 에드워드 3세에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플랑드르는 프랑스에 충성을 맹세했던터라, 에드워드 3세는 그 김에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노르망디의 영주로서 프랑스 국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던 것을 파기하고 스스로 프랑스 국왕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혹은 플랑드르의 핸트 시장이란 이야기도 있다. 율리우스력 1340년 1월 26일.)

플랑드르를 확보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루트비히 4세와 동맹을 체결했고 에노 백작 등 네덜란드 저지대 지역의 귀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북부 프랑스로 침공해 들어갔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가 전쟁자금을 조달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동안 필리프 6세는 전면전을 피했고 용병으로 고용한 귀족들도 밍기적거려서 전쟁은 지지부진했다.

교착 상태에 빠진 전쟁을 타개하기 위해 필리프 6세는 바다로 눈을 돌렸고 영국 남부해안 지역을 습격하여 가스코뉴를 약탈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곧 불해협의 제해권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되었지만 1340년 6월 24일 일어난 로이스 해전에서 영국군이 프랑스 함대 190척을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다[6]. 하지만 육상에선 프랑스군이 영국군에 승리를 거두면서 쌤쌤이 돼버렸다(...). 묘하게 바다에서 강한 영국육지에서 강한 프랑스라는 구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때에도 이어졌다. 뭔가 전통? 포에니 전쟁이냐

결국 1340년 9월 25일 양국은 2년동안 휴전하기로 결정했다. 휴전의 배경에는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면서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3.3.2. 크레시 전투(1346년)

하지만 휴전은 1년 만에 깨졌다. 1341년 에드워드 3세는 1341년 4월 장 3세의 사망에 따라 르타뉴 공작령의 후계 문제가 불거지자 본격적으로 프랑스를 공격했다. 장 3세의 조카인 잔느(팡테블 백작 - 계승순위가 우선됨)와 장 3세의 배다른 동생인 장 드 몽폴(몽폴 백작 - 어머니의 여백작 지위를 승계)의 후계대결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브르타뉴의 자체 관습으로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할 때는 프랑스가 살리카법을 옹호했는데, 이때는 영국이 살리카법을 옹호하면서 장 몽폴과 손을 잡게 된다. 몽폴은 반대하는 대다수의 제후를 무찌르고 브르타뉴의 수도인 낭트를 손에 얻었다. 프랑스는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브르타뉴에 공격을 가했고, 영국은 이에 맞서 개입했다. 프랑스는 10월 몽폴을 포로로 잡았으나 아내 잔느가 몽폴의 아들인 장(장 4세)의 후견인을 자처하면서 서브르타뉴의 에느본에서 강경하게 농성했다. 죄다 잔느야 그래서 "두 명의 잔느가 싸웠다"라고 일컬어진다.

1342년에 벌어진 브르타뉴의 일련의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지만 정전이 종결되고 1346년 에드워드 3세와 영국군의 군대가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다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에드워드 3세는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가면서 전쟁을 벌였고 덕분에 이탈리아에서 잘 나가던 가문 하나[7]를 파산크리 먹였다고 하는데 일단 프랑스 쪽의 대응이 침착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영국군이 노르망디에서 플랑드르까지 가는 동안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았다. 결국 영국군은 쪼들리다 못해 비용을 자체 조달하고 프랑스군을 끌어내기 위해 행렬(chevauchee)을 자행했다. 가는 길에서 돈이 되는 건 다 약탈하고 불 지르고 다니면서 농촌을 황폐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런 약탈은 중세 전쟁에선 기본이었으나 영국군은 아예 싸그리 털어먹고 불 질러버린다는 점에서 한층 더 악독했다(...) 청야작전?

결국 프랑스군은 약탈 행렬을 더 두고 보기도 그렇고 충분한 군대도 모으고 해서 1346년 크레시에서 영국군과 격돌했다. 하지만 중세 전쟁사에 유명한 크레시 전투는 1만명의 영국군이 3만명의 프랑스군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면서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단, 이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사료마다 다르다. 영국군은 6천~1만2천, 프랑스군은 2만~10만으로 나온다. 영국군은 1만~1만2천, 프랑스군은 3만~4만으로 보는 게 중론. 중기병 수로는 영국 2300~4천 대 프랑스는 최소 2/3에서 대부분이 기병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4~6천명이 제노아의 석궁병들. 여하간 프랑스가 압도적으로 수가 많았다.

이에 대해서는 장궁을 이용한 강력한 투사 무기를 이유로 드는데 사실 좀 더 복합적이다. 이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영국군이 언덕 위에서 좋은 자리 잡고 있음
  • 롱보우를 이용해서 상대를 투사 무기로 압도함[8]
  • 영국군이 계속 화살을 퍼붓자 프랑스군이 어쩔 수 없이 언덕 위로 올라옴
  • 영국군이 양 날개에서 화살비를 쏟아붓고 프랑스군은 화살비를 피하느라 중앙으로 밀리는 바람에 과다 밀집 상태에 빠짐
  • 프랑스 기마대는 일단 말뚝과 목책에 저지되고 지친 프랑스군을 언덕 위에서 쉬고 있던 영국 하마(下馬) 기사[9]가 격퇴
  • 프랑스군이 퇴각하면 영국 하마기사들이 다시 말을 타고 프랑스군을 추격

라는 식으로 기본형이 만들어진다.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1만~3만으로 추정되며 왕자 11명과 기사 1,200 여명이 포함된 수치라고 한다. 그리고 사망자 중에는 필리프 6세(당시 프랑스 왕)의 동생인 알랑숑 백작 샤를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친부인 룩셈부르크 백작 요한 1세 등 화려한 인사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이제 프랑스 북부 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방 천지로 약탈 행렬을 자행하기 시작, 프랑스 전역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프랑스군은 모롱 전투[10]등 몇 차례 똑같은 방식으로 덤볐지만 영국군의 필승 패턴에 막혀 군대만 꼬라박기 일쑤.

이런 가운데 양측은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중재로 1355년까지 휴전 협정을 맺는 문제를 협상했고, 그 와중에 흑사병이 널리 퍼지자 아예 영구적인 평화 협정을 맺자는 이야기도 나오게 되었다. 휴전 협정 교섭 중 필리프 6세가 사망했고(1350) 그 뒤를 이어 장 2세(1350~1364, 선량왕)가 즉위했다.

1354년 아비뇽에서 영구적인 평화 협정을 맺는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장 2세에게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거나 그 대신으로 아키텐 영토의 인정 및 투레인, 앙주, 메인 등의 영토를 할양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장 2세 역시 님하 즐 하며 이를 거부했고 이듬해 1355년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다.

3.3.3. 흑세자 에드워드 왕세자와 푸아티에 전투(1356년)

이러던 와중에 또다시 벌어진 큰 전투가 바로 푸아티에 전투(율리우스력 1356년 9월 19일)로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흑태자(에드워드 왕세자)가 이끌던 군대가 프랑스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대담한 약탈 행렬을 벌이자 프랑스 왕 장 2세가 이를 가로막은 전투다. 프랑스군은 기존의 영국군 하마 기사 전술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이번에는 말을 버리고 무거운 갑옷을 걸친 채 언덕 위를 향해 개돌하는 만행을 저지르다 대패. 물론 장궁 화살에 의한 피해는 확실히 줄었지만... 기사들이 무슨 헐크도 아니고 체력이... 이 전투에서 장 2세마저 사로잡히고 만다.

흑태자는 장 2세를 극진히 대우하긴 했지만 결국 몸값은 다 뜯어냈고, 심지어 프랑스가 몸값을 지불할 돈이 없자 장 2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직접 영국으로 건너가 스스로 포로(!)가 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기사도 돋네 좋게 말하면 대인배지만 왕으로는 확실히 글러먹었달까.

프랑스에선 왕까지 사로잡히자 장 2세의 아들인 샤를 황태자(뒤의 샤를 5세, 현명왕)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부회의 평민 의원들은 티엔느 마르셀을 중심으로 국왕이 국정 운영 못하게 하자 란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제안을 하는 바람에 1년여에 걸쳐 협상을 끝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평민 의원들과 협상을 포기한 샤를 황태자는 자신을 국왕 섭정으로 선포하고 1358년 프로방스와 콩피에뉴에서 별도의 삼부회를 소집해 군자금을 확보했다. 농민들에 의한 크리의 난이 일어나자 샤를 황태자는 이를 평정하고 파리로 쳐들어가 파리를 포위하고 파리 내에 내분을 유도해 에티엔느 마르셀을 척살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의 문제가 정리되면서 협상이 재개되어 1360년 영국은 프랑스에게 확장된 아키텐과 칼레calais, 퐁티웨Ponthieu와 푸아투Poitou를 보장받는 대신 프랑스 왕을 칭하는 것을 그만두었다(1360년 휴전). 그리고 1364년, 장 2세가 런던에서 죽었다.

3.4. 소강기(1360~1415)

3.4.1. 프랑스의 재기와 화평 협상

푸아티에 패전으로 프랑스가 군대를 시원하게 말아먹은 이후 영국군이 프랑스 전역에서 깽판을 치고 다니던 중 프랑스에서는 르트랑 뒤 게클렝이라는 장군이 등장했다. 게릴라 전술에 탁월한 르타뉴 출신인 게클렝은 탁월한 게릴라 전술을 바탕으로 약탈 행렬을 거듭하는 영국군을 기습하여 격파했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먼치킨 유닛 흑태자(에드워드 왕세자)는 각지에서 프랑스, 스티야[11]을 쳐바르면서 다녔지만[12] 건강도 악화되어 후기에는 가스코뉴 지방에만 웅거했고 그 사이에 게클렝은 다른 영국 장군의 군대를 게릴라전으로 괴롭히는 한편 착실히 영국군이 점령한 프랑스 성채를 회복했다. 짤짤이 노가다

장 2세의 뒤를 이은 샤를 5세와 게클렝의 피눈물 나는 노력과 영국군의 삽질이 겹쳐서[13] 프랑스는 1380년대에 이르러서는 노르망디와 가스코뉴를 제외한 기존 영토를 거의 다 회복했다.

브르타뉴는 1364년 올레 전투에서 결국 친영인 몽폴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최후의 결전에서 샤를 드 브로와가 사로잡히고, 게클랑이 포로가 되면서(!) 잔느 여백작은 승계를 포기했고, 결국 몽폴의 아들 장 4세가 브르타뉴의 공작으로 프랑스와 화해했다. 그러나 장 4세가 몰래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으려고 했던 것이(1372년) 발각 되면서 장 4세는 다음해 추방되고 브르타뉴는 프랑스의 직속영지(1378년)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잔느 여백작까지 브르타뉴의 독립을 위해 들고 일어나면서(!) 샤를 6세의 즉위에 따라 1381년 장 4세가 다시 복귀했다.

이런 와중에 때마침 에드워드 왕세자가 사망(1376)하면서 1396년까지 20년간 영불의 본격적인 화평 협상[14]이 진행, 이후 1415년까지 평화가 완수되었다. 그러나 이 화평을 빌미로 영국은 내전이 벌어지니...

3.4.2. 양국의 내전과 전쟁의 재개

흑태자의 요절에 이어 에드워드 3세도 사망하자(1377)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 2세가 즉위했으나, 인두세 문제로 영국은 내전에 휩싸인다[15]. 화평이 대강 종결되고 나자 리처드 2세는 반격에 나서 글러스터 공과 알란델 백작을 처형(1397년)했으나, 아일랜드 원정에 빈틈을 보이며 결국 패배해 런던 탑에 유폐되었다. 그렇게 해리포드 백작의 아들 랭커스터 공작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랐다(랭커스터 왕조, 1399년). 영국 중부의 노섬벌랜드와 웨일즈, 웨일즈 근처의 변경 영주들이 헨리 4세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헨리 4세는 치열한 전투 끝에 이들을 제압했다.

한편 프랑스는 샤를 5세(재위 1364~1380)의 아들인 샤를 6세(재위 1380~1422, 친애왕)가 돈키호테급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기사도 숭배자였는데 진짜로 으로 미쳐버렸다. 결국 부르고뉴 공작파와 오를레앙 공작파(아르마냐크파[16])가 섭정 후견의 실권을 두고 박터지게 싸우기 시작했다. 브루고뉴 공작 장(플랑드르 백작을 겸임한 필립 공작의 아들)이 오를레앙 공작 루이(재무장관 겸 아키텐 총독)를 살해할 정도. 프랑스에서도 자끄리의 난이라는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같은 기간엔 교황청마저도 분열되었다(...) 1378년 로마로 돌아간 교황의 후계가 누가 정통이냐는 문제가 불거져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의 아비뇽 교회(친프랑스)와 교황 우르바노 6세의 로마 교회(반 프랑스)로 대립되었다.[17] 자, 이제 대체 누가 화해를 주선할 것인가?

쿨타임 됐다. (적군을) 까자!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3.5. 제2기(1415~1453)

3.5.1. 아쟁쿠르 전투(1415년)

헨리 4세(재위 1399 ~ 1413)의 뒤를 이은 헨리 5세(재위 1413 ~ 1422)는 의회의 지지를 끌어내고 세력 정리도 할 겸 이 기회에 다시 내분에 빠진 프랑스를 공격했다. 1415년 부르고뉴 공작파와 친교를 맺고 또 노르망디에 상륙한 헨리 5세는 칼레까지 진군했고 샤를 6세(정확히는 샤를 달브레 장군의 대행)도 여기에 맞서서 응전을 준비했는데 에드워드 3세가 처음에 겪었던 일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지친 영국군을 향해 프랑스군이 집결해 공격한 것... 까진 좋은데 1415년 벌어진 이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크레시 전투처럼 처절한 삽질을 거듭하다 자폭했다! 안 그래도 점성 높은 아쟁쿠르의 진흙탕()+마비에 병목지형으로 프랑스군이 우르르 밀려드는데 영국군이 장궁으로 반격하자 밀려난 부대가 뒤로 후퇴하다가 뒤섞여버린 것. 보쌈인가 그래도 프랑스군은 어떻게 영국군 본진까지 밀어붙이긴 했는데 프랑스 하마 기사들이 영국 하마 기사들과 싸우다가 잔뜩 지친 가운데 경무장한 영국군 궁수들이 측면을 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버렸다. 오오 위대한 삽질... 총사령관인 샤를 달브레도 여기서 전사했다. 같은 패턴의 패전을 반복하는 것은 묘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한 세대를 전멸시켰다는 프랑스 육군의 삽질을 연상시킨다. 삽질로 크게 진 후 게릴라로 땜빵하는 건 프랑스 종특인가 게릴라로 땜빵하진 않고 잔 다르크로 땜빵했다

3.5.2. 파죽지세 영국군

부르고뉴파의 도움까지 얻은 영국군은 베르네유(Vernile)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18] 이어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가의 제임스 1세(재위 1406 ~ 1437)의 지원군을 격파하며 승기를 확실히 잡았다.

샤를 황태자의 계책으로 부르고뉴 파는 잠시 이탈(1419)했으나 당사자인 부르고뉴 공작이 오를레앙 파에 암살되면서 다음 대 공작은 영국에 확실히 달라붙게 되었고 결국 1420년 프랑스 왕비 이자보가 샤를 6세가 죽으면 황태자 대신 헨리 5세에게 계승권을 준다는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헨리 5세가 골골한 샤를 6세에 이어 프랑스의 앙리 2세가 될 수 있던 순간이었다. 프랑스는 당시 앙리 1세만 있었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헨리 5세가 죽었다!!(음?)

그렇다. 1422년 헨리 5세가 35살의 나이에 급서하고 9개월 먹이 헨리 6세(재위 1422~1461)가 왕위에 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샤를 6세는 그로부터 2개월 후에 사망했고, 그후 프랑스 왕위는 1429년에 샤를 7세가 즉위할 때까지 잠시 공석이 되었다[19].
2개월 후 샤를 6세도 서거했고 헨리 6세가 조약에 따라 최초의 영불 공동왕이 되었지만 11개월짜리 아기가 영불왕이 된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졌다.

3.5.3. 풍전등화의 프랑스


당시 영불전황 지도

하지만 영국은 아직도 여러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영국은 언플로 황태자가 샤를 6세의 친자가 아니고 오를레앙 공작과의 스캔들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퍼트렸다. 그렇기에 트루아 조약이 성립이 가능했다는 논리였고 또 오를레앙 공작의 땅에 있는 샤를 도팽의 세력을 약화시키기에도 매우 적절한 선전이었다.

거기에 영국은 또 하나의 정통성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랭스였다. 프랑스 왕은 대대로 파리가 아닌 랭스에서 대관식을 했는데 바로 부르고뉴의 주도가 랭스였고 영국은 부르고뉴와 동맹 관계였기 때문이다. 샤를이 정식으로 프랑스 왕권을 주장하려면 파리 뿐만 아니라 랭스까지 회복을 해야 할 판이었다. 덧붙이면 프랑스는 아비뇽 교회마저도 교황이 난립하는 반면 영국은 어떻게든 한 명의 로마 교황이 있었다. 게다가 오늘날 가톨릭에선 분열시대의 아비뇽 교황은 정통 교황이 아닌 대립 교황으로 본다.

게다가 영국군은 아직 건재했다. 쐐기를 박기 위해 섭정인 랭커스터 공작 베드포드 존과 글로스터 공 험프리는 남진을 계속했으며 기어이 1428년에는 샤를의 본거지가 목전인 목전인 아르 강까지 남하했다.

영국군의 다음 목표는 를레앙이었다. 오를레앙은 앞서 말했듯 샤를을 돕는 마지막 대영주의 요충지로서 함락될 경우 루아르 강을 건너 황태자인 도팽[20] 샤를(샤를 7세, 재위 1422~1461, 도팽 즉위는 1417년)의 본거지인 시농까지 점령이 가능했다. 말 그대로 여기까지는 프랑스 왕국의 사망 플래그였다.

하지만 그렇게 영국군이 주변 요새를 전부 다 무력화 시키고 오를레앙을 꿀꺽하려던 순간 나타난 인물이...

3.5.4. 오를레앙 전투와 잔 다르크

바로 그 유명한 잔 다르크. 잔 다르크와 프랑스군은 성공적으로 오를레앙에 입성한 뒤 농성이 아닌 야전으로 영국군을 몰아내버렸다(1429년 5월). 오를레앙 공방전의 승리 이후 잔 다르크는 1429년 6월 파타이 전투에서 전설적인 명장 보트 경의 군대마저 아쟁쿠르와 똑같은 방식으로 역관광을 시켰고 심지어 트루아와 랭스까지 함락시키면서(1429년 7월) 부르고뉴를 관광시켜버리고 샤를을 정식 프랑스 왕 샤를 7세로 즉위시키면서 전장의 추를 프랑스 쪽으로 돌려놓는다.

잔 다르크 자신은 파리까지 수복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일단 왕위에 오른 뒤 상황을 안정시키려던 온건파 샤를 7세와 기존 프랑스 귀족의 견제를 받다 이듬해 콩피에뉴 전투(1430년 5월)에서 사로잡혀 화형(1431)당했다. 잔 다르크(1412~1431)가 활약한 시간은 채 2년이 되지 않지만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의 역할은 지대하다.

잔 다르크의 승리 요인으론 역시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는 것. 잔 다르크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노아 경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군 1,000명이 영국군 200명만 만나도 ㅌㅌㅌ할 정도로 심각한 모랄빵 상황이었는데 잔 다르크의 등장 이후 이것이 사라졌다고 한다. 아마 성처녀라는 이미지에 스스로도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우는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에 뷔로를 비롯한 유수의 대포 전문가의 활약도 들긴 하는데 대포가 활약하려면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이유는 아닐 것 같다.

3.5.5. 프랑스의 승리

이후 프랑스군은 1436년 파리를 수복하고 본격적으로 영국군을 몰아내기 시작한다. 영국군은 설상가상으로 요크파와 랭커스터파의 대립이 슬슬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어서 제대로 전력 투입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21] 여기다가 그동안 앙숙이던 부르고뉴 공 필리프가 프랑스왕 샤를 7세와 화해하고 영국과의 동맹을 단절하면서(1431년, 1435년) 더 이상 프랑스 내에서의 친영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1450년 프랑스군은 포미니(폴미니) 전투에서 대포를 이용하여 영국군을 격파했다.충공깽이다 장궁잽이 새끼야! 사실 대포 자체가 살상력이 어마어마했다기 보다는 프랑스군이 대포로 포격하자 영국군이 장궁으로 언덕 위에서 버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우세한 프랑스 병력과 기마대에 쳐발리는 식이었다. 포미니 전투를 끝으로 오랫동안 영국령이었고 영국왕의 근거지였던 르망디마저 프랑스 손에 떨어졌다.

뒤이어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장 뷔로가 이끄는 군대가 마지막으로 보트 경이 이끄는 영국군의 분전을 분쇄하고 보르도 시를 포함한 가스코뉴를 점령,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영국군을 몰아내버렸다. 나약한 헨리 6세가 앙주 등의 주요 영토까지 칼레를 위해 포기하면서(1475년) 영국은 더 이상 프랑스에 전쟁을 걸 명분을 상실했고, 이것이 백년전쟁의 끝이었다. 샤를 7세는 나라를 구원한 승리왕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칼레[22]는 1558년까지 영국의 영토로 남아 있으면서 영국산 양모를 집산하는 항구로 기능하면서 재정 수입의 35%를 담당하는 노른자 땅이었지만, 이후 영국피의 메리 메리 1세가 남편 펠리페 2세를 도와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와 전쟁했다가 이 지역을 빼앗기고 만다. 이후 되찾지 못하면서 영국은 진짜로 섬나라가 되었다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지브롤터를 차지하면서 유럽 개입 교두보를 다시 확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의의

백년전쟁을 통해 본격적으로 영국프랑스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 전까지는 영국과 프랑스가 왕도 다르고 정치 체계도 달라도 딱히 서로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컨대 프랑스 귀족이 영국 귀족이기도 했고 영국 왕의 측근이 프랑스에 영지를 갖고 있고 프랑스에 영지를 갖던 귀족도 영국 국왕 편을 드는 등등. 이것이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영국과 프랑스를 별개의 국가로 확연히 분리시켜 놓았다. 사실 영국의 귀족이나 왕족들은 영어 대신 프랑스어만 썼고, 이것이 중세 영어를 고대 영어와 크게 다르게 바꾸어놓게된다.

나아가 기마대 행렬은 프랑스 농촌을 크게 망가뜨려 놓았다. '영국군이 프랑스 농촌 기반을 파괴->돈 없어진 프랑스가 용병 관리 못함->용병이 다시 프랑스 마을을 텀->땅과 집을 일은 프랑스 농민이 냅더적이 됨' 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마대 약탈 행렬이 오히려 거래 규모를 확대시켜 결국 프랑스의 국부를 증대시켰다는 반론도 있다. 무조건 털기만 한 건 아니고 일단 병사들도 이것저것 사고 팔고하는데 여기에 마을 사람이나 상인이 들러붙어서 거래 규모가 커졌다는 이론인데 꽤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흠좀무.

백년전쟁 이후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국왕권을 강화해갔다. 샤를 7세는 정부 조직을 재편하고 고등법원을 일부 지방에 설치했으며, 1438년의 부르주 칙령으로 프랑스의 교회가 교황청이 아닌 왕의 직속에 가깝게 되면서 왕권(특히 세금)이 증대되었다. 또 1448년에는 새로운 상비군 조직이 완료되었다. 루이 11세(재위 1461 ~ 1483) 때에는 부르고뉴 공의 군대가 먼치킨 스위스 용병대에게 쳐발리자 프랑스는 부르고뉴·오를레앙·브르타뉴에 이어 앙주, 로방스를 차례로 직속으로 흡수했다. 프랑스군은 스위스 용병을 적극적으로 고용하고 포병 전력을 증강시켜 1500년대 초까지 유럽 최강국으로 떠오른다. 문제는 그때 등장한 상대가 뭐든지 튕겨내는 스페인 테르시오. 지못미

영국은 영국대로 카스티용 전투에서 탈보트 경이 전사하자 더 이상 요크 가문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졌고 나약한 헨리 6세 하에서 양 세력은 장미전쟁으로 격돌한다.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거쳐 영국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게 되고 그렇게 하여 등장하는 왕가가 바로 튜더 왕가다. 추가로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하게된 영국은 대륙국가에서 완전한 섬나라/해양국가화 하게되었고, 이것이 섬에 고립된 영국이 본의 아니게 해양진출에 목매게 했다고 볼 수도 있을것이다.

결국 백년전쟁은 양국 모두에게 중세 봉건시대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을 알리는 심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초엽[23]까지 가는 오랜 라이벌 대결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우연히도 같은 1453년에 동쪽에서는 콘스탄티노플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당하면서, 1453년은 중세와 근세를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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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역시 114년의 기간을 자랑한다. 오오(루이 14세 시절부터 나폴레옹 1세가 프랑스에서 쫓겨날 때까지)!
  • [2] 살리카법은 애시당초 프랑스에서 여성 왕위 계승을 막으려고 1316년에 확대해석을 한 결과물이었다. 살리카법 참조.
  • [3] 이는 프랑스 왕국의 봉작인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프랑스의 봉신인 것이며, 영국 왕이라는 작위가 프랑스의 왕보다 하위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 [4] 이는 중간기를 길게 잡았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는 1369년부터 1389년까지를 프랑스가 영토를 탈환하는 2기, 이후 잠시 휴전기를 두었다가 1415년부터 1429년을 영국 재우세의 3기로 보고 있고(즉, 사실상 다섯 국면의 구분이다), Osprey 출판사는 헨리 4세의 즉위년인 1399년을 기준으로 2기와 3기를 가르고 있으나 이는 영국적인 기준에 가깝다.
  • [5] 아르들 회의가 있던 해.
  • [6] 영국이 제노바에게 보상금을 주고 프랑스 해군을 지원하지 말라고 한게 영향을 끼쳤다.
  • [7] 이탈리아의 바르디와 페루치 가문이다. 영국 양모 수출 독점권과 여러 혜택을 조건으로 하여 에드워드 3세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이를 통해 에드워드 3세는 전쟁 자금을 얻었고 두 가문은 막대한 이익을 얻고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했기 때문에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지만 에드워드 3세가 돈을 갚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엄청난 타격을 받아 두 가문 모두 몰락하고 만다.
  • [8] 프랑스군은 제노아 용병 석궁병들이 석궁을 썼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다.
  • [9] 말에서 내린 기사를 뜻한다. 절대 동물 하마를 타고 다니는 기사가 아니다!
  • [10] 1352년 8월, 네슬레경인 기 장군이 말에서 내려 싸우라는 신박한 전략을 세웠음에도 프랑스는 장궁병에게 간발의 차로 졌고, 이후 프랑스는 다시 장궁병에 꼴아박는 과거의 기병대로 돌아갔다(...) 프랑스의 기사도(?)가 어느정도였냐면, 1351년에는 양군에서 30명의 기사가 장소와 일시를 정하여 대결한 <30명의 싸움>을 제안해 벌일 정도였다. 물론 전쟁의 성패와는 상관 없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 [11]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분쟁에 영국과 프랑스가 둘 다 끼어들었다.
  • [12] 게클렝도 정면 대결에선 흑태자를 못 이겼다. 아니, 게클렝 자체가 정면 대결에서 승률이 영...
  • [13] 계속 약탈만 하고 다녔다보니 민심을 잃었다.
  • [14] 1375년 휴전을 시작으로 1392년의 아미앵 회의와 1393년의 루랑쟝 협상, 1396년의 아르들 회의로 종결이 되었다고 본다.
  • [15] 1380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나 일시적으로 런던이 점령되었고, 1387년의 라드콧 브릿지 전투로 국왕에 동조하는 화평파 귀족들이 반대파에게 크게 졌다.
  • [16] 루이의 아들인 샤를이 결혼한 아르마냐크 백작가의 이름을 땄다. 후에 부르봉 왕가가 되는 부르봉도 이 파에 협력한다.
  • [17] 아비뇽 유수 항목의 서방 대이교 대목 참조.
  • [18] 이 전투에서 본격적으로 플레이트 아머vs장궁 대결이 벌어지긴 했다. 일단 승리는 플레이트 아머. 근데 이탈리아 용병들은 영국군 측면을 공격한 게 아니라 본진을 털러 가다가 반격크리 먹고 달아나버렸다... 가우가멜라도 그렇고 라피아, 마그네시아 등등에서 발견되는 고전적인 패배 플래그인 듯 싶다.
  • [19] 이전 버전에서는 트루아 조약에 따라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공동의 왕이 되었다 했으나, 조약에는 그런 조항이 없었다. 즉 헨리 6세가 공동왕이 되는 건, 조약을 확대 해석한 결과. 그런데다 헨리 6세는 1429년에 샤를 7세가 잔 다르크의 도움으로 대관식을 올린 때로부터 2년 뒤인 1431년에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프랑스 왕으로 대관했다. 물론 잉글랜드에서는 샤를 6세가 죽자 헨리 6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고 있었지만, 대관식이 없다면 별로 의미는 없다.
  • [20] 직역하면 돌고래인데 프랑스 황태자를 일컫는다.
  • [21] 나중에 둘이 본격적으로 격돌하는 게 장미전쟁이다.
  • [22] 영국 본토에서 가장 가까운 프랑스 땅
  • [23]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후 1802년 미앵 조약이 맺어지면서 영국 왕의 문장에서 백합이 삭제되었다. 물론 충돌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다시 이어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