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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지리

last modified: 2018-02-11 15:41:49 Contributors

발해지리에 관한 것들을 정리해놓은 항목.

발해는 동만주 간도 지역의 타이가 삼림지대를 중심으로 했던, 만주에 위치한 국가였다. 현재 중국흑룡강성길림성러시아연해주북한함경도 일대가 발해의 영토에 해당한다. 중국 영토가 된 발해 영토에서의 고고학적 조사는 중국 정부 측의 통제로 난항을 겪고 있으나 연해주에서의 발해 관련 고고학 조사는 러시아측과의 공조로 잘 이루어지고 있다.

발해 영토의 중심이 동만주 일대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한다.

Contents

1. 발해 영토사
1.1. 발해 건국 이전의 발해 영토
1.2. 강역의 변동
1.2.1. 건국 초기(698~719)
1.2.2. 점진적 확장(719~737)
1.2.3. 전성기(737~793)
1.2.4. 혼란기(794~817)
1.2.5. 중흥기(818~857)
1.2.6. 쇠퇴기(857~906)
1.2.7. 거란과의 전쟁과 말갈의 이탈(903~926.1.15)
1.3. 5경
1.4. 15부
1.5. 62주
1.6.
1.7. 촌락
2. 도시
3. 산업
4. 도로
5. 자연지리
6. 인구
7. 관련 사료


1. 발해 영토사

1.1. 발해 건국 이전의 발해 영토

발해가 건국되기 전에는 부여, 옥저와 같은 예맥계 세력들과 읍루, 숙신이 교차하는 지역이었다.[1] 5세기 이후 고구려말갈로 정리되기 전까지는 동만주를 두고 여러 세력이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5세기 중반 물길이 이 지역의 패자로 등장하고 곧 부여를 정복, 물길-말갈-발해로 이어지는 계보의 첫 장을 쓴다. 물길은 6세기 중엽에 말갈 7부로 분열되고 이들 중 송화강 유역의 속말부와 흑룡강 유역의 흑수부가 두각을 나타낸다. 그러나 흑수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족이 6세기 중후반에 고구려에게 복속되고 668년에 고구려가 망하자 흑수부를 제외한 모든 말갈 부족이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한다. 고구려 멸망 후 말갈 부족은 재편성된다. 에 의해 고구려 유민들이 요서의 영주로 이주되는데 이들 중에는 후일 발해를 건국하는 속말부의 걸걸중상도 있었다. 695년에 거란이 당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 틈을 타 빠저나온 걸걸중상 일행이 백산부의 걸사비우와 합심하여 자립한다. 그러나 걸사비우는 당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사망하고 살아남은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천문령에서 당군을 물리치고 간도의 동모산에 정착하여 698년에 발해를 세운다.

1.2. 강역의 변동

1.2.1. 건국 초기(698~719)

대조영이 오동성(동모산)을 중심으로 발해를 세우고 두만강 상류, 백두산 일대의 말갈족과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며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21년이라는 대조영의 재위기간의 기록이 얼마 되지 않아 자세한 건 알 수 없다.

1.2.2. 점진적 확장(719~737)

발해의 확장은 무왕 대무예 시기에 두드러진다. 무왕 때 무왕 대무예는 수군장수 장문휴를 시켜 당의 등주를 초전박살 내놓는데 이 시기에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던 서안평이었던 압록강 하구 혹은 비사성이었던 요동반도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와 국경을 맞닿은 것도 이 시기.

1.2.3. 전성기(737~793)

대흠무 치세에 이르러서 발해는 확장을 중지하고 안정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1.2.4. 혼란기(794~817)

강왕 대숭린 시기의 짧은 안정기의 앞과 뒤로 5명의 왕들[2]이 10년만에 바뀌는 혼란기를 틈타 변경 지역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흑수말갈이 있다.

1.2.5. 중흥기(818~857)

선왕 대인수시기에 발해는 흑수말갈을 재복속하고 소고구려와 소백제를 흡수하면서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이 시기의 발해는 요동반도에서 시작하여 대동강, 북만주, 연해주 지역을 아우르게 되는 발해 역사상 가장 넓은 강역을 이루었다.

1.2.6. 쇠퇴기(857~906)

그러나 반세기도 안된 12대 대건황 시기부터 해동성국 발해의 영광은 점점 사라지게 되는데 이 때의 기록이 안타깝게도 특히나 부실하여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2.7. 거란과의 전쟁과 말갈의 이탈(903~926.1.15)


발해와 거란의 전쟁은 20여년간 지속되었으며 그 시작은 903년 요동지역을 둘러싸고 발해와 거란 간의 전운이 돌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해의 가독부였던 대위해가 죽고 마지막 가독부인 대인선이 즉위하였다.
909년을 기점으로 발해와 거란은 요동을 둘러싼 치열한 혈전을 벌이게 되며 사실상 발해-거란전쟁이 시작되었다. 918년 발해는 요양 지역을 상실하고 요동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빼앗긴다. 이후 거란은 청천강까지 도달하여 고려와 국경을 맞닿게 된다.기록에는 발해의 대처가 없었다고 나오는데 이후 상황을 보면 글쎄... 여하튼 요동 지역을 둘러싼 전투에서 발해가 패배하면서 상당히 큰 전략적,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그도 그럴것이 고구려때부터 주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의 주도권까지 완전히 잃은건 아닌데 919년, 요동을 병합한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것이다. 발해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923년, 거란은 요서의 평주에 노룡군절도사를 설치하여 발해의 숨통을 쥐어오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말갈족들의 이탈을 가속화시켰기 때문이다. 말갈족들도 발해의 행정 및 군사에 일정부분 투신하고 있었던 만큼 발해로선.... 결국 발해는 정국을 타개하고자 924년 5월,거란의 요주를 공격해서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요주를 박살을 낸다 거란인을 포로로 잡아 온 것은 덤1+1 하지만 중요 요충지였던 요동이 오랜 전란으로 초토화된 것은 부정할 수 없었고 이로인해 발해의 국력이 한계에 달했다. 이 상황에서 발해의 군주 대인선은 중국과 한반도의 국가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만...비록 상황은 다르지만 250여년 전 고구려가 멸망할 때처럼 발해를 도와줄 수 있는 국가는 사실상 없었다.

그 당시 동북아의 정세를 보자면 몽골초원의 위구르제국은 해체되고 해족과 습족은 거란에 병합되었으며 중원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10국시대의 혼란기가 열렸으며 한반도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 일본은 이 때부터 사실상 독자노선을 걷게 되는데 뭐 애초부터 도와줄 수 있을리 만무하고(...) 발해로선 더더욱 절망적인게 내부에서 말갈족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924년 5월에 있었던 위의 요주전투는 발해가 쳤던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요사 본기에 '이심(내분)'이라는 표현대로,924년 여름부터 발해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925년,발해장군 신덕이 휘하병졸 500명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후 발해의 관리 등이 필사적으로 고려로 망명하기 시작하는데 아마도 오랜 전란으로 인한 국력의 쇠퇴와 그로 인한 지배계층의 분열과 민심이반이 원인일 것이다.

여하튼 발해의 세기말적 상황을 파악한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몽골초원정벌을 마친 후 925년 음력 12월,발해를 끝장내기 위해 2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발해를 침공하였다.[3] 이 때 거란은 요동을 침공했던 영주도가 아닌 거란도를 이용하여 발해의 심장부였던 부우부부여부를 대규모로 급습하는 결정적인 전략을 세우게 되는데... 요동을 통해 올 줄 알았던 거란의 주력이 거란도를 이용해 올 줄이야...발해로선 의표를 강하게 찔렸는데, 그도 그럴 것이 거란의 주력이 요동을 통해 왔다면 서경압록부,중경현덕부라는 거대한 방어선이 있어 막기가 수월했지만 거란도를 통해 왔다면 발해의 수도 앞에 있는 중요 방어선은 딱 하나...일직선상에 있는 부여부밖에 없었다. 발해의 의표를 찌른 거란은 부여부에 있던 발해의 정예군을 괴멸시키고 부여부를 함락하였다.[4] 조금 어이없던게 본래대로라면 오랫동안 버텼을 부여부는 도독 대문진왕권다툼으로 인해 상경용천부로 가는 바람에 중요 군사력이 빠져나가고 지휘관이 부재했던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함락당하게 된다.이뭐병

발해는 증원군을 보내 거란군을 막고 부여부를 재탈환하려했으나 패배하였다. 노상[5]으로 하여금 3만(혹은 5천)의 군사를 주고 수도인 상경용천부로 진격해오는 거란군을 길목에서 막게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한편, 요동으로 진격한 거란군은 장령부에서 발해에 의해 막히게 된다. 결국 거란은 장령부를 돌파하여 서경압록부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지만...부여부를 돌파한 거란의 주력은 926년 음력 1월9일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를 포위하였다. 발해의 군주 대인선은 항전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선포하였으나 이미 늦었고 결국 음력 1월 12일 성문을 열고 대인선은 항복하였다. 이로써 발해는 15대(?) 22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1.3. 5경

발해 5경 중 수도였던 중경, 동경, 상경의 위치는 유적등의 발굴로 거의 확실시되지만 남경과 서경은 애매하다. 특히 서경압록부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1.중경현덕부[6]
2.동경용원부[7]
3.상경용천부[8]
4.남경남해부[9]
5.서경압록부[10]

1.4. 15부


1.상경용천부
2.중경현덕부
3.동경용원부
4.서경압록부
5.남경남해부
6.부여부
7.장령부
8.솔빈부
9.철리부
10.동평부
11.회원부
12.안원부
13.막힐부
14.정리부
15.안변부

발해의 15부 중 5경이 속한 용천부, 현덕부, 용원부(혹은 책성부), 압록부, 남해부를 비롯하여 부여부, 장령부는 중요 군사요충지였다.

1.5. 62주

  • 용천부 소속(3주) : 용주, 호주, 발주
  • 현덕부 소속(6주) : 노주, 현주, 철주, 탕주, 영(榮)주, 흥주
  • 용원부 소속(4주) : 경(慶)주, 염주, 목주, 하(賀)주
  • 압록부 소속(3주) : 옥주, 정(睛)주, 초주
  • 부여부 소속(2주) : 부주, 선주
  • 장령부 소속(2주) : 하(瑕)주, 하(河)주
  • 막힐부 소속(2주) : 막주, 고주
  • 정리부 소속(2주) : 정(定)주, 반주
  • 안변부 소속(2주) : 안주, 경(瓊)주
  • 솔빈부 소속(3주) : 화주, 익주, 건주
  • 동평부 소속(5주) : 이주, 몽주, 타주, 흑주, 비주
  • 철리부 소속(6주) : 광주, 분주, 포주, 해주, 의주, 귀주
  • 회원부 소속(9주) : 달주, 월주, 회주, 기주, 부주, 미주, 복주, 사주, 지주
  • 독주 3주 : 영주, 고(錮)주, 속주

1.6.

1.7. 촌락


2. 도시


3. 산업

발해의 산업은 밭농사와 목축과 수렵이 주를 이루었으며 벼농사도 짓긴 하였으나 기후적,지리적 한계로 일부에 그쳤다.밭농사에서는 주로 , , 보리 등을 재배하였고 목축에서는 특히 이 유명하였다.

4. 도로

5개의 교역로가 있었는데 이 중 2개는 수로이고 나머지 3개는 육로였다.

1.영주도(對 당 교역로)
2.거란도(對 거란 교역로)
3.압록도(對 당 교역로. 압록강을 이용한 수로)[11]
4.신라도(對 신라 교역로)
5.일본도(對 일본 교역로. 동경용원부에서 동해를 거친다)

5. 자연지리

6. 인구

구당서 기록을 참고하자면 발해 초기에 인구가 약 50만 명이었다. 다만 이후의 기록은 잘 알 수 없는데 대이진 시기의 행정과 군제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추산하자면 대략 250~300만 정도로 예상되는데 대인수시기의 중흥기에 맞물려 발해가 안정되고 영토가 수복(확장?)되면서 아랫동네인 통일신라의 인구랑 얼추 비슷해진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건 발해항목의 인구관련 주석 참조


7. 관련 사료

  • 구당서 발해전
  • 신당서 발해전
  • 요사 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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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러한 배경을 보면 발해가 예맥계나 숙신계나 정체성 논란이 있는것도 당연. 한국에서는 예맥계임을 중국에서는 숙신계임을 강조하지만 막상 사료를 보면 반반이다.
  • [2] 대원의,대화여,정왕,희왕,간왕
  • [3] 발해의 동원가능한 병력이 최대 얼마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인구수에 비례하자면 발해가 야전에서 동원할 수 있던 병력은 전신인 고구려의 15만에 못미치는 규모였을 것이다.
  • [4] 공교롭게도 전신인 고구려도 부여부(당시엔 부여성)이 당에게 함락당하면서 국내성,압록강까지 당의 쾌속진격을 허용하게 된다. 물론 이는 고구려와 발해의 국경방어체계의 장점이자 치명적인 단점.
  • [5] 늙은 재상
  • [6] 현재 중국 지린성 화룽시
  • [7] 현재 중국 헤이룽장성 훈춘시
  • [8] 현재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
  • [9] 현 함경남도 함흥시 or 북청군
  • [10] 현재 중국 지린성 퉁화시 린장지역으로 추측
  • [11] 흔히 '조공도'라 알고 있는 그 도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