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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의 묘

last modified: 2018-01-21 12:42:13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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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내용
2. 등장인물
3. 원작과 작가
4. 관련 논쟁
4.1. 해당 작품 옹호론
4.2. 해당 작품 비판론
5. 이야기거리

1. 내용

火垂るの墓
Grave of the Fireflies

1967년에 출간된 노사카 아키유키의 단편 소설과, 1988년 개봉된 동명의 지브리제 애니메이션이 가장 유명하다. 2008년 4월에는 실사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감독은 애니메 명작동화 시리즈(빨간머리 앤 이라든지)와 추억은 방울방울 등으로 이름이 알려진 타카하타 이사오.

국내에 정식 소개되기 전 소규모 상영회에서는 반딧불의 묘가 아닌 '반딧불의 무덤'으로 번역되었다.

간략한 내용은 주인공 세이타, 세츠코 남매가 태평양 전쟁 중 겪는 피난생활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남매가 태평양 전쟁통에 군인이었던 아빠를 잃고 폭격에 엄마도 잃고 둘이서 고생하다가 죽는다는 슬픈 이야기.

감독은 이 작품에 대해 '반전 작품 같은게 절대 아니다. 그런 메시지는 일절 실려있지 않다' 고 했으나 반전 애니메이션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서 어쩔 도리가 없다고 회고했다. 그는 오누이가 둘만의 가정생활을 이뤄내는 것에 성공하지만 주변 사람과의 공생을 거절하고 사회생활에 실패하는 모습이 현대에도 통한다고 해설하고 고등학생과 20대의 젊은이들이 공감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애니메이션 제작에 우익기업들이 많이 관여했다.(사실 이것도 논란거리가 되는 점이 많은데, 해당 비판론 항목 참고)

2. 등장인물

  • 세이타
  • 세츠코
  • 어머니
  • 친척 아주머니
  • 친척 아저씨
  • 친척 누나

  • 구호소 아주머니
  • 농부
  • 밭주인
  • 나이든 순사

3. 원작과 작가

국내에서는 1980년대 초반, 2002년, 2003년, 2006년에 번역 출간되었다. 내용은 사실상 작가 본인의 자전(自傳)으로 실제로 기아로 여동생을 잃었던 체험이 바탕이 되고 있다. 그 덕에 원작 소설은 애니메이션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내용보다는 당시 기성세대에 대한 시니컬한 냉소주의가 더 강하다. 굳이 예를 들자면 노벨문학상 작가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과 비슷한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참고로 노사카 아키유키는 고베 공습으로 양아버지(어린 시절 부모의 별거 및 이혼으로 인해 다른 집안에 입양되었다)를 잃고, 이어서 피난을 갔던 후쿠이현에서 여동생을 영양실조로 잃었다. 이때 동생을 구하지 못한 속죄를 위해 소설로 쓴 것.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죽었지만, 노사카 아키유키는 살아남아 방황하다가 친아버지가 다시 거두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노사카의 다른 단편중에는 '고추잠자리'도 있는데 이게 일각에 도시전설처럼 와전되듯 알려진 "카미카제대원이 훈련기 몰고 자폭하려다 콕핏에 앉은 벌레를 보고 순간 생명의 귀중함을 깨달아 적함까지 갈 남은 연료를 무인도 가는데 써서 무인도에 불시착한뒤로 그뒤 어떻게 되었는지 모름" 이라는 일화의 원전이다.아니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는데 이 이야기는 어떻게 알려진 거지?

4. 관련 논쟁

개봉 당시 한국에는 "피해자 행세를 한다"면서 논란이 일었다. 1990년도 당시 9시 뉴스에서 우익 애니메이션이라고 맹비난한 적도 있다.

이것은 작품이 자세한 서술을 최대한 피하고 등장인물의 입장에서 시대상황을 그려냈기 때문에 빚어낸 오해로, 원작의 시니컬하기 이를데 없는 내용이나 실제로 작중 주인공의 행적을 보면 변해버린 현실(유복했던 집안→친척집, 전쟁 초기의 부유한 생활→전쟁말의 궁핍한 생활)에 타협하는 것을 거부하고 뛰쳐나갔다가 결국 지켜야할 여동생마저 잃고 자신도 목숨을 잃어버린 건데 단순한 피해자 드립으로만 보기에는 주인공의 삽질탓이 크다. 거기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다른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멀쩡히 살아가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주인공의 대사 중 "무적의 일본 함대"라는 대사가 있다거나, 군가를 따라 부르는 장면이 있다는 점도 논란이 되었는데, 사실 어른들의 각종 프로파간다의 영향을 받는 추축국의 아이임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신기한 일도 아니다. 참고로, 주인공들이 '무적의 일본 함대~'어쩌구 하는 대사를 하는 이유는 작중 주인공들의 아버지가 일본군 해군의 순양함(타카오급 중순양함) 함장이기 때문.

이 작품 시점은 1945년인데, 마야는 레이테 만 해전 중 1944년 10월 23일 미군 잠수함 데이스에게 어뢰 4발을 얻어 맞고 8분만에 격침되었다.(…) 이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주인공들은 아버지가 죽었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있는 상태. 다만 승무원 996명에서 336명만이 전사했을 뿐 나머지는 구조되었기에 일본군 함정 중에서는 운이 좋은 편(당시 일본해군이 보유한 조약형 순양함들은 타국해군의 동종함은 두 개를 가진 선체 종격벽을, 중심선에서 하나만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남은 중량을 공격력에다 투자했는데, 덕분에 어뢰피격으로 인한 침수가 일어날 경우 급격한 침수속도를 선체가 견디지 못하고 타국해군의 동종함보다 훨씬 빠르게 전복해버렸다.)에 속한다. 재수좋으면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뭐, 알 수 없는 노릇.

한국에서 이미지가 별로 안 좋았다. 수십년간 수탈 받은 피해자가 옆에 있는데 침략국인 일본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모습으로 보였으니. 일부 감상문에서는 어느 주부가 자신의 딸이 "일본인 아이들이 불쌍하다"라는 말에 경악을 했다고 한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고위 간부라는, 주인공 관련 설정도 이 애니가 우익 애니로 보이게 만든 요인 중 하나. 또 이러한 일들이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이용되거나 민간인들 개개인의 책임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작품과는 또다른 별개의 문제로 반딧불의 묘를 이용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일본의 매년 8월은 원폭 희생자를 추도하는 달(히로시마 원폭 투하 8월 6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8월 9일)이며 8월 15일은 종전 기념일이다. 패전기념일이 아니다! 전형적인 정신승리의 예 그리고 알다시피 한국의 8월 15일은 광복절이다. 일본이 매년 8월 15일마다 반딧불의 묘를 방영하며 일본인이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아따맘마에서도 관련 패러디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涙のごまかし方っ', 당연하지만 한국에서는 에도시대 패러디랑 같이 통편집 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에서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할지도. 자국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전범국의 국민들이 '자신들도 피해자' 라고 주장하는 것이 진정한 피해자였던 주변 아시아 국가에게 좋게 보일 리 없다. 정성일 평론가의 평 에 따르면 영화 자체에 일본인=피해자라는 의식이 깔려 있으며, 관람자에게 그 이데올로기를 전염시키고, 아주 감동적이기 때문에 관람자로 하여금 영화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거부하게 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타카하타 이사오는 '헌법 9조의 회' 결성집회에서 애니메이션 팬들이 전쟁 홍보용 애니메이션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던 일화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작품이 반전 요소가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고민했으며, 전쟁 개시 전부터 일본 국민들이 브레이크 없이 치달은 결과 가해자가 되어버렸다고 말하며 군국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평화헌법을 옹호하였다. 게다가 해당 내용을 한국 블로거가 번역해서 게시해도 되는지 문의하자

타카하타는

'전쟁말기의 자국민의 비참한 체험만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그 근본적인 원인, 즉 그 이전에 타국으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와, 그것들이 타국민에게 안겨준 참상에 대해 확실하게 전달하고, 생각하게 할 수 있어야만이 비로소 <반전>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한 편의 영화로 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자국의 타국으로의 침략을 영화에서 묘사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우며,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굉장히 힘들다. 그렇기에 진정한 <반전>은 영화에서보다, 교육 등 보다 이성적인 방법으로 끊임 없이 실천해야만 할 것이다.'

라는 소리를 자신이 평소 해왔는데 그 내용도 첨가해 달라고 정중히 부탁할 정도. 해당 발언은 그런 영화를 만들기는 힘들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단 미화를 하려고 했던 의도는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저 코멘트에 따르자면 본인의 입장에서도 반딧불의 묘는 불완전한 반전 영화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감독은, '아무리 전쟁으로 인해 비참한 꼴을 당하는 이야기를 그려도 전쟁을 억지하는 힘이 되지는 못한다. 정치가들은 전쟁을 시작할 때 그런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전쟁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면서.' 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단순히 반전(反戰)이라는 것으로는 이 작품이 가지는 일본이 피해자라는 의식은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본 국민 입장에서는 피해자이기 때문에 전쟁을 반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니까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원폭 피해국으로서 전쟁을 반대하는 셈이다.

4.1. 해당 작품 옹호론

원작 소설을 기준으로 볼 때,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중에는 작중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의 모습이 문학적으로 당시 일본 국민과 지배층의 모습을 은유하고 있다는 것도 있으니 참고할 것. 사실, 작품을 꼼꼼히 보면, 작중에서 주인공 남매의 모습이 별로 불쌍하지가 않다. 44년에 설탕 절임 복숭아를 먹었다거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시골로 내려가면서 바리바리 싸간 것이 버터, 치즈, 기모노, 피아노(!)처럼 당시 기준으로는 대단한 사치품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불쌍하게 여기라고 만든 인물이 아니다.(...)

그리고, 주인공 남매가 겪은 고난과 빈궁은 엄밀히 말하면 당시 일본인들이 겪었던 평균적인 상황과는 좀 다르다. 폭격을 피해 시골로 소개되어 내려간 후, 친척 아주머니에게 천대받기 싫다는 여동생의 징징거림에, 아직 어린 오빠가 빡쳐서 우린 독립하겠다고 집을 뛰쳐나간 상황이었던 것. 이 경우 문제는, 남매의 가출은 곧 도나리구미를 비롯한 지역 조직을 중심으로 편성된 식량 배급 체계에서 이탈하는 것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부모가 남겨준 유산으로 암시장에서 식량을 사 와서 남매끼리 재미있게 살았지만, 돈이 떨어지고, 전쟁의 격화로 암시장 자체가 붕괴하면서 더 이상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어 굶어죽게 된 것이다.

결국 이는 아직 판단력이 미숙한 오빠가 판단력이 더 미숙한 여동생이 투정부리는 것을 적당히 달래지 못하고, 부화뇌동하여 친척집을 나가버린 것이 죽음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2차대전 시작 이전에 일본이 다른 동양 국가들에 비해서 여유로운 상황이었던 점이나 전쟁에 돌입한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여동생 세츠코는 일본 민중을 은유하는 것, 오빠 세이타는 일본 지도부를 은유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전후 일본이 겪은 고난은 결국 자업자득이라는 것을 은유하는 것이다. 또한 발간 당시 '전쟁은 국가지도층의 잘못으로 일어난 것이고, 일본 민중은 오히려 지도층의 무모한 야욕에 희생되었을 뿐이다'라는 역사관이 유행하던 것이 비추어 생각한다면 결국 지배층은 어떤 식으로든 다수 대중의 요구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고, 전후의 참상은 결국 일본 민중들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책임의 대가를 스스로 치룬 것일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무적의 일본 함대 운운하는 대사 역시 세이타의 시점에 가깝게 진행되는 이야기 특성상 주인공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한 대사고, 더 나아가 이것이 주인공(그리고 당시의 일본 대중)의 무지를 상징하는 대사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점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불쌍한 애들을 괴롭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쯤으로 묘사되는 친척 아주머니 역시,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그리 나쁜 인물도 아니다. 어머니의 기모노를 대신 내다 팔아준다고 하더니, 자기들에게는 고작 쌀 한 단지 주고 말았다고 남매가 서러워하는 부분도, 사실 암시장 거래의 위험성이나 아이들을 부양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적절한 분배 비율에 대한 이견의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기모노와 바꿔온 쌀 중에서 자기 가족 몫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남들은 다 농사일이나 대피훈련 등으로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방에서 피아노나 뚱땅거리는 여동생과, (폭격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방 안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안 하는 오빠를 좋지 않은 눈으로 보게 되는 것 역시 당연하고...

즉, 전쟁에 돌입한 일본의 태도가 마치 어린애와 다를 바 없었다는 비판으로도 해석 가능한 셈. 작중에서의 묘사에서 그러한 의도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는 의견이 있으나, 그런 의도가 드러난 부분이 있다. 일단 주인공 남매가 부모님 돈으로 밥을 사먹자 섭섭하게 생각하는 장면이 등장하며, 집을 떠날 때는 기뻐하지않고 오히려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다. 또한 주인공 부모의 돈을 약탈하는 장면도 없다. 작중에선 물가가 극단적으로 올라가는데, 주인공은 물건을 한번에 사지않고 천천히 쓰는 장면이 나온다. 부모의 돈이 엄청났다는 증거인데, 이걸 뺏지 않은 것만 해도 과연 악당인지 의문이다.

해당 특징은 원작소설에서 더욱 드러난다. 위에서 설명된 것처럼 밥은 커녕 죽도 먹기 힘든 상황에서 설탕 절임 복숭아 타령을 한다거나, 피난가면서 피아노까지 싸짊어지고 가서 남들은 다 바쁘고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피아노를 뚱땅거리고 있다거나, 탐욕스러운 악마처럼 묘사되는 친척 아줌마가 정작 아이들이 독립해 나가겠다고 하는 상황에서는 아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재산을 탐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세이타와 세츠코는 희생자인 동시에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물이고(어린아이라서 어리석은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다섯살배기 아아들도 울어서 안 될것 같으면 울음 그친다.), 무조건적인 동정의 대상이 되기에는 석연찮은 인물임은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특히 이 아이들이 당시 일본 사회에서 일종의 특권계급이던 해군 고급장교의 자식들로써, 남보다 훨씬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점은 작중에서 명확히 묘사된다.

이런 해석 자체는 반딧불의 묘라는 작품을 최대한 우호적으로 해석한 것으로써, 이 작품을 일본인의 일방적인 피해자 가장으로 보는 관점 못지 않게 의심받을 여지가 큰 것은 사실이다. 다만, 세이타-세츠코 남매의 입장이나 행동에 대한 작중의 서술은 두 아이를 '죄 없고 가련한 희생양'으로 보기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고, 이러한 서술에는 작가의 의도가 당연히 개입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4.2. 해당 작품 비판론

앞선 '관련 논쟁'에 쓰인 내용들은 거의 다 역사 및 철학 연구를 통해 반박당한 내용들이다.

첫째, 당시 일본인들이 과연 피지배 민중으로써 본인의 의지와는 반하여 타국민에 대한 수탈과 착취를 자행했는가. 그렇다고만은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홉스봄은 심지어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계급 역시도 수탈한 잉여가치를 나눠 갖는 노동귀족의 성격을 띤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이 의식적이었든 의식적이지 않았든간에 '민중'이란 이름으로 전범국가의 국민을 순수한 피해자로 볼 수는 없다.

둘째, 국가를 비롯 제삼자가 명령한 가해는 책임이 사라지는가? 혹은 이데올로기에 '선동'당하여 소극적으로 동조한 경우에는 개인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가? 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 다양한 사례들에 대한 국내외의 연구들을 통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물론, 심지어는 명령을 이행한 군인에게도 분명한 책임이 있다는 게 다수설이다. 이는 한편으로 책임과 권력은 동시에 존재(해야)하기 때문이며, 개인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개인에게 체제 및 국가에 대한 어떠한 권한이나 자격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건 좌파적인 자세라기보다는 차라리 전체주의에 가까운 주장이며, 구조에만 심각하게 매몰된 시각이다.

혹자는 실제로 제국주의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았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끝까지 일본 제국주의와 전쟁을 반대한 당시 일본의 공산주의자, 평화주의자 등 양심을 지킨 인물들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다면 다시 여전히 '일부'는 그렇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제국주의를 몰역사화하여 미시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때에만 지탱 가능한 시각으로, 이 때 이 영화에 대해서 어떤 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갖는 것은 논쟁으로 이어지기 어려우며, 미시적인 수준의 연구들이 그러하듯 다양한 종류의 해석 수준에서 그치는 정도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셋째, 영화를 포함한 매체에서 감독의 의도를 가지고 그 효과를 재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성일 평론가 등이 지적했듯, 이 영화는 감상주의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가해사실을 망각하게 할 우려가 크며, 이는 실제로 원폭과 관련해서 각종 기념사업을 통해 일본 정부가 항상적으로 퍼뜨려온 분위기다. 무려 '좌파'인 감독이 2차대전을 다룬 영화가 일으킬 이러한 효과에 무지했다면, 그 무지 역시 문제가 된다.

넷째, 한국인이 한국정부의 침략과 수탈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만큼 이 영화를 통해 일본인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심각한 논점 일탈이다. 앞서 논쟁 부분을 기술한 이가 지적하듯 다양한 학살과 전쟁 가해 사실이 있다면, 그 지점들에는 충분한 비판이 항상 가해져야 하며, 작품 제작자와 수용자 모두의 성찰성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모든 영화가 가해 사실에 대해서 반드시 말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주장은, 이 영화가 갖는 스탠스와 일본 제국주의와 원자폭탄, 그리고 기존 일본 정부의 입장이라는 특수한 사실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각된다.

다섯째, 2차 대전이 "절대선과 절대악의 대결이 아니"인 데다, 일본인이 아시아인이어서 원자폭탄의 피해를 본 사실도 존재하며, 모두가 인종차별주의와 제국주의의 희생자이기도 하다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이 주장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흐리려는 시도는 결국 가해자의 주장에 복무할 것이다. 세계 각지의 과거사 관련 연구들은 가해사실에 대한 물타기와 침묵이 가해 당사자와 지배세력에게 유리한 정치적 상황을 재생산해내고 있음을 보인다. 따라서 대중이 보이는 이 영화에 대한 반감은 그 격렬하기가 어느 정도이건간 단순한 비난이기 이전에, 일본과 한국을 둘러싼 정치상황에 대한 우려에 가깝다.

이 작품에 대한 가장 강력한 옹호는 전술한 논쟁부분보다 차라리 위의 '옹호론'에 쓰여 있는 비평적 해석에 담겨있다. 이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릴 수 있으나 나름의 타당성이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여전히 논란이 있는 대상을 완벽히 다룰 수 없을 때, 혹은 자신이 표현코자 하는 내용이 옳지 않을 수 있을 때 인간이 침묵을 택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 논쟁은 현재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이 비판론에 대한 주장이나 반박론도 꾸준히 새로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 다 소개하진 못했지만, 좋은 주장글들이 많이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찾아볼 것.

5. 이야기거리

작품의 배경이 된 도시는 고베로, 애니메이션 마지막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가 내려다 보는 도시도 현대의 고베다. 세이타가 아사한 곳은 고베의 산노미야역. 작중 초반의 공습장면은 고베 공습 중 피해가 컸던 1945년 3월 17일 공습을 묘사한 것이다.

한편, 제작 스탭중 안노 히데아키가 있었는데 전함의 원화를 맡겼을 때 밀덕후답게 신이 나서 극사실주의로 전함을 그려내 왔더니 정작 감독은 실루엣 처리를 해버렸다고. 그리고, 스즈키 프로듀서와의 대담에서 반딧불의 묘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 있다.

스즈키 토시오 (이하 스즈키): 그리고나서, 반딧불의 묘 때에 다시 나타났었지?
안노 히데아키(이하 안노) : 그렇죠. 취직활동이죠. 일거리가 없어서요. 미야상한테가서 뭐 일거리 없습니까 물어보니, 토토로의 오프닝을 하던지, 타카하타상 쪽의 뭐랄까 전함 그릴 사람이 없다는데, 그쪽을 하든지 어디할래? 그래서 미야상하고는 전에 (같이)해봐서 타카하타상하고 일을 해보고 싶었죠.
스즈키 : 그래. 그랬지. 기억하고 있어. 그래서 전함에 일루미네이션(여기서 웃음 터짐)하고 불꽃.
안노 : 네. 일루미네이션과 불꽃입니다. 실은 전함이 아니라 순양함(巡洋艦)입니다. 전함이 아니라.
스즈키 : 그래서 그 다음엔가 만나, 이야기를 하던 중에, "두 사람에 관해서는 잘 알고있으니까 "라고 말하던데...
안노 : 한번 같이 일해 보면 (어떤 사람인지) 대략 압니다.

작가의 딸이 학교에서 받은 과제 중에서 "'반딧불의 묘' 작가의 당시 심경에 대해서 제출하라." 라는 내용이 있어서 그걸 아버지에게 묻자, 아키유키는 "음, 마감에 치여서 필사적이었다."라고 말했는데 그걸 그대로 제출한 딸이 낙제점을 받았다라는 일화가 있었으며, 예술가의 작품 제작 동기를 왜곡해서 해석하는 감상자, 평론가 등에 의해 정형화된 감상방법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경직된 교육방법에 대한 비판으로 자주 쓰인다. 이와 같은 일화는 한국 수능에 관해서도 전해져 온다. 작가의 아들이 "아버지가 말해준대로 답을 골랐더니 틀렸더라."라는 이야기. 심지어 최승호 시인도 본인의 시를 주제로 출제된 언어영역 문제를 직접 풀어봤는데 틀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본격 작가도 모르는 작가의 의도.

일본에서 첫 개봉시 같은 제작사의 이웃집 토토로와 동시상영으로 공개되었는데 이웃집 토토로를 먼저 상영하고 반딧불의 묘를 뒤에 상영해버리는 바람에 이웃집 토토로를 보고 훈훈했던 관객들의 기분이 뒤에 나온 반딧불의 묘 때문에 순식간에 기분이 암울해져 이웃집 토토로의 이미지가 꽤 안 좋아진 일이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보다보면 은근히 토토로와 비슷한 구도의 컷이 나오며, 토토로와 대치되는 형태로 사용되는 이미지도 나오며(우산, 조력자)서사 구조도 대조적으로 채용하고 있다. 물론 토토로에 비하면 한없이 우울한 형태로.

한국에서는 대원방송을 통해서 더빙 방영을 했다. 세이타역에는 김일이 맡았다. KBS판 세일러문에서 세일러문과 나머지 세일러 전사 4인방이 요마들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몰릴때 장미꽃 휙휙 던지는 턱시도 입은 사내를 했던 그 성우다.. 세츠코는 김서영. 여러 케이블 채널에서 가끔씩 방영하는 편이며 성우 김일이 한국어로 읊는 "대일본제국이 졌다고요?"라는 대사는 충공깽. 덕분에 한번 방영할 때마다 시청자 게시판엔 부모로 보이는 이용자들이 왜 이런 애니를 방영하냐며 항의글을 자주 올리는 편이다.그래서 요샌 방영을 못한다고 봐야하나? 한국에서는 원작의 지명도가 낮다 보니 원작소설의 작가인 노사카가 우익이라는 출처불명의 루머가 돌고 있다.

스웨덴의 멜로딕 데스 메탈 밴드인 아치 에너미의 곡중 The Day You Died는 이 애니메이션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태평양 전쟁에 구 일본군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던 일명 일본 드롭스 사탕이 작중에 등장하는데, 작중에 등장한 모델을 복각한 상품이 나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