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박철순

last modified: 2015-04-01 17:22:55 Contributors

bears_pcs.jpg
[JPG image (Unknown)]


두산 베어스 영구결번
No.21

이름 박철순(朴哲淳)
생년월일 1954년 3월 12일[1]
출신지 부산광역시
학력 배명고-연세대 중퇴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OB 베어스 창단멤버
소속팀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팀(1980~1981)
OB 베어스(1982~1997)
등장곡 권인하 - 에이스를 위하여
프랭크 시내트라 - My Way

1982년 한국프로야구 MVP
박철순(OB 베어스) 이만수(삼성 라이온즈)


OB 베어스 등번호 21번(1982~1997)
창단 멤버 박철순(1982~1997) 영구결번

Contents

1. 개요
2. 선수시절 활동
3. 여러가지
3.1. OB 베어스 항명파동
3.2. 기타
4.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82ks_parkchulsun.jpg
[JPG image (Unknown)]

불사조.

KBO 원년부터 활약한 전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 출신의 투수. OB/두산 최초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면서, 2번째로 영구결번된 레전드. 더불어 그는 한국프로야구 원년부터 21번을 등번호로 사용했으니 두산 베어스 역사상 유일하게 21번을 단 선수가 된다.

- 통산 15년 동안 231경기 76승 53패 20세이브, 평균자책점 2.95, WHIP 1.24를 기록.
- 프로야구 최초 투수 3관왕 기록(1982년의 다승&평균자책점&승률).[2]
- 단일 시즌 투수 22연승 기록(1982년).[3]
- 한국시리즈 최고령 등판 기록(39세 7개월 8일)[4],
- 경기 개시 6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1994년 8월 31일 vs. 해태전)

전용 응원가는 인하의 '에이스를 위하여'. 이 노래가 나오면서 상처투성이의 노장 박철순이 마운드 위에 오르는 순간의 감동은 잠실 야구장의 OB 팬들에게 전설이자 추억으로 남아있다. 은퇴식에서 울려퍼진 랭크 시내트라My Way도 그를 상징하는 노래로 남아있다.

전성기 시절에는 저음의 목소리에 뛰어나게 잘 생긴 용모로 국내에서 미남 운동선수 하면 종목을 불문하고 첫손에 꼽히는 외모 덕에 야구에 관심없는 여성들도 박철순의 팬인 경우가 많았다.[5] 초코파이 광고에도 나온 적이 있다. #

2. 선수시절 활동

1954년 3월 12일 부산에서 태어났다.[6] 부산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2학년 때 대전 대성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2학년 후보투수 시절 대전고와의 지역예선 경기에서 심판이 대전고 측에 유리한 볼 카운트 판정을 내려 대성고가 역전패 당하자 대성고 선수들이 앙심을 품고 심판을 구타했다. 이 때문에 학교 체면이 깎인 대성고는 야구부 해체라는 초강수를 둔다.[7] 박철순은 폭행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나 야구부 해체로 인해 어쩔수 없이 학교를 옮길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서울로 올라가 배명고로 전학하여 졸업하게 된다.

1975년 졸업 후에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대학 초년 시절에는 아무 것도 한 게 없었다. 자퇴원을 내고 도망치듯이 공군 야구팀에 입대했는데, 선임이던 이종도가 그의 정신력을 다시 일깨우고, 후임으로 들어온 당대 최강의 투수 남우식[8]의 조련을 받으며 급성장, 급기야 백호기 결승에서 그의 모교인 연세대와 연세대의 에이스 최동원을 누르면서 일약 주목받게 된다.

그 뒤 연세대가 자퇴원을 무효화시키면서 연세대에 복학, 결국 2학년 말에 밀워키 브루어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하면서 한국인 두 번째로 미국 야구 무대에 진출(따라서 대학 졸업은 하지 못했다)[9], 트리플A 입성 직전까지 갔다. 실제로 트리플A에서 던진 적은 없고, 더블A 우수투수로 뽑히며 트리플A 진출을 약속받은 상태였다. 실제 마이너리그 기록.[10] 밀워키 브루어스의 구단 관계자들이 한국 측 인사들을 만나면 "한국이 우리 팀의 전도유망한 유망주를 뺏어갔다" 라는 농담을 건낼 정도로 브루어스에서 주목했던 유망주였다.[11]

1982년 OB 베어스가 창단하기 전에 박용곤 구단주가 미국에 직접 날아가 트레이드 머니 3만 달러에 합의를 보고[12] 어렵사리 모셔온 투수로 그해에 22연승 포함 시즌 24승을 기록, 그야말로 리그를 씹어먹었던 괴물투수였다. 빠른 공에 미국에서 습득한 다양한 변화구와 기본기로 당대 프로야구를 평정했다. 당연히 초대 한국프로야구 MVP에 올랐다.


처음이자 마지막 전성기인 1982시즌에는 80게임 중 36게임에 등판, 선발/마무리 가릴 것 없이 224.2이닝을 던져 전체 팀 이닝 중 29.1%나 소화하는 혹사를 하면서도 24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1.84, WHIP 0.97이라는 괴물같은 성적을 올렸다.

공 쥔 손을 벨트라인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가 다시 올려 던지는 특유의 투구폼 때문에 허리부상의 위험을 달고 다녔는데 거의 하루 걸러 한 번씩 등판하는 혹사로 인해 1982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허리를 다치게 된다.[13] 1982년 한국시리즈 1,2차전에서 등판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3차전부터 진통제를 맞으면서 출장을 강행[14][15], 기어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 타구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때의 무리로 인해 지병이던 허리디스크가 도지게 되어,[16][17] 1983년 0승, 1984년 1승으로 부진에 빠졌다.

이 후, 오랜 재활을 거쳐서 다시 구위를 조금씩 회복하면서 1987년 후반기와 스프링캠프를 통해 어느 정도 위력을 찾는 것처럼 보였지만, 1988년 CF 촬영 도중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대참사를 겪는다. 본인 스스로도 이 때 구단에서 방출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을 거라고 했을 정도. 그러나 기어이 재활에 성공하면서 복귀, 결국 선수 생활을 1996년까지 이어가기에 이른다. 선수 생명을 끝낼 수도 있는[18] 큰 부상을 당하고도 그 때마다 불굴의 정신으로 마운드로 돌아오는 박철순에게 팬들은 불사조 박철순이란 별명을 붙여 준다.

1994시즌이 끝나고 윤동균 감독이 사퇴하면 나도 은퇴하겠다라는 발언을 했다.
이유는 OB 베어스 항명파동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일으킨 원인중 하나가 박철순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최고참인 자신이 책임지고 은퇴하겠다는 뜻.

그러나 신임감독인 김인식은 원만한 처리를 요구했고, PC통신등에서도 박철순의 은퇴를 반대했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체육계의 폭력등으로 문제를 빚고있었기에 여론은 선수단에 어느정도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박철순을 그대로 방출시키면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없던 점도 한몫했다.

그래서 1995시즌은 5선발로 뛰었고,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 중간계투로 등판하기도 했다.

우승이 결정되고서 그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팬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1996년 시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구단에서 1997년 4월 29일 LG전 때 은퇴식을 열어 주었다. OB는 그의 등번호인 2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이후 OB 베어스에서 투수코치를 맡기도 했으나, 1998년 시즌 중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사임하고 1999년 이후로는 야구계를 떠나 '알룩스포츠'라는 스포츠 용품 회사를 경영하였다. http://www.alrook.com

2011년경 스포츠 용품 사업을 접은 모양이다. 그 후로는 인터넷 방송이나 olleh TV에서 야구 해설을 맡았다. olleh 편파중계에서는 두산까 악덕 해설자 마가 손가에 지친 두산팬들을 위한 구원자 역할 기아자동차의 광고 나레이션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다만 예전 2군 코치시절의 흑역사 때문인지 지도자로 나설 생각은 없다고 한다.

KBS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유소년 야구 코치도 하고 있는 듯.

3. 여러가지

3.1. OB 베어스 항명파동

1994년 시즌 말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군산 원정경기가 끝난 뒤 전주 숙소에서 다혈질의 윤동균 감독이 경기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로 화를 내며 체벌하려 하자[19] 최고참이었던 박철순과 장호연, 김형석 등이 이에 반발했고 결국 주축 선수 17명이 윤동균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며 숙소를 떠나 서울로 돌아온 프로야구 초유의 항명 파동이 일어났다. 구단 측은 본보기 차원에서 박철순을 비롯한 주축선수 5명을 트레이드하고 윤동균 감독의 연임을 시도했으나 당시 여론은 폭력을 휘두른 윤동균 감독보다는 선수들을 지지하는 쪽이 많았다.

결국 박철순이 경창호 사장에게 "나도 은퇴할 테니 윤 감독도 같이 물러나게 해라"고 배수의 진을 친 끝에 윤동균 감독이 사임하고 후임으로 김인식 감독을 영입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신임 김인식 감독의 선처 요구와 팬들의 성화로 박철순과 김형석, 김상호 등은 연봉이 삭감되는 선에서 팀에 계속 남았고, 영수는 방출당했지만, 바로 강타자를 원하던 태평양에서 데려갔으니 퇴진한 윤 감독만 책임진 꼴. 그래도 다음 해의 기적적인 우승으로 결과적으로는 감독 교체가 잘 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래저래 흑역사. [20][21]

자세한 내용은 OB 베어스 항명파동 참조.

3.2. 기타

한국프로야구의 원조 레전드이며 지금은 나이가 들면서 대인관계도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사생활이나 야구인생 모두 우여곡절이 많았다.

  • 대학생 시절(20세)에 결혼을 했으며 한 차례 이혼 경력이 있다.[22]

  • 연세대 재학시절 얼차려라는 명목으로 후배인 최동원을 구타하여 병원신세를 지게 한 적이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최동원은 연세대에서 다른 학교로 옮기겠다고 학교와 갈등을 빚다 결국 선후배간의 위계질서라는 명목으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던 최동원측에서 몇달 후에 학교에 사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리는 편인데, 최동원이 나중에 학교로부터 오히려 사과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2011년 박동희 기자가 최동원과 김성한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당시 박철순의 구타로 인해 최동원은 허리에서 피가 날 정도였다고... 그로 인해 전치 2주 판단을 받아 고향에 내려가 쉬고 있었는데 학교 측의 음해로 인해 무단이탈이라는 기사가 나갔다고 한다. 연세대와 박철순의 흑역사인 셈. 다만 박철순의 단독행동이 아닌 연세대 야구부가 집단으로 저지른 행동이었고 최동원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선배들이 후배들을 구타할 사람으로 박철순을 지목해서 그가 악역을 맡은 것이라고.

  • 선발 22연승 기록에 대해, 박철순 본인은 자신의 기록이 아닌 팀의 기록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선발경기에 야수들의 득점지원 호수비가 있었기에 가능한 기록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최동원이 그때 자신 대신 던졌다면 22연승보다 훨씬 높은 기록을 찍었을꺼라고 밝혔다.

  • 투수 출신임에 불구하고 야구는 타자놀음이라고 생각하는 케이스다. 전술한 22연승 기록과 맞물려 말하길, 투수가 아무리 잘해봤자 퍼펙트게임, 노히트노런에 불과하며 이걸 평생에 몇번 해볼 수 있냐고 반문하며 완봉승도 야수가 점수를 내주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한다. 박철순 본인의 생각으로는 결국 야구는 타자놀음, 야수놀음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23]

  • OB 코치 재임 시절이던 1997년, 음주운전을 하다 적발되어 면허정지처분을 받기도 했다. 적발된 시기가 한창 정규시즌이 진행되던 7월이라 더 말들이 많았다.

  • 1988년 속옷광고 빅맨의 모델로 나선적이 있다. 한강 둔치에서 CF를 찍다가 아킬레스건을 다쳐서 시즌 아웃.박철순 빅맨 광고

  • 그가 OB를 떠난 이유도 구타와 간접적 관련이 있었다. 2군 투수코치로 일하던 1998년 OB 2군의 주장인 소상영 선수가 자신의 심부름을 하지 않은 후배를 구타했고, 구단이 소상영을 방출하려 하자 "선배가 후배를 좀 혼낼 수도 있는 것 아니냐" 면서 반발, 결국 사표를 제출하고 팀을 떠났다. 자신이 선배에게 폭력을 당한 것은 부당하고, 내가 폭력을 당하지 않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사고방식. 나만 아니면 돼 지도자로서는 실격감이다.
결국 박철순 쉴드가 사라진 소상영은 시즌 끝나고 방출되었다.

  • 1989년 이광환 감독 재임 당시 1년동안 1군 투수코치(플레잉코치)로 활약했는데 동우, 김동현 등의 신인투수들을 육성하고 팀 방어율 역시 중상위권을 기록하면서 나쁘지 않은 능력을 보여 주었다. 1997~1998년 리빌딩기에도 핵실험가 이혜천, 김유봉, 용호 등의 신인투수들을 지도한 경력으로 볼 때 투수코치로는 의외로 괜찮은 능력자였을지도. 이미 야구계를 떠난 지 10년이 넘은지라 별 의미없는 가정이긴 하다.

  • 2012년 기아자동차의 '포수의 매니큐어' 광고에 목소리로 출연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광고에 나오는 선수의 수비 포지션은 포수이지만 박철순은 투수였다는 것과 두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OB의 레전드가 KIA 타이거즈의 모기업인 기아자동차의 광고에 목소리로 나왔다는 것.(...)[24]

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2 OB 베어스 36 224⅔
(2위)
24
(1위)
4 7
(3위)
- 0.857
(1위)
1.84 151 7 73 108
(2위)
60 46 0.970
1983 4 10⅓ 0 1 0 - 0.000 3.48 10 0 4 4 4 4 1.355
1984 1군 기록 없음
1985 9 50⅓ 1 4 0 - 0.200 2.68 36 2 16 34 19 15 0.993
1986 13 53⅓ 5 3 0 - 0.625 3.54 46 3 22 29 23 21 1.275
1987 5 24 2 0 1 - 1.000 2.25 17 0 9 11 7 6 1.083
1988 1군 기록 없음
1989 12 16⅓ 1 1 0 - 0.500 4.96 17 1 9 14 11 9 1.592
1990 18 96 4 9 0 - 0.308 4.78 104 6 41 58 53 51 1.510
1991 18 102⅔ 7 5 0 - 0.583 3.51 97 5 53 55 48 40 1.403
1992 30 99⅔ 7 6 9
(5위)
- 0.538 2.80 92 5 35 68 35 31 1.264
1993 25 116⅔ 7 5 2 - 0.583 2.08 99 3 39 90 30 27 1.183
1994 20 93 7 7 0 - 0.500 2.61 73 3 32 66 31 27 1.097
1995 20 94⅔ 9 2 0 - 0.818 4.47 98 8 50 67 54 47 1.479
1996 21 68⅔ 2 6 1 - 0.250 2.62 68 0 38 44 26 20 1.485
KBO 통산(15시즌) 231 1050⅓ 76 53 20 - 0.589 2.95 908 43 421 648 401 344 1.237

----
  • [1] 호적상 출생년도는 1956년, 똑같은 부산출신의 장효조도 54년 생이지만 호적상 56년생이다.
  • [2] 이 해 박철순은 24승 4패 7세이브, 승률 0.857, 평균자책점 1.82를 기록했다.
  • [3] 단일시즌 연승으로는 세계기록이며, 일본의 다나카 마사히로가 2013년 2012시즌에 이어 23연승으로 경신하기 전까지는 아시아 기록이었다.
  • [4] 물론 이 기록은 호적상 생년을 따른 것이다. 실제 정확한 기록은 41세 7개월 8일.
  • [5] 그러나 30대부터 일찍 탈모가 진행된 후에는 약간 안습….
  • [6] 김은식 기자의 <두산 베어스 때문에 산다>라는 책에서 실제 나이가 알려진 나이보다 2년 많은 1954년생이라고 밝혔다. 김용희와는 동광초등학교 동창.
  • [7] 팀 해체의 여파로 대성고의 3학년 선수들은 거의 대부분 야구를 접어야 했고 뒤에 장충고와 성균관대 감독을 지내는 유상호,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활약하는 정성만 등 2명만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가게 된다.
  • [8] 실업야구 선수들이 그렇듯 은퇴 후에 롯데우유에 입사, 현재는 르밀의 대표이사다.
  • [9] 참고로 첫 번째로 미국 야구 진출 선수는 이원국이다. 1968년 도쿄 오리온즈로 입단하면서 일본프로야구에서 활동한 뒤 한 시즌 지나 미국 메이저리그와 멕시코 리그에서 활약했다. 선수 말년이었던 1983년에 MBC 청룡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 [10] 대단한것이, 박찬호와 추신수등은 계약금으로 마이너 생활을 하는데 상대적으로 힘들진 않았지만, 박철순의 경우 파트타임 잡을 하면서 마이너 시절을 버티며 야구를 했다.
  • [11] 밀워키측에선 박철순이 귀국하질 않아서 정치적인 이유로 납치 당한줄 알았다고 한다.
  • [12] 박철순의 말에 의하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못하면 일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 [13] 정확히는 번트수비 중에 발을 헛디디면서 무리가 가던 허리가 결국 터져버린것.
  • [14] 당시 김영덕 감독은 박철순이 등판한다고 하면 지랄과 미친놈등의 욕설을 하며 등판하지 말것을 요구 했으나 박철순이 마운드에 오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는 누가봐도 등판하지 말라는 김감독의 요구가 정상적이었던 것이다.
  • [15] 이 혹사에 대하여 김영덕 감독은 한결같이 자신이 관리를 해주지 못한것 이라며 자책하는 반면, 박철순은 자신이 감독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등판했다고 했다. 끈끈한 사제기간
  • [16] 1982년 한국시리즈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삼성의 배대웅이 친 땅볼 타구를 잡기 위해 마운드에서 뛰어오르다 그대로 주저앉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이미 진통제 주사가 아니면 걷기도 힘들 정도의 상태였다고 한다.
  • [17] 또 다른 인터뷰에선 그 땅볼 처리를 하려다가 허리를 삐끗하게 되면서 문제가 부상을 입었다고도 한다.
  • [18] 의사 진단이 정상적인 생활은 어려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 [19] 선수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전에도 선수나 코치의 뺨을 때리는 등의 폭력이 몇 번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까지의 체육계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윤동균 감독이 유난히 심했다고만 볼 수는 없다.
  • [20] 여담이지만 이 당시 스포츠 서울의 故 이종남 기자가 칼럼과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선수들의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박철순은 그렇다 쳐도, 거의 팀에 남을 가능성이 없었던 장호연과 구단 측을 직접 중재해서 잔류시킨 것도 이종남 기자 본인. 이종남 기자는 원래 인천 토박이로 특별히 OB 팬은 아니었으며 이때 선수들 편에 선 것도 OB 구단 수뇌부의 좀스러운 운영에 예전부터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 [21] 박동희 기자가 라디오에서 감독 이기는 선수는 없다고 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이 양반은 감독을 사실상 이긴 셈.(...) --
  • [22] 그런데 이혼의 이유가 박철순 잘못이 아니라 전부인의 빚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선수시절 내내 빚쟁이에 시달려야 했기에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당시 OB 베어스 감독이던 김성근이 어느날 무작정 박철순을 데리고 은행으로 가서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거금인 2000만원을 자신의 명의로 대출받아 빌려주고 본인의 돈인 2천만원을 빌려줬다. 참고로 저 당시 9급공무원 초봉이 20만원을 조금 넘던 시절이다. 박철순은 김성근을 인생의 은사이자 은인으로 존경한다고,대체 김성근이란 사람은... 덕분에 50대 중반 나이에 벌써 손자까지 둘이나 본 할아버지.
  • [23] 같은 투수출신인 선동열등의 감독과 비교하면 상당히 대조적이다.
  • [24] 여담으로 이 광고에서 나오는 포수는 실제 KIA 타이거즈의 포수인 김상훈과 그의 아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