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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last modified: 2015-04-05 16:18:51 Contributors

KIA 타이거즈 소속 현역 내야수 박찬호는 박찬호(내야수)로.


1997년 8월 11일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에서 개인 첫 완투승을 결정짓는 순간.


올스타들이 쏘아올린 '전설 박찬호!'

"저에게 있어서 야구장은 학교와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야구는 제가 선택한 인생 과목이었습니다."
ㅡ 박찬호. 2014년 7월 18일, 올스타전 은퇴식에서.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전 ‘자기 자신을 믿으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자기 자신을 믿으면 시행착오는 겪을지 모릅니다. (강한 어조로) 그러나 그걸 통해 분명히 성장하는 자신을 보게 될 겁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으세요. 제가 절 믿고 이 자리에 섰듯이요.
ㅡ 2015년 메이저리그 야구의 정신-개척자 상을 수상한 후 인터뷰 中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며 살 겁니다. 그리고 목표를 세울 거에요. 전 목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봐요. 목표를 향해 오늘과 내일 똑같은 스텝을 밟아 걷는 것. 전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생 최고의 목표가 아닐까 싶어요. 어쩌면 현역시절의 제 목표도 통산 124승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요. 제 가장 큰 목표는 오늘도 내일처럼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거였어요.
매거진S 인터뷰에서

이름 박찬호(朴贊浩)
생년월일 1973년 7월 28일[1]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충청남도 공주시
본관 충주 박씨[2]
가족 아내 박리혜, 슬하 3녀
출신학교 공주중동초-공주중-공주고-한양대[3]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4년 아마추어 자유계약(LA 다저스)
소속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1994~2001)
텍사스 레인저스(2002~2005)
샌디에이고 파드리스(2005~2006)
뉴욕 메츠(2007)
로스앤젤레스 다저스(2008)
필라델피아 필리스(2009)
뉴욕 양키스(2010)
피츠버그 파이리츠(2010)
오릭스 버팔로즈(2011)
한화 이글스(2012)

노모 히데오, 구로다 히로키와 더불어 역대 최강의 아시아 선발투수 중 한명
대한민국 최초의 메이저리거이자 개척자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큰 이력을 남긴 역대 최강의 투수.[4]
한국 야구, 그리고 시련을 겪던 대한민국에게 희망을 안겨줬던 국민영웅.
영원한 코리안 특급

Contents

1. 개요
2. 현역 시절
2.1. 청소년기
2.2. 영광의 다저스 시절
2.2.1. 다저스의 1선발이었는가?
2.3. 비상과 몰락, 그리고 재기
2.4. 새로운 도전, 2011 오릭스 시절
2.5. 마침내 한국으로 오다(2012)
2.6. 은퇴 선언
3.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
4. 이야깃거리
4.1. 메이저리그 계약과 마이너리그 시절
4.2. 플레이 스타일
4.3. TV활동
4.4. 역대 연봉
4.5. 읽을거리
4.6. 작품 속 박찬호
4.7. 은퇴 이후
5. 국제대회
6. 주요기록
6.1. 좋은 기록들
6.2. 영 좋지 않은 기록들
7.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대한민국 최초의 메이저리거. 한국 야구 역사상 최강의 투수. 불같은 강속구[5]와 낙차 큰 커브로 '코리아 특급'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한때 다저스의 1선발 에이스[6]까지 올라갔던,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100승까지 한 한국 투수. 2001년에는 다저스의 개막전 선발이었다. 또한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을 때린 타자이기도 하다.

주무기는 빠른 강속구와 파워 커브, 슬로 커브, 슬러브. 특히 파워 커브는 메이저 최고의 명품 구질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7] 그 외 오렐 허샤이저에게 전수받은 투심도 상당히 인정받고 있다.[8] 박찬호의 커브는 2000시즌과 2001시즌 2년 연속으로 메이저리그 단장과 감독들 선정 최고의 커브 부문 3위를 했을 정도로 대단한 구질이었다. 그리고 내야수(3루수) 출신답게 수비실력도 훌륭한데, 특히 번트 대처능력은 귀신급.

게다가 저 기록들은 소위 말하는 약물시대[9]에 세운 기록이라 더욱 더 빛난다.

2005년에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딸 셋을 두고 있다. 부인은 박리혜씨로 세계 최고의 요리학교인 미국 CIA(보통 당황하기 쉽지만 예전에 다큐멘터리에도 나왔다...)를 졸업했다고 한다.

전성기에는 그렉 매덕스, 랜디 존슨과 같은 은퇴해도 바로 명예의 전당에 들수 있는 레전드급 투수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빛을 잃기도 했지만 전성기때는 리그에서도 1~2선발급 실력을 보유했던 선수이다.[10][11] 전성기가 4년이라 문제지만

탈삼진의 경우, 랜디 존슨에 이은 2위[12]를 마킹한 시즌이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LA다저스가 아닌 리그 중위권 수준의 팀에서 활약했을 시, 에이스로 활약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다저스의 1선발은 아니었지만 1선발급 수준이었다고는 주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 어차피 투수의 탈삼진 능력에 부여하는 개개인의 평가는 상당히 다채롭고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이하는 개인의 판단에 맡긴다.

메이저리그에서 박찬호와 비슷한 수준의 통산 커리어를 보유한 선수로는 노모 히데오, 러스 오티즈, 댄 패트리, 시드니 폰손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사한 선수가 노모 히데오. 실제로 선수 간의 커리어 유사성을 비교하는 Similarity Score가 952점으로 서로에게 가장 높은 점수다.

2. 현역 시절

2.1. 청소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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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G image (Unknown)]


공주고등학교 시절 고3이었던 1991년에 한미일 청소년 야구대회에 청소년대표로 미국에 간 적이 있었고, 그때부터 MLB에 대한 꿈을 가졌다. 공주고등학교 당시에는 4번타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당시 초특급 유망주였던 조성민, 임선동, 경수 등 이른바 Top 3에 비해서는 그리 이름을 날리지 못했다. 고향팀 빙그레 이글스와 계약금 5,000만원에 거의 합의했으나[13][14] 어머니의 반대로 인해 한양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십수년 만에 고향으로 귀환했다.

한양대 2학년 시절이었던 1993년 미국 버펄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나가 활약했으며 이 때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뉴욕 양키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에서 오퍼가 들어왔다. 먼저 박찬호는 애틀랜타와 접촉을 했고 애틀랜타 측에서 계약금 30만 달러를 제안했다.[15]

그런데 현지 사정에 밝지 않았던 박찬호는 1991년 한미일 청소년 대회 때 숙소를 제공해 준 것으로 인연을 맺은 스티브 김(훗날 박찬호의 에이전트가 됨)을 통해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받았음을 확인했고, 스티브 김이 박찬호에게 메이저리그 구단과 밀당을 할 것을 주문한 끝에 다저스와 계약금 120만 달러 오퍼를 받았다. 이후 다저스의 피터 오말리 구단주, 프랭크 조브 박사[16] 등이 계약 문제로 한국으로 오면서 계약은 급속도로 진행된다. 병역 문제 등으로 인해 계약이 불투명하기는 했으나 대승적 차원에서 병역 문제 등을 눈감아주면서[17] 1994년 1월 11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계약금 120만 달러를 받고 정식으로 입단하게 된다.[18]

2.2. 영광의 다저스 시절

인간계의 에이스

예외적으로 첫해에 바로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하는데, 이 기록은 당시 기준 17번째 진기록이었다.[19] 그러나 역시 당시 구위로는 MLB에서 버티기 어려웠고 17일만에 바로 AA로 내려가게 된다. 이 당시 MLB 직행은 LA의 한국인들을 노린 마케팅이었다는 설도 적지 않게 들리고 있다. 이후 AA와 AAA를 거치고 난 뒤 1995년 9월 40인 로스터 확장에 맞춰 다시 MLB로 승격되었고 나름대로 쏠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6 시즌 시작 전 5선발 자리를 두고 여러 선수들과 경쟁[20]하였으나 스프링캠프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5선발 자리를 쉽게 차지하였다. 1996년 4월 7일 컵스 원정에서 선발 라몬 마르티네스가 타석에서 부상을 당하자 바로 구원 등판하여 구원승을 따냈고 이것이 MLB 첫 승이었다. 4월 12일에는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홈경기에서 첫 선발승을 따냈다.

1997 시즌에도 치열한 5선발 경쟁 끝에 선발자리를 꿰찼고, 8월 11일 컵스전에서 생애 첫 완투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한국 언론은 그를 크게 다루지 않았으나 5연승을 거두며 시즌 10승을 넘기자 부랴부랴 그를 띄워주고 스타가 된다. 그 해,정치인인 김종필은 TV에 나와 박찬호가 내가 다녔던 학교 후배라고 난데없는 자랑을 하기도 했다. 시즌 성적은 14승 8패 ERA 3.38.

1998 시즌에는 더욱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7월에는 6경기 동안 42⅔이닝, 4승 무패, ERA 1.05, 탈삼진 34개를 기록하면서 이달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시즌 성적은 15승 9패.시즌 직후 방콕 아시안 게임에 참가해 팀의 우승에 일조하였고 정식적으로 군면제를 받게 되었다.

1999 시즌에는 성적이 매우 안 좋았다. 4월 13일 애리조나전에서 생애 첫 만루홈런을 맞았고[21], 그 유명한 한만두를 이 해 맞았다. 게다가 애너하임 에인절스 전에서 상대 투수 팀 벨쳐가 박찬호에게 욕설[22]을 하자 팔꿈치 가격 뒤 이단옆차기라는 기이한 싸움을 보였고 벤치클리어링 후 퇴장 당했다. 여러모로 다사다난했던 시즌.


2000년도 에네하임전때 선발 모습
2000 시즌에는 그야말로 에이스 모드...라고 하기에는 케빈 브라운이 강하긴 했지만 그래도 빼어난 모습을 보였다. 2000년 8월 25일 몬트리올 전에서는 생애 첫 홈런을 기록했고[23], 2000년 9월 3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전에서는 생애 첫 완봉승을 기록했다. 18승 10패 ERA 3.27의 최고의 성적.

이듬해인 2001시즌에는 더욱 강력한 모습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시즌초 방어율 2점대행진을 달리면서 전반기부터 그해 FA계약금액이 얼마나 될것인가하는 기사가 돌았다. 투수 첫 연평균 2000만달러 계약을 돌파할것인가하는 가쉽성기사도 나올 정도.올스타전에도 출전하였다. 그러나 칼 립켄 주니어에게 홈런을 맞았고 성적은 그리 좋지 못하였다. 그러나 올스타전이후 허리가 문제가 되어 성적은 급락하게 되고 또한 배리 본즈의 시즌 71, 72호 홈런 신기록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시즌 성적은 여전히 15승 11패 ERA 3.50으로 뛰어났다.

2001 시즌 뒤 FA 자격을 획득했는데, 이 당시 다저스는 대런 드라이포트와의 희대의 먹튀 계약을 체결한 뒤라 박찬호를 붙잡을 돈이 없었고, 결국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하게 된다. 이 당시 박찬호가 부상을 숨기고 있었지만 텍사스는 그것을 몰랐고, 이는 텍사스와 박찬호 둘에게 매우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2.2.1. 다저스의 1선발이었는가?

이 시절 박찬호는 그야말로 리그에서 10손가락 내에 꼽힐만한 성적을 냈다는 주장과 당시 세이버 스탯을 살펴보면 박찬호는 팀 덕에 승만 많이 챙겼을 뿐이지 절대로 리그에서 10손가락 안에 든다고 볼 수가 없다는 주장이 공존한다. 우선 FIP가 방어율보다 꾸준히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 이유는 운빨이라기보단 박찬호의 수비가 워낙 뛰어나서[24] 본인의 힘으로 막은 실점이 꽤 많은데 FIP는 투수 수비도 지워버리기 때문이며 박찬호도 FIP의 예외케이스 중 하나이다.(FIP 항목에도 나와있음)

또한 몇몇 박빠들은 다저스 시절에는 팀의 1선발인 케빈 브라운은 거액을 주고 데려오자마자 드러눕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박찬호가 팀내 최고 에이스였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케빈 브라운은 데려오자마자 드러눕지도 않았고, 오히려 이적 첫 해인 1999년에 252⅓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3.00을 기록, 팀내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반면 박찬호는 194⅓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5.23을 기록했다.

그 다음해인 2000년 역시 케빈 브라운은 230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2.58을 기록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다만 박찬호의 실질적 전성기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2001년 시즌에 케빈 브라운은 부상으로 인해 115⅔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2.65를 기록하였다. 2001 시즌 케빈 브라운은 '콜라 등 카페인이 많은 음료를 많이 마셔 심장 박동에 이상이 생기는' 묘한 부상을 시작으로, 시즌 내내 부상에 시달렸다. 그 덕택에 2001 시즌은 개막전 선발을 포함, 박찬호가 사실상 1선발이었다. 참고로 브라운이 약을 빤 시기는 부상을 당한 01시즌 직후부터다. 그러나 정작 약빨을 받기는커녕 더욱 성적이 하락해버리며 좋지 않은 끝을 보이고 말았다.

2.3. 비상과 몰락, 그리고 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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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꿈과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던 텍사스 레인저스 입단 장면 아 안돼
톰 힉스[25] 구단주 : 최고의 투수를 영입했습니다.


왼쪽에 롸동자 알렉스 로드리게스, 오른쪽에 라파엘 팔메이로. 양쪽 다 약 빤 분들.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박찬호 입단 당시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 양복을 입은 채로 수영장으로 점프할 뻔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텍사스 금지어 텍사스의 볼드모트

박찬호는 몇 년간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2001년 역시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에 정상적이라면 많은 돈을 받고 계약을 하는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2001년에 FA로 대박 내보겠다고 부상을 안고서 투구를 했고 [26]시즌 후에 그걸 알고 있던 다른 팀들에서는 영입 제안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관심을 가진 쪽은 시애틀 매리너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거 모르고 걸린 게 텍사스 레인저스.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 6,500만 달러의 거액에 계약했다. 물론 여기서 텍사스 입장에서 진짜 문제가 될만한 부상이 있었다면 입단 직전 메디컬 테스트에서 빠꾸 먹는다. 즉 텍사스 입장에서는 일단 지르기 시작하면 오기 싫어하는(구장이 타자구장이니) 투수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 저 당시 텍사스는 에이스 릭 헬링을 포함한 선발진의 몰락으로 투수진을 재건하고자 거액으로 지른다. 그 결과는……

엄청난 기대치와 함께 비싼 돈 주고 영입했더니 텍사스 레인저스로의 이적 전후 찾아온 부상으로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며 이후로도 한만두, 박먹튀라는 욕까지 먹는다. 이 당시 쏟아진 한국 언론의 원색적, 비판적인 태도 때문에 2013년 현재까지도 박찬호는 언론에 대해서 안 좋은 인식을 가졌다고 한다.[27] 미국 언론에서도 최악의 FA계약을 꼽을 때 모 본, 대런 드라이포트 등과 함께 항상 상위에 꼽고 있는 나쁜 계약으로서 그 이후 한동안 투수에게 장기계약을 하지 않는 분위기까지 불었다.[28] 텍사스에 있던 3년 반 동안 제대로 뛴 시즌은 2002년과 2005년이었는데 성적은 안 나왔고, 나머지 2년은 부상으로 누운 시간이 많았으니 커리어도 그 만큼 손해를 보았다. 그리고는 A-Roid에게 24kids 중 하나라고 까였다.

2005년 오렐 허샤이저 코치를 만나면서 부활의 징조를 보였고, 그 해 7월 31일 플레이오프를 노리던 샌디에이고 파드레스로 이적하면서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으며 방어율은 좋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시즌 10승을 기록한다. 2006년에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시즌을 잘 소화해 나갔다. 하지만 원인 불명의 장출혈과 수술, 그리고 이어지는 빈혈로 시즌 후반 로테이션에서 탈락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로스터에는 포함되어 생애 첫 플레이오프를 치루고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 등판에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기도 하였다.

2007년에는 뉴욕 메츠와 계약하였으나 장출혈 후유증 등으로 아주 나쁜 모습을 보이며 방출되었으며 휴스턴 애스트로스 마이너에서도 상당히 나쁜 모습을 보여 재활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 하지만 2008년에 올림픽 예선에서 호투하고 LA다저스와 계약한 뒤 상당한 구위 회복을 보였으며 시즌 초반 완전 재수[29]로 콜업되어 중간계투로 주로 활약하는 한편 선발투수로도 등판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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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돌아온 구위와 선발의 기회. 그러나...

2008년 6월 22일 드디어 오매불망 그리던 선발 출전에서 35도의 불볕더위 속에서 5이닝 1실점 9삼진의 놀라운 피칭을 보여줬으나 하필 상대팀 밀워키 브루어스 선발이 2007 사이 영 상 수상자인 CC 사바시아. 사바시아는 5회까지 무결점 피칭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날 박찬호의 유일한 실점인 홈런도 쳐낸다. 그리고 박찬호가 마운드에서 내려가자마자 사바시아는 홈런을 허용하였다. 흠좀무. 이래저래 안습이다.

2009년엔 다저스를 떠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최소 250만, 최고 500만 달러라는 불황치고는 짭짤한 메이져 계약을 해냈다. 조건은 5선발 후보로 경쟁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 시즌 초에는 5선발로 선발출장[30]했지만 1승만 거두고 중간계투 요원으로 돌아섰다. 선발투수 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박찬호를 계속 믿고 내보냈던 당시 필리스 감독 찰리 매뉴얼은 한국 팬들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중간계투로 전환한 뒤에는 구원승과 여러차례 홀드를 기록하며 선발로 나섰을 때보다 구위가 상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박찬호의 선발 부진의 원인에 대해 일각에선 부상설을 제기하였지만 워낙 예민한 성격의 박찬호가 주변의 과도한 기대에 대한 부담감과 선발투수로 확실히 부활하겠다는 일념이 너무 지나쳐서 도리어 부진했던 이 아니냐는 시각이 제일 근접한 설명인 것 같다. 실제로 선발에서 탈락하고 릴리프로 전환하면서 상당히 좋은 피칭을 보여주고 있으며, 본인도 부담감이 적어 좋은 피칭이 나오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여담으로 불펜으로 돌아선 덕분에 MLB 네트워크에서 방송중인 'The Pen'(필라델피아 불펜 선수들의 일상을 다룬 프로그램이다)에 2회부터 자주 출연하기도 했다. 불펜 동료들과 있을때 특유의 말투로 한두마디 툭툭 던지곤 하는데 상당히 재미있다.

'불펜 에이스'라는 칭호를 들으며 롱 릴리버로서 무피홈런, 삼진/볼넷 비율 10 이상 등의 황금 스탯을 자랑했으나 안타깝게도 9월 16일 경기에서 병살타로 이닝을 마감하던 공을 뿌리다 다시금 오른쪽 햄스트링 부상이 도졌다. 1994년에 MLB에 진출하여 PS에 던진 경험이라고는 2006년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에서 던진 패전처리용 2이닝 뿐. 세상을 향해 법규를 날린 남자가 가진 두 개의 우승반지를 보면 이래저래 부러워 할 수 밖에 없을 듯. 부상을 이겨내고 PS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길 기대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필리스의 내셔널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기록상으로는 1패에 평균자책점 8점대를 찍어 매우 좋지 못하지만, 결정적 위기 상황을 잘 모면했다. 특히 LA 다저스 클린업 트리오를 삼자범퇴시켜 게임을 승리로 이끈 NLCS 1차전은 그 중 백미. LA 원정에서는 다저스 팬들에게 야유를 받은 것 때문에 국내 박찬호 팬덤이 들고 일어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원래 미국야구의 특성상 자기가 응원하는 이 무조건 우선인 법[31]이고, 1년 전만 해도 다저스 소속으로 NLCS 필리스전에서 등판하던 왕년의 다저스 에이스급 투수가 필리스로 날라버린채 자기 팀을 상대하러 오니 팬들은 불쾌할 수밖에 없으니 그러려니 하자...



이 해의 명장면 : NL 우승이 확정된 뒤 관중석에 올라가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렇게 악의 제국과의 월드시리즈 맞대결을 펼쳐 신종플루에 걸린 상태에서 4게임에 등판해 3⅓이닝 동안 2피안타 무실점으로 활약해, 예년과 다른 모습을 보이던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불펜에서 스캇 에어와 함께 그나마 체면치레를 해준 단둘뿐인 선수가 되면서 길었던 2009년 시즌을 마무리했다. 브래드 릿지 대신 클로저로 기용하자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

2010년 계약발표 당일까지 언론에서는 마치 시카고 컵스와 계약할 것처럼 이야기가 흘러나왔는데, 모든 사람들과 기자들의 예상을 뒤엎고 뉴욕 양키스와 계약했다! 절대반지월드시리즈 우승반지 득템을 위한 선택으로 추정된다. 계약조건은 1년에 기본 120만달러 + 보너스 30만달러로 선발이 아닌 불펜투수로 뛰게 되었다.

등번호는 이번에도 61번. 외야수 그렉 골슨이 자신의 등번호였던 61번을 포기하고 27번으로 바꾸면서 박찬호는 다시 양키스에서도 자신이 매번 달아오던 61번 번호를 달고 뛸수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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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폭풍설사 인터뷰 뒤에서 웃는 대머리 아저씨가 압권
카메라 뒤에서 미친듯이 폭소하는건 데이비드 로버트슨조바 체임벌린. [32]

PARK: I had a lot of diarrhea. That - That is what you want to know?
REPORTER: Your manager said you were sick.
PARK: Yeah, I had a lot of diarrhea. I had diarrhea and then.... why? Why, it's funny?
REPORTER: No. He thinks its funny.
PARK: Save it. The off day - off day I had a lot of diarrhea.. and flu too...a little. A lot of cough. Chest hurts. I feel dehydrated, something like that.

박 : 설사를 많이 했어요. 그, 그게 알고 싶은 건가요?
리포터: 감독 말로는 당신이 아팠다는데요.
박 : 그렇죠. 설사를 많이했고, 그리고... 왜? 왜 이게 웃긴가?
리포터: 아뇨. 다른 사람들이 웃긴가봐요.
박 : 그만해. 쉬는 날 설사와, 감기증세, 기침도 많이 했고, 가슴에 통증. 탈수증세도 좀 있었죠.

2010년 4월 4일 펜웨이 파크에서 열린 레드삭스 원정에서 더스틴 페드로이아에게 좌월 2점 홈런을 맞고 뒤이어 케빈 유킬리스에게 그린 몬스터를 맞추는 2루타를 허용한뒤 강판당했다. 설상가상으로 뒤이어 올라온 다마소 마떼와 호르헤 포사다 배터리는 2연속 폭투를 범하며 유킬리스는 득점. 마떼야 뭐하는거니. 결국 7:9로 양키스는 패배했고 박찬호는 패전의 멍에를 썼다. 가뜩이나 승리투수는 오카지마 히데키...

4월 7일 경기에서는 1:1 스코어에서 7회에 등판하여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연장 10회초 양키즈가 커티스 그랜더슨의 솔로홈런 등 2점을 추가, 10회 말 마리아노 리베라의 세이브에 힘입어 통산 121번째 승리를 기록하였다.

4월 15일 에인절스전에서 몸을 푸는 도중 오른쪽 햄스트링에 통증을 느꼈고, 바로 15일 DL행. 박찬호는 개인 홈페이지에서 갑작스럽게 부상을 당한 이유에 대해서는 "늦게 계약해 약간은 정신없이 새로운 팀에 적응하고 시즌 준비 또한 서둘러 하다 보니 좀 바쁘게 달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복귀를 위해 25일에 양키스의 스프링캠프가 있는 플로리다에서 재활에 매진하였으나 여전히 오른쪽 햄스트링 뒤틀림이 낫지를 않아 재활을 중단하였다.

결국 복귀 후에도 높은 피장타율을 보이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코칭스태프의 눈밖에 나 트레이드설이 흘러나왔고, 케리 우드가 트레이드로 양키스에 온 7월 31일자로 웨이버 공시를 거쳐 지명할당되면서 4일 뒤, 피츠버그 파이리츠가 클레임을 걸어 피츠버그로 이적, 빅리그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웨이버 공시기간이 지나 FA로 풀릴 경우 영입을 원하는 탬파베이 레이스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뺏길 것을 염려한 해적네가 대담(?)하게 나서 데려간듯 싶다. 하위 팀이기는 하지만 팀의 중심을 잡아줄 베테랑 투수로써 데려갔으니 어쩌면 양키스에 있을 때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다. 우승반지는 좀 더 참아야 할 듯.

어쨌든 온갖 고난 끝에 9월 12일 드디어 123승 97패의 아시아 최다승 타이기록을 이루었다! 그리고 10월 1일 플로리다 말린스와 원정 경기에 3-1로 앞서던 5회말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3이닝 무실점 호투로 시즌 4승째를 거두면서 124승 97패 아시안 최다승 기록을 경신하였다![33]

흔히 말하는 박까들은 노모 히데오의 123승 109패와 비교하며 박찬호를 까기 바쁜데, 선발승으로만 이루어낸 노모의 123승에 비하면 불펜에서의 승수가 더해진 박찬호의 기록이 못미친다는 논리. 인고의 세월이 더해진 대기록에 사용하면 안될 비교이다.

최다승을 경신한 후 한화 이글스로의 복귀를 원한다는 발언을 했는데, 한화팬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의견은 "한국에서 마무리 잘하자."와 "그냥 미국에서 깔끔하게 은퇴하자."로 팽팽히 맞섰다. 다만 공통적인 의견은 "국내에 와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원자단위로 까이는 건 원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2010년 시즌을 마치고 향후 진로를 놓고 가족이 허락한다면 국내에서도 뛸 수 있다는 의사를 피력하는 등 여러 의견이 오갔지만 결국 메이저리그 4개 구단에서 박찬호와의 계약에 흥미를 보인 상황이고, 박찬호 본인 역시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까닭에 기자회견을 열어 2011년에도 메이저리그에서 뛰겠다는 사실을 밝혔다.

하지만 2010년 12월 20일 스포츠조선 단독보도로,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버팔로즈로 갈 것이라는 기사가 났다. 계약기간은 1년이고 등번호는 그대로 61번. 오릭스 팬 여러분 최고의 투수를 영입했습니다.
# 그리고, 그토록 염원하던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는 결국 영영……. 그래도 일본시리즈와 한국시리즈가 있으니까…. 하지만 오릭스와 한화의 막장성은 박찬호도 극복할 수 없었다.

메이저리그 생활은 이미 청산한지 오래라고 한다. 근데 좀 요상한 게 본래는 오릭스에 입단하는게 아니라 고향팀인 한화로 오고 싶었다고. 하지만 오는 데 여러가지 병신력 넘치는 규정이 산재해 있는 바람에 이도저도 못하다가 일단 처가가 있는 일본으로 가닥을 잡았다.

2.4. 새로운 도전, 2011 오릭스 시절


오릭스 입단이후 첫 공개훈련.

2011년 3월 6일 주니치와의 시범 경기를 가졌는데 결과는 4이닝 5실점. 이에 네티즌들에게 까였다. 하지만 이와는 상관 없이 박찬호 자신은 이번 성적에 일단은 나름대로 만족한 모양이다. 일단은 계획대로 80구를 던져서 그중 51개는 스트라익을 만들었고, 탈삼진 5개에 사사구 2개가 4이닝동안 5실점하고 교체 될때까지 낸 성적인데 일단 박찬호 자신은 뭔가 자신감을 얻은 듯한 뉘앙스를 주었다. 게다가 시범경기때 한번 푸닥거리한번 하고 본 시즌 들어가서 잘나가는 선수들도 있으니...

그렇게 시범경기 선발등판에서 죽을 쑤던 것도 몇번이였을까…. 3월 21일 쿄세라돔에서 열린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등판, 53개의 공을 던지고 볼넷을 한개도 내주지 않고 딱 3피안타만 허용하며 총 4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그의 위기 관리능력과 구위가 상승한 것을 본 팬들은 이제야 몸풀렸구나!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도호쿠 대지진으로 일본 사회가 흉흉한 가운데, 3월 15일자로 피해지역 지원금 모금에 1천만엔을 기부했다고 발표 하였다. 배용준에 이어 기부발표에 대해, 일본 내 야구팬들은 크게 감사하다는 반응. 대인배로 추앙받았다. 그리고 같은 일본 야구계 선수들은 왜 기부금 안내냐고 자국 프로선수를 까는 훈훈한 상황이.

4월 2일 있었던 프로야구12개팀 자선경기에 선발로 출전, 상대는 지바 롯데 마린스로 해당 팀에서 활약하는 김별명김태균과의 투타대결이 화재를 모았다. 하지만 보크를 6개나 범하면서 페이스가 무너져서 인지 6이닝에 포풍실점...일단 투구와 볼끝은 좋았다지만 10년 넘게 미국에서 야구생활을 하다가 규정이 더 세밀한 일본야구의 보크 규정에 발이 많이 묶인 듯 하다.

결국 여러가지 불안요소가 노출되면서 아쉽게도 개막전 선발투수 자리는 기사누키 히로시에게 돌아갔다.

4월 15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전에 정규시즌 첫 선발 등판했다. 마쓰이 카즈오에게 선두타자 홈런을 허용하면서 불안하게 출발했으나, 오릭스 수비진의 도움과 베테랑다운 위기관리능력을 십분 활용하며 6⅔이닝 3실점으로 역투했다. 7이닝 가까이 던지면서 투구수가 고작 83개였을 정도로 투구수 관리도 적절했다. 하지만 라쿠텐의 에이스인 다나카 마사히로의 구위에 오릭스 타선이 완전히 발리면서 패전투수가 된다. 이 날 경기에서도 보크를 하나 범했지만, 본인이 수긍했다고 한다.

4월 22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전에서는 7이닝동안 3피안타 4볼넷 6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하여 일본에의 첫 승을 거두었다. 거기에 이날은 부진하던 이승엽이 몸을 던져 안타와 점수를 뽑아내어 팬들을 열광시켰다.

4월 29일, 이번에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다나카 마사히로와 선발 맞대결을 펼쳤다. 2회에만 5안타를 맞으며 3실점했지만, 그외에는 특별한 위기없이 8회까지 완투. 그러나 이번에도 오릭스의 타선이 9회까지 완투한 다나카의 구위에 발리면서 1득점에 그치는 바람에 완투패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나마 1득점도 병살타구가 실책으로 타자가 살아서 얻은거다. 이쯤되면 오릭스에게서 한화의 향기가 난다 이 날의 기록은 8이닝 110투구수 9피안타 3실점 0볼넷(!) 4탈삼진.

어린이날인 5월 5일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전에 선발 등판하지만 잦은 실투를 범하며 5이닝 7피안타 5실점으로 부진, 패전투수가 된다. 이날도 오릭스 타선은 당연히 무득점으로 침묵.

5월 11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6이닝 4실점으로 또 패전투수가 되었다. 잘 던진 편이었지만 6회에 맞은 홈런이 뼈아팠다. 이 날 팀타선은 간만에 터졌으나 터졌다고 하기도 애매한게 3득점이니….

근데 이걸 이유로 감독이 박찬호를 2군으로 내려보냈다. 2군 내려가기 전까지 평균자책점은 4점대로 어떻게 보면 평타는 친 성적으로 보일 지도 모르나 2011년 퍼시픽리그는 극도의 투고타저를 겪었다. 박찬호의 경우 2군 내려가기 전 퍼시픽리그 선발 중 평균자책점이 뒤에서 2등. 며칠 전 이승엽의 2군행까지 엮여서 감독이 한국까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오기도. 그런데 박찬호와 이승엽은 2군가는게 워낙 당연한 성적이다.

그리고 5월 2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을 앞두고 이승엽과 함께 1군에 복귀, 요미우리전에 선발 등판한다. 다양한 변화구를 바탕으로 한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6이닝 3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7회초 공격에서 대타로 교체되었고, 그 회에서 오릭스가 한 점을 뽑아내면서 박찬호는 승리투수 요건을 갖춘다. 하지만 9회말 오릭스의 마무리 기시다 마모루가 야노 켄지에게 동점 적시타를 허용하면서 박찬호의 승리는 물거품이 된다. 일단 잘 던졌다는 것에 위안을 삼자.

그러나 일본리그가 희대의 투고타저 리그가 된 시점에서 4점대의 ERA는 용병의 성적이라 하기에는 초라한 것이 사실이며, 게다가 2군에서는 그것보다도 성적이 나쁘다. 사실상 일본 리그 시절은 거의 흑역사라 봐도 무방하다. 처음에는 국내 복귀에 회의적이었던 일부 팬들 - 정확히 말하면 구위와 제구가 좋은 박찬호가 한화에 오는 것을 꺼리던 팬들 - 도 이제는 "까짓거 뭐..."라는 마인드로 생각을 바꿀 정도.

2011시즌이 끝나고 결국 오릭스에서 박찬호 퇴단을 공식 기사화했다. 한국에도 오지 못하고 자신의 부진도 마이너스 요인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나 아쉬운 시즌.

2.5. 마침내 한국으로 오다(2012)


늦은 나이에 데뷔를 한한화 신인 선수의 위엄


인터넷 필수요소거리를 만들고 싶어 가로본능을 시전하는 박찬호
박찬호/2012 항목 참조.

2.6. 은퇴 선언

2012 시즌 종료 이후, 현역 연장과 선수 은퇴의 기로에서 고민하던 박찬호는 결국 11월 29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수많은 이력을 남겼던 대선수의 은퇴 선언의 아쉬움도 있었지만, 박찬호를 포함하여 전력구상을 세웠던 김응용 감독의 한화 이글스의 입장에서도 타격이 큰 결정이었다.[34]

2013 시즌 중반쯤 되자 야구팬들이 우스갯소리로 박찬호의 은퇴를 신의 한수라 평하기도 한다. 한화의 투수진이 외국인 선발 두명을 제외하고 자리를 잡지 못하고 김응용 감독의 불펜 투수 기용도 잘하는 투수를 무리하게 등판시키는 일이 잦은 만큼(예:송창식) 만약 박찬호가 은퇴하지 않았다면 말년에 엄청나게 고생하게 됐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박찬호/2012 항목에도 있었지만 김응용 감독은 박찬호를 마무리 투수로 기용할 구상을 하고 있었다.)

사실 이 둘은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김응용이 한화에 오기 전까지 없었지만 깊은 악연이 있었다. 박찬호가 텍사스로 이적한 후 부상 후유증과 이적 부담감이 겹치며 부진을 겪고 있을 때 김응용은 느닷없이 박찬호에게 '야구에 집중 안 하고 딴짓하느라 그런 거다.' 라는 근거없는 비난을 하였다.[35] 이미 박찬호를 먹튀라고 하며 국민영웅에서 국민역적으로 온갖 매도를 하던 언론은 구체적 증거도 없이 김응용의 말을 사실인 것처럼 다뤘다.그러고보면 그 제자도 스승한테 배웠는지 별별 개드립을 박찬호에게 박찬호는 시 구절을 응용하여 김응용의 증거 없는 막말에 대해 섭섭함을 표현했다.

박찬호가 한국에 돌아온 뒤 국내팬들에 대한 팬서비스에 가까운 선발 등판을 한 2012년 시즌이 끝나고, 잘 던지던 못 던지던 진심으로 응원해주며 좀 더 던져주기를 원하는 한화팬들의 성원에 마음이 흔들려 지인들과 상담을 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김응용은 대뜸 박찬호를 마무리로 보직 변경한다고 발언하였다. 야구선수의 보직 변경, 특히 투수의 보직 변경이라는 건 투수 개인은 물론 팀 전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라도 보직 변경을 권유받거나 자처한 투수는 감독이라든가 코칭스태프와 의논을 진지하게 나눠야한다. 그런데 김응용은 박찬호와 한마디 의논도 없이 보직 변경을 하겠다고 선언. 이러한 김응용의 박찬호의 의사를 무시한 태도는 고민하던 박찬호에게 은퇴라는 결과를 만들어줬다.

덕분에 박찬호는 현역 시기 김응용과 악연으로 시작해 악연으로 끝났다.[36]

youtube(tdTV1xcMp6M)
2014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역대 최초로 은퇴식을 가진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원래 2013시즌에 한화 이글스에서 은퇴식을 준비했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결국 무산 되었고 2014시즌 들어서 선수협이 KBO에 박찬호 은퇴식을 건의하면서 이러한 의견이 급물살을 탔다. 이하 그의 은퇴사 전문.


감사합니다.

오늘 이 영광스럽고 특별한 이 지금 이순간을 제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지난 2012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었는데요 그후 20개월 동안 저는 끊임없이 다시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올라서는 생각을 잊을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다시 마운드에 올라가서 공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여러분, 야구장은요, 야구장은 제 인생에서 정말 학교와도 같았습니다. 야구는 제가 선택한 제 인생과목과도 같았고요 야구를 통해서 너무나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정말 소중한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요, 그리고 삶의 열정과 애정, 사랑, 그리고 꿈과 도전, 인생의 철학까지 배울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통해서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한 분들을 위해서 제가 감사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이 특별한 자리를 만들어주신 구본능 총재님과 KBO 관계자여러분. 그리고 각구단 임원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에게 동료애(愛)와 그리고 선후배의 의(義)와 애정, 사랑을 정말 깊이 느끼게 해준 선수협, 선수 후배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태어나서부터 저의 모든 것을 지켜봐주시고 그리고 제가 야구를 시작한지 30년동안 저의 투구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시며 저의 슬픔과 기쁨을 늘 함께해주신 사랑하는 부모님께 감사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겸손을 통해서 삶의 목표와 의식의 질을 높여주는 옆에 있는 제 아내에게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소중하고 고마운, 저에게 야구에 대한 열정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늘 잃지않게 해준 애국심과 한국인의 긍지를 늘 각인 시켜주신 지인 여러분들, 그리고 여기 계신 야구 팬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저는 공을 던지면서 꿈과 희망에 도전할순 없습니다. 하지만 야구인으로써 더 성장할 수 있는 노력을 하겠습니다. 내나라 대한민국 야구를 위해서, 야구 발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3.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

전성기 시절 새가슴이라는 일부 비난이 있었던데다,[37] 한만두처럼 잘 던지다 한 번에 무너지는 모습을 자주 보여 '멘탈이 약한 선수가 아닌가' 하는 이미지가 강했으며, 의외로 이 이미지는 아직도 많은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듯. 그러나 그가 홈페이지에 남기는 글이나 인터뷰[38] 등을 보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

처음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 자기소개 밖에 할 줄 몰랐던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구단에서 붙여준 통역을 과감히 사양했다든지[39], 첫 차를 사기 전에 교통비를 아끼려고 경기장에서 숙소까지 뛰어갔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보면 고생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자세가 엿보인다. 또한 메이저리그에서 생존하기 위해 프로 초창기 때 던졌던 슬라이더를 봉인한 대신 빠른 공과 궁합이 맞는 커브를 장착한 이야기나, 샌디에이고 시절 장출혈, 필라델피아 시절 신종 독감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 프로정신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4. 이야깃거리

4.1. 메이저리그 계약과 마이너리그 시절

메이저리그 행을 통보받고 공항에서 출국하기 전에, 몇 안되는 기자들과 관계자들이 배웅해줬다 한다. 당시에 대충 이런 말이 오갔고...

박찬호: 제가 백억을 벌어서 오겠습니다.
기자들: 백억?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박찬호: 아 농담한건데 너무 심하네ㅋㅋㅋㅋㅋㅋㅋ
모두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이 아이는 몇 년 후에 코리안 빅 맥이 됩니다 100억이 아니라 1000억을 벌어 왔다.

박찬호가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장거리 달리기를 매일 같이 해와 하체가 튼실하다는 점과 국내에서는 금기시한 하이 키킹 동작을 했다는 점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관한 이야기는 그를 다룬 책 <메이저리그와 정복자 박찬호>에서 나오는데, 고등학생 때부터 달리기를 거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마이너리그 시절 차가 없었을 때는 경기장에서 집까지 뛰어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국내 지도자들이 금기시했던 하이 키킹을 시도했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그의 영원한 우상인 놀란 라이언 투구 동작 사진을 구해 부분부분 연습해 구속이 빨라졌다고 한다.[40] 물론 마이너리그 서비스 타임시절에 이 극단적인 투구폼은 손을 보면서도 강속구를 살리는 방법으로 코칭을 받았다고 한다.

4.2. 플레이 스타일

이 말 한마디로 끝난다. 아시아 야구 역사상 최강의 패스트볼을 뿌렸던 선발투수

현재까지도 패스트볼의 구위만으로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압도한 동양인 선발투수는 박찬호와 노모[41] 뿐이고 그나마 구원투수 쪽에서는 사이토 다카시우에하라 고지가 있으며 현역 동양인 선발투수 중에서 다르빗슈의 패스트볼 구위가 박찬호에 가장 근접해 있다.[42]

박찬호 악포심 던진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년에는 이를 악물고 괴성으합! 흐압! 지가 무슨 샤라포바여?을 질러가며 포심을 던진 적도 있었다. LA나 필라델피아, 피츠버그 등에서 이런 일이 좀 잦았는데, 해설자들이 이야깃거리로 삼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또한 이러한 습관 때문에 어금니가 망가져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고, 남아있는 치아의 보호를 위해 대책으로 마우스가드(피스)를 착용하고 던진다. [43][44]

류현진의 미국진출 후 은근히 류현진과 비교가 되거나 재평가되고 있는데 박찬호는 전형적인 구속, 무브먼트로 윽박지르는 파워피쳐이고, 류현진[45]은 다재다능함을 자랑하긴 하지만 박찬호처럼 우격다짐형 파워 피쳐는 절대과는 스타일이 완전 달라서 두 명의 다져스 한국선수의 경기를 모두 본 사람들에게 잔잔한 재미를 주고 있다. 젊을 적에는 사실상 패스트볼과 커브 투피치[46]로 A급 투수로 등극할 만큼 스터프로 먹고사는 스타일이었다. 특히 95~6마일을 넘나드는 포심은 제구가 되는 날에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며 삼진의 산을 쌓는 원동력이었다.그러나 제구가 안될 때에는 미칠듯한 볼넷 이후 여러 구질을 배우고 보완하면서 다양한 구질을 던지게 되고 또 몇몇 구질은 부활의 원동력이 되긴 했으나 항상 박찬호를 상징하고 박찬호가 있게 한 것은 강력한 직구였다. 사실 류현진은 직구로 압도하는 타입은 아니라서 박찬호보다는 오히려 압도적인 면이 떨어져 보일 수도 있으나 훨씬 더 안정적이고 완성된 타입이다.어차피 그러거나 말거나 한국인은 모두 두 사람 경기를 각잡고 본다 그래도 힘으로 찍어누르는 압도적인 구속이 빠른 파이어볼러 투수가 인기도 높고 많은 야구팬의 로망이라 전형적인 정통파 우완투수로 리그를 호령하는 한국 투수인 박찬호는 선구자 타이틀이 없어도 매력적인 투수였고, 박찬호 이후 정통파 한국인 메이져리거를 다시 보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전성기때는 기억되는 박찬호와 달리 상당히 안정적인 투수였다.이상하다 매번 각잡고 본 경험밖에 없는데 특히 '퀄리티스타트'라는 단어를 한국에 처음 정착시켰으며 박찬호의 투구를 보고 퀄리티 스타트가 쉬운 걸로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매번 나오면 6이닝 3실점은 당연한거였다. 다만 삼진 아니면 볼넷그리고 홈런일 정도로 제구되는 날과 안되는 날의 차이가 좀 있었고 볼넷으로 위기를 자초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경력이 쌓일 수록 위기관리능력이 늘어 삼진과 병살로 잘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그리고 훗날 후배가 1회마다 비슷한 짓을 하고 있다

투수치고는 타석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어 가끔씩 홈런을 치곤 했다. 연장 13회 때 선발출장한 투수를 대신하여 '대타' 박찬호가 나서는 일도 있었다. 흠좀무. 1호 홈런2호 홈런. 가장 마지막 기록을 보자면 09/04/26 vs플로리다전에서 홈런을 쳤다.[47] 더 대단한건 3개의 홈런 모두 밀어서 넘긴 홈런이다. 시즌 타율은 투수 중에서도 높은 편인 1할 대 후반에서 2할 타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보내기 번트 능력은 메이저리그 투수 중 정상급이다.

사실 잘 믿기진 않지만 대학교시절의 박찬호는 국가대표 4번타자였다. 물론 출신고등학교인 공주고에서도 4번타자. 고교야구에서는 강타자의 수비 위치가 투수인 경우가 종종 있다.[48] 당시 92학번은 '전설의 학번'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재들이 많은 학번이었다. 특히 투수쪽에는 조성민, 임선동, 등 엄청난 선수들이 즐비했었다. 근데 재미있는 건 당시에는 이 세 명의 투수 중 박찬호에 대한 평가가 가장 낮았다고 한다. [사실] 공은 빠르지만 세세함이 부족하고 컨트롤이 잘 안되는데다 부상도 많았다는게 이유. 그래서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갔기 때문에 더 성공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메이저리그는 선수의 단점을 고치는 한국 스타일보다 선수의 장점을 강화시키는 훈련 스타일인데다 체계적인 트레이닝으로 선수의 몸관리를 해서 오랫동안 선수로 뛸 수 있게 되었다는게 그 이유다.

전형적인 슬로우 스타터다. 전성기 때 시범경기 성적이 썩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기어코 10승 이상을 올리는 활약을 보여줬다. 시즌 초인 4~5월에 난타를 당하는 경기를 자주 보여주다가 6월 하순부터 발동(?)이 걸리기 시작, 7~8월은 리그 특급 투수의 성적을 찍어줬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초창기 때 전담포수를 둘 정도로 포수와의 호흡은 상당히 민감했다. 방망이는 좋지만 수비와 리드가 시망인 마이크 피아자, 토드 헌들리, 폴 로두카 대신에 찰스 존슨이나 채드 크루터같은 수비형 포수를 선호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게, 저 시기 국대경기에서는 약드래곤 대신에 잉금님을 선호했다.[50] 그러다 점점 연차가 찬 이후에는 그다지 까탈스럽지 않은 투수로 변했다.

강했던 팀과 선수는 시카고 컵스, 밀워키 브루어스, 다저스 시절 필라델피아 필리스, 제프 켄트, 에드가르도 알폰소[51]. 약했던 팀과 선수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미네소타 트윈스,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배리 본즈, 블라디미르 게레로, 클리프 플로이드 등이 있다. 그 밖에 후자의 예를 더 보충하자면, 박찬호가 유독 약했던 팀에서 늘 박찬호를 괴롭히던 선수들이 하나 둘 있었다. 이를테면 에릭 차베스라든지, 미네소타의 자크 존스라든지...

2006년 WBC 일본전에 던진 박찬호의 공을 보고 일본 기자들이 "변화구를 많이 던진 것이 아니냐"라고 질문하자 박찬호가 "오늘 변화구는 던진 적 없고 투심 던졌다."라고 대답한 일화도 있다. 그만큼 공의 변화가 엄청났다는 얘기.

또 사족으로 일본의 마쓰이 히데키의 천적이다. 통산 전적에서도 마쓰이가 박찬호를 상대로 단 한개의 안타를 쳤을 뿐 거의 밥이라고 할 정도로 마쓰이에게 강하다. 통산 9타수 1안타. (그런데 그 1안타가 홈런이다) 실제로 마쓰이는 "박찬호의 공은 도저히 칠 수가 없다."라고 이야기 한 적도 있다.

구질 욕심이 보통이 아니다. 전성기 시절 투피치 피처로 구분되긴 하나, 2000년부터 재미를 보던 슬러브를 비롯, 속도가 40km/h가 차이 나는 커브를 실전에 쓰기도 했다. 또한 상술된 바, 투심도 수준급.

노모 히데오에게 메이저리그 시절 포크볼을 알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노모 히데오가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는 "내가 당신의 패스트볼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포크볼 따윈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오릭스에 가서도 포크볼을 배우려고 하는 건 여전하다. 결국 오릭스의 동료 선발투수에게 체인지업을 가르쳐 주고 그에게 포크볼을 배우려고 로비하기도 했다.

4.3. TV활동

전성기였던 90년대 후반 대한민국 광고계의 블루칩이었다. '익사이팅'이라는 본격(?) 스포츠 껌의 광고 모델이기도 했고, 그리고 그 유명한 삼보컴퓨터 체인지업의 모델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찔러 그의 이름을 딴(?) '찬호박'이라는 이름의 호박맛 아이스크림도 있었다.[52] 2010년에 LG패션 타운젠트의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

경인지역 민영방송의 밥줄이었다. iTV 때도 그랬고 OBS도 MLB중계를 시작했다. 그러나 돈이 안 돼서 결국 2010시즌의 중계권은 포기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 다시 중계를 시작했다. 2010시즌 중계권을 소리소문 없이 구매해서 잘 방영했다. 다만 추신수 위주의 중계방송을 시도하는지라 박찬호의 비중은 많이 줄었다.

2009년 초 1박 2일에 출연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던 박까들을 팬으로 전향시키는 기적을 실현하기도 했다. 1박 2일에 출연하여 믿을 수 없는 기술을 보여주기도 했다.
[53]
2011년 12월 1일 '주병진의 토크콘서트' 첫 방송의 게스트로 초대되었다. 중간에 노래는 잊자고요

2013년 7월 18일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다.

4.4. 역대 연봉

년도 액수 소속팀 소속리그
1994년 10만 9000 달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메이저리그
1995년 11만 4000 달러
1996년 12만 4000 달러
1997년 27만 달러
1998년 70만 달러
1999년 230만 달러
2000년 395만 달러
2001년 990만 달러
2002년 688만 4803달러 텍사스 레인저스
2003년 1300만 달러
2004년 1400만 달러
2005년 1500만 달러 텍사스 레인저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6년 1550만 5142달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7년 60만 달러 뉴욕 메츠
휴스턴 애스트로스(마이너)
2008년 50만 달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9년 250만 달러 필라델피아 필리스
2010년 120만 달러 뉴욕 양키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2011년 2억 5천만엔 오릭스 버팔로스 일본프로야구
2012년 2400만원[54] 한화 이글스 한국프로야구

박찬호가 여태껏 벌어들인 돈[55][56]
팀명 금액 원화로 환전 시
메이저리그에서 번돈 8,665만 6,945달러 969억 9511만 8500원
일본프로야구에서 번 돈 2억 5천만 엔 28억 9,582만 5,000원
한국프로야구에서 번 돈 2,400만원
총액 998억 9,094만 5,900원

이게 선수야 재벌이야
어느 메이저리거 후배가 회장님의 5년 6,500만 달러를 경신했다!![57]

원래 94년경 첫 출국 당시 당당히 100억 벌어오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정확히 10배를 벌어 온 것이다! 이로써 박찬호의 재산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 숫자로 드러났다. 저 정도면 국회의원 중에서 박찬호보다 부자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즉 원래 재벌가인 정몽준 의원같은 그런 극단적인 분들뿐이다.

4.5. 읽을거리

전담포수였던 채드 크루터를 고소한 적이 있다. 사유는 빌려준 돈을 안 갚았다고. 그런데 나중엔 소송을 취하했다. 오오 대인배 오오

부인 박리혜는 아버지가 일본 부동산 재벌인데, 그 아버지가 박찬호에 대해서 하는 말이 '우리 사위가 야구하느라 돈은 별로(!) 못 벌었지만 사람은 좋다'[58]이다. 참고로 박찬호가 연봉으로 번 돈도 많지만 여기저기 산 건물들도 있는데 그 건물의 시세도 오르고, 임대료로 알차게 돈을 벌고 있다.

부인인 박리혜는 위에서 서술한대로 요리사이며, CJ의 요리 전문 케이블 채널 O'live에서 홈메이드 쿡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부인이 요리사라는 사실을 두고 DC인사이드 야구갤러들은 박찬호 선발 경기에서 특별한 활약을 보이는 선수(박찬호의 선발승을 위해 적시타나 홈런을 치거나 호수비 등을 하는 팀원이나, 결정적 에러로 상대방 팀분위기를 일순에 꺾는 상대 팀원)를 '박사장 회식 초청자 명단'에 추가하기도.

사실 결혼하기 전에도 저런 류의 팬덤이 있었다. 다저스 시절에는 박찬호 도우미로 불리는 선수가 몇몇 있었다. 토드 질, 라울 몬데시, 게리 셰필드, 그린 등. 특히 게리 셰필드는 박찬호 등판 경기 때마다 연속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활약하던 시절, 엑스포츠 개국 초기 딱히 광고수입이 없던 당시 박찬호 등판경기 때 좋은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엑스포츠에서 우릴대로 우린 조여정의 송월타월 광고에서 본따 타월을 선물하자는 얘기도 있었다. 쇼월터 감독을 '벅 송월터' 감독으로 불렀던 그 시절이다.

이때 조여정과 송월타올을 지긋지긋하게 본 탓에 메이저리그 통산 100승을 올릴 당시 국내 메이저리그 팬덤에서는 박찬호와 조여정을 맺어주자고 하는 여론까지 생겼었다. 배스타월로 몸만 가린 조여정의 타월을 벗기고 싶다던 일부 남성 해야팬들도 있었다. 극소수 팬들은 조여정이 타월을 벗으면 돔구장 건립은 현실이라는 말을 했다 카더라. 믿거나 말거나.

2009년 월드시리즈 때 독감에 걸린 채로 등판되었다고 보도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신종플루였다는 것이 본인 입에서 밝혀져서 대인배로 칭송받았다.이게 무슨 대인배야 다른 사람들 다 걸리라고?

희한하게도 그가 공을 잘 던지면 나라가 곤경에 빠진 증거라는 설이 있다. 그냥 웃으면서 넘기기에는 참 미묘한 시기에만 잘 던지는 것이 또 나름의 아이러니.

특이하게도 박찬호는 선수 시절 내내 미국 영주권이 없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구단의 협조까지 받아가면서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메이저리거라는 신분이 보장되는 확실한 직업이 있어서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금방 딸 수 있다. 그런데 박찬호는 어차피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끝낼 것이기 때문에 영주권을 따지 않았다는 식의 기사가 나온 적이 있었지만 정말인지 불분명했으나 어쨌든 이 때문에 계약이 새로 갱신될 때마다 노동비자를 새로 발급받는 불편함을 감수했다.

뉴욕 양키스의 투수 조바 체임벌린이 위에 나온 박찬호의 폭풍설사 인터뷰를 듣고 폭소했다. 사실 당시 양키스 선수치고 이 영상을 안 본 선수가 없고 안 웃은 선수가 없는 지경이니 조바는 "박찬호는 오랜 시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난 투수였다. 어렸을 때 나는 박찬호의 투구를 자주 봤다. 그의 팬으로 나는 성장했다. 그런데 이제 같은 팀 불펜에서 선수생활을 한다는 것이 기쁘다"라고 말했다.

여담으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KLPGA에서 활약하던 프로골퍼 박현순이 박찬호의 사촌누나다.

그의 연대기를 자세하게 볼 수 있는 불암콩콩코믹스 - 레전드 박찬호 카툰.

해외야구 갤러리에선 박찬빈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정확하게는 찬빈님or챈빈님이라 불리며 숭배되고 있다.(한때 박찬호가 부진했을때 역술인이 이름을 바꿔야한다고 했는데 바꾸면 좋은 이름중 하나가 찬빈이었다) 박찬호의 등판 때마다 갤은 페이지가 쉽게쉽게 넘어가며, 상대팀에서 박찬호에게 좋은 타격을 한 선수나 삽질을 하는 한화 선수는 매국노 취급을 받고, 삽질을 하는 상대 선수는 애국자로 칭송받는다. 갤러리에서는 허구헌날 IMF 때의 채무 의식을 되새기라면서 찬빈님에 대한 존경을 강조한다.

지누션의 두 멤버와 친구사이다. 박찬호가 마이너와 메이저를 오가던 시절 LA로 가면 자주 만났던 친구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이도 동갑이고. 2001년에 박찬호는 등장음악으로 지누션의 A-Yo!를 쓰기도 했다. 요즘은 서로 왕래가 뜸한 편이긴 하지만 예전에 지누션이 가지고 있던 의류브랜드 MF(메이저 플레이버)의 모델로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래퍼가 된건가!!


특이하게 언사이클로피디아에는 그의 항목이 없는데 Encyclopedia Dramatica에는 그에 대해 다룬 항목이 있다. 다른 항목들과 달리 상당히 정상적이다. 다만 저 폭풍설사 이야기만 다룬다는게 함정

팬서비스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불친절한게 아니라 말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한다. 사인 하나 하고 팬과 꽤 많은 시간을 토크를 나눈다고.*

4.6. 작품 속 박찬호

1990년대 당시 아시아선수가 드물었던 메이저 리그에서노모 히데오와 함께 아시아 선수를 대표했으며 더불어 두자리 승수의 실력까지 겸비해서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만화 메이저에서는 본명이 아닌 '안종빈'이라는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한국팀 에이스의 모티브로 나왔으며, 일본 작품 답게 한국팀과 안종빈이 비열하게 나온다.

김성모의 만화 스터프 166km에서는 박찬화라는 2차 창작 비슷한 캐릭터가 나오는데, 셰필드의 '박찬화에게 전해, 난 영원한 도우미라고!'라는 명대사가 유명하다. 그리고 이는 클로저 이상용에서 3차 창작으로 이어진다.


4.7. 은퇴 이후

  • 단편영화 서울서칭에 출연한다.
  • 샌디에이고시절 도움을 받았던 구단주와의 친분으로 지도자 수업보다 구단경영에 관심을 가져서 미국으로 구단 경영수업을 받으러 갈 거라고 한다.진짜 박사장을 볼날이 머지 않았다. 차기 한화이글스 구단주.

  • 친한 사이인 배우 차인표의 권유로 sbs라는 토크프로그램에 공동 MC가 되었다. 추석특집으로 파일럿으로 스님편이 반응이 좋아서 정규프로그램으로 승격이 되었다. 매주 한국사회의 저명한 인사들을 캠프로 초청하여 하나의 테마를 바탕으로 그들의 인생이야기를 들려주는 힐링프로그램성격의 토크프로로, 워낙 굴곡진 선수생활을 많이 격고 이겨낸 박찬호의 인생경험과 철학이 그대로 토크에 녹아 있어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었다. 첫 회 게스트로 만화가 이현세와 사진작가 중만이 나와서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이제는 매주 금요일에 박찬호의 모습을 볼수있게 되었다.

  •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송재우 해설위원과 함께 JTBC의 한국전 중계 해설을 맡았다. 최고의 투수답게 매 상황마다 선수의 상태나 개인적인 경험 등을 살려 좋은 해설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 한번은 투수가 어떤구질로 승부할지 예측했는데 그게 그대로 이루어져 역시 박찬호라는 찬사도 받으면서 성공적으로 해설가의 길로도 안착했다. 중간 중간 소강상태때마다 해주는 메이저리그 뒷얘기라고 쓰고 피아자 디스[59]는 덤. 거기에 피처 까지. 하지만 대표팀은 1라운드 탈락

  • 2012년에 유한양행 삐콤씨와 한화생명[60] 광고에 출연. 삐콤씨의 "궁금해 박찬호", "하루 두 알"이라는 구호와 대한생명 광고에서 (아내:야구 관두면 뭐하고 살까?)아내의 말에 콕콕!! (감독:어째 공이 예전과 다르다?)감독의 말에 콕콕!! 대충대충 인생살게?! 콕콕짚어 인생설계!! 라는 랩을 구사하며 프로야구 광고 때마다 등장하여 깨알같은 웃음을 주고 있다. 하지만 코코몽한테 발린건 안자랑[61] 워낙 건강하고 믿음직한 성실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광고에서 그를 계속 볼수 있을것 같다.

  • 2013년 메이저리그 NLCS 시리즈 3차전 다저스 홈경기에 등판하는 류현진을 응원하러 다저 스타디움을 찾았다.[62]

  • 공식 홈페이지도 있다. 주소는 http://www.chanhopark61.com/.

  • 2014년 5월 27일(미국시각 기준) 다저스 구단에서 개최된 한국의 밤 행사 기념으로 시구를 하였다. 포수는 류현진. 그리고 시구 버프를 받은 다저스는 그날 경기에서 승리했다. 시구영상

  • 2014년 시즌 중반부터서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2014년에 은퇴식이 열린다는 소리가 돌았는데 결국 선수협에서 박찬호의 은퇴식이 없었다는게 마음에 걸렸는지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2014년에서 은퇴식이 열리는걸로 확정이 되었다. 대체로 프로야구와는 인연이 깊진 않았지만 한 때 한국 야구인으로서 대단한 업적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여론. 다만 올스타전이 아니라 연고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올스타전이 열리는 경기장이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인지라, 광주광역시기아 타이거즈와 연고가 없는 박찬호가 이 곳에서 은퇴식을 여는 것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63] 올스타전에 비가 오고 있었지만 은퇴식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되면서 박찬호는 공식적으로 야구를 은퇴하게 됐다.

  • 2014년 8월 미국에서 열리는 리틀 야구 월드 시리즈에서 한국 대표팀 대 푸에르토 리코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시구를 하고, 대표팀 선수단을 격려했다.

  • 인천 아시안 게임기간 동안 SBS서 야구 해설을 맡기로 했다. 정우영 - 이순철 콤비와 호흡을 맞출 예정. 해설을 하다가 오재원 선수와 있었던 일[64]을 꺼내면서 핵직구 디스를 해서 논란이 있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해설자가 꺼낼 정도의 수위가 아니었고, 나중에는 오재원 쪽 주장이 맞다는 얘기가 많이 나오면서 야구 팬 사이에서 거의 절대적 존재였던 박찬호도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박찬호와 오재원이 그간 쌓아온 이미지 차이(...) 때문에 오재원도 많은 비판[65]을 받았다. 안습... 이외에도 이거성 뺨치는 비난해설(...)을 보여주며 거성의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 은퇴 기념 300개 한정 피규어가 제작되었다.120만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이지만 그 가격만큼의 퀄리티를 보여준다. 피규어 구입후기

5. 국제대회

국제대회에 굉장히 강해서 상대하는 나라들을 다 바르고 다녔다. 심지어는 공의 위력이 텍사스 시절 이후 가장 약화되었다는 06년에도 다른 나라 타자들이 손 한번 못댄 정도. 특히 06 WBC때 코치나 해설가 할거 없이 박찬호의 체인지업 위력이 완전 떨어져서 공을 던지면 난타 당할거란 예상을 내놓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체인지업으로 관광 보내버렸다. 당시 한국에선 먹튀가 된 박찬호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선발이 아닌 계투로 활용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가장 잘 던지는 투수는 계륵 취급받던 박찬호였다.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불참 선언 때 괜히 난리친 것이 아니다.

박찬호의 국제대회 성적은 다음과 같다.

  •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야구
    • 예선전 vs. 대만 : 5이닝 1실점 승리투수
    • 예선전 vs. 대만 : 1⅔이닝 0실점
    • 결승전 vs. 일본 : 7이닝 1실점 승리투수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예선1라운드 vs. 대만 : 3이닝 0실점 세이브
    • 예선1라운드 vs. 일본 : 1이닝 0실점 세이브
    • 예선2라운드 vs. 멕시코 : 1이닝 0실점 세이브
    • 예선2라운드 vs. 일본 : 5이닝 0실점

  •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예선
    • 예선전 vs. 대만 : 3이닝 무실점

  • 도합 성적
    • 2승 3세이브 26⅔이닝 2실점 평균자책점 0.68
흠좀무.

저 2실점도 알루미늄 배트가 허용되었던 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잃은 것. 하지만 어쨌거나 위에 기록이 보여주듯이 합법적 병역 브로커의 첫 주인공 겸 일원이자 큰형으로서[66] 그를 포함한 수많은 국내파 선수들에게 병역특례를 선물한 주역 중 하나.

6. 주요기록

6.1. 좋은 기록들

  • 1994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입단. 그 해에 NL에서 두번째로 어린 선수였음 (만 21세)
  • 1997년~2001년 5년 연속으로 13승 이상 기록
  •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드림팀 I) 소속으로 금메달 (군면제)
  • 2000년 18승 10패, 평균자책점 3.27, 226이닝 기록. 다승 NL 5위
  • 2000년 피안타율 6.89개 - NL 1위 (다만 피출루율은 NL 10위권 밖)
  • 2000년 삼진 217개 - NL 2위
  • 2001년 35경기 선발 출전 - NL 1위 (15승 11패, 평균자책점 3.50, 234이닝)[67]
  • 2001년 올스타전 출전
  • 2001년 삼진 218개 - NL 3위
  •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4경기 출전해서 평균자책점 0.00, 3세이브 기록
  • 2009년 월드 시리즈에 4경기 3⅓이닝 등판해서 평균자책점 0.00 기록
  • 통산 홈런 총 3회 기록[68]
  • 2010년 9월 13일까지 메이저 리그 통산 123승 97패, 아시아 최다승 타이기록.
  • 2010년 10월 2일 124승으로 아시아 선수 최다승 달성.

6.2. 영 좋지 않은 기록들

여러 모로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만한 기록을 많이 세웠다. 좋은 기록이던 나쁜 기록이던 간에.왠지 양키들은 나쁜 기록에만 더 관심이 갈 거 같긴 하지만...

7. 연도별 주요 성적

박찬호는 NPB와 KBO에서는 홀드세이브를 기록한 적이 없다.

MLB에서의 주요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1994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 0 0 0 4 0 0 - 0 11.25 5 6 6 2.50
1995 2 1 0 0 4 0 0 - 0 4.50 2 2 7 1.00
1996 48 10 0 0 108⅔ 5 5 - 0 3.64 82 75 119 1.41
1997 32 29 2
(NL 18위)
0 192 14
(NL 12위)
8 - 0 3.38
(NL 14위)
149 78 166
(NL 12위)
1.14
(NL 7위)
1998 34 34
(NL 5위)
2
(NL 22위)
0 220⅔
(NL 12위)
15
(NL 14위)
9 - 0 3.71
(NL 19위)
199 108 191
(NL 6위)
1.34
1999 33 33
(NL 10위)
0 0 194⅓ 13
(NL 19위)
11 0 0 5.23 208 114 174
(NL 10위)
1.58
2000 34 34
(NL 6위)
3
(NL 11위)
1
(NL 9위)
226
(NL 9위)
18
(NL 5위)
10 0 0 3.27
(NL 7위)
173 136 217
(NL 2위)
1.31
(NL 17위)
2001 36 35
(1위)
2
(NL 14위)
1
(NL 7위)
234
(NL 3위)
15
(NL 11위)
11 0 0 3.50
(NL 12위)
183 111 218
(NL 3위)
1.17
(NL 7위)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02 텍사스 레인저스 25 25 0 0 145⅔ 9 8 0 0 5.75 154 95 121 1.59
2003 7 7 0 0 29⅔ 1 3 0 0 7.58 34 31 16 1.99
2004 16 16 0 0 95⅔ 4 7 0 0 5.46 105 46 63 1.44
2005 20 20 0 0 109⅔ 8 5 0 0 5.66 130 60 80 1.68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05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10 9 0 0 45⅔ 4 3 0 0 5.91 50 30 33 1.66
2005 시즌 합계 30 29 0 0 155⅓ 12 8 0 0 5.74 180 90 113 1.67
2006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4 21 1
(NL 21위)
1
(NL 7위)
136⅔ 7 7 0 0 4.81 146 54 96 1.39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07 뉴욕 메츠 1 1 0 0 4 0 1 0 0 15.75 6 2 4 2.00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08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54 5 0 0 95⅓ 4 4 5 2 3.40 97 40 79 1.40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09 필라델피아 필리스 45 7 0 0 83⅓ 3 3 14 0 4.43 84 38 73 1.40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0 뉴욕 양키스 27 0 0 0 35⅓ 2 1 1 0 5.60 40 13 29 1.47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0 피츠버그 파이리츠 26 0 0 0 28⅓ 2 2 1 0 3.49 25 9 23 1.13
2010 시즌 합계 53 0 0 0 63⅔ 4 3 3 0 4.66 65 22 52 1.32
MLB 통산(17시즌) 476 287 10 3 1993 124 98 20 2 4.36 1872 1048 1715 1.40


NPB에서의 주요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선발 완투 완봉 이닝 평균자책점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1 오릭스 버팔로즈 7 7 1 0 42 1 5 4.29 44 16 21 1.33

KBO에서의 주요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완투 완봉 이닝 평균자책점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2 한화 이글스 23 1 0 121 5 10 5.06 134 63 68 1.54

역대기록(MiLB)
년도 소속팀 경기수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이닝
1994 샌안토니오 미션스(더블 A) 20 5 5 0 0 3.55 91 57 100 101⅓
1995 앨버커키 듀크스(트리플 A) 23 6 6 0 0 4.91 93 76 101 110
2002 오클라호마 레드호크스(트리플 A) 1 0 1 0 0 9.00 9 76 3 3
2003 프리스코 러프라이더스(더블 A) 2 1 0 0 0 2.45 10 3 3 11
2003 오클라호마 레드호크스(트리플 A) 3 3 0 0 0 4.89 27 8 12 18⅓
2004 애리조나 래인저스(루키리그) 4 1 1 0 0 1.71 15 15 20 21
2004 호클라호마 레드호커스(트리플 A) 4 0 2 0 0 3.72 21 3 19 19⅓
2007 라운드 락 익스프레스(트리플 A) 15 5 8 0 0 5.21 100 24 70 84
2007 뉴올리언즈 제피어즈(트리플 A) 9 4 3 0 0 4.57 64 16 16 51⅔
2010 스크랜턴 양키스(트리플 A) 1 0 0 0 0 0.00 1 0 2 1


타격기록
통산 MLB 타격 타석 타수 안타 홈런 득점 타점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통산 타격기록[70] 479 430 77 3 27 31 20 155 0.179 0.215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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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양력 생일이며 대부분의 포털 사이트에는 음력 생일인 6월 29일로 기재되어 있다.
  • [2] 박세리, 박경림과 같은 본관이다.
  • [3] 2학년 재학중에 다저스와 계약하면서 중퇴, 2001년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 [4] 추신수가 박찬호의 통산 WAR를 넘어버렸기에 역대 최고의 메이저리거는 아니다. 박찬호 통산(투수+타자) 17.9, 투수 15.8. 추신수 2012년 7월 7일 기준 19.8. 비단 WAR뿐만이 아니라 7년 1억 3000만달러의 계약으로 박찬호의 계약 기록까지 깨뜨렸다.
  • [5] 단,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2000-2001시즌에는 패스트볼의 구위가 상당 부분 감소한 상태였다.
  • [6] 케빈 브라운 때문에 에이스까지는 차지 못했지만 그래도 다른 중하위권 팀에서는 에이스 노릇해도 이상하지 않은 성적이었다.
  • [7] 여기에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이 함께 들어갈 수 있겠으나, 슬라이더는 마이너리그 시절 통타 당하던 구질이라 이후에는 구사를 자제하다 2008시즌부터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체인지업은 그가 던질 수 있는 구질 중에서 민감하고도 완성된 시간도 꽤 오래 필요했던 구질이다.
  • [8] 미국 폭스TV 중계방송 당시 아나운서가 박찬호의 투심을 보고 '저런 투심은 플레이스테이션2에서나 볼 수 있다.'라며 칭찬하기도 하였다.
  • [9] 사실 MLB에서 약물의 시대가 아니었던 적은 없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베이브 루스가 양의 고환 추출물을 복용했다는 기록이나 미키 맨틀이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다가 종기가 나서 결장한 사건, 행크 애런이 암페타민을 복용했다고 밝힌 것 등 약물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는채로 약물 복용이 성행했으며, 미첼 리포트가 터지며 대중이 메이저리그의 약물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된 이후에도 약쟁이는 꾸준히 적발되고 있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간에 통상적으로 스테로이드 시대를 일컫는 경우 1980년대 후반부터 2007년까지를 일컫는다.
  • [10] 굳이 1~2선발급 실력이라고 표현한 것은 박찬호가 텍사스 시절 1선발이었던 때가 있었지만 그에 걸맞는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다저스 시절 2선발로 활약했을 때에도 1선발인 케빈 브라운을 압도하는 성적을 보였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박찬호의 전성기 시절 수상기록을 살펴보아도, 2001년 올스타를 제외하곤 딱히 주요부문 평균자책점, 탈삼진, WHIP, 승수, 이닝수 등에서 1위를 마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제구력도 1선발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불안했고.
  • [11] 박찬호의 마이너리그 시절 스카우팅 리포트를 보면 빅리그 선발진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다는 평을 내렸다. '확실한 유망주', '미래의 메이저리그 프런트라인 급 투수'로 평한 부분은 새삼 박찬호가 대단했다는 걸 방증해준다.#
  • [12] 물론 압도적인 차이가 있긴 하다. 2000 시즌 217K를 잡아내는 위엄을 보였지만 그분은 347K. 다만 이 시즌에 볼넷도 124개로 리그 2위를 기록하여 삼진/볼넷이 1.75였다.
  • [13] 박찬호가 메이저 리그에 가서 얼마되지 않았을 때 이루어진 인터뷰에서는, 빙그레가 3,000만원을 제의했는데 이미 몸값이 억대를 호가하던 조성민과 임선동에 비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서 1,000만원만 더 주길 바랐는데 빙그레에서 그러지 않아서 무산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출처는 확인 바람.
  • [14] 이 당시는 연고 지역 내의 고졸 선수들은 별도의 지명 절차 없이 입단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교섭 기간이 11월 1일부터 15일까지로 제한되어 있었고 1990년대 중반에 들어 프로야구와 아마추어 야구의 대립이 심해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15] 다만, 브레이브스 측에서는 계약금을 먼저 받는 대신 먼저 병역을 마칠 것을 박찬호에게 요구했다.
  • [16] 토미 존 수술을 최초로 제안한 의사로 다저스의 팀닥터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 [17] 면제를 하는 것은 아니었고 미필자임에도 불구하고 해외로 바로 보내줬던 점. 김일성이 살아있던 1993년 겨울 시점에서 분단국가에서 병역의무를 필하지 않은 20대 남자는 단기 해외여행에도 보증인을 세우고도 무조건 단수여권만 발급되던 시절이다. 심지어 당시 병무청장이 엄청난 야빠라서 눈감아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실제로 박찬호가 해외로 나갈수 있었던 것은 해외 유학생 신분에 한해 28세까지 병역 연기가 가능했던 당시 병역법때문이었다. 유학비자를 딴채 취업하게 되면 미국 이민법에 저촉될 수 있었지만 당시 메이저리그에는 팀당 3명의 비미국인 선수의 취업은 허가되었다는 조항까지 있어서 당시 21세인 박찬호의 미국무대 진출이 가능했다는 이야기. 이종남 기자의 책 발췌.
  • [18] 박찬호 이후 2012년까지 거의 50여명에 달하는 한국 유망주들이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했지만 100만불 이상 계약은 겨우 10명 남짓이며, 더구나 20년의 세월의 흐른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액수이다. 당시에도 100만 달러 이상은 드래프트 1라운더 계약금 수준이었고, 실제로 1993년 드래프트 전체 1번이었던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계약금 150만 달러를 받았다.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한 유망주 중에서 메이저리그까지 올라간 선수들은 예외없이 100만불 이상 계약금을 받은 선수들 뿐이다.
  • [19] 당시 먹튀의 전설 대런 드라이포트와 함께 메이저리그에 직행했다. 하지만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직행은 일종의 기록 만들기에 불과했다는게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일치하는 평. 뉴욕타임스에서는 아예 대놓고 마이너리그 계약이라고 보도했다.
  • [20] 5선발 자리는 주로 베테랑과 유망주들이 경쟁하는 자리다. 당시 박찬호는 베테랑 너클볼러였던 톰 캔디오티와 5선발 자리 경쟁을 했다.
  • [21] 그해 박찬호는 한만두 포함 4개의 만루홈런을 맞았다. 이는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 공동 타이기록.
  • [22] 희생번트 후 뒤에서 껴안은 채 놓지 않자 박찬호가 "아 님 왜 안놓으셈? 좀 놔줘요" 하니까 벨쳐가 "꺼지셈(fxxk off)"이라고 말했다.
  • [23] 참고로 이날 미국 국가를 부른 가수가 양파였다 한다.
  • [24] 1997-2001년의 투수 수비 기여도(def)는 전체 투수중 10위다. 투수 수비만큼은 정말 열 손가락 안에 든다.
  • [25] 리버풀 FC의 팬이라면 학을 떼는 그 양키 구단주 맞다. 현 구단주인 펜웨이 스포츠 그룹의 존 헨리 이전에 팀을 소유했었다.
  • [26] 사실 허리 부상은 대학때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 외에도 오른팔 팔꿈치 뼛조각 문제도 대학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 [27] 민훈기 기자와 사이가 벌어진 것도 이 시기의 일. 당시 언론들의 까대기 때문에 박찬호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
  • [28] 그래서 그랬던 걸까, 2013년 텍사스 레인저스에 입단한 추신수에게 박찬호 관련한 질문이 쏟아졌다.
  • [29] 박찬호는 사실 시즌 극초반 콜업할 예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날 비가 오기로 예보되어 있던 날이라서 다저스의 조 토레 감독은 임시 선발 투수를 투입했다. 하지만 의외로 날씨가 맑자 3회에 예정된 선발 투수로 바꾸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시 비가 내려서 투수의 어깨가 식는 바람에 또 선발급 투수를 한명 더 투입하였다. 그 바람에 다저스는 급하게 롱 릴리프가 부족해 박찬호를 콜업하게 되었다.
  • [30] 시즌 초 선발로 등판하던 때에 플로리다 말린스 원정경기, 다시말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홈런 치기 힘든 돌핀 스타디움에서 커리어 최후의 홈런을 치기도 했다. 이후 박찬호에게 홈런을 맞은 크리스 볼스태드는 부진한 커리어를 보내다가 2014년 한국프로야구두산 베어스에 입단한다.
  • [31] 워낙 팀이 많아서 자기 팀 선수였는지도 모르는 선수에게 일일이 격려를 보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며, 이따금씩 기립박수를 보내주는 것은 팀에 큰 공헌을 했거나 위대한 업적을 세웠던 선수에게나 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도 위대한 선수라 해도 라이벌 팀에 가서 자기 팀을 상대할 때는 야유를 당하기가 부지기수. 심지어 로저 클레멘스까지도 토론토 블루제이스 시절엔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았지만 뉴욕 양키스로 가버리자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았다. 다저스와 필리스가 신 라이벌리로 떠오르던 상황에 그렇게 필리스로 가서 다저스를 상대하는 전 다저스 투수에게 좋은 반응이 있었겠는가.
  • [32] https://ca.sports.yahoo.com/mlb/blog/big_league_stew/post/Chan-Ho-Park-is-amazingly-honest-about-his-diges?urn=mlb,233585
  • [33] 당시 피츠버그 감독 존 러셀이 전폭적으로 밀어줬다. 당시 피츠버그는 포스트시즌은 예전에 물건너가고, 기념할 만한 마일스톤도 전혀 없는 상황이어서 팀 전체가 박찬호의 기록을 맘놓고 지원해 줄 수 있었다. 실제로 기록달성 때 자기일처럼 기뻐하는 팀원들을 볼 수 있다.
  • [34] 2012년 시즌 후 NC 다이노스의 특별지명이 있을 때 박찬호를 20인 보호선수에 포함시켰고, 그 때 옮겨간 선수가 송신영이었다. 후에 다시 넥센으로 옮겨가긴 했지만
  • [35] 야구에 집중 안 하고 한 딴짓이라는 건 검열삭제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허리 부상이니 보나마나 그것 때문이라고 지레짐작한 모양.
  • [36] 은퇴식때 김응룡 감독이 박찬호의 신문 스크랩을 액자로 내놓으면서 이 같은 평가도 미묘해졌다.
  • [37] 실제 박찬호는 고등학교 때 담력을 키우기 위해 야밤에 공동묘지에 혼자 가서 방망이질(?)을 하거나(이 일화는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다.), 일부러 미팅에 나가는 등의 노력을 했다고 한다. 대학 1학년때는 선배였던 구대성이 박찬호에게 뻔뻔함을 길러주기 위해 지하철 잡상인을 시키기도 했다고.
  • [38] 내가 원하는 것은 선발투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꿈 속에서만 살 수는 없다. 때로는 현실을 이해하고, 그 현실 속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보고있냐김병현
  • [39] 이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메이저리그에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은 뒤에는 히스패닉 선수들과 제대로 소통을 하기 위해 스페인어를 추가로 공부했다고 한다.
  • [40] 여기에는 한가지 사연이 있다. 1991년 한미일 청소년 대회를 마치고 귀국 후 바로 공주로 갈 수는 없어서 이태일 기자(現 NC 다이노스 사장)의 집에 머물렀는데 박찬호가 놀란 라이언의 책을 보고 관심을 보이자 이태일 기자가 그 책을 박찬호에게 선뜻 선물을 했다. 그리고 박찬호는 그 책에 나와있는 그림을 보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하이키킹 투구폼을 완성했다.
  • [41] 물론 두 선수 모두 각자 리그에서 손꼽히는 슬러브와 포크볼로 재미를 보기는 했지만.
  • [42] 하지만 정작 다르빗슈는 자신을 다양한 구질도 타자를 상대하는 유형의 투수로 생각하는듯 하다. 항목 참조
  • [43] 이미 어금니는 심하게 마모되었다고 한다.
  • [44] 2008년 12월 28일에 방송된 1박 2일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치아 보조기를 착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45] 류현진이 KBO 에 있을 때에는 최고의 파워 피쳐에 컨트롤도 최고의 피네스 피쳐라 부를 수 있는 완전체였다. 메이저리그로 와서는 양쪽 모두가 정점인 완전체는 아니지만 양쪽 모두를 적절히 구사하는 올라운드 형 투수가 되었으나 상대적으로 정교한 제구력과 섬세한 운영이 장점으로 평가받는다.
  • [46] 사실 패스트볼을 포심과 투심으로 나눈다면 3피치
  • [47] 2000년에 2개의 홈런을 날린 후 9년만에 쳐낸 통산 3호 홈런. 세 홈런 다 홈런이 나오기 힘든 구장(1호 다저 스타디움, 2호 퀄컴 스타디움, 3호 돌핀 스타디움(댄 매리노의 집))에서 쳐낸 것도 대단한 기록이다.
  • [48] 본문의 해당 내용은 출처가 필요함. '92학번'은 인재가 즐비하던 학번이고, 그 당시 대학무대에서 최고의 타자인 박재홍이나 김종국(물론 지금 시점에서는 믿기지 않겠지만)을 두고 1선발(그 당시 국가대표 1선발은 문동환. 대학무대의 최고의 투수로 명성이 자자했던 조성민이나 임선동 조차도 문동환보다 한 학번 밑이라 그 뒤에 주로 나왔음. 믿기지 않을테지만 사실임.)도 아닌 박찬호를 4번으로 썼다는 내용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프로 가는 시대가 아니어서 대학무대에는 준프로급 선수가 즐비했기 때문에 투수를 국가대표 4번 타자로 썼다는 것은 의문을 가중시킨다. 고졸에서 프로로 바로 직행한 홍현우가 무척 흔치 않은 경우였던 시대이다.
  • [사실] 92학번 전체를 이야기해보면 더 많은데 손경수 정민철 염종석 차명주 흑마구전병호 안병원 그리고 타자로 박재홍 송지만 이영우 김종국등이 있다.
  • [50] 잉금님이 까였던건 투수진과의 불화가 주된 요인이고 그 외에 리드 때문이지 수비 능력 자체는 좋다.
  • [51] 뉴욕 메츠에서 2루수로 뛰다 나중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도 뛰었던 그 선수 맞다.
  • [52] 그런데 박찬호 본인은 이 CF에 출연 하기는커녕 사진도 안 나온다.
  • [53] 이 때 선에 걸치면 얻는 혜택이 걸친 사람 1명 빼고 나머지 야외취침에서 전원 구제로 바뀐 건데 즉 박찬호를 제외한 나머지 7명이 밖에서 잘 뻔했다. 참고로 1명 빼고 야외취침을 제안했던 사람은 은지원
  • [54] 한국프로야구 최저 연봉. 박찬호/2012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사실상 무연봉으로 시즌을 뛴 거다. 거기다 한화 구단과 함께 개인돈 포함, 6억 원 + 연봉 전액(2,400만 원)을 유소년 야구에 사용하라고 기부를 했다. 고로 한화 입단 시 박찬호 본인이 벌어 들인 돈은 마이너스.
  • [55] 달러와 엔화는 모두 2013년 3월 16일 환율 기준으로, 해당 시절 가치가 반영되지 않았으니 참조만 하길 바란다. 광고 등의 추가 수익도 있으니 오차범위도 생각하시길.
  • [56] '외화벌이'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박찬호를 보기 위한 야구 팬들의 입장료, 한국에서 박찬호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들어간 돈 등등을 제외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많이 남았겠지?
  • [57] 추신수는 2014년에 7년간 1억 3천만 달러, 한화로 총 1,474억 원에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했다.
  • [58] 사실 이 말만 보면 장인이 굉장히 돈이 많을것 같지만 사실 박찬호보다 조금 더 많은것뿐이다.
  • [59] 변화구가 땅바닥에 튀자 '피아자는 블로킹을 못해서 항상 2스트라이크 잡고는 직구를 요구했었죠.' 라든가
  • [60] 2002년 한화그룹에 인수된 뒤 2012년 10월 9일부로 사명이 바뀌었다.
  • [61] 이 광고가 나가던 시기 한화 성적은 현시창이었기에 한화 경기를 보며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을 대비한 고단수 보험 마케팅이라는 드립이 성행했었다.
  • [62] 그리고 미국 진출을 위해 미국으로 온 윤석민도 이날 경기를 보러왔다고 한다. 하지만 둘이 만났다거나 사전에 이곳에 오기로 했다는 걸 알고있던 건 아니었으며, 박찬호는 현장에서 윤석민이 왔다는 걸 기자가 알려줘서 알았다고 말했다. 이날 박찬호와 함께 류현진 경기를 응원한 건 피터 오말리 전 구단주.
  • [63] 박찬호가 고향팀인 한화 이글스에서 은퇴하고 싶다고 밝혀왔으며 대전에서 은퇴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대한민국 국가대표로서 한국 프로야구의 올스타들이 모이는 올스타전에 은퇴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전에서 올스타전을 하려면 6년뒤라.. 대전에서 올스타전은 박찬호의 현역시절인 2012년에 있었기 때문에 대전 올스타전 은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한화 이글스에서도 공식 은퇴식 외에도 홈구장인 한밭구장에서 박찬호의 은퇴와 관련된 컨텐츠를 박찬호와 조율하고 있다고 하니 한화팬이라면 크게 실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언제 프런트가 은퇴식 자체 여부로 의리를 안지킨적이 있던가
  • [64] 박찬호가 선발 등판한 경기에서 오재원이 땅볼을 쳤는데, 오재원이 타구가 다리에 먼저 맞았다고 주장하면서 파울 판정이 난 적이 있다.
  • [65] 원래부터 논란이 꽤 많았던 선수였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그간 해왔던 행각들이 다시 논란이 되었다.
  • [66]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뛰었다.
  • [67] 당시 다저스 선발 최다이닝. 2013년 클레이튼 커쇼가 236이닝으로 경신한다.
  • [68] 1호 2000년 8월 24일 몬트리올 엑스포스 홈경기(허용 투수 하비에르 바스케스), 2호 2000년 9월 3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원정경기(허용 투수 우디 윌리엄스), 3호 2009년 4월 25일 플로리다 말린스 원정경기(허용 투수 크리스 볼스태드). 재미있게도 세 홈런 모두 다 투수에게 극도로 유리한 구장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홈런을 달성한 경기와 얽히 사연도 있었는데, 1호 홈런 경기가 있던 날 경기전 행사로 당시 유학중이던 가수 양파다저 스타디움에 공식 초청되어 미국국가를 불렀고, 2호 홈런 경기는 박찬호의 프로 첫 완봉승 경기였다.
  • [69] 칼 립켄 주니어에게는 사실상 홈런을 헌납한 것이라고 후에 밝히긴 했다. 영상으로 보면 90마일짜리 한복판 직구. 오오오!! 레전드에 대한 예우!
  • [70] 투수치고는 그리 나쁜 성적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