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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태

last modified: 2015-03-12 21:12:12 Contributors


박정태(朴正泰)
생년월일 1969년 1월 27일
출신지 부산광역시
학력 대연초-부산중-동래고-경성대
포지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1년 롯데 자이언츠 1차 지명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1991~2004)
지도자 경력 밴쿠버 커내디언스 타격코치(2005)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2006~2009)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2010~2011)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2012)

1991, 1992년 한국프로야구 2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강기웅(삼성 라이온즈) 박정태(롯데 자이언츠) 강기웅(삼성 라이온즈)

1996년 한국프로야구 2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이명수(OB 베어스) 박정태(롯데 자이언츠) 최태원(쌍방울 레이더스)

1998, 1999년 한국프로야구 2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최태원(쌍방울 레이더스) 박정태(롯데 자이언츠) 박종호(현대 유니콘스)

1998년,1999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 미스터올스타
유지현(LG 트윈스) 박정태(롯데 자이언츠) 송지만(한화 이글스)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4번(1991~1992)
박정태 (1991~1992) 김민재
(1993~2001)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6번 (1993~2004)
박영태(1983~1992) 박정태 (1993~2004) 박기혁(2005~2010)




"알긋나? 오늘은 무조건 이기야 된다. 씨발 짐 싸라"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 선수(내야수). 현재는 KBO 선수 육성 위원. 등번호는 14번 - 16번. 통산 1,167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96 / 1141안타 / 85홈런 / 638타점 / 531득점을 기록했다. 한국프로야구에서 최고의 2루수중 한명으로 꼽힌다. 그리고 1990년대 롯데의 정신적 지주이자, 롯데를 상징하는 선수

Contents

1. 선수시절
1.1. 소개
1.2. 1991시즌
1.3. 1992시즌
1.4. 1993시즌
1.5. 1994시즌
1.6. 1995시즌
1.7. 1996시즌
1.8. 1997시즌
1.9. 1998시즌
1.10. 1999시즌
1.11. 2000시즌
1.12. 2001시즌
1.13. 2002시즌
1.14. 2003시즌
1.15. 2004시즌
1.16. 은퇴
1.17. 선수시절 총평
2. 지도자 시절
3. 타격폼
4. 기타
5. 역대 기록


1. 선수시절

1.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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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열 번쯤 연속으로 우승한다 하더라도 팬들의 성원에 다 값하지 못할 롯데 자이언츠부산 야구 팬들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있다면, 아마도 박정태가 아닐까. 박정태는 단순히 독특한 타격 자세를 가진 선수가 아니며, 그저 야구를 잘 했던 선수도 아니다. 그는 자이언츠, 아니 부산 야구의 정신이라고 불리는 사나이다. - 김은식 저 '야구의 추억' 中

영원한 주장으로 기억되는 선수로, 아직도 근성의 이미지로는 박정태 이상인 선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분에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는 롯데 자이언츠 팬들이 많다.

대표적인 강병철의 양아들동래고등학교경성대학교를 졸업한 후 1991년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하여 1990년대 최고의 2루수로 활약했다.

1.2. 1991시즌

1991년, 개막전 1번 타자로 프로 첫 타석을 맞아 중전 안타를 기록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박정태는 그 해 .285의 타율과 14홈런 74타점이라는 범상치 않은 활약으로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한몫했다. 신인 첫 해 박영태를 밀어내고 풀 타임 주전으로 활약. 개막 두번째 경기까지는 1번타자로 나섰으나 세 번째 경기부터 3번타자로 이동해 그 이후 선수생활 대부분을 3번타자로 보내게 된다. 신인왕은 절친인 조규제에게 넘겨 줘야 했지만 2루수 골든글러브는 박정태의 차지였다. 1982년 창단 이후 롯데에서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내야수는 원년멤버 김용희김용철 이후로 박정태가 처음.

이 해 처음으로 열린 한일슈퍼게임에서도 주전 2루수로 활약했다. 대표팀의 베스트 나인 중에서 유일한 신인이었을 정도로 박정태의 존재감은 이미 신인의 범주를 넘어선 상태였다.

1.3. 1992시즌

1992년 남두오성의 하나로 활약하며 타율 .335 14홈런 79타점, 역대 한국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2루타 기록인 43개의 2루타를 기록하여 롯데의 소총부대를 이끌며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한몫하게 된다. 안타왕을 한 끝차로 놓쳐버리며 개인타이틀 홀더가 되지는 못했지만, 포스트시즌에서의 맹활약으로 팀 우승을 이끌며 그 한을 풀었다.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를 거치며 12경기동안 44타수 17안타로 .388의 타율을 기록하며 팀 타선을 이끌었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결정지은 마지막 아웃카운트도 박정태의 손으로 만들어냈다(2루땅볼). 땅볼을 잡아 송구하지 않고 바로 2루 베이스터치를 한 뒤 좋아서 펄쩍펄쩍 뛰던 장면은 지금 현재도 롯데의 마지막 우승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2루수 골든글러브 또한 당연히 그의 몫으로 2년 연속 수상.

그 해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했던 최고투수 빙그레의 송진우는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타자로 다름아닌 박정태를 꼽았을 정도로 박정태는 고작 2년차에 롯데의 중심선수이자 전국구 스타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했다.

1.4. 1993시즌

3년차부터 등번호를 종래의 14번에서 16번으로 변경했다. 14번을 달고 2년 연속으로 홈런 14개를 쳤기 때문에 올해는 2개만 더 치자는 뜻에서 번호를 16번으로 변경했다는데 실제로 이후 홈런 16개를 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 번호가 마음에 들었는지 은퇴시까지 계속해서 16번을 사용했다.[1]
시즌 초반부터 타격 선두권을 질주하며 그야말로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당시 LG 외야수 박준태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타격 선두 레이스를 펼쳤는데 둘이 이름이 비슷하고 둘 다 영문 이니셜이 똑같이 PJT라서 당시 나름 화제가 되었다. 본인 말로는 야구가 너무 잘 돼 올해야말로 내가 뭔가 큰 건 하나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그러나... 5월 23일, 사직 태평양전에서 1루에 나가 있는 상황에서 후속 타자의 땅볼 타구 때 더블플레이를 저지하기 위해 2루로 슬라이딩하다가 유격수 염경엽과 크게 충돌해 선수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2] 발목에 심각한 복합 골절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1993년~1994년 전 시즌을 날려 먹었다. 부상 당시 타율이 .359로 타격 1위를 질주하며 절정으로 달리고 있을때라 더욱 뼈아픈 시즌이었다.


졸지에 팀의 핵심을 잃어버린 롯데는 이후 성적이 점점 내리막길, 투수진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전년도 우승팀이 6위로 추락하며 박정태가 팀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줬다. 롯데 홈경기 중계때 목발을 짚고 관중석에서 인터뷰하던 장면은 많은 롯데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큰 부상에서의 성공적인 재기는 박정태의 근성왕 이미지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5. 1994시즌

전반기 롯데 경기 중계중 에 하일성이 빠르면 후반기쯤 복귀할 수도 있다며 박정태의 근황에 대해 잠깐 언급했던 적이 있긴 했지만, 결국 발목 부위의 재수술과 방위 복무로 인해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하며 시즌을 통으로 결장하였다. 참고로 부상 부위에 총 5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1.6. 1995시즌

1995년 5월 16일 LG 트윈스와의 복귀전에서 4타수 3안타를 기록하며 호성적을 기록하며 부상을 근성으로 이겨내고 복귀했다. 1년 11개월 23일만의 복귀라 당초 대타로 나설 것으로 보였지만 3번타자 선발 2루수로 출전하여 복귀 첫타석에서 안타 포함 3안타를 기록했다. 박정태가 복귀한 3연전은 화수목 평일이었음에도 3게임 연속 만원관중을 기록할 정도로 팬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그 이후로 주루 플레이는 썩 좋지 않았으나[3] 타격과 수비에서는 A급의 활약을 해 주었다. 당시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홈 경기에만 출전[4] 이 가능하여 50경기만 출전, 시즌 성적은 타율 0.337 2홈런 34타점을 기록해 롯데가 3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데 공헌했다.

플레이오프부터는 원정경기에도 출전하면서 팀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함께 하지만 1995년 한국시리즈 7차전 3회말 2사 2,3루에서 2루베이스 방면으로 흐르는 땅볼을 달려가서 잡다가 공을 글러브에 채지 못하고 흘려버리는 바람에 2점을 헌납, 결국 롯데는 이 점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2:4로 패배하게 된다. 이때의 임팩트로 나쁘지 않은 수비에도 불구하고 수비가 나쁘다는 인식이 강하게 박혔다.[5]

1.7. 1996시즌

1996년에 부상에서 복귀 후 처음으로 풀 타임을 소화했고 시즌 내내 꾸준하게 3할 이상의 타율과 안정된 수비로 완전히 재기에 성공하였음을 알렸다. 4년만에 첫 풀타임 시즌이다보니 이런저런 잔부상에 시달리며 결장이 잦아 95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시즌 후반기에는 체력 저하로 타율이 .290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다. 8월 중순부터 다시 타격감을 회복하고 몰아치기를 시작해 .309의 타율로 시즌을 마쳤다. 많은 경기를 결장했지만 92년 이후 최초로 규정타석을 채웠고 3할 이상의 타율로 시즌을 마치며 골든글러브도 4년만에 다시 탈환, 지난해의 재기가 일시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 해 각 언론사에서 시상한 올해의 재기상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1.8. 1997시즌

1997년은 입단 이후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김용희 감독의 지원으로 92년 이후 5년만에 정규리그 100경기 이상을 출전했지만 타율 .229에 3홈런 40타점이라는 박정태답지 않은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해태와의 광주 개막전에서 2번타자로 출전했으나 개막전부터 타격감이 좋지 못했다. 유격수 쪽 깊은 땅볼로 내야안타를 하나 만들어 5타수 1안타를 기록했을 뿐, 날카로운 타격을 하나도 보여주지 못했고 팀도 연장 접전 끝에 패전. 이 좋지 못한 타격감이 단 한 차례의 반등도 없이 시즌 내내 이어졌다. 훗날 본인 말로는 이 시즌의 부진이 자만했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회고했는데 실제로는 전해에 워낙 잔부상을 많이 당해 그것을 막고자 체중을 심하게 감량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무려 9Kg을 감량했다고 한다). 팀 성적은 1989년 이후 첫 꼴찌...

1.9. 1998시즌



1998년은 전해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며 체중을 10Kg 넘게 늘리면서도 타격폼의 밸런스가 흐트러지지 않게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키는 작지만 탄탄하고 우람한 근육을 가진 박정태의 모습은 이 시즌부터 만들어진 것. 심지어는 꿈을 꿔도 야구하는 꿈을 꿨을 정도로 노력한 끝에 타율 .318 13홈런 79타점의 성적으로 화려한 재기에 성공했다. .318의 타율은 그 해 타격순위 전체 3위에 해당하는 매우 좋은 성적. 또한 광주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4안타의 맹타를 휘둘러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후반기부터는 부진한 마해영을 대신해 한동안 팀의 4번타자를 맡아 고군분투했으며 특히 7월 23일 대구 삼성전에서 연타석 홈런 포함 4타수 4안타 5타점을 기록했던 경기가 백미. 팀 성적은 전해에 이어 여전히 꼴찌였지만 2루수 골든글러브는 박정태의 몫이었다.

1.10. 1999시즌

1999년엔 팀의 새 주장을 맡아 마해영, 펠릭스 호세와 함께 공포의 클린업 트리오를 구성, 롯데 자이언츠의 1999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이끌게 된다. 전시즌까지 2년 연속으로 꼴찌를 했던 팀이었지만, 지기 싫어하는 근성의 박정태가 주장을 맡았을 때 또다시 루징 시즌을 보낸다는 것은 박정태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강력한 카리스마로 팀을 다잡아 이끌어가는 강한 주장의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본인이 자진해서 유니폼의 양말을 무릎까지 끌어올리는 농군패션을 시작하면서 전 선수단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지시했던 것. 그래서 이 당시 롯데 하이라이트를 찾아보면 용병과 일부 투수를 제외하면 선수들이 죄다 농군패션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팀에는 박정태보다 선수들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박정태의 말을 거역하지 못할 정도로 박정태의 팀내 위상과 카리스마는 후덜덜한 수준이었다. 그 덕택인지 당초 드림리그 꼴지 후보였던 롯데는 개막 시작하자마자 6연승을 달리며 정규시즌 마지막 전날까지 드림&매직리그 통합 1위자리를 고수했다.[6]

이때 성적은 타율 .329 11홈런 83타점. 1998년~1999 두 시즌은 박정태의 최전성기(혹은 2차 전성기)로 2년 연속 골든 글러브미스터 올스타에 뽑히기도 했다. 1999년에 기록한 31경기 연속 안타 기록은 박정태 전성기의 최고 백미였다.[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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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99년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오늘은 무조건 이기야 된다" 가 유명하다.[10] 이 당시 선수단을 이끌고 경기장에서 나가려고 한 것도 다름이 아닌 박정태였다.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 참조.

올스타전에서도 두각을 톡톡히 나타냈는데 1998년 7월 8일 무등야구장에서 벌어진 올스타전에서 4안타를 기록해 기자단 투표 46표중 39표로 미스터 올스타(MVP)를, 1999년에는 3-3으로 맞선 3회 2사 1,2루에서 매직리그 3번째 투수인 LG 트윈스의 김상태를 상대로 좌월 3점 홈런을 쏘아 올리고, 5회에 우전안타까지 기록하며 드림리그의 9-5 승리를 이끌며 MVP에 선정되었다. 2년연속 미스터 올스타 기록은 박정태가 유일 무이.

1999년 시즌 종료 후 열린 시드니올림픽 아시아예선전을 겸한 제20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한국대표팀 주전 2루수로 선발되어 중국전에서 만루홈런을 날려주셨다. 또한 제 3회 한일슈퍼게임에서도 주전 2루수로 활약. 이 두 대회에서 특유의 타격폼이 화제가 되었다. 박정태가 타석에 들어서면 상대편 선수들이 빵 터진 일화는 유명.

한일슈퍼게임 종료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년 시즌을 마치고 해외진출가능 연차를 채우게 되면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일슈퍼게임도 자신이 일본에서 통할 수 있는지를 테스트해보는 기회로 삼았다고. 슈퍼게임에서 .375의 타율을 기록했다.

1.11. 2000시즌

2000시즌 전 선수협 파동으로 인해 해외전지훈련을 하지 못했다. 선수협 창립 핵심멤버들은 구단들의 담합 덕택에 한 명도 해외전지훈련에 참가하지 못했던 탓. 그럼에도 정작 박정태는 시즌에 돌입하자마자 4할 언저리의 맹타를 휘둘렀고 시즌 중반까지도 .350을 넘나드는 고타율을 자랑하며 역시 박정태라는 찬사를 받았다. 같은 선수협 핵심멤버였지만 시즌 초반에 열심히 삽을 펐던 마해영과 비교되어 박정태가 더 주목받게 되었으나 정작 본인은 동계훈련을 체계적으로 하지 못해 체력적으로 힘들고 몸상태도 좋지 않다고 호소.

본인의 우려대로 결국 6월에 장딴지 근육에 부상을 당하며 한 동안 전열에서 이탈하게 되고 이 부상이 시즌 끝날때까지 박정태의 발목을 잡게 된다. 전반기 종료 시점에서 .349였던 타율은 후반기 시작부터 귀신같이 하락세를 타며 결국 시즌은 .285의 타율로 마무리. 후반기의 극도의 부진 덕택에 따놓은 당상으로 여겼던 올림픽 국가대표팀 승선도 탈락했으며[11] 포스트 시즌에서도 뚜렷한 활약을 하지 못해 팀을 패배에서 구해내지 못했다. 후반기 극도의 부진 덕택에 전해에 공언했던 일본 진출도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1.12. 2001시즌

2001 시즌은 마해영이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어 중심 타선이 크게 약화된 팀 사정상[12], 좀더 장타 생산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본인 표현으론 타구의 비거리를 늘리게 되면 홈런이나 2루타 수가 늘어나는 것은 물론, 평소 내야수 플라이로 잡힐만한 타구도 내야수 키를 넘는 안타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이를 위해 동계훈련 때 전성기보다 무려 7Kg나 늘리는 벌크업을 하고 타격폼도 손의 위치를 뒤로 가져가면서 타구의 비거리를 늘리는 장타자로의 변신을 꾀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야말로 최악. 개막전에서 투런홈런 포함 2안타를 치는 산뜻한 출발을 보이며 장타자로의 변신에 성공했나 싶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팬들도, 코칭스태프도, 본인 스스로도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극악의 부진이 시작, 13게임 연속으로 무려 42연타석 무안타라는 끝모를 부진에 빠졌다. 과도한 벌크업으로 인해 순발력이 저하되어 스윙 스피드가 느려진 탓.

당시 김명성 감독이 계속해서 타순 조정을 해줘 클린업에서 6번타자로, 이후 7번, 심지어 8번타자로 기용된 날이 있을 정도로 부진이 심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명성 감독은 박정태를 라인업에서 빼지 않고 계속해서 타격감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줬다. 5월을 기점으로 다시 타격감이 살아나기 시작했고 5월 22일 인천 SK전에서는 5타수 5안타를 치며 사이클링 히트까지 기록할 뻔 하며 완전히 타격감을 찾은 모습을 보였다. 6월에는 .266까지 타율을 끌어올렸으나 결국 과도한 체중으로 인한 후반기 체력저하로 인해 다시 부진에 빠져 .247이라는 저조한 타율로 시즌을 마쳤다.

이 시즌에 프로통산 1천안타를 달성했다.

1.13. 2002시즌

2002시즌은 전해의 실패를 거울삼아 체중을 다시 전성기때로 가볍게 되돌렸고, 떨어진 순발력을 끌어올리는데 초점을 맞춰 시즌을 준비했다. 하지만 의욕과는 달리 시즌 초반부터 부진에 허덕여 결국 커리어 역사상 최초로 성적 부진으로 2군에 강등되는 수모를 겪는다. 만루홈런을 치기도 했지만 1할대의 저조한 타율이 개막후 한달 내내 지속되었고, 5월 들어서도 간신히 2할을 넘기는 부진이 계속 이어지자 5월 말 어쩔 수 없이 2군에 내려가게 되었다. 이 와중에 LG와의 트레이드설에도 연루되어 마음고생이 심했다.[13]

백인천 감독 부임 후 8월 중순부터 새 감독의 조언을 따라 기존의 타격폼에서 약간 수정을 본 것이 엄청난 효과를 보게 되어[14] 다시 전성기의 안타머신 모드를 회복했다. 8월 중순때까지만 해도 1할대였던 타율이 수직상승하기 시작했고 9월 한달간 .386 3홈런 15타점이라는 무시무시한 활약을 보이며 형편없는 꼴지였던 팀 성적과 별개로 월간 MVP를 수상. 타율도 .262까지 끌어올리면서 시즌을 마감했다.

이 시즌에 프로통산 1천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1.14. 2003시즌

2003시즌은 박정태에게 있어서 정말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어렵사리 FA자격을 갖췄지만 구단에서 제시한 어처구니없는 대우[15]에 도저히 도장을 찍지 못하고 버티자 구단에서는 괘씸죄 명목으로 FA계약협상기간이 종료되기도 전에 박정태와 계약을 포기한다고 공식 발표 후 보도자료를 돌려버렸고 졸지에 박정태는 소속팀을 찾지 못해 강제은퇴를 당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롯데구단이 간과한 것은 롯데팬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격렬한 저항. 박정태와의 계약 포기는 어느 정도 여론의 악화를 감수한 결정이었지만 그 후폭풍은 롯데 구단이 상상한 그 이상이었다. 롯데를 위해 12년을 뛰어온 프랜차이즈 스타를 이런 식으로 홀대하는 모습에 롯데팬들은 엄청나게 분노했고 여기에 타 구단 팬들까지 합세해 구단 사무실과 홈페이지를 마비시켜버릴 정도로 격렬하게 항의했다.[16] 결국 롯데팬들의 상상을 초월한 민중봉기를 견디다 못한 롯데구단은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FA 계약협상기간 종료 하루 전에 박정태와 2년 6억에 FA 계약을 맺었다.[17]

늦어진 FA 계약 덕택에 스프링캠프에 뒤늦게 합류하지만 뒤쳐진 몫을 따라잡으려 오버페이스를 하다가 부상을 당하면서 바로 귀국 조치. 그럼에도 워낙 약했던 선수층 덕택에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며 개막 후 한동안 팀의 4번타자로 활약하다가[18] 허벅지 근육 파열 부상으로 몇 달간의 재활을 하게 된다. 다시 복귀한 후에는 대타&지명타자로 활약했다. 50경기에 출전해 .278의 타율과 2홈런 17타점을 기록.

1.15. 2004시즌

2004년은 젊은 선수를 중용하는 신임 양상문 감독의 방침으로 개막이후 줄곧 2군에 머무르게 된다. 사실 양상문이 일부러 박정태를 쓰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자세한 내용은 양상문 항목 참조. 팀 내 2루수 자원들이 하나 둘도 아니고 넷이나 부상으로 쓰러져나가는 상황에서도 양상문이 끝끝내 박정태를 쓰지 않자[19] 뿔난 롯데팬들이 몇 개월에 걸쳐 구단 홈페이지 갈매기마당에서 '박정태 1군 등록 릴레이'를 펼치고 심지어 외야에 '우리는 악바리 박정태를 원한다' 는 대형 플랜카드까지 내걸며 시위를 한 끝에 8월초[20] 가까스로 1군에 콜업할 수 있었다.[21]

8월 3일 한화 이글스와의 홈경기에서 1군 복귀를 했으며, 그 날 관중이 평소보다 두 배가 더 들어왔다(...) 찬스에서 대타로 나가 볼넷을 골라내고 후속타로 득점까지 올렸는데 후배선수들이 홈런타자를 맞을 때처럼 모두 덕아웃 바깥에 일렬로 서서 홈인하고 들어오는 큰형님을 맞이하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다.


주로 클러치 상황에서 대타로 기용되었으며 타율은 전년도와 같은 .278였지만, 노장선수의 건재함 정도를 측정하는 지표인 출루율이 무려 .519였을 정도로 매우 좋은 타격감을 보였다.[22] 박정태가 등장음악[23]을 깔고 나타나면 엄청난 환호가 나왔으며 혹 삼진이나 범타를 기록하고 덕아웃에 들어올때도 팬들은 여전히 박수와 환호로 맞이했다. 소위 말하는 박정태 효과에 구단 관계자들도 은근히 놀랐다고.

현역 마지막 경기였던 10월 5일 잠실구장 LG전이 유지현의 은퇴식과 겹친 날이었는데, 5회 종료 후 치러진 은퇴식에서 유지현이 마이크를 잡고 은퇴 소감을 밝히다가 가장 존경하는 선수로 박정태의 이름을 호명한 후 원정팀 덕아웃에 있던 박정태에게 달려가 자신이 받은 꽃다발을 나눠주고는 둘이 포옹하며 눈물을 흘리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24][25] 박정태는 이 날 7회초에 대타로 출전해 총알같은 우전안타를 날리며 현역 마지막 타석을 유종의 미로 장식했다.

1.16. 은퇴

2004년 10월 11일 공식 은퇴를 발표하면서 14년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시점이 하필이면 롯데의 8888577 암흑기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전무후무한 4년 연속 꼴지를 기록한 시점이었던지라 후배들에게 큰 짐을 안겨주고 떠나는 느낌이라며 은퇴 발표 당일에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팀과 후배들 걱정을 많이 하는 짠한 모습을 보여줬다.

은퇴 발표 후 구단의 지원 하에 캐나다로 코치 연수를 떠났으며 2005년 홈 개막전 현대 유니콘스전을 앞두고 일시 귀국, 홈팬들 앞에서 구단이 마련해 준 은퇴식을 치렀다.

1.17. 선수시절 총평

정근우 등장 이전까진 사실상 비교대상이 없었던 한국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2루수라 할 수 있다. 흔히 최고의 2루수 논쟁에 김성래, 강기웅, 안경현, 박종호가 함께 거론되던 편인데, 단일 시즌의 임팩트로는 87년 홈런왕 시절의 김성래가 최고로 꼽히지만 김성래는 본인의 커리어동안 2루수로 활약한 기간이 극히 짧고, 강기웅은 이미 전성기가 지난 시점에서 프로에 입단해 연차나 누적, 비율스탯 모든 면에서 박정태에 뒤진다. 박종호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긴 했지만 비율스탯에서 밀리는 감이 있다.

이후 정근우가 장기간에 걸쳐 좋은 활약을 보인 덕에 박정태를 뛰어넘을 거라는 의견이 다수 있었고 실제로 정근우는 2013 시즌까지 통산타율 0.301[26], 통산 OPS 0.779를 기록하는 등 누적스탯에서나 비율스탯에서나 박정태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2011년 시점에서 정근우가 이미 박정태를 뛰어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지만 정근우가 2012년에 부진했고 스탯도 많이 까먹었기 때문에 정근우의 한화에서의 성적을 봐야 결판이 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두 선수 모두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훌륭한 선수들임은 분명하다.

역대 최고의 2루수 논쟁에서 박정태의 매리트는 14년의 선수생활동안 단 한 차례도 포지션을 변경하지 않고 2루수만을 지켜왔다는 것.[27] 그 덕택에 역대 2루수 골든글러브 최다수상 기록을 보유하고 있고 비율스탯 또한 경쟁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우위[28]에 있는 점 때문에 박정태의 손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편이다. 실제로 프로야구 20주년 및 30주년 기념 역대 베스트10 선정에서도 압도적으로 경쟁 후보들을 제치고 역대 최고의 2루수로 선정되었다.

야구에서는 센터 라인, 즉 포수, 2루수, 유격수, 중견수가 강한 팀이 이긴다. 수비가 중요한 포지션에 강타자가 포진한다면 전체적으로 팀 공격력이 높아진다. 전통적으로 타격이 약한 팀에 속하는 롯데에서 3번타자 2루수 박정태의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2루수 포지션을 맡고 있으면서 한 팀의 3번타자&클린업트리오 자리를 10년 이상 지켜온 선수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박정태가 유일 무이. 역대 2루수 중 가장 높은 통산타율과 OPS는 덤.

2. 지도자 시절


선수 은퇴후 2005년 3월부터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산하 싱글 A팀인 밴쿠버 캐내디언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2005년 1년간은 구단이 연수비용을 부담했고, 남은 기간은 자비로 머물면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자율 야구를 습득했다고. 해당기사

2006 시즌 종료 후 롯데에 복귀해 양상문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밑에서 타격코치로 지내다 2009 시즌 종료 후 양상문 전 2군 감독이 1군 투수코치로 선임되면서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으로 정식 취임했다.해당기사

2011년 시즌 종료 후 김무관 타격코치가 LG 트윈스로 이적함에 따라 공석인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에 정식 임명되었다.해당기사

2012년 시즌 초반에 롯데 자이언츠경기가 우천취소 되었을때 나온 롯데 자이언츠의 혼 박정태라는 다큐가 나온 적이 있다. 맨 마지막에 나오는 장면은 동남 방언가 섞여있어 매우 호응받는 중.bgm 조심 카더라에 따르면 박정태 코치가 다큐를 보고 우셨다고

하지만 2012 시즌 들어 양승호 감독 다음으로 무능하다고 까이는 코치가 되었다. 4월에는 성적이 좋아서 티가 나지 않았지만, 5월 들어 롯데 타선이 심하게 부진해지자 까이기 시작했다. 고질적인 약점으로 지적되던 (특히 바깥쪽) 변화구 공략의 어려움을 전혀 극복해주지 못하고 있고, 컨택 위주로 짧게 밀어치는 타법을 주문하기는 했는데 장타는 고사하고 컨택조차 안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는 선구안의 실종. 타선 전체가 다 그렇지만, 특히 필요할 때 해 줘야 하는 클린업 트리오(전준우, 홍성흔, 강민호)의 부진이 너무 두드러져서 팬들의 걱정이 늘어만 가고 있다. 1군 타격코치가 된 이후로 그의 능력을 혹독하게 시험받는 중. 심지어는 아무리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고는 하지만 덕아웃에서 기도만 하고 있다는 이유[29]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 주님태라는 별명으로 까이고 있다. 선수시절에는 강렬한 카리스마와 근성의 이미지로 사랑받은 선수였으나 타격코치로는 무능함으로 인해 명성이 희석된 인물.(공필성의 예도 있다.) 9월 들어서는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 퇴출 릴레이 글까지 나오고 있다.

9월 23일, 용덕한의 수훈 인터뷰에서 양준혁 해설이 코치의 특별한 지시가 없었냐는 말에 용덕한이 특별한 지시는 없었다고 답한데다 선수들끼리 미팅을 가져 초구는 골라내고 치자는 의견을 서로 주고받았다라는 말을 하고 양준혁 해설이 재차 물어보자 "코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여 선수들에게마저 신뢰를 잃어가는 모습이 은연중에 비추어졌다.

아시아시리즈 종료 후 11월 10일, 결국 구단에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박정태가 사의를 표시한 직후 김시진 감독이 마무리 훈련을 지도중이던 넥센 히어로즈 박흥식 타격코치를 바로 빼온것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30] 타 팀 팬들은 박흥식 코치를 넥센에서 빼낸 것과 레전드를 그냥 사퇴하게 뒀다는 것에 대해 반발하기도 했으나 롯데 팬들은 박흥식 타격코치가 타선의 답답함을 해소해줄 것이라 생각하여 대체적으로 반기는 분위기이다. 일단 한 팀의 중심 선수였던 코치이므로 언젠가 복귀할 가능성도 없진 않을 것으로 보였지만[31]...

타이중 참사의 숨은 주역으로 꼽히며 복귀는 개뿔이라는게 대체적인 시각.왜 롯데팬들이 퇴출하라고 했는지 들었어야 했는데

롯데 코치에서 물러난 이후 KBO의 육성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사퇴 1년뒤의 근황. 롯데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2014시즌을 마치고 사임한 김시진 감독의 후임으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롯데는 이종운 감독을 선임. 박흥식 코치 부임 2년차에 독기 빼는 데 1년 걸린롯데 타선이 좋아지면서 그의 타코 시절은 흑역사에 가깝게 되었지만,하지만 투수진이 폭발 투수코치로 그보다 몇 배 심한 흑역사를 썼던 양상문이 LG 감독으로롯데가 승리 대줘서 성공[32]하는 것을 씁쓸하게 지켜본 롯데 팬들 사이에서는 감독 박정태를 한 번 바라는 목소리도 분명히 꽤나 늘어났다. 그만큼 기술적인 면과 별도로 그의 인격과 리더십은 아직 확실하게 롯데 팬들의 기억에 남아있다고 보아야 할듯. 특히 2014년 롯데의 DTD는 객관적인 전력의 문제보다는 프런트와 코치진의 갈등으로 선수단 분위기가 망가진 탓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3. 타격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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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성과 함께 박정태 하면 생각나는 것은 바로 그의 독특한 타격폼. 보기에도 어지럽게 배트를 이리저리 돌리고, 왼손은 타격 직전까지 배트에 데었다 뗐다 한다. 박정태 스스로는 배트스피드를 늘리기 위해 고안한 동작으로 철저히 순서를 지키는 동작이며, 하다못해 매일 거울을 보며 한시간씩 연습하기까지 했다고 한다.[33] 은퇴한 지금 이벤트 매치같은 경기에서 본인조차도 재연이 불가능할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타격폼인건 확실하다(..)

박정태가 인기를 끌 당시에는 부산, 경남 지역의 초등학생들이 전부 배트를 들고 박정태 흉내를 내는 바람에 초등학교 야구 팀 감독들이 제발 폼 그렇게 하지 말라고 박정태에게 부탁하기도 했다고... 이것 때문에 박정태는 언론을 통하여 어린이들에게 자기 폼을 따라하는건 좋은게 아니라고 했지만, 애들이 말을 들을리가 있나. 사실 본인도 왜 그렇게 극단적인 자세를 취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고 그저 자신에게 맞는 폼을 계속 연구하면서 3년 정도 시행하다 보니까 어느 사이에 그런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박정태 본인은 자연스러운 무게이동을 통해서 자신의 작은 체구를 극복하게 해준 폼이 아니였나 추측한다.

2009년, 정수근이 음주폭행사건 이후 복귀하고 몇경기 지나 이 폼과 유사한 폼으로(정수근은 좌타라 우타인 박정태와 반대의 폼으로) 결승타를 쳤는데, 언론서 타법이 이사람처럼 변했다고(본인은 부인했다) 기사에서 띄워진 적이 있으나, (위에 언급한 팬서비스와는 당.연.히 다르다. 정규시즌 경기였으니) 그후 OME!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혹자는 이에 대해 '박정태 말고 다른 사람이 저런 타법을 쓰면 저주가 걸린다'라는 것을 제시했다. [34]


한일 슈퍼게임 당시 출전했던 박정태의 타격 폼을 보고 당시 일본 올스타 팀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가 깜짝 놀랬다는 일화도 있다. 이날 경기 성적은 3타수 2안타.#

아시아 게임당시에도 중국인 선수가 자신의 타격폼을 보고 비웃자 만루홈런을 날려주셨다. #

4. 기타

  • 현역시절 유난히 초구를 안 치기로 유명한 선수였다.초구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윤덕규와는 정반대 하일성이 롯데 경기 중계하다가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초구 안친다고 혀를 내둘렀을 정도. 본인은 이에 대해 그만큼 공을 오래 보겠다는 의지였고 실제로 삼진을 잘 안당하고 배트스피드도 자신이 있었던지라 언제든지 좋은 타구를 날릴 수 있었기 때문에 초구는 치지 않고 지켜보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 1993년에 당한 발목 부상이 선수 생활 동안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예전과 같은 주루 플레이는 고사하고 피가 잘 통하지 않아 수시로 통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부상 당시 수 차례의 수술로도 발목 부상이 회복되지 않고 골수염으로까지 전이되어 재기는 커녕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선수 생활을 더 이상 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펜글씨학원, 컴퓨터학원 등을 전전하며 강사 자격증을 따려고까지 했었다고.

  • 중장거리형 타자라 통산 홈런은 많지 않지만, 의외로 만루홈런을 많이 쳤다. 역대 통산 4번의 만루홈런을 쳤는데, 1998년 한 차례, 1999년에 2차례, 2002년에 한 차례 각각 기록했다. 99년 9월 7일, 02년 4월 9일. 그리고 한국프로야구 300번째 만루홈런을 박정태가 기록했다.

  • 홈런타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통산 OPS가 8할이 넘어간다. 혹자는 이 부분이야말로 박정태의 진짜 위엄을 보여준다고 평하기도.

  • 1999년 연속경기안타 기록이 31경기로 중단되었는데 32경기째인 마산 두산전에서 9회말 2아웃 주자없이 마지막 타석에 박정태가 들어서 좌전안타성 타구를 날렸으나 당시 두산 3루수 홍원기의 다이빙캐치 호수비 덕택에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에도 불구하고 간발의 차로 아웃되며 기록 갱신이 중단되었다. 일본프로야구 기록이 33경기 연속 안타였고 당일 경기가 이미 0-6으로 롯데의 패배가 99.9% 확정된 시점이었던지라 홍원기가 굳이 그렇게까지 억지로 잡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매우 아쉬웠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 후 박정태가 밝힌 기록 중단 소감이 홍원기 선수한테 너무 고맙다 였다. 홍원기가 최선을 다 해줬기 때문에 자신의 연속경기안타 기록 또한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라는 소감으로 이 당시 박정태의 대인배적 면모가 극찬을 받았다.

  • 본인이 꼽은 가장 약했던 투수로는 조웅천, 자신이 가장 잘쳤던 투수로 절친 조규제를 꼽았다. 조규제를 상대로 너무 잘치다보니 나중에는 조규제가 아예 포기하고 박정태만 나오면 그냥 가운데로 살살 던져주고 박정태도 알아서 단타만 치고 나갔을 정도라고.#

  • 국대 기록은 롯데 입단 전에 참가한 1990년 아시안 게임과 1999년 제20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으며[35] 2002년 아시안게임 예선에 참가했다.

  • 위에서 나온 것처럼 롯데에서 LG와 트레이드를 시도했다가 기사가 먼저 뜨는 바람에 파토 난적이 있다고 한다. 관련 방송.[36]

  • 별명으론 탱크, 악바리 등이 있다. 그의 악바리는 유명했기 때문에 롯데의 코치-2군 감독 트리를 타면서 여타 훈련을 열심히 하는 선수가 있으면 박정태 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악착같이 훈련한다 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그러다 보니까 1년에도 몇번씩 혀를 내두르는 일이(...). ex: 박정준, 이인구 등등;;;

  • 독실한 크리스천으로[37] 발목 부상으로 재활하던 당시 6개월 동안 입원한 병원 내에 있는 교회에 꾸준히 다녔는데 이 당시에 깊은 신앙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성격도 많이 온순해지고 후배들에게 따뜻하게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고. 그래서 코치가 된 이후에는 선수들을 다그치기보다 칭찬을 많이 하는 쪽으로 지도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 현역시절부터 가진 것에 비해 팬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는 선수라고 자신을 낮추며, 선수는 무엇보다 팬들에게 잘 해야 한다고 많이 강조하던 타입. 그래서 선수생활 후반부에는 의도적으로 팬서비스에도 많이 신경을 썼고 후배들에게도 팬서비스에 대해 많이 조언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은퇴 후에는 현역시절 입었던 유니폼들조차 모두 팬들에게 줘버려 집에 남아있는게 한 벌도 없다고(...)[38]



  • 잘 알려져 있듯이 추신수의 외숙부이기도 하다. 추신수의 어머니는 박정태의 누나이다. 추신수가 쓴 책을 보면 박정태는 조카 추신수가 야구하는 걸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추신수의 아버지가 "우리 신수 잘 하나?"라고 물어 보자 "야구선수 너무 힘들다면서 그걸로 성공하기도 장담못하고 솔직히 다른 걸 하게 하세요...재능이야 있습니다만. 야구나 스포츠란게 재능이 있어도 성공할지 장담 못 합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물론 추신수 본인이 야구가 너무 좋다고 하자 그럼 어쩔 수 없지...라며 야구에 대한 걸 가르쳐 줬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2013년 7월 28일 코리안 데이 매치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신시내티 레즈의 3차전 경기 류현진과 추신수 맞대결 경기에서 김인식과 함께 특별 해설로 초대됐다.


  • 프로야구 30주년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박정태뿐만 아니라 각 포지션별 최다 수상자가 모여 2011년 7월 23일 잠실 야구장에서 올스타전 식전행사로 반지 수여식을 했다.

  • 2014년부터 신설되는 롯데 자이언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예정이다. 같이 헌액될 은퇴선수는 故 최동원, 윤학길, 김응국, 염종석, 주형광.

  • 2014년 9월 8일, 마구마구2014에서 92 박정태 엘리트카드가 포스팅에 풀렸는데, 최종낙찰가 2222마구볼에 낙찰되었다 .

5. 역대 기록

  • 한국야구위원회 기록실에 표기되는 리그 TOP 10위 이내 기록은 순위가 등재.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성적.

역대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장타율
1991 롯데 자이언츠 122 463 .285 132
(4위)
29
(1위)
6 14 74
(6위)
69
(9위)
3 .464
1992 124 445 .335
(2위)
149
(2위)
43
(1위)
3 14 79
(5위)
91
(4위)
7 .539
(5위)
1993 31 103 .359 37 8 1 1 18 10 1 .485
1994 1군 기록 없음 - 부상으로 시즌 아웃
1995 50 178 .337 60 16 1 2 34 21 2 .472
1996 94 366 .309
(6위)
113 25
(10위)
1 5 61 49 2 .423
1997 102 341 .229 78 10 2 3 40 33 2 .296
1998 113 406 .318
(3위)
129 24 2 13 79
(10위)
56 1 .483
1999 127 456 .329
(7위)
150 17 3 11 83 83 0 .452
2000 107 386 .285 110 15 2 6 53 51 3 .381
2001 118 356 .247 88 25 1 7 59 35 1 .382
2002 103 267 .262 70 14 1 7 38 26 0 .401
2003 50 72 .278 20 2 0 2 17 5 0 .389
2004 50 18 .278 5 0 0 0 3 2 0 .278
KBO 통산
(14시즌)
1167 3857 .296 1141 228 23 85 638 531 22 .433

  • 기타 기록들
43개 한시즌 최다 2루타 기록
4개 한경기 최다 2루타 기록
31안타 단일시즌 연속 안타기록
98년,99년 미스터 올스타 2연속 수상
5회수상 2루수 부분 최다 골글 수상
첫번째 롯데가 연수자금 지원해준 첫번째 인물..
BEST 9 한국프로야구 30주년 올스타 2루수 부문 선정[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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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16번이 롯데 팬들에게는 박정태의 번호로 각인된 바람에 그 이후 16번을 물려받은 후배들이 하나같이 박정태와 비교되어 까이는 웃지 못할 상황을 초래했다. 가장 많이 욕을 얻어먹은 선수는 박정태가 은퇴하고 난 뒤 박정태를 졸라서 16번을 물려받은 박기혁.
  • [2] 당시 의사가 앞으로 선수 생활을 할수 있을지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하루종일 울었다고 한다.
  • [3] 부상 이후 부상당한 쪽의 다리 길이가 짧아졌다고 한다. 부상 전 도루도 곧잘 기록할 정도로 발이 느린 선수는 아니었으나 부상 이후 도루를 거의 기록하지 못했다.
  • [4] 당시 단기 사병으로 복무시 정규시즌엔 홈 경기만 출전 가능했다. 다만 포스트시즌에는 홈 원정 가리지 않고 출전 가능.
  • [5] 박정태의 통산 실책 수는 87개. 이는 2013년 기준으로 200여 경기를 적게 소화한 정근우보다도 적은 수치다.
  • [6] 시즌 마지막 경기가 두산과의 전체승률 1위 결정전 단두대매치였는데 여기서 패하는 바람에 2위가 되어버렸다.
  • [7] 이후 박종호의 39경기로 깨졌다. 다만 단일 시즌 연속안타 기록은 박정태가 가지고 있다. 박종호는 2시즌 걸쳐서 이룬 기록.
  • [8] 32경기째 마지막 타석때 3루수쪽 안타성 타구를 날렸으나 당시 두산 3루수 홍원기가 다이빙 캐치로 잡아내면서 아쉽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다음날 안타를 쳤다.....
  • [9] 경기가 끝나고 기자들이 안타성 타구를 잡은 홍원기가 밉지 않냐고 질문했을때, 오히려 너무 고맙다고 했다. 홍원기의 호수비로 인해서 자신의 연속안타 기록이 짜고친 것이 아니라 서로 최선을 다하는 상황에서 힘겹게 달성한 기록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 [10] 김민재 KT 코치의 말에 따르면 풀 버전은 이거라고 한다. "오늘 무조건 이기라. 안그르면 다 지기삔다! 알긋나?"(안그러면 다 죽여버릴꺼야! 알겠어?) 라고...
  • [11] 이 때는 양준혁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대표팀에서 탈락해 선수협 주동자들에 대한 길들이기였다는 여론도 일부 존재했다.
  • [12] 당시 호세와 박정태를 빼면 중심타선을 맡을 선수가 없었다. 다행히 조경환이 포텐을 터뜨리며 중심타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다음해에 백골퍼가 오면서 망했어요
  • [13] 박정태 임경완을 LG로 보내고 안병원, 상준을 받아오는 트레이드였는데 당시 LG의 김성근 감독이 박정태를 무척 원해서 추진되었던 트레이드였으나 팬들의 반발과 구단 자체 검토 끝에 결국 백지화되었다
  • [14] 당시 백골퍼는 박정태가 부진하자 2군을 보내놨는데, 백인천 항목에 '특이한 폼의 박정태는 2군에 쳐박아두었다'라고도 나와있다. 특이한 타격폼이 부진한 원인이라고 오판한듯.
  • [15] 2년 6억의 조건으로 보장금액은 4억에(계약금 1억, 연봉 1억 5천 X 2년치) 옵션 2억이 포함된 금액이었는데 이 옵션의 조건이 130경기 이상 출전에 .320 80타점이라는 말도 안되는 조건이었다. 최전성기의 최고 타자에게도 쉽지 않은, 당시 노장인 박정태로선 현실적으로 달성이 불가능한 조건. 박정태는 차라리 처음부터 2년 4억이라고 했으면 기분이라도 덜 나빴을거라고 이 당시를 회고했다.
  • [16] 당시 갈매기마당(일명 갈마)는 지금의 DC인사이드처럼 비회원도 자유롭게 글을 남길 수 있었다. 그 덕택에 박정태를 홀대하는 롯데구단에 항의하고 성토하는 글들이 지금의 DC 야갤 수준으로 리젠될 정도였다.
  • [17] 구단에선 위로의 뜻으로 박정태와 구단 간의 갈등에 있어 가장 큰 원인이었던 말도 안되는 조건의 옵션을 대폭 완화해 줬다. 총액 6억은 종전과 같은 조건이었지만 계약금을 1억에서 2억으로 인상해 보장금액을 5억으로 올려준 대신, 옵션 액수는 2억에서 1억으로 반을 깎고 달성조건도 규정타석과 .280에 50타점으로 대폭 낮췄다. 박정태는 팬들이 자신의 현역생활 연장을 이뤄줬다면서 지금도 이 부분을 팬들에게 진 빚이라고 표현한다.
  • [18] 노장 박정태가 4번타자를 맡아야 할 정도로 이때당시 롯데의 전력은 그야말로 습자지 수준으로 허약하고 빈약했다. 당시 개막 후 최다연패 기록인 12연패 기록을 세웠다.
  • [19] 당시 주전 2루수 조성환이 사구를 맞고 손등 골절로 시즌아웃되었고 그를 대신했던 신명철, 신종길, 박준서가 줄줄이 부상으로 쓰러져나가 2루수 자원이 바닥이 난 상태에서도 끝끝내 박정태를 콜업해 쓰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주전 2루수를 맡긴 선수가 입단 후 4년간 1군경기 경험이 전혀 없던 박진환이었으니 누가 봐도 너무나 노골적이었던 상황. 시즌 중반 양상문은 박정태에게 은퇴를 권유했으나 박정태는 팬들 때문에 연장된 현역 생활이기 때문에 팬들 때문에라도 계약기간 종료 까지는 현역으로 뛰고 싶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 [20] 실제로는 플랜카드 사건까지 터지고 난 6월 중순 양상문 감독이 팀 분위기 쇄신 차원으로 박정태를 1군에 올리려 했었다. 그런데 하필 그시점 2군경기에서 박정태가 2루 수비도중 상대팀 주자와 충돌해 늑골 타박상을 입어 늦어지게 된 것. 당시 관전자의 말로는 2군에서도 1군처럼 너무 열심히 플레이하다가 입게된 부상이라면서 안타까워했다.
  • [21] 물론 이는 양상문 감독이 박정태를 기용하지 않은 것을 세대교체 차원이라고 해도 대놓고 홀대한 행위이다. 그 뒤 2010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 [22] 타석수가 적어 표본이 적긴 해도 5할이 넘는 수치는 타격감 유지가 힘든 대타 위주로 기록한 것임을 감안시 무시할만한 수치가 아니다. 당시 롯데의 물방망이 타선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 [23] 당시 WWE 프로레슬러 커트 앵글의 테마음악을 사용했다
  • [24] 박정태는 14년의 선수생활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이나 연속경기안타, 올스타전 MVP 등이 아닌 바로 이 순간을 꼽았다. 사전에 전혀 얘기가 되지 않은 유지현의 돌발 행동이었던지라(점심때 둘이서 짬뽕을 같이 먹었는데 그때까지도 아무말이 없었다고;;) 당시의 놀라움과 감동이 그만큼 컸다고 한다. 유지현의 훈훈한 돌발 행동은 자의보다 타의에 의한 은퇴를 앞두고 있던 두 프랜차이즈 스타의 동병상련의 감정 때문이었으리라. 박정태는 이 날 이후 유지현을 친동생처럼 여기고 아낀다고 한다.
  • [25] 사실 두 사람은 원래 사이가 좋다고만은 볼 수 없는 관계였는데, 박정태가 선수협 창단 멤버이지만, 유지현은 선수협 5적으로 까이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 날을 계기로 두 사람이 상당히 친해졌다는 것이다.근데 별로 안 친한 사람끼리 단둘이서 짬뽕을 먹나?
  • [26] 2012년에 많이 까먹고도 이정도.
  • [27] 김성래, 박종호, 안경현 등이 모두 타 포지션 유경험자이다. 이는 현역에서 첫손에 꼽히는 정근우도 마찬가지. 2루수로 정착하기 전 3루수와 유격수를 왔다갔다했다.
  • [28] 통산타율 .296는 은퇴선수 가운데 무려 역대 6위에 해당하는 고타율이다. 박정태보다 앞서있는 선수는 장효조, 양준혁, 이정훈, 이종범, 이만수까지 불과 다섯 명 뿐이다. 또한 2루수는 수비의 비중이 큰 특성상 보통 포수, 유격수와 함께 공격력이 가장 약한 선수들이 많은 위치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가치는 더욱 크다.
  • [29] 타격코치라면 슬럼프를 해결하기 위한 조언이나 해결책을 제시해야하는데 스스로 극복해야한다는 식의 말을 하는 바람에 더더욱 까이는중 (...)
  • [30] 일명 '런흥식 사건'으로 특히 넥센팬들이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 [31] 실제로 과거에 잘려나갔던 김응국이나 윤학길,이종운 등의 코치들도 다시 복귀한 적이 있었다.
  • [32] 사실 롯데 감독 시절에도 8888과 77 사이에서 5위를 찍고 리빌딩의 초석을 다졌다는 점에서 최소 평타는 쳤다고 여겨진다.문제는 그 뒤 투수코치 시절이지만
  • [33] 출처 : 이성득 해설위원의 자이언츠네이션
  • [34] 정수근은 두산시절이던 2001년에 잠실구장서 벌어진 올스타전에서도 박정태 타격폼을 흉내낸적이 있었다. 7월 17일에 열린 올스타전에서 6회초 1사후 타석에 들어선 정수근이 초구를 기다리면서 박정태 특유의 타격폼을 흉내낸것. 그때 덕아웃에 있던 박정태도 박장대소했던 게 TV에 잡히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후 정수근은 6구째에 갑자기 당시 LG선수였던 양준혁의 만세 타법을 흉내냈다.당시 영상 그놈의 술만 아니었으면
  • [35] 중국과의 개막전에서 만루홈런을 쳤다. #
  • [36] 중간 앞부분부터 나온다. 잘 찾아보시길
  • [37] 참고로 역대 롯데출신 선수들중 개신교 신자라 해봐야 박정태, 조성환, 최대성이 전부라고 한다.
  • [38] 은퇴식을 치를 때 받은 동료들 사인이 들어간 유니폼 액자만 소장중. 코치와 2군감독 시절 유니폼도 모두 팬들에게 증정하고 있다고 한다...
  • [39] http://cheilstory.com/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