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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last modified: 2015-02-27 15:24:15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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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泳孝
1861 ~ 1939년

조선의 정치가이자 갑신정변의 주역 그리고 개화파 인물. 조선의 마지막 부마[1]. 1884년 김옥균,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망명하였고 그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었다.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춘고 또는 현현거사이다.

1861년 수원에서 진사 출신의 가문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초명은 무량이었다가 후에 영효로 개명하였다. 12세 때 조선 25대 왕 철종의 여식인 영혜옹주와 어린 나이에 결혼해 금릉위(錦陵尉)에 봉해졌으나 세 달 만에 영혜옹주가 죽게 되면서 혼자 몸이 되었다. 부마는 재혼을 못 하는 것이 법도였으므로 평생 홀아비 인생을 12살 나이에 예약한 셈. 이를 딱하게 여긴 고종이 궁녀를 하사해 소실로 삼도록 하였다고도 한다.[2] 그 뒤 여러 번 소실을 들였지만 불화설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 어쨌든 이 때문에 자식들을 여럿 두었고, 박영효의 2남의 딸이 이우 공의 부인 박찬주 여사다.

1881년 의금부 판의금부사로 임명되었고 1882년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는데 이 당시 개화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처음으로 김옥균과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침투 그리고 의 내정간섭을 방지하는데 주력했다. 그 해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여[3] 선진문명이 발달해 있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개화사상에 주력하게 되었으나 여흥 민씨 일가의 제재를 받게 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을 통해서 우정국 연회에 참석한 민씨 일가 사람인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히고 수구파를 제거하는데 기여하였다. 그 후 갑신정변 주동자로 지목되어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1차망명)

일본에서 망명하면서 수차례 자객에게 살해당할 위협에 시달린다. 그 와중에 같은 망명자 김옥균하고는 사이라 나빠져서 "옥균이 쟤가 갑신정변에 뭐 한거 있나? 나랑 홍영식이 다 했지..."라고 디스를 날리기도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어 조선으로 돌아온다. 이후 2차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나, 당시 친러정책으로 가던 내각의 흐름을 친일내각으로 되돌리고자 왕비암살을 모의하다가 걸린다(...) 그것도 유길준의 밀고로 이루어진다. 이에 일본으로 2차망명일 가게 된다.

그 이후 1907년 순종이 즉위하게 되면서 귀국하였고 이후로 친일파의 길을 걷게 되면서 을사조약의 주범인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으로 들어갔으나 고종 양위에 개입한 대신들을 암살미수한 혐의로 제주도에 유배를 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조선총독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8년 조선산은행 이사에 취임하였다.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초대 사장이 되었으나 그 해 평양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소요사건을 동아일보가 게재했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조치를 당하자 사임하였고 1926년에 총독부의 자문격인 중추원 의장이 되었다.

1932년 일본 귀족원으로부터 의원직을 맡아 족원 의원이 되었고 (최초이나 의미는 없다.) 1939년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가 그 해 임기중에 노환으로 죽었다. 그의 작위는 손자 박찬범이 계승했다. 죽은 뒤 고작 3개월 동안 부부였으나 평생 그의 정실 부인이었던 혜옹주의 곁에 묻혔는데, 후에 후손들이 화장하였다고 한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독립유공자 서훈 및 훈장 포상자 대상으로 지정되기도 하였으나 애국단체 등에서 후반에 친일 행적 등을 문제삼았고 역사 고증에서도 친일 행위가 드러나면서 서훈 및 훈장 포상자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친일인명사전에도 친일파 명단 중 이름이 올려지기도 하였고 친일반민족 행위자 704인 명단에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서울 남산골한옥마을에 박영효의 가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각에서는 박영효의 친일 행각 등을 거론하며 친일파 가옥 철거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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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덕혜옹주의 남편 소 다케유키는 조선이 망한 뒤인 일제강점기에 결혼을 했던 관계로 부마에 봉해지지 않았다.
  • [2] 영혜옹주의 생모가 범씨인데 고종이 내린 궁녀도 범씨였다고 한다. 범씨가 흔한 성씨는 아니므로 기막힌 우연.
  • [3] 이때 태극기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전에는 박영효가 이때 배 위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알려져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