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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last modified: 2014-12-17 01:39:45 Contributors


대한민국의 소설가. 경상남도 통영군 출생. 1926~2008.
대표작은 토지신시대, 약국의 딸들.

Contents

1. 인생
1.1. 수상
2. 작품
2.1. 수필
2.2. 미완성작, 유작
3. 일화
4. 정치적 측면

1. 인생

1926년 경상남도 통영군에서 출생하였으며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 1950년 수도여자사범대학(現세종대학교)졸업, 1950년 황해도 연안중학교에 근무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녀의 남편 김행도는 북한군에 납북당했다.

그의 딸 김영주는 1973년에 저항시인 김지하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이 발표됨으로써 등단, 이후에는 단편들을 쭉 작성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큰 업적은 소설 토지를 들 수 있겠는데, 1969년 문화일보 연재부터 1994까지 총 5부로 완성된 대하소설이었다. 이 소설로 인하여 박경리는 유명세를 타, 영어·일본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는 등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2007년 말 폐암이 발견되어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고, 2008년 뇌졸중 증세까지 나타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2008년 5월 5일 사망하였다. 묘소는 통영시 산양읍에 있다.

한편, 그녀가 3부작 연재하였던 '나비야 靑山(청산)가자'는 유작으로 남게 되었다.

1980년 서울을 떠나 원주 단구동에 정착하면서 토지 4,5부를 집필하고 탈고한 생가는 박경리문학공원이 되었으며, 택지 개발로 1998년 회촌마을로 이사하였다. 보상금과 토지공사의 기부금을 합쳐 토지문화관을 세웠다.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와 가까워, 석좌교수로 강의를 오기도 했다. 사후 캠퍼스에 박경리 동상과 시비가 세워졌다.

1.1. 수상

월탄문학상
인촌상
한국여류문학상
내성문학상 (1959)
금관문화훈장 (작고후)

2. 작품

2.1. 수필

  • Q씨에게
  • 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
  • 설을 위한 망상

2.2. 미완성작, 유작

  • 본산고
  • 비야 청산 가자

3. 일화

박경리는 반일주의자였고 일본 문예지의 편집장과의 인터뷰 당시에는 자신을 반일작가라고 하며 자기소개를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후 일본 학생들이 방문했을 시 "나는 철두철미 반일작가지만 반일본인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1]

일본의 문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하였다.

언젠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높은 문화가 들어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막을 이유가 없다. 문화는 인류의 공유물이니까.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 들어오는 것이 문화인가, 우리 본래의 인성과 생명을 바탕으로 한 유산을 깡그리 버리고 기능적 통제의 산물이거나 아니면 쾌락적 부패의 인자를 가득 실은 것에 문화라는 상표를 붙인 것, 과연 그것은 문화인가 하고 말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 시장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청계천 복원에 관해서 관계가 껄끄러웠다. 박경리는 본래 청계천 복원사업 계획에 찬성 의사를 표명했었는데 후에 청계천 복원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변경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찬성 의사를 취소하고 반대 의사를 내비쳤기 때문이다.

또한 박경리는 사위이자 시인인 김지하와 더불어 생명주의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는데 그녀는 이것에 대하여 가는 왜 쓰는가에서 언급하였다.

“자연의 파괴는 우리 모든 생명체의 파괴이며 자연의 황폐는 우리 모든 생명체의 황폐이며 자연의 해체는 우리 모든 생명체의 해체입니다. 그리고 자연의 종말은 우리 모든 생명체의 종말입니다. 우리의 육신과 영신은 모두 자연의 것이며 자연의 육신과 영신 역시 우리의 것입니다."
 
김용옥과의 대화에서는 일본의 긍정적인 면을 말하는 김용옥에게 "일본은 야만"이라고 일갈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그녀의 소설 토지가 일본에서 반일문학으로 치부된다는' 답변으로 왜 자신이 반일인지 말하였다.

"일본 군국주의는 자체로 비도덕적이고 반생명적이었어. 그 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지. 무엇보다 나는 일본 체제를 반대하지만 일본인을 반대하는 건 아니야."
 
한편, 그녀는 산문집 '생명의 아픔'에서 일본인에 대해 그 동안의 일본의 행적에 비하여 단순하고 소심하며 범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민족이든간에 일본과 같은 상황이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라고 평했다.[2]

굉장한 헤비스모커로 유명하다. 통영시 남망산에서 이루어졌던 문화 행사에서도 공적 시간 이외에는 담배를 손에서 놓질 않았다고. 박완서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에세이 속에서도 언급된다.

4. 정치적 측면

현대그룹아산 정주영 회장이 정치를 할 무렵에 그와의 관계가 부각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상당한 관계가 지속되었고, 토지문학관 등에도 현대의 자금이 많이 들어갔기에 강준만 같은 정치평론가 측에서는 "재벌과 문학인의 결탁"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반재벌 측이 보기엔 좀 낯뜨거운 수준의 찬양 글을 쓰기도 한지라.

이런 문제는 고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정래포스코박태준 사장과의 관계 등 재벌가와의 인맥이 한두개씩은 겹치는게 사실이기도 하다. 또 정주영 씨가 강부자최불암 등 문화, 예술계 인사들에게 인맥풀을 갖추기 위한게 반, 지원을 하는게 반 식으로 백두산 천지나 다른 여러 곳에 다녀오는 등의 지원을 하기도 했고. 박완서 씨도 현대가와 비슷한 관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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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박경리 수필집 '가설을 위한 망상' 출처
  • [2] 박경리 수필집 '생명의 아픔' 2. 생명의 문화/ P.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