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바이에른

last modified: 2015-09-18 03:23:12 Contributors


[1][2] [3]
바이에른 주의 주기(州旗)
바이에른 주의 문장 바이에른 주의 위치
국가 독일
시간대 (UTC+1/+2)
주도 뮌헨

Contents

1. 개요 및 본문
2. 역사
3. 특색
3.1. 프로이센에 대한 지역감정
3.2. 바이에른 독립?
4. 주요도시
5. 관련 항목

독일의 국호는 독일연방과 바이에른이라고 한다

1. 개요 및 본문

Freistaat Bayern, 바이에른 자유주
독일의 주(州). 주도는 뮌헨. 독일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장 넓은 주이다. 하지만 인구는 2위(1250만명)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가 무려 500만명이나 더 많다.

영어로는 바바리아(Bavaria). 참고로 바이에른 사람, 바이에른 방언, '바이에른의' 란 의미의 형용사는 영어로 바바리안(Bavarian)이다.[4] 바바리아 사람이라고 해서 바바리맨이 아니다

주요 도시로는 뮌헨 외에도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등의 도시가 있다.

서쪽에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서북쪽에 헤센 주, 북쪽에 튀링겐 주, 동북쪽에 작센 주, 동쪽에 체코, 동남쪽과 남쪽에 오스트리아, 서남쪽에 스위스와 접한다. 직접 닿아있진 않지만 리히텐슈타인과도 가까운 편이며, 오스트리아를 통해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 이탈리아가 나온다.

이 곳과 오스트리아 티롤 주의 경계 부근에 독일판 백두산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고 2962~3m로 백두산보다 더 높은 최고봉 추크슈피체 산이 위치해 있다.한국어위키백과, 영어위키백과 참조

2. 역사

기원전 바이에른 지방에 처음 정착한 주민들은 켈트족들로 그들은은 기원전 마지막 10년 동안 북쪽의 족과 남쪽의 로마인들 사이에서 압박을 받았다. 로마 제국은 이 지방을 정복해 남부지역을 라에티아와 노리쿰으로 나누었고, 북쪽 경계를 따라 요새들을 건설해 튜턴족의 남침을 막았다. 아우크스부르크·켐프텐·레겐스부르크·파사우 등의 번영하는 로마 식민지들이 남부에서 생겨났다.

5세기에 로마인들은 거듭되는 게르만족의 침공에 압도되었다. 결국 이곳에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게르만족이 들어와 남아 있던 켈트족·로마인들과 뒤섞여 정착했다. 오늘날 지명의 어원이 된 부족은 바바리아족으로, 그들은 488~520년 사이에 남부에 정착, 555경~788년 프랑크족의 아길롤핑 공작가의 통치를 받았다. 그사이인 7~8세기에 이곳은 성 보니파티우스, 성 코르비니언, 성 엠머람, 성 루퍼트 등과 같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수도사들에 의해 그리스도교화되었다.

그러다가 788년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는 아길롤핑가의 마지막 공작인 타실로 3세를 폐위시키고 바이에른 공작령을 합병시켰다. 이후 817년 카롤링거 제국의 분할 후 바이에른 공작령은 경건왕 루트비히의 차지가 되었고, 이어 그의 아들로 동프랑크의 왕위에 오른 게르만 왕 루트비히의 소유령이 되면서 이후 독일 역사에 귀속되게 된다. 바이에른은 10세기에 공작령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이후 1180년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가 팔츠 백작이었던 비텔스바흐 가문(Wittelsbach)의 오토에게 바이에른 지역을 증여하여,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오토 1세(황제와 동명이인!)로 비텔스바흐 왕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현재의 바이에른 남동부 지방만을 비텔스바흐가가 소유했고, 나머지는 수많은 제국도시, 도원 보유지, 기타 가문 소유지들로 조각나 있었다. 14~15세기에 비텔스바흐가 공작들의 세력은 계속되는 집안 싸움으로 약화되었고, 중간에 루트비히 4세가 등장해 이 지역을 통합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선제후직을 그대로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양도해야 했으며, 그의 사망으로 인해 영토 역시 아들들에 의해 분할되어 14세기 말에는 비텔스바흐가의 여러 분가가 바이에른을 3개의 공작령으로 분할했다.

그러다가 1506년 바이에른-뮌헨의 현명공 알베르트 4세가 장자 상속 원칙을 세움으로써 영토의 통합이 시작되었다. 또한 알베르트는 뮌헨을 그의 공작령 수도로 삼았다. 1545년 알베르트의 아들 빌헬름 4세는 마침내 이곳을 하나의 공작령으로 재통합할 수 있었다. 빌헬름 4세는 종교개혁을 반대했고, 그의 후계자인 알베르트 5세 밑에서 바이에른은 엄격한 로마 가톨릭령이 되었다. 30년 전쟁막시밀리안 1세합스부르크가의 편에서 싸웠고, 그의 지도력으로 영토가 넓어지고 그 자신은 선제후가 되는 특권을 얻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들어와 바이에른은 스페인오스트리아왕위 계승 전쟁들로 인해 줄곧 유린되었다. 1777년 바이에른의 지배권은 분가였던 팔츠의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에게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 바이에른과 팔츠는 통합되었다. 이에른 계승전쟁(1778~79)에서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대왕은 바이에른의 대부분 지방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며 합병하려는 오스트리아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1790년대에 바이에른은 프랑스 혁명에 맞서 제1·2차 반프랑스 연합에 가담했으나 1796년엔 랑스 혁명군, 1799년에는 오스트리아, 다시 1800년에는 프랑스에 잇따라 점령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다음해에 바이에른은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어 오스트리아를 희생시키며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고, 1805년 레스부르크 조약에 따라 거의 현재의 경계대로 영토를 얻었다. 이 조약은 바이에른 공작령을 왕국 수준으로 격상시켰고, 통치자인 선제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는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가 되었다. 그러나 바이에른은 나폴레옹 전쟁 후기 1813년 이프치히 전투 직전에 나폴레옹을 버렸고, 1815년에는 나폴레옹에 대항해 신성 동맹에 가담했다.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진영을 바꿈으로써 바이에른은 빈 회의(1814~15) 후에도 이미 취득한 영토의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이어 3번째로 큰 독일 영방 내 국가가 되었다.

막시밀리안의 계속된 치세중 1818~19년에는 바이에른 최초의 헌법의회가 발족했다. 막시밀리안의 아들인 루트비히 1세 아래에서 지방자치제와 다른 개혁들이 취해졌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여류 모험가라 몬테즈와 열애에 빠져 왕위를 지킬 수 없게 되자 루트비히는 결국 1848년 했다. 1850년 루트비히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막시밀리안 2세작센·하노버·르템베르크 등과 동맹을 맺었다. 이들의 목적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대항하는 제3세력으로서 독일 내에 중간 크기의 나라들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바이에른은 이들 가운데 가장 큰 나라였다. 바이에른은 그후 프로이센에 반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지했다. 남독일연방...

막시밀리안의 후계자인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령으로 합치자는 프로이센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제안을 거절하고,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 그러나 프로이센 측의 조속한 승리와 바이에른에 대한 그들의 온건한 정책으로 바이에른은 1870년 보불전쟁 때에는 프로이센 편이 되었으며, 그후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의 주도하에 독일 제국을 수립할 때 도움을 주었다.

1871년 바이에른 왕국은 독일 제국에 가맹했으며 제정된 독일 헌법하에서 바이에른은 독일 제국의 다른 어떤 구성국보다도 큰 독자성을 얻었다. 외교활동, 군사행정, 우편·전신 업무, 철도 등에서 자치권을 보유했으며 제국내에서 프로이센에 이어 제2위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루트비히 2세는 정신불안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고, 특히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그의 과도한 건설사업들은 바이에른의 국고를 바닥냈다. 1886년 루트비히 2세는 정신이상자로 공포되었고, 왕위는 그의 동생인 오토에게 넘어갔지만 오토 역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오토의 삼촌 루이트폴트가 같은 해에 섭정이 되었고, 1912년 루이트폴트가 죽자 그의 아들 루트비히 3세가 왕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독립 사회주의자인 르트 아이스너가 비텔스바흐 왕조를 무너뜨리고 바이에른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1919년 아이스너는 암살되었고, 잇따른 혼란 속에서 혁명위원회들이 '적색 테러'를 자행하고 단명한 소비에트 공화국을 구성했다. 이 공화국은 1919년 5월 독일의 육군부대들과 민방위대들이 뮌헨을 탈환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백색 테러'를 가하면서 끝장이 났다. 1919년 8월에 통과된 새로운 바이에른 헌법에 따라 바이에른은 전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유주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바이에른의 정국은 여전히 혼란한 상태였고, 1920, 1921년에는 우익 쿠데타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운동이 뮌헨에서 시작되었고, 아돌프 히틀러뮌헨의 맥주홀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하였다.

이후 1933년 나치당이 권력을 잡자 독일의 모든 주들 가운데서 가장 보수적이던 바이에른은 나치즘의 요새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뉘른베르크. 가톨릭이 나치에 긍정적이지 않았으나 히틀러에게 가톨릭이 협력했다고 하면 백발백중 바이에른(...)[5] 그런 주제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당시 독일의 다른 주들에 비해 연합국의 폭격을 많이 받지않았다(...) 전후 바이에른은 미국 점령지역의 일부가 되었고, 팔츠는 분리되어 새로 창설된 인란트팔츠 주에 편입되었다. 1948년의 서독 기본법에 따라 바이에른은 독일연방공화국의 한 주가 되었다.

설명했듯이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바이에른 영토는 팔츠 지방(현재 라인란트팔츠州 남부)도 포함하고 있었다. 1920년 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코부르크 지역을 흡수하였다.

3. 특색

독일의 지역 중 가장 지역색이 강하다. 텔레비전에서는 독일 국가(國歌)보다 먼저 바이에른 주가(州歌)를 연주하며, 국제뉴스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독일 정치관련 뉴스에서 '기민-기사 연합'이란 말을 들어 봤겠지만 바이에른 지방 정당인 기독교사회연합(기사당, Christlich-Soziale Union)은 기독교민주연합(CDU)과 연대하여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며, 바이에른 이외 지역에서는 기민당과 협력하고 있다. 동시에 독일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기도 하다.

독일에서 가톨릭 인구가 가장 많은 곳으로 前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여기에서 태어났다.

같은 남부인 바덴-뷔르템베르크와 지역감정이 있다는 말도 있으나 한국의 영남과 호남같은 지역감정이 딱히 있지는 않다. 지역대 지역의 지역감정이 있다기보단 바이에른주 자체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한 편. 오히려 축구에서 남북간 라이벌 의식이 강한 편이다.

독일 내에서도 그렇지만 유럽내에서도 손꼽히게 잘사는 지역이기도 하다.

바이에른의 졸른호펜(Solnhofen) 지역은 라기의 동물 화석으로 유명하며 그 유명한 아르카이옵테릭스콤프소그나투스의 첫 화석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화석들은 보존률이 뛰어나서 왠만한 연조직(깃털이나 날개막 등)이 화석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3.1. 프로이센에 대한 지역감정

과거부터 대대로 바이에른은 프로이센에 라이벌 의식과 지역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까지도 그 후신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베를린[6], 거기에다 한자동맹 자유시인 함부르크브레멘에까지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

바이에른은 본래 프로이센과 동등한 왕국이었으나, 1870년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철저히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고, 바이에른은 완전히 소외되었다. 통일 이전 바이에른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과 함께 독일에서 가장 큰 영방국 중 하나였으며, 통일된 지역에서는 프로이센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왕국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이끈 프로이센 주도 하에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새 독일 제국에서의 주도권은 프로이센, 함부르크브레멘 등 구 북독일 연방 세력, 거기서도 특히 인구, 면적과 경제규모에서 우월한 프로이센이 잡게 되었다. 새 독일 제국의 황제, 수상, 국기 등을 비롯한 여러 국가 제도들이 프로이센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 내에서 두 번째로 큰 왕국이었던 바이에른은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과 대립각을 세웠기 때문에[7] 오히려 패전국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역사적으로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가는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황실보다 유서깊다고 여겨서 바이에른 사람들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센한자동맹 자유시가 개신교인 반면 바이에른은 가톨릭 국가였고, 독일 제국에서 호엔촐레른 황실이 전국을 개신교 지역으로 만들려는 작업에 착수하며 가톨릭 지역을 압박한 것도 그 반감에 더 불을 지피기는 했지만. (다만 이 사안은 호엔촐레른 황실이 딱히 바이에른만 압박한 것은 아니어서, 프로이센 내부에서도 가톨릭이 무시못할 지분을 차지하던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오버슐레지엔, 베스트프로이센, 포젠 등의 가톨릭 세력도 처지가 별다를 바 없기는 했다.)

심지어 1차대전에 대해서도 "프로이센이 멋대로 일으킨 전쟁에 바이에른이 이끌려갔다."고 여길 정도였으며, 이는 프로이센의 중심지 베를린에서 유지되는 중앙 정부에 대한 반발심으로 이어졌다.

프로이센에 대항하여 좌익을 선택했고, 이에른 레테 공화국이 세워지게 된다. 하지만 좌익 정부가 무너지고 좌익 세력이 소탕되자, 이번에는 우익을 지원하여 나치가 급성장 하는 토양이 돼버리기도 했다.[8]

상대적으로 내륙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베를린[9]이나 함부르크보다도 연합국의 폭격을 덜 맞아 그만큼 전쟁의 피해가 타 지역보다 덜했다. 전후복구 역시 전쟁 피해를 직접적으로 본 영국이 점령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소련이 점령한-그리고 반은 동독이 가져가고 반은 동독에 포위되어 고립된-베를린보다는 쇼미더머니를 쳐가며 전쟁물자를 지원하고도 여력이 충분한 미국이 점령한 바이에른 쪽이 전후복구도 훨씬 수월하고 빠를 수밖에. 그것도 모자라 베를린에서는 지멘스리안츠의 본사를 가져오고 작센에서는 아우디 본사를 가져오며 바이에른만 어부지리와 전쟁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즉 현재 바이에른이 누리고 있는 영화와 독일 내에서 가지고 있는 위상은 그렇게 증오하던 프로이센의 피를 빨아먹고 자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2차대전 이후 서독에서 바이에른과 대비되는 북부지역 '대표'이미지를 니더작센이 갖게 되었는데(산악지역과 대비되는 평지와 바닷가, 가톨릭과 대비되는 개신교 이미지 등) 실제로도 폴크스바겐의 본사가 하노버 근교인 볼프스부르크에 자리잡고 있다. 즉 동서독 분단 이후의 남북 지역감정 구도는 바이에른 VS 니더작센 이미지로 재편되었으며 흥미롭게도 사투리 역시 바이에른 사투리와 머나먼 동방에서까지 지역드립으로 유명해진[10] 동프리슬란트 사투리[11]가 자주 비교당하곤 한다.

3.2. 바이에른 독립?

카탈루냐, 바스크, 스코틀랜드처럼 많이 알려져 있지 않기는 하지만, 아예 독일 연방에서 독립해버리자는 바이에른 당(Bayernpartei)이 존재한다. 그런데 20세기에는 뮌헨서독의 수도가 되었던 탓인지 세력이 줄어들었으나 영향력은 잠재되어 있었고, 21세기에는 오히려 세를 불리는 추세가 되었다.

----
  • [1] 산마리노의 국기 바이에른 주의 기(Flag). 위의 흰색이 잘 안 보이겠지만 위쪽이 흰색, 아래쪽이 하늘색인 2색기이며, 흰색부분과 하늘색부분의 넓이와 폭이 같다.
  • [2] 영어 위키백과의 관련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다.
  • [3] 이것도 바이에른 주의 기인데, 교대로 빛깔을 바꾸어 놓은 마름모꼴 연속 무늬의(lozengy) 기이다. 바이에른에서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간간이 구름 낀 푸른 하늘을 형상화한 것이다.
  • [4] 독일의 프리미엄 자동차 BMW도 Bavarian Motor Works, 독일어로는 Bayerische Motoren Werke다.
  • [5] 다만 이건 일부의 이야기고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부모 등 일반 평신도들은 그닥 호의적이지 않았다.
  • [6] 현재 독일에 남아있는 프로이센 지역 중 바이에른과 경제 및 인구규모로 대항할만한 곳들이다.
  • [7] 오스트리아를 지지했으며, 보오전쟁에서도 오스트리아 측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 [8] 다만 나치가 대두되기 이전인 1928년 총선처럼 사회민주당이 진출하는 경우도 있었고, 대개 지역정당 바이에른 인민당(보통 바이에른 기독교 사회연합(CSU)의 전신으로 여겨진다.)이 바이에른 지역의 제국의회 의석과 바이에른 주지사 자리(폰 카르 장군이 잠시 집권한 1920~1921, 1923~1924의 기간을 빼면 좌익 정권 붕괴 이후, 나치 집권 이전)는 죄다 바이에른 인민당이 장악하기도 해서...
  • [9] 둘 다 프로이센 지역이다.
  • [10] 실제로 동서독 통일 이전 오씨(Ossi)란 단어는 본래 동프리슬란트 사람들은 뜻하던 단어였다.
  • [11] 저지독일어의 한 갈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