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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진보당

last modified: 2015-04-05 17:00:28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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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主進步黨 / Democratic Progressive Party:DPP

Contents

1. 개요
1.1. 당의 노선
2. 당의 역사
2.1. 당의 역대 대표

1. 개요

중화민국(대만)의 정당. 범록연맹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1986년 9월 28일 창당했으며, 2000년~2008년 천수이볜 총통 시절에는 여당이 되기도 했다. 약칭은 '민진당.' 실제 국내 언론에서는 대부분 민진당이란 약칭을 쓴다.

1.1. 당의 노선

기본적인 당 이념은 자유주의진보주의를 지향하며, 보수주의 계열인 중국 국민당과는 대립 관계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딱히 큰 문제는 없어보이지만...

문제는 양안관계. 이 정당이 세가 커지는 것을 중국(대륙) 정부에서 극히 싫어한다. 자기들을 불법단체가 아닌 국가로 인정해주겠다는데 왜냐하면 이 당은 대만 자체의 독립을 지향하는 범록연맹의 중추 정당이기 때문.

다만, 중화민국 정부를 침략자의 체제라고 부르며 중국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던 과거와는 달리, 1990년대 후반부터는 "대만은 독립국이나 국호, 정부 조직은 기존의 것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하며 온건 노선을 타고 있다. 천수이볜 정권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노선 변경으로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을 포섭했기 때문이다.

2. 당의 역사

1986년 이전까지 중화민국에서는 중국 국민당만이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다. 한마디로 야당의 존재 자체가 불법이었다는 소리. 이런 상황에서 국민당 반대를 표방하는 세력들이 한데 모아 만든 것이 민주진보당의 시초이다. 이들은 당시 당외(黨外)라는 별칭으로 분류되었는데, 유일 합법 정당인 국민당 밖에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과거 장제스 독재치하 때부터 이들은 계엄령 해제, 민주화 촉구를 외쳤다. 그러다 장제스가 죽은지 몇년 지난 1979년 12월 10일 세계 인권 선언일에 가오슝시에서 메이리다오(美麗島)라는 잡지가 민주화 시위를 주도했고 이에 당국이 경찰력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하는 메이리다오 사건[1]이 발생, 주도자 스밍더(施明德)/황신제(黃信介)/뤼슈렌(呂秀蓮)을 비롯한 8명이 반란죄로 징역형을 선고받는다.[2]

메이리다오 사건 이후 민주화 운동가들은 세를 규합하여 국민당에 맞서기로 결정하고 세력화를 논의했다. 이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민진당으로 1986년 9월 28일, 타이베이의 그랜드 호텔(圓山大飯店)에서 당외 활동가 132명이 모여 창당을 결의했다. 물론 앞서 말했다시피 당시의 창당 행위는 불법이었으나 아버지 장제스(蔣介石)와는 다르게 유연한 편이었던 장징궈(蔣經國)가 사실상 민진당의 존재를 묵인하면서 최초의 야당이 탄생하게 된다. 물론 국민당과 정부의 몇몇 강경파 인사들은 메이리다오 사건 때처럼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민진당을 박살내야 한다고 장징궈에게 건의했으나, 장징궈는 이를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그럼 7년 전에도 좀 그렇게 하시지 근데 7년 전 당시 장제스가 살아있었다면, 민주화인사 상당수가 사형당했을 거라고 예견하는 사람들도 많다. 당시 유연해서 그정도로 끝났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제스 시대는 막장이였다.

그리하여 1986년 말에 처음으로 입법위원 선거와 국민대회 대표 선거에 국민당 이외의 정당으로 참가, 20%의 득표를 하며 야당으로 자리잡는다. 초창기에는 계엄령 해제와 총통 직선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많이 벌였던 탓에 "가두당(街頭黨)"이란 멸칭이 따라붙기도 했다.

1987년 7월, 장징궈가 전격적으로 계엄령을 해제했다. 그러나 민진당은 총통 직선제를 촉구해 물러서지 않았다. 1991년에는 "대만독립강령"을 채택해 대만 독립을 당의 중요한 정치목표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움직임에 대만 국민들이 호응하여 이듬해 열린 입법의원 선거에서는 33%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1993년의 지방선거에서는 4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1994년 열린 타이베이 시장선거에서는 천수이볜이 당시 현직시장이던 국민당 후보 황다저우(黃大洲)를 누르고 사상 최초로 야당출신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1995년, 스밍더(施明德)가 당의 주석이 되면서 민진당은 변화를 맞는다. 당외시절부터 이어져오던 과격성을 접고[3] 민진당이 집권해도 대만독립을 당장 시행할 일은 없다고 하는등 이전의 대만독립 행보와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런 노선 변화탓인지 1996년 총통선거에서는 펑밍민(彭明敏)을 후보로 내세웠으나 중국의 위협속에서도 두개의 중국을 주창하며 강경하게 대응해나가는 리덩후이(李登輝)에게 표가 쏠리면서 패배했고 스밍더는 주석직을 사퇴한다. 이듬해에 열린 지방선거에서 민진당이 승리하는데 성공했으나 그 다음해인 1998년에 열린 타이베이 시장선거에서는 천수이볜(陳水扁)이 청렴한 시장(...?)[4]으로 재선을 노렸으나 리덩후이가 내세운 신예에게 패배했으니 그가 바로 천수이볜 잡는 저승사자가 된 마잉주(馬英九)였다.(...) 그리고 같은해 치러진 입법의원 선거에서도 의석을 늘리긴 했으나 국민당의 과반확보 저지에 실패하고 득표율도 정체세를 보이며 부진했다.

1998년 양대선거에서 부진함을 보인 민진당은 결국 총통선거를 앞두고 "대만전도결의문"을 채택, 대만은 독립국가이지만 국호는 중화민국을 유지한다라는 현상유지의 의지를 천명해 민진당을 불안하게 보는 중도층의 여론을 민진당쪽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민진당의 스타 정치인인 천수이볜을 총통 후보로 내세워 선거를 치른끝에 사상 처음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여당이 된 탓인지 천수이볜 정권은 난맥상을 드러냈다. 국민당 출신 인사를 행정원장에 임명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기도 했으나,[5] 이내 정권내 갈등이 고조되면서 천수이볜 정권은 흔들거렸다. 대표적인 경우가 국민당 출신 행정원장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밀어붙이다가 경질된후 이를 폐기하면서 벌어진 반핵논쟁. 천수이볜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다시 추진하는걸로 무마하려 했으나 이는 민진당내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런 정국 난맥을 타개하기위해 대만단결연맹, 국당과 연대하여 범록연맹으로 연정을 시행하기도 했다.

2004년 총통선거는 천수이볜에게 불리했다. 이전 선거에서 보수표 분열로 패배했다고 여긴 렌잔(連戰)과 쑹추위(宋楚瑜)가 연대를 선언했던것. 그러나 2.28 사건 기념일에 열린 인간사슬 캠페인으로 대만 자주의식이 고양되고 의문스런 천수이볜 저격사건 등이 터지면서 불과 0.22%라는 초박빙 표차로 천수이볜이 재선에 성공했다.[6]

재선에 성공한 천수이볜은 입법의원 선거에서 민진당의 압도적인 과반의석 확보를 목표로 대만 신헌법등의 정책을 밀어붙이려 했으나 결과는 2석이 늘어난 89석 확보에 그쳤다. 이에 책임을 지고 천수이볜은 주석직에서 사퇴한뒤 가건명의 임시주석체제를 거쳐 2005년 1월 27일, 행정원장 쑤전창이 새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쑤전창의 주석 취임으로 총통부와 민진당 중앙부는 화해를 모색해 2005년 2월에는 가오슝 시장 셰창팅(謝長廷)이 행정원장으로 지명되기도 했다. 한편으로 천수이볜은 친민당의 쑹추위와 회동을 가지고 양안관계, 대만의 안전보장, 국가적 단결등의 10개항에 합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천수이볜 정권의 난맥상에 질린 대만 국민들은 마잉주가 이끄는 국민당으로 돌아서기 시작했고 2005년 통합지방선거에서 민진당은 대패한다. 특히 천수이볜의 정치적 기반이던 타이베이를 빼앗긴 것의 타격은 심각했다. 이에 책임을 지고 쑤전창이 주석직을 사퇴한뒤 부총통 뤼슈롄(呂秀蓮)이 주석이 되지만 뤼슈롄의 대만 방언 말투에 당내의 비토로 다시 주석직을 사퇴, 2006년 1월 26일에 여우시쿤(游錫堃)을 주석으로 선출해 당내 결속을 다지려 애썼다. 이후 다시 천수이볜이 총통과 주석을 겸하지만 2008년 1월의 입법의원 선거에서 민진당은 89석에서 27석으로 의석이 확 줄어[7] 천수이볜은 주석직을 사임했다. 이후 총통후보가 된 셰창팅이 주석직을 이어받았으나 2008년 3월의 총통선거에서 셰창팅은 마잉주에게 패배해 주석직을 사임했다.

다시 야당으로 돌아간 후, 당의 회복을 위해 젊은 인사인 차이잉원(蔡英文)이 여성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차이잉원은 입법의원 보궐선거에서 잇달아 승리하며 당의 세력을 차츰 회복시켜나갔고 2009년 지방선거에서 선전하고 2010년 11월에 열린 5개 직할시 지방선거에서 민진당은 타이난가오슝 시장을 당선시켰다. 다만 차이잉원이 직접 나선 신베이 시장선거에선 패배했다.

차이잉원은 2012년 총통선거에 나서 마잉주를 위협할 정도였으나 결국 중국과의 관계를 우려한 보수성향 국민들의 표결집으로 패배했다. 동시에 치뤄진 입법의원 선거에서도 기존 의석을 능가하는 40석을 확보했으나 국민당의 과반저지에는 실패해 차이잉원은 주석직을 사임했다. 이후 가오슝 시장 천쥐(陳菊)가 대리 주석으로 재임하다가 2012년 5월 27일에 쑤전창 전 행정원장이 주석직에 재임했다가 2014년 5월에 차이잉원이 전당대회에서 승리하며 주석직에 복귀하였다.

2012년 총통선거에서 집권 국민당에게 패하였다. 국민당의 마잉주 총통은 2012년 1월 14일 펼쳐진 총통선거에서 민진당의 차이잉원 주석에 승리를 거두었으며, 입법의원 총선에서도 역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문에 민진당 내에서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2014년 대만-중국간 무역서비스 협정 때문에 이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2014년 11월 29일 펼쳐진 지방선거에서는 2014년 9월부터 홍콩 민주화 시위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친중노선을 펼쳐온 마잉주 정부에 대한 불만감이 가중된 결과, 민진당이 6대 직할시 중 신베이 시장을 제외한 5곳을 건지는 대승을 기록했다.[8] 거기에다 신베이 시장 선거도 국민당 후보와 접전을 벌이며 선전했다. 시장과 현장 선거에서도 선전을 거두어 16곳 가운데 9곳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었고, 특히 펑후 현장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2.1. 당의 역대 대표

  • 1대 장펑젠(江鵬堅)(재임:1986.11.28-1987.11.10): 가오슝 사건의 변호인. 민진당의 결성 멤버.

  • 2대 야오자원(姚嘉文)(재임:1987.11.10-1988.10.30): 가오슝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1987년 석방. 천수이볜 집권기에 고시원 원장 재임.

  • 3~4대 황신제(黃信介)(재임:1988.10.30-1991.10.13): 가오슝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1987년 석방. 당대표 재임시에 총통직선제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 1990년 6월에는 "민주 대헌장 초안", 1991년 8월에 "대만 헌법 초안"을 발표.

  • 5대 쉬신량(許信良)(재임:1991.10.13-1993.12.4): 가오슝 사건을 주도한 잡지 메이리다오의 사장. 가오슝 사건으로 체포를 피해 1979년 미국으로 망명후 1989년 귀국. 이후 타오위안현의 현장을 지냈다. 1999년 민진당을 탈당해 총통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천수이볜 집권기간에는 천수이볜과 대립한 나머지 국민당편을 들었던 적이 있었을 정도.

  • 6대 스밍더(施明德)(재임:1994.5.1-1996.3.27): 1963년 반란모의로 체포되어 15년을 복역후 다시 1979년 가오슝 사건으로 10년을 복역했다. 대만독립 노선을 약화시켰다가 국민당의 리덩후이에게 총통선거에서 패배하여 사임. 이후 2000년에 민진당을 탈당했고 천수이볜 사임 100만 국민 운동의 총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 7대 쉬신량(許信良)(재임:1996.6.15-1998.7.18): 당대표 재임중 원전 반대 연좌농성 주도.

  • 8대 린이슝(林義雄)(재임:1998.7.18-2000.4.20): 변호사 출신. 가오슝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1984년에 석방. 옥중에서 가족이 의문의 피살을 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린이슝 일가 피살 사건) 당대표 재임시 "대만전도결의문"을 발표했고 천수이볜이 총통에 당선. 그러나 2006년에 탈당했다.

  • 9대 셰창팅(謝長廷)(재임:2000.4.20-2000.5.20): 가오슝 사건의 변호인. 민진당의 창립 멤버. 가오슝 시장을 거쳐 천수이볜에 의해 행정원장으로 취임. 민진당 출신으로는 최초의 행정원장 취임이었다. 2008년 총통선거 후보로 나섰으나 마잉주에게 패배했다.

  • 10~11대 천수이볜(陳水扁)(재임:2000.5.20-2004.12.11): 가오슝 사건의 변호인. 민진당의 창립멤버. 타이페이 시장을 거쳐 민진당 최초의 총통 재임.

  • 쑤전창(蘇貞昌)(재임:2005.1.15-2005.12.3): 당주석 재직 중 공개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을 정도로 친일적인 인물.

  • 여우시쿤(游錫堃)(재임:2006.1.15-2007.9.21)

  • 천수이볜(陳水扁)(재임:2007.10.15-2008.1.12)

  • 제14대 쑤전창(蘇貞昌):(재임 2012.5.30-2014. 5.26)

  • 제12,13,15대 차이잉원(蔡英文):(재임 2008.5.20-2012.2.29, 2014.5.27~): 리덩후이 총통하에서 최초로 대만인 출신 행정원 대륙위원회 위원 재임. 천수이볜 총통하에서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위원. 2004년 민진당 입당. 행정원 부원장 재임. 2012년 총통선거에서 후보로 나섰다가 마잉주에게 패배. 2014년 5월 다시 당대표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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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혹은 가오슝 사건이라고도 불리며 당시 정부는 가오슝 폭력사건 반란안이라고 불렀다.
  • [2] 스밍더는 무기징역에 황신제는 14년, 그 외 인물들은 12년형.
  • [3] 이는 국민당이 대만세력과 대륙세력간의 갈등으로 두개의 정당(국민당과 신당)으로 분당되고 이에 따라 국민당내에서 리덩후이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바람에 더 이상 대만의 독립이라는 의제 하나만으로 선거에서 이기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 [4] 총통 퇴임 후 천수이볜이 어떤 상황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헛웃음이 나오겠지만, 타이페이 시장 시절의 천수이볜은 분명히 청렴한 정치인이었다. 실제로 임기 4년동안 불법 도박장/매춘업소/퇴폐 미용실 등의 어두운 뒷골목을 그야말로 싹 쓸어버렸으며, 이 과정에서 뇌물 제의도 들어오고 심지어는 그들의 뒤를 봐주던 조폭들의 위협도 빗발쳤지만 천수이볜 시장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밀어붙였다. 너네 민주화 운동하다가 감옥에 끌려가보고 주변 사람까지 테러당해봤어? 안 겪어봤으면 깝치지 말어! 그래서 천수이볜의 이미지가 좋았던 것이며, 1998년의 낙선을 놓고 뒷골목 일당과 국민당의 내통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음모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5] 다만 이는 다소 미묘한데, 해당 인물들은 죄다 대만 독립 지지 성향이었기 때문. 전임자인 리덩후이 역시 마찬가지 성향으로 12년간의 집권 기간동안 자신의 계파 인사들을 곳곳에 심어놓았고 천수이볜 정권하에서도 성향이 사실상 같아서 그대로 간 것이다. 실제로 2012년 총통선거 때 민진당 후보로 나섰던 차이잉원 역시 천수이볜 정권 초반까지만 해도 국민당 소속이었다.
  • [6] 다만 여론조사 기관의 조사로는 천수이볜 저격사건은 딱히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 [7] 다만 민진당의 의석이 확준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입법의원 선거제도를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꾸면서 입법의원 의석을 절반가까이 감축(225명->113명)한 영향도 있다. 그래도 의석비율로 따지면 절반 가까이 줄어든 셈이니 도저히 실드가 불가능한 수준이지만
  • [8] 타이베이 시장은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었으나 그 당선인이 천수이볜을 공개적으로 지지해온 대만대 의대 외과 교수 커원저(柯文哲). 게다가 민진당은 자당 후보의 지지율이 낮게 나오자 아예 공천을 철회하고 커원저를 지지한지라 사실상 민진당의 승리나 마찬가지인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