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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코 황후

last modified: 2019-04-11 17:45:31 Contributors

美智子皇后


아키히토 덴노의 황후. 미혼 시절의 이름은 쇼다 미치코(正田美智子). 1934년 10월 20일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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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월, 코후리소데(小振袖)[1]를 입고 집에서 포즈를 취한 미치코. 미치코의 친정아버지는 독일유학한 경험이 있어, 그 옛날에 집 또한 벽난로와 피아노 등을 들여놓고 서양식 저택으로 꾸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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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0월, 만 37세 생일을 며칠 앞둔 미치코 황태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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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된 미치코 황후.

Contents

1. 결혼 전
2. 아키히토 황태자와의 만남과 결혼
3. 결혼 과정의 진실
4. 평민 출신 황태자비에 대한 반발
5. 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5.1. 장갑 사건
5.2. 이세신궁 사건
5.3. 시숙부와 시숙모로부터 부녀(父女)가 당한 모욕
5.4. 창문 사건
5.5. 토카 악당 사건
5.6. 공항 사건
5.7. 종교 문제
5.8. 의상 사건
5.9. 황후가 된 뒤에도
6. 평민 출신 황태자비의 파격
7. 아키히토 덴노의 퇴위
8. 자녀
9. 가해자가 된 피해자??
9.1.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
9.2. 작은며느리 키코 비

1. 결혼 전

친가인 쇼다 가문은 닛신(日淸) 제분[2]이라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재벌가이며,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백작 가문으로 화족이다. 아버지는 히데사부로(英三郞), 어머니는 후미코(富美子), 형제로는 오빠 이와오(嚴), 여동생 안자이 에미코(安西惠美子), 남동생 오사무(修)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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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 친정 가족들과 함께.

가톨릭 집안이어서인지, 가톨릭계 학교인 후타바(雙葉) 여학원[3](초등학교)과 세이신(聖心) 여학원(중학교, 고등학교, 대학)[4] 을 졸업했다. 미치코는 미모가 빼어났고, 공부와 운동 등 다방면에서 뛰어났으며, 대학 시절에는 학생회장까지 역임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동경을 한몸에 받았다. 1957년 3월에는 세이신 여자대학 영문과수석으로 졸업하며 졸업생 대표로 연설도 했다. 졸업 후 미치코는 대학원에도 진학하고 싶었으나, 양친의 뜻에 따라 신부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쇼다 미치코는 장래가 기대되는 규수였다. 마치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오가사와라 사치코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2. 아키히토 황태자와의 만남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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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하던 당시. 아키히토 황태자가 은근 나이 들어보인다.

세이신 여대를 졸업한 해, 미치코는 가루이자와(軽井沢)에서 열린 테니스 시합에 참가했다가 아키히토 황태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지만, 전통에 따르면 그동안 황실의 신붓감은 황족 내지는 화족. 게다가 쇼다 가문에서는 이미 미치코의 신랑감으로 어느 법조계 청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쇼다 가문은 황태자의 청혼을 정중하게 거절하며, 몇 달 동안 미치코를 미국유럽으로 여행보냈다. 1958년 10월 20일, 미치코는 미국 여행 도중에 만 24세의 생일을 맞았다. 그날 미치코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바라보며 '여기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하며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이렇게 쇼다 가문도 미치코 본인도 괴로워했으나, 아키히토 황태자의 끈질긴 청혼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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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두고, 친정어머니 후미코와 함께. 후미코의 근심스러운 표정이, 미치코의 앞날을 예고하는 것 같다. 화족 가문 출신인 후미코는, '그들'의 세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미치코는 몇 달 동안 황실의 일원이 되는 데 필요한 교육[6]을 받았다. 그리고 혼수. "결혼 비용을 여행하는데 다 써버렸어요. 가방 하나만 들고 가더라도 저를 받아주실 수 있다면…"이라는 미치코의 말에 아키히토 황태자가 "OK"라고 한 것과 달리, 쇼다 가문은 억지로 딸을 시집보내면서 어마어마한 혼수까지 준비해야 했다. 무려 6t 트럭 3대 분량으로, 당시 금액으로 약 3,000만 엔이며 현재 시세로는 약 3억 엔. 재벌가의 딸이 아니었다면, 기둥 뿌리를 뽑아도 모자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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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월 14일, 결혼을 앞두고 황실에 인사드리러 궁성을 방문한 미치코와 친정 부모. 소매가 땅에 닿을 듯 치렁치렁한 후리소데를 입은 미치코와, 짧은 소매의 토메소데를 입은 후미코가 대조된다. 미치코의 키는 161cm로 당시 일본 여성치고는 굉장히 큰 키였으나[7], 미치코보다 옛날 사람인 히데사부로와 후미코의 키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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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가는 날 아침, 여동생 에미코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미치코. 에미코는 언니 미치코보다 더 키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미치코가 다리를 약간 구부리고 있긴 하지만. 당시 일본 여성치고는 거인이었을 듯.

1959년 4월 10일, 결혼식을 올렸다. 평민 출신의 미치코가 황태자비가 된다 하여 미치 붐(ミッチーㆍブーム)이 크게 일었으며, 두 사람이 만난 계기가 된 테니스 또한 크게 유행했으며,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결혼식을 보려는 사람들 때문에 흑백 텔레비전이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3. 결혼 과정의 진실

세간에는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가 그저 '우연히' 테니스 코트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되었다는 식으로만, 그저 아름답고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이기만 한 것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과정에는 좀 더 복잡한 사정과 치밀한 계획이 뒷이야기로 숨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일본은 많은 변화와 혼란을 겪었고, 이는 황실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쇼 덴노의 직계들을 제외한 수많은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신적강하로 인해 평민으로 전락했고, 신으로 숭배되어 오던 덴노 일가는 인간 선언을 했으며, 황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잃고 '상징'으로 전락했다. 따라서 황실이 폐지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들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야만 했다.

미치코가 등장하기 이전, 아키히토 황태자의 신붓감 후보로는 기타시라카와 하츠코(北白川肇子)[8]라는 규수가 거론되고 있었다. 하츠코는 1939년 출생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어 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방계 황족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北白川宮永久) 왕, 어머니는 화족 출신인 도쿠가와 사치코(德川祥子), 할머니는 메이지 덴노의 7녀인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내친왕이었다. 즉 철저하게 황족&화족의 혈통으로 태어나 전통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난 구시대적인 규수였다. 새롭게 바뀌어야 할 황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규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개혁파 인사들은 일류 여자대학교의 우등생들을 중심으로, 하츠코와 반대되는 유형의 규수들을 은밀하게 물색했다. 그 가운데 미치코도 있었던 것이다. 개혁파 인사들은 유복한 평민 가문 출신이며, 서구적이고 현대적이며, 아름답고 총명한 미치코를 새로운 시대의 황태자비에 적합한 인물로 꼽았고,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여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가 테니스 코트에서 만나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다. 이후 이어진 두 사람의 연애결혼과, 황실 입성 후 미치코 황태자비가 보여 준 파격적인 면모들을 생각하면, 개혁파 인사들의 작전은 대성공한 셈이다.

4. 평민 출신 황태자비에 대한 반발

평민 출신의 신붓감에 대한 옛 황족들과 화족들의 반발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긴 자신들은 신적강하로 인해 수백년간 이어내려져 오던 신분을 잃고 하루아침에 평민이 되었는데, 반대로 자신들의 아래로 여기던 평민이 황족, 그것도 장래의 국모가 된다니, 당연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시아버지 쇼와 덴노는 "이제 황실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며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를 감쌌지만,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는 미치코를 몹시 미워하여, 두 아랫동서 지치부노미야 세츠코(秩父宮勢津子) 비[9],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高松宮喜久子) 비[10]와 함께 반대운동을 펼쳤다. 또한 다이쇼 덴노의 사촌 여동생 야나기하라 뱌쿠렌(柳原白蓮),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11],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12]옛 황족들과 화족들이 똘똘 뭉쳐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미치코는 황실로 시집을 왔지만, 그 후로도 그들은 미치코 황태자비에게 집요한 학대를 가하였다.

그나마 첫째 시누이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남동생 부부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를 신문에 게재하기도 하고, 미치코 황태자비를 친정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파티를 열어주는 등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게코는 미치코 황태자비가 황실로 시집온 지 2년 뒤인 1961년에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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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날. 남편 아키히토 황태자, 시아버지 쇼와 덴노,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와 함께. 어서 와, 시월드는 처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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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컬러 버전도 존재한다. 1959년이니 화질은 기대하지 말자.

5. 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5.1. 장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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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월, 약혼 발표 기자회견 때의 일이다. 쇼다 가문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황실로 시집가는 미치코에게 무슨 옷을 입혀 내보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사숙고하여 의상을 골라 미치코에게 입힌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황실 직원에게 보내어 문의했다. "이 차림으로 괜찮을까요??" 직원은 "짧은 장갑이 예의에 어긋납니다."라고 했지만 평민인 쇼다 가문은 황실에서나 쓰는 긴 장갑을 구할 수 없었고, 결국 직원이 보내 준 긴 장갑을 끼고 미치코는 무사히 기자회견을 마쳤다. (오른쪽 사진)

그런데 어째서인지 처음에 직원에게 보낸 왼쪽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옛 황족들과 화족들은 바리바리 쇼다 일가에 전화를 걸어 불같이 항의했다. "이래서 평민은 안 된다!!"라는 식으로. 쇼다 가문은 해명하지도 못하고 일일이 정중하게 사과하느라 혼이 났다. 이 사연은 30여년 후, 친정어머니 후미코에 의해 진상이 밝혀진 것이었다. 세 외손들이 딸을 오해할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5.2. 이세신궁 사건

결혼식 전, 미치코는 아키히토 황태자와 함께 이세신궁[13]에 참배하러 갔다가 이세신궁의 최고 제관(祭官)인 기타시라카와 후사코로부터 홀대를 당했다. 후사코는 바로 미치코에게 밀려 황태자비 후보에서 탈락한 하츠코의 할머니이다. 그러니 자신의 손녀를 제치고 황태자비가 된 미치코가, 후사코의 눈에 곱게 비칠 리 없었던 것이다.

5.3. 시숙부와 시숙모로부터 부녀(父女)가 당한 모욕

본인만이 아닌 친정아버지도 모욕을 당했다. 히데사부로는 대기업 회장에 처가 소에지마 가문이 옛 화족인 만큼, 황족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큰딸을 황실에 시집보낸 후였다. 히데사부로는 큰사위 아키히토 황태자의 숙부인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14]을 만나자 정중하게 인사했지만, 이전까지 인사를 잘 받아주던 노부히토 친왕은 히데사부로를 싹 무시했다. 한 마디로 평민과 인척 관계가 되어 불쾌하다는 시위.

또한 미치코 황태자비가 2번째 임신을 했다가 유산했을 때, 노부히토 친왕의 아내 키쿠코 비는 '황실의 후사' 운운하며 미치코 황태자비를 비난하기도 했다. 정작 키쿠코 비는 임신조차 한 번도 하지 못했음[15]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나마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는 형님 나가코 황후나 마츠다이라 노부코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마음이 누그러져, 미치코 황태자비와 친하게 지냈다. 특히 자녀를 낳지 못한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는 미치코 황태자비의 아이들을 손주처럼 귀여워했다. 키쿠코 비는 후미히토 친왕에게 서예[16]를 가르치기도 했고,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의 약혼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5.4. 창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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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앉아있는 심술궂은 표정의 여성은, 당시 동궁(東宮)의 궁녀장(宮女長)인 마키노 쥰코(牧野純子)[17]이다.

1960년 2월 23일, 미치코 황태자비는 궁내청 병원에서 첫아이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을 낳았다. 병원에서 퇴원하여 자동차를 타고 궁으로 돌아가는 길, 기자들이 갓난아기의 사진을 찍으려고 몰려들었다. 미치코 황태자비는 그들을 배려하여 창문을 살짝 열어주었는데, 이 일로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 및 여러 사람들로부터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아기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창문을 열었느냐고!! 안 열어주었으면 또 그거대로 혼났을 것 같은데

5.5. 토카 악당 사건

덴노가 거처하는 궁전인 고쿄에는, 나가코 황후의 환갑을 기념하여 지은 '토카 악당(桃華樂堂)'이라는 건물이 있다. 오페라 하우스 같은 시설인데, 여기에 황족 및 화족들이 초대되었다. 그들은 자신들끼리만 반갑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으며, 미치코 황태자비는 못 본 것처럼,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시했다고. 레알 막장 드라마네

5.6. 공항 사건

시집 온 이래 최대이자 최악의 모욕. 1976년,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미국 순방을 떠날 때였다. 황족들은 모두 공항까지 따라 나가서 인사를 했다. 그런데 나가코 황후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큰며느리를 싹 무시하고, 옆에 있던 큰아들과만 인사를 나누고 비행기에 올랐다. 문제는 이 장면이 일본 전역에 생중계되고 있었다는 것. 그야말로 전국적으로 개망신!! 일본인들도 말로만 듣던 궁중 이지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사건이었다.

5.7. 종교 문제

미치코 황태자비는 가톨릭계 학교를 졸업했고, 친정도 가톨릭 집안이라고 한다. 시동생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은 그리스도교에도 관심을 가져 형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고[18], 미치코 황태자비는 (당연히)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이것을 시어른들에게 들켜, 미치코 황태자비만 또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고.

5.8. 의상 사건

정말 유치한 일인데, 공식 석상이나 행사에 참석할 때면 미치코 황태자비만 쏙 빼놓고 자신들끼리만 무슨 옷을 입을지 미리 짰다고도 한다. 옛날 사진들을 보면 미치코 황태자비 혼자서만 다른 색상의 옷을 입고 나오거나, 다른 사람들은 기모노를 입었는데 미치코 황태자비만 양장을 입고 나온 모습들이 있다. 혼자만 튀어 보여서 무안해지게 하려는 고도의 이지메.

5.9. 황후가 된 뒤에도

1989년 시아버지 쇼와 덴노가 죽고 남편 아키히토 황태자가 125대 덴노로 즉위하자, 미치코 황태자비도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나가코 태후는 꼬장꼬장 정정하게 살아서 계속 미치코 황후를 괴롭혔고, 원래 나쁜 놈은 오래 사는 법. 저승사자도 잡아가기를 꺼려할 정도로 악독하면 오래 산다고 한다. 나가코 태후와 함께 하는 세력들은 그 후로도 언론 등을 동원하여 미치코 황후를 향해 갖가지 말도 안 되는 비난들을 퍼부었다.

"미치코 황후 때문에 쇼와 덴노가 생전에 아끼던 궁성의 숲이 파괴되었다." "연회 등 각종 행사도 미치코 황후의 승낙이 없으면 진행되지 못한다." "한밤중에도 과일을 깎으라거나 라면을 끓이라는 주문을 하기 때문에, 시종들이 쉴 틈이 없다."는 등등. 결국 미치코 황후는 만 59세 생일인 1993년 10월 20일에 쓰러져 실어증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이듬해인 1994년에야 회복. 2000년 6월 16일나가코 태후가 죽은 후에야 미치코 황후의 시집살이는 끝났다.

왕족, 귀족이라는 사람들이 대단히 밴댕이 소갈딱지에다 쪼잔해 보인다. 무슨 애들도 아니고(…)

6. 평민 출신 황태자비의 파격

미치코 황태자비는 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하면서도, 황실 생활의 여러 면에서 천년 동안 전해져 온 전통을 깨고 파격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가정적',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궁성 내의 산전(産殿) 대신에 궁내청 병원에서 출산했고,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의 품에서 떼어내 신하들에게 양육을 맡기는 전통을 깨고 2남 1녀를 직접 자신의 품에서 젖을 먹여 길렀다.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도 직접 수유를 했지만 유모도 두었다. 하지만 미치코 황태자비는 아예 유모를 두지 않고, 직접 수유를 하다가 모유가 부족하면 분유를 먹였다고. 또한 가족들을 위해 직접 요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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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동궁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손수 요리를 하는 미치코 황태자비.

미치코 황태자비는 자녀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Benjamin Spock 박사[19]의 저서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를 원서로 읽으며 육아에 대해 공부하여 나름의 육아 지침을 세웠다. 공무(公務) 때문에 시종에게 아이를 맡길 때면 이 지침대로 돌보게 했다. 이는 나루 짱[20] 헌법(ナルちゃん憲法)이라고 불리며 많은 일본 부모들의 공감을 샀으며,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훗날 차남 부부가 낳은 두 손녀 마코 공주카코 공주도 '나루 짱 헌법'에 따라 양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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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코 공주와 함께. 사야코 공주가 1969년생이니 1970년대 초반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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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아키히토 황태자와 함께. 곱다.


남편 아키히토 덴노와도 금슬이 좋다고 한다. 아들 나루히토 황태자도 그렇고, 예상보다 애처가들이 많다. 사실 황실에서 시집살이하면서 온갖 푸대접을 받았음에도 남편을 내조했다는 점에서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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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를 통해서 처음 만난 것 때문인지, 지금도 남편 아키히토 덴노와 테니스를 치기도 한다고. 사진만 보면 근처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는 옆집 노부부로 보일 수도 있지만 오산이다.

7. 아키히토 덴노의 퇴위

2016년 8월에 아키히토 덴노가 퇴위 의사를 밝힌 이후로 이와 관련된 논의가 진행되었고, 2017년에 2019년 4월 30일에 아키히토 덴노가 퇴위하고 5월 1일에 나루히토 황태자가 새 덴노로 즉위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아키히토 덴노가 퇴위한 후에 아키히토 덴노는 상황, 미치코 황후는 상황후(上皇后)라 불리기로 결정되었다.

8. 자녀

이제 일본에 화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2남 1녀 모두 일반인과 결혼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일본의 화족들은 신적강하로 공식적으로 지위가 무효화되었기에, 현대 일본에 화족은 사실상 없다. 그런데도 1959년 쇼다 미치코가 황실로 시집올 때 옛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그 난리를 떨었으니,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항간에 차남과 장녀는 미치코 황후의 친자가 아니라, 숨겨둔 의 자녀라는 소문도 있다.

9.1.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

무엇보다 아들을 낳지 못해서 사이가 좋지 않다. 황태자 부부는 결혼 후 오랫동안 아기를 낳지 못한 반면, 먼저 결혼한 차남 부부에게서는 금방 두 가 태어나 황실과 국민들로부터 갖은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황태자 부부는 점점 가족들과의 자리가 어색하고 불편해졌고, 결혼한 지 8년 만에야 어렵게 아기를 낳았지만 딸이었다. 그래서 황태자 부부의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여성 덴노로 올리자는 논의도 활발했지만 5년 후 차남 부부가 아들을 낳는 바람에(…) 망했어요

이 외에도, 오랜 기간 외국에서 성장하여 서구적이고 현대적이며 활달한 마사코 황태자비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일본 황실과 맞지 않는다고도 한다. 그녀는 왕실 외교, 국제교류, 해외 순방 등등 외교관이었던 전직을 살려 활동하고 싶었으나, 시부모는 아들 출산에 전념할 것만을 강권하였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마사코 황태자비의 방문을 요청해도 궁내청에서는 나루히토 황태자만 보내거나, 차남 부부 내지는 사야코 공주를 대신 보냈다고 한다.

또한 마사코 황태자비는 솔직하며 아첨하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아랫동서 키코 비에 비해 시부모 및 시가 식구들에게 사근사근하고 애교 있게 굴지 못한다고 한다. 아키히토 덴노의 가쿠슈인 동창으로 절친인 하시모토 아키라(橋本明)[21]는 이에 대하여 "마사코 황태자비키코 비처럼 약삭빠르고 상냥하며 시부모에게 순종했다면, 가족 문제는 유혈사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9.2. 작은며느리 키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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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며느리 키코 비와 함께.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보다 시부모와 수월하게 지낸다고 한다. 남편 후미히토 친왕, 시누이 구로다 사야코와 같은 학교인 가쿠슈인을 다닌 덕분에 시집오기 전부터 황실 가족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친하게 지냈고, 시집와서도 적응이 빨랐던 듯. 미치코 황후는 그녀를 '키코 짱(ちゃん)'이라 부르며 귀여워했고, 마코 공주카코 공주임신하고 출산할 때도 잘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차남 부부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자주 덴노 부부를 방문하면서 더욱 친밀해졌다. 게다가 결국에는 황실 역사상 40여 년 만의 아들까지 낳았으니…

그러나 시어머니며느리의 사이가 마냥 화기애애할 수만은 없는지, 키코 비와 친정어머니 가와시마 카즈요(川嶋和代)가 결혼 전 미치코 황후에게 인사하는 자리에서 꾸중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히사히토 친왕의 출산 역시, (차남 내외도 야망이 있었던 것 같지만) 일단은 덴노 부부가 강요한 거라고 한다. 2003년 6월, 궁내청 장관 유아사 토시오(湯淺利夫)는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황태자 부부가 둘째를 낳기 바랍니다."라고 말한 바 있고, 같은 해 12월의 기자회견에서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황실의 번창을 생각한다면 차남 부부가 셋째를 낳기 바랍니다. 두 공주와의 나이 차이를 고려한다면 이제 빨리 셋째를 낳아야 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과연 누구의 의견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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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후리소데 중에서 가장 소매가 짧은 것인데, 소매 길이가 85cm 정도이다.
  • [2] 창업주는 할아버지인 쇼다 데이이치로(正田貞一郞). 이후 경영은 아버지 히데사부로를 거쳐 지금은 남동생 오사무가 맡고 있다.
  • [3]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후타바 여학원을 다녔고, 마사코 황태자비의 친정어머니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도 후타바 여학원을 졸업했다.
  • [4] 세이신 여학원은 옛 구니노미야 저택 부지에 세워졌다. 즉 시어머니 고준황후가 어린 시절을 보낸 터에서, 며느리 미치코 황후가 학창시절을 보낸 것. 이 이야기만 들으면 '고부 간의 아름다운 인연'이라는 착각에 빠지지만…
  • [5] 사실 말이 '청혼'이지, 황실의 청혼을 감히 끝까지 거부할 수 없다. 미치코 황후의 아버지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이며 마사코 황태자비의 아버지는 고위 외교관이어서, 청혼을 계속 거부하기에도 참 난처한 입장이었다. 실제 황실의 청혼을 연이어 거절했을 때 미치코 황후의 친정 쇼다 가문에도, 마사코 황태자비의 친정 오와다 가문에도, 감히 황족의 청혼을 거절한다며 편지전화 등으로 우익들의 괴롭힘이 연달아 이어졌다. 억지로 시집온 후의 삶은(…) 단 키코 비는 시어머니ㆍ형님과 반대로, 자신이 원하여 황실로 시집왔다고 한다.
  • [6] 황실의 비(妃)가 되는 여성들이 받는 교육. 역대 황실 신붓감들 중에서 이 교육을 제일 어려워한 사람은 마사코 황태자비였다. 오랜 기간 외국, 그것도 다신교가 아닌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성장한 오와다 마사코신토 등 일본의 전통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영어로 된 책으로 수업을 받기도 했다. 교육과정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가 받은 것보다 훨씬 단축된 것이었는데, 당시로서는 노처녀인 오와다 마사코를 한시라도 빨리 결혼시켜 후손을 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 [7] 1950~60년대 초기 미스코리아의 키가 162cm 정도였다. 2010년대의 미스코리아의 키는 대략 175cm 정도 된다. 그때도 미스코리아에서는 키가 큰 여성을 선호했다. 1970년대 아시아 패션 모델들이 남성 180cm 전후, 여성 165cm 전후를 키가 커서 옷발이 잘 받는다고 했다.
  • [8] 황태자비 후보에서 탈락한 후, 나가코 황후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 [9] 다이쇼 덴노의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秩父宮雍仁) 친왕의 아내.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손녀이며, 외가는 나베시마(鍋島) 가문.
  • [10] 다이쇼 덴노의 3남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의 아내.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로, 외가는 방계 황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이다.
  • [11]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당시 일기에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고 썼을 정도였다.
  • [12] 가쿠슈인 동창회장이자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 이츠코의 여동생이니 이방자 비에게는 이모가 된다. 따라서 세츠코 비와 이방자 비는 이종사촌 자매이다. 노부코는 황실의 사돈이라는 배경으로 궁정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반대운동의 중심에서 우두머리로 군림했다.
  • [13] 일본 황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를 모신 신궁.
  • [14] 다이쇼 덴노의 3남. 다만 남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과 함께 일본의 전쟁을 반대한 사람이라, 일본군/인물에는 정상인으로 분류되어 있다.
  • [15] 이는 노부히토 친왕이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ang?
  • [16] 키쿠코 비의 외가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은 서예를 가업으로 삼아,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서예 기법이 있었다. 키쿠코 비는 어머니 미에코(實枝子)로부터 이를 배웠다.
  • [17] 마츠다이라 노부코에 의해 동궁 궁녀장으로 추천된 인물이다. 미치코 황태자비를 몹시 미워한 노부코가 손수 추천한 인물이라면, 더 이상 설명이 必要韓紙?? 마키노 쥰코는 미치코 황태자비의 일거수 일투족을 나가코 황후에게 고자질해서 이간질을 부추겼다거나, 나루히토 친왕이 어렸을 때에도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해서 황태자 부부와 나루히토 친왕으로부터 악마 아줌마로 불렸다는 등, 좋지 않은 소문이 많다. 다만 유독 저 사진에서 심술궂게 찍힌 건지, 저때 찍힌 다른 사진들을 보면 그냥 평범한 표정이다.
  • [18] 마사히토 친왕은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한 적도 있다고 한다. 참고로 작은아들 마사히토 친왕이 결혼할 때가 되자, 나가코 황후는 옛 화족 가문의 딸 츠가루 하나코(津輕華子)를 직접 작은며느리로 골랐다. 아마 두 며느리를 퍽 차별대우하지 않았을까. 참고로 마사히토 친왕과 하나코 비는 자녀를 낳지 못했다.
  • [19] 미국소아과 의사
  • [20] 맏이 나루히토 황태자의 이름에서 딴 것.
  • [21] 긴부라사건(銀ブラ事件)의 주인공. 가쿠슈인 고등과 3학년이던 1952년 초에 아키히토 황태자와 함께 시종들 몰래 긴자로 놀러 나갔다가, 잠시지만 황태자 실종사건이 일어났다. 들킨 뒤에 동궁대부(東宮大夫)와 경찰로부터 엄청나게 깨진 것은 안 봐도 비디오. 하시모토 류타로 前 총리는 그의 사촌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