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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

last modified: 2015-04-12 14:04:48 Contributors


본명 : 히라오카 키미타케
(한자명: 三島由紀夫). 일본소설가, 극작가, 보수주의 이론가.

Contents

1. 개요
2. 미시마 사건
3. 2명의 미시마
4.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5. 정치 사상
6. 일화
7. 기타
8. 한국에서 그의 입지
9. 작품 목록


1. 개요

본명은 히라오카 키미다케(平岡 公威).

그의 문학적 은 <설국>으로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와바타 야스나리. 그 또한 제자 미시마 유키오가 자살한 충격을 못이겨 자살하였다.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엘리트 출신.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행정고시에 합격한 셈이다.[1] 그러나 문학에 더욱 심취하여, 당시 일본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가와바타를 사사(事師)하고 "가면의 고백"으로 등단했다. 이후 전후문학의 총아로 왕성하게 활동, 소설과 극본 외에도 방송이나 잡지, 영화 등에도 자주 출연하고 대중적 주목을 받게 된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라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받는다.

미시마는 노벨 문학상 후보자로 입에 오르내리던 1960년대에 오에 겐자부로를 가리켜 "내가 상을 받은 다음에 노벨 문학상을 받을 사람은 오에 뿐이다"라고 일갈했다. 정작 본인은 수상하지 못했지만, 오에가 199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예언은 절반 정도 들어맞았다.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인 덴노주의자여서 기존의 우익 정치세력한데도 가차없는 비판을 퍼부었고[2] 좌파 학생운동의 전성기에도 매스컴을 통해 학생들을 마구 질타(?)하기도 했다. 6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 국군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자위대 젊은 장교단, 정부 신진관료들과도 어울렸고 자위대에 체험입대, 공수부대 훈련을 받거나 F-104전투기를 타는 등의 기행을 벌였고 한국에도 수 차례 비공식적으로 와서 휴전선을 시찰하거나 무장간첩들의 침투 루트 등을 탐방했다고(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중엔 예비군공비 수색 작전을 참관하기도 했다고 한다.).[3] 그러한 경위로 나중에는 그와 뜻을 같이 둔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극우 사설 부대를 만들기도 했다. 이름은 다테노카이(楯の會, 방패회). 천왕의 방패란 의미다.

이후 자위대의 국군화, 즉 일본군화를 주장하며 육상자위대 동부방면대 총감[4]인질로 잡고 농성하면서 '나와 함께 천하를 바꾸자. 궐기하라 자위대'라고 외친 일면 미시마 사건을 일으켰으나 오히려 자위대원들의 야유와 비난을 받고나서 "난 실망했다."면서 할복 자살하였다.


1969년 전공투들과 1대 몇백명으로 대담도 했었다고 한다. 그는 "덴노만 인정하면 너희와 함께 가겠다."라고 나름의 넓은 배포(?!)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전공투들이 그럴 리가 있나. 당시 점거 중이던 전공투들과 벌인 대담은 일본의 극좌 vs 극우를 비교하는 자료로 등장할 때가 잦다. 특이한 건 서로가 일본을 걱정해 일어난 무리들이란 인식을 같이 해, '님 아까운데 이리 오삼', '아니 니들이 이리 오면 안되냐?' 같은 내용이 많았다. 역시 막장매치 극과 극은 통한다 끼리끼리 잘 논다

이 대담집은 한국에서도 '미시마 유키오 對 전공투'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나왔다. 큰 서점이나 도서관을 뒤져보면 꽤 나온다.

이런 인간이면서도, 정작 군대안 갔다. 2차대전때 징병 소집장을 받고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젊은 군대 의사가 청진을 할때 폐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결핵으로 오진을 하고 군 입대에 부적합 판정을 내렸다. 문제는 그걸 알고서도 묵인해서...병역비리의 대표적인 예이다. 집안 빽을 이용해 병역을 회피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2. 미시마 사건

mishima.jpg
[JPG image (Unknown)]

자위대원들에게 연설을 하는 장면

그리고 대담(을 빙자한 서로간의 회유전) 1년 후 1970년 11월 25일, 그는 스스로 배를 갈랐다.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는 방패회 멤버들과 함께 도쿄에 있는 자위대 사령부에 난입한다. 자위대 간부를 일본도로 위협하여 인질로 잡은 뒤, 그들은 인질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자위대 병사들을 모아달라는 요구를 한다. 요구대로 병사들이 모이자, 그는 난간 위로 올라가서 건물 앞의 병사들을 향해 쿠데타로 과거 일본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천황제와 일본제국을 부활시키자고 선동한다. 이 황당한 요구에 자위대 병사들은 미쳤다며 그저 야유와 냉소와 모욕으로 응답할 뿐이었다. 연설을 들어보면 자위대원들이 잇달아 "바카야로!"하고 소리지를 정도. 참고로 미시마 유키오랑 알고지내던 전직 일본군 장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바로 무다구치 렌야의 부관을 역임했다. 미시마가 이 부관에게 쿠데타 계획을 말하자 그는 "무다구치 렌야 이후로 이렇게 정신 나간 자식은 처음이다."라고 황당해했다.

몇 분의 연설을 마친 뒤 미시마는 건물 안으로 되돌아가 할복을 감행한다. 가이샤쿠닌(介錯人, 할복할 때 칼로 목을 쳐주는 사람)의 역할을 맡은 것은 모리타 마사가쓰(森田必勝), 하지만 다섯 번을 내리쳐도 미시마의 목은 떨어지지 않았다.[5] 의무 수행에 실패한 모리타가 고가 히로야스(古賀浩晴)에게 칼을 넘겨준다. 그의 손에 미시마의 목이 떨어지자, 모리타 역시 미시마의 뒤를 따라 제 배를 가른다. 고가가 다시 한 번 할복자의 목을 베어 퍼포먼스를 끝낸다.

처음엔 여러가지 매트릭스를 짜서 멋지게 할복하려고 했지만 막상 해보니까 아파서 쩔쩔 매다 죽었다. 너무 아파 참다못한 미시마는 를 깨물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할복을 할때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칼로 목을 쳐 주는게 관습[6]이라 동성의 연인이란 말이 있는 모리타 마사가츠가 이 일을 맡았는데, 이 모리타가 칼을 잡아본 적이 없는 초보라서[7] 여러 번 내리쳤으나 실패, 결국 검도 유단자였던 고가 히로야쓰가 목을 내리쳐서 비로소 죽을 수 있었다. 흠좀무. 그리고 모리타도 할복자살하고 뒤처리를 고가가 하였다. 이 자살극 자체는 약 1년 전부터 준비해 왔던 듯.

마지막 육성 연설과 기타 자세한 사항은 여기

미시마가 자살한 사실이 당시 일본 천왕이었던 히로히토 역시 미시마가 사건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 불쾌해했지만,[8] 평소 자신을 찬양해 왔던 사실을 인지하여 장례 비용을 지원하며 장례식만은 잘 치루어달라고 일본 국민들에게 부탁했을 정도. 하지만 일본 국민들 중에서는 대부분 미시마 같은 정신병자를 싫어했던 탓에 그의 유골함이 도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의 김지하는 "아주까리 신풍"이라는 시를 지어 미시마의 자살을 통렬히 풍자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아주까리 神風 - 三島由紀夫에게
별것 아니여
조선놈 피 먹고 피는 국화꽃이여
빼앗아 간 쇠그릇 녹여버린 일본도란 말이여
뭐가 대단해 너 몰랐더냐
비장처절하고 아암 처절하고말고 처절비장하고
처절한 神風도 별것 아니여
조선놈 아주까리 미친 듯이 퍼먹고 미쳐버린
바람이지, 미쳐버린
네 죽음은 식민지에
주리고 병들어 묶인 채 외치며 불타는 식민지의
죽음들 위에 내리는 비여
역사의 죽음 부르는
옛 군가여 별것 아니여
벌거벗은 女軍이 벌거벗은 갈보들 틈에 우뚝 서
제멋대로 불러대는 미친 미친 군가여

2차 세계대전의 참전용사초재생능력후나사카 히로시와도 미시마가 병약했던 시절에는 친했다고 하지만, 군국주의자가 된 미시마를 굉장히 한심하게 여겼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 양반은 전쟁이란 지옥도를 직접 산전수전으로 겪어봤으니 더 경멸했을 것이다.[9] 흔히 2차대전 당시 폭탄 한발 안 떨어진 지역이 일본 수꼴 동네라고 까는 논리랑 비슷하다.

3. 2명의 미시마

미시마 유키오의 인생은 두 가지로 양분 할 수 있다. 헬스 운동을 시작해서 건강해진 미시마와 헬스를 하기 전 병약했던 미시마. 어릴적에는 허약했으나 지속적이고 열정적인 관리로 몸을 단련해서 근육질 몸매를 만들었다고.

병약한 몸으로 금각사를 쓸 때만 해도 우익적인 성향은 커녕 인간의 내면 자체에만 관심을 두었고, 권력이나 집단은 인간의 섬세한 가치를 단순화, 사물화하여 훼손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다. 이랬던 사람이, 헬스를 시작하고 몸이 건강해지자 초극렬 우익이 돼버렸다. 미시마의 표변이 어찌나 심했던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도대체 어떤게 미시마의 진짜 모습인지 몹시 혼란스러워했다. 건강해진 뒤에는 헬스 운동의 효과를 만병통치약처럼 찬양했는데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 때 미시마가 우울증체조만 해도 낫는다고 코웃음친 것도 이런 이유다.[10] 물론 그럴 리 없다.

4.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그의 유명한 작품들은 병약했던 시절에 썼던 미주의적인 작품들이다. 유명한 게 금각사이다.[11] 그외에도 '파도소리'나 '우국'이 있는데 우국은 자기가 직접 영화로도 만들었다. 우국의 배경은 일본 2.26 쿠데타이다.

일반인들은 그의 최후 때문에 소설들은 과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파도소리'처럼 연애소설도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 및 일본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작품은 좋아하고 높은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사실 평범한 독자 입장에서도 동시대의 오에 겐자부로와 비교하면 미시마의 책이 더 쉽게 읽힌다.

갓 스물을 넘긴 작가가 묘사하는 중년 여성, 노년 남성의 심리와 그 심리를 상징하는 온갖 은유들을 읽으면 문학에 천재가 있긴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

5. 정치 사상

미시마 유키오의 독특한 정치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시마라는 인물의 내면에 대해 살펴봐야할 필요가 있다. 미시마는 전쟁 당시에도 천황을 위해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하지 못한것에 대해 후회스러운 감정을 평생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그의 죽음을 앞당기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미시마가 보기에 전쟁이 끝난 뒤 고속성장 시기에 접어든 일본은, 과거의 전통적인 가치 보다는 소시민적 행복을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고 전쟁 당시의 상황을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던 미시마로서는 그러한 분위기에 대해 불만을 품고 천황을 위해 명예롭게 죽을 수 있던 전쟁 당시의 일본을 부활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가 주장했던 이상적인 일본상=메이지 유신으로 볼 수는 없는게, 미시마가 꿈꾸던 일본은 천황이 군의 통수권을 지니고,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였다는 점이다. 애초에 미시마라는 인물이 자신의 사명을 일본의 역사와 전통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는 사회에서는 문화의 발전이 정체되고, 정권의 필요에 맞게 내용이 변형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었던 듯. 또한 그는 '무사도'의 관점에서 파시즘을 비판했다는 점이 특이한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무사도란 '개개인이 대등한 관계에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대일로 대결하는 것'으로 한 사람의 독재자가 누군가를 강제 수용소에 보내거나 처형을 시키는 짓은 독재자 개인의 위험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비겁하며, 이는 진정한 무사도를 실현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는 일본의 소위 '극우'라 불리우는 정치세력의 주장과는 대립되는 부분이 많아서, 당시의 미시마는 오히려 우익으로부터 극좌라고 까이는 신세였다고(...) 흠좀무

6. 일화

  • 천성적으로 겁이 많았던 미시마는 (주변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전쟁 중에 공습경보가 울리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방공호로 도망쳤다고 한다(…)

  • '게 공포증'이 있었던 미시마는 게 요리만 봐도 정색을 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정작 게 통조림은 맛있게 잘 먹었다고. [12]
  • 그는 토론에는 언제나 일본도를 지참했는데, 토론 중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창백한 안색을 하고 상대의 두상에 칼날을 휘두르는 사나이 였다고 한다.흠좀무 당연히 분위기가 살벌해지니 그와 토론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 극단적인 마마보이였던 그는 젊은 시절 2명의 여성에게 고백을 했다가 차인 가슴아픈(…) 경험이 있는데, 그 이유가 가관인 게, 그토록 농밀한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 차마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 이였다고 한다. 지못미 미시마쨩

  • 하루는 미시마의 친구가 그의 집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미시마의 어머니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자 어머니, 뭐?, 어디? 어디?라고 호들갑을 떨며 남의 눈치도 보지 않고 열심히 다리를 주물렀다고.

  • 병약하던 그가 보디빌딩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 미와 아키히로와 게이바에서 같이 춤을 추던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미시마의 어깨를 만지며, "어머 패드, 패드밖에 없네, 미시마 씨 어디 있나요??"라고 잔인한농담을 던지자 빡돈 미시마가 갑자기 정색하며 "파트너 교체다, 나는 가겠다." 하곤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고.

  • 젊은 시절, 당시 세이신(聖心) 여자대학 영문과 학생이던 쇼다 미치코와 맞선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유키오와 미치코는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유키오는 나중에 일본화가 스기야마 야스시(衫山寧)의 장녀 스기야마 요코(衫山瑤子)와 결혼했다. 그리고 쇼다 미치코는…

  • 할아버지와 아버지 역시 도쿄대 법대에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한, 3대가 엘리트 집안이다.

7. 기타

미시마 유키오는 영어 실력이 좋기로도 유명했는데, 그 때문에 외신기자들과 여러 차례 영어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13]. 하지만 1958년에 스스로 '저는 영어회화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인간의 가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항상 역설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영어 이외에도 중국어독일어 역시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그는 몸을 헬스를 통해 근육질로 만든 후 사진집까지 만들었다. 그것도 대부분 훈도시 입고 일본도를 들거나 나무에 매달려 화살을 맞는 사진이 대부분이다. S이자 M인듯 참고로 화살을 맞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포즈를 취하는 사진은 서양에서 수없이 변주된 성 세바스찬 성화의 오마주. 그런데 성 세바스찬은 일종의 BDSM 게이 클리셰로 쓰이는지라 많은 이들이 그가 게이임을 주장한다.

대영박물관에도 일부 사진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당대 미시마 유키오의 신체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던 듯. 키도 160cm를 넘지 못하는 단신에다가,[14][15] 언젠가 일본 여성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적 있었는데, 그 결과가 굉장히 나빴다고 한다. 사실 미시마 유키오 자신도 그렇게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무슨 운동을 해도 뻣뻣하고 어색했다고 하며 신체를 중요시하던 그에겐 이 사실이 큰 컴플렉스로 작용했다고 한다. 근육

영화배우로도 활동해서, 동경대 법학부 선배였던 마스무라 야스조가 연출한 카라카제 야로에서는 찌질이 야쿠자 역으로 출연하여 안좋은 의미로 화제가 되기도 했고, 자신의 소설 을 영화화 할때에는 본인이 출연은 물론 직접 연출까지 했다. 1969년작. 히토키리라는 사무라이 영화에서는 이시하라 유지로와 함께 출연했다.

참고로 게이였다는 추정이 많다. 게이바를 실제로 드나들었는데다가 자신이 동성애 연인이었다는 일본 중견 소설가의 증언도 있었다.

오카마(여장남자)로 유명한 배우 겸 가수인 미와 아키히로(美輪明宏)[16]와도 연인관계였다는 설이 있다. 미시마가 "마루야마(미와 아키히로의 본명)군. 당신에게는 한가지 결점이 있다. 그것은 나에게 반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미시마는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영화 검은 도마뱀에 출연한 적도 있는데, 출연 동기가 '검은 도마뱀'역으로 출연한 미와 아키히로와 키스하고 싶어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미와 아키히로와 무도장에서 춤을 추다가 미와가 그의 팔뚝을 만져보고는 웃으면서 하다고 한마디하자, 버럭 화를 내고는 헬스클럽에서 체미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육체에 대한 컴플렉스를 알 수 있다. 결혼도 하고 살았으니 양성애자인 듯.

1998년 3월 17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미시마 유키오는 작가인 후쿠시마 지로(福島次郞)와 1951년에 처음 만나,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후쿠시마 지로는 문예지인 학계에 실명 소설 <미시마 유키오>를 발표해서, 자신이 미시마와 주고 받은 편지와 동성애에 탐닉했던 일을 고백했다. 1964년 2월, 미시마가 후쿠시마 지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좌익에는 남자의 매력이 없다"라는 후덜덜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에도가와 란포의 '검은 도마뱀'을 각본화하고, 박제로 출연한다.(1968년)

한동안 일본에서는 언급조차 하면 위험한 인물이다. 앞서 쓴 것과 같이 정부 관료, 자위대 간부들과의 관계와 그의 주장 탓에 한동안 자위대내 쿠데타설이 불거질때마다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고 그때마다 일본 정치인들은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하지만 2005년경, 즉 그의 탄생 80주년(그는 45세에 자결했다.)부터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럼에도 우익중에서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자들은 초 우익에 가깝다고 하는 것 같다. 결국 별탈없이 넘어갔다.

그는 다자이 오사무 생존시부터 비판하는 입장에 섰고 그가 자살하자 정면에서 깠다. 그는 다자이 오사무를 향해 그의 우울증은 매일 라디오 체조만 해도 낫는 병이라고 비웃었다. 그런데 정작 자기도 할복. 다자이 사후 그의 제자가 따라 자살했는데 미시마의 사후에는 스승이 자살했다는 것도 묘한 대조를 이룬다.[17] 물론 그 의도와 차원이 다르게 할복이었기에 세계적으로 엄청난 뉴스가 되었다. 미시마는 다자이 오사무를 유약하고 목표 없는, 마치 온실 화초같은 쓸모 없는 부르쥬아라며 조롱하곤 했는데 본인도 딱히 다를 바 없이 살아 왔고 또 같은 방법으로 삶을 마감했다는 건 참 재미있는 일이다.

특히 그들의 소설 인간실격과 우국은 각자의 자살의 동기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데, 자전적인 소설 인간실격이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동기, 즉 스스로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을 그대로 드러내보이고 있는 데 반해, 우국은 미시마 유키오의 컴플렉스, 즉 젊은 시절의 병역기피와 동성애성향을 극복하는 (그의 생각에는) 이상적인 죽음, 우국의 주인공인 젊은 장교는 사랑하는 아내와 검열삭제한 후 할복자살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실제 미시마 유키오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할복자살하긴 하지만, 소설의 주제인 2.26사건과 그의 자살 모두 이상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엄연히 병크이다.(2.26은 천왕을 명분으로 한 쿠데타였지만 천왕이 그들을 거부했고, 미시마 유키오는 군국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우파와 자위대로부터 비웃음을 당했다.)

사람은 서로 달라서 미워하기도 하지만, 또 서로가 같아서 미워하는 경우도 있는 법인가 보다.[18] 결국 자살에 이르게 한 심각한 컴플렉스에 짓눌린 삶이라는 면에서는 동일하고, 대응하는 자세, 수긍 및 자기비하 대 극우 마초로 변신,라는 면에서는 반대이다
해외에서는 노벨문학상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다고 하던 젊은 문인이 정치적 이유로 할복자살한다는 게 상당한 컬쳐쇼크로 받들여 졌다. 쟈포네스크랄까. 그래서 나중에 폴 슈레더 감독이 미국 자본과 함께 "MISHIMA(미시마)"(1985년작)라는 그의 전기 영화도 만들기도 했다.[19]

그의 작품 대부분이 주요 외국어로 번역되었고 그의 드라마틱하고 쇼킹한 생애와는 별개로 그의 작품들은 해외(주로 영국, 프랑스, 독일등의 유럽국가)에서 꾸준히 읽히며 좋은 평가를 얻어 오고 있다.

생전에 미국의 SF 및 판타지 소설가인 A. E. 반 보그트(Alfred E. Van Vogt)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반 보그트가 '전미 과학소설 및 판타지 작가 협회'로부터 <거장 상>을 받을 당시에 후배SF작가 처드 체딕이 지은 헌정시에도 미시마 유키오가 언급되고 있다.[20] 이 시는 황금가지에서 2004년에 출판한 <오늘의 SF 걸작선>에 실려있다.

대체역사소설비명을 찾아서에서는 환갑까지 살아 198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주화입마의 마수에서 벗어난건가?

8. 한국에서 그의 입지

구세대에게는 방패회 사건 때문에 똘아이. 인터넷이 활성화된 이후에도 그냥 배째고 죽은 똘아이 우익으로만 유명해졌지만 그의 작품 '금각사'와 '파도소리' 때문에 '어쩌다 이리 주화입마했을꼬'라고 여기는 한국인도 많다. 당연하지만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우익사상에 찬동하는 건 아니다. 다만 기득권 세력과 결탁한 기존의 우익 세력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좌익 학생들과 단신으로 토론을 벌이는 등의 기개나 논리의 치밀함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

한편 한국의 작가 이문열이 자신이 좋아하는 단편소설들을 몇몇 주제로 묶어 '세계 명작산책'이라는 이름으로 단편집을 내놓았었는데, 그 중 죽음을 주제로 한 소설집, '죽음의 미학'에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9.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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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과거 일본의 고등문관시험은 이 정도의 지위를 보장하는 시험이었다.
  • [2] 학생들이 우익인 그에게 관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 [3] 참고로 박정희의 5.16 쿠데타를 모델로 한 쿠데타를 계획한 적도 있지만 무산되었다.
  • [4] 말하자면 관동지역 사령관
  • [5] 참수는 결코 쉬운게 아니다.
  • [6] 이런 관습을 '카이샤쿠(介錯)'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카이샤쿠는 주로 할복하는 사람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부하가 카이샤쿠를 하곤 했다.
  • [7] 더군다나 피를 봤는지라 극도의 공포와 흥분상태였고, 그러니 칼을 제대로 휘두를 리가 있나...
  • [8]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이 과거 제국주의 시절처럼 나간다면 UN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권력도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땅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되었기 때문.
  • [9] 여담이지만 후나사카는 미시마가 죽은 후에 그가 할복할 때 쓴 칼을 받게 됐는데, 이때 이런 한심한 새끼. 이걸로 야쿠자나 죽일 것이지 쓸데없이 자살 따위나 하냐? 고 비꼬았다. 그리고 그 칼의 이름을 자살밖에 못하는 칼 이라고 지었다고.
  • [10] 물론 후나사카 히로시는 이런 미시마 유키오에게 "그런 놈이 제일 먼저 방공호로 도망쳤냐?"라고 비웃었다.
  • [11] 말더듬이인데다 외모도 추한 절집 소년이 가진 기묘한 미안과 이상심리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친 비틀린 세상을 아름다우면서도 논리적인 문장으로 묘파해 낸 탁* 월한 소설이다. 물론 읽기는 좀 힘들다.
  • [12] 게의 사진만 안 보이면 OK
  • [13] 당시 영어공부를 위한 매체가 부족했던 시절인지라 그는 매일 어학 LP판을 들으며 독학으로 회화실력을 쌓았다고 한다.
  • [14] 영국 BBC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Strange case of Mishima'에서는 5피트 1인치(156cm)라고 소개. 참고로 1950년 기준으로 일본 남성 평균키는 166cm.
  • [15] 한편, 사 후 부검 결과 신장은 163cm 였다는 설도 있다.
  • [16] 리즈 시절 꽤나 예뻤고 일흔을 넘긴 지금까지도 오카마로 활동중이다.
  • [17] 그리고, 미시마 유키오가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을 비웃은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을 비웃은 사람이 또 나왔으니...시오노 나나미다. 그리고 안 자살
  • [18] 그런데 실제로 미시마 유키오는 다자이 오사무와 자신이 일치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 [19] 그 해 느 영화제 최우수 예술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영화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동성애 의혹은 특히 강하게 제시되고 있는데 때문에 유족들의 강력한 반대로 지금도 일본내 상영 금지, DVD/비디오 출시 금지로 묶여있다. 다만 게이 바 장면을 자른 버전이 TV에서 몇차례 방영 됐다고 한다. 개봉이 예정됐을 당시 '미시마 11월 25일, 쾌청'라고 번역제가 붙었다고.
  • [20] 반 보그트는 이 상을 받은 직후인 2000년에 알츠하이머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실 상 자체가 반 보그트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게 알려진 후에 부랴부랴 수여한 것이다.
  • [21] 총 4부작으로 이루어진 미시마 유키오의 마지막 작품이며, 이 중 1부인 봄의 눈이 영화로 제작된 바 있다.
  • [22] 급생 OVA에 주인공과 사쿠라기 마이가 이 책을 보고 있는게 잠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