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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last modified: 2015-04-07 00:45:51 Contributors


1945년 8월 광복 이후, 미국군이 진주하여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조선총독부에게서 한반도의 행정권, 치안권 등을 이어받아 38도선 이하 한반도(및 그 부속 도서)를 통치했던 기구, 혹은 그 시기(한편 38선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통치했다).

군정 사령관은 존 하지 중장이었고 소장급 장성이 군정장관을 맡았다. 하지 중장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였으며 미군정도 맥아더가 주재하던 GHQ의 지시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일본의 통치에 집중하고 있어서 한국의 미군정에 대해서는 간섭 자체를 거의 하지 않았고, 사실상 미군정은 미국 본토의 지시를 받았다.

미군정(美軍政)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약칭 미군정청(美軍政廳)
USAMGIK(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합갤러들 한정으로 심영하면 딱 떠오르는 시대

Contents

1. 군정 이전(~ 1945. 9. 8)
2. 군정 초기(1945. 9. 9 ~ 1947. 2)
2.1. 여론 관련 자료
3. 군정 후기(1947. 3 ~ 1948. 8. 14)
4. 소련군정
5. 관련 문서
6. 같이 보기


1. 군정 이전(~ 1945. 9. 8)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들어가던 시기, 추축국의 패배가 서서히 다가오자 연합국 측은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미국, 영국, 중화민국 참여)에서 일본의 해체와 그에 뒤따른 '적절한 시기의(in due course)' 한국의 독립을 결정했으며,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미국, 영국, 소련 참여)에서 이를 재확인하였다. 이에 앞서 1945년 2월에는 얄타 회담(미국, 영국, 소련 참여)이 이루어져 독일 항복 이후 2 ~ 3달 안에 소련이 일본 전선에 개입할 것을 약조하였다.

한편 충칭에서는 중화민국 정부와 함께 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이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있었고, 1941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이보다 북쪽인 연안에서는 1942년 경부터 조선 독립 동맹이 마오쩌둥 등의 공산 정부와 합작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극심한 감시로 독립운동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여운형의 주도로 1944년 조선 건국동맹이라는 비밀 결사가 세워져 있었다.

1945년 8월에 들어가면서 일제는 말 그대로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8월 6일부터 참전한 소련은 파죽지세로 만주를 장악하고 한반도 북부까지 진입했으며, 태평양 전쟁을 사실상 정리한 미국은 일본 본토 폭격에 들어가고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이에 조선총독부 측에서는 여운형과 교섭을 시도했으며, 여운형은 일본인의 무사 귀환을 보장하는 대신 5개조 요구를 들어 행정권, 치안권의 이양 등을 약속받았다. 여기에 송진우 선 교섭설이 존재하나, 신빙성을 놓고 말이 많은데, 정확히 말하면 한민당에서 유포한 뜬소문이다. '한국현대사 박사 1호' 연구자인 서중석은 '총독부의 송진우 접촉까지는 사실이나, 이는 명백히 여운형의 경우와는 다른 하급 수준의 것이었으며, 송진우가 총독부의 정권담당의뢰 또는 치안담당의뢰 거절했다는 설은 한민당 측에서 자신들의 일제시기 행위를 은폐하고 건준과 여운형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요하게 주장했다'고 규정지었다.

한편 전쟁 말에 겨우 오키나와에 진입한 미국은 일찌감치 한반도 북부로 진입한 소련을 보면서 불안감을 느꼈다. 이 때문에 1945년 8월 11일 경 미국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38선 한반도 분할론을 제시하였고, 미국의 생각 외로 소련은 이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소련이 동유럽에 치중할 계획이었으므로 동북아시아에 개입할 여력이 별로 없었고, 따라서 이러한 합의가 쉽게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다…참고로 이 제안을 소련에서 불복할 시에는 37도선까지[1]로 합의를 보려고 했다는 기밀 문서의 내용도 존재한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하고 한반도는 8.15광복을 맞았다. 여운형 등은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8월 말까지 건국준비위원회는 지방 세력의 호응을 받으며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행정권 등을 제대로 이양하지 않아 마찰이 벌어졌는데, 이는 일본 본국에서 행정권을 미국에게 이양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국내에서도 김성수, 송진우 등은 '임시정부 봉대'를 주장하며 건국준비위원회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러던 중 9월 초에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건국준비위원회 측은 마음이 급해졌다. 때문에 9월 3일 내각 개편이 이루어지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비중이 좌익측으로 기울자 안재홍 등 중도 우파 세력이 건국준비위원회 / 조선인민공화국에서 탈퇴하였다. 그러나 9월 7일 인천항에 진주한 미군은 포고령을 통해 조선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을 부정하였으며 이에 얼마 가지 않아 조선인민공화국은 와해되었다. 미군정은 9월 9일 서울로 진주하였으며,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2. 군정 초기(1945. 9. 9 ~ 1947. 2)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의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갔다. 그리고 미군정이 선포되었다.
이 시기에 심영고자가 되었다 [2]

미군정 진주 이후에는 조선인민공화국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당의 형태로 정치 세력을 전환하고 조선인민공화국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물들 또한 당을 조직하였다. 이 시기 난립한 당파의 개수는 수백 개를 상회하므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우나, 대략적으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이 중 한국민주당은 미군정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으므로 미군정 측에서도 이들에 호의적이었으나 대중적 지지율은 낮은 편이었다. 이에 미군정은 이승만과 한민당이 연대하도록 주선하였다. 미군정은 김구와도 접촉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완고한 임시정부 정통론을 주장하였던 김구와 거리가 멀어졌다.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정치 세력이 한반도의 통일 국가가 생길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또 대부분이 서로 그리고 미군정과 교섭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으므로 정치 대립이 그 이후만큼 격하지는 않았다. 이건 남한뿐만 아니라 남북 관계에도 마찬가지여서, 38선도 원래는 소상인들이 물건 팔러 넘나들 수 있을 정도로 경비가 느슨했다고.

다만 정치 부분을 벗어나면 일제강점 하에서 눌렸던 각종 불만들이 자유민주주의 이식을 표방하던 미군정 하에서 폭발하였으므로 이로 인한 혼란은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해외 동포의 다수 귀국과 공출 - 배급제의 해지에 따른 쌀값의 폭등이었다. 이에 1946년 1월 미곡수집령이 발표되었으나 운영 미숙으로 다시 한번 혼란을 가져왔다. 이외에 소작제, 토지 분배 등을 놓고 쟁의가 계속되었다. 미군정 측은 소작료를 수확량의 1 / 3로 제한하고 일제 하 지주의 토지를 매각하는 등의 노력을 하긴 했으나 이는 농민의 불만을 수렴하지 못했으며 사회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진 북한과 대비되면서 불만은 더욱 커졌다. 이후 미국 국방성과 국무부의 한국문제특별위원회에서는 3년간 5억4천만달러를 한국에 뿌리려 했으나 계획단계에서 그쳤다.

하여튼 다시 정치로 돌아와서, 임시정부 수립과 이를 위한 신탁통치안이 포함된 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안이 전달되면서 남한의 정치판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타국에게 정치를 맡긴다는 신탁통치안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견딜 만한 것이었을지 모르나 감정적으로는 35년의 식민 통치를 겨우 벗어난 한국 민중들에게 악몽의 재림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이러한 전달이 미국과 소련측의 입장이 뒤바뀌어 전달된 것이다(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 우익측(이승만, 김구, 한민당 등)은 반탁 운동에 나서면서 나섰고, 좌익측(박헌영 등)은 본래 대개 반탁 혹은 중립적 행보를 보였으나 박헌영 등이 소련에 갔다온 이후에는 찬탁으로 선회하였다.[4] 반면 중도 세력 측은 신탁통치안을 보류 혹은 수용하려는 반응을 보이되 한반도 내 임시정부 수립안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민중의 지지는 우익측으로 향했으며 좌익층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한편 좌우파의 대립이 격해지면서 중도파(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의 세력 또한 위축되었으며, 우익의 대표 인사였던 송진우마저도 신탁통치에 대해 (다른 우익층에 비해 비교적) 호의적인 발언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암살당했다.

이후 1946년 3월 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위원회는 초기에는 그럭저럭 잘 진행되는 듯 보였으나, 참여할 정치 세력을 놓고 미소 양측이 대립하면서 결국 결렬되었다. 소련측은 3상 회의안에 반대하는 반탁 세력은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측은 3상 회의안에서 한반도 세력이 직접 참여하지 못했으므로 이를 들어 한반도 내 정치 세력을 배제할 것을 논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모든 정치 세력을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5월에 회의가 결렬되자,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한 연설에서 남한만이라도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할 것을 주장하였는데(정읍발언) 이는 사실상의 단독 정부 수립안이었다. 한편 격화된 좌우 대립과 단독 정부 수립안에 위기감을 느낀 중도 세력은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946년 10월에는 좌우합작 7원칙을 내놓았다. 이 당시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대단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극좌와 극우 모두에게서 배척받는 중도의 한계점을 보였다. 가령 '무상 / 유상 / 유조건 몰수 → 무상 분배'안의 경우 우익측에서는 무상 분배를, 좌익측에서는 유상 / 유조건 몰수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양측 모두 '돈 주고 사서 돈 없이 배분하면 재정이 파탄난다'는 반대 의견을 냈으며 이 또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판단은 알아서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좌우익 모두를 수렴하려는 노력이 결국 좌우익 모두의 반발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는 동안 미군정 측은 중도 세력과 교섭하여 1946년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과 남조선 과도 정부를 세웠으나, 여운형 세력 등은 남조선 과도 정부 수립 단계에서 탈퇴하였다.

한편 미군정은 1946년 초부터 국방경비대, 경찰 등을 창설하거나 강화하였는데 이는 좌익층에 대한 압력으로 이어졌다.[5] 이에 대한 반발로 조선공산당(후에 남조선노동당)은 쟁의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46년 9월 30일, 부산에서 철도기관사들이 일으킨 파업부터 시작해 총파업이 일어났고, 여기서 경찰의 민간인 발포로 우발적으로 터진 대구 10.1 사건이었다. 그러나 쟁의가 격해지면 격해질 수록 탄압 또한 격화되었으며, '정책의 역전' 이후 좌익층은 지하로 들어가거나 월북하게 되었다.

또한 1946년 초부터 이어진 북한의 개혁으로 인해 많은 월남민들이 발생하였으며,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에 대한 반발 심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때문에 서북청년단 등의 정치 세력 등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1946년 8월에는 민선의원과 관선의원 45명씩으로 구성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일종의 과도기적 국회의 역할을 하였다. 다음해인 1947년 2월에는 명칭을 남조선과도정부로 바꾸고 한국인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하였다.[6]

경제에 있어서는 일본인 자본 및 기술자의 철수와 만주 및 일본과의 교역 단절 등으로 혼란이 심했는데 여기에 미군정이 정부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지폐 발행으로 조달하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졌다. 여기에 서울 등 도시에 필요한 쌀을 농촌에서 강제로 수매한것 때문에 여론도 나빠졌다.

미군정이 이렇게 한반도 현실에 맞지 않는 정책을 실행하는 병크를 일으킨것은 한반도에 대한 정보 부족이었다. 미군정이 한반도에서 얻은 정보들은 구 일본군이 넘겨준 정보가 전부였고 그나마 이것도 왜곡되었거나 근거가 부족한 정보였다. 실제로 미국은 한반도 정보에 무지했는데 이승만대통령이 태평양 전쟁중 미국에서 일본의 가혹한 식민통치를 기자회견을 통해 알리자 그 어떤 미국인들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반도가 근대화되지 않았냐?식의 질문을 해 이승만이 울화통이 터질정도였다. 이는 해방후에도 마찬가지로 이승만이 미군정의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해도 듣지않고 그대로 시행하였다가 낭패를 보았고 한국전쟁시에는 구 일본군을 투입시켜 병력열세를 만회하자는 주장을 했는데 그 주장 근거로는 일본군이 한반도를 지배한 만큼 한반도 지리를 잘알고 일본군이 한반도에 오랫동안 주둔한 만큼 일본군에 대한 한국인들의 친근감도 있어 빠르게 적응할것이라는것이 근거였다. 당연히 이승만대통령은 "한국군과 일본군이 전쟁하는것보고 싶으면 해봐라 '식으로 비판하여 이 계획을 철회하였다.

2.1. 여론 관련 자료

해방 정국 1945년 10월, 중도우파 성향의 잡지사 '선구'에서 서울 시민 2000명에게 여론조사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이 자료를 통해 여운형의 지지율이 매우 높았다는 단편적인 해석을 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조금 복잡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일단 표본은 잡지사의 여론조사에 응할 수 있는 지식인층이었으므로, 일반 민중의 여론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여론조사는 '선구회' 잡지사에서 창간하자마자 기념으로 여론조사를 한것이고, '그나마' 해방정국 당시 정치색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 학계에서는 이 여론조사를 자주 인용한다.

또 한편으로 여운형, 박헌영은 국내에서 계속적으로 활동을 한(그래서 활동 등에 대한 인지도가 높은) 상태였던 반면 김구는 10월, 이승만은 11월에 귀국했음을 생각하면 단순한 수치보다 해외파의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에 대한 지지율에는 또한 미군정과 교섭할 때 수월할 수 있으리라는 신뢰[7]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좌익층조차도 해방 직후 이승만을 미군정과 교섭할 인물로 삼으려 했다는 것은 9월 초 우익측이 탈퇴하면서 좌경화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조선인민공화국의 내각안에서 당시 국내에 있지도 않던 이승만을 주석으로 세운 점, 그리고 조선공산당이 독립촉성위원회에 합류한 점(금방 탈퇴했지만) 등으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승만은 이러한 제안들을 거부했다. 지금은 믿을 수 없겠지만, 이 시기까지만해도 이승만은 좌우익을 망라해 인지도가 높았던 지도자 가운데 한명이었다.

이외에 1946년 7월, '조선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 대통령이 될 것인가?"라는 조사를 한 결과는 이승만(29.2%), 김구(10.5%), 김규식과 여운형이 각 10.3%였다. 1948년 6월23일, 조선여론협회가 5개의 거리 행인에게 "누가 초대대통이 되기를 바랍니까?"라는 조사를 한 결과는 이승만(1,024), 김구(568), 서재필(118) 순이었다. 신탁통치 오보사건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으로 인한 좌익층의 위축이 눈에 띈다. 그러나 설문에 응답한 이들 가운데 '모르겠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전체에 30%가량이나 될 만큼 많았고 미군정에서 여론조작 공세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설까지 있어 신뢰성이 떨어져 학계에서는 이 자료를 그다지 많이 인용하지 않는다.

이 두 여론조사에서 유추해보면 한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이 한민당 세력 인사들은 단 한명도 뽑히지도 거론되지도 않았다. 이는 당시 민심이 한민당을 얼마나 극렬 혐오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해방정국 당시 민심은 사회주의 성향이 다분히 강했다.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한민당의 기관지)의 기사에 따르면, 미군정 당국에서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민중들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한다는 여론이 70%나 되었다. 반면,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지지한다고 응답한 이들은 각 24%, 7%정도였다.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 3면 참조. 다만 1945년 당시 한국의 문맹률이 77%에 달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과연 정치 사상에 대해서 일반 민중이 얼마나 깊은 이해도를 갖고 있었을는지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소작 등 부조리한 수취 구조에 대해 '부의 재분배'를 원하는 민중이 몹시 많았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듯.

3. 군정 후기(1947. 3 ~ 1948. 8. 14)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동북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 또한 뒤바뀌게 되었다(정책의 역전, Reverse Course). 이 트루먼 독트린을 바탕으로 미국에서는 매카시즘 열풍이 불게 된다.[8] 이전까지의 정책이 좌익측에 대해 비우호적일지언정 '자유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지키려 했다면, 이 이후의 정책은 아예 반공 정권을 세우려는 성향이 강해져 좌익측의 활동은 아예 불법화되었다. 이에 맞춰 좌우합작운동 등에 대한 지원 또한 약해졌다.

1947년 5월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제2차 미소공위는 초기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참가단체 선정문제를 놓고 제1차 미소공위때와 같은 문제를 넘지 못하고 끝내 1947년 10월에 결렬되었다. 이과정에서 1947년 7월에는 여운형이 암살되어 좌우합작운동이 사실상 와해되었으며[9], 단독 정부 수립파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1947년 9월에는 미국 측이 제시한 한반도 내 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안이 UN 총회에서 가결되었으나, 소련 측은 북한 지역에 UN 한국 임시 위원단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였다(인구 수에 따른 의원 수가 적었다는 것이 그 이유로 꼽힌다). 이에 1948년 2월 UN 소총회에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 수립안이 결정되었다.

김구와 김규식 등은 이에 반발하고 1948년 4월경 남북 회담을 열었으나 이미 북한 단독 정부 수립안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던 김일성 등에게 형식상의 합의를 얻었을 뿐이었으며, 이는 이후 북한의 선전에 이용되는 불행만을 낳았다. 한편 무장 좌익 세력에 의해 제주도에서 4.3 사건이 일어나 총선거를 방해하였고 미군정은 이를 진압했으나, 이에 대한 토벌 작전이 벌어지면서 무고한 민간인이 다수 학살당했다(한편 여순사건이 4.3 사건에 연동하여 벌어지면서 군내 좌익 숙청 작업이 벌어졌다).

이후 선거가 연기된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에서 진행된 5.10 총선거로 제 1대 국회가 성립되었는데, 여기에는 김구 세력이나 중도 세력 등이 대거 불참하였다(이는 당대에는 신념에 따른 일종의 보이콧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제 1대 국회가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 위주로 편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선거에서는 100석을 공석으로 남겨두었는데, 이는 북한 지역 또한 대한민국의 관할에 있다는 상징성을 위해 남겨둔 것이다. 7월 12일 대통령으로 이승만, 부통령으로 이시영, 그리고 본래 이승만이 맡았던 국회의장 직에 신익희가 당선되었으며,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세워졌다(제헌절의 기원).

1948년 8월 15일 중앙청성조기가 내려지고 태극기가 걸리면서 미군정은 끝났다. 미군정이 대행하던 각종 권한들이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되었으며, 남아있던 미군정 관리 하의 토지와 공장 등 적산 또한 대한민국 정부의 소유로 전환되었다. 1948년 12월 UN은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내 유일한 공식 정부로 인정하였다.

4. 소련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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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북위 37도선은 아산만부터 울진 앞바다까지를 가른다. 즉,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강원도 전 지역이 소련 치하에 들어가는 것이다.
  • [2] 사실 실제 역사에서는 하복부에 총상을 맞은 것으로 그쳤다.
  • [3] 김구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환하기를 원했으나 이를 거부한 미국 측과 한동안 마찰을 겪었으며, 결국 한국독립당이라는 당의 형태로 전환하였다.
  • [4] 여기에 존스턴의 왜곡보도도 커다란 한몫을 했다.#
  • [5] 다만, 국립경찰 강화하는 부분은 좌익층 뿐만아닌 당시 민심에서도 상당히 부정적인 여론을 초래시켰다.(당시 국립경찰에는 일제시대때 일했던 친일경찰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 이들은 민중들 상대로 가혹하게 다뤘다.)
  • [6]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인 군정장관이 우위에 있었다.
  • [7] 여기에 다른의견도 있는데, 미군정의 선전활동도 커다란 한몫을 했었다는점이다.
  • [8] 이는 한반도 뿐만이 아닌 일본 GHQ에서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 일본GHQ도 '레드퍼지'(역코스 정책) 이전까지만해도 사회주의자들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
  • [9] 이때 민정관 E. A. J. 존슨에 따르면 당일 미국은 여운형에게 민정장관직을 타진하려고 했고, 여운형 역시 당일 북한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문서를 지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