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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last modified: 2017-05-31 00:37:24 Contributors

검열
대한민국/문화 규제와 탄압 문화대혁명 도서정리사업

중국의 정치격변 순서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중국어: 无产阶级文化大破壞[1]革命(Wuchan Jiieji Wénhuà Dàgémìng:우찬제지 원화다거밍)
영어: Great Proletarian Cultural Destruction Revolution (GPCR)
별칭: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無産階級 文化大革命,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한자권에서는 '문화혁명' 또는 더 줄여서 '문혁'이라고도 부른다. 원래 내세운 목표는 봉건주의적이고 구시대적인 문화를 타파하여, 이타주의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새로운 사회주의적 문화를 창조하자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역사적인 문화검열 사건이자, 전국 단위로 시행된 대규모 반달리즘이 되어버린 중국의 흑역사.[2]

Cultural_Revolution.jpg
[JPG image (Unknown)]
레드카드 여권자랑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있는 인민들 중국 인민해방군은 마오쩌둥 사상의 큰 학교[3]

Contents

1. 개요
2. 배경
2.1. 중국 공산당 내부의 '보수파' 문제와 관료주의
2.2. 해서파관과 조반유리
3. 전개
3.1. 2인자가 된 린뱌오와 몰락
3.2. 4인방의 등장과 몰락
4. 문화대혁명의 내용
5. 문화에 끼친 재앙
5.1. 문화유산 파괴
5.2. 무술
5.3. 스포츠
5.4. 식문화
5.5. 미술
5.6. 애니메이션
5.7. 음악
6. 해외의 반응
7.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8. 이야기
9. 남한과 북한
10. 망각의 사건
11. 관련인물과 사건
12. 만일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13. 관련 미디어
14. 관련 항목

1. 개요


※ 문화대숙청혁명의 현장

마오쩌둥이 기획, 연출, 감독 주도한 사회 운동.이라고 쓰고 숙청이라고 읽는다


말은 많지만 주요 골자는 "옛 것은 모조리 숙청하라. 문화, 교육, 정치, 니들 부모까지도". 그야말로 탈권위를 하겠답시고 마오쩌둥이라는 새로운 권위를 따르다가 권위가 만들어낸 병크를 새로 창조한 복잡한 병크.

분서갱유나 카르타고의 최후처럼 자주 가끔식 일어나는 승리국에 의한 패배국의 '문명 파괴'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애초부터 문화대혁명의 모토는 "이제 경제/정치 분야의 혁명이 완수되었으니 그보다 상부구조인 문화를 혁명할 단계다." 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구 체제의 봉건적이고 권위적인 관료제, 위계질서를 파괴하겠답시고 시작한 거였다(…).

간단히 말해, 현대판 분서갱유데자뷔라고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이 문화대혁명이 중국문화 전체에 끼친 피해는 분서갱유를 훨씬 능가한다.

1966년부터 1976년에 걸친 '불과 10년' 동안 중국모든 것을 말 그대로 바닥까지 추락시켰다[4].

그리고 그 덕택에 대한민국을 비롯해 당시 고도 성장을 막 시작했던 후진국들이 중국의 고립으로 서구의 투자가 집중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행운 중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전에 있던 대약진운동중소 국경분쟁이나 이후의 중월전쟁 등도 중국의 고립, 중국의 약체화에 큰 역할을 했다.

2. 배경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오쩌둥의 권위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공식적으로 마오는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국가주석직을 사임했고, 후임으로 류사오치가 선임되었다. 마오쩌둥은 당 중앙위원회의 주석직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을 맡고 있었음에도 마오쩌둥은 계속 "주석"이라고 불렸다. 마오의 권위와 영향력이 쇠퇴하는 것과는 반대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영향력이 증대되자, 마오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게 펑더화이였다. 1959년 장쑤 성 루산에서 열린 루산 회의에서 펑더화이가 마오가 밀어붙인 삼면홍기[5]에 대해서 "총노선은 옳았으나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는 잘못되었다."라고 비판했다. 물론, 펑더화이는 나름대로 마오를 생각해서 한 충언이었으나 초조해져있던 마오에게 이 소리는 고깝게 들릴 수 밖에 없었다.

사실 펑더화이의 비판은 비판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매우 완곡한 표현의 한통의 개인 편지였다. 단순히 "총노선은 옳았으나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는 잘못되었다."라는 표현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매우 상세한 표현을 들어가면서 칭찬과 부족한 점을 차분한 어조로 언급한다. 그 예로 "전 인민들의 철강생산 중에 수많은 흙으로 만든 용광로를 만들어 많은 자원과 인력을 낭비하였다. 이는 당연히 커다란 국가적 손실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운동을 통하여 전국의 지질에 대하여 대규모 조사를 하였고 또 적지 않은 관계부문의 전문가를 양성하였으며 많은 간부들도 이 운동기간 중 단련을 하였다는 점은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와 같은 평가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마오가 펑더화이의 비판을 받았다는 것에서 너무 감정적인 사실 왜곡은 조심해야 한다.[6]

이에 마오는 펑더화이에게 "감히 주석에게 사임하라고 강요하다니! 이 자산계급 민족주의자야!!"라고 거의 폭언에 가까운 발언을 쏟아냈고, 펑더화이는 깨갱하면서 물러나야 했다. 결국 이로 인해 펑더화이는 실각하고, 마오는 자신의 최측근인 린뱌오를 펑더화이가 맡던 국방부장에 앉혔다.

게다가, 삼면홍기에 긍정적이었던 류사오치조차도 고향 후난 성을 시찰하면서 "천재지변이 3할이면 인재가 7할이야."라고 할 정도로 마오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갔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경제 개혁을 추진하는데 강제적인 집단화 추진 정책이던 인민공사를 일부 후퇴시키고 "생산보다 구매가 더 좋고 구매보다 대여가 더 좋다."라는 말을 남기며 실용적인 경제정책으로 마오의 자급자족 경제정책을 대체하려 했다.

이런 경제개혁이 실효를 거두기 시작하면서 일반 인민들은 물론, 중국 공산당 안의 고위 간부들에게까지 류사오치의 명망이 높아져갔다. 이렇게 되자, 류사오치는 마오의 권력을 점점 줄이고 자신이 최고권력자가 되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때, 류사오치는 마오를 뒷방 늙은이, 즉 상징적인 존재로 남겨둘 계획을 세웠다. 다시 말해 실권은 없지만, 인민들을 단결하기 위한 우상화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나, 마오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권력을 넘겨준 건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마오는 젊은 세대들에게 주목해 젊은 세대들에게 마오주의 교육세뇌 을 강화하면서 그들을 자신의 열렬한 지지층으로 만드는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이런 우상화 선전과 교육을 받고 자란 이들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들은 천하의 개쌍놈들 홍위병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63년, 마오는 소위 4청운동이라 하여 정치, 경제, 조직, 이념에서 불순한 사상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류사오치를 직접 겨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홍위병 자체는 단일조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마오이즘을 모토로 젊은이들끼리 만든 조직을 뜻하는 보통명사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지역마다 홍위병이 다 다르고 조직마다 내세우는 모토도 조금씩 달랐다. 게다가 자발적으로 조직된 집단이었다. 무슨 동네 조기축구회도 아니고 동네마다 세 개, 네 개씩 차라리 조축이었으면 지금쯤 중국에서는 11명의 메시가… 그렇기 때문에 조직간의 연계도 불확실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저 마오라는 이름 아래 모여있었다고 보면 된다. 그리하여 홍위병은 나중에는 문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팀킬을 벌이게 되고 지방에서는 모토가 다른 홍위병 조직들이 갈등을 끝에 정규군 병영을 습격하거나 파벌으로 나뉜 군지휘관들의 원조를 받아 서로 총격전까지 벌이는 일까지 있었다.

사실, 이런 교육과 선전이 잘 먹혀들고 전체주의적 추종이 나타난 배경에는 한국에서 일제강점기의 반동으로 민족주의에 경도된 것처럼 가까운 과거에 겪은 외세의 침략에 대한 반동과 급격한 체제, 문화적 변화로 인한 중국인들의 정신적 혼란에 개인간 불신의 풍토, 세대간의 갈등이 태동하는 것도 있었다.

2.1. 중국 공산당 내부의 '보수파' 문제와 관료주의

중국 공산당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한 이래 그 내막을 살펴보면, 사실 완전히 피의 숙청으로 권좌를 잡은 것이 아니었다.

국공내전 과정에서 이미 상당수의 국민당 군벌들이 공산당으로 전향했다. 국공내전 과정에서 초기에는 미약한 숫자를 보이던 공산군이 후기로 갈수록 병력이 불어나고 중국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 그 많은 병력이 2~3년 새에 땅에서 솟아나왔을 리가 없으니, 대부분 상대 진영에서 전향을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또한, 중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크다보니까 각 성의 주요 관직에는 과거부터 이미 존재하던 지역 토호나 유지들과 어느 정도 협상을 해서 당의 지도 하에 각 성을 혁명화하는 구조로 권력이양이 진행되었다. 쉽게 말하면, 생각보다 많은 숫자의 행정관료들이 공산당에다 충성을 맹세하고 해당 지역에 그대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OS라고 볼 수 있는 정치체제를 새로운 플랫폼으로 재설치해야 하는데, 하드웨어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그에 알맞게 교체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계속적인 내부정화나 혁명화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사람이 이 때까지 해오던 짓이 있던지라, 지역에 따라서는 아직도 지주가 남아있던 지역도 있었고 완전히 민공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도 생각 외로 많았다. 게다가, 구 체제의 관료들이 새로운 체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관료주의를 그대로 가지고 온 폐해도 적지않게 생겨났다.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 못 되고 편한 것만 배운다고 이전 체제에서 하던 장부조작, 통계조작 같은 짓을 일 삼는 자들도 생각 외로 많았다. 대약진 운동의 통계조작은 이런 부분에서 기인한다.

이런 이들은 중국 사회의 보수파라고 불리며 점점 일반 기층 민중과의 갈등을 빚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보수파는 진짜 보수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혁명에 보수적(온건적)인 입장과 방법으로 일관한 패거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애초부터 마오주의는 기존의 공산주의가 가지고 있던 노선인 "노동자가 사회변혁의 주체"에서 융통성 있게 수정을 거쳐 "농민이 사회변혁의 주체"라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중국의 민심을 얻은 바 있다. 이래서 마오주의를 농민들의 마르크스 주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7].

그런데, 이러한 이상은 간데없이 구닥다리 관료들과 기득권층들이 그대로 남아서 옷만 인민복으로 바꿔입고 구태의연한 병크를 저지르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결국,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는 이러한 보수파의 문제가 점점 지적되기 시작했고 이는 공산당이 일반 민중들의 민심을 잃게 되는 주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게다가, 관료주의는 보수파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 중국 공산당은 오랜 내전을 거치며 지나치게 조직화가 되었고 민주집중제보다 한술 더 뜬 주석제 하의 공산당으로 초권력적인 집단이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은 상명하달의 구조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고, 민중이 주인이라던 공산당의 이상은 점점 훼손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서 보수파의 관료주의에 공산당 내부의 관료주의가 더해져서 2배의 관료주의가 된 것.

이에 반발하여, 마오주의의 이상을 믿고 있던 공산당 내부 급진파와 혁명적 청년 공산주의자들, 급진적 마오주의자들은 이러한 이상을 다시 복원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물론 마오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었고, 흐루쇼프스탈린 비판을 보고 부패와 싸우기 위해서 자유로운 비판을 허용했다. 이것을 백화제방 백가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비판이 자신을 향하자 마오는 분노했고, 결국 반우파운동(1957)으로 비판자를 전원 숙청하거나 동교화형을 내린다.

그러나, 마오의 주치의 즈수이의 주장에 의하면 비판이 너무 극단적인 수준으로 가서 "차라리 장제스가 나았다!"는 소리까지 들리자 놀라서 방향을 선회했다고 한다. 여기서 마오가 모든 직장과 기관에 10~20%의 우파가 숨어있다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는 통에 의무적으로 모든 기관이 직원의 10% 가량을 해고해야만 했다.

여기까지가 196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이미 중국은 내부에서 기아와 숙청, 내부정화 활동, 보수파의 약진, 노선 갈등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제 불을 당기면 펑하고 터질 상황이었다.

2.2. 해서파관과 조반유리

그런 가운데 일은 엉뚱한 데서 터졌는데, 그것은 <서파관>이라는 역사 연극에서 시작되었다. 1959년 당시 베이징 부시장 직에 있던, 명대 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로서 청화대학의 역사학 교수를 지내기도 한 사람인 우한(吳晗)[8]이 <해서파관>을 발표하는데 이 연극은 해서라는 청백리 관리가 폭군 황제에게 파직을 당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폭군 황제는 가정제를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가정제 항목 참조.

처음 연극이 발표되었을 때, 마오는 "이거 괜찮네"라는 반응을 보였고, "당원들은 해서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오의 부인인 장칭오원위안1965년 문회보에 "이거 우리 마오님 까는 물건이네염?"이라고 비난글을 발표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장칭에 의하면 해서는 펑더화이를 의미하며 황제는 마오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1959년 산 회의에서 실각한 펑더화이를 빗대서 쓴 연극이라고 주장했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을 것을 우려한 베이징 시장 펑전(彭眞)은 우한을 옹호하고,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일종의 연구 위원회인 '문화혁명오인소조(文化革命 五人小組)'를 구성하여 학술적인 분야에 사태를 한정시켜 논란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그러자 장칭은 펑전과 우한을 싸잡아 비난했고, 여기에 마오도 직접 이 키배에 뛰어들어서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를 통해 펑전을 비판했다. 여기에 마오 빠돌이 린뱌오가 "우리 마오님은 천재! 마오님 말씀이 무조건 다 옳아요!"라는 대놓고 빠심을 드러낸 일장연설을 했고, 7월 27일 홍위병 대표단들이 "사회정치를 뒤집어 엎자!"라는 편지를 마오에게 보냈다. 이를 "조반유리"라 한다. 조반유리는 말 그대로 "모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홍위병의 반란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천하무적의 병사들의 분노가 하늘에 가득하다 - 조반유리"[9]


마오는 조반유리에 젊은이들이 잘한다며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히고 8월 8일, 인민일보에 <사령부를 폭격하라-나의 대자보>라는 제목의 짧은 논평을 발표했다. 공산당 안의 우파를 척결하자라는 내용이었지만 사실상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때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결국은 만악의 근원이 시작되었다.

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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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홍위병의 제트기 형벌. 비판 대상자의 상반신을 구부리게 하고
두 사람이 옆에서 목덜미를 누르며 팔을 뒤로 들어올리는 것.

1966년 8월 8일, 마오의 논평에 맞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소위 16개항이란 것을 발표한다. 16개조의 내용은 쉽게 말해서 마오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진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지만, 그 표현의 자유는 홍위병이 자유롭게 기존의 낡은 것들을 비판하고 타도할 수 있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홍위병들의 활동에 사실상 한없는 자유를 부여하자, 홍위병들은 날개 달린 듯이 다니면서 각지에서 소위 낡은 것들을 마구 파괴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 , 성당은 문을 닫거나 약탈되었으며, 베이징상하이에선 낡은 사상의 소유자들이라면서 사람들이 무차별로 홍위병들에게 붙들려 구타를 당했고, 심지어 살해를 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공안들은 그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심지어 당시 공안 수장 푸즈"누가 맞아서 죽어도… 우리 소관이 아니다. 만약에 이렇게 때려죽인 사람을 구속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란 말을 할 정도였다. 사실, 공안이 막으려고 해도 홍위병들이 워낙 살기등등해서 함부로 다가기도 힘들었다는 말도 있다.

마오쩌둥은 이런 사태를 보고 받고도 "히틀러가 더 잔인하지 않았나?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진정한 혁명가가 되어간다."라는 개념을 밥말아 쳐먹은 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16개조에선 "무력 쓰지 말고 좋게 말로 하자.", 정확하게 말하자면 "투쟁수단은 무투보다는 문투가 좋다."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그 말을 지키는 홍위병 따위 그런거 없었다. 뭐 어폭력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봐선 말로 하기도 한 모양이다….

류사오치는 결국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고 가택연금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당직에서 쫓겨나고 소위 말하는 재교육을 세 번이나 받고 난 뒤 지방트랙터 엔진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덩샤오핑의 손에는 줄칼에 베인 흔적이 있었는데, 이 트랙터 엔진 공장에서 얻은 상처다. 이후 그는 1973년 저우언라이가 복귀를 시켜줄 때까지 꼼짝없이 그곳에 있어야만 했다.

8월 22일, 마오는 아예 "홍위병이 뭘 하든 태클을 걸지 말라."는 내용의 교시를 하달했다. 이제 홍위병이 하는 일을 막으려는 자도 반혁명분자로 몰려서 숙청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9월 5일에는 모든 홍위병들에게 베이징을 방문하도록 권장하는 통지문이 발표되었는데, 이 때 베이징을 방문한 홍위병들이 무려 1100만여 명에 달했다. 이때 마오는 "숙식 걱정하지 말라. 정부가 다 대준다!"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사실상 국가재정으로 자기 사병들을 먹여주고 재워준 셈이었다.

10월 10일에는 린뱌오가 완전히 동네북이 되어버린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주자파. 즉, 자본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세력 이라고 맹비난했으며 펑더화이의 집에 홍위병들이 난입해서 명패를 채우고 거리로 끌고 다니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쯤해서 홍위병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엄청나게 불어난다. 그리고 세대교체도 이루어진다. 초기의 시설 파괴, 유적 파괴를 주도했던 홍위병들은 보수파라고 불리워지며, 이들은 대부분 고위 간부나 당 관료의 자녀들이었다.

그런데, 점점 홍위병의 숫자가 불어나면서 노동계급의 자녀들이 홍위병에 가담하기 시작하고 이들은 "무투보다 문투를 하라!"라는 모토하에 하방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들은 조반파라고 한다. 조반파였던 사람들은 홍위병들의 패악질은 보수파들이 한 짓이고, 자신들은 그런 일에 별로 가담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들도 역시 다를 바가 없다. 자세한 사항은 홍위병 항목을 참조하시라.

해가 바뀌어 1967년이 되자, 린뱌오와 장칭상하이를 장악하기 위해서 홍위병언론 등을 통해 상하이 지방정부의 고위직들을 맹비난한 뒤 숙청했다. 사실상 상하이 지방정부의 은 완전히 마비가 되었다. 이를 1월의 폭풍이라고 한다.

베이징에선 4인방과 박자가 잘 맞은 이 부총리 오주를 반혁명분자로 몰아 숙청시켜 버렸다. 이제 공산당 내에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반혁명분자로 모함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마오는 인민일보에 글을 발표하면서, 이들이 잘하는 일이라고 크게 칭찬했다. 공산당 시망 이 시기 노동부 부장이었던 리싼 역시 압박을 견디다 못해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장칭은 문혁의 기운을 인민해방군에까지 퍼뜨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중국 건국에 기여한 인민해방군의 여러 주요 장성들이 문화대혁명에 우려를 표하자 4인방은 언론을 동원해 문혁을 비판한 장성들을 맹비난했고, 그들은 결국 홍위병들에 의해서 조리돌림을 당한 뒤 실각하고 만다. 이를 2월 역류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소련대숙청과 마찬가지로, 개국 원수로 추대된 최고위 장성들도 여럿 숙청되었다. 이미 사망한 룽환과 문혁 주도파였던 린뱌오는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펑더화이와 은 이 기간 동안 홍위병들에게 구타조리돌림을 실컷 당한 뒤 허룽은 그 후유증으로 옥사했으며 펑더화이는 으로 사망, 천이는 공장 노동자로 좌천을 당했다.

주더룽전도 좌천까지는 아니었지만, 실각당한 뒤 몇 년 동안 찬밥 신세가 되었고 그나마 별 피해를 입지 않은 원수들은 이미 장님이 되어있었던 보청, 고도의 처세술을 발휘해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상첸, 젠잉 정도였다. 결국 인민해방군은 완전히 무력화되었고 홍위병이 인민해방군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마오가 편을 들어주면서 심지어는 군부대가 홍위병에게 약탈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한편으로 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게 된 홍위병들은 자체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해 몇 개의 파벌로 갈라졌고 각 파벌들은 자신들이 더 혁명적으로 옳다면서 키배라고 쓰고 온갖 병림픽을 벌였다.

결국 1968년이 되자, 이제 더 이상 마오를 위협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마오는 결국 격화되는 경지에 이르렀고, 동네북 류사오치는 그의 집에서 홍위병들의 침입을 받았고 2시간 동안이나 폭행, 폭언을 당한 뒤 카이펑의 교도소에 수감된다. 지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간수들이 류사오치의 를 위해서 의사를 불렀으나 의사가 "당신들 미쳤소? 인민의 적을 어떻게 치료한단 말이오! 미친 소리!!!"라고 말하며 치료를 거부했고, 류사오치는 그대로 카이펑 옥중에서 쓸쓸하게 사망했다.

이렇게 되자, 마오쩌둥 입장에서도 다시금 질서를 잡을 필요가 생겼다. 이 이상 홍위병이 날뛰는 것을 내버려두면, 마오의 권력까지도 무너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오는 다시 인민해방군홍위병보다 우위라고 선언을 하고 홍위병들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홍위병을 하던 젊은이들은 소위 산하향 운동으로 농촌으로 내려보내서 홍위병들을 사실상 해체했다. 모토는 마오이즘의 핵심인 하방 활동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르게 마오이즘은 도시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혁명의 역량으로 파악했고, 이들 사이에서 전위대를 조직해서 도시를 포위한다는 것이 주요 전략이었다. 그래서 마오가 "니들 도시에선 혁명을 많이 했으니까 이제 내려가서 농민들과 더불어 노동하면서 거기서도 혁명을 완성해야지?"라고 하니까 순진한 홍위병들은 우루루 낚였다. 마오에게 실컷 이용당하고도 좋다고 농촌으로 추방당한 이들은 70년대 후반이 되어 마오쩌둥이 죽은 뒤에야 다시 도시로 돌아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물론, 그 덕택에 농촌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으니 무조건 까기는 애매하다는 양반들도 간혹 있는데, 그럼 히틀러홀로코스트이스라엘 건국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낳았으니, 유대인들은 히틀러에게 감사해야 하나?

3.1. 2인자가 된 린뱌오와 몰락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사라진 뒤, 고령의 마오에게 후계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마오는 자신의 최측근이자 문혁의 일등공신인 린뱌오를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했다. 참고로 린뱌오의 공식 칭호는 마오의 충실한 전우였다.

마오는 린뱌오를 크게 신뢰했고 모든 공식 행사에서 마오 주석과 린 부주석이란 식으로 호칭되었다. 사실 그럴 만한 게 1962년 중국-인도 국경분쟁인도군을 물리친 공을 세운 데다 마오의 충실한 냥개가 되어 동네북 류사오치를 마구 물어뜯었기 때문이다.

린뱌오의 위상은 1969년 제9차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새로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린뱌오는 마오에 이어 제 2인자 자리를 차지했다. 저우언라이는 4위로 밀려나 더 이상 린뱌오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정치국 상무위원은 서열 순서에 따라 마오쩌둥, 린뱌오, 보다, 저우언라이, 순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천보다보다도 서열이 밀리는 굴욕을 당했다.

바야흐로 린뱌오의 시대였다. 하지만 린뱌오는 좀 더 확실한 미래 권력의 발판을 얻고 싶어했다. 그래서 류사오치가 실각한 뒤, 폐지된 국가주석직의 복원을 추진했다. 마오를 국가주석에 앉히고 린뱌오가 국가부주석에 앉으면 마오 사후에 자동적으로 린뱌오가 국가주석직을 승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 8월 23일, 려산에서 열린 제9차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전체회의에서 보다가 총대를 메고 국가주석직의 복원을 제안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마오는 천보다의 발언을 비난하면서 그를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해임시켜 버렸다. 마오는 국가주석직 복원을 린뱌오가 자신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것으로 여겼다. 사실 이런 의심에는 린뱌오의 실수도 불을 붙였다. 천보다의 발언이 비난받았음에도 린뱌오는 마오에게 승진시켜 달라고 징징댔기 때문. 결국 국가주석직 복원 시도가 무산되고 린뱌오는 무력감을 느꼈다. 린뱌오를 의심하기 시작한 마오는 린뱌오의 권력과 당내 영향력을 점점 줄이기 시작했다.

이러자 초조해지기 시작한 린뱌오와 그의 측근들은 결국 아직 남아있는 군권을 이용해 마오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린뱌오의 아들인 리궈가 린뱌오를 지지하는 군내 세력들과 함께 꾸민 소위 571 공정 이라 알려진 이 음모는 마오를 제거하고 공군 폭격과 병력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571 공정에 린뱌오가 얼마나 개입했는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린뱌오가 직접 지휘했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린뱌오보다는 아들 린리궈가 더 주도적이었다는 말도 있다. 자료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음모는 1971년 9월 8일부터 9월 10일 사이에 일어난것으로 보인다. 이때 마오는 중국 남부를 기차로 순시중이었는데 일설에는 마오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습격을 당했다고도 하며 또 다른 설에는 마오를 암살할 것이라는 음모가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어 마오가 일정을 바꿔 암살을 피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 시점에 음모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고 어떤 시도였든 간에 결국 실패했다.

일이 틀어지자 린뱌오는 아들 리궈와 가족들, 측근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망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린뱌오 일행이 탄 비행기는 소련까지 가지 못하고 몽골 상공에서 추락했다.

린뱌오 일행이 탄 비행기의 추락원인도 불분명한데 중국군이 미사일로 격추했다는 설과 연료부족 혹은 기기불량으로 추락했다는 설이 분분하다. 린뱌오 일행의 시체도 찾지 못했으며, 소련이 그들의 시체를 회수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린뱌오가 탄 비행기는 총알이 뚫지 못하는 특전비행기라서 아주 강한 미사일로 격추시켰다는 소문도 있으나 물론 말이 안 된다. 비행기는 전차가 아니고, A-10 공격기처럼 장갑을 미친듯이 두른 비행기마저도 기체에 구멍이 뻥뻥 나도 좀 더 오래 날 수 있는 정도총알 튕겨내는 게 아니다. 물론, 튼튼하게 만들면 보병소총 총알이야 튕겨내겠지만, 비행기에 그딴 장갑은 쓸 데가 없다. 미사일도 규격화되어 생산되는 물품이지 아주 강한 미사일 제조해서 막 만들고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린뱌오의 쿠데타 음모죽음에는 불분명한 것들이 많지만 아직까지도 이것을 밝혀내려는 시도도 없다. 필연적으로 린뱌오의 죽음의 실체를 캐내다 보면, 결국 마오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중국 정부가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린뱌오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도 금기시되는 실정이라고 한다.

3.2. 4인방의 등장과 몰락

린뱌오가 사라진 뒤 마오의 후계자가 공석이 되면서 마오는 앞날에 대해 크게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딱히 후보자가 없자 마오는 상하이의 당 간부였던 훙원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1972년 중앙 정계로 진출한 왕훙원은 마오의 후광을 등에 업고 1973년에는 공산당 부주석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차기 후계자로 급부상해나갔다.

그런데 1973년,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에게 건의해 덩샤오핑이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일각에선 저우언라이가 왕훙원을 견제하기 위해 덩샤오핑을 불러들였다고 보기도 한다. 덩샤오핑은 부총리직에 올라 정부 행정을 관장해나갔다.

이렇게 되자 문혁을 주도했던 장칭과 그녀의 추종자이자 선동 전문가인 춘차오오원위안, 그리고 훙원이 뭉쳐서 대놓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안티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뭉친 넷을 바로 4인방이라 한다. 이들은 언론미디어를 장악하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경제 정책을 비난했다.

1973년 말, 4인방은 뜬금없이 "비림비공"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비림은 린뱌오 안티, 비공은 공자 안티라는 의미로 중국에서 유교 문화를 일소하고 린뱌오의 역적 행위를 규탄하자는 내용이었지만 사실상 이 운동이 겨냥한 것은 저우언라이였다. 마오가 사망한다면 후계자가 공식적으로 천명되지 않는 이상 저우언라이가 그 뒤를 물려받을 것이고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에게 권력을 승계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저우언라이 안티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대중들은 4인방의 안티 운동에 질렸고 이들의 행동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대중들의 저우언라이에 대한 지지가 확고했기 때문에 실효가 없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러자 이들은 타겟을 바꿔 덩샤오핑을 공격했다. 덩샤오핑은 실용적 경제 정책의 추진으로 점점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덩샤오핑을 공격한 것은 효과를 거두어서 마오는 덩샤오핑의 정책을 "우파의 복권정책"으로 판단했고 1975년 12월 덩샤오핑에게 아 비판서를 쓰도록 지시했다.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광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들에게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추모 열기는 뜨거웠다. 4인방은 자칫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가 정치적인 폭풍으로 옮겨질까봐 우려했다. 그래서 이들은 되도록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를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2월이 되자 4인방은 최후로 남은 정적 덩샤오핑을 끌어내리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4인방의 기대와는 달리 말년에 정신이 돌아왔던지 마오는 4인방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화궈펑을 총리로 임명했다. 3월 말이 되자 중국 인민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저우언라이를 추모했다. 4월 5일이 청명절이었기 때문에 이를 위한 것이었다.

저우언라이 추모는 곧 4인방에 대한 비판과 성토로 이어졌다. 4월 5일이 되자 수십만의 군중들이 모여 4인방을 비난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가 1차 천안문 사태이다. 4인방은 공안을 동원해 이들을 강제해산시키고 미디어를 동원해 이 집회를 우파분자들의 책동이라고 선전하면서 그 배후가 덩샤오핑이라고 몰아갔다. 결국 4월 6일 중앙위원회에서 4인방은 덩샤오핑을 성토했고 덩샤오핑은 실각한 뒤 가택연금되었다. 이제 4인방이 모든 걸 장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4인방의 천하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전 중국은 추모 열기에 휩싸였고 공공기관은 1주일 넘게 문을 닫았다. 사망 직전에 마오는 화궈펑에게 "당신이 맡는다면 안심이다."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이는 사실상 마오가 화궈펑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4인방은 화궈펑에겐 정치적 야심이 없고 기술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화궈펑은 4인방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날렸다. 그는 실각했지만 영향력이 있던 덩샤오핑과 인민해방군의 지지를 받아 10월 10일에 4인방을 전원 체포했고 이로서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4. 문화대혁명의 내용

대약진 운동에 이은 2단 콤보 크리티컬 히트로 중국을 혼란과 충격과 공포에 밀어넣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점철되었고 심지어 가족지간에도 서로를 믿을 수 없었다. 개인의 인권? 그딴 거 없다. 아버지가 마오쩌둥에 대해 아주 약간의 불만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면 아들이 그것을 공산당에 보고하고 그럼 홍위병들이 와서 아버지를 타도한다.

타도(打倒)라는 건 때려눕힌다는 얘기인데 그냥 때려눕히는 게 아니라 이상한 모자[10]에 '더러운 자본주의의 개' 따위의 글을 적어서 씌우고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 결박해놓는다. 그리고는 묶인 사람을 사람들이 와서 한 번씩 강렬하게 비판한 뒤 폭력적인 구타를 가하고 외양간이나 화장실 같은 곳에 가둔다.

당해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 친분이 있거나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언어와 신체폭력을 집단적으로 겪고 나면 정신적으로 크나큰 상처를 입고 충격에서 헤어나오기 힘들다고 한다. 피해자 중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혹은 이런 끔찍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아예 미쳐버린 사람도 부지기수. 한 예로, 소설 <낙타상자>를 발표하여 마오쩌둥으로부터 '인민 예술가'라는 찬사를 받았던 소설가 라오서는 홍위병들에게 놋쇠 버클이 달린 혁대로 수없이 구타를 당하자 정신적인 충격과 분노로 인해 연못에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또한 그런 피해자 대부분은 원래 고위급 관직을 맡거나 권위적인 지식인 등 중국 사회의 엘리트들이었다. 정신이 멀쩡한 엘리트들이 그렇게 미쳐나가고 죽어가며 투옥되었기 때문에 중국 사회의 수없이 많은 인재가 말살당했다. 더욱더 끔찍한 사실은 마오쩌둥은 "자살은 인민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행위다."라고 하여서 자살을 할 경우 그 사람은 장례식조차 공개적으로 치루지 못하고 쓸쓸하게 화장해야 했다. 동양의 칸트

또한 영국, 인도 등 일부 국가의 외교 공관들도 '반제국주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외교 문제가 발생했고 나중에 심각한 국제적 고립에 몰려 혁명외교를 철회한 마오쩌둥은 방중한 북한오진우에게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어떤 이들은 기회에 편승하여 소위 말하는 조반을 시도했다. 베이징에 있는 영국대표부를 불사르고 (중략) 그런 사람들이 바로 국민당이다."[11]

이건 뭐 위키 반달했다고 반달족 탓하는 것도 아니고…

극단적으로 문화대혁명에 앞장섰던 집단인 홍위병이 득세했는데, 홍위병은 대개 10대~20대의 학생들이었다. 공통된 특징은 녹색 인민복과 모자, 무장 벨트, 마오쩌둥 어록을 착용한 채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죄명을 씌워 때리고 부수고 빼앗는 것. 중국의 청소년들이 대부분이 홍위병에 가담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에 대한 소회는 각각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이시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재빨리 병크를 깨닫고 새시대를 준비하다가 개혁개방이 실시된 이후 외국에 나가서 성공한 사람도 있다. [12] 문화대혁명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장 먼저 홍위병으로 봉기했으며, 마오쩌둥에게 처음으로 홍위병이라는 완장을 채워줬던 칭화대 여학생 출신 쑹빈빈 (마오쩌둥이 이름을 물어본후, 이름이 봉건적이라며 야오우(要武: '무장투쟁을 한다'는 뜻으로 개명하라고 했다. )은 다른사람보다 먼저 꿈에서 깨어났고, 개혁개방이 끝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가서 MIT에서 공학박사를 받고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이양반은 나중에 홍위병으로 행패를 부린데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하지믄 대다수의 홍위병들은 꿈에서 깨지 못해서 나중에 마오쩌둥이 농촌에서 노동을 하며 배우자는 "상산하향 운동"을 제창하자 그에 따라 모조리 시골로 내려갔고, 1980년대까지 그곳에서 사실상의 굴라그 생활을 하면서 인생이 사그라들었다.

다만 단순히 세뇌라고 보기 힘든 측면도 있는 것이 홍위병들의 입장에서는 그 당시가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였다. 홍위병 중 초기 보수파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은 집단이었지만 후기의 조반파들은 대부분 못 배우고 가난한 계층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문화대혁명은 자신들이 자산가와 지식인들의 위에 설 수 있었던 유일한 시기인 셈. 거기다 사회 전반적으로 권위를 타파하고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앞당겼다는 점에서는 많은 이들이 인정하긴 한다(그 평등이 다 못 살고 다 못 배운 평등이라는 점이 문제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 뒷부분의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을 참조할 것. 지금도 마오이즘이 위세를 떨치는 국가들 치고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각하지 않은 사회가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권위타파와 만인의 평등이라지만, 문화대혁명 이후로 중국이 이 '모두가 평등해진'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엘리트 계층을 재건하는 데 얼마나 진땀을 뺐는가 생각해 보면[13], 그리고 현재 부정부패로 유명한 중국 공산당에 의해 통치되는 중국에 과연 권위주의가 타파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평등'이란것도 허울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과연 문혁, 실드 쳐줄 만한 게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어쨌든 중국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봉건적 잔재는 문화대혁명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수천 년을 내려오던 향촌의 유교적 질서도 완전히 뿌리뽑혓다.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이 예절을 중시하는 것을 놀라면서도 부러워하는 이유도 문화대혁명 시절에 이런 것들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2012년 현재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주요 책임을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이 주축이 된 4인방과 린뱌오에게 떠넘기고 있다. 문화대혁명을 시작한 마오쩌둥도 책임이 크지만 음모를 꾸민 반혁명분자'''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게 대체적인 공식 결론이다. 중국 공산당에게 있어 근현대 중국의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는 마오쩌둥을 자신들의 입으로 직접 공격하여 현재 공산당의 집권 정당성마저 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해 권력 일선에서 퇴진했으나 그 뒤를 이은 류사오치 등의 실용주의 정치가들이 실권을 잡고 예전 자신의 과오를 수정하는 모습에서 권력에서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받고 심한 분노와 권력욕을 느꼈다. 이에 아직 자신에게 남은 정치적 카리스마를 악용하여 정, 관, 군부의 권력 중심에 있는 이들을 숙청하고 권좌를 재확립하고자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선동된 군중과 '4인방', '린뱌오' 등을 이용해 자신이 세운 국가를 자기 손으로 망가뜨린 것이다. 그러나 4인방을 숙청한 덩샤오핑 등은 그의 권위를 등에 업고 세력을 유지하기를 원했으며 군중의 비난도 피하고자 죄과를 은근슬쩍 4인방에게만 물렸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 공산당 수뇌부를 비롯한 중국의 엘리트 중 이공계 출신이 많은 것도 문화대혁명의 영향이라는 주장이 있다. 문화대혁명 때 인문계 및 사회과학계에 대한 공격이 너무 크다 보니 상대적으로 깔 거리가 적은 자연과학공학 계열로 인재들이 몰렸다는 것. 실제로 중국 공산당의 유력 파벌 중 중국공산주의청년단(中国共产主义青年团)의 경우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이공계 인재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5. 문화에 끼친 재앙


이러한 폭력은 단순히 사람에게만 가해진 게 아니라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기존의 문화 전체에 영향을 끼쳐서 수많은 문화유산과 서적 등이 파괴당하고 소멸당했다. 마찬가지로 음악, 미술, 영화, 체육,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어이없는 정책과 숙청이 난무했고, 중국 문화계도 당연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5.1. 문화유산 파괴

1. 염제릉(炎帝陵)의 주전(主殿)은 불에 타고, 능묘는 파헤쳐졌으며, 뼈는 태워져서 뿌려짐.
2. 창힐의 능원은 훼손되고, "열사능원"으로 개조됨
3. 산서성의 순제릉(舜帝陵)은 훼손되고, 무덤에는 큰 나팔을 꽂아놓음
4. 절강소흥 회계산의 대우묘(大禹廟)는 훼손됨. 우임금의 조각상은 파괴됨, 머리와 목이 잘림.
5. 세계불교의 최고보물이라고 불리우는, 석가모니가 살아있을 때 친히 개광(開光)한 삼성상중의 하나일 팔세등1신상의 얼굴이 훼손됨.
6. 공자의 묘가 파헤쳐져 편평하게 됨. '대성지성선사문선왕'이라는 비석도 부서져 가루가 됨. 묘비도 부서짐. 공묘의 니태소상도 훼손됨, 공자의 76대손 공령이의 분묘도 파헤쳐짐.
7. 화현 오강변의 항우의 패왕묘, 우히묘와 우희묘도 천여년을 내려왔는데, 묘들이 모두 파헤쳐져 폐허가 됨. 문혁후에 패왕묘에 남은 것은 반쯤 땅에 묻힌 석사자뿐임.
8. 곽거병의 곽묘도 재난을 벗아나지 못함. 향촉과 첨통이 부서진 외에 곽거병의 소상도 하루아침에 훼손됨.
9. 이화원의 불향각이 부서지고, 대불이 훼손됨
10. 왕양명의 문묘와 왕문성공사의 두 개의 건축과 왕양명의 소상이 전부 훼손되고 남지 않음.
11. 고성ㄷ태원의 신임 시위원회는 첫째 묘우를 부수어 전시의 190여곳의 묘우고적을 부수었음. 10여개를 남기고 모두 훼손함. 그의 명에 따라 100여곳의 고적이 하루아침에 훼멸됨. 산서성박물관의 관장이 급히 방림사로 가서 겨우 니소인두를 한무더기 구해냄.
12. 의성 장중경의 소상이 훼손됨. 묘정, 석비도 부서짐. 장중경기념관의 전람품은 하나도 남지 않음. 의성사는 이미 존재하지 않음.
13. 하남 남양의 제갈량의 제갈초려(무후사)의 천고인룡, 한소열황제삼고처, 문도무략의 세 개의 석방과 인물소상, 명나라 성화연간에 만든 18개의 유리나한이 모두 훼손됨. 전각의 장식물도 모두 부서짐, 여러 목각 목판도 불에 태워짐.
14. 한중 면현의 고정군산 석비는 제갈량이 지주분자라는 것때문에 훼손됨
15. 서성 왕희지의 능묘와 20무에 달하는 금정관이 거의 평지화됨. 남은 우군사앞에 몇 개의 천 년 된 백송만이 남아 있음.
16. 문성공주가 친히 주재한 송찬간포와 문성공주 두 사람의 소상이 각라사에 있었는데, 훼손됨.
17. 합비에서 대대로 보호해오고 매년 제사지내오던 '포청천'묘가 하루아침에 훼손됨
18. 하남 탕음현 중학생이 악비등의 소상, 동상, 진회등 오간당의 철궤상, 역대로 전해내려오던 비각까지 모두 없애버림.
19. 항주혁명청년이 악비묘를 부숨. 악비의 묘도 파헤침. 그리고 악비의 시신을 불태움.
20. 아라텅간더리 초원에 있는 징기스칸의 능원이 부서짐
21. 주원장의 거대한 황릉석비가 쓰러임. 석인, 석마가 폭약으로 파괴됨. 황성도 깨끗하게 철거됨.
22. 해남도의 천애해각에 명나라 때 해서의 묘가 부서짐, 청백리의 유골도 파헤쳐짐.
23. 호북강릉의 명재상 장거정의 묘도 홍위병에게 파헤쳐지고 뼈가 불태워짐.
24. 북경성내의 원숭환의 분묘가 파헤쳐져 평지가 됨.
25. 여평고리에 안장되었던 명나라 말의 명신 하등교의 사당에 있는 불상이 부서짐. 여평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하등교의 묘도 파헤쳐짐.
26. 오승은의 옛집은 강소성 회안현 하하진 타동항에 있었는데, 폐허로 변함.
27. 홍위병이 포송령의 묘를 파헤침. 묘에는 담배대와 머리아에 책하나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음. 시체는 불태움.
28. 1959년에 세워진 오경재기념관이 문혁때 부서짐.
29. 산동 관현중학 홍위병이 천고의개 무훈의 묘를 부수고 유골을 파헤침.
30. 북경 교외의 은제장에 묻힌 동치, 광서 양황제의 궁정대총관 이연영의 묘를 파헤침.
31. 장지동의 묘가 파헤쳐짐.
32. 하남 안양현의 조간왕 주고수의 묘가 파헤쳐짐
33. 흑룡강 흑하현에 있던 장군묘는 '제왕장상'의 묘라는 이유로 파괴됨
34. 송나라때 시인인 임화정(967-1028)의 묘도 파헤쳐짐
35. 청나라 말의 장태염, 서석린, 추근 및 양내무와 소백채의 사건에 관련된 양내무의 묘도 모두 파헤쳐짐.
36. 강유위의 묘도 파헤쳐짐
37. 절강성 봉화현 계구진의 장개석의 옛집, 장개석 생모의 묘도 파헤쳐짐.
38. 남장현의 항일명장 장자충의 장공사, 장씨의관총과 3개의 기념정이 파괴됨
39. 양호성장군도 국민당반동파로 몰려 묘와 묘비가 훼손됨
40. 신강 투루판의 화염산에 있는 천불동의 벽화도 파괴됨.
41. 산서 운성박물관은 원래 관제묘였으므로 부수어버림.
42. 안휘곽저현 문묘, 산동 래양 문묘, 길림시 문묘도 모두 파괴됨
43. 당나라 고승 보선산의 대소 이탑이 모두 훼손됨
44. 전국최대의 도교성지인 노자강경대와 주위의 근 백개의 도관이 훼손됨
45. 송나라때 구양수의 취옹정기는 소동파가 글을 쓴 것인데, 안휘 제현에 있었는데, 파괴되어 버림.

말하지만, 이것은 극 일부다(...)
위의 것들만 보전시켰어도 중국은 아시아 최대의 세계유산보유국이 되있었을 것이다.

즉, 지금 현재 중국에 남아있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무형*기록유산과 각종 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문화재는 전부 문화대혁명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문화재들이다.

이 시기에는 "종교는 착취계급이 이용하는 도구로 반드시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 문제를 처리한다"는 종교말살정책으로 당의 모든 종교사무부분을 완전히 폐쇄시켜 각 지방 종교단체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각 지역의 홍위병들은 각 성당에 들어가 건물과 성상을 부수고 성경을 태우는 등 기도와 전례, 성경 읽기 등을 모두 금지시켰다. 또한 교회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이에 중국에서 공식적인 종교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항저우의 어느 유명한 홍위병들에게 습격당해서 파괴당할 뻔했다. 하지만 온건파였던 저우언라이 총리가 '절 입구와 대웅전 앞에 마오쩌둥 사진을 붙여놓으라'고 지시해서, 사진을 본 홍위병들이 절을 부수는 걸 주저하다가 그냥 돌아갔다는 일화도 있다. 심지어 저우언라이가 배치한 경비병이 아니었다면, 자금성조차 무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14]

명나라 황릉도 피해를 당해 만력제와 황후, 후비들의 유골과 부장품 일부가 파괴되어 결국 만력제의 더 자세한 행적과 건강상의 특징은 영원히 묻히고 말았다.

유교와 공자 역시 봉건적인 사상으로 취급당해 취푸(曲阜, 공자의 고향)의 대성전에 모셔져있던 공자상이 도끼로 박살났고, 거의 분서갱유에 가까운 유교 경전 소멸 등등. 또한 무형문화재도 상당수 실전되었으며, 대표적으로 문묘에 제향하는 제공대전도 실전되어 한중수교 이후 한국석전대제를 참고해서 재현해야 했다. 현재도 우리나라 쪽에 오히려 대의 사료가 세세하게 많이 남아 있어서, 한국의 도움 없이는 유교 연구가 어려울 지경이다. 이로써 한국이 오히려 중화 문명을 중국보다 잘 보전한 국가가 되었을 지경.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소중화 그래놓고 현 중국은 자신들이 유교를 보존하고 있는 국가라고 주장한다. 이뭐병 물에 빠진 놈 건져 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네.

공자를 통해 소프트파워를 키우려는 중국의 시도가 평가절하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중국은 하드파워는 강하지만 소프트파워가 취약해 미국을 넘어서기 힘들거라는 평가를 받곤 한다. 그래서 중국은 공자학원 등을 통해 소프트파워를 증진시키려하나 위에 열거된 장렬한 병크 덕분에 그 노력이 가까운 미래에 보상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5.2. 무술

더불어 사제관계가 봉건적이라고 중국 무술개발살났다. 그니까 제 아무리 무술을 평생 익혀도 결국 다구리가 최강이다 이는 유명한 소림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명맥이 끊어졌다.[15]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무술가들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위치에, (우리나라 서당 훈장처럼)제자들이 먹여살리거나 유파를 세워 제자를 받아 돈을 벌었다고 해서 공산주의 정권엔 좋지않게 봤던 터라 문화혁명이 터지고 이후로 무술가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현재는 중국무술이라는 이름아래 장사꾼들밖에 남지 않았다고들 한다. 격투기라는게 배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가르쳐주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이랑 배운걸 바탕으로 이것저것 피드백을 해 줘야 배우는 사람이 제대로 배울 수 있을텐데 그 맥이 끊겨버리니 완전히 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홍콩, 마카오, 대만, 화교등지에서 살아남은 무술의 명맥이 겨우 유지되는 상황. 현재는 우슈로 수십, 과장해서 수백에 가까운 중국무술들을 묶어버렸으니 무에타이와 같이 오래된 무술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와서는 그 진면목과 제대로된 수련방법 등을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무술들을 보면 '자유대련'에서 소위 '개싸움'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에 대한 영향에 문화대혁명이 적지 않게 끼쳤을 것이다.

5.3. 스포츠

스포츠도 예외는 아닌지라 중국 축구농구 분야에서 많은 흔적들이 박살났다. 이당시 중국은 선수들이 외국풍에 물든답시고 올림픽은 물론 모든 체육종목의 해외대회에 참가를 거부할 정도였다. 한국 축구인으로 한국과 전세계 축구 흔적, 용품을 수집하는 이태형이 1950년대 중국 연변팀 축구 유니폼을 겨우 구했는데, 조선족인 정지승이 어렵게 보관하여 겨우 남은 것이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 국가 유니폼에서 클럽 유니폼까지 불태워져서 지금 중국에선 이 시절 축구 유니폼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정지승도 문화대혁명 당시 인민재판에 끌려나와, 축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모욕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1990년대 후반 한국으로 귀화하여 한국 축구계에서 일했으나 그만 심부전증으로 갑작스럽게 66살로 급사하고 만다. 그리고 중국에서 국기라 일컫는 바둑도 4구악[16]이라 하여 금지되었다. 당시 손꼽히던 청년 기재로 이름을 떨치던 녜웨이핑은 흑룡강성의 돼지 도살장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바둑에 대한 중국정부의 인식전환으로 인해 다시 바둑을 두게 되었다. 훗날 녜웨이핑은 중국의 1인자가 된 뒤 "흑룡강성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5.4. 식문화

이들의 만행은 중국 요리에까지 미쳤다. 가장 대표적인 게 만한전석의 소실이다. 황실 연회에 나왔다는 그 전설의 만한전석의 모든 것이 한줌의 재로 변했는데, 만한전석에 나오는 요리들의 조리비법 및 절차, 예식은 물론이고 요리사들까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증발해버렸다. 그 결과 중국 정부는 오늘날 아주 쌔빠지게 만한전석의 복원에 광분하고 있다. 홍위병들이 어찌나 철저하게 말살시켰던지 단서가 거의 안 남아서[17] 오죽하면 마지막 청나라 황실 내관들까지 수소문해 찾아내어 기억을 되살리게 할 정도다. 이런 중국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외국의 돈 많은 관광객에게 대접하는 만한전석은, 그저 고급 중국 요리를 모아놓은 코스요리일 뿐, 진짜 만한전석이 아니라고 한다.

5.5. 미술

21세기가 되면서 중국 출신 현대미술가들이 뜨고 있는데,[18] 이들 상당수가 문화대혁명 당시의 트라우마를 작업 주제로 삼고 있다. 중국출신 현대미술가중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웨이웨이[19] 같은 경우 시인인 아버지[20] 때문에 어린시절을 시골에서 보내야 했다. 샤오강 같은 작가도 문화대혁명 시절 홍위병들을 주제로 작업하기도 하였다.

5.6.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도 예외는 아닌지라 그 이전에 상당히 다양한 소재의 애니메이션이 나왔고 국제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애니메이션이 나올정도였으나 문혁시기들어 그 이전에 제작된 작품들과 그 작품을 제작한 감독들은 어처구니없는 비난을 받기 일쑤였고 작품 소재와 촬영기법도 제한을 받게 되어 내용도 단순화 되었다.거기에다가 강력한 심의의 영향으로 애니메이션 제작량도 급감하여 중국 애니메이션 업계는 문혁기간 동안 제작된 애니메이션 작품수는 단 17편 (참고로 10년에 걸친 기간동안 제작된 편수다!)에 그치게 되는 암흑기를 겪게 된다.

5.7. 음악

4인방의 수장이자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이 특히 앞장서서 망친 분야가 되겠다. 장칭은 우선 1964년에 경극 공연대회에서 한 연설을 통해 기존 경극이 구시대적이고 봉건적인 내용만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건전한 사회주의 노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디스했고, 모든 경극은 인민들의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삶의 표본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경극 전반에 대한 개작을 지시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장칭의 방침에 반발하거나 미온적이었던 경극 배우들은 모두 숙청되었는데, 당시 경극 배우들에 대한 처우는 문혁 시절 홍위병이었던 첸카이거가 감독한 영화 패왕별희에서 리얼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1967년에 우선 기존 경극을 왜곡 개작하거나 아예 새로 만든 소위 혁명경극 다섯 편, 혁명무용극 두 편, 혁명교향곡 한 편까지 여덟 편의 공연물이 '문화대혁명의 이상적 음악 작품' 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들 작품은 곧 양판소 양판희(樣板戱)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엄청나게 자주 상연되고 방송되었다.

  • 제1차 양판희 목록
    • 혁명경극
      • 홍등기 (紅燈記, The Red Lantern)
      • 사가빈 (沙家浜, Shajiabang)
      • 지취위호산 (智取威虎山, Taking Tiger Mountain by Strategy)
      • 기습백호단 (奇襲白虎團, Raid on the White Tiger Regiment)
      • 해항 (海港, On the docks)[21]
    • 혁명무용극
      • 백모녀 (白毛女, The White-haired Girl)
      • 홍색낭자군 (紅色娘子軍, The Red Detachment of Women)
    • 혁명교향곡
      • 사가빈 (같은 이름의 혁명경극을 연주회용 작품으로 개작한 것)

혁명경극 중에 장칭이 특별히 좋아했던 작품이 기습백호단과 홍등기였다. 기습백호단은 한국전쟁 당시 금성 전투를 다룬 작품으로, 중국인민지원군 명의로 참전한 중국군이 한국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의 백호연대를 섬멸하고 그 군기를 노획한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이 군기는 아직까지도 단둥의 항미원조 기념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홍등기는 중일전쟁 당시 만주국 점령 하의 후린 철도역 탈환을 위해 잠입한 중국 공산당의 공작원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원작으로, 신해혁명 이후 대를 이어 중국 공산당의 혁명에 동참한 리씨 집안의 내력을 서술하면서 적에 대한 섬멸 의지와 순국하면서도 대를 잇는 혁명의 기상을 선전하는 작품이다.

백모녀는 가난한 소작농의 딸인 여주인공이 악덕 지주의 첩으로 팔려 온갖 학대를 당하다가 탈출한 뒤 팔로군 병사로 지원해 싸우던 남주인공과 만나 공산 혁명의 대열에 동참한다는 내용이고, 홍색낭자군은 빈농 출신인 여주인공이 공산당 여군 부대에 입대해 혁명 전투에서 맹활약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경극과 가무극 모두 기존의 화려한 의상과 무대 미술을 지양하고 가수와 배우, 무용수들이 평범한 인민복이나 군복, 기타 수수한 평복을 입고 연기하도록 했고, 주인공은 무조건 사회주의 정신에 충실한 영웅상으로 설정되어 그에 반하는 인물이나 사건을 철저히 타도한다는 내용이 골자가 되도록 했다. 극의 음악 반주는 기존의 소규모 기악 합주단이 아닌 합창단과 관현악단이 동원되어 맡도록 했고, 각본과 작곡, 안무를 개인 창작가가 아닌 여러 창작가들의 공동 창작 형태로 맡도록 했다.

그리고 이들 양판희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렸다고 판단한 장칭은 두번째 양판희 창작을 지시했고, 여기서 뽑힌 아홉 편의 작품이 제2차 양판희로 이름 붙어 보급되었다.

  • 제2차 양판희 목록
    • 혁명경극
      • 용강송 (龍江頌, In Praise of the Longjiang)
      • 홍색낭자군 (같은 이름의 혁명무용극을 경극으로 개작한 것)
      • 평원작전 (平原作戰, The Warfare on the Plain)
      • 두견산 (杜鵑山, Cuckoo Mountains)
    • 혁명무용극
      • 기몽송 (沂夢頌, In Praise of the Yimeng)
      • 초원아녀 (草原兒女, Little Sisters of the Grassland)
    • 혁명교향곡
      • 지취위호산 (같은 이름의 혁명경극을 연주회용 작품으로 개작한 것)
    • 피아노 반주곡
      • 홍등기 (같은 이름의 혁명경극을 관현악 반주 대신 피아노 반주로 공연이 가능하도록 발췌 편곡한 것)
    • 피아노 협주곡
      • 황하 협주곡 (黃河協奏曲, Piano Concerto 'The Yellow River') (시안 싱하이의 칸타타를 피아노 협주곡으로 편곡한 것)

그나마 경극이나 무용극은 상대적으로 공연할 레퍼토리가 많은 편이었지만, 피아니스트나 관현악단의 경우 이 1~2차 양판희나 대중 집회 때의 혁명가요 반주를 빼면 연주할 곡이 너무나 부족했다. 인터내셔널가를 제외한 모든 국외 작품은 연주가 금지되어 있었고 피아니스트는 오로지 홍등기 피아노 반주곡판과 황하 협주곡만을 연주해야 했다. 관현악단도 사가빈과 지취위호산의 교향곡판과 황하 협주곡, 그리고 혁명 경극과 무용극 반주만 하면서 이 시기를 버텨내야 했다.

당연히 이 시기에 활동했던 지휘자와 관현악단 단원들, 피아니스트들은 문혁 후 전부 당시 상황에 학을 떼며 부정적인 증언을 남기고 있다. 중국중앙교향악단(현 중국국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였던 리더룬은 "하도 같은 곡을 수백 번 반복해 공연하다 보니 나 뿐 아니라 모든 악단원들이 악보 없이, 심지어 눈 감고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마찬가지로 상하이가무단 관현악단 지휘자였던 천시양도 "우리는 문혁 시기 백모녀만, 그것도 수백 번을 공연했다. 이러다 보니 모두가 질려했지만 그런 내색도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물론 시기와 장소에 따라 이 양판희 외의 작품을 연주할 기회도 있었지만, 그것도 양판희 작품을 편곡해 정부의 검열을 거쳐 허가받은 것만 가능했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중국의 양악 분야는 나락으로 추락했고, 1977년에 가서야 수많은 금지곡 조치들이 해제되면서 재기할 수 있었다.

연주자 뿐 아니라 작곡가, 대본 작가, 연출가, 안무가들도 심한 탄압을 받았고, 양판희의 공동 창작 때를 빼면 개인 이름을 붙여 작품을 내놓을 수도 없었다. 아예 거기서 배제된 인물들은 홍위병들에 의해 반혁명적이라며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투옥 혹은 하방되어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몇 가지 예로 조선 출신 작곡가 정률성도 이 시기에 마찬가지로 고문과 투옥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문혁 말기에 세상을 떠났고, 비슷하게 고문과 하방 노동을 당해야 했던 작곡가 왕시린(王西麟)도 홍위병들로부터 치아를 몇 개 잃고 얼굴 모양이 변할 정도로 심하게 구타당하는 등의 고초를 겪다가 살아남았다.

중국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들 중 한 사람이자 촉망받는 작곡가로 베이징 중앙음악원장과 중국 정치국원이라는 요직까지 올라갔던 마시총(馬思聰)은 문혁이 일어나자 졸지에 서방 추종자로 몰려 홍위병들에게 위협받기 시작했고, 결국 1967년에 가족들과 홍콩으로 밀항한 뒤 미국으로 망명했다. 소련에서 개최된 제1회 차이콥스키 음악 콩쿠르의 피아노 부문에서 공동 2위를 차지했던 피아니스트 류시쿤(劉詩昆)도 문혁 시기 고문과 투옥 생활을 겪었고, 6년 동안의 징역을 살면서 감방 벽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놓고 그걸로 연습을 대신했다고 증언했다.

이 때문에 문혁 이후의 연주가나 작곡가들은 그 당시의 음악이나 어법을 일부러 피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후 중국이 사상적으로 보수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들어 양판희의 연주가 다시 재개되기 시작했다. 다만 중국 정부도 문혁 시기처럼 이들 양판희의 공연과 관람을 강제하지는 못하고 있고, 공연 횟수도 그 당시에 비하면 현저히 적어져서 일종의 추억팔이 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외에 중국 공산당에서는 문혁 시기 성서나 마찬가지였던 마오쩌둥 어록을 인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어록 구절에 가락을 붙인 어록가라는 혁명가요풍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고, 그 외 정부나 당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서도 이렇게 혁명가요의 아이디어를 빌려 노래로 만들었다. 물론 이 운동 자체가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 숭배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마오 찬양가도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들 노래들도 마찬가지로 문혁이 끝난 뒤에는 평가절하되어 부르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현재 중국의 국가의용군 진행곡도 이 당시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곡의 작사자인 톈한(田漢, 1898-1968)이 문혁 당시 반당분자로 몰려 숙청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노래는 한동안 가사 없이 연주만 되는 곡으로 전락했다. 1978년에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을 찬양하는 가사가 나왔긴 했는데, 이때 중국인들의 반응은 영 좋지 않았다.[22] 이후 1982년 톈한이 복권되자 원래의 가사로 되돌아오게 된다.

6. 해외의 반응

문혁 당시만 해도 유럽권에서는 문혁을 찬양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위협적이라 할 정도의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대국이 자멸해서 찬양하는게 절대 아니다. 거기에 발 맞추어 일본 적군파에서도 문혁을 대단히 찬양하던 적이 있다. 놀라운 일이지만 중국식 농촌 사회주의를 실천한 캄보디아폴 포트 정권도 당시에는 호평 일색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보다 자세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 뒤로는 아무도 이것들을 찬양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비틀즈존 레넌은 혁명에 대한 회의감을 담은 <혁명 Revolution>이라는 노래에서 문화대혁명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 "But if you go carrying pictures of Chairman Mao, You ain't going to make it with anyone anyhow." 'Chairman Mao'가 마오쩌둥 말고 또 있을 리가 있나?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8억 인과의 대화>를 지금 읽으면 대목에 따라서 정신이 우주로 날아가는 걸 느낄 수 있다. 리영희는 나중에 이를 두고 "당시에는 문혁에 대한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없었다"는 식으로 변명했다. 물론 당시 한국에서 개인으로서 북한과 중국에 관한 정보를 가장 많이 확보한 리영희 교수였고 조선일보 재직시에도 동북아시아권 전문가로 나름대로 인정을 받던 사람이 바로 리영희였다. 리영희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을 미제에 맞선다고 지지한 사르트르처럼 서구의 수많은 지식인들도 비슷한 병크를 저질렀다. 이건 리영희가 몰라서 이렇다기 보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들 수 있겠다. 연구의 성과를 공표하기조차 꺼리는 것이다. 이것은 군사 독재가 절정에 이르던 1980년대에 NL의 세가 크게 확산되었다는 점. 북한의 경제파탄으로 외국에 구걸하기 시작하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들의 세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된다.

당시 서구권에서도 중국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국경일에 천안문에서 지난번에 봤던 특정인이 보이지 않으면 그 특정인이 숙청되었다고 추측했던 시절이었다. 21세기인 현재에도 우리가 북한 내부사정에 대해 잘 모르듯이 이 당시의 중국은 어디까지나 중공이었고 미지의 국가였다.

좀 더 철학적 관점적으로 애해 한다면 사실 유럽모더니즘과 문화대혁명은 사상적으로 뿌리가 같다는 주장도 있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간은 물질에 지배되는 존재이며 새로운 문물이 나온 것은 새로운 시대이며 새로운 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다만 유럽은 과거와 단절하긴 했어도 과거를 파괴하지는 않았으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 중국은 그저 과거만을 파괴했을 뿐이다. 인간이 사상을 잘못 이해하면 어떠한 비극이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되었다.

또한 그 운동의 저류를 분석하자면 문화대혁명과 가장 가까운 사상은 나치즘이다. 나치즘의 기본사상은 기존 그리스 - 유대즘의 사상에 반발하는 아리안사상의 발현으로, 그 아리안사상의 총화적 구현으로서 그들의 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를 떠받듦으로서 아리안 민족인 독일은 구시대사상의 대표인 유럽 제국주의에 맞선다는 발상이었다. 이것은 문화대혁명에서 마오쩌둥이 점하는 위치와 구사상과 신사상 사이의 알력, 그리고 헤게모니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진행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 결과 중국이 문화대혁명의 대혼란 속에서 입은 물질적, 정신적 피해는 중국의 발전을 수십 년 늦추는 데 일조하였다.

또 이웃 북한은 겉으로는 중국의 문혁을 극좌주의라며 깠지만, 그 아이디어를 사실상 그대로 들여와 북한의 독재 체제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 사용했다. 특히 김일성의 뒤를 이어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은 문화 부문의 지도를 시작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할 때 장칭을 필두로 한 4인방의 문화 정책을 거의 그대로 따라 했고[23] 거기에 주체사상으로 색을 입혀 독자적인 것처럼 꾸며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비판이 진행되어 잘못을 인정하고 고친 중국과 달리, 북한에서는 이것이 현재진행형이고 지도자의 위대한 업적으로 찬양받고 있다. 현대 중국의 노년층들은 북한을 볼 때마다 문화대혁명의 기억이 떠오른다고 하는데, 1960~70년대에 창작된 북한의 가극들이 21세기에 와서도 중국에서 순회 공연을 벌이며 흥행하고 있는 것도 이 시대에 대한 추억팔이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7.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문화대혁명 당시의 분위기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기술한 책으로는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이 있다. 이 책은 당시 문혁에 참가했던 젊은 홍위병의 후일담과도 같은데 "그래도 당시 당국에 의해 통제되던 언론/출판과 집회는 문혁 기간에 가장 자유로웠고 활발했으며 권위주의와 관료제에 대한 타파도 활발히 논의되었다"는 논지다. 모든 마을에서 평등의식이 퍼져나가서 대문을 열고 다녀도 도둑이 들지 않았고 콩 한 쪽도 나눠 먹었으며 공공 식당에서 점원을 하인 부리듯 하던 잔재가 사라졌으며 학생은 교사의 권위에 눌릴 필요가 없었고 더 이상 공무원들이 권위를 가지지 않았으며 대학 입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이 제기되었다.[24] 뭐, 이런 점만 본다면 이것도 제법 괜찮은 문화운동으로 보일 수 있지만….[25]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당시 대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저 집은 뭔가 숨기는 게 있다"라고 하여 저 집은 해로운 집이다 홍위병들이 단체로 몰려가서 세간 살림을 부수고 집주인을 붙잡아다 문초하고 구타를 하지 않나, 물자를 나눠 쓰지 않으면 이기주의라고 동네 고목나무에 매미처럼 매달아놓고 괴롭히다가 싹싹 빌어야 겨우 풀어주던 현실이다. 게다가 교육정도가 낮아 무식했고 사상적으로도 강고한 자아가 형성되어 있지 않던 젊은이들이 마오쩌둥과 사인방 일파의 교묘한 프로파간다에 이용되어 그들의 정적을 처단하는 망나니노릇을 했던 것이다. 게다가 마오주석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마오어록'하나만으로 만사를 해결하려고 했던 모습을 보면 그 사상적 편력의 깊이가 낮고 취약함으로 오로지 폭력으로 호소할 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마고그적 선동에 놀아난 이들은 후에 '그저 남들이 하라기에...'라고 변명을 하면서도 스스로 떳떳할 수 없었다. 처음에 높으신 분들이 작살나는 걸 보고 좋아하던 일반 서민들조차 불과 수년 만에 너무한다고 외면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괴벨스가 봤더라면 환호 했겠지!

게다가 대학 입시가 폐지된 뒤 대학 입학은 무조건 교사의 추천으로만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문제가 되자[26] 대학을 일종의 평생교육기관처럼 만들어버려서 누구나 다니게 되었다.[27] 당연한 결과지만 시설은 급속히 노후되었고 연구성과는 미진하게 되었으며 고등교육이 엉망진창이 되었다.[28]

더군다나 공공식당을 비롯한 각 점포에서 종업원을 노예처럼 부리는 굴욕적인 방식인 서빙을 금지하여서 일시적으로 모든 음식점이 프 서비스가 되는 상황도 벌어졌다. 그러면 원래 있던 종업원들은 어떻게 됐냐고? 아무것도 안 시켰더니 진짜 아무것도 안하더라는 결과가 나왔다. 자랑할 게 못 된다.[29]

그리고 2010년대에 들어선 지금 자본주의 체제를 본격적으로 들여온 중국은 동북아 제일의 빈부격차를 자랑한다. 과거에도 문제시 되었던 부정, 부패는 여전히 잘 남아있고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도 없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고 심지어 대약진운동 같은 병크조차 실수한 거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적당히 실드쳐 주는 중국인들조차 문화대혁명만큼은 절대로 실드를 쳐주지 않는다. 공칠과삼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닌 것이다.

그나마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애쓰다 능력 부족으로 인한 실수였고 실수의 책임도 진 대약진 운동과는 달리 문화대혁명은 마오 개인의 권력욕과 이상주의적 관점으로 말미암아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어머어마한 잠재력을 순식간에+확실하게 날려먹은 것이고 책임을 지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을 뿐더러 그 질이 더욱 나쁘다. 현 중국 공산당이 엄연히 마오쩌둥을 계승했고 공칠과삼이라 하여 그를 적극 옹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혁만은 절대 실드를 쳐주지 않고 오히려 잊을만 하면 적극적으로 까는 이유[30]가 바로 이것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문혁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엄청나다보니 당연히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급증했다. 덕분에 마오 말기에는 마오는 물러나시오!같은 구호가 일상적으로 터져나왔고 여기에서 제 1차 텐안먼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절대적인 계승권자였던 화궈펑이 이 때문에 몰락하고 그 뒤를 덩샤오핑이 이은 건 덤,[31] 실제로 중국공산당이 왜 1차 텐안먼은 2차와 달리 부정하지 않는 데에 대한 답은 바로 문혁에 대한 반감이 엄청나다는 데서 나온다. 거기에 당시에 홍위병이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자기가 그런 짓을 했다고 대놓고 말하지 못할 정도다.

8. 이야기

덩샤오핑의 아들이 문화대혁명 당시 덩샤오핑 눈앞에서 창문 밖으로 던져져서 이에 앙심을 품은 덩샤오핑이 이후에 야심찬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긴 한데 그의 정책은 그렇게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아들이 내던져진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 마지막 황제의 후반부에 문화대혁명 장면을 볼 수 있다. 만주국 황제에 올라 전범이 된 아이신기오로 푸이교도소에서 징역형을 살고 '교화'된 후 사회로 나와 정원사가 되었는데 거리를 지나가다 만나게 된 반동분자가 바로 그때의 교도소장(조선족이었다고 한다.)이었던 것. 선통제는 그에게 온갖 수모를 당했음에도 비참한 꼴이 된 그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고 옹호하면서 선처를 호소했지만 결국 외면당한다.

그리고 여담으로 국공내전때 중화민국(대만)이 타이완섬으로 후퇴할 때 미국에게 수송선 몇 대를 빌려 북경의 유물들을 싹쓸이해서 가져갔다. 그래서 대만 타이베이국립고궁박물원에서는 몇 주마다 전시하는 유물을 바꾸는데 60여년 동안 한 번도 중복된 적이 없었다. 만약 이게 중국에 그대로 있었으면… 하지만 현재는 베이징의 고궁 박물관의 유물 양이 대만 고궁 박물원 유물들 다 합친 것보다 많다. 다만 질적인 면에서는… 아무튼 문화대혁명 때 무진장 까부쉈으면서도 이 정도라니 역시 대륙. 게다가 이 당시 문화대혁명으로 엄청난 중국 문화가 파괴된 반면에 정작 중화민국에서는 '중화문명부흥운동'이라 하여 중국 문화를 연구, 보존하고 발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스스로를 중국 문명의 종주국으로 자부할 수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력이 넘사벽으로 커진 현재에도, 중화민국의 이러한 노력과 자부심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다. 중화민국도 이제 '대만'을 지향하며, 그들이 쓰는 '중국'이라는 단어는 자신이 아닌 바다 건너를 가리킨다.

앞에도 언급되었듯이 실제 문화혁명 기간 중 홍위병들이 영국 대사관과 영국 대표부에 난입해서 기물을 파손하고 건물에 방화하고 근무하는 여직원에 대해 심각한 성적 학대를 자행했다. 그리고 모택동은 오진우에게 이게 다 국민당 잘못이다. 라고 엉뚱하게 대만에 있는 장개석을 탓하는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도 잘했다고 안 한 게 어딘지도…

애꿎게도 에 불과했던 차우차우도 이때 많이 학살당했다. 또한 다른 개들도 상당수 학살당했는데 덩치만 크고 먹을 것만 탐낸다고 하여 쓸모없는 개들이라고 하여 덩달아 학살당했다. 우습게도 고양이가 쥐를 잡고 먹을 것도 적게 먹어서 개(다만 군견같은 개들을 제외)보다 훨씬 쓸모있다고 하여 고양이들이 우대받았다. (중국 왕조 황실마다 페키니즈 등 애견을 자주 호화롭게 길렀던 역사 영향도 있을수있다)

이외 4인방의 영어 표기인 갱 오브 포에서 이름을 따온 영국 펑크 밴드가 1970년대에 결성되기도 했다는 설이 있다.

장국영 주연의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 후반부는 문화혁명을 다루고 있다. 홍위병들에게 붙잡혀서 자아비판을 강요당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연기를 뛰어넘어 그냥 보기 안타까울 정도이다.

이 시기를 다룬 또 다른 영화로는 장이머우 감독의 인생이 있다. 공리와 갈우 주연. 이쪽은 문혁만이 아니라 일제시대부터 문혁까지를 폭넓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 역사를 조금이나마 알고 싶다면 사실 패왕별희 이상으로 볼만한 작품이다. 토법고로, 집단농장으로 대표되는 대약진운동아쉽게도 저 새는 해로운 새다는 안 나온다홍위병으로 대표되는 문화대혁명과 같은 거대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직접적으로 마오를 비판하지는 않지만, 시골 촌부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마오 시대의 굵직한 사건들을 소소한 가족사와 엮어 그려냄으로써 당시 시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삐삐 밴드 1집인 문화혁명이 문화대혁명에서 따왔을 거라 추측된다 카더라.

21세기에 와서는 중국홍객연맹이 추앙하고 미화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반정부 행위에 속한다. 물론 중국 정부는 이들의 능력이 아까운지 적당히 눈감아주는 분위기지만.

다른 이야기로 베이징에 이 시기를 주제로한 테마이 있다. 홍색경전주제찬청 참고.

9. 남한과 북한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큰 이익을 봤다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예를 들어 류사오치가 중심이 된 실용주의 정책은 외부 자본을 대거 유입하고 내부 경제도 활성화시켜 이제서야 겨우 경제 성장에 착수한 상황에서 모든 기회가 중국으로 빨려들어가 한강의 기적이 좌절되는 사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마오쩌둥이 때맞춰 일을 저지르고 나라 문을 걸어 잠그는 바람에 그런 사태를 맞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는 것이 1960년대는 아직 냉전의 절정기였기에 공산당 체제하의 중국에 대규모의 서방자본이 유입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고 게다가 서방이 중국"대신" 한국에 투자를 결정할 정도로 한국의 여건이 좋았다거나 동아시아에 투자처를 찾고 있었다는 전제 자체에도 당시 한국의 발전상황을 보았을때 무리가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1960년 외자도입촉진법을 공표하는 등 외자를 유치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규제가 심하고 정치적 불안과 외자유치 노력부족으로 1960~1965년까지 단 한건의 외자도 유치하지 못했다. 이후 1966년의 외자도입법을 기점으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1970년 수출자유지역조치법 등 좀 더 외국 자본 유입을 촉진하려는 노력이 줄이어 있었고 결국 1970년대 초반에는 외국인 투자가 잠시 증가를 보였으나 자본 출처의 일본 편중이 심했고 자본이 실제로 정부가 원하는 중공업에 투자되지도 않았던지라 정부가 원하는 산업에 마음대로 투자할 수 있는 해외차관이 훨씬 선호되며 결국 1973년 다시 규제 정책으로 선회하게 된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이 모든 면에서 크게 후퇴하여 이로 인해 한국이 경쟁자가 사라져 한국이 반사이익을 봤다는 주장이라면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한국의 발전이 오로지 중국의 후퇴 때문에 가능했다는 주장 자체가 극단적이라고 볼 수 있다[32].

한편 북한의 경우는 김일성이 이걸 계기로 중소 관계가 나빠진 틈을 이용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제대로 된 경제 성장을 통해 소련 입장에서의 대중국 견제에 필요한 기반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바꾸고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국과의 단독 전면전을 위한 군비증강과 우리민족끼리 산업화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했고 여기에 전제군주제를 전면 도입하여 나라 전체를 문혁 시절로 돌려놓았다. 실제로 문혁시기를 보낸 중국인들은 북한을 보면서 향수를 느낀다고 한다.

10. 망각의 사건

이 사건의 가해자들은 아직도 권력을 쥐고있는 중국 공산당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이미 사거한 뒤이고 같이 놀아났던 젊은 세대는 이제 기성세대를 지나 노년기가 되어 중국에서 권력의 중추가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스스로의 치부를 밝히고 더우기 현 권력을 향하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이 가능할 리가 없다. 가해자가 중국인이고 피해자는 중국이란 국가이기 때문.
중국에서 현대사란 공산당의 입맛에 맞는 사실만 가르치지만, 문혁은 어떻게 해도 실드가 안 되는 일이기 떄문에 아예 금기시되어 버린 것. 다만 정권에 불편한 진실을 덮어 두는 것은 사실 다른 나라에서도 흔한 일이다. 현재 스페인에서 프랑코 치하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시 되어 있고, 한국에서도 보수정권이 들어선 이후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거론하는 것은 쑥 들어가 버렸다.

또한 문혁에 관련된 공문서들은 대부분 비밀로 묶여 있다. 문혁을 지내온 사람들 누구도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거니와 공산당의 입장도 매우 난처하기 때문에 그런 듯 하다. 이때문에 문혁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서방에서 행해져 왔으나, 정보의 부족이나 연구자의 정치적 입장[33] 때문에 때문에 또다른 정치적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중국 공산당의 자세가 전향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제대로 된 문혁에 대한 연구는 힘들 것 같다.

12. 만일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일단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약진 운동 실패로 버로우 타고 있던 마오쩌둥은 그냥 상징적인 허수아비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시 실권을 쥐고 있었던 국가주석 류사오치나 당총서기 덩샤오핑이 계속 집권을 했을 것이고, 그들 하에서 점진적으로 시행되던 실용주의적 개혁이 자리를 잡아 10여년 먼저 개혁개방을 이끌었을 수도 있다. 현재 중국의 평가는 10년간 국가기능을 정지시켰고, 다른 나라들이 10년 앞서가는 동안 중국은 20년 뒤떨어지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다만 문혁의 사망수는 중국 인구에 비해서는 매우 적은 편이다. 문혁으로 죽은 사람은 많게 잡아도 200만(장융), 적게잡으면 40만 정도인데, 그때 이미 중국의 인구는 8억을 넘고 있었기 때문에 문혁 때문에 중국의 인구증가가 둔화된 것은 아니다. 중국 인구 증가에 제동이 걸린 것은 문혁이나 대약진이 아니라 1978년 이후의 계획생육정책 때문이다. '''[34]

한국에게 안 좋은 시나리오가 될지는 모르나 문혁이 없었다면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맞지 않고 형편이 그럭저럭 좋아져서 동독과 비슷한 수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몰락하고 덩샤오핑에 의한 개혁이 빨리 시작되어 북한도 이를 본받아 성장한 덕에 남북통일이 되지는 못해도 남북관계가 우호할 가능성도 있다.

13. 관련 미디어

학문적으로 다루는 것은 거의 금단의 영역이지만, 예술적으로는 대부분의 중국 현대사 관련 작품에는 거의 언급되거나 소재가 되는 사건이다. 전통 문화재를 엄청나게 파괴한 대신에, 문학작품에 엄청난 소재를 제공했다.

  • 마지막 황제 마지막 부분에서 잠깐 나온다.
  • 늑대 토템 (소설, 영화) 문화대혁명 당시 내몽골에 유배된 한 지식청년의 이야기..
  • 패왕별희 문화대혁명이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모티브이다.
  • 생(영화)
  • 허삼관 매혈기
  • 용진 개혁개방후 1세대 중국영화로, 문화대혁명의 잔상을 그리고 있다.

중국에서 문혁을 공개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지만, 홍위병 생활을 하거나 문혁참가자의 경험을 다룬 후일담 문학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엄청나게 쏟아져나오고 있다. 10년정도의 기간에 이렇게 전인민들에게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다는게 얼마나 이 사건이 충격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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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파괴
  • [2] 중국이란 나라가 인류역사중 영향력이 상당했다는점을 보면 전세계단위 고고학적으로도 흑역사인 사건이다
  • [3] 중국어에서 대학교는 '대학'이라고만 한다.
  • [4] 말 그대로 경제와 문화전반에 걸쳐 엄청난 추락을 일으킨 원흉이라고 하지않을 수 없는데 특히 문화의 경우 고전문화에서는 우위를 어느정도 점하고 있지만 현대문화 특히 대중문화에 있어서 엄청난 열세를 면치못하고 있다. 더구나 현재 한국의 대중문화붐을 일으키는 한류가 아시아에서 일으키고있는 열풍을 생각해본다면 중국의 입장에서는 가슴을 치며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 [5] 총노선, 대약진 운동, 인민공사를 가리킨다. 중국 경제를 말아먹은 마오쩌둥의 대표적 병크들. 사실 마오의 의도는 좋았다. 이념(즉, 정신력)으로 성장하는 경제를 더욱 빠르게 한단계 도약시키려고 한 것. 하지만 워낙 공상적이고 허황된 목표였기 때문에 이를 실행하다가 오히려 경제를 망쳤다.
  • [6] 김재선, 모택동과 문화대혁명
  • [7] 중국이 공산주의가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여진데는 마오쩌둥의 이러한 현실적인 공산주의사상도 한 몫했다. 러시아와는 달리 공업기반 자체가 없다시피한 중국은 농업이 자국의 주요산업이라는 것을 알고 여기에 맞는 공산주의운동을 했기에 공산주의 혁명이 부정적이지 않게 받아들여진것.
  • [8] 이 사람은 명 황제인 만력제의 능을 발굴하는 데 주도하기도 했다.
  • [9] 天兵怒气冲霄汉은 마오쩌둥의 싯구에서 인용된 것이다.
  • [10] 웃기게도 서양식 던스 캡(dunce cap)이다.
  • [11] 최명해, '중국·북한 동맹관계', 도서출판 오름(2009), p.275
  • [12] 달라서 간간이 반성을 하거나 사과 글을 내는 홍위병들도 있긴 하다.
  • [13] 결국 현대 중국은 다시 '불평등'해졌고 그 결과 마오쩌둥도 재평가를 받고 있다.
  • [14]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 시절 과학자들에게 경호병력을 붙여 보호했다.
  • [15] 오해가 없도록 첨언한다면, 무승이 소림사에서 무술을 전하고 익히는 전통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민간으로 퍼진 소림 무술은 살아남았다. 다만 실전된 무술도 상당수이고 현대에 소림사를 복원했지만, 이 과정에서 원판은 얼마나 남았느냐 문제가 있다.
  • [16] 낡은 문화, 사상, 풍속, 습관을 가르키는 말.
  • [17] 만한전석의 연회를 묘사한 반쯤 불탄 책 한 권이 전부다.
  • [18] 물론 중국의 경제적 성장과 맞물려 투기자본이 미술품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긴 하다.
  • [19]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베이징 주경기장의 설계 과정에 미술 컨설턴트(Artistic Consultant)로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정부 성향이 강해서 정작 올림픽이 끝나고 가택 연금을 당했다.
  • [20] 비판적인 이야기를 할까 봐 시골로 당했다.
  • [21] 원제 그대로 영역하자면 The Harbour가 맞겠지만, 중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저렇게 되어 있다.
  • [22] 이 노래가 쓰일 당시 중국은 일제의 위협에 시달리던 시기였고 의용군 진행곡은 항일투쟁을 위해 만들어졌다. 가사가 바뀔 당시 일제가 침략한 때를 벌써 잊은 것이냐라는 비판이 주를 이뤘다고 한다. 출처.
  • [23] 가령 중국의 양판희를 모방해 혁명가극 창작 운동을 벌였고, 영화나 무용 등 나머지 장르에서도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여 항일 빨치산 이래의 전통을 계승한 작품처럼 선전하고 다녔다.
  • [24] 이것이 그 유명한 지답안 사건. 한 학생이 "나는 농촌에 살아서 일할 시간이 많기 때문에 도시 학생들하고 동일한 시험을 치러 대학에 가기가 불가능하다"라는 항의 서한을 받은 모택동이 대학 입학시험을 없애버린다. 물론 입학시험이 없어진 대학에 얼마나 많은 인파 - 나쁘게 말하면 어중이떠중이 - 가 몰려들었으며, 그 결과로 어떤 후폭풍이 몰아닥쳤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25] 한비야의 여행기에 따르면 중국 소수 민족 중 하나인 나시족에 만연해 있던 남존여비 사상이 이때를 계기로 사라졌다고 한다. 거긴 여성들이 온갖 의무를 지고 돈까지 버는 반면 남자들은 아편이나 빨고 빈둥거리기만 했는데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 공안들이 거기에 하도 딴죽을 걸고 해서 그러한 악습이 상당수 사라질 뻔했는데 개혁 개방이 시작되면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갔다나.
  • [26] 정확히는 교사의 판단을 어떻게 신뢰하는가? 객관적이지 못하다. 교사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럼 그냥 시험 보든가?
  • [27] 다만 대학의 평생교육기관 기능 자체는 선진국에서도 통용되는 거라 누구나 다닌다고 무조건 까기는 좀 어렵다. 문혁 당시 중국 대학이 문제가 되는 건 제대로 된 교육과 엄정한 심사조차 외면했기 때문.
  • [28] 이 당시 중국인들 중에는 한국에서 "나 어렸을 때 6.25 전쟁이 터져가지고 학교를 못 갔어!"라고 하는 어르신들처럼 "나 어렸을 때 문혁이 터져서 대학에 못 갔어!"라는 세대가 존재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국가의 부당한 결정으로 인해 피해만 본 사람들이 가만 있을 턱이 없으니, 이들 상당수가 반정부 세력이 되었고 일부는 민주화 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 [29] 막말로 대한민국6.25 전쟁 덕분에 남이고 북이고(특히 남한에서) 피난과 내부 분열과 숙청으로 지역 공동체가 죄다 박살나는 바람에 전통적인 지주와 소작민 사이의 계급 의식이 사라지고, 덕분에 토지 개혁에 대한 저항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6.25 전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존재하는가?
  • [30] 당장 보시라이 때려잡을 때도 대외적으로는 제2의 문혁 방지를 내세웠다. 물론 실제 이유는 부정부패와 더불어 아내 관리를 아주 잘못한 것이었지만.
  • [31] 화궈펑은 문화대혁명으로 급성장해서 마오의 바로 뒤를 이은 케이스다. 집권하자마자 신속하게 4인방을 제압하는 등 지도력은 뛰어난 편이었으나 문화대혁명으로 성장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얼마 못 가고 자리에서 내려온다. 지금도 중국에서 문혁으로 성장했다는 정치인은 별로 좋은 소리 못 듣는데 마오는 물러가라는 구호가 대놓고 터져 나오던 저 시점에선 치명적 약점이었다.
  • [32]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1970년대 초까지 한국은 최빈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살았었다. 여기에 한국이란 나라 자체가 해외에서는 듣보잡 취급을 당하거나 그나마 알려진 이미지조차 6.25 전쟁을 연상할 만큼 평가 역시 부정적이었다. 여기에 국토까지 분열된 상황이니 세계적인 매력을 느끼는 곳이 아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문화혁명은 중국이라는 주자가 발목을 접질려 경주에서 이탈해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리게 된 것을 한국이 중국을 잠시나마 앞서게 만든 기회를 준 것이라는 점이지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는 되지 않는다.
  • [33] 한국의 중까들에게 종종 인용되는 장융의 마오쩌둥 전기가 바로 이런류의 서적인데, 이사람은 마오쩌둥이나 중국공산당을 최대한 나쁘게 쓰려고 작정하고 썼기 때문에 본격적인 학문적 연구로 보기는 힘들다. 그런데 이런 류의 저서들이 서방이나 한국의 중국관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 [34] 오히려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인구가 대폭 늘어나고 있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 인구는 1억 넘게 늘어났다.